한걸음에 달려갈 준비는 언제든 되어있으니까. - 한 친구를 그리며. 
 
 
 
 
내게는 10년 사귀면서도
함께한 시간이 10시간도 안되는.
더구나 스물한 살 때 이후로는 구경도 못해본,
매우 ‘가까운’ 친구가 하나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나는 그 녀석이 열아홉 때 첫사랑보다 더 그립고, 보고 싶다.
이따금씩 그 녀석을 떠올리면, 
혹시 또 다른 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니까.

씨는 같은데, 어떤 놈은
비닐하우스에서 받을 거 다 받아 처먹고도 모자라다고 떼쓰며 자라고,
어떤 놈은 아스팔트 둔덕에서 배기가스를 마시고 짓밟히며 겨우 싹을 틔운.

그 녀석과 조우할 때는,
언제나 그런 기분이었다.




부산 북구 화명동(지금이야 아파트촌이지만 80년대, 90년대 초반에는 정말 깡촌이었다), 충청남도 태안 등지에서 초등학교 생활을 대부분 보내고, 상경하여 처음으로 입학한 서울의 어느 중학교는 ‘남자 중학교’였다. 주먹이야 시골 애들이 훨씬 험악했지만, 서울에는 시골 애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들을 가지고 있었다.
이른바 ‘빽’이 그것이다.


P중학교 1학년 6반에는 S국민학교(마지막 국민학교 졸업생) ‘일짱’을 먹고 들어온 놈이 있었다. 체구도 그다지 크지 않았고, 마른 편이었으며 다만 좀 ‘깡다구 있게 생겼구나’ 싶은 인상이었다. 듣자하니, 주먹은 별 게 아니라는데, 형이 이 동네 잘나가는 조폭이라고 했다. 잘못 건드리면 학교 운동장에 일본도와 파이프를 든 ‘가다’들이 꽉꽉 들어찬단다. 조심하라고.


‘양아치 X끼’
그게 그 녀석의 첫 인상이었다.


그즈음의 나는 어떤 류의 인간이었냐 하면, 수업 따위는 들은 적이 없고, 시험 전날 벼락치기로―순간적인 집중력만큼은 자신있었다―적당히 3등 정도 유지해 반에서 어느 정도의 입지를 굳히고, 선생에게는 대놓고 개겼으며, 1등이라고 앉아있는 놈을 한심하다는 듯한 여론을 조성하여 공격이나 일삼던, 아주 비겁한 놈이었다. 딴에는 일종의 ‘풍류’ 내지는 ‘저항’―어렸을 적에 이런 말을 알았겠냐마는―이라 생각하며 즐긴 모양이지만,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면 비겁함이요, 인생의 방만이며, 철없음의 반증임을. 
살아간다는 것은 어제 몰랐던 것을 오늘 알면서 느끼는 소소한 반성과 성장의 연속이 아닌가 싶다.


사는 곳도 달라 그 녀석(이하, L)과는 자주 마주칠 일도 없었을 뿐더러, ‘노선’도 완전히 달랐기 때문에 사실 대화다운 대화라고는 나누어 본 적이 없었다. L과의 대화다운 대화는 11월 말 경이 처음이었다. 나에게는 묘한 징크스가 있는데, 매년 겨울 다리에 깁스를 한다는 것. 열 다섯, 열 여덟살 때만 무사히 넘어갔고, 12살 때부터 19살 때까지 8년간 총 6번의 깁스를 했다. 그러니까 1996년 11월 말은, 내가 깁스를 해서 체육시간에 교실을 지키며, 상경하여 2년여 동안 가장 친하게 지냈던 친구가 불의의 사고로 뇌사판정을 받고 중환자실에서 조금씩 부패되어가고 있는 모습을 가슴 아파 하던 때였다. L은 자유구기종목시간을 틈타―학기 말 즈음이면 자유구기시간이 대부분이었으므로―교실로 담배 땡땡이를 치러 왔고, 일주일의 두 번. 우리는 넓직한 교실의 창가 쪽에 앉아 공을 좇아 고함을 지르는 아이들을 무념히 바라보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었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우리의 대화는 L이 주로 푸념을 하면, 나는 이야기를 들어주는 편이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모르겠어 X팔.’
매점에서 300원하는 페스츄리 빵을 사왔다며 교실 문을 박차자마자 휙 내 자리로 빵을 던져놓고 늘상 하던 여자이야기나, 농담 따먹기도 식상해질 때 즈음, L이 꺼낸 첫마디였다. 나의 어떤 면이 그의 속마음을 꺼내어 보이게 한 것인지는 지금의 나로서도 알 수 없으나, 단박에 꺼낸 그 핏기어린 말 한 마디에 나 역시 마음을 열고 진지하게 들을 수 밖에 없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렇게 되어버렸어. 
형이 데리고 오는 친구들은 죄다 양아치들이었고, 
주변에 꾀는 놈들이라고는 하나같이 형편없는 놈들이었지.
학교에서 좀 맞기라도 하면, 정작 나는 말하지도 않았는데 어디서 들었는지
형과 친구들이 나타나 상대방을 반쯤 죽였어.
힘이라는 것도, 가져보니까 기분이 나쁘지 않아서, 거부하지 않았던 것뿐인데.
돌이킬 수가 없어. 언제부턴가, 내가 좋아하는 녀석들은 나를 피하고,
주변에는 시시껍절한 놈들만 드글댔지.
에라, 모르겠다 닥치는 대로 줘 패고 다녀도 반항하는 놈 하나 없었어.
X같은 놈들. 내 주변엔 아무도 없어. 

아무도.


당시에는 정리되지 않던 그와의 대화들(물론, 가슴으로는 알고 있었지만)을 시간이 지나고 천천히 곱씹어보니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희한하게도 살면서 비슷한 경험조차 한 자락 닿아본 적 없으면서 그의 말은 묘하게 내 안을 울렸다. 쉬는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리고 아이들이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하나 둘씩 교실에 들어올 때에는 우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각자 자리로 돌아가곤 했다. 우리의 대화는 어느 누구도 몰랐으리라. L과 나는 누가 봐도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으니까. 말하자면, 그것은 약속없는 우리 둘 만의 비밀이었다.


그 해, 마지막 체육시간. 수업 종이 울리기 직전에, 그 녀석이 했던 말이 기억난다.


니가 보기엔 나 뭣 좀 되는 것 같냐? 
나 사실, 형들한테 엄청 맞는다. 샌드백이야 샌드백.
H.O.T ‘전사의 후예’ 가사로 국어시험 보면 다 맞을 자신 있는데. 하하.

.......그동안 즐거웠다.

피우던 담배를 손끝으로 툭- 날리더니 나지막하고 청명하게 ‘즐거웠다-’고. 
괜히 짠했다.






그 해 겨울방학, 결국 나는 목발과 함께 2년 가까이 가장 의지했던 친구를 잃었다.


그의 할머니를 우연히 길거리에서 마주쳤었다. 많이 야위신 할머니는 나를 보시자마자 그 작고 조막한 손에 들린 장바구니를 떨어뜨리시고는 나를 꼭 끌어안고 우셨다. 며느리없이 갖은 고생 견뎌내며 혼자 키우신 금쪽같은 손자가 피어보지도 못하고 갔으니 오죽하셨을까. 할머니의 울음소리. 길바닥에 나뒹굴던 야채와 요구르트들. 눈물이 날만큼 부신 햇살. 에는 듯한 1월의 칼바람. 


우리 손주 몫까지 두 배로 열심히 살아다오.


나를 붙들고 흐느끼시며 들썩이는 할머니의 몸은 내게 그렇게 말씀하고 계셨다..
차마 그 분 앞에서 눈물을 흘릴 수가 없었다. 할머니가 요구르트 한 줄을 손에 쥐어주시고 쓸쓸하게 떠나실 때, 그 뒷모습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춥다고 방방 뛰어다니던 사람들 틈, 1월의 서울 어느 한 거리에 멍하니 서서. 나는 서럽게 울었다.


열네살은 그렇게 흘러갔다.





1학년 6반에서 나와 같은 반을 받고 2학년 새 학기를 시작한 사람은 단 한명 밖에 없었다.
이것도 운명이라면 운명일까. 50명이 12개 반을 배정받으니까 최소한 4,5명은 같은 반이 나와야 되는데, 단 한 명이라니. 그 한 명이 L이었다. 굉장히 반가웠지만, 나는 보고도 인사 한번 하지 않았다. L도 역시 마찬가지. 그냥 서로 눈이 마주치면 입 꼬리가 살짝 올라가는 정도로 희미하게 웃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인사의 의미는 충분했다. 

새 학기가 시작되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담임선생이 들어와서는 반장선거를 할 테니까 추천할 인원을 손들어 발표하라고 했다. 뒤에서 누가 손을 들더니 내 이름을 들이댄다. 
L이었다. 선생이 이유를 묻자 우물쭈물 되도 않는 말을 늘어놓는다. 


피식. 바보같은 놈. 누가 그런 거 시켜달래.


예전같았으면, 당당히 앞에 나가서 “안해요. 용지에 제 이름 쓰시면 한 표 버리시는 겁니다.” 라고 휙 자리에 돌아왔으련만, 나는 겨울을 지나면서 변해있었다. 후보자 연설 때 나는 교탁에 서서 내가 가장 비웃던 말들을 늘어놓고 있었다.


“저를 뽑아주신다면......”


L이 추천한 만큼 나는 2위 후보와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되었고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반장’이라는 것을 해보게 되었다. 


문제는 이게 매우 거추장스러운 자리라는 걸 미처 깨닫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수업시간에 잠을 자도 눈에 제일 먼저 띄고, 선생이라는 사람들은 시시콜콜한 것 까지 다 나를 찾았다. 하물며 수업 중 불특정 다수를 향한 교사들의 질문에 아무도 답이 없으면 그들은 누구를 가장 먼저 찾는가. 젠장, 반장 1년 하면서 선생들에게 제대로된 답변을 한 적이 단 한번 있다. 똘끼다분한 체육교생이 성교육 이론수업 한답시고, 칠판에 S.E.X라고 엄청크게 써붙여놓고는 “반장. 남자의 성감대가 어디지?”라고 물었을 때, “귀X입니다.”라고 대답했을 때다.(성적으로‘는’, 나는 좀 조숙했다. 그 인간, 교감선생이 복도 순찰 돌다가 교실에 들이닥쳤을 때 당황하던 표정이 기억났다. 하하) 더군다나 가장 귀찮았던 것은 우리 반이 ‘문제아반’이었다는 점이었다. 서울의 평범한 중학교에서 반 편성을 의도적으로 그렇게 했으리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어찌됐거나 말도 안된다 싶을 정도로 ‘모여’있었다. 덕분에 한 해 동안, 학생부 들락거리고, 엉망인 출석부 뒤치닥까리―공결증이나 조퇴증 위조라던지― 때문에 골치가 아프긴 했지만. 돌이켜 보면 여러모로 추억이다. 


L과의 관계는 크게 변함없었다. 어울리는 친구들부터가 다르고, 자리도 끝과 끝이니 마주칠 일도 없었다. 그러던 와중에 2학기의 ‘가을 수련회’ 때, 충북 음성 근처의 어느 콘도 발코니에서 우리는 다시 둘 만 대화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불량 열다섯 살답게 곱게 꼬불쳐온 소주에 벌게진 얼굴로 덥다며 내가 서있는 쪽의 발코니로 담배를 빼어 물고는 걸어왔다. 작년에도 그랬지만, 이 녀석은 1년에 한 번 말거는 주제에 뜬금은 눈 씻고 찾아봐도 없다.


엄마가 같이 죽자는데? 

뭐? 

내가 애X끼 하나 조져놨거든. 그게 좀 커져 가지구는, 같이 경찰서 다녀왔는데, 엄마가 장판바닥에 식칼을 내리꽂더니 같이 죽자고 하더라구. 피식.

그게 웃기냐 임마? 그래서, 뭐랬는데.

너 그 기분을 알겠냐? 눈물난다. X팔. 그냥 잘못했다고 빌었지. 다신 안 그러겠다고.

그러더니, 여느 때처럼 손끝으로 담배를 툭- 털어내고는 한숨을 내쉰다.

나도 지겹다. 후우-
야, 너 나중에 돈 많이 벌면
나 택시 한 대만 뽑아주라. X나게 벌면 모범으루다가.

그래. X나게 벌면.
근데, 그 애X끼는 뭣땜에 조진거야?

아? 별 거 아냐. 
1학년들 삥 뜯고 돌아다니면서 내 이름 팔고 다니길래.

얼마나 조졌는데 그래?

코뼈 내려 앉았덴다. 갈비 한 대 나가고.
아깝지? 아예 죽여 버릴껄 그랬나?


나는 피식- 하고 웃었다. 이 사람. 나와 이야기할 때에는 평소의 억양과 목소리와는 좀 많이 다르다. 
뭐랄까, 참았던 응어리를 조금씩 토해내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아주 묘하고, 농밀한 목소리로 피묻은 이야기를 하면서도 전혀 아프지 않게 이야기했다. 오히려 꺼내고 싶지 않은 이야기일수록, 덤덤하게 이야기했다. 뼈를 깎아 독을 발라내는 관운장처럼, 심지어는 껄껄 웃으면서 말이다. 

그 때가 유년기의 L과의 마지막 대화였다.
중학교 졸업이후로는, 그 녀석은 실업계에, 나는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마주치지도 못했다.



살아가면서, 
왜 늘 보고싶고 그리운 사람은 죽어라 기다릴 때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다가,
잊을 때쯤 되면 갑작스럽게 나타나서 사람을 싱숭생숭하게 만드는지 모르겠다.
첫사랑이 그랬고, 
L이 그랬다.



아마도, 대학교 1학년 때였던 것 같다. 시시껄렁해 죽을 맛이었던 대학 초년생 생활에 질려, 수업도 제끼고 집에서 하릴없이 독서를 위한 독서나 하며 시간을 죽이고 있던 때였다. 매일 시키던 중국집이 주문이 밀려 40분도 넘게 걸린다길래, 다른 동네 짬뽕 맛도 먹어보고 싶고(고백하자면 짬뽕이라면 사족에 힘이 모두 풀린다.). 결국 약간 멀다 싶은 중국집에 전화해서는 한 그릇시키는데, 짬뽕시키긴 좀 그렇고 결국 ‘굴짬뽕’을 주문했다(그래봤자 오천원). 한 20분쯤 뒤에 “배달이요” 하고 들어오는 녀석을 보니 내 또랜데, 낯이 익다. 

아? L이었다. 
눈이 마주치자, L의 입가에 멋쩍은 웃음이 번진다.


너였냐? 
응. 오랜만이네. 담배 한 대 피고 갈래? 
아무도 없어? 
그래. 
그럼 한 대 피우자.


서울,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것 같은 흐린 초여름의 오후에.
L과 나는 아파트 13층 높이의 발코니 창틀에 팔을 기대어 담배를 빼어 물고,
6년 전의 그 때처럼 대화했다.


뭐하고 지냈냐?
나? 뭐. 학교 자퇴하고 중국집 배달 3년차.
그 집. 돈 많이 주냐? 한 달에 얼마 주는데?
빡시게 뛰면 얼추 120까진 된다. 할 만해. 그러는 너는, 학교다니냐? 어디갔어?
재수해서 X대. 03학번이야.
피식. 뭐야. 꼴랑 거기 갔냐. 한심한 놈. 나는 수능 끝나면 TV에라도 나올 줄 알았지.
고등학교 졸업장도 없는 놈이 말이 많구나.
어허. 못 본 사이에 많이 컸구나. 너 누구한테 맞아본지 너무 오래된 거 아니냐?


흐린 하늘을 향해 우리는 회색 연기를 내뿜었다. 유쾌하게.
그리고 한편으론,
전혀 다른 두 길의 교차로에서 지나온 길을 바라보며 차분하게.


“열심히 살아라.”


철가방을 손에 쥐고 문을 닫으며 L이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하- 열심히 살라고. 제대로 덤벼보지도 않고 대학생활에 질려가지고는 집에서 하릴없이 시간이나 축내는, 인생태만의 내가 ‘시간외 근무도 마다않는 스물한 살 경력 3년차 프로페셔널 철가방’에게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내가 졌다. 


그래야지. 니 모범택시 한 대 뽑아주려면, 
열심히 살아야지.

하하. 네놈도 어지간히 할 일 없는 놈이로구나. 
그딴 걸 다 기억하고. 어쨌든 열심히 살아-

그렇게 나는 천천히 닫히는 현관문 틈으로 L의 마지막 뒷모습을 보았다.





여기까지가 그와 나의 인연이다. 생각해보면, 긴 시간 동안 이야기한 적도 없는데,
두 사람이 진정으로 교감하기 위해 필요한 시간의 값이 정해져 있다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그만큼은 이야기한 것 같다. 


예의 누가 그랬던 것도 같다.
아무리 오랜만에 대화해도,
마치 어제 만난 것처럼 어색하지 않은 친구가 있다면 그 친구가 진짜배기라고.
내게는 L이 그랬다. 
언제나 반가웠고. 
짧으나마 함께 있으면, ‘세상도 참 살아갈 만한 거구나’ 싶었다.


이따금씩 비 올 것처럼 잔뜩 으름장 놓고, 머쓱하게 흐리기만 한 오늘 같은 날이면,
나는 13층 높이의 발코니에서 세상을 향해 뿜어내던 회색 연기와 함께 L을 떠올린다. 
보고싶다고 생각해보지만, 또 노력하면 못 만날 것도 없겠다마는.
인위는 우리를 멀게 하리라는 것을. 세찬 삶에서 뜻하지 않은 우연만이 
우리의 가깝고도 먼 우정을 더욱 깊게 하리라는 것을. 
L도. 그리고 나도.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우리는 같은 씨를 가진 대척점이었으니까.
서로를 동경했던 N과 S였으니까.




다음에는, 우리는 또 얼마나 다른 모습으로 만나게 될는지.
하지만 우리 언젠가 만나 짓게될 멋쩍은 웃음 속에서,
열 넷. 열다섯. 스물하나의 서로를 추억할 수는 있겠지.


그러니 부탁하건대,
친구여.
세상살이 힘에 부친다하여,
너무 변해버리지는 말도록.
재회가 어색하지 않게.


그리고 어린 날의 ‘우리’들이여.
부디 이 무엇하나도 정해진 바 없는 세상 속에서,
너희들만은 언제까지나 그 자리를 지켜주기를.

다시 만나면, 그때로 돌아갈 수는 없겠지만,
서로의 반가운 웃음 속에
그 어리고 방황했던 날들의 색(色)으로 축축하게 젖을 수 있도록,

너희들을 향해 한걸음에 달려갈 준비는 언제든 되어있으니까.


* 병장 김동환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6-05-08 15:59) 

  
 
 
 
상병 송희석 (2006/04/06 05:21:15)

......잘 읽었습니다......    
 
 
상병 배성문 (2006/04/06 05:37:06)

크윽...가슴을 울리는 글 정말 잘 읽었습니다    
 
 
상병 이영준 (2006/04/06 07:48:52)

잘 읽었습니다.    
 
 
 병장 김동환 (2006/04/06 08:12:53)

아..정말 추천기능 간절하게 만드시네요.    
 
 
병장 신현동 (2006/04/06 08:54:27)

예의 누가 그랬던 것 같다. 
아무리 오랜만에 대화해도, 
마치 어제 만난 것처럼 어색하지 않은 친구가 있다면 그 친구가 진짜배기라고. 

마음에 와닿네요.    
 
 
병장 강보람 (2006/04/06 08:59:33)

유후. 좋습니다. 좋아요...    
 
 
병장 주현탁 (2006/04/06 09:35:40)

멋있음. 나중에 꼭 멋진 모습으로 친구와 다시 만나길 바랍니다.    
 
 
병장 김태경 (2006/04/06 13:19:17)

잘 읽었습니다. 예전에 현관물을 열고 들어온, 짜장면 배달가방을 들고온 같은 반이었던 친구를 애써 외면했던 기억이 나네요. 잘 지내고 있을지.    
 
 
상병 조주현 (2006/04/06 16:00:18)

잘읽었습니다. 멋집니다.    
 
 
하사 윤석호 (2006/04/06 21:49:51)

잘 읽었어요. 종민씨, 글 잘쓰시는 군요.(웃음) 
참.. 웃음 흘릴 글이 아닌데.    
 
 
상병 강철민 (2006/04/07 22:29:18)

피천득의 인연이라는 수필이 기억나네요~    
 
 
이병 박재우 (2006/05/08 16:09:39)

너무 멋진 글입니다    
 
 
상병 최숭규 (2006/05/08 18:57:08)

감동.    
 
 
병장 양영후 (2006/05/08 19:48:04)

...    
 
 
상병 김용범 (2006/05/09 15:01:11)

감동입니다. 게다가 그 글 솜씨에 다시 감동..    
 
 
상병 김재환 (2006/05/15 15:57:43)

가슴 한켠이 뭉클하군요.. 

친구들이 또 그립군요 하하    
 
 
병장 류재경 (2006/05/22 08:22:04)

p종 소설같애.. 
나도 친구들 생각나네    
 
 
병장 이은호 (2006/06/15 22:12:53)

글.이라기 보다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잘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