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1) 「하늘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삼국지를 권하는 이들은 말했다. 역사는 반복되는 거라고.
근래, 책을 뒤적거리며, 이해는 하는 둥 마는 둥, 머릿속에 집어넣기에만 바쁜 나를 돌아보면 진절머리난다. 그러면서도 읽을수록 명확해지는 것은 내가 지금 고민과 방황의 길을 걷고 있다는 것이다.

고민과 방황은 이미 경험한 이들이 과다하리만큼 책으로 써서 남겼으며, 시대에 따라 다르게 읽히며 끊임없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책은 그야말로 사유의 역사이자, 인류의 총화. 내가 오늘 고민한 문제는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분명 마주칠 수 밖에 없는 그런 류의 것들이다. 

신에 대해 고민했던 나의 사유는, 보다 뛰어난 ‘쿠아란타리아서’에서 맥락을 같이 했고, 책을 덮으며 '부질없는 무언가'에 빠져있는게 아닌지 또 다시 고민했다.

내가 [가졌던, 가진, 가질] 모든 ‘시제(時題)’는 이미 책에 과거형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2)失
책이 인간에게 준 것은 밤새도록 늘어놓아도 긍정성을 다 이야기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책이 인간에게서 빼앗아간 것들에 대해서 생각해 볼 겨를은 없었을까

「책의 발명은 다시말해 ‘기록’의 시작. 전에 없던 기록의 시작은 기억의 종말을 예고했다.」

책 한권 만들기가 대사(大事)였던 그때도, 책은ㅡ지금과는 다른 형태지만ㅡ출판되어, 무수한 양이 전해온다. 구텐베르크의 활자혁명에 힘입어, 바야흐로 대량 출판의 시대가 도래함으로 지금도 갱신되는 축적도서의 양은 천문학적이며, 그야말로 기하급수적이다. 반면에 인간의 능력은 축적량을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에 전문화의 길을 걸었으나, 어느 한 분야에 정통하기도 매우 힘들어졌다.

축적된 모든 도서를 한곳에 쌓아둔다면, 신에 가까운 무정물이리라.



3)創造
이 땅 아래, 창조적 행위는 얼마나 어려운가. 책 사이를 전전하며 창작을 위한 밑거름으로 삼으려고 해봤자, 대부분 정반합, 거기서 거기인 뮤턴트 창작물들만 득시글거리는 모습이 이젠 식상하다. 서적에 퇴적된 화석들을 이리저리 끼워맞추는 작태는 눈만 어지럽게 한다.

전에 없던 창작을 위해 전에 있던 모든 창작을 알고 넘어가야 한다면, 창작의 어려움은 얼마나 비인간적인가. 그렇기 때문에 얼마나 대단한가. 옛날, 세계의 모든 도서가 있었다던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 화재는 창작의 난관에 부닥쳐 퇴적되어버린 지식인들에게 신이 내려준 숨통의 불씨가 아니었을까. 

이젠 이미 태울래야 태워버릴 수 없다.


4)記憶
기록의 시작으로 기억의 위대함은 거의 사장되었다. 누구하나 기억하려 들지 않으며 책 한권 뒤적거리며 잠깐잠깐 외우며, 값싼 인터넷이나 뒤적거린다. 지식은 서적은 기록은 어디에든 어떤 형태로든 남아 원하면 다가설 수 있고, 기억은 그 다음의 문제다. 기억은 모조리 기록으로 바뀌어 일기로, 독후감으로, 레포트로 죽어서 전달될 뿐, 후엔 잊어버릴 뿐이다. 지독하다.

나는 기록을 죽이고 싶지는 않다. 이제와서 어찌할 수 없다는 맥 빠진 이유도 분명 포함되어있다. 그것은 인류가 쌓아온 높은 계단이고, 엘리베이터가 없는 정직한 단계이다. 창작하는 삶이 어렵다하여 이제까지의 창작물을 부숴버린다면 너무나 이기적이고 어리석다. 허나 그리움만은 어찌할 수 없다.

「밤이면 모닥불을 피우고 삼대가 둘러앉아, 간단한 식사를 하며 대화를 나눈다. 어제 있었던 이야기서부터 길게는 몇 백 년을 거슬러 태초까지 이르는 이야기를 하며, 형용할 수 없는 세월의 기억을 대를 건너 전한다. 모두, 기억을 공유하며, 기억을 나누며, 잊혀질법한 내용을 다시 보충해가며 작은 목소리로 멀리까지 들릴법한 기억의 공명을 이룬다.」

기록에 가려져 기억이 잊혀진다면, 기록도 결국 죽고 만다. 

  
 
 
 
병장 송주영 (2006/03/25 15:05:51)

아, 

이 글을 읽고 나서 느낀 점은, 

첫번째 조회라는 짜릿함이군요. 
그 외에는 도무지 공감이 가지 않아요.    
 
 
상병 송희석 (2006/03/25 15:14:00)

책 예찬론인가요? 그런느낌이 드네요!(웃음)    
 
 
상병 조주현 (2006/03/25 17:15:59)

혹시 읽어보신 분이 있으실 진 모르겠지만, '사서'라는 책이었던가요? 제목은 잘 기억이 안나지만, 
책이 쌓인 모양이 묘하게 '도서관 사서'처럼 보이는 그림이 표지로 있던 책이었습니다. 그책에서 그랬죠. 
기록의 시작은 기억의 종말이라고. 다시 읽어보고 싶네요.    
 
 
병장 김대현 (2006/03/30 13:07:16)

글 내용도 그렇지만, 글투가 참 맛있네요. 

사람은 말씀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밥으로 사는 동물이라죠. 책이 한없이 고결해져 그것이 사람을 억누른다고 생각될 때는, 천진한 표정으로 "잘 모르겠는데? [긁적]([웃음]도 좋습니다)" 라고 하면 그만입니다. 사람의 손으로 쌓은 것은 그렇게 사람의 입으로 한번에 부정될 수 있기에 재밌는 게 아닐까요. 사람나고 책 났지, 책 나고 사람 난 건 아니듯이요. 
그래서, 저는 기록이 아무리 많아져도 기억은 안전할 거라고, 천진하게 생각합니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