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운 사회학 3부-허공에 매인 십자가는 우릴 구원해줄까 
 
 
 
 
쉬운 사회학 3부-허공에 매인 십자가는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을까.


어찌저찌 쉬운 사회학 3부, 쉬운 사회학 시리즈의 마지막까지 왔다. 우리 시대의 위대한 사회학자 앤터니 기든스에 대한 오마쥬[존경의 차원에서 하는 패러디]로 나는 3부까지만 쓸거다. 그의 명저 'Sociology'는 3판이 아무래도 최고의 판본이었으니까, 하는 것은 물론 농담이지만. 아무튼. 나름대로 1,2부와의 내적 연관성을 지니는 3부니까 아무쪼록 재미있게 읽어주었으면 한다. 이번 3부의 주제는 종교. 라고는 하지만 사랑이라도 상관 없고 연애라도 상관 없는 그런 이야기. '순수하지 않은' 의도, 내지는 구조의 영향을, 순수하지 않은 역사적 구성체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에 대한 나의 생각들.

본문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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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저는, 뻔하디뻔한 종교적 상징에 경배하고 울며 매달리면서 삶의 의미를 찾는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해둬야 할지 고민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할까. 저건 역사적 구성물인데. 사람이 만들어낸 건데. 그것이 허울이라도, 그 허울로 위안받고 삶의 의미를 찾는 사람들 앞에서 그걸 홀라당 벗겨 버리는 건 과연 온당한 짓일까. 제 결론은 "아니다"였습니다. 물론 그걸 그렇게 해석하는 제 시각이 제한받아서도 안되지만, 그 허울 속에서도 나름의 의미를 찾는 사람들의 시선도 존중받을 필요가 있다는 거였죠... <아름다운 청년 김대현> 中 87p.

제법 많은 사람들이 종교를 가지고 있고,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종교에 매달린다. 서울의 밤은 모텔의 간판과 십자가로 불타오르고, 영화관 하나 찜질방 하나 없는 市답잖은 도시, 태백시에도 교회와 중국집은 넘쳐흐른다. 아니, 특정 종교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종교 전반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데 이게 왜 이러지. 아무튼, 오해하지는 말자. 굳이 십자가를 거론하고 싶은 것은 아니니까. 이슬람의 초승달이어도 좋다. 교회가 아니라 사찰이어도 좋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저 그런 종교에 대한 이야기니까. 지난 사회학 칼럼들과 마찬가지로, 몇 몇 구체적인 단어들에 혹하면 안 된다. 어디까지나 가벼운 사회학 일반론의 문제에서 받아들이자.

그런데 종교란 무엇일까. 무엇이길래 그리도 많은 사람들이 종교를 가지는 것일까? 라는 질문에 대한 구체적인 대답을 회피하고도 종교를 논해 볼 수 있는 것이 '관계' 내지는 '맥락'을 중시하는 사회학의 강점이다, 라고 어디가서 사회학 전공자한테 이야기를 하면 귀싸대기 맞을 공산이 높다. 하지만 어차피 나야 뭐 사회학 전공자도 아니고, 어쩌고 저쩌고 하니. 종교 자체에 대한 고민을 심도있게 진행해보지도 않았고. 여기 이 글에서 전제하는 종교는 그저 세간에서 이야기되는 '일반적인 종교'다. '나의 종교는 흡연이며 글쓰기입니다. 종교인이 식전에 기도를 하고 싶어 하는 것 처럼 나는 식후에 담배를 피우고 싶습니다. 주말에 종교 행사를 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나는 글을 쓰고 싶습니다' 따위의, 누군가가 이등병 시절 화장실에서 몰래 끄적거렸을 법한 그런 헛소리는 하지 말자. 기독교라거나, 불교라거나. 라엘리안 무브먼트[외계인과 관련된 영적인 종교운동]라도 상관은 없고, 악마교라도 좋다. 

그런 종교의 핵심은 무엇인가. 종교적 관점에서 종교는 물론 성스럽고 신비스러운 무엇이겠지만 2부에서 밝힌 것과 마찬가지의 이유로 나는 종교를 다른 차원-소위, 사회학적 차원-에서 바라볼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차원에서 종교 일반은 '절대자의 존재를 전제로 한 신앙체계'로 정의될 수 있다.

한번 이런 가정을 해 보자. 예수 그리스도란 인물은 사실 사기꾼이었다고(자꾸 종교 이야기를 한다고 하고 기독교에 한정된 어휘를 사용해서 미안하다. 사실은 이게 '제유법'이라고, 상당히 고급스런 비유법의 한 가지를 내가 문법적으로 활용하는 과정에서...하는 헛소리는 그만두고 아무튼 기독교도들에게 진심으로 죄송스럽다). SM 매니아[사도/마조히즘(가학적/피학적 특수성욕)적 성욕에 천착하는 사람들]여도 좋고, 배설물 페티쉬[배설물, 이라는 물질적인 실체로부터 성적인 흥분을 느끼는 특수성욕]라도 가정해도 괜찮다. 그래도 당신은 기독교에 대한 신앙을 유지할 수 있는가?  만일 내가 기독교도라면 나는 그러한 문제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를 믿을 것이다(결코 내가 SM 매니아라거나 배설물 페티시스트라거나 하는 류의 이유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기독교'의 여러 모습들로부터 내가 받아들인 '기독교'라는 총체지, 그리스도 존재의 절대성이 아닌 것이니까. 물론 기독교의 총체에서 그리스도 존재의 절대성이 아주 중요하다고 파악한 당신이라면 그렇지 않을 것이지만. 절대자의 존재에서 구원의 가능성을 받아들이는 것을 종교의 핵심적인 부분이라고 받아들인다면 그렇겠지만 '전반적인 신앙/가치관 체계'를 종교의 핵심이라고 생각하는 내게, 절대자의 존재는 그렇게 커다란 무엇이 되지는 않는다. 물론 실제로 예수가 SM 매니아였더라면 기독교에 대한 신뢰가 굉장히 떨어지기는 하겠지만.

하지만 기독교의 핵심은 예수의 전체적인 삶의 모습과, 그의 가르침, 그리고 역사적으로 구성된 종교의 가치체계가 아닌가?

그렇기에 결국 종교의 핵심은 그것이 갖추고 있는 '총체적인 가르침'에 있다는 생각이다. 내가 기독교도인 대신 불교도인 이유는 부처가 예수보다 잘 생겼다는 이유 때문이 아니니까. 나의 '영성'이 기독교적 가르침보다는 불교적 가르침이 더 내게 필요한 무엇이라고 그렇게 느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의 확장에서, 아름다운 청년 김대현 씨의 표현을 빌어 '경배하고 울며 매달리면서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은, 사회적 구성물이든 무엇이든 상관이 없는 것이 된다. 중요한 것은 절대적 존재 한 명도, 성서의 모든 구절들도, 기독교의 역사도 아니다. 그러한 모든 것의 유기적 총체인 '거대한 가치체계'가 종교인 것이다. 조금은 극단적인 가정으로 시작한 거친 논리 전개지만 아주 틀릴 것은 없다는 생각이다.

물론 종교를 이런 식으로 바라보는 것은 어쩌면 상당히 反종교적인 입장이 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은가. 종교는 결국 역사적으로 만들어진 체계인 것이다. 이것은 가치관의 문제나 당위의 차원이 아닌 실재하는 현상이다. 그리고 비단 종교만 그러한가? 국가는, 민족은, 아니 하다못해 인간도 역사적 구성체가 아닌가. 왜, 그 푸코가 그러지 않았는가. 인간도 발명된 개념에 불과하다고. 그리고 그러한 발명된 인간의 역사에 선행하는 특정한 종교는 존재하지 않는다(원시 신앙과는 별개의 문제이다). 결국 종교는, 김대현의 극단적인 어휘를 빌려 이야기해보면 하나의 '허울'이며 '역사적 구성체'인 것이다. 내가 쓴 이전의 사회학 칼럼에서 '사랑'이 그랬던 것처럼. 

그런데 '허울'과 '본질', 발명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차이, 그것이 무슨 의미를 지니는가?

종교든 사랑이든 이념이든 까치 까치 설날이든, 그것이 역사적으로 구성된 무엇이든 본질적이고 영성적으로 자생된 절대적 존재든 그야말로 whatever, nevermind다. 초역사적인/탈역사적[역사를 초월한, 그러니까 역사 이전부터 역사가 사라진 이후에도 존재할/역사적 맥락과 상관없이 공시적으로 존재하는]인 인간 내면의 영성에 실재하는 무엇인가 알 수 없는 에너지만이 순수하고 의미를 지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만들어진 것이면 어떻고 그렇지 않은 것이면 어떤가. 그것이 어떤 맥락 속에서 탄생된 것인지, 그렇게 탄생된 그것이 실제로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지, 그리고 그것이 세계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게 되는지가 진정 중요한 것이 아닌가. 특정한 어떤 종교가 중요한 것은 그 종교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가'하는 것과, 그 종교가 '무슨 짓꺼리를 하는가'의 문제가 아닌가. 종교도 하나의 지적인 구성체인 이상, 그러한 구성체가 자신의 내적인 논리성/미학성을 가지고(그러니까, 억지 주장이나 말도 안되는 궤변을 늘어놓으면 안된다), 그것이 인류 공영에 이바지할 수-있기를 바라지만 김대현 씨의 말대로 남에게 피해만 주지 않으면-있으면 그것으로 된 것 아닌가. 

종교가 역사적 구성물이든, 실재하는/실재했던 절대자의 권능에 의한 것이든, 그것이 정말 뻔한 이야기를 밥먹듯이 토해놓든 상관 없다. 그것을 통해 자신의 시각을 구성하고, 자신의 비루한 삶을 위안받고, 삶의 지표를 얻을 수 있다면 종교는 그 나름의 가치를 지닐 수 있다. 물론 역사적으로 종교의 이름으로 구원받은 이들보다는 종교의 이름으로 살해당한 이들이 더 많다. 또한 현존하는 종교도 얼마든지 그러한 방향에서 이용당할 수 있다. 이는 '주장'이 아닌 '현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현실에 긍정의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종교를 고민하는 당신이 그러한 현실들을 잊지 않는 한, 종교에는 일말의 가능성이 새로이 태어날 지도 모른다. 사회에 조종당하든 말든 상관 없다. 당신이 조종당한다는 것을 깨닫고, 그러한 조종의 메커니즘을 아는 상태에서 살아가는 삶과 그렇지 않은 삶은 정확하게 다른 그러한 삶인 것과 마찬가지로.

하지만 역시 이와 관련한 인식-남을 억압하는가 그렇지 않은가/논리적으로 정합적인가 그렇지 邦별× 관련한-은 쉽지 않다. 논리학이야 원래 어려운 것이고. 억압과 관련해서는 내가 만약 어떤 봉건적 구조를 가진 국가에서 귀족으로 태어났다면, 나의 모든 행위는 '구조'에 의하여 결국 국민에 대한 압제 행위에 불과하게 되는 것이 사회니까. 내가 아무리 착한 녀석이라도, 나의 귀족관이 아무리 '노블리스 오블리제[귀족은 사회적 책임을 져야 한다]'류의 것일 지라도. 이것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당신이 종교관이 어떠한 것인지 나는 알지 못하지만, 전체 종교의 행위가 압제 행위에 불과한 세상이라면 당신은 종교에 대해 '근본적인 고민'을 해 보아야 할 것이다. 순진한 눈망울로 '나는 주께 내 몸을 바치리라'라고 하는 것이 당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나는 옆집 순이를 목졸라버리겠습니다'라는 것을 의미하게 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근본적인 고민. 당신의 종교를 버릴 것인지, 당신의 종교를 재구성할 것인지. 뭐 꼭 이런 것만은 아니고, 당신 뜻 내키는 대로. 아무렇게나. 그러나 그것이 남을 억압하지 않는 방향으로. 그리고 궤변을 늘어놓지 않는 방향으로. 그리고 이러한 고민과 관련하여, 사회학은 커다란 힘이 될 수 도 있을것이다 (또 이상한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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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엔 교육학 3부작이다. 시이나 링고[세계에서 두 번째로 예쁜 여성이자 허원영과 나의 음악적 취향이 일치하는 부분]의 밴드 동경사변의 첫 앨범명이 '교육'인 이상, 나는 나의 전공을 배반할 수가 없다. 그 전에 사회학 칼럼 시리즈에 대한 변명도 좀 하고 해야 할 것 같기도 한데. 물론 반 이상 농담이다. 

  
 
 
 
상병 조용준 (2006/03/31 13:05:16)

일단 선리플 후감상! 
다음 칼럼이 기대되네요(웃음)    
 
 
병장 육이은 (2006/03/31 13:19:03)

교육학 3부작. 다 보고 전역하게 해주시길.    
 
 
병장 주영준 (2006/03/31 13:56:10)

물론 반 이상 농담이다 : '다음엔 교육학 3부작이다' '그 전에 사회학 칼럼 시리즈에 대한 변명도 좀 해야 할 것 같기도 한데' 는 농담 부분이고 
'시이나 링고의 밴드 동경사변의 첫 앨범명이 '교육'인 이상, 나는 나의 전공을 배반할 수가 없다'는 진담 부분입니다. 제가 전역하기 전에 교육학 3부작따윌 쓰게 될지가 의문인데요. 펫.    
 
 
상병 송희석 (2006/03/31 13:57:52)

이글에 딸릴 대현님의 답글을 기대하는 바이며, 아울러 교육학 3부작은 전혀 모르는분야 이므로, 입다물고 감상만 하겠습니다.(웃음. 근데 심리학 3부작이나, 철학 3부작이나, 종교학 3부작 혹은 법학 3부작같은거 쓰실분 없으시나? 아니면 양자역학 3부작도 괜찮은데...)    
 
 
 상병 박진우 (2006/03/31 15:58:27)

사.회.학 적인 접근이군요!(...) 
아... 그렇게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쇼크로 쓰러질듯한 단어들과 개념들이... 
반 이상 농담이라고 하는 영준님의 변명으로 스스로 세뇌시키는 수밖에...    
 
 
상병 안대섭 (2006/03/31 16:03:22)

앨범명 '교육'에서 에로티시즘이 느껴지는건....(좌절)    
 
 
상병 조주현 (2006/03/31 16:49:54)

제가 좋아하는 입장이란걸 느끼다가 업무종료시간이라 일단 나중을 기약합니다.    
 
 
병장 김대현 (2006/03/31 17:59:45)

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라고 끝낼려다가 희석님의 날카로운 눈쌀에 밀려 그만. [웃음] 

일전에 말씀드린 것이기도 하지만, 저는 제 믿음이나 감수성을 부끄럽지 않게 만들고 싶거든요. 이를 위해서는 그에 대한 사회학적 검증의 눈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허울이라도 그대로 뒤집어쓰고 살면 안될까? 그것까지 꼭 벗겨내야겠어?"라는 말이 동정을 살 수 있으려면, 혹은 울림을 가질 수 있으려면, 그 허울에 피해받고 있는 사람이 없어야겠죠. 저도 모르게 누군가를 짓밟고 있는 주제에 그런 멘트로 없어보이는 척 하는 건 기만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치 상처를 드러내는 것이 누군가의 상처를 억압하기 시작하면(이를테면, "안 겪어본 놈이 뭘 알겠어?" 식의.) 그 상처는 더이상 상처라고 불릴 수 없듯이 말이죠. 
감수성이 감수성이라고 , 믿음이 믿음이라고 제대로 불려지기까지는 많은 난관들이 존재합니다. 오히려, 칼지른 논리를 다루는 것보다 더 조심해야 하는게 저런 것들일지도 모르죠. (사실 그래서 제가 요즘 글을 못쓰겠습니다 [먼산]) 

더불어 같은 맥락으로 종교는 호전적이어지면 안된다고, 최대한 없어야하고, 없어보이는 척 해야 한다고 봐요. 특별한 시대적 이유가 있지 않은 한, 종교가 "있어보이는 척" 할려고 하는 것만큼 구린 것도 없다고 생각하구요.    
 
 
상병 엄보운 (2006/03/31 18:23:13)

영준씨의 글 호쾌하군요. 시원시원하게 잘 읽었습니다.    
 
 
 병장 박준응 (2006/04/01 08:54:53)

가끔 판타지 소설에 나오는 '고지식한' 프리스트들을 바라보며 몇 가지 의문을 느낀 적이 있습니다. 
(제 인생의 8푼은 판타지 소설이 키웠답니다. 쿨럭) 

그들은 왜, 
'신의 뜻을 받들어 이단자를 처단하고 미워하는 것이 진정으로 신의 뜻인가?' 
'그들은 인생의 모든 가치와 즐거움을 버려서까지 신의 뜻에 맞춰서 살아야 하는가?' 
'신의 뜻을 받드는 것이 그들에게는 정말로 행복한 일이었을까?' 
'종교라는 것이 정말로 신에 의한 것인가? 아니면, 인간의 마음에 있는 것인가? 이 것 중에 정말로 믿어야 할 것은 무엇인가?' 

등등의 의문들이 사제의 길로 향하고자 했던 제 7년간의 걸음을 결국 세상으로 돌려놓았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는 여전히 저는 대답을 찾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찾는다면 다 버리고, 사제가 될지도 모르죠(쿨럭) 지금으로서는 별로 가능성이 없겠지만. 

하여튼, 문득 영준씨의 '지적'이 이런 해묵은 의문들을 푸는 해답의 실마리가 될 수 있을 것도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댓글 남깁니다. 사회학적으로는 별로 생각해본 적이 없거든요. 해봐야 겠어요. 
결국 하고 싶었던 말은 말이죠. 잘 봤다구요. 이 3부작. 
교육학 3부작도 기대할게요.(笑)    
 
 
상병 김상엽 (2006/04/01 23:31:50)

인트라넷이 심히 제한되는 환경 속에서도 3부작 모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하지만 재밌단 감정과는 별도로 사회학만의 개성을 느끼기엔 좀 불충분했습니다. 아마 제 부족한 능력 탓이겠지만. 
사회학적 환원주의에 대해 짚고 가면서, 분석적이고 비판적인 시각으로 -사회학적이라는- 사랑이나 종교를 그려볼 수 있음을 보여주는것에는 감명을 받았지만, 그런 과학적 혹 사회과학적 연구방법이 심리학이나 생물학에서 인간 사회를 하나의 연구소재로 삼는 것과 특별히 달라보이지 않았어요. 최근의 논의가 학제적 성격 - 사회심리학, 사회생물학, 진화심리학, 인간사회행동학 - 등을 뛰어넘어 아예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어서인지 모르겠어요. 

사회학3부작이라는 타이틀에서 기인한 태생적 문제일 수도 있지만 
"사회에 의해 조종당한 것이다"는 설명으로는 
글 곳곳에 나타난 "경제학적 차원의 설명, 도덕적 차원의 설명, 심리학의 영역 등"을 
포섭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것이 사회학의 독자적 영역을 보이기엔 역부족이지 않은가요.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일병 김병완 (2006/04/03 09:34:16)

잘 읽었습니다. 흡연이나 글쓰기와 일반적인 종교를 구분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한 차이는 아무래도 절대자의 유무겠지요(뭐 담배가 나의 절대자요 하면 할말이 없겠지만서도..) 저같은 불가지론자에게는 신이 존재하는가는 알수도 없고 알아야 할 필요도 없는 문제지만, 한가지 확실한건 신이 있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아닐까요. 신이 아닌 사회를 알고자 하는 사람들이 종교를 사회적 산물로써 공부해 봐야 할 이유도 바로 그 지점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병장 정민혁 (2006/04/03 16:48:16)

사람 때문에 기독교를 믿는 게 아니랍니다. 적어도 저와 제 가족의 경우는..(웃음) 
종교와 교파를 초월하여 존재하는(전 우주에서 통용되는 물리학의 법칙과도 같은) 진리와 절대 의지가 존재한다고 믿고 있으며, 그것을 이해하는 방식은 사람마다, 사회마다, 민족마다 다를 수 있다는 점도 이해하기에..사고의 깊이는 사람마다 차이가 있으며 언어 체계 또한 유한한 것일 수 밖에 없기에.. (알라 또한 하나님이란 뜻인데.. 같은 하나님을 두고 머리 터지도록 싸우고 있는 지구 반대편 사람들을 보면 너무도 가슴이 아프네요..) 
그런데도 왜 너는 기독교만(?) 믿고 있냐구요? 허헛, 누군가 제게 그 이유를 묻는다면 저는.. 
'기독교의 옷이 제 몸에 맞아서(진리로 나아가는 데 있어 제게 익숙한 방식이어서)'라고 대답하고 싶네요..    
 
 
병장 주영준 (2006/04/05 09:46:50)

상엽 / 장문의 글을 끄적거리다가 날아가버리는 바람에[묵념] 짧게 핵심만 쓰겠습니다. 학제간 연구를 거론하셨는데, 학제간 연구를 전제한 상황에서 사실 학문의 영역은 참 애매한 문제가 되어버립니다. '무엇을 다루는가'하는 학문의 '영역'과 '어떻게 다루는가' 하는 학문의 '방법론'모두 한 분과 학문의 독자성을 담보해주기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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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학제간 연구를 전제하기 이전부터, 사회학은 단일 학문 내적으로 이미 학제적이라는 것, 그것이 사회학의 특징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미 그것의 영역은 '사회'라는, 경제와 윤리와 심리와 철학이 중첩된 애매모호한 영역이며, 그것의 방법론은 '과학적/체계적 방법론'이라는, 수많은 학문들이 사용하는 방법론입니다. 소위 '학제적 연구'라는 개념 발생 이전부터 이미 학제적이었다는 것이 사회학의 특징이라고 생각합니다. 고전 사회학자인 꽁트가 '사회학은 만학의 제왕이다'라고 질렀던 것은 아마 이런 이유이리라 생각되구요(아닐 수도 있습니다. 사회실재론/사회학주의의 극한의 입장을 대변하기 위한 이유인 것 같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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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논의나 학제간 연구를 전제하면, 모든 학문은 특색을 주장하기 힘들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그 이전부터 사회학의 독자 영역이라고 주장할 만한 어떤 영역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생각입니다. 사회학은 사회적 실체를 규정하고, 그러한 것에 대해 체계적 방법론으로 탐구하는 것, 이라는 일반적인 사회학의 정의. 도 이런 식이구요.    
 
 
 병장 노지훈 (2006/04/05 11:42:53)

<아름다운 청년 김대현 >까지는 이해하는데 87p는 뭐란 말인가 푸훗~    
 
 
상병 박종민 (2006/04/05 16:41:10)

<아름다운 청년 김대현> 위시리스트 추가.    
 
 
병장 정치훈 (2006/04/30 12:09:32)

사회학은 형이상학적인 면을 어느정도 배제 한 체 형이하학적인 면을 다루는 학문이라는 말씀을 하고 싶으시다고 제 멋대로 생각하면 논리적 비약인가요?    
 
 
병장 주영준 (2006/04/30 15:34:50)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에 대한 정의의 차원으로 문제를 소급하면 희석씨가 좋아할 법한 논쟁이 진행될 것 같아서 그런 짓은 하지 않고, 그냥 편하게 이야기하겠습니다[웃음 to 희석]. 글쎄.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이상학이나 형이하학이라는 개념어를 사용하셨으니 한 마디쯤은 하고 넘어가야겠네요. 저는(기본적으로 사회학이 형이상학에 속하는가 그렇지 않은가를 판단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저는) 만일 둘 중에 양자택일만을 해야 한다면 사회학은 차라리 형이상학에 속한다고 봅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관계의 학문'이기 때문입니다. 각각으로 존재하는 물 내부의 무엇인가를 넘어서, 물과 물 사이의 관계성을 기반으로 하는 학문이 사회학인데, 그건 차라리 형이상학에 가깝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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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마 치훈 씨가 제게 하고 싶었던 문제제기는 그런 게 아닌 것 같습니다. 아마 제가 종교를 다루는 방식이 형이하학적으로 보이기에 그러한 문제를 제기하신 듯 하네요. 네. 이 글에서 저는 분명히 종교를 종교 내적인 어떤 가치를 가진 무엇으로 분석한 것이 아니라, 사회 속의 관계성의 측면에서 종교를 파악했습니다. 이를테면 저는 종교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쓴 일기를 보고 그 사람을 파악했다기보다는 종교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밖에서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살펴보며 그 사람을 파악했다고나 할까요. 이러한 지점에서 치훈 씨가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을 거론하신 것 같은데, 역시 제 대답은 '그것은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으로 나뉘어 설명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라는 생각입니다. 보다 깊숙한 논의를 위해서라면 각자가 가진 형이상/하학에 대한 정의를 꺼내 봐야 할 것 같구요. 하지만 저는 그 전 단계에서 그러한 구분은 무의미하다는 생각이고, 만일 굳이 그러한 구분을 해야 한다면 사회학은 관계성을 전제하기에 충분히 형이상학적이다. 는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뭐. 형이상학이 이하학에 대해 우월한 무엇은 아니지만. 그냥 그런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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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내적 접근 역시 얼마든지 사회학적으로 갈 수 있지요. 종교사회학 같은 것처럼. 일기도 얼마든지 사회학적인 분석이 가능한 겁니다.    
 
 
병장 정치훈 (2006/05/01 03:31:06)

아 제가 너무 좁게 봐서 오해를 한 것 같네요. 종교가 '실재하는 현상이다'와 '허울과 본질'에 대해 언급 하실 때 이 윗 글에서 말씀하신대로 다루는 방식 때문에 폭넓게 바라보지 못했나 봅니다. 주병장님께서 이 글을 통해 사회학적인 방법으로 종교를 어떻게 다루는가를 보여줌으로써 사회학이란 이런것이다라는 설명을 해주시려 한다는 전제를 가지고 읽다보니 그렇게 된 것 같네요. 어쨌든 3부작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