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변화시키는 유효한 방법 
 
 
 
 


105. 삶을 변화시키는 유효한 방법 :


날짜를 써놓고서 한참동안 노트를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아무런 글도 쓸 수가 없었다. 그게 불안했다. 하루이틀 그런 거라면 별 문제가 안된다. 오히려 항상 머리속이 복잡한 생각들로만 들어차 있는 건 종종 끔찍하게까지 여겨지기도 하기 때문에, 적절한 휴식은 정신건강에 유익할 수가 있다. 하지만, 지금 이 기분은 다르다. 다시는 글을 쓸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마치 자신이 대단한 글쟁이라도 되는 양 앞으로 글을 못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니 불안해요, 라는 둥의 엄살을 떠는 게 자칫 얼치기의 겉멋으로 보이지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에 애써 태연한 척 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어쨌든, 글을 쓰는 행위는 나의 문제들을 풀어나가는 삶의 한 양식이다. 그것이 변하려는 걸까.

지금껏 어떤 시련에 봉착할 때마다 나는 더욱 강해지기만 했다. 나의 정신은 더욱 또렷해지고, 더욱 날이 설 뿐이었다. 세계는 허술해서, 한 인간을 끝까지 파멸시키지 못한다. 이를 악 물고 아득바득 덤벼들면 방법은 있었다. 그래서 내가 물러서야만 한다는 충고에 도무지 나는 동의할 수가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런 지레 겁먹은 듯한 붕뜬 얘기가 내게 설득력을 가질 기회 자체가 얼마 없었다.

한동안 자주 가위에 눌리던 때가 있었다. 그것은 늘상 겪는 일이면서도, 매번 죽음의 공포와 맞닿아 있었다. 그래서 끔찍했다. 무서웠다. 하지만 어떻게든 안간힘을 다 해서 나는 그 상활을 빠져나오곤 했다. 가위에 눌렸다가도 이를 악물고 그 공포를 이겨내면, 일당백의 가츠도 부럽지 않았다. 죽음의 경계에서 승리는 늘 나의 차지였다. 그것은 곧 하나의 자신감이 되기도 했다.

요컨대, 나에게는 끊임없이 나의 의지를 환기시키는 적이 있었다. 마치 줄리엣 가문을 향한 집안의 적개심이 로미오의 사랑을 오히려 환기시켰듯, 윤대협이 농구를 하면서 즐거운 이유는 경기가 자신의 승리로 끝나기 때문이듯, 이 세계는 RPG 게임 유저가 일부러 들어가는 던전이었다. 전쟁 중에 김강록의 내부는 단결되어 이었고 그래서 크게 나쁘지 않은 삶이었다.

그러나 어느덧 의뭉스러운 후기 자본주의 사회가 도래했고 그것은 내 삶의 지반이 되었다. 이제 무엇과 대적해서, 어떻게 싸운단 말인가. 미처 자신의 죽음을 알지 못했던 시체와도 같은 나는 싸움이 멈췄을 때 비로소 죽음을 감지해낸다.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기듯, 북산이 느린 템포의 경기 운영으로 풍전의 페이스를 교란시키듯, 나에 대한 지금 이 세계의 전략은 유효하게 먹혀들어가고 있다. 적과 맞서는 것을 삶의 양식으로 삼아온 이에게 적의 부재는 곧 삶의 붕괴이다. 올드보이의 유지태가 생을 마감하듯이.

사회과학도 김강록은 적을 찾기 위해서 고심했다. 일부러 전장으로 향한 것은 숭고한 희생을 위해서가 아니라 살기 위해서였다. 적과 내가 뒤엉키는 전쟁터는 차라리 나에게 생의 요람이었다. 그 삶은, 제기랄, 내게 허락되었던 그 단 한 가지 삶의 양식을 저주한다. 다른 삶은 없을까. 내 숙제는 언제나 단 한 가지였다.

하지만 벗어나길 갈망하면서도 나는 결정적인 문턱에서 늘 변화를 거부했다. 자, 지금부터 집중해야 한다. 나의 우유부단함이나 내 앞에 우뚝 선 담장의 드높음에서 모든 원인을 찾지 말자. 문제는 언어의 잘못된 사용에서 비롯된다. 나와 적, 나와 세계의 이항대립이 갈등의 본질이 아니다. 자신을 심문하려 들지 말자. 지금은 어디까지나 최선을 다해왔던 너 자신을 변호할 시간이다.

시중에 나돌던 싸움에 관한 소문들은 너 자신의 싸움에 관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것들이 구구절절 옳을지언정, 다른 누군가의 싸움이지 너의 싸움은 아니다. 담론의 대리전에 휩쓸려 허공에 칼부림을 하지 말자. 너의 싸움은 너의 삶 속에 있다. 너 자신을 위해 싸워라!

이것이 나의 싸움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언어 이전의 막연한 미심쩍음, 그것이 너를 지금껏 전장에서 주저하게 만든 동시에 또한 끊임없이 전장을 전전하게 만들었다. 너의 그 모든 고집과 독선과 투지와 불행의 근원인 그 촉수가 처음부터 사회과학도로서 훈련받았던 건 아니다. 사회과학도라는 이름은 그저 머물기 좋아서 택한 것일 뿐. 그것은 마치 가츠가 휘두르는 거대한 칼처럼 네 삶 속에서 피를 마시며 성장했다. 그 감각을 믿어라, 타고난 악귀의 본성을!

비단 나의 문제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고대 그리스 이래 인류의 철학은 그토록 애써왔지만 단 한 가지의 문제도 해결하지 못했다.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에 대하여,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시절의 그 구태의연한 문제는 여전히 인류의 발목을 잡고 있다. 우리는 여지껏 우물에서 숭늉을 찾고 있었다. 겨우 20세기에 와서야, 비트겐슈타인이 비로소 그 실마리를 찾았다.

문제는 언어의 잘못된 사용에서 비롯된다─그래서 우리의 참된 인식을 가로막는 언어의 오용을 바로 잡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다. 나는 그런 그의 주장에 열광했고, 그것을 내 삶에 적용시키려 애썼다. 하지만 점차 시간이 지날수록 그것이 지나치게 순진한 견해가 아니었냐는 의구심이 들었다. 왜 비트겐슈타인은, 아는 것이 실천으로 이행되는 원리에 대해 침묵했는가. 그러한 회의는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하지만, 무허가 주택단지로 들이치는 포크레인 중장비 앞에서는 골골거리던 할머니도 투사가 된다. 천하의 무능력한, 못난 오빠 김강록도 초등학생 김지은 양의 하교길을 가로막던 소년 불한당들을 그들 집앞까지 쫓아가서 함부로 '도륙'했다. 진정 자기 자신의 싸움임이 확연할 때, 우리는 더 이상 어떤 주저나 계산도 하지 않는다. 이 마당에 앎과 실천이라는 이분법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말장난에 불과하다. 비트겐슈타인은 바로 그 점을 '알고' 있었다.

혹시나 해서, 정말이지 오랜만에 꺼내든 사르트르의 「지식인을 위한 변명」 서문을 펼쳐보니 과연 이런 얘기가 나와 있었다.


"……그런데 지식인이 그러한 민중의 동반자로 변모하기 위해서는 그는 자신의 직업, 즉 자신의 사회적 존재와 새로운 관계를 맺어야 하며, 또 그가 아무리 정치적 고발을 하더라도, 이것은 그 자신이 객관적으로 민중의 적이라는 사실을 전혀 상쇄시켜주지 못한다는 것을 반드시 깨달아야 한다. 예를 들면, 미국 교수들이 월남전을 고발하는 것, 그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고발은 다른 교수들이 각기 실험실에서 새로운 무기를 개발하여 미국 군대에 공급하고 있는 효율적 작업에 비해보면 아무것도 아니며, 상대적으로 비효율적이다.

지식인이란 불편한 의식(이것은 이상주의적이며, 비효율성일 뿐이다)의 단계에만 머물러 있을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문제부터 공격하기 시작해야 하며 혹은 다른 표현을 쓴다면, 새로운 민중적 제도를 추구하기 위해 지식인적 순간을 부정해야만 한다."

- 장 폴 사르트르


우리의 의기는 높았고 그것이 장한 일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치기어린 마음에 함부로 지식인 흉내를 내려 들었다. 우리의 무지였고, 거기에 폐착이 있었다. 우리가 지식인을 흉내내어 얻으려 했던 것들은, 정작 '지식인적 순간을 부정'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것들이었는데 말이다.

자, 이제 답이 나왔다. 나의 논리는 완전무결하며 공격불가능이다. 나는 본질적인 면에서 실천에 관한 문제들을 최종적으로 해결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실천의 문제로 고민하던 세계의 청년들이여,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침묵하라! 그리고 네 존재론이 뿌리내리고 있는 일상의 영역으로 되돌아가라. 나도, 다시 당구장으로 돌아갈테다.



2006. 3. 14. 火, 大영일고등당구스쿨 공채 24기 목동의 김프로


 

  
 
 
 
병장 김대현 (2006/03/16 09:45:45)

아. 늦었다. 흑흑. 
잘 읽었습니다. 잘 읽었어요.    
 
 
병장 오재환 (2006/03/16 09:55:25)

저도 돌아가야겠군요.    
 
 
병장 주영준 (2006/03/16 09:56:50)

사르트르나 까뮈같은 적극적 실존주의자들의 핵심은, '목숨을 서른 두개쯤 걸어두어야 겨우 할 수 있는 일' 을 가지고 '에이, 그래도 인간이라면 이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는가' 라는 식으로 지르곤 하는 그 언사에 있는 것 같습니다. 라는 건 여담이구요. 잘 읽었고, 다시 잘 읽어보겠습니다.    
 
 
상병 송희석 (2006/03/16 10:21:08)

결국 당구장으로 회귀네?    
 
 
 상병 박진우 (2006/03/16 13:00:29)

그래서 적과 맞서는 삶의 양식을 내면으로 돌리겠다는 말씀인건가. 
적대적인 태도를 변화시킬수는 없는걸까요? 

드래곤볼엔 더 강한 적을 만나면 더욱 더 강해지는 사이어인만 있는게 아니잖아요.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더 변화를 갈구하는 자신을 발견하게되고 
낮아지는 변화는 생각할수없는 뇌속까지 근육으로 되어버린 사이어인이 되어버린건 아닌지... 

높이, 그리고 멀리... 날아가는 새가 될수는 없는걸까요? 
이미 새장은 열렸는데 말이죠. 

저는 아무도 성공한적이 없는 새로 돋은 날개의 근육에 힘을 실어볼래요. 
날아보려구요. 
아직 우리의 인식의 하늘에 존재하고 있는 것들을 보고 오려구요.    
 
 
병장 한상원 (2006/03/16 13:05:28)

강록씨와 늘 비슷하게 생각하는 점이 언어. 그리고 일상의 문제, 저마다 가슴속에 품고 있는 당구장으로 향하는거 같아요. 다음에 학교 앞에서 당구 한게임 치죠. 핫. 
그리고 희석씨, 저도 강록군이랑 손잡고 당구장 갈래요. 죄송해요.    
 
 
 병장 김동환 (2006/03/16 17:27:34)

어느덧 9년째 150. 
말 많이하면 피곤해요. 서너시간을 넘나드는 무한결승 시스템에는 
그저 침묵당구가 필승의 전략.    
 
 
병장 노지훈 (2006/03/16 18:13:06)

안타깝게도 여기서 길이 갈리네요, 저는 PC방으로 돌아 갑니다.    
 
 
일병 허익준 (2006/03/16 20:11:52)

저는 TV 앞으로 돌아갑니다. 한 손에는 PS2 컨트롤러를 들고.    
 
 
상병 박종민 (2006/03/17 00:23:04)

결국은 원영님 손을 들어주시는 건가요? 

하지만, 
포크레인 중장비가 코 앞에 들이닥칠 때 쯤이면, 
이미 게임 셋인 경우도 허다하지요. 

대다수의 사람이 목에 칼이 들어오기 전에, 너무 늦기전에 
'인지'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 
다시 '실천'의 문제로 돌아가는 기분? 

'인식'과 '실천'의 이분법은 저도 썩 내키지는 않지만, 
'동일시'도 문제가 있지 않을까요. 
(이런. '구제불능회색저울상대주의기질' 또 나옵니다.) 

어쨌든, 강록님의 경쾌하고 발빠른 템포의 글은, 
언제나 감탄을 하게 만들어요-    
 
 
병장 김태경 (2006/03/17 16:44:20)

지식인을 위한 변명. 서문에서 지식인인척하는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주다니, 너무 쉽게 끝난건 아닌가 싶은데요. 강록님은 답이 나왔다고 하셨지만, 뭔가 더 있을듯한 느낌. 

하지만 더 궁금한것은 결국 당구장으로 돌아가고마는 '당구장 곤돌이' 강록님의 다마수는 몇인가 하는거죠.    
 
 
상병 송희석 (2006/03/17 22:38:06)

태경/ 다마수야 서울다마니 기껏해야 200~300정도? 대략 추측이지만, 저하고 붙으면 제가 이길듯(150실력을 가진 제가 30이라고 뻥치고 치면서 - 들키지 않을정도로 - 온갖 겐쎄이를 외친다면 천하의 강록님도 별수 없을듯(웃음)    
 
 
병장 김강록 (2006/03/19 09:49:30)

영준 / 글쎄요. 오히려 제가 예상했던 영준님의 이파리는 말이죠. 당신은 지금 혈기 왕성하고 제법 의식있는 척하는 대학생들이 흔히 빠지기 쉬운, 흡사 주화입마와도 같은 '정치 과잉' 상태를 벗어나자면서, 그 이면으로 자신의 소극적인 태도에 대한 정당화를 기도하는 게 아니냐, 뭐 이런 거였는데. 혹 '실천'으로의 이행을 너무 쉽게 보고 있는 게 아니냐는 우회적 표현이신가요. 아니면 그야말로 정말 '여담'이었던 건지. 

희석 / 그런 면에서 희석님이야말로─여전히 그 어법은 적응하기 힘들지만─소극적인 태도에 대한 추궁을 하려고 하시는 듯 한데, 제가 당구장으로 돌아간다는 게 어떤 의미냐면요. 그건 얘기가 너무 길어져서 지금 하기는 그렇고, 나중에 천천히 다른 글을 통해서 말씀드릴께요. 사실은 제가 예전에 '농땡이 예찬 시리즈 3탄'으로 고교시절 얘기를 하겠다고 운만 띄워놓았던 게 바로 그건데─비록 아무도 기억못하겠지만, 아무튼─동시에 희석님께서 요구하시는 답변이 되기도 할 겁니다. 

진우 / 삶에는 언제나 문제가 있고, 그 원인은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헌데 자신의 내부에서만 원인을 찾는 것은, 외부에 있을지 모를 원인을 은폐하고 방기하는 일이 될테니까요. 저는 오히려 내면에서의 추상적 활동에서 벗어나 직접 자신의 일상적인 삶에부터 마주 서자는 얘기를 하고 싶었습니다만. 

그리고 적대인 태도에 대해서는, 저도 좀 피곤하긴 합니다. 헌데 정말 다른 방법을 몰라서요. 슬프게도 저는 '다른 삶을 상상하지 못합니다'. 혹시 좀 더 편한 방법을 아시면 진우님이 좀 가르쳐주세요. 

상원 / 저마다의 가숨속에 품고 있는 당구장, 그 말 정말 맘에 드는걸요! 

지훈 / 괜찮습니다. 한게임 당구에서 만나겠습니다. 
익준 / 괜찮습니다. 컨트롤러는 들고만 계세요. SBS 일요당구에서 만납시다. 

(계속)    
 
 
병장 김강록 (2006/03/19 20:19:37)

종민 / 딱히 누구의 편을 들기 위한 의도로 쓴 글이라기보다는, 같은 주제에 대해 저 나름대로 고민해오던 것을 제가 서있는 자리에서 저의 언어로 한번 말해보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각자의 발등에 당장 불이 떨어져서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신의 이익과 권리를 지키기 위해 나서게 되기 전에, 그 이전에 취해져야 할 조치가 있지 않겠냐는─뜻으로 받아들였습니다─종민님의 초점도 유의미한 얘기입니다만, 이번에 저는 보다 미시적인 관점에서 당장 저 자신이 어떻게 실천으로 이행할 수 있는냐를 생각해보고 싶었습니다. 사실 구조적인 문제에 관한 거시 담론은 어느 정도 충분히 활성화되어 있습니다만, 정작 개별 개인이 막상 어떻게 해야 하고 할 수 있냐는 얘기는 딱히 찾아보기 힘들었거든요. (이번 논의의 주된 흐름 자체가, '그래서 너 자신, 나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하느냐'에 관한 것이라고 저는 파악했습니다.) 

* 이건 제가 근래에 읽고 있던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읽고 있는가」(토니 마이어스 作)에서도 지적하고 있는 얘기입니다. 덧붙이자면, 이런 관점에서 개인의 의식과 행동의 관계를 탐구하고자 할 때 비로소 정신분석학은 사회과학의 한 방법론으로서 그 위상을 부여받을 수 있습니다. 정신분석학이 하는 일이 다름아닌 그거니까. 사실 사상가로서의 지젝의 업적 또한 바로 이 점이라고 해요. (네, 또 책 광고입니다. 으하하하) 

태경 / 만약 제대로 된 해결책이라면 언제나 문제를 복잡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명료하게 만드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우선 우리 삶을 지배하는 상징 체계부터 온전히 우리들 자신의 삶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것으로 바꿔야 한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나서야,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있고 그것을 얻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보다 명확해지지 않을까요.    
 
 
 상병 박진우 (2006/03/20 00:52:24)

//강록// 
아, 이런. 거꾸로 봤군요! 외부로의 실천을 위해 행하는 나자신과의 싸움이라는 방법을 목적으로 잘못본... 
적대적인 태도는 뭐, 이런말 하면 건방져보일지는 몰라도 치기어린 젊을때 할수있는 가장 기초적이고 반항아적인 적성에 맞는 태도라고 봅니다만. 그래서 전 영감님들의 태도를 견지하려구요! 
뭐든지 둥글게 포괄하고 감싸안고 따스하게 보듬어주는 영감님들. 문제를 만나도 그러니 마니 설렁설렁 넘어가는 듯 하면서도 어느새 해결된 문제들. 그런 영감님들의 태도가 좋은거 같아요. 

네. 맞습니다. 제 별명은 영감쟁이입니다. 흑.    
 
 
병장 노지훈 (2006/03/20 05:52:49)

강록 // 우리는 이렇게 돌아온 각자의 위치에서 서로를 바라볼 수 있는 것이군요.    
 
 
상병 박종민 (2006/03/20 17:44:55)

강록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읽고 있는가」(토니 마이어스 作) 메모했습니다. (아아 지갑)    
 
 
병장 김강록 (2006/03/20 17:45:00)

진우 / 논지의 연장선 상에서 '영감님' 유형의 탁월한 점을 찾아보자면, 그분들은 그만큼 살아오면서 자신만의 경험을 쌓아오셨으니까요. 아직 젊은 우리들이 부족한 경험을 대체하기 위해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각종 이론 따위를 끌어들이려는 것과는 달리, 그분들은 좀더 편안하게 자신만의 언어로 문제를 바라볼 수 있으실 거에요. 

여담인데, 저희 동네 당구장에는 늘 카운터 앞다이를 차지하고 계시는 할아버지 한분이 계셨어요. (* '카운터 앞다이'를 차지한다는 것은 이 바닥에서 상당한 함의를 지니고 있습니다. 영화도 있죠. 「메디슨 당구장 카운터의 앞다이」라고, 모든 동네 당구인들의 로망. 카운터 앞다이.) 그 언젠가 "자넨 나를 따르라"라는 명대사 덕분에 친구들끼리 키득거리며 나폴레옹 영감, 줄여서 나영감님이라고 부르곤 했었죠. 

제가 그 나영감님에게서 발견한 것은 다소 악동끼마저 엿보이는 어떤 소년성이었습니다. 그 연세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당구를 치면서 친구에게 "자넨 나를 따르라"라고 말할 수 있는 패기와 젊음의 상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카운터 앞다이의 로망을 간직하고 계시는 나영감님의 삶. 이제껏 어른으로 주저앉지 않고 소년으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끝까지 자신을 지키기 위한 싸움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 목동 영당구장의 나 영감님을 기억하며 -    
 
 
상병 박종민 (2006/03/20 17:47:10)

매우 뼈가 굵은 여담이군요.(반짝)    
 
 
병장 김강록 (2006/03/20 17:50:43)

아악! '읽고 있는가' (오) → '미워하는가' (정).    
 
 
상병 송희석 (2006/03/20 18:32:47)

강록/ 다른글을 진심으로 기대하는 바이며, 결국 같은 목표를 향했을지라도 가는길이 달라 친구가 되기는 어렵겠네요!(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