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론]하나의 정의론을 위하여 
 
 
 
 
답변이 너무 늦었습니다. 희석씨께 죄송하네요. 

제가 정의를 정의(定意)하는 방식이 서툴렀던 것 같습니다. 저는 희석 씨가 생각하는 것처럼 교과서에서 배운 것을 정의라고 생각하며 글을 쓴 것이 아닙니다. 저는 단지 만화영화나 각종 사회 매체 등에서 정의라는 말들이 너무 난무하는 가운데, 진정한 ‘정의’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사람들이 당연한 의문을 가져야 한다라는 것에서 논지를 전개하고자 했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정의를 이야기하지만, 그 이면에는 아이러니하게도 정의에 대한 교과서적인 관념인 ‘지고지순함’이나 ‘공평무사함’이라는 강박과 비슷한 것이 자리잡고 있지는 않나라는 착상에서 그런 표현을 사용한 것입니다. 희석씨가 말씀하신대로 저 역시도 개개인마다 가지고 있는 정의라는 것에 대한 정의(定意)가 사람들마다 각기 다르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희석씨 말대로 분명 개개인의 의지는 자신만의 정의를 정립하고 그것을 추구해가는 기반이 됩니다. 하지만 그들이 정의를 아는 것과 정의를 현실에서 실현하는 것은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나의 기준에서 이러한 행위는 ‘옳은 것이다, 정의를 실현하는 일이다’라고 스스로 생각하면서도 결국 그것을 실현하는데까지는 이르지 못합니다. 그것은 정의를 알지 못해서가 아니라 정의를 추구할 수 없도록 만드는 환경의 영향입니다. <자기 앞가림하기 바쁘다>라는 오늘날의 대표 명제가 아마 그 환경이 무엇인지 대변해주리라 생각을 합니다. 이런 연유로 저는 부정의의 사회라는 언급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정의를 말하기에 힘겨운 상황’이란, 주지했듯 상대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라고 다시 강조하겠습니다. 그것은 희석씨도 저도 동의하듯 하나의 거대한 정의-저가 주장하는 바로는 공리주의-가 사람들에게 주도적인 영향을 미치는 가운데, 공리주의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각 분야의 다양한 지위의 사람들에게 저마다의 정의라는 것이 자리잡고 있는 한 하나의 정의로 수렴해가는 것은 무지하게 어렵습니다. 때문에 롤즈 역시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들여 그 하나의 정의론을 정립하기 위해 노력한 것이겠죠. 게다가 설령, 하나의 정의론이 생겨난다고 한들 그 실천을 보장받지 못하는 한 그 정의론은 정의‘론’에 그칠 뿐입니다. 정의론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사회에서 ‘선’이라 권장되는 행동양식들이 얼마나 많은가요. 하지만 그 실천이 익히 잘 이루어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물음표를 내밀겠습니다.

제 독해가 맞다면, 희석씨가 댓글을 통해서 정의론에 대해 말씀하고자 하시는 부분은 <개개인의 의지를 바탕으로 저마다의 정의를 추구하고 실현하자>인 것 같습니다. 저는 이부분에서 완전히 생각이 다릅니다. 본문에서 언급했듯 저는 연대를 말하고 싶습니다. 그 부분이 제 글에서 가장 주장하고 싶었던 부분이기도 하니까요. 각자의 정의를 추구하는 일은 개인에게는 선입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그것이 과연 정의가 될지 부정의가 될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얼마 전에 강계정님과 다른 분들과의 대화에서도 발견할 수 있었듯이, 한 개인이 추구하고자 하는 방향은 그게 그 사람에게는 ‘정의’일지라도 마찰을 피할 수 없는 경우가 생길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성향은 결국 자신의 이해와 당장 무관할 경우 극도의 무관심으로 나타나거나, ‘너는 너, 나는 나’라는 식의 극단적 상대주의로 빠져버릴 우려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결국 정의는 공공적인 성격을 띄는 것이라는, 교과서적인 말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겁니다. 하나까지는 아니더라도 무수히 다른 방향으로 산개해가는 각자의 정의에 대한 생각들을 헤쳐모여를 외치며 한 곳으로 수렴해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롤즈 역시도 자신의 정의론을 정립하기 위해서는 무수한 개인들의 고유한 특징들을 계약론의 자연상태로 치환시켜버린 후, 합리적이고 공정한 판단을 내리는 사람들로 구성된 사회에서는 이러한 정의론에 대한 합의에 이를 수 밖에 없다라는 말로 자신의 정의론을 논증합니다. 그가 무조건 옳고 그 방식에서 나온 정의론 역시 옳은 것이라 보장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틀림없는 것은 이제는 스스로 자문하고 회의해야 할 때라는 것입니다. 특히 세상에 나아가 무수한 정의를 맞닥뜨리고 그 속에서 내가 정의라고 믿고 있는 것을 추구하기 일보 직전이 사람들인 우리에게 그것은 더없이 중요한 일입니다. 

내가 추구하는 정의는 그저 ‘이익’이 아니라 ‘선’인가, 왜 선하게 살아야 하는가, 행복은 선과 만나는 그 지점에 존재하는가,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의 자유를 위해서 내가 맡아야 하는 책임은 무엇인가, 나와 너의 관계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떤 책임과 의무의 관계로 엮여 있는가, 이 모든 것은 과연 올바른 질문인가, 등을 스스로 자문하고 고민하고 회의해야 합니다. 그 고민의 일차적 결과물을 들고서 세상에서 만납시다. 고민 끝에 얻어낸 긴 과정 속의 작은 결과들이지만, 서로의 연계를 인식하고 자신의 자유와 책임을 보다 넓은 견지에서 바라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우리는 하나의 정의를 향한 불가능하지만 희망찬 항해를 시작할 수 있을거라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너는 너고, 나는 나’ 로 남을 수가 없기에 언제나 ‘우리’가 되는 것입니다. 나도 나지만, 그 이전에 계속 모두와 우리이고 싶습니다.

p.s
몇 번 본문에서 언급한 롤즈의 정의론을 좀 지나칠 정도로 간단하게 요약한 것을 첨부하겠습니다. 참고가 되셨으면 하는 생각도 있네요.


<정의론, 존 롤즈>

제1원칙
각자는 모든 사람의 유사한 자유체계와 양립할 수 있는 평등한 기본적 자유의 가장 광범위한 전체 체계에 대해 평등한 권리를 가져야 한다.

제2원칙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은 다음 두 가지 즉,
a) 그것이 정의로운 저축원칙과 양립하면서 최소 수혜자에게 최대 이득이 되고,
b) 공정한 기회 균등의 조건 아래 모든 사람들에게 개방된 직책과 직위가 결부되게끔 편성되어야 한다.

롤즈의 제1원칙은 자유주의에, 제2원칙은 사회주의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그런데 롤즈가 정의의 두 원칙이 축차적 서열, 즉 1원칙을 기반으로 한 상태에서 2원칙이 적용되어야 하는 식의 서열을 따른다고 전제한다. 이는 밀이 자유론에서 언급한 것과 같은 맥락으로 개인의 자유는 침범할 수 없는 신성한 것이라는 점에 동의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롤즈의 정의가 의미를 갖는 것은 제2원칙에 있는데 개인의 자유와 평등이 제한되는 경우는 그 제한으로 인해 생기는 이익이 최소 수혜자least advantaged에게 최대 이익을 가져다 줄 때만 허용되며, 그렇지 않고서는 평등분배가 옳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b항목은 모든 이에게 태어난 사회적 지위와 무관하게 유사한 삶의 기회를 보장 받아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병장 한상원 (2006/03/26 20:03:40)

희석씨 감사합니다. 질문과는 다소 다른 방향으로 흘러버린 것 같아 겸연쩍긴 하지만,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더 많이 풀어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상병 송희석 (2006/03/27 06:37:14)

상원님// 이거 오히려 제가 감사해야하겠는걸요! 너무 많은걸 배웠어요! 적어도 일주일간 이것 하나 고민해도 좋을만한 내용이네요! 일단 저도 개인적인 견해를 말해 볼께요! 
일단 개개인의 정의에 대한 생각은 서로 같은것 같습니다. 다만 상원님은 정의를 실현시키기 어려운 환경 - 자기 앞가름 하기 바쁘다 - 때문이라 생각하시는것 같습니다. 여기서 상원님은 그 정의를 내리는사람을 비판하지는 않을꺼라 생각은 하지만 역시 옳지 못한것은 분명하다 라고 생각되는데, 저는 그것마저 다른 정의라 보는것입니다. 

이제 여기서 연대라는것이 문제입니다. 저와 상원님의 견해가 전적으로 틀린것이 바로 연대부분입니다. 상원님은 연대가 필요하다 하지만, 어떤 연대인지가 의문이 듭니다. 과연 어떤 정의를 가지고 연대를 할것인지가 답이나와야 됩니다. 그 답이 진짜 옳은 정의인지, 아닌지도 계속 판단해볼 문제입니다. 혹시라도 제대로된 정의가 아닌 조금 불완전한 정의를 가지고 연대하면 역시 연대마저 불완전해질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만큼 연대를 이야기할때 왜? 라는것보다 어떻게?를 저는 중심으로 보는것입니다. 

제가 보는 연대는 극단적인것으로 마찰을 하되 관용으로 서로 불완전한것들을 보충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개개인의 정의를 합치는 작은 저의 견해인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이지만 나는 나인것 같습니다. 나의 정의가 우리의 정의가 는것이 아닌, 나의 정의와 너의 정의가 서로 부딪쳐 새로운 정의가 나오고, 새로운 정의가 또 나의 정의와 너의 정의가 부딛쳐 또새로운 정의가 나온다면, 꽤 괜찮은 정의가 나오지 않을까 라는 생각인 것입니다. 물론 굉장히 유토피아적 사고방식일수 있지만 제가 내릴수 있는 정의론인것입니다. 

상원님의 글을 정말 잘 읽었으며, 특히 존 롤즈의 정의론은 꽤 많은것을 생각해봐야 할것 같습니다. 저 정의론을 반박할만한 능력이 현재 저로서는 안되지만, 열심히 고민해서 새로운 정의론을 생각해볼까 합니다. 그래서 이참에 저 책을 사볼까 합니다.(웃음) 

상원님 좋은 월요일 되길 바라며, 혹시 제가 잘못판단된다 생각하시면 언제든지 답글 남겨주십시요!    
 
 
상병 엄보운 (2006/03/27 12:46:02)

상병 송희석/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만, 이해가 되지 않는 대목이 있네요. 

<< 여기서 상원님은 그 정의를 내리는사람을 비판하지는 않을꺼라 생각은 하지만 역시 옳지 못한것은 분명하다 라고 생각되는데, >> 

이 문장은 '상원님께서 어떤 정의를 비판까지는 아니어도 옳지 못한 것으로 여기고 계시다.' 라는 뜻인 것 같은데, 이에 반하여 희석님께서는 '그것'마저도 긍정해야 한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희석님이 말씀하신 '그것'이란, 상원님께서 비판까지는 아니어도 옳지 못하다고 한 것이 무엇을 가르키나요? 상원님께서 전제하신 관용의 범위를 - 희석님 생각에는 - 더 크게 확장해야 한다라고 여기시고 그에 반박하는 주장을 펼치고 싶으시다면 적절한 논거 제시가 있어야 하지 않나 아쉬움이 남습니다. 

희석님께서 방법론이 연대를 이야기하는데 있어서 중요하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렇다면 희석님께서 말씀하신 '마찰은 하되 불완전한 것들을 보충하는 방법'은 과연 "어떻게" 이룩할 수 있을까요? 그것에 대한 방법론을 먼저 이야기하신 뒤에 상대방의 방법론을 묻는 것이 순서라 생각합니다. 존재하지 않는 곳(유토피아)에 대한 방법론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개인적으로는 상원님의 정의론에 무게가 실립니다. 정의든, 정의론이든 완벽한 것은 애초부터 있을 수 없어요. 사람이 만든 정의에 대한 사고가 어찌 완벽하겠습니까? 연대에 있어 완벽성을 전제로 두려는 것은 희석님께서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그 방법론에 너무 많은 제약을 가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병장 한상원/ 추신 전에 끝에서 두번째 단락. "내가 추구하는 정의는 그저 ‘이익’이 아니라 ‘선’인가" 가 이끄는 그 문단이 상원님의 진수가 담겨져 있는 것이 아닐까 감히 추측해봅니다. 보론 부분이 있어 본문이 더 밝아졌다고 생각해요. 좋은 칼럼 감사합니다. 




희석님과 상원님 모두 즐거운 월요일 보내세요!    
 
 
상병 송희석 (2006/03/27 13:10:44)

상병 엄보운/ 역시 저의 추상적 표현에서 문제가 된것 같습니다. 
일단 질문의 대한 답변부터 드리는것이 순서라 먼저 말씀드립니다. << 여기서 상원님은 그 정의를 내리는사람을 비판하지는 않을꺼라 생각은 하지만 역시 옳지 못한것은 분명하다 라고 생각되는데, >> 라는 부분은 보운님이 해석한게 맞습니다. 옳지 못하다고 표현한것은 상원님의 글에서 자신의 정의를 내리는사람중 환경때문에 <먹고살기 바빠서>란 정의는 옳지 못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아마 저의 착각일수 있습니다. 하지만 글을 읽을때 저는 그렇게 해석했고, 저는 그 정의도 정의로서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인것입니다. 

이제 보운님께서 마찰을 하되, 어떻게? 라는 질문을 하셨습니다. 저는 이미 상원님과 비슷하게 '관용'을 중심으로 풀어나간다고 했습니다. 단, 상원님과는 다르게 모든 극단주의 조차 마찰을 하되, 서로 받아들일 부분은 받아들이는 겁니다. 물론 이것은 양 극단에 있는분들한테 말도안되는 소리일수 있습니다. 상대방 의견을 받아들이면 그 순간 자신의 의견이 틀렸다고 생각될수 있는 것이죠. 

하지만 틀린것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 부분을 계속 수정해 나가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토론과 논쟁의 존재의미일 것입니다. 예! 저는 유토피아 방법론은 바로 끊임없는 경청입니다. 관용이 포함된 모든 경청! 그 어떠한 잘못된 내용이라도 배울것이 있다라는 자세! 이것이 저의 어떻게? 라는 방법론입니다. 

보운님도 즐거운 한주 보내시기 바라며, 저의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언제든지 일격 가해주시기 바랍니다.(웃음)    
 
 
병장 한상원 (2006/03/27 15:40:42)

희석// 먼저, <먹고 살기 바빠서>는 옳고 그르다로 말해질 수 있는 정의라기보다는 그것이 시대적 상황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돈을 버는 것‘만’ 하게 만드는 그 시대적 조류는 부정의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시대적 상황 안에 무수한 개인들의 정의가 있다고 저는 이미 주지 드렸습니다. 그런데 엄밀히 말해서 개개인의 정의는 제가 말하고자 하는 공정으로서의 정의, 공공성을 내포하고 있는 정의와 다소 거리가 있습니다. 그것을 ‘정의’라 부르는 것은 그 자신이지 다른 사람의 눈에 그건 정의가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죠. 때문에 우리에게는 여러 가지의 정의 가운데 모두가 공감하고 실천할 수 있는 하나의 정의를 꿈꾸는 것입니다. 

희석씨가 말씀하시는 변증법적인 과정을 거치는 정의론의 수렴과정은 유토피아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잔혹한 전쟁터와 같을 겁니다. 왜냐하면 정의는 한 사람의 세계관이고 행동양식이며 그 사람의 정체성이기 때문이죠. 저는 정의가 이런 것을 함축하고 있는 것 만큼, 연대라는 관계를 맺는 것을 제안합니다. 그 실천의 방식은 희석씨의 방법론과 거의 유사합니다. 말씀대로 경청을 해야 할 것이고, 관용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허나, 다른 점은 수렴되는 하나의 정의는 롤즈의 것처럼 각자가 합의에 이르러 이러이러한 것을 하나의 ‘정의’로 하자가 아니라, 각자의 정의를 서로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틀, 자신의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모두에게 필요한 지반을 마련하는 정의를 구하기를 바랍니다. 희석씨의 것을 모두의 교집합을 소통과 관용으로 찾아가는 것이라면, 저는 제 스스로의 방법론을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서로를 인정하고 스스로를 실현할 수 있는 집합 조건을 설정하는데 있다고나 할까요. 그것이 아마 제가 추구하고 싶은 정의론이 될 것 같습니다. 저의 소심하고 나약한 일면일지도 모르지만, 저는 모두가 정의를 추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정말 생존을 고민할 지경에 처한 사람의 부정의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부의 획득을 정의로 믿는 사람을 가치판단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다만, 그건 아니라고 끊임없이 긁어줄 수 밖에요. 어쨌든 제 자신이 말하는 정의 자체도 저라는 인간의 세계관과 가치관 안에 제한되는 만큼 저 역시도 롤즈의 정의론이나 희석씨의 정의론이나 무엇하나 이렇다 저렇다 말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그냥 고민하는 수 밖에요. 그리고 <정의론> 25000원에, 700쪽이에요. 읽는데 두달 반 걸렸습니다.(땀) 

보운// 네, 맞습니다. 저는 무슨 정의가 옳다 그르다보다, 질문을 던지는게 더 중요하다 생각합니다. “그게 왜 문제지?” 라고 전혀 생각할 수 없는 상황, 생각해 본 적 없는 상황보다 나쁜 것은 없는 것 같으니까요. 

두 분 덕분에 더 정리가 잘되는군요. 감사합니다.    
 
 
상병 송희석 (2006/03/27 16:59:55)

상원/ 이거 많이 배웠습니다. 정말 배웠네요! 특히 상원님의 방법론중 전혀 생각지도 못한 부분 - 집합조건을 설정하는것, 즉, 서로 인정받을수 있는 틀, 자신의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모두에게 필요한 지반을 마련하는 정의를 구하는것! - 에 대하여 이런 글을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끊임없이 또 고민해볼 문제인것 같습니다. 쉽게 글을 달수 없는 글이기에 추후에 상원님 제대하시기 전에 꼭 한번 <정의론>을 읽어보고 다시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네요! 
아무튼 좋은글 감사합니다. 

덧. 근데 돈은 문제가 안되는데!(집에 돈이 많다는뜻이 아닌, 벌어놓은 돈이 조금 많습니다.)쪽수가 문제가 되는군요!(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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