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쟁의 타격점은 상대의 논리가 아닌 상대의 면상이다. 
 
 
 
 
-분량이 많은지라, 비록 슬럼프지만, 지금까지 쓴게 아깝단 생각에, 개념없이 칼럼.



논쟁의 타격점은 적의 논리가 아닌 적의 면상이다.
-논쟁 회피에 대한 허접한 핑계


논쟁은 상대를 부수는 일이다. 주먹 대신 언어를 휘두르며 상대방을 휘청이게 하고는, 휘청이는 상대방에게 멋진 피니시 블로우를 한 방 선사한 후에, 쓰러진 상대방에게 화려한 수사학의 포화로 상대를 짓뭉개는 일이다. 논쟁에서 대적하는 것은 상대가 사용하는 논리와 이론의 취약성 따위가 아니다. 권투에서 내 글러브를 꽂아야 하는 곳은 상대의 글러브가 아니라 상대의 면상인 것처럼. 논리와 이론에 대한 대응은 상대 면상으로의 길을 방해하는 블로킹을 무효화해가는 지난한 과정에 불과하다. 핵심은, 상대를 때려눕히는 것이다. 그런 반쯤 실성하게 만들어서, 누구의 눈에도 상대방이 '그로기 상태의 권투선수를 연기하는 슬랩스틱 코메디언'으로 보이게 만드는 것. 논쟁자들이라면 이를 논쟁의 목표로 삼아야 할 그런, 논쟁의 핵심이다. '내가 생각하는 논쟁'의 '내가 생각하는 핵심이다'따위의 부연 설명은 몰래 숨기는 것이 나의 가치관에는 적합하지만, 그건 앞으로 차차 하기로 하고 아무래도 '논쟁'이란 것과 관련하여 쓰는 첫 번째 본격적인 글이니까 아무튼.

순수한 논쟁이 있다고 믿는 순진한 작자들이 더러 있는 것 같다. 아측의 논리적 정합성을 바로세우고, 적측의 논리적 취약성을 유감없이 찔러대는 방식으로 논리에 의한 승부가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그런 작자들 말이다. 물론 어떤 논쟁에서 이는 적합한 방식일 지도 모른다. 때론 논리 만으로, 그러니까 상대의 가드를 붕괴시키는 것으로도 상대방을 얼마든지 휘청이는 코메디언으로 만들 수 있는 경우도 존재하니까. 그저 논리가 붕괴되는 것으로도 끝나는 논쟁이 의외로 많으니까. 그러나 이런 경우도 존재한다. 상호간의 논리가 꽤나 강력해서, 논리에 의존한 싸움으로는 결코 끝나지 않는 그런. 그리고 사실 이쯤 되어야 '논쟁'이라는 거창한 단어를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충분히 드러난 논리적 취약성을 지닌 이론을 고집하는 상대와의 대결에, 그러니까 일방적인 학살에 대고 '논쟁'이니 뭐니 하는 거창한 언사를 사용할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보통 이런 식의 학살에는 추가적으로 '부정확한 사실의 인용' 내지는 '비유를 논증의 한 형식이라고 오해하며, 비유로-특히 유추-논리 밀어붙이기' 혹은 '감명깊게 본 만화의 스토리-굳이 이 이야기를 하는 건, 우파 건담주의자인 친구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 못한다-를 논거랍시고 밀어붙이기' 등이 등장한다). 논쟁이라고 할 만한 경지에는, 단지 취약점에 대한 공세로만 부숴질 수 있는 논리 따위는 발 붙일 틈이 없다. 논리적 정합성과 우위의 차원에서 서로 팽팽히 맞붙는 상황이 벌어지는 상황에 이르러야 우리는 그것을 '논쟁'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이 이전 단계의 '순수한 논쟁'이 이루어지는 차원에 개입하는 것은 그다지 유쾌한 일이 아니다. 자신의 논리적 취약성에 둔감한 인간과 함께는 논쟁의 즐거움을 느끼기 힘든 것이니까.

차라리 즐길 수 있는, 그렇기에 위대하고 원대한 논쟁이란 이런 것이다. '짜장면이 맛있느냐, 아니면 짬뽕이 맛있느냐' 혹은 '소수에 의한 부의 독점적 소유가 옳은 것인가, 아니면 다른 형태의 재분배가 옳은 것인가' 이런 논쟁이야말로 흥미진진하며, 싸울 만한 가치가 있다. '현 세계 체제가 과연 적합한 재분배를 이루고 있는가' 하는 문제는 내멋대로 이름붙인 소위 '순수한 논쟁'의 수위에서 이루어질 법 한, 재미없는 이야기다. 들이대는 것이라곤 기껏해야 적당한 통계 수치와 정립화된 이론들. 굳이 취약점을 찾으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는 그저 그런 이야기들이 전부다. 이런 논쟁은 재빠르게 '어떤 식의 소유구조가 옳은 것인가?'하는 가치관의 문제로 전화, 아니 단절적으로 진화되어야 한다. 글러브 같은 건 일찌감치 벗어던지고, 서로의 면상(이라고 쓰고 가치관, 이라고 읽든 말든 상관은 없다)에 죽빵을 날리는 것이야말로 가히 논쟁이라고 할 만하다. 짜장면과 짬봉은 각자의 논리적 정합성을 가지고 있고, 이는 상대의 논리적 정합성과 비대칭적이다. 논리가 부딪혀서 깨질 여지가 없이 서로 미끄러지는 관계. 논쟁은 이 관계에서 나온다. 상호간의 블로우와 가드가 엇나가는 상황에서 간간히 명중하고 마는 유효타. 논쟁이란 이런 것이다. 아흐.

이런 논쟁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이냐고 묻는 사람들을 죄다 모아 내일 모레쯤 땅에 묻어버릴 예정이기에 이에 관하여 그다지 대답하고 싶지 않다. 라고 질러놓고 대답하는 것이 내 취미이기에 조금 이야기해보자면 이렇다. 상대방의 가치관에 개입하지 않은 채로 논리의 참/거짓을 가지고 논쟁하는 것이 도대체 무어 의미있는 것인가? 논쟁이란 것이 너의 승리도 나의 승리도 없이, 단지 논리의 승리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인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 논쟁은 나의 가치관의 승리를 위해, 혹은 너의 가치관의 승리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나는 짬뽕을 처먹고저 하는 너의 입에 새까만 짜장면을 집어넣고 말겠다. 그런 너는 짜장면을 음미하려는 나의 입에 붉은 짬뽕의 국물을 흘려넣어라. 그리하여 결국 의사를 관철시키는 것. 그것이 안되면 결국 소모적인 전투로 돌변하여 서로의 가치관이 깨부수면서, 비교적 많이 깨진 쪽이 '그로기 상태의 권투선수를 연기하는 슬랩스틱 코메디언'을 연기하는 것을 강요당하는 것, 언어와 논리의 영역에서 육체와 코미디의 영역으로 전화하는 것, 그것이 논쟁이 담지하는 심오한 의미인 것이다(그리고 종국에는, 이러한 육체와 코미디를 넘어서 세계와 변혁으로 이행하는 것이 되려나).

사소한 '순수한 논쟁'들이 이러한 원대한 '논쟁'의 수준에 당도하려면, 적어도 하찮은 실수는 범하지 않아야 한다. 동문서답이라거나, 잘못된 숫자를 인용한다거나, 문맥에서 썽둥 잘라낸 인용문을 무슨 만고불변의 진리인듯이 '이런 말이 있다' 식으로 밀어붙인다거나, 유명한 인물을 모셔와서 '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자라.' 그러니까 논쟁 이만하고 가서 잠이나 자자' 따위로 진행한다거나, 명확한 자신의 스탠스-면상이라고 읽어도 좋고, 가치관이라고 해석해도 좋다-가 없는 채로 유령 기사마냥 이쪽 저쪽의 입장에서 상대의 논리에 대한 반론만을 늘어놓는다거나, 논리적 취약성을 무참하게 상대에게 내보이거나 하면 대략 낭패다. '내가 아무도 안보는 데서 이런 주문을 걸면 난 날아다닐 수 있다'식의 언사도 참 좀 그렇다. 이러한 것에 대해서야 쇼펜하우어라는 인간이 잘 이야기해 두었으니 더 할 말은 없다만, 두려운 것은 또 쇼펜하우어의 반어법적 경구도 하나의 '권위'가 되어 '넌 쇼펜하우어가 지목한 4번에 의거, 틀린 논쟁을 하고 있다'식으로 나오는 상황이라면 이것 참 차라리 '너의 공격 패턴은 모두 파악했다. 강강약 강강중약 강중약!'이라고 외치고 싶어진다. 일일히 쓰자면 끝도 없는 이러한 행위는 상대방을 전혀 배려치 않는, 테러에 가까운 만행이다. 상대방의 면상을 가격하려면 상대의 논리적인 가드를 내 논리적인 펀치로 밀어내든지 비껴내든지 해야 할 터인데, 가드를 추욱 내린 채로 무기력하게 서 있는 건 이것 참 때릴 맛 안 나게 하는, 예의와 염치를 상실한 행동이다. 자못 크로스 카운터를 노린다는 듯 비장한 눈매로 쏘아본댓자, 눈매만 비장한 채로 승리하는 경우는 만화에만 나온다.

그러면 이러한 원대한 '논쟁'은 어떻게 결판날 것인가. 사실 결판나지 않는다. 글의 처음에 꺼낸 예시에서처럼, 한 쪽이 일방적으로 두드려맞아 코메디언이 되는 논쟁의 결말은 어쩌면 '원대한 논쟁' 이전 단계의 '순수한 논쟁'으로의 퇴보에 가깝다. 차라리 제대로 된 논쟁의 결판은 이렇다 : 상대방의 가치관, 그리고 나의 가치관을 끝까지 들여다보며 난투극을 벌이고, 부서지고, 어느 한 쪽이 혹은 양자 모두가 웃음거리가 되고, 각자 새로운-마구 뭉게진-면상을 들고 거리고 나가는 것. 거리에서, 삶 속에서, 나의 삶 속에서 그런 나의 가치관을 실천을 통해서 몸으로 증명하는 것. 일테면 짜장면이 맛있다는 사람을 나의 논리를 통해 거대한 모임을 만들어서, 그리하여 언젠가 짬뽕이 맛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모두 나무에 목매달아 척살할 수 있는 역사를 창조하려는 그 모든 실천들. 논쟁은 이런 실천으로 인해서만 결판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이런 정도의 원대한 논쟁은, 안타깝게도 매우 드물다.

공부도 몸으로 하는 것이라는데, 논쟁이야 오죽하것는가. 논리라는 건, 현상에 대한 순수한 논쟁이라는 건 이런 실천을 위한 하나의 전술일 뿐이다. 아주 중요하고 효율적인 전술에 불과한 것이다. 아, 물론 중대한 전술적 승리 없이 전략적 승리를 거두는 것은 은하영웅전설(일종의 SF소설이다)에 나오는 바라트 성계 전투 이전에는 결코 존재하지 않을 것이겠지만.

상기와 같은 조잡한 이유로 인해서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직까지' 나는 대체로 논쟁을 회피하고는 한다.

-ps
자못 쓰고 나니 원영씨의 '찬성과 반대에 대하여'와 비슷한 이야기나 늘어놓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병장 김대현 (2006/03/13 14:49:57)

설사 비슷한 이야기라도 이런 표현에서라면 새로 쓰여진 거나 마찬가지죠. 
화려한 글빨이 다만 글빨로 그치지 않는 드문 분 중의 하나. 

그나저나 읽은 게 없는 우파 건담주의자는 재빨리 도망이나 가야 - [후다닥]    
 
 
상병 송희석 (2006/03/13 19:06:35)

그래도 영준님은 색다른 결론이 나올줄 알았는데! 결국 해답은 단 하나라는 건가? 
물론 나도 원영님이나 영준님같은 해답을 생각하곤 있지만, 
그래도 이왕 문제푸는거 새로운 풀이법을보고싶은데! 
다른 해답을 줄 대섭님을 한번 믿어보는 수밖에!    
 
 
병장 노지훈 (2006/03/14 05:56:17)

그러면 좀 가혹하게 말해보죠. 
요즘 벌어지는 논쟁은 편협한 어떤 인물에 대한 집단 린치입니다. 그가 정당하든 어떻든 이렇게 당한 이상 어떤 대응을 할지 모르겠군요. 
더이상 눈 뜨고 보기 힘듭니다.    
 
 
상병 송희석 (2006/03/14 06:01:55)

지훈/아마 저처럼 대응하지 않을까요?(웃음)    
 
 
상병 박진욱 (2006/03/14 14:08:17)

우하하 감상중 리플. 
'감명깊게 본 만화의 스토리-굳이 이 이야기를 하는 건, 우파 건담주의자인 친구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 못한다-를 논거랍시고 밀어붙이기' 
... 우하하하하하.    
 
 
 상병 박진우 (2006/03/14 14:40:55)

전 좌파 지오니즘! 
으하하하    
 
 
일병 허익준 (2006/03/14 14:50:29)

그럼 저는 중도 사이드7파입니까(...?)    
 
 
병장 주영준 (2006/03/15 10:59:24)

건담주의에 참 많은 분파들이 있었군요. 저는 다만 '열혈과 근성으로 돌파' 라고 외치는 친구녀석이 짜증났을 뿐이었는데[웃음]    
 
 
 상병 박진우 (2006/03/15 16:31:30)

열혈과 근성이라면 
건담주의자라기보다는 류세이.(다른가...)    
 
 
 상병 강계정 (2006/03/17 02:22:19)

노지훈// 걱정마세요 엉망 진창으로 치고받아놓고도 2~3일 지나면 실실 쪼개는 그런 사람이니까요 
저는.. 

덧붙이자면....... 

지온공국에 영광 있으랴!!!!    
 
 
상병 엄보운 (2006/03/23 09:54:22)

글이 올라온 당시에는 오해의 소지를 키울까봐 답글을 달지 않았지만, 전 이 글이 영준씨 최고의 작품이라 생각합니다. 이 높은 유머와 풍자에 진정 감동했습니다. 당신이 이 마을에 챔피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