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한 언어를 위하여 
 
 
 
 
익숙하진 않지만, 먼저 한 장면을 소개한다.

허리에 이물감이 느껴지고 욱신욱신 아픈 것이 어딘가 문제가 있는 것 같아 장요환 씨는 망설이던 끝에 병원을 찾았다. 의사에게 자신의 증상을 설명하고, 엑스레이를 찍었던 장요환 씨. 촬영을 마치고 이십여 분 기다렸을까, 의사가 자신의 척추가 노골적으로 드러나 흰뼈가 유난히 앙상해보이는 사진을 들고 진찰실로 들어온다. 그는 사진을 책상 옆에서 어슴프레 빛을 내는 감광보드에 걸더니 날카로운 작대기로 뼈들을 짚어가며 장요환 씨의 척추 상태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한다. 

“장요환 씨의 경우에는 7번 척추와 8번 척추 사이에 페리콘드리움(perichondrium, 연골)이 임플레임(inflame,염증을 일으키다)되셨어요. 그래서 이물감이 느껴지고 증상 부위에 척추가 마찰되면서 아프기도 하는겁니다. 절개한 후 ATP를 한 열흘 복용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난감한 장요환 씨 왈

“뭐가 어떻게 됐다구요? 뭘 먹으라구요?”


이 상황은 내가 만들어낸 완전히 가상적인 상황이다.(ATP는 그냥 내키는대로 적었다) 그런데 이 가상적인 상황은 역설적이지만 완전히 상상의 산물일까? 의사든 다른 전문직이든 우리는 사회생활을 통해서 자신이 능통한 분야와 다소 거리가 있는 생경한 영역들을 접한다. 병원에 갔을 경우에 자신의 병명과 치료에 대해서 낯선 용어들을 접하고, 자동차 수리를 맡기러 갔을 때는 자동차 부품들에 대한 난해한 설명에 부딪히기 일쑤다. 식당에 가서도 외국이름으로 되어있는 요리명들을 보며 이것이 대체 무엇으로 만드는 음식인지 차림표만으로는 당최 알 수가 없을 때도 있다. 'fried rice with mushroom'(버섯볶음밥)이라고 적어놓은 메뉴를 보면 기가 찬다. 

물론, ‘친절한’ 사람들은 병명이든, 부품이든 간에 알기 쉽게 정보수용자의 언어로 설명을 해주어 우리의 난감함을 덜어준다. 하지만 일정 영역이나 특정 지위에서 사용되는 그들만의 언어는 그들과 나 사이에 간격을 벌여놓는 낯설음을 불러일으킨다. 문과와 이과로 사람의 학문적 성향을 이분하는 교육을 받고 성장한 세대가 인문학과 과학 양쪽에 대해서 느끼는 그 낯설음은, 이제껏 쉬이 접해보지 못한 언어들로 인해 더욱 배가된다. 분야가 다르니 이해도가 떨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지 않나 생각할 수도 있다. 허나, 사람과 사람 사이의 첫인상이 무의식적으로 많은 영향을 미치듯 처음 만나는 언어의 지나친 생경함은 익숙한 것만을 좇으려는 보편적(이라 추측되는)인 성향을 부추긴다. 봐도 잘 모르는 말만 있으니 확고한 의지가 있지 않은 한에는 더 보기 싫은 것은 자명하다. 그리고 그 확고한 의지라는 것 역시 쉽게 생기도록 놔두지 않는 세상이기도 하니까.

이렇듯 이 간격은 일차적으로 언어의 문제고, 2차적으로는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마음가짐, 타인을 대하는 친절함과 관련된 문제다. 친절하지 않은 언어는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타자화시킨다. 여성학자 정희진의 말처럼 ‘어디어디서 보자(see)’라는 말이 시각장애인들을 배제하듯, 불친절한 언어는 그에 익숙하지 않고 그를 설명하기 힘든 지식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을 배제한다. 언어는 인간의 탁월한 능력이다. 그 능력으로 우리는 사고와 사상을 교환하고, 서로의 감정의 의미를 해석할 기반을 갖는다. 언어를 기반으로 힘을 모으고, 또 대립한다. 하지만 언어 사용에서 나타나는 불친절은 종종 이런 유대를 가로막는 벽이 된다. 그리고 각기 다른 학문 분야의 거리를 두게 하는 원인이 된다. 때문에 나는 너와 나의 원활한 대화, 내가 너를 이해하고 니가 나를 이해하기 위한 친절한 언어를 사용하자고 말한다.

이에 대한 가장 강력한 반론은 문학을 언급하면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문학의 언어는 때에 따라서는 쉽고 또 때에 따라서는 난해하다. 시를 보아도, 화자나 시인의 그 시상을 문학적 언어에 생경한 사람은 대체 이게 뭔소리인지 알 수 없어한다. 그러면 그저 쉬운 문학으로 가자는 건가하면, 그렇지는 않다. 친절한 언어를 사용하자는 것은 그렇다고 자신의 무기를 버리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문학적 언어는 시인이나 작가의 세상을 향한 강력한 무기다. 문학작품을 정말 맛있게 읽어본 사람은 다들 알겠지만, 곰곰이 생각해보고 이리저리 그 의미를 음미했을 때야 비로소 이름이 불리워진 꽃처럼 그 본모습을 보여주는 문학작품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 아름다움은 그 작품이 지닌 본모습이기도 하겠지만, 독자의 애정 어린 노력이 곁들여졌을 때 더욱 환한 법이다. 언어와 독해는 상호작용이다. 언어가 친절해지면, 그 친절함에 부응하여 독자는 자신의 소양을 닦아야 하고, 행간의 의미를 읽어내기 위해 집중하는 독해를 해야 한다. 무협지나 가벼운 가십거리처럼 쉽게 읽을 수 있는 텍스트는 받아들이기 쉬운 친절한 언어로 씌여있을지 모르지만, 그 친절함은 결코 우리를 발전시키지 않는다.  

결국,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자유로운 언어를 구사하면서도 다양한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만큼 보다 겸손해지고 친절해지고, 관대해지자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글을 쓸 때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앞서 의사의 예와도 같이 자신이 맡은 분야에서 자신이 사용하는 모든 언어를 자뻑 모드로 자신에게만 통하게 하지 말고 다른 사람이 그 지적 희열을 함께 공유할 수 있도록, 세상의 이치를 함께 이해할 수 있도록 자신의 언어를 가지런히 하자는 것이다. “따라올테면 따라와봐!”가 아니라. 언어를 자신의 철학적 기반으로 삼았던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에서 ‘형이상학적’으로 사용해 온 언어들을 ‘일상의 사용’으로 되돌리는 것에서 자신의 철학을 시작한다. 그래야만 누구든 일상의 언어를 통해 보다 높은 차원의 이해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학에서 모든 사람이 이해할 만한 표현만을 사용하자는 것은 문학의 아름다움을 말라 비틀어지게 하는 것이며, 작가와 시인들의 세계에 대한 심대한 폭력이다. 반면에 모든 용어와 맥락을 설명하면서 글을 쓰거나 말을 하는 것은 지나치게 비생산적일 수 있다. 특정 목적이나 독자를 전제로 하는 지극히 전문적인 영역도 분명 존재한다. 절대적인 기준이란 결코 찾을 수도 없고 찾으려해서도 안된다. 모든 사람들의 지적인 수준과 이해력 등을 모두 감안하면 대체 무슨 말을 사용하더라도 문제가 나올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의문에 까지 다다르면 ‘우리는 다르다’ 라거나, ‘절대적인 규칙같은 것은 없다’라고 탄식하는 상대성의 벽에 부딪힐지도 모른다. 허나, 우리가 친절함을 발휘할 수 있는 부분은 의미를 풀어내는 방식이 아니라 ‘언어’다. 형이상학적이고 난해한 언어에서 일상적인 것으로 고개를 돌리면 상대성의 벽을 어느 정도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용어에 대해서 친절한 설명을 조금만 덧붙이고, 사용하지 않아도 될 전문용어는 피하는 가벼운 친절은 우리의 소통을 훨씬 수월하게끔 만들어준다. 특히 온라인 공간에서 용어에 대한 불명확한 사용이 무수한 오해를 낳기도 한다는 것은 이미 많은 경험을 갖고 있다. 허나,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소위 ‘대중적 글쓰기’라는 것인데. 이 말은 허구다. 글쓰기는 개인의 자유고 누군지도 모르고, 그 역량이나 관심 또한 불분명한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글쓰기는 누구나 쉽게 즐기고 소비할 수 있는 기성복과 같은 상품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나는 대중적 글쓰기가 아니라 친절한 글쓰기를 말한다. 

취직한 누님이 고급 레스토랑에서 쏘는 이름조차 낯선 음식이라도, 음식의 재료라든지, 무슨무슨 드레싱이나 뭐시기 소스와 곁들여 먹으면 더욱 맛있을 거라는 설명을 들으면 더욱 그 음식의 맛을 즐길 수 있는 것처럼 자신이 만들어 내어놓은 글이라는 음식을 먹는 사람이 더욱 맛있게 먹을 수 있도록 위생상태를 스스로 검사해보고, 음식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하는 것은 글을 쓰는 사람의 도의가 아닐까. 비문이나 맞춤법은 두말하면 잔소리고. 모두의 구미에 맞게 글을 쓸 수는 없다. 하지만 최소한 구미에 맞는지 아닌지 판단할 수 있도록 통(通)해야하지 않겠는가. 먹는 사람은 그 음식과 음식을 만든 손길에 집중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병장 한상원 (2006/02/12 13:43:20)

강록군의 칼럼<송혜교를 지켜라 >에서 잠시 언급되었던 '대중적 글쓰기'에 대한 내용이 참고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최근 여러 댓글들에서 보였던 특정 용어들을 피하자고 말하면서 그 근거가 되는 생각들을 써봤습니다. 언어를 늘 사용하지만 그래도 언어에 대해 쓰는 것은 너무나 어렵습니다. 하나의 예시를 들었지만 여성학자 정희진 씨의 책을 읽으면서 타인을 배제하는 나의 언어에 대해 늘 반성하고 또 반성합니다. 언어는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요.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병장 한상원 (2006/02/12 15:58:11)

참, 질문이 독해가 안되는군요(땀) 

'자주 쓰는'과 '남용하는'은 의미가 다소 중첩되고 있지 않나요. 부정적인 언어를 마구 쓴다는 의미에서 '남용'이란 말을 쓰셨는지요. 그리고 그 부정적인 언어를 자주 쓰는 이유가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사용하지 않도록 하게 하기 위해서라면, 그것은 너는 어떻게 판단하느냐 라고 물으신게 맞나요. 그리고 어디에 대한 판단이란 건지요. 그 글쓴이의 시도에 대한 판단입니까, 아니면 그 언어에 대한 판단입니까. 

어쨌든. 만약, 그렇다면.(제 독해가 맞다면 말이죠) 

첫번째 경우, 특정 언어 -희석님의 질문의 맥락에서는 언어라기보다는 '어휘'가 맞을지도 모르겠군요 - 를 단순 반복해서 사용한다고 해서, 읽는 사람들이 그 어휘를 사용하지 않게 만드는 마법과 같은 일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되려 묻고 싶습니다. 글의 맥락에 암시적으로 이런 어휘를 사용하지 말자거나, 어휘의 부정적인 측면을 강하게 드러냈다면 글쓴이의 그런 의도가 먹히겠죠. 

두번째 경우, 이 어휘를 사용하지 말자는 의도에서 그 어휘를 사용하는 것은 그저 그 어휘를 도구적으로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별 무리가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덧, 언어를 올바르게 사용하자는 칼럼에, 댓글이 해석이 힘들다니. 글쓴이의 입장에서 참 안타깝습니다. 제 이해에 부족한 면이 있다면 다시 질문을 해주시길.    
 
 
병장 한상원 (2006/02/12 16:50:17)

무슨 말씀하시는건지 희석씨를 '비난'한다기보다는 '비판'에 가까운 입장에서 참 의아하다는 말씀을 드릴 수 밖에 없군요. 논리학 서고(?)를 씹어보자는 이야기, 그리고 원영씨 이름이 왜 나오는지. 저를 잘못 표기 하신거라면, 저를 독해불능의 세계로 빠뜨린다는 건 대체 무슨 의도인지. 마법과 마술이 어떤 맥락에서 달라지는지, 비트겐슈타인이 방법서설을 더 알맹이 없는 책이라 정의를 내릴 수 있는건지. 죄다 모르겠습니다. 제 이해가 짧은건가요? 제가 다시 한번 물어서, 다시 댓글을 다시기보다는 한번에 친절해주셨으면 참 좋겠는데 말이죠. 

< 그 '간격'을 위와 같은 방법으로 마술을 부리는 자(저)가 계속 가까이 하기 먼당신으로 만들어버리는것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 부분이 주 내용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또 의문인 것은 '간격'이라는 말 자체를 가까이 하기 먼 당신으로 만든다는 이야기인건가요. 

어쨌든. 질문의 핵심은 '-주의, 스머프'에 대한 이야기 인것 같은데 그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겠습니다. 그와 같은 어휘들이 자주 쓰인다고 해서 그 어휘들이 담고 있는 의미가 퇴색되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예전에 '간격'이라고 말을 사용했던 것은, 그 어휘들이 글의 필수적인 부분이 아닌 곳에서 등장한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고, 동시에 그 어휘들에 생소한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 '-주의'나 '스머프-사실 스머프가 뭔지 모르는 분들도 충분히 많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 담고 있는 의미에 대해 그 글만으론 독해가 힘들 가능성이 컸기 때문입니다. 

사회구조나 이념들을 다룰때는 그런 어휘들을 사용하지 않기란 힘들 수가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사용을 자제하는 것이 친절한 태도일 수 있다는 것이고. 또한, 그 어휘들을 다룰 경우라 할지라도 그 맥락과 그 어휘가 담고있는 범주를 명확히 하는 것이 읽는 이를 위한 배려가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글을 썼습니다. 

희석님의 말에 등장하는 무한반복의 마술이란건 대체 무엇인가요. 민주주의를 위하여, 민주주의에 의하면, 민주주의에 따르면, 그것은 민주주의적 태도이다, 민주주의의 사상에 근거해서,.,,, 이런 것들을 의미하시는 건가요. 읽는 사람은 이런 민주주의라는 개념을 반복해서 받아들이면 대체 민주주의라는 것이 어떤 것을 가리키는 개념인지 혼동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민주주의의 종류는 또 얼마나 많은가요) '민주주의'라는 소중한 개념을 결코 버리지는 않을겝니다. 제가 염려하는 부분은 그런 어휘들이 현학에 가까이 쓰여지는 경우고, 또한 좋은 글이라 할지라도 읽는 사람들이 그 어휘의 어려움에 휠을 거칠게 흘려버리고, 창을 닫아 대화까지 차단되는 경우랍니다. 

질문이 명확하지 않으니, 답변을 해도 답변을 한건지 스스로도 의문이 듭니다. 딴지를 거셨다고 스스로 말씀하셨는데, 딴지가 아니라 딴소리가 되지 않게 대화에 등장하는 어휘의 의미들을 분명히 세워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희석님은 희석님대로 저는 저대로, 이 대화를 통해 얻어갈 수 있는 것이 없고 그저 계속 답답할 뿐입니다.    
 
 
병장 허원영 (2006/02/12 20:35:27)

이런 식의 논의(여러가지 뜻으로 해석될 수 있겠지만, 여기서는 한쪽의 의미전달이 불명확하여 결국 무의미해지는 논의)에 제 이름이 난데없이 나와서 상당히 불쾌하군요. 그래서 여러번 생각하다가 답글을 답니다. 

희석 님께 묻겠습니다. 주제넘을지는 모르겠지만, 인사치레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글을 몇 번 정도 읽어보고 답글을 다시나요? 저는 이게 참으로 궁금합니다. 아무리 독해능력이 뛰어난 사람이라고 해도 모니터를 통해 글을 읽으면 머리 속에 쏙쏙 들어오기가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저 같이 둔한 사람의 경우에는 적어도 5-6번 정도는 글을 읽고 답글을 달지요(물론 칼럼이나 '내글내생각'에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좀 복잡하거나 이해가 잘 가지 않는 글-답글에 대해서는 10번도 읽고 20번도 읽습니다. 
희석 님의 답글을 보면, 글을 충분히 읽고 천천히 생각하면서 답글을 달았을 때 있을 수 없는, '불필요한' 오해와 오독이 종종 나타납니다. 그리고 글에 쓰이는 비문과 오자는 가독성을 떨어뜨리구요. 둘 다 천천히 읽고 천천히 생각하면서 천천히 쓰면 충분히 예방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희석 님은 아마 이렇게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왜 내 답글에는 이렇게 비난이 많은가?' 제 생각에 희석 님의 답글에 달리는 것은 '비난'이 아니라 '물음표'인 듯 합니다. '의문'의 물음표도 있을테고, '의아함'의 물음표도 있을테지요. 즉, 희석 님의 글-답글에 존재하는 '논리적인 구조'나 '글의 내용'에 대해 답글이 달리는 것이 아니라,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 '비 논리적이며 맥락이 닿지 않는 부분'에 대해 답글이 달리는 겁니다. 

한 두 명이 그런 반응을 보인다면, 그건 일종의 '오해'로 치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 그런 반응이 나타난다면 글쓴이 스스로 생각해 봐야 할 이유가 충분히 있습니다. 내가 글쓰는 방식에 무언가 문제가 있는 건 아닌가, 하구요. 
또한 희석 님의 생각 자체에 충분히 공감하고 논의할 만한 주제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여러 차례의 '무의미한' 대화를 통해 나타나게 된다면 그것 역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쉽고 정확하게 논의를 이루어 나가는 길이 바로 옆에 있으니까요. 

기왕 주제넘게 나왔으니 아예 시건방지게 건의하겠습니다. 좀 더 천천히 읽고 답글을 써 주십시오. 세 번 정도 읽고 글을 써주시면 아주 좋겠습니다. 쓰고 나서 바로 버튼을 누르지 마시고, 쓰신 글을 몇 번 읽어보신 후에 답글을 올려주십시오. 그러면 불필요한 말싸움과 무의미한 논의도 많이 줄어들 거고, 희석 님과 저는 서로 더 많은 것을 얻어갈 것입니다. 


덧붙임) 오해를 막기 위해 미리 얘기해두지요. 저는 이 글을 어떤 '우월감'이나 '자만'의 상태에서 쓰지 않았습니다. 그런 감정을 가질 근거도 저에게는 없습니다. 저는 상식선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제 글이 사실 거의 다 그렇습니다만). 희석 님의 글을 보면, 저는 희석 님이 읽은 어려운 책들을 겨우 이름만 알고 있을 정도이며, 희석 님의 '전공'에 해당하는 어려운 개념들도 잘 모릅니다. 인생의 경험 역시 짧구요. 그렇지만 아닌 건 아닌 겁니다. 서로에게 좀 더 나은 길이 있다면, 그 길을 가는 것이 훨씬 좋겠지요. 희석 님이 부디 넓은 아량으로 제 뜻을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상병 송희석 (2006/02/12 21:54:50)

원영님// 누누히 또 말하지만 정말로 반성하고 또 반성합니다. 
위에 코멘트는 전부 지웠습니다. 특히 저같이 쓴글은 절대 후회도 안하는 제가 지운다는것으로 
조금은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물론 원영님 을 말한것으로 인해 기분나쁘신것까지 사죄드립니다. 물론 철저히 다른뜻이 
있었지만 그것역시 변명일테니 말이죠! 
앞으로 저도 반성하는 의미로 모든 질문과 모든 의문점과 모든 생각들은 철저히 
내글내생각을 통해서 글을 쓸까 합니다. 
이러면 어느정도 서로에게 좋은 길이 될듯 하네요! 
물의 아닌 물의를 일으켜 죄송합니다. 
다들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병장 권기범 (2006/02/13 00:04:31)

음. 일단 저의 언어가 어떤 언어인지 성찰하는 것이 우선사항으로 삼아야 되겠군요. 그런데 친절한 것도 훈련이 많이 필요할것 같아요. 글을 더 많이 쓰고, 더 많이 고치고 싶어집니다.    
 
 
병장 육이은 (2006/02/13 08:22:02)

친절한 상원씨...    
 
 
병장 한상원 (2006/02/13 08:35:58)

이은님/ 헉..    
 
 
병장 김형진 (2006/02/13 08:43:52)

상원님, 글 잘 읽었어요. 머릿속에 쏙쏙 들어오는게, 명강사님 같아요. 
사실 어제 달린 댓글 읽다가 머리가 아팠었는데.    
 
 
 병장 김동환 (2006/02/13 09:58:37)

문득 치아교정의 추억이 떠오르는군요. 
저는 의사선생님이 하라는 거 안하고 하지말라는거 하고 그러다가 치아교정을 7년쯤 했는데요. 
처음에는 의사들끼리 하는 말이나 간호사에게 지시하는게 무슨뜻인지 하나도 못알아들었는데 
7년쯤 개구기를 끼고 그 의자에 앉아있다보니까 순전히 그간 쌓여온 체험으로 그들의 언어도 
왠만한건 다 알아듣겠더군요. 
어느날인가는 의사가 간호사한테 "이 환자 치아 석고본 뜰 준비하세요"라는 의미를 차트에 적길래. 
"쌤. 저 오늘 20분안에 가야해서 그러는데 석고본은 나중에 제가 따로 와서 간호사 누나랑 뜨면 안될까요?"라고 한국말로 얘기하니까 둘이 흠칫 놀라더군요. (그날 마침 여자친구랑 데이트가 있었는데 시간이 별로 없었걸랑요.(땀)) 

물론 언어적인 고립으로 타자가 되기도 합니다만 제가 그때 느낀건 이미 이사람들의 대화가 
발화되기 이전에 저는 타자였다는 거에요. 학문적인 대화가 오가는 현장에서 해당지식을 갖고있지 
못한 사람이 외톨이가 되는것도 같은 경우입니다. 어떤 소통의 상대로 인식되지 못하는 것이지요. 

예로드신 ‘어디어디서 보자(see)’라는 말이 시각장애인들을 배제하긴 합니다만 이 말은 시각장애인과 
비 시각장애인과의 대화가 아니라 비 시각장애인들끼리의 대화임이 교묘히 전제되어 있습니다. 
'보자(see)'라는 말은 서로가 시각장애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기때문에 사용되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길래 저만 그런것이 아닐까 싶어 제 주위 사람들에게도 실험해본건데(웃음) 
미녀 시각장애인의 데이트를 가정했을때 '보자(see)'라는 표현을 사용한 사람은 없었거든요. 
우리는 '보자(see)'이외에도 해당 상황에 적용할 수 있는 어휘들을 많이 가지고 있고, 이 경우 실험 
대상들이 어떤 친절한 말하기를 염두에 두고 표현했다기보다는 시각 장애인과의 만남이라는 
상황을 무의식적으로 '인식'했다는 설명이 정확할 것 같습니다. 

언어가 인식을 만드는 것도 맞고, 인식이 언어를 조종한다는 것도 맞는 말인데. 
그냥 상원님 글을 읽고서 드는 생각을 써 봤습니다.(땀) 
저도 친절한 언어를 쓰는게 꿈인데 우리 계나 하나 할까요? (웃음)    
 
 
 병장 한상천 (2006/02/13 10:05:27)

예전 그러니까 상원씨의 첫칼럼으로 기억하는데 인터넷 세계의 소통하기란 칼럼을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새로운 세계에서의 가능성을 내포하는 인터넷이지만 그 만큼 또한 어려움이 있다는것을 말했던걸로 기억합니다.    
 
 
병장 오철수 (2006/02/13 10:14:28)

글의 친절함을 말하는 정말 친절한 글입니다.    
 
 
병장 한상원 (2006/02/13 10:33:47)

동환씨/ 치과에 대한 이야기 잘 읽었습니다. 보자(see)라는 말에 대해서 조금 부연드리겠습니다. 동환씨의 실험(?)처럼 이미 특정 상황을 전제한다면-장애인을 만난다는- 아마 의식적으로 언어를 고치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겠지요. 하지만 일상에서는 안그렇거든요. 

하지만 언어는 공통적인 인간의 것이고,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모두 인간이지요. 그런데 언어를 굳이 구분해서 의식적으로 장애인용과 비장애인용인양 나누어 사용한다는 것에서 '배제'가 나타난다고 생각합니다. 언어는 화장실이나 휠체어와 같은 도구가 아니니까요. 장애인들의 입장에서는 똑같은 사람인데 달라야 하지 않을 것에서 다르게 대우받는건 배제라고 느끼는거죠. 정희진씨의 책을 읽으면서 저는 본다(see)라는 단어를 늘 아무 생각없이 '나중에 뵈요'와 같이 사용하면서 보편적인 언어라고 생각하면서 써왔었는데 많은 반성을 하게 됐거든요. 여성주의에서 말하는 남성중심의 배제적인 언어들도 그와 비슷한 맥락이죠. 

이번에 정모 나가시면 계한번 추진해보세요. 전 꼭 가입할게요(웃음)    
 
 
상병 노지훈 (2006/02/13 11:34:31)

본다는 말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네요. 
정말 친절한 상원씨(웃음)    
 
 
병장 김태경 (2006/02/13 13:25:41)

친절한 글 잘 읽었습니다. 
고등학교 이후로 인문계열과 거리가 멀어서 항상 '~적', '~주의' 등의 단어를 보면 머리가 아파왔는데 조금은 위안도 되고, 반성도 되네요. 

정희진씨가 말한 '보다(see)'의 문제는, '쓰다(write)'라는 것이 종이에 펜으로 쓰는것만을 의미하다가 타자기가 등장하면서 의미의 범위가 넓어진 것과 마찬가지로, '어디서 봐', '내일 보자'라는 말이 일반적으로 사용되면서 의미를 확장해서 단지 '보다'의 개념이 아니라 '만나다'의 개념도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게 맞다는 생각이 들어요. '학교앞에서 보자'라고 말하면서 눈으로 보겠다는 생각을 하는건 아니거든요. 실제로 시각장애인에게 물어보지는 못하겠지만, 그들도 큰 의미없이 '내일봐'라고 말하지 않을까요.    
 
 
병장 김대현 (2006/02/13 13:26:55)

상원..씨가 말한 바로 그 이유때문에 제가 상원씨와 강록씨의 글을 정말 좋아합니다. 
일상적 파시즘이라 불릴 만한 주제에서 가장 먼저 표적이 되어야 할 것은 "나 좀 읽었네" 식의 우월감이 아닐까 생각해요. 그걸 제어하는 것이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더라구요. 다시 보면 저 "일상적 파시즘"이란 말도 얼마나 묵직한 언어인지. 쉽게 쓰는게 어렵다는 말을 가면 갈 수록 뼈저리게 깨닫습니다. 그것은 글을 쓰는 스킬 이전에, 생색내고 싶은 자신과 맞서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 계, 저도 한자리 끼워주시겠어요? [웃음]    
 
 
병장 한상원 (2006/02/14 01:40:18)

'보다(see)'라는 예가 예상대로 이런저런 의문을 낳고 있군요. 그 사용에 있어 의미의 범위가 넓어진 것이라는 태경씨의 말에 공감합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드는 의문이 있습니다. 시각장애인에게 정말 확인받을 수 있는 문제는 아니지만, '내일봐'라는 말을 비장애인이나 장애인이 함께 아무생각없이 말하게 되는 것 자체가 문제의 본질 아닐까요.(저도 공부가 별로 안되서 저의 개인적인 생각일 뿐입니다만, 괜히 잘 모르는 이야기를 써서 스스로 해명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래서 땀.) 

'보다'라는 말이 그냥 사용될 수 있는 환경, 보다라는 말이 큰 의미없이 쓰여지고 있는 분위기, 이런 것들 자체가 정말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그간 별 생각이 없었다'라는 걸 반증하는건 아닌가 조심스레 생각해봅니다. '보다'라는 말을 사용하든 사용하지 않든지 이는 어쩌면 문제의 본질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위에서 동환씨가 말한 것처럼 비장애인들이 언어를 가려서 쓸 수도 있는 문제고, 시각장애인들이 큰 의미없이 내일 보자라는 말을 방긋 웃으며 사용할 수도 있으니까요.(시각장애인이라는 큰 범주로 묶어서 생각하는 것도 이상합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이라도 자신이 언어로부터 배제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보다'라는 언어의 사용에는 문제가 있는거라고 생각합니다. 너만 그러니까 참어!는 분명한 폭력이니까요) 

어쨌든 언어가 사회의 권력이나 시대의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과거와는 달리 훨씬 다양한 주체들이 동등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등장하고, 우리 역시도 그 다양성 속에서 살아가는 만큼 고민을 해야겠지요. 

방금 전까지는 명쾌하게 대답조차 할 수 없는 주제에, 잘 알지도 못하는 예시를 들어서 혼란만 만드는구나 생각했었는데, 그래도 여러분께 생각의 여지를 남겼다는데 만족하렵니다. 저도 태경씨랑 동환씨 댓글에 덧붙이면서 다시 한번 생각을 정리하게 됐어요. 고마워요. 공부가 더 되면, 이 부분에 대해서도 글을 써 볼 수 있길 개인적으로 바래봅니다.(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