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책을 읽고 난 뒤에 글을 쓰는 일에 대하여 
 
 
 
 

  우리나라에는 정말 이상한 문화가 커다랗게 자리잡고 있다. 그걸 과연 '문화'라고 불러야 하는지부터가 의심쩍긴 하지만, 아무튼 일종의 문화처럼 사람들 사이에 깊이 뿌리박혀 있다. 약간 천박한 스노비즘과, 다른 사람들의 흐름에 합류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 심지어 그것이 소설이나 시를 읽는 일일지라도 - 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문화. 나보다 먼저 이 문화에 대해 훌륭한 글을 쓴 작가가 있으니, 그의 말을 들어보자(주1).

  "우리나라에는 '알 듯 말 듯한 것을 즐기는 문화'가 존재한다. 예를 들어『내 친구가 떡볶이를 만들어 주었을 때』라는 시집을 읽으면서 충족감을 느끼는 부류가 있다. 그들은 시집이란 어차피 '알 듯 말 듯한' 말들을 모아 써 낸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진지한 이해나 주의깊은 독서가 필요없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이들은『내 친구가 떡볶이를 만들어 주었을 때』라는 시집과『백석 시집』을 똑같다고 생각한다. 시는 어차피 알 듯 말 듯한 말들로 이루어진 것이므로, 두 시집은 그런 이유에서 동일하다는 것이다.
  이런 '알 듯 말 듯한 것을 즐기는 문화'에는, 동양적 글쓰기도 한 몫을 한다. 예를 들어서 중학생도『주역』을 읽을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다 읽고 나서 무언가 심오한 도를 깨달았다고 느낄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런 책들은 추상적이고 '알 듯 말 듯한' 방식으로 쓰여 있기 때문이다.
  반면 서양의 철학책들은 그렇지가 않다. 책 속에서 나름대로 체계가 잡힌 논리의 흐름을 따라 읽어나가지 않으면, 그렇게 해서 끝까지 읽어내지 못하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제대로 읽지 않았으면서도 읽었다고, 이해했다고 사기치지 못하는 구조인 것이다."

  그렇다, 바로 저런 문화가 우리나라에는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저런 문화는 흔히 한 번 읽어봐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을 '알 듯 말 듯한' 느낌으로 넘겨버리게 만든다. 그리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은 '알 듯 말 듯한' 느낌만을 간직한 채로 마지막 책장을 덮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막상 읽은 책에 대해 물어보면 그에 대한 대답은 추상적인 느낌과 추측의 나열이 될 뿐이다. "작가가 뭘 말하려는지는 알 것 같은데, 대체로 내용이 없어. 뭔가 가슴에 와 닿는 게 없다고나 할까." 말들이 허공을 맴돌 뿐이다. 왜냐하면, 자신이 뭘 읽었는지 스스로도 모르기 때문이다. 눈으로는 책에 써 있는 글자를 전부 읽었지만, 책 속에 펼쳐진 사고의 흐름은 따라가지 못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류의 사람들은 쉽사리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머릿속에 있는 막연한 느낌만으로 자신들의 독서가 완결되었다고 확신한다. 그런 이유로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책을 본 뒤에 쓴 글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다른 사람들의 '독서후기'나 '감상평'은 '알 듯 말 듯한' 느낌으로 가득 차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느낌'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그 글들은 특별한 가치가 없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에게 자신이 읽은 책에 대해서 글을 써보라고 하면, 아니나 다를까, '느낌'만이 난무하는 '알 듯 말 듯한' 글이 나타날 뿐이다. 자신의 생각은 토끼꼬리처럼 간신히 붙어 있고, 전체의 내용은 무절제한 인용문과 '내가 만일 주인공이었더라면' 운운하는 초등학생식 독후감으로 도배된다.
  물론 이런 식의 사고방식으로 이루어지는 독서가 - 즉, 피드백이 없는 독서가 - 전혀 무가치하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그런 식의 독서는 남기는 것이 아주 적다는 것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알 듯 말 듯한' 것을 나름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결국 그것은 영원히 '알 듯 말 듯한' 것으로 남을 뿐이다. 반면 그런 것들을 자기 나름의 체계를 세워 이해한다면, 사고의 틀은 확장될 것이고 그 깊이는 깊어질 것이며, 그 사람의 인생 또한 윤택해지리라 믿는다(이해하며 읽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그런 의미에서, 현재 일본에서 가장 뛰어난 저널리스트이자 저술가라고 불리는 사람의 말을 들어보자.

[……]사람이 뭔가를 배울 때는 교수가 강단에서 말하는 것을 그냥 듣기만 해서는 결코 참으로 배웠다고 할 수 없다. 책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다. 그저 읽기만 해서는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듣고 있을 때나 읽고 있을 때는 다 이해한 것 같아도 실제로는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뭔가를 정말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간단한 검증법은 배운(인풋) 것을 아웃풋 해 보는 것이다. 아웃풋 형식은 아무래도 좋지만, 일반적으로는 말하거나 쓰는 것이다. 아웃풋 해 보지 않고서는 자기가 정말로 그걸 이해했는지 아닌지를 알 수 없다.[……]

  그의 또다른 말을 들어보자.

[……]학습을 지적인 인풋이라고만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머리에 산더미 같은 지식을 채워 넣어도 그 지식을 아웃풋 하는 지적인 글쓰기를 못하고 지적인 발언도 못하는 사람이라면 한낱 바보와 다를 것이 없다. 자기 딴에는 인텔리가 되었네 해도, 지적 아웃풋이 전무한 사람은 객관적으로 머리가 텅 빈 사람과 다를 것이 없다. 구체적인 지적 아웃풋을 아직 시도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은 자신의 지적인 능력을 아직 객관시 할 수 있는 수준에까지 다다르지 못한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결국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책을 읽고 난 뒤에 글을 쓰는 일이 전혀 무용하고 가치없는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책 속에 길이 있다'는 말이 있다. 내게 이 말은 어떤 비유적인 의미가 아니라, 실제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책 속에는 분명히 어떤 길이 있다. 우리는 그 길을 따라서 걷는 것이다. 그러나 그 길은 단순히 즐기기 위해 걷는 산책로가 아니다. 그것은 끝에 닿기 위해서 걷는 길이며, 그 길 끝에 닿았을 때 - 마지막 책장을 덮었을 때 - 거기에서 또다른 나를 만나는 길이다. 새로운 사고로 무장한 나를 만나는 길이다. 우리는 주의깊게 갈 길을 정해야 할 것이며, 정말로 걸을 만한 길을 만났을 때 시간을 들여 정성스럽게 걸어야 할 것이다. 사람에게 주어진 시간은 정해져 있고,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길들이 - 책들이 -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아마도, 형편없는 길을 걸으면서, 혹은 대충 길을 걸으면서 낭비할 시간 같은 건 없을 것이다(주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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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지금 내 수중에 그의 책이 없기 때문에 기억에 의존해서 재구성한다. 주의깊게 읽었기 때문에 작가의 의도가 대체로 살아있을 것이다. 정확한 인용문을 쓰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주2) 이 글은 어떤 전제를 바탕으로 쓰였다. 그것은 파트리크 쥐스킨트가 말한 의미의 "너는 네 삶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명제다. 이 글은 자기의 삶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느끼고, 자신이 좀 더 발전된 모습으로 나아가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쓰였다.
  그리고 부언하자면, 세상의 모든 책들을 '정성스럽게' 읽어야 할 필요는 없다. 천천히 읽어가면서 느긋하게 즐겨야 할 책도 존재한다. 또한 가끔은 머리를 비운 채 책을 읽는 시간도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밖에는 읽을 수 없는 책들도 많다. 내가 이 글에서 '정성스럽게' 읽을 대상으로 설정한 책은, 흔히 말하는 고전(古典)이 대부분을 차지할 것이다. 그리고 현대의 고전 역시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 

  
 
 
 
병장 허원영 (2006/02/22 23:52:06)

원래 [Ex-Libris]를 매주 수요일에 쓰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오늘은 길게 써 놓은 글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아 62전대 시절에 썼던 [에세이]를 올립니다. 올리고 보니 바로 밑에 있는 제 칼럼과 연관성이 있는 것도 같군요.    
 
 
병장 주현탁 (2006/02/23 00:05:10)

서양철학이 확실히 체계같은게 있는것 같아서 읽고나면 '아, 이렇게 되는구나.' '이렇게 연결되는구나.' 같은 무언가 남는게 있지만, 그래도 '알 듯 말 듯한' 동양철학이 끌리는 건 저도 그런걸 즐기는 문화에 빠져서인가요? 
무슨 책이든 읽고 많이 생각하는게 중요한거겠죠    
 
 
병장 김태경 (2006/02/23 09:04:07)

전에 읽었던 글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62전대 시절에 올리셨던 글이군요. 왜 책을 읽고 왜 책을 읽은 후에 독서후기를 쓰는지. 아래 글과 잘 어울리는 에세이네요. 
질문이 있는데, 주1의 작가가 누군가요?    
 
 
병장 허원영 (2006/02/23 09:39:26)

태경 님 / 장정일입니다.    
 
 
상병 김강록 (2006/02/23 10:08:53)

책을 읽고 나서 절로 떠오르는 소감을 한 자 적고 나면 뿌듯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의무감을 가지고서 억지로 쥐어짜는 건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하라는 강령에 위배된다고 봅니다. 가령 책에서 내가 발견할 수 있는 최대의 의미는 100인데, 아직 그걸 다 찾아내지 못했는데, 서둘러서 글을 쓴다는 건 현재의 불완전한 독해를 확정시키고 그 안에 책의 의미를 가두는 결과를 낳게 되지 않을까 합니다. 마치 오락실 스트리트 파이터 Ⅱ 보너스 스테이지에서 떨어지는 드럼통을 몇 개 놓친 기분, 슬램덩크에서 3점슛을 몇 개 놓친 기분, 퍼펙트 클리어를 향한 그리움은 책을 읽을 때도 적용되는 거 같아요. 

물론 그것도 너무 강박 관념이 되면 곤란하겠지만(왜냐하면, 우리는 책을 정신병자가 되기 위해 읽는 게 아니니까), 역시 문제는 얼마나 스스로에게 성실한 독해를 하느냐가 아니겠어요. 뭔가를 얻기 위해 책을 읽는 거라면, 최대한 자신이 먼저 능동적인 독해로 뭔가를 찾으려 해야지 않을까요.    
 
 
병장 김대현 (2006/02/23 11:31:29)

현탁님 /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논리적 사고"이고 이를 보완해야 한다는 건 확실하지만, 그렇다고 "알 듯 말 듯한" 부분에 대한 선호까지 내동댕이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그 "알 듯 말 듯한" 부분이 세상과 나에게 긍정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계속 신경을 써주는 센스는 필요하겠고, 그 와중에 논리적 사고는 필연적으로 따라오게 되어있는 것이겠구요. 
사람은 논리로 자랄 수는 있어도 논리에 감동하지는 못한다, 라는 말을 저는 "논리는 소용없다"가 아니라 "논리가 세상의 전부는 아니다"로 읽고 싶습니다. 탄탄한 논리를 바탕으로 서되, 논리 너머의 것을 바라봐야 한다는 점에서, '알 듯 말 듯한' 것에 끌리고 그런 것을 즐긴다는 현탁님의 말씀은 충분히 당당할 수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알 듯 말 듯한" 것을 좋아하는 자신의 취향을 당당하게 만들기 위해서라도 논리적 사고는 반드시 필요하다는 얘기겠죠.    
 
 
일병 허익준 (2006/02/23 11:47:46)

- 첨부한 일본인 작가분의 성함이 혹시 타치바나 타카시 아닌가요?(웃음)    
 
 
병장 허원영 (2006/02/23 12:14:11)

익준 님 / 그렇습니다.    
 
 
병장 한상원 (2006/02/23 12:59:52)

그간 써온 독서후기에 대한 반성이 마구마구 되는군요.(난 뭘 썼던거지. 흑.) 
그래도 저의 경우에는 써보는건 다시 읽기도 되고, 쓰면서 또 다른 생각들로 책의 내용을 엮어낼 수 있어서 좋더라구요. 다시 읽으면 또 새로운 의미를 발견해내는 책들이 있는 것 보면, 한 권의 책을 완전히 알기 위해서는 무지한 노력과 정성이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한동안 칼럼쓰느라 독서후기를 소홀히 했는데, 초심으로 다시 잘 써봐야겠군요.    
 
 
 병장 김동환 (2006/02/23 17:03:22)

알듯말듯한 것도 좋고, 똑똑 부러지는 논리적 사고도 좋고, 유려한 원영님의 글솜씨도 좋고. 
아.. 아름다운 퇴근시간이에요.    
 
 
병장 김석윤 (2006/02/23 23:43:13)

원영씨 글을 보니 점점 아리송해져요. 어찌 이렇게 글을 잘 쓰시는 거예요.? 
나도 모르게 설득당하려고 해서 정신을 가다듬고 나의 독서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봅니다..음.. 그래. 문제가 있는 것 같애.. 읽고 나면 알듯모를듯 하잖아.. 정리도 안되고.. 글로 표현하려고 해도 잘 써지지도 않고. / 아니야 아니야 이 세상에는 말로 표현되어 지지 않은 것들이 얼마나 많은데.. 니 머리 속엔 그런 것들로 가득차 있는 거라구. / 제대로 읽지 않아서일수도 있잖아. 다른 사람들은 잘만 표현하던걸.? / 그것이 절대적인 진실은 아니잖아. 책 속의 진실은 니 안에 있어. / 에이.. 그런게 어딨어?.. 

아.. 머리 아파요.. 그냥 설득당해버릴까봐.. 나쁜 것 같지도 않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