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 청년의 어느 무료한 주말 
 
 
 
 


109.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 청년의 어느 무료한 주말 :


주말은 무료했다. 이 말은 단순히 심심했다는 말도 될 수 있고, 혹은 절망적이었다는 말도 될 수가 있다. 뭔가 내키지 않았다는 말도 될 수 있고 그래서 괜히 심드렁했다는 말도 될 수 있다. 답답했다는 말도 될 수 있고 반대로 머리가 뻥 뚤린 듯, 다시 말해 대가리에 총 맞은 기분 같기도 했다.

미칠 것 같았고, 그러면서도 죽음의 심연에 비로소 도달한 듯한 안도감도 뒤섞여 있었다. 모순된 것들이 교차하였고 아무것도 정의내릴 수 없는 듯 했다. 하지만 그것이 또한 어쩌면 진실이 위치하고 있는 장소인 듯 했고, 마침내 나는 내 생의 정중앙에 자리했다. 내가, 보이기 시작했다.

심심했다. 뭐 심심할 수도 있지, 하고 넘겨버리기 이전에 나는 문득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는 내무실에 있었고, 딱히 감상평씩이나 늘어놓고 싶지는 않은, 미안하지만 그저 그랬다는 정도로만 말하고 그냥 넘기고픈 그저 그런 책 한 권을 막 다 읽고 난 직후였다. 내무실엔 나 말고도 사람이 많았다. 모두들 나와 같은 주황색 활동복을 입고서, 각자 TV를 보거나 낮잠을 자고 있었다.

나는 놀랐다. 이렇게 비슷한 또래의 여러 사람들을 곁에 두고 심심할 수 있다니. 더 나아가, 함께 먹고 자고 생활하는 사이임에도 우리 사이엔 진정한 의미의 '공동체'란 게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것도 다른 곳도 아닌 군대에서, 전우애를 부르짖고 공동 생활이라는 물적 조건이 뒷받침되는 이곳에서. 심심할 수가 있다니.

그래, 어쩌면 이것이 바로 가감없는 군 내무생활의 현주소인데, 여지껏 지나쳐버렸던 것일 수도 있다. 요새 같은 시대에, 소위 말하는 '신세대 장병'들에게 '전우애'란 말은 '새마을운동'만큼이나 거리감이 있는 단어이다. 애시당초 개인주의에 입각한 사고방식과 생활양식에 푹 젖어있던 이들에게, 과거 학창시절에 이미 한번 '단결'이라느니 '통일'이라느니 하는 각종 교육 이념들에 승리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 이제 와서 '전우애'를 강조해봐야 마치 예방접종 이후의 병원균 침입처럼 때늦은 감이 없잖아 있다.

진작부터 각자 뿔뿔이 흩어진 채로 잘 살아온 이들에게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라는 구호가 먹힐까. 차라리 그런 추상적이고 실험적인 구호보다는 그동안 살아온 '흩어진 나날들'이 더 생생하고 와닿을텐데. 요새 제대하는 병장들이 복학 걱정하고 취업 준비할 걱정하지, 대한민국 어느 누가 헤어지는 전우들과 얼싸안고 눈물을 흘리나. "아무런 상관없는 그런 사람들에겐 이별이란 없을 테니까." 그래, 2년간의 '흩어진 나날들' 끝에 '이별'이 어디 있나.


헌데 가만 보면 이것이 군 내에서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즉, 군에서야 마음 안맞는 사람들 랜덤으로 묶어놨으니 그런 거고 밖에서는 안그렇다, 논리가 그다지 타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20대에겐 공동체가 없다. 중고등학교 다닐 적부터도 살벌하기만 한 입시 기관에 소속감 따위를 느꼈을 리가 없고, 대학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렇다고 사회 나가면 이제 평생 직장 같은 건 없는 세상이다. 그나마 촉망받는 직종이란 것도 의사니 변호사니, 자기 혼자 능력으로 외롭지만 잘 사는 사람들이다. 대기업 CEO의 꿈도 그게 어디 애사심 가지고 일하는 자린가, 자기 캐리어 위해서 일하지.

우리 세대엔 처음부터 공동체가 없었고 현재에도 없으며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헌데 이런 사정을, 누구 하나 눈여겨보는 사람이 없다. 우리는 지금 위기에 처해 있다.

과거에는, 즉 우리 부모님 세대에는 달랐다. 우선 그들에겐 '고향'이라는 게 있었다. 그 유명한 '이촌향도'의 물결 속에 저마다 작은 돛단배처럼 도시로 휩쓸려 왔지만, 자식 세대들과는 달리, 그들 마음 속에는 여전히 고향이 있다. 그것이 떠나야만 했던 곳을 향한 그리움이 되었든 떠나고만 싶었던 곳을 향한 경멸이 되었든, 어쨌든 그들에게는 '고향'이 있다. 그것은 자기 정체성의 존립 근거이며 공동체적인 가치와 규범의 구심점이다. 우리에게도 각자 태어난 병원은 있지만, 그 분만실이 갖는 의미는 부모님 세대의 '고향'과는 엄연히 다르다.

우리는 고향을 가지지 못했다. 존립 근거를 가지지 못했고 가치와 규범의 구심점을 가지지 못했다. 그들은 떠나온 고향을 그리워하지만 우리에겐 그리워힐 고향이 없다. 우리가 부모 세대가 성취한 풍요 속에서 자라난 세대라고? 우리는 처음부터 빼앗긴 세대다. 결핍의 세대이고 허무의 세대이며 혼란과 방황의 시대이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이미 충분히 불쌍했다. 그점을 직시해야 한다. 아니야 우린 충분히 누렸지만 그만한 값어치를 못하고 있는 세대야, 라는 겸손은 스스로에게 지나치게 인색한 견해이며, 오히려 우리 자신의 병을 치료하는 데 도움이 안된다.

우리가 공동체를 상실했고 따라서 불쌍하고 외로운 세대임을 인정하고 나면, 많은 것들이 설명 가능해진다. 가령, 왜 우리는 난데없는 월드컵에 열광하는가. 무엇이 철저히 파편화된 우리 개인들을 별안간 같은 복색을 하고서 '대~한민국'을 연호하게 만드는가. 공동체를 상실한 우리들에게 월드컵은 그것의 대체물이었던 셈이다.

'연애'는 어떤가. 사람들은 항상 소통을 원한다. 하지만 과거 소통과 결속의 대인관계 양식을 담보하던 공동체의 붕괴 이후 아직 직장도, 배우자도 없는 젊은이들에게 남녀간의 1:1 연애 관계가 가장 현실적인 대안으로서 대두되었다. 그것은 기존의 지배적 제도인 일부일처제에 별다른 마찰없이 수용될 수 있으며, 무엇보다도 개인주의와 소비주의라는 시대의 패러다임과도 맞물려 서로 상승 효과를 일으킨다. 그렇게, 공동체의 붕괴라는 시대적 위기 앞에서 우리는 나름대로의 대응책을 찾아나가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문제가 있다. 첫번째는 의식의 관념화이다. 가령, 고향을 가져보지 못한 이들에게 '전통'이란 말은 현저히 피상적일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상징을 딛고 서있어야 하지만 과거의 상징 체계를 담보하던 물적 조건이 이미 해체되어 버리고 난 이상, 그것을 대신할 것들을 만들어내지만 아무래도 대체물은 그저 대체물일 뿐이다. 이는 삶에의 몰입을 저해하고, 그로 인한 단절감과 상실감은 나아가 패배주의를 우리 세대의 정체성으로서 공고화한다. 똑똑한 대학생들은 몸부림치듯 자기 삶 외부의 '구조'와 '부조리'를 외쳐보지만, 끝내는 괴로워하며 지쳐 쓰러질 뿐이다. 슬프게도 이 패턴은 이미 지나치게 흔한 나머지 별 관심조차 끌지 못한다.

두번째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무방비 상태의 노출이다. 대한민국에서 20대의 나이에 멀쩡히 대학 강의실에 앉아 노트 필기를 하고 있다는 것은, 과거 성장기를 지배하던 그 모든 억압에 대해 두손 두발 다 들고 공모자가 되었거나, 혹은 이미 진작에 장렬히 전사했음에도 자신의 죽음을 깨닫지 못한 채 여전히 거리를 활보하는 좀비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전자는 한번 공범이 된 이상 발을 빼기가 어려우며, 후자는 비록 살아 움직이지만 이성적 판단 능력에서는 뇌사 상태나 다름없다. 어느쪽이건, 이용당하기에는 최적의 조건이다.

이들은 이미 삶과 유리된 관념적인 의식에 익숙하기에, 거짓말을 하기도 크게 거북스럽지 않다. 그래서 보다 적극적으로 자신을 속일 수 있다. 고시를 준비하고, 토익을 공부한다. 월드컵에 열광하고, 연애에 빠진다. 자신이 동의하지 않으려 했던 지반 위에서 가능한 것들을, 자신이 원해서 하는 일이라 여긴다. 다시 그것은 우리 세대의 정체성인 패배주의를 구성한다.

세번째는 무력화이다. 단지 전통과의 단절, 즉 이전 세대와의 결별이라면 그것은 어느 시대 청년들에게나 해당하는 문제다. 하지만 유독 비극적인 우리 세대의 특이성은 공동체의 상실로 인해 새로운 공동의 가치 체계를 형성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소통의 네트워크가 확고하다면 죄수의 딜레마는 성립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배제의 공포 / 포섭의 환상이라는 이중주 장단에 맞춰 춤추는 꼭두각시로서 성장해왔다. 어떤 공동체도 서로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는 불신으로 팽배한 구성원들로는 이루어질 수 없는 법이다.

그리하여 위기에 봉착한 각 개인의 자기 구제 노력은 철저히 개인적인 범주 안에서 이루어진다. 일신의 안위를 위해 고시를 보고, 취업을 한다. 그리고 노후 대책으로 자녀 양육에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힘을 합치지 못하는 각 개인은 무력할 뿐이다. 그리고 공동체 구성에 실패한 차선책으로서의 사적 자기 구제는 현 시스템과의 야합으로 이루어진다.


나는 이 문제들의 가장 근본적인 해결책은 무엇보다도 공동체의 회복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공동의 가치와 규범을 담보하는 네트워크의 재구축을 의미하며, 다시 더 나아가 그것을 우리가 변화시키고자 하는 세상에 관철시킬 수 있는 힘의 구비를 암시한다. 우리가 동시대인들을 적이 아닌 동반자로서 받아들일 수 있는 지반 위로 딛고 일어설 수 있다면 함께 힘을 합쳐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는 일도 그리 요원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은, 얼마 전에 후배에게서 이런 편지를 받았다. "……앞으로 나아가려 합니다. 어디로 가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합니다. 최대한 긍정적으로 살려구요. 그렇게─열심히 발버둥치다가 지쳐 쓰러져서 느끼는 무기력함은 의외로 달콤할 것 같습니다.……"

한동안 중요한 것을 잊고 지냈던 모양이다. 내가 누구의 손을 잡고 어떻게 일어나야 하는지. 답은, 생각보다 가깝고 익숙한 곳에 있었다.



2006. 3. 26. 日, 大영일고등당구스쿨 공채 24기 목동의 김프로


 

  
 
 
 
상병 송희석 (2006/04/05 07:26:59)

저런 생각을 했다는것 자체만으로 무료하진 않았을것 같네요!    
 
 
 병장 김동환 (2006/04/05 07:58:56)

혼자. 혼자죠. 저는 아직 주변에 손을 잡아야 할것 같은 사람이 보이지 않아서 
좀더 혼자여야겠어요.    
 
 
상병 조주현 (2006/04/05 08:49:50)

커다란 울림과도 같은 글이었습니다.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병장 김대현 (2006/04/05 09:07:48)

소속감을 위해 필연코 버려지게 될 것들에 대해 연민해주는 것. 1급수 열목어처럼 세상을 살지 않는 것. 
그래요, 사람 사이에 공동의 기반을 찾는 것이 꼭 작은 차이들을 배제하는 방향으로만 가는 건 아닐 거예요. 
그리고 저 역시, 어깨동무가 그립습니다. [싱긋]    
 
 
상병 이영준 (2006/04/05 09:25:05)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제가 속한 공동체는 제가 속한 고등학교 같은 과 아이들입니다. 
3년동안 2개 반 안에서만 왔다갔다 하다보니 80여명은 완전 친해졌습니다. 
지금 휴가나가서도 만나는 아이들은 그 아이들이구요. 
최소한 한개의 공동체는 지니고 있어, 조금이나마 마음이 놓이네요.    
 
 
병장 이상준 (2006/04/05 09:59:50)

이 글도 글이지만, 이 글 다음의 글들도 정말 놓치기가 싫군요.    
 
 
병장 김형진 (2006/04/05 10:29:11)

잘 읽었구요, 저도 공감하는 내용들입니다. 
각자, 해결책은 다르겠지만, 그러니까 각자의 답이 있겠지만, 저도 그것 때문에 가슴이 아플때가 있지만, 
누군가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는 사실 혹은 생각이 커다란 힘이 되기도 하더라구요.    
 
 
 병장 노지훈 (2006/04/05 11:16:07)

글 잘 읽었습니다. 
책마을이 광장이 아닌 그냥 게시판이 아닌 공동체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병장 최무강 (2006/04/05 11:26:10)

정말 너무나 무료합니다.    
 
 
일병 조형규 (2006/04/05 11:37:10)

정말 잘 읽었습니다. 구체적인 소통이나 공감의 기억이 없는 세대, 그래서 더 추상적인 관계(사랑, 국가, 게임, 뭐든)에 열광하고, 집착하는 것이겠지요. 공동체라, 공동체의 회복이 단지 복고적인 구호에 머물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정치의 상실 이전에 아예 대화의 상실을 겪는 세대라니, 으음. 

영준/혹시 외국어 고등학교 출신이 아니신지. 혹시나 해서요(웃음)    
 
 
상병 정준엽 (2006/04/05 14:05:05)

공동체가 무엇인지..    
 
 
병장 김강록 (2006/04/05 18:26:42)

최근에「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토니 마이어스 作)를 읽어보니 지젝 역시 탈근대 사회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공동체의 붕괴와 그에 따른 공동 가치와 규범의 상실을 지적하고 있었습니다. (여담 : 저는 부끄럽게도 일전에 이거 노트정리하다가 한번 집어치운 이후로 아직도 끝을 못봤는데, 정작 제가 바람넣은 대현씨가 저보다 먼저 다 읽어버리고 말았더군요.) 또한 은희경의 「비밀과 거짓말」역시 대타자大他者 상실로 인해 송두리째 뒤틀려버린 삶을 살아온 두 형제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었습니다. 

철학도, 문학도 이 문제를 주목하고 있습니다. 이땅의 사회과학도들도 그 흐름을 빨리 따라잡아야 합니다. 우리 시대의 문제는 우리 자신이 해결해야 합니다. 그건 우리가 우리 자신의 삶에 얼마나 몰입했냐의 문제이고, 충실했냐의 문제이며, 또한 자존심의 문제입니다.    
 
 
일병 김동민 (2006/04/05 19:42:29)

좋습니다. 공동체, 그리워 불러보는 이름처럼 가슴 한켠이 아리군요. 
서로가 서로에게 모두를 위한 허브가 되어 주는 일, 아직은 채 여물지 못한 
저만의 작은 꿈에 불과하지만 해볼만한 일이 될 것 같습니다. 
명징한 언어로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병장 손동철 (2006/04/06 06:01:15)

요거 프린트입니다. 그나저나 이 글을 읽으니 엉뚱하게도 가족을 위해 강해지신 아버지가 생각나네요.    
 
 
일병 황성규 (2006/04/06 08:30:40)

저는 '공동체의 회복'이라는 말이 실감이 안나는군요. 그 언제 어느 시절에 사람들이 공동체 속에서 소통하며 연대의식을 느꼈는지 모르겠어요. 이상의 소설 '권태'에서 주인공이 삶의 무료함과 권태를 느끼는 것이 고향의 부재와 공동체의 상실에 근거한 것인가요? 공동체의 부재가 소통의 단절에 한 원인이 될 수는 있어도 그것일 필연적이라고는 보이지 않네요. 그리고 소통에 대해서 이야기할때는 '우리는 이러이러한 이유로 소통이 단절되었다'는 인식에 머무를 것이 아니라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소통을 해야한다' 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소통의 부재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하고 그것의 원인을 고민하는 강록님이 정작 자신의 부대원들과의 소통은 원활히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에 아쉬움이 남네요. 중요한 것은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시키는 일이니까요. 

덧. 다소 공격적인 투로 글을 쓰게 되었는데, 결코 고의적인 악의가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제가 느끼지 못했던 강록님의 문제인식에 여러가지를 깨닫고 재밌으면서도 알찬 문장력에 감탄하고 있어요. 다만 제가 쓰는 글들은 결국 저의 무지함과 저의 나약함과 제가 하지 못했던 것들에 대한 반성인에서 비롯되는 것인지라 돌려서 표현하지고 가능하면 정확하게 쓰고 싶었어요. 어쨌든 앞으로도 좋은 글 많이 부탁드리고 더 얘기 해봤으면 좋겠네요.(진심)    
 
 
상병 송희석 (2006/04/06 08:52:26)

성규/ 강록님은 이런 스타일이세요! "왜 소통이 단절되었는지 안다면 어떻게 해야할지 당연히 안다." 
즉, 왜 이루어지는지 확실히 안다면 변화는 어렵지 않다는 것이죠! 아마 맞을꺼에요! 강록님은 왜? 라는 근본적인 생각부터를 중요하게 생각하십니다. 우리는 왜? 인지도 모르고 무조건 변화하겠다는 강박관념을 갖고 있을수도 있거든요! 그래서 강록님은 어떻게? 라는 방안은 설명을 안해주신답니다. 

맞나요? 강록님? 제가 여태까지 글을 읽은 강록님에 대한 생각인데? 혹시 틀렸다면 언제든지 알려주세요!    
 
 
일병 황성규 (2006/04/06 09:31:39)

희석/ 저는 소통을 한다는게 '왜?인지도 모르고 무조건 변화하겠다는 강박관념'이라고 생각지 않아요. 서로의 취향에 대해서 알아가고 서로의 고민을 공유하는, 그들의 입장에 다가서려 하는 것이 '소통'아니었던가요. 이는 결코 강박관념이 아니며 공동체의 복원이 되었든, 관계의 회복이 되었든 가장 기본적이고 그래서 가장 중요한 한 걸음이라고 생각해요.    
 
 
상병 송희석 (2006/04/06 09:41:00)

성규/ 아 저하고 처음 대화하시는분들은 이렇게 소통하기 어려운점이 있어요! 바로 제 글 문제죠! 잠시 제가 글을 잘못썼다는것을 인정하며, 상규님이 말씀하신 서로의 취향에 대해 알아가고 서로의 고민을 공유하면서, 그들의 입장에 다가서는것이 '소통'이라는 견해는 일반적 견해이지만, 대체적으로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부자와 거지가 그렇게 소통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바로 제가 원하는 세상입니다. 하지만 불가능하네요!(웃음) 

부자와 거지뿐이 아닌 한 사상과 다른 사상이 과연 그런방식으로 소통할수 있을지 의문이 듭니다. 마치 '과학' 과 '종교'가 서로의 취향과 서로의 고민도 공유하면서, 그들의 입장에 다가서기 매우 힘듭니다. 그래서 저는 대부분 "왜?"소통해야하는것따위는 중요하기 보다는 "어떻게?" 소통해야하는것인지 중요하다 봅니다. 

그것이 공동체 복원이든, 관계의 회복이든 그것도 방안이지만 다른 방안을 찾고 싶은 것이죠! 성규님이 말한 변화는 과연 누구를 위한 변화인지도 꽤 중요한 고민거리입니다. 여기까지 저의 견해입니다.    
 
 
병장 김강록 (2006/04/06 10:58:38)

성규 / 실감이 잘 안나는 이유는, 우리가 공동체에 대한 구체적인 경험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저 윗세대에게서 간접적으로 '듣기만 한' '전통'이니 하는 개념들에 대입하여 유추해보려해도 잘 안될 겁니다. 우리에게 '전통'이란 이미 추상적인 구호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제가 '회복'이라고 표현하긴 했습니다만, 공동체를 상상하고 그것을 실천에 옮긴다는 것은 지금까지 없었던 것을 새롭게 만들어내는 행위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20세기의 끄트머리, 냉전 말기에 태어나 성장했습니다. 그것도 우리의 역사적 체험이라면 역사적 체험입니다. (아직까지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제대로 되돌아본 적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하나의 실험과 도전이 실패하는 광경을 목도, 씩이나 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당시에 성숙해있지 않았을런지는 몰라도 그로부터 파생된 사회의 시류가 우리의 정체성 형성에 영향을 주지 않았다고는 말 못합니다. 

저는 우리 세대에 실험에 대한 패배주의가 만연해있다고 생각합니다. 본문에서는 얘기하지 않았습니다만, 그날 저는 놀아주는 사람도 없고 해서 저는 밖으로 나가 운동을 했었습니다. 그럼 혹시 기분이 나아질까, 하는 막연한 기대에서 말이죠. 기분전환을 위한 무엇, 이라고 일컫어지는 것들에 대해서 그 기계적 어감 때문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만,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한번 해봤습니다. 그러고 나니 뭔가 좀 달라지긴 하더군요. 마음에 여유가 생기고, 덕분에 내무실에 돌아와서 웃는 얼굴로 후임들에게 농담 한 마디씩을 건낼 수가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변화시키는 것'이라는 성규님의 지적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사항입니다. 하지만 전 그날 후임들에게 웃는 낯으로 농담을 건내면서 그 변화의 실마리까지도 잡은 것 같아요. 다시 '실험'을 꿈꿀 용기가 생긴 겁니다. 공동체의 부활이 되었든 무엇이 되었든 변화에 뒷받침되어야 할 가장 기본적이며 결정적인 것은 곧 '행위의 부활'이 아닌가 합니다. 마치 그 부활을 마침내 이룬 것 같은 느낌입니다. 내무실도 작은 사회입니다.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이에게 작은 내무실 하나 변화시키지 못한다고 하면 되겠습니까. 기대해주십쇼. 저녁 무렵에 이르기 전까지 저희 내무실은 바뀌어 있을 것이며, 그 방향은 어느쪽이든 지금보다는 더 나은 곳을 향할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 변화에 미력한 한 힘을 보탠 사람이 되고자 합니다.    
 
 
병장 주영준 (2006/04/06 11:04:15)

마침내 자유인의 공동체, 피맺힌 염원인것을...(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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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 공공성의 복원, 이라는 것이 여기 오기 전에 제가 가장 극복하고 싶었던 레토릭 중 하나였어요. 개인적인 삶의 궤적과 관련하여. 공동체라는 이름이 내재한 폭력성과 관련하여. 글쎄. 무슨주의자 크리스 하먼에 의하자면 저는 '분파주의자'에 가까운 입장이랄까요. 여전히 우리 시대의 삶의 가장 중요한 극복 전술은 '공동체성의 환원'일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러기에 걸리는 것들이 두려워요. 오랫동안 해 오던 고민이었는데, 다시금 상기시켜주셔서 고맙네요. 강록님. 쳇. 안그래도 요즘 또 슬럼프인데. 흥. 그래서 글과는 전혀 상관 없는 딴소리나 남겨 봅니다.    
 
 
병장 김강록 (2006/04/06 11:11:54)

희석 / 말하자면, 제게 소위 말하는 지행합일설스러운 성향이 있는 건 사실입니다. 그래서 실천에 대해 꽤 널널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생각도 종종 듭니다만, 그렇다고 그 문제에 대해서 전혀 나 몰라라 하는 건 아니에요. 

실은, 적나라하며 심지어는 자질구레하다 싶을 정도의 대안 찾기야말로 감히 말하건대 이제껏 자칭 사회과학도 김강록 학생의 주특기였습니다. 제가 어떤 카드를 쥐고 있는지, 자. 궁금하죠?    
 
 
일병 황성규 (2006/04/06 11:13:51)

강록/ 저도 미력하나마 노력하려구요. 아직 저녁 무렵으로 수렴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 무한한 시간이 남아있으니... 화이팅!(반짝)    
 
 
상병 송희석 (2006/04/06 11:14:18)

강록/지금 놀리는거죠!!! 한번도 카드 안보여줬으면서 제가 투시력이라도 있다고 생각하나요? 이왕 쥐고있는 카드 살짝 낮은패부터 보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병장 김강록 (2006/04/06 11:32:12)

영준 / 이 점에 대해 얘기하자면, 최근 우리 문학의 조류를 한번 짚고 넘어가는 게 여러모로 편리하겠군요. (문학의 조류, 씩이나 말하기엔 제 소양이 아직 너무나 일천하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만, 근래 들어 이와 관련해 스크랩을 해놓은 게 몇 개 있습니다.) 80년대 문학이 어떤 공동의 담론과 문제의식을 담고 있었다면, 90년대는 그에 대한 반발로 개인의 문제로 돌아가려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다시 2000년대에 들어서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하면서도 사회적 상상력을 복원'하는 그런 분위기라고들 합니다. 

물론 공동체에는 여러 형태가 있을 수 있고, 그중 과거에 존재했으며 아직까지 잔존하는 형태의 공동체에는 분명 우리가 극복하고 떨쳐내야 할 요소들이 많습니다만. 2000년대의 공동체는 그와는 다른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가 될 것이며, 그 모색의 발자욱을 문학이 먼저 딛고 나선 게 아닌가 합니다. 이제 사회과학에서도, 80년대를 넘고 90년를 넘어서 2000년대형 사회과학이 나올 차례입니다. 그리고 그 가장 주된 화두는 '공동체'가 되지 않을까 감히 생각해 봅니다.    
 
 
병장 김강록 (2006/04/06 11:47:51)

희석 / 그것은 제가 나일롱이나마 정치경제학을 공부하는 학회에 소속되어 있었으며 나름대로 꽤 열성적인 활동을 하던 일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곳에선 그런 냄새를 전혀 풍기지 않고 있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 봅니다. 

그리하여 구체적 대안에 대한 목소리가 잦아들게 된 것에는 현재의 신분과 이곳 공간의 특수성도 한 요인이긴 합니다만, 그게 결코 다는 아닙니다.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알면 다 된다, 즉 '계몽'이 적절한 해결책이 되지 못하는 시대입니다. 하지만 저는 아직 그 '지행합일설스러운 경향'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그것을 그저 인간을 포기하지 않는 휴머니즘 정도로 스스로 생각했습니다만, 지금은 그것 말고도 다른 이유가 생겼습니다. 

지금껏 이 사회의 '구조'가 어떻게 잘못 되었다, 하는 분석은 넘쳐날 정도로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세상을 바꾸진 못했습니다. 저는 그 이유가 '정작 우리 자신은 당장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문제를 아직 설명해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알아도 안되는 부분이 있는 게 아니라 현재의 사회과학 이론들이 아직 완성된 게 아니며 여전히 모르는 부분들이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구조가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가, 에서 당장 나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하는가로 화두가 바뀌기까지 꽤 시간이 걸렸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답을 거의 찾아가고 있습니다. 

"시대가 어느 시댄데 아직도 깃발 들고..."라는 비난이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던 90년대를 지나 지금은 2000년대이고, 우리는 2000년대의 청년들입니다. 우리 시대에는 우리 스타일의 대안을 찾아야 한다는 방향을 잡기까지 10년 내지 15년의 세월이 걸렸습니다. 

헛된 시간이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만, 그것을 만회하고 싶은 기분이 든다면 앞으로 더욱 힘내서 서두르면 될 일입니다.    
 
 
상병 송희석 (2006/04/06 13:55:29)

강록/ 안타깝게도 이 사회의 '구조'가 어떻게 잘못되었는지 분석만 되었을 뿐입니다. 그것도 나름대로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말이죠! 아직 어떻게 잘못되었는지 더 분석도 분석이겠지만 그 분석에 따른 실천은 별로 보이지도 않더군요. 그래서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 할수 있는 것이죠. 허나 분석과 동시에 실천하는 사람이 단 한명이라도 존재한다면 그 나름대로 바뀌는 것입니다. - 그런 사람이 존재는 합니다. 아주 간혹 뉴스에서 보이곤 하죠. 

포스트 모더니즘을 무너트릴 상대가 바로 모더니즘이란 엉뚱한 소리를 한 학자도 있는데, 세삼 그 학자에 말이 요즘 틀리진 않다고 봅니다. 결국 강록님이 말하는 '나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말이 결국은 '실천'으로 귀속될수밖에 없을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시간을 그 시대에 맞게 실천했습니다. 이제 2000년이니 2000년시대에 맞게 실천하면 될뿐입니다. 그것이 제가 말하는 어떻게? 입니다. 공동체 해야되나 말아야되나 가 아닌 '구조'에 대한 나의 생각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가 중요한 것이라 저는 판단합니다. 

정말로 궁금한것은 대체 어떤 '공동체' , 아니, 누구를 위한 '공동체', 아니 , 누구에 대한 '공동체'인지 알고 싶습니다. 아니 더 걱정되는것은 그 '공동체'조차도 구조를 갖고있는것에 대하여 심히 답답함을 느끼는것입니다. 그냥 제 생각이 이런것입니다. 

아무튼 답글 잘 읽었습니다.    
 
 
병장 김강록 (2006/04/06 14:38:41)

희석 / 초점은 구조를 비판하는 층위와 개인의 실천을 다루는 층위가 서로 다르다는 것에 맞춰졌으면 합니다. 가령, 우리는 양극화니 분배 불균형이니 하는 각종 경제 구조의 문제들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헌데, 막상 그런 내용을 매체를 통해 접하거나 혹은 스스로 깨우친 뒤에 올커니! 하고 무릎을 치고 뒤돌아서면 정작 우리가 그 문제에 대해 무엇을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신, 존재, 도덕과 같은 형이상학적 문제들을 '말할 수 없는 것들'이라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우리 삶 속의 문제들을 해결하기보다는 더욱 아리송하게 만들 뿐이며, 그런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 언어의 사용에 한계를 긋고자 했던 것입니다. 구조에 관한 담론 역시, 우리의 일상 너머에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사회과학 내부의 형이상학'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물론 구조가 우리의 일상을 이렇게 저렇게 지배하고 있지 않느냐, 하는 얘기라면 저 역시 이견이 없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얼마나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와닿느냐'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회 문제에 대해서, 소수의 정책 입안자들에게나 와닿을 만한 방법을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유효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과거 대학생들이 예비 정치 엘리트 정도의 위상과 마인드를 가지고 있던 시절의 이야기일 뿐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 일상의 언어로, 일상의 층위에서 대안을 제시해야 합니다. 그 대안은, 개인에서 출발해 마침내 거시적인 구조에에도 영향을 미치기까지 공동체라는 징검다리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보다 구체적이고 실현 가능한 방법이 될 것입니다. 

과거에 있었던 공동체에는 많은 문제가 있었고 그것들의 부활에 대한 희석님의 우려는 정당합니다. 하지만 또 달리 생각하면 우리가 공동체에 거리를 두기 시작하면서 잃어야 했던 것 역시 이제는 다시 되돌아보며 생각해 볼 때도 되지 않았나 합니다.    
 
 
상병 송희석 (2006/04/06 14:51:14)

강록/ 문제는 대다수가 구조를 비판하는데 '공동체'를 사용한다는 겁니다. '공동체'를 사용한다는 말이 좀 이상하면 '공동체'를 주장하는 거라고 합시다. 구조에 대한 이야기를 단순히 '형이상학적 담론'이라고 칭하고 그것이 명확하지 않다는 이유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면 결국은 명확한것은 오히려 아무것도 없을것입니다. 

어떤 사회문제를, 각각 개개인들이 수많은 방법을 대안으로 제시한다면, - 예전에는 일류 엘리트라고 불리우는 지식인들만 했었지만 2000년대 들어서 인터넷지식인들이 늘어남과 동시에 지역도 타파해버린 엘리트들이 넘쳐나난 판국임을 생각하면 - 결국 구조는 그러한 지식들로 인해 포화상태가 되며 스스로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일상언어로 표현시켜서 대안을 제시하자'에는 저역시 공감은 하지만, 그것역시 누구에 일상언어인지 의문이 들뿐입니다. 개인이 출발할때 징검다리 없이 모두가 각각 다른소리를 낸다면 그 소리는 각기 엉커져서 목적지에 쉽게 도달할수 있지만 '공동체'라는 징검다리때문에 각기 다른소리가 혼합되어 보다 큰소리가 목적지에 갈까봐 저는 두려운것입니다. 

공동체에 거리를 둘수록 그것이 바로 새로운 희망이 다가온다고 믿고싶습니다. 강준만,홍세화,박노자,진중권등 이런양반들이 한 공동체안에 있다면 참 재미없듯이 말이죠!    
 
 
병장 김강록 (2006/04/06 15:49:19)

희석 / 구조에 대한 담론보다 더욱 명확하고 와닿는 것은 바로 제 삶 속에서 직접적으로 겪는 문제들입니다. 가령 내무실에 함께 생활하는 병사들이 많은데도 서로 대화도 없고 고참 한명 전역한다고 아쉬워하는 사람 하나 없는 남남같은 분위기가 바로 명확한 것입니다. 복학하면 다들 예전의 기백은 어디 갔는지 쥐죽은 듯이 공부만 하고 있는 상황에서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고민이 바로 명확한 것입니다. 제 삶의 존재론이 묻어나는 문제들이 바로 명확한 것들입니다. 

그런데, 이거 좀 힘이 빠지는데요. 본문에서 쭉 얘기했던 게 공동체의 붕괴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점들과 그것의 해결책에 관한 내용이었는데,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지금까지 대체 뭘 한 건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제 얘기는 무조건 옳으니 반론은 곧 나의 힘빠짐이다, 라고 말하려는 건 아니고 또 그렇게 말해서도 안되는 거겠죠. 

다만 그렇다면 1) 공동체의 붕괴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들로 위에서 얘기한 것들은 사실 관계에 비추어 합당하지 않다. 사실은 이렇다, 라거나 혹은 2) 그런 문제점들이 새롭게 발생했다는 사실은 인정하지만 해결책이 적절하지 않다. 더욱 적절한 해결책은 이거다, 라거나 어느쪽이든 희석님께서 생각하고 계신 보다 구체적인 답변을 부탁드립니다.    
 
 
상병 엄보운 (2006/04/06 16:24:56)

글 안에서 유추해낼 수 있거나 뉘앙스를 느낄 수 있는 내용에 대한 질문의 경우, 다른 의도가 있다면 모를까, 그런 질문을 남기는 건 실례가 아닐까 합니다. '질문을 위한 질문', 단지 '아니오'라고 말하기 위해서 던지는 질문은 상생의 묘를 해치는 행위겠지요. 

개인적으로는, 학술적인 내용의 토론에서는 질문에도 일정 이상의 정합성을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상병 송희석 (2006/04/06 18:52:53)

강록/ 아무래도 삶을 다른방식으로 살았던 저와 대화때문에 곤욕스러운점 일단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가령 내무실에 함께 생활하는데, 어떠한 '문제'에 대해서 '공동체'로서 접근을 하자 라는것을 저는 반대하고 싶은 것입니다. '문제'에 대한 해답이 모두 같다면 그것은 '공동체'로서 접근하는 방식은 매우 타당하다고 저역시 생각합니다. 하지만 다른 해답을 갖고있는 사람이 단 한명이라도 존재한다면 전 '공동체'로서 접근하기를 거부하는것이 저의 견해입니다. 

힘이 빠진다는것은 아무래도 본문과는 상반되는것과 같은 이야기때문이라 생각되지만, 저는 가장 근본적인 생각에 대한 반대견해를 표시하는 것입니다. 과연 강록님이 말한 문제점이 과연 '공동체붕괴' 때문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의식의 관념화', '이데올로기 붕괴에 대한 무방비 노출, '무력화'는 '공동체'를 통해서 회복시키는것이 아니라 '실천을 행하는 용기'로 회복시키는 것이라 판단합니다. 

바로 '그러한 문제점을 해결안하는 용기가 부족함'으로 인한 '발생결과물' 인거라 저는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여기서 저하고 견해가 달라집니다. 이것을 '공동체의 붕괴'로 보는 강록님 시각과 '문제해결을 안하는 용기부족'을 보는 저로 인해 지금 소통이 원할하게 안되는것처럼 보이는것 같습니다. 이점을 해결하기 위해 부연설명을 더 해보자면 

'의식의 관념화'은 삶의 구조를 어떻게 할까 고민만 하기 때문에 생겨난 결과물이고, '이데올로기에 대한 무방비노출'또한 스스로가 빠져나올수도 있지만 안빠져나오기 때문에 생겨난 결과물이고, '무력화'역시 '무력하지 않을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력해버리는 용기부족'때문에 생겨난 결과물이라 보는것입니다. 

아마 1)번에 해당하는 답변을 드린것 같습니다. 이로서 2)번중 더욱 적절한 해결책은 바로 '공동체 붕괴를 통해 실천과 용기를 갖고 각 개인이 행동하자!'라는 것이 저의 견해인것입니다. 
이정도면 답변이 된듯!(요즘 저도 친절한 글쓰기 라는것에 대해 조금은 고민하고 있습니다.) 

보운/ 윗 글로 해결은 된듯합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병장 김강록 (2006/04/07 10:20:33)

희석 / 좋습니다. 희석님의 생각 잘 읽었습니다. 그러니까 희석님의 얘기는 결과적으로 공동체의 부활을 말하는 것은 새롭다기보다는 과거회귀적인 시도이며 '공동체'로 이름 불려지는 순간 거세되는 각 개인에 대한 우려로 요약될 수 있겠군요. (그렇게 이해해도 되겠습니까?) 역사적 경험에서 나온 그러한 신중한 자세는 저 역시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만. 하지만 저도 '새로운 공동체'라는 말을 무슨 로마 시대 중보병 대형 같은 뜻으로 한 건 아니었는데, 그래서 좀 섭섭했어요. 

힘이 빠진다는 건 희석님께서 반론을 하셔서가 아니라(반론에 힘이 빠질 것 같았으면, 그럴 것 같으면 이짓이 제 취미생활이 되지도 않았습니다), 오가는 이야기에 어떤 접점이 없이 서로 허공을 향해서 떠들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희석님께서는 실천으로의 이행이 늘 좌절되는 이유가 개인의 용기 부족, 내지는 개인의 의지 부족 때문이라고 보고 계십니다. 하지만 제가 본문에서 쭉 했던 얘기가 바로 그 이유가 뭔가, 그것은 "공동의 가치와 규범을 담보하는 네트워크의 재구축을 의미하며, 다시 더 나아가 그것을 우리가 변화시키고자 하는 세상에 관철시킬 수 있는 힘의 구비를 암시"하는 공동체가 부재하기 때문에 개인은 여전히 무력한 채로 남아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애써 공동체와 거리를 두려고 하시지만, 희석님께서 말씀하시는 식으로 해서 개인의 목소리가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 역시 어쨌든 그것을 뒷받침할 네트워크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당장 예로 드신 진중권, 홍세화, 박노자 같은 분들만 해도 그분들이 어디 허허벌판에 홀로 외로이 서계시는 분들입니까.) 결국 희석님의 말씀은 반론이라고 하기보다는, 제가 처음 전제했던 사항들에 대한 동어반복으로 들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파리들이 이어지면서 본의아니게 초점이 거시적 관점에서의 공동체의 기능적 측면에 맞춰진 거 같은데, 사실 그건 제가 말하고자 했던 바의 절반에 불과합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당장 저 자신의 구원입니다. 그 가능성을 지금껏 함께 했던 친구 선후배들에게서 발견했고, 나중에 다시 그들 품으로 돌아가면 예전보다 더 가까이 마음을 열어놓고 지내고 싶습니다. 아, 친구들이 보고 싶네요.    
 
 
상병 송희석 (2006/04/07 12:46:37)

강록/ 현재 우리는 수많은 곳에서 '공동체'라고 불리우고 있지만, 그 '공동체'에서 각 개인의 목소리를 계속 함구하고 있는것에 대한 우려입니다. 강록님과 대화중에 계속 접점에 머무를수 없었던 이유는 저는 '공동체로 인해 개인의 용기 부족 -> 공동체 붕괴' 이라고 생각하며, 강록님은 '개인의 무력함 -> 공동체를 통한 부활'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접점이 나올수가 없는것입니다. 

개인의 목소리가 도달하는데 그것이 네트워크 따위는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예로든 그양반들은 인터넷이라는 네트워크라고 말할수 있지만, 네트워크가 없다고 해도 개개인의 목소리를 얼마든지 낼수 있는사람들입니다. 솔직히 불만스러운 부분도 많이 있지만 그것은 나중에 논하고) 네트워크에 묶여있어서 지금 더더욱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도 듭니다. 

왠지 제가 괜히 강록님에게 딴지 아닌 딴지건것처럼 되버리는 바람에, 느낌이 이상하긴 한데, 뭐 이런일 한두번 당하는것도 아니고, 꼭 품으로 돌아갈필요가 있을까? 라는 생각도 들며, 지금 혼자 떨어져있는 강록님 모습이 더 좋아보이는것 같다는 생각이라고 하면 되지 않을까? 이며, 혹은 , 당시 강록님이 이야기하신 남들 다 짜장면 먹는다고 해도 계속 짬뽕 우기는 것 또한 공동체를 파괴하고 개인의 목소리를 크게 낼수 있는 분이 아닐까? 라는 생각도 해보며, 그냥 그렇다는 것이며, 이정도로 우리의 소통을 끝마치면 될것 같습니다. [ 아무튼 좋은 대화 나누었습니다. ]    
 
 
병장 김강록 (2006/04/07 13:38:06)

희석 / 다른 부분은 됐고, 한 가지만 더 해명하고 저도 마무리 짓고자 합니다. 그때가 고3 때였는데, 제가 우긴 것은 짬뽕이 아니라 간짜장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짜장면으로 통일하려다 저 때문에 투덜거리며 간짜장을 먹었던 大영일고등당구스쿨의 공채 24기 문래동 최프로, 개봉동 신프로, 그리고 목동의 정프로는 여전히 저의 소중한 친구들입니다. 이것만은 꼭 분명히 해두고 싶었습니다.    
 
 
상병 송희석 (2006/04/07 13:55:25)

강록/ 아! 저의 기억력에 문제가 있었던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이건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일병 김경수 (2006/04/08 05:33:28)

혹시...목동의 정프로...혹시 정창훈?!?!    
 
 
병장 김강록 (2006/04/10 09:12:19)

경수 / 쪽지 보내드렸습니다.    
 
 
상병 조석우 (2006/04/15 21:52:23)

뭐... 글과 관계 없는 이야기지만... 
영일고등학교라... 이런데서 그 단어를 만날 줄 몰랐네요. 
반갑네요... 
영일고 물리부 공채 4기(사실 당시 물리부에서는 스스로 당구및 스타부 라고 했었죠) 목동의 돌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