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자기보론 - 어떻게 할 것인가 
 
 
 
 

0. 논의의 출발

  고진의 글로 출발했던 '책임'의 문제가 수많은 논의들을 낳았다. 개인적으로는 굉장히 반가운 일이며, 새로 옮겨온 책마을이 건재하다는 표시로 보여 기쁘다. 책마을이 지향해야 할 방향 중 하나가 바로 이런 '논의의 생성'이 아닐까. 많은 이들이 참여하여 의견을 제시하고 새로운 관점을 보여주는 것, 그것이 '책마을'의 중요한 원동력일테다.
  그런데 사실 나의 칼럼 <필연성과 책임에 대하여>는, 지금까지 내가 - 거창하게 말하자면 - 추구해온, 또는 관심을 가져온 문제들을 고진의 <윤리 21>을 통해 정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정말로 궁금해하고 해결하고 싶었던 문제는 '방법론'의 문제였다. 이번에 펼쳐진 '책임' 논의에서도 종국에는 중요한 지향점이 된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 그것이 내가 진정으로 풀고 싶은 것이었다.
  이 글에서는 바로 그 문제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 한다. 어쩌면 이제까지 내가 줄곧 관심을 가져왔던 하나의 문제에 대한 총정리가 될지도 모르겠다. 물론 정답이 나오지 않을 거라는 것은 잘 알고 있다. 따라서 이것은 문제의 '풀이'가 아니라 '풀이과정'에 불과하다. 답이 없는 풀이과정이다. 그러나 틀린 풀이과정이 되풀이 된다면 분명 언젠가는 답안에 도달할 것이라 믿는다.
  그리고 여기에서 제기한 인간의 모든 문제(이기주의/책임회피/무감각/습관 등등)는 결국 나의 문제이기도 하다. 나는 이 글을 전적으로 나 자신을 위해서 쓴다.


1. '책임'의 문제, '윤리'의 문제

  본 이야기에 앞서, 잠깐 정리를 하고 넘어가자. 고진은 '자율적인 책임'을 제시했다. 이것은 기존의 도덕률에 얽매이는 '타율적인 책임', 즉 '도덕의 굴레'(김강록)를 벗어나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기존의 공리주의적 도덕론을 비판하는 것이기도 하다. 다수의 행복을 도덕의 기준으로 규정하는 공리주의 도덕론은 그 자체로 '타율적'이다. 공리주의의 '행복'은 '욕망의 충족'으로 이루어지는데, 헤겔이 말했듯이 욕망이란 타자의 욕망이기 때문이다. 내가 최신형 휴대폰을 갖고 싶다고 해서 그것이 진짜 '나의 욕망'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은 단순히 다른 이들이 '욕망하는 것'을 욕망하는 것일뿐이다. 이것이 '자율적'일 리 없다. 이렇듯 고진의 논리는 '선/악의 도덕'과 '행복/욕망의 도덕'을 모두 비판하는 데서 출발한다.
  그렇다면 '자율적인 책임'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 많이 말했으니 자세한 것은 생략하자. 간략히 정리하면 이것은 어떤 문제를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거나 '모두의 책임'으로 회피해서는 안된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주1).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고, 따라서 한 개인이나 집단, 혹은 하나의 기업이나 국가의 책임만을 요구하는 문제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문제를 '내가 했는가 하지 않았는가'의 기준으로 따지지 말고, 스스로 책임을 부여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이것이 고진이 말한 '자율적인 책임'의 의미이다.
  여기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고 해서 '모든 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라는 점이다. 그건 불가능하며 옳은 자세도 아니다. 그리고 개인의 '사정'이나 '능력'에 따라 책임이 부여되고 되지 않고가 결정될 수는 없다는 점이다. 책임은 스스로 부여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천'은 사람의 상황이나 처지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고, 당연히 달라져야 한다. 국제분쟁을 막기 위해 꼭 전재산을 털어야 할 필요는 없다. 동물권 보호를 위해 반드시 채식을 해야 할 필요도 없다. 나는 이런 의미에서 [모든 일에 참여하고 실천하는 것이 불가능할지라도,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한에서는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라는 문장을 썼다. 그러나 인식->책임부여->실천으로 진행되는 과정에는 이 문장으로도 회피할 수 없는 많은 문제들이 존재한다. 거기에는 한상원 씨가 지적한 문제도 있다.

  1) 과연 무엇이 '최선'인가? - 실천의 문제
  2) 모두가 문제를 인식하고 스스로 책임을 부여할 수 있는가? - 무감각의 문제
  3) 문제를 인식했다고 해서 그것이 계속 유지된다는 보장이 있는가? - 습관의 문제
  4) 생활하는 것도 힘든데, '책임'이나 '실천'이 무슨 소용 있는가? - 먹고사는 문제


2. 나의 문제

  사실 위에서 제기한 네 가지 문제는 곧 '나의 고민'이기도 하다. 몇몇 곳에서도 이야기한 기억이 있는데, 나는 '왜 그래야 하는가'라는 당위에는 익숙한 편이지만, 그 당위를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영 젬병이다. 나는 이 문제에 꽤 오랫동안 시달려 왔다. 예전에 강성주 씨와 논쟁 같지도 않은 말싸움을 길게 벌여 사람들의 눈쌀을 찌푸리게 했던 칼럼 <깨어있음에 대하여>가 그런 고민의 산물이다. 그 칼럼은 3)번의 문제제기다. 깨어있어야 한다(=인식해야 한다)는 건 알겠는데, 어떻게 해야 계속 깨어 있을 수 있는가? 내가 뻔뻔한 얼굴로 문제제기한 다른 칼럼들('과자에 대하여', '가능한 일에 대하여', '겁주는 시대에 대하여', '작가특집-무라카미 하루키' 등)은 모두 이 문제 앞에서 무색해진다. 문제가 있다는 걸 인식하고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도 알았는데, 그걸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가? 또 그 인식과 책임과 실천은 무슨 수로 계속 유지해 나가야 하는가?
  이건 나만의 문제는 아니다. 많은 사상가들이 '실천론', '방법론'에 대해서는 명쾌한 해답을 제시하지 못했다. 사르트르가 실존주의 윤리서를 저술하려다가 끝끝내 쓰지 못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다. 까뮈 역시 <시지프 신화>에서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알려주었지만, '어떻게 해야 계속 깨어있을 수 있나요?'라는 질문은 외면했다. <작가특집-무라카미 하루키>를 쓰면서도 그 점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나-세계의 연결', 그것은 '어떤 현실에 토대를 두고' 이루어져야 하는가? 그 질문에 대해 하루키의 문학은 침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장 운동하기도 귀찮은데, 식당에 밥먹으러 가기도 귀찮은데, 이런 내가 과연 인권의 문제에 대해 인식할 수 있을까? 전역하면 무슨 알바를 해서 어떻게 돈을 벌고 어디에 취업해야 할지가 당장 걱정인데, 인권의 문제 같은 걸 인식했다고 해서 스스로 책임을 부여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부여한 책임'에 따라 실천을 조금이나마 할 수 있을까? 하루하루 생활하기가 바쁜데 그런 '인식'과 부여된 '책임' 같은 것이 과연 오래 갈까? 까먹지나 않을까? 이런 것들을 실질적으로 해결해 준 사상이나 철학은 나에게 없었던 것이다. 이것은 내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백날 공부하고 깨우치면 뭐하나, 시간이 가면 잊혀지고 잊혀지면 그만인 것을. 배운 것은 남 줘야 하고, 그것으로 인해 스스로가 변화하고 세상이 더 나은 곳으로 변하지 않으면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이 나의 믿음이었는데 정작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책에도 나와있지 않았다. 나는 이제부터 그 문제를 정리해보려 한다. 물론 서두에서 말했듯이 답을 내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나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하다. 다만 지금 생각하고 있는 바를 정리하고, 나아갈 길을 조금이나마 엿보려는 작은 안간힘이다.


3. '자동 기계'와 먹고사는 문제

  위에서 끝까지 남아있던 문제들은 1) 실천의 문제, 2) 무감각의 문제, 3) 습관의 문제, 4) 먹고사는 문제, 이렇게 네 가지이다. 이 문제들을 한 번 정리해보자.
  먼저 1)번 문제는 한상원 씨가 나름의 답안을 제시해 주었다. '믿음직한 개인주의'로 요약되는 '개인'과 '개인'의 소통에 기대는 방법이다. 그러나 나는 이 답안이 곧바로 2)번, 3)번, 4)번의 문제로 이행되어 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상원 씨의 말대로 '의식한 개인'이 2)번, 3)번, 4번)에 해당하는 '개인'의 방문을 두드린다면, 2)번은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지?', 3)번은 '몰라, 귀찮아', 4)번은 '씨바야 먹고살기 바쁘니까 꺼져'라는 대답을 각각 할지도 모른다. 물론 상원 씨는 '그래도 다시 한 번'을 말할 것이라고 짐작한다. 나 역시 종국에는 거기에 희망을 걸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분명 쉽지 않은 길이며, 불가능에 가깝다. 따라서 나는 좀 더 근본적인 방안을 찾아보려고 한다.
  2) 무감각의 문제는, 결국 지루한 싸움의 문제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기에 '무감각한' 개인들은, 문제를 인식하게 만드는 길 외에는 방법이 없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까지 인간이 걸어온 길이기도 하다. 우리는 수 천년에 걸쳐서 서로가 평등하다는 진리를 '인식'해 왔으며, 하나뿐인 지구가 소중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문제는 다시 3)번의 문제로 이행된다. 습관에 젖어 잊어버리기 - 또는 의도적으로 잊기 - 시작하는 것이다. 서로 평등하다는 것을 '인식'하면서도 아직도 벌어지는 수많은 인종간의 대립은 이것을 잘 증명한다. 머리는 아는데 몸이 안 따라주는 것이다. 우리가 'PD 수첩'이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보고 인권유린과 환경파괴의 실태에 전율하며 '인식'한 뒤에 곧 잊어버리고 마는 것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한 번 인식한 것이 계속 유지된다면 그만큼 성자(聖者)에 가까운 것이 어디 있을까. 따라서 근본적인 문제는 3)번과 4)번이다.

  3) 습관의 문제는, 어쩌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숙명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무언가를 깨달아도 쉽게 잊는다. 어떤 것이 옳다는 것을 깨닫고 그것에 책임이 있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껴도 일상의 패턴 속에서 망각하기 일쑤다. 한 번 인식한 것이 계속 유지된다면 '책임 부여'와 '실천'도 그리 먼 길이 아닐텐데, 어째서 그런 것일까. 강유원이라면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답은 아주 간단하다. 그게 편하기 때문이다. 몸도 마음도 편하기 때문이다. 아무 생각 없이 그저 [……] 살아가는 게 편하기 때문이다. 이것저것 신경 써서 앞뒤를 재고 선택을 해야 하고, 그러한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골치 아픈 것이고, 그 과정에서 몸이 피곤해지기 십상이며 자칫 잘못하다가는 다칠 위험마저 있다.[……]

  그렇다. 인간은 귀찮은 것을 싫어하고, 익숙한 것을 찾는 본능이 있는 듯 하다. 여기에 대해 파스칼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정신이면서 또 그만큼 자동 기계다. 그러므로 설득에 사용되는 수단은 증명만이 아니다. 증명된 사물이란 얼마나 적은가! 증명은 오직 이성만을 설득한다. 습관이야말로 가장 강력하고 가장 신뢰받는 증명을 이룬다. 습관은 자동 기계를 기울게 하고 자동 기계는 무의식중에 정신을 이끌어간다. 내일 해가 뜨고 또 우리는 죽을 것이라고 그 누가 증명하였는가. 그런데 이보다 더 확실히 믿는 것이 어디 있는가. 그러므로 우리를 그렇게 믿게 하는 것은 습관이다. 수많은 기독교도를 만드는 것도 습관이고 터키인, 이교도, 직업, 군인 등을 만드는 것도 습관이다(기독교도는 신앙을 받아들이면서 이교도보다 한 가지 더 세례를 거친다). 결국, 정신이 일단 어디에 진리가 있는지를 본 다음에는 습관에 의지함으로써 시시각각 우리에게서 빠져나가려는 이 확신 속에 흠뻑 빠져들고 물들어야 한다. 왜냐하면 증명을 항상 머릿속에 간직한다는 것은 번거로운 일이기 때문이다. 더 쉬운 믿음, 즉 습관의 믿음을 획득해야 한다. 습관은 억지도 기교도 이론도 없이 사물을 믿게 하고 우리의 모든 기능을 이 믿음으로 기울게 함으로써 우리의 마음은 자연스럽게 그 속에 빠져들어 간다. 오직 확신의 힘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의 두 부분을 믿게 해야 한다. 즉, 일생에 단 한번 보기만 하면 되는 이유에 의해 정신을 그리고 습관에 의해 자동 기계를 믿게 하되 이것이 반대의 것으로 기울지 않도록 해야 한다.[……]

  길지만, 이렇게 인용하지 않으면 느낌이 오지 않는다. 파스칼이 말한 것을 나름대로 해석하면 결국 이런 것이다. 인간의 몸은 '습관의 관성'에 의해 움직이는 "자동 기계" 같은 것이므로 한 번 '인식'한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다시 '몸'이 적응하고 있는 '습관'에 의해 원상태로 되돌아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식한 것을 되풀이하고 그것을 습관으로 만들 필요가 있다. 다시 한 번 파스칼의 말을 빌리자면 "무릎 꿇고 기도하라, 그러면 믿을 것이다"라고 할 수 있다. 습관에 의해 그것이 제 2의 천성으로 고정될 수 있다는 말이다.

  한편, 4) 먹고사는 문제는 얼핏 생각하면 '인식'이나 '책임' 또는 '실천'에 있어서 크게 상관이 없는 것 같기도 하다. 가난한 사람이 이웃을 더 잘 돕는다는 말도 있고, 혹 사정이 여의치 않더라도 '그 사정에 맞게' 인식하고 책임을 부여해서 실천하면 될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다시 한 번 강유원의 말을 들어보자.

[……]사람들은 한 번 무엇에 대해 편견을 갖기 시작하면 그것이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는 한 바꾸지 않는다.[……]

  바로 이것이 문제다. 2) 무감각의 문제와 가장 깊게 연관되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도무지 '인식'을 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기 때문에. "비전향 장기수는 석방되어야 합니다!" "아니 왜? 풀려나면 돈 주나?" "종군 위안부 문제는 해결되어야 합니다!"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관심은 주로 보상금에 집중되어 있다)" "동물들의 권리는 보호되어야 합니다!" "뭘로 벌어먹고 살라고? 철없는 소리(대부분 양계 또는 소/돼지 사육업자들이다)" 이런 식으로, 먹고 사는 문제는 '인식'과 많은 연관이 있다.
  또한 이 '먹고 사는 문제'는 말 그대로 '생존'의 문제가 되기도 한다. 옛날 옛적 공자(孔子)도 훌륭한 말을 했다. "의식이 풍족해야 예의를 안다." 4)번 문제를 단 한 문장으로 요약하고 있다. 인간은 기본적인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다른 데 신경을 쓰지 않는다. 예의는 물론이거니와 인권이니 평등이니 하는 것들도 배가 고프면 다 헛소리가 되고 마는 것이다. 길거리의 노숙자들에게 부패정치 타도를 외쳐봤자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소년소녀 가장에게 입시제도의 부당함을 역설해봤자 아무 소용도 없는 것이다.


4.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여기까지 쓰고 보니, 인간이란 존재는 도무지 구제불능으로 보인다. 유토피아 따위는 바랄 수조차 없는 존재처럼 느껴진다. '습관의 동물', '돈'이 연관되지 않으면 꿈쩍도 하지 않는 이기적인 동물, 이런 인간에게 과연 무엇을 바랄 수 있단 말인가. 이런 나에게 어떤 변화와 혁명을 요구할 수 있단 말인가.
  솔직한 심정으로는, 사회의 변화를 꾀한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처럼 들린다. 사르트르나 까뮈처럼 끊임없는 자기 성찰만이, 학대에 가까운 반성과 니체적인 자기 초월이 유일한 방법일지도 모른다는 - 따라서 사회변화는 영원히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는 - 생각이 든다. 사실 인간은 그냥 불평등한 구조와 환경오염, 인권유린과 인종차별을 즐기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런 것이 인간의 본성은 아닐까. 거기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것은 아닐까.
  물론 그렇지는 않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 앞에서는 무력하게 무릎을 꿇고 만다. 나조차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무슨 수로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그냥 좌절할 수만은 없는 것이다. 시도라도 해보는 것이, 희미한 길을 약간이라도 엿보는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3) 습관의 문제는 둘로 나누어서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는 습관을 이용하는 것이다. 파스칼의 말처럼, '자동 기계'를 '인식'과 '실천'에 익숙하게 만드는 방법이다. 그러나 '인식'과 '실천'은 귀찮다. 몸도 피곤하고 마음도 불편하다. '내가 왜 죄의식과 죄책감을 갖고 있어야 하는가'라는 반발도 생겨나게 된다. 따라서 곧 '편한대로' 살아가게 된다.
  그러나 이 과정을 무수한 반성과 성찰로 이겨내고 '인식'과 '실천'을 체화하면 습관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작용하게 된다. 체 게바라나 호치민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이런 변화의 중요성은 일찍이 유태인 할아버지도도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진우는 이렇게 말한다.

[……]'유태인 할아버지'는 사회변혁에 관한 유물론적 사상은 종종 사회 상태가 인간에 의해 변화되어야 하며 또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교육자 자신이 교육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망각한다고 언급하며 이렇게 말한다. "상태의 변화와 인간 활동의 변화, 즉 자기 변화의 일치만이 혁명적 실천으로 파악되고 합리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에 따르면 혁명적 실천은 해석을 통한 세계변혁이며 동시에 인간의 자기변화이다.[……](수정 : 인용자)

  따라서 인간의 '습관'을 변화시키는 운동은 '실천'과 '변화' 또는 '변혁' 이전에 먼저 실행되어야 한다. 이것이 현실 사회주의 국가가 실패한 원인이었으며 동시에 지금 존재하고 있는 '이 죽일 놈의 자본지상주의' 사회가 지닌 온갖 문제의 근원이기도 하다. 이 '습관의 변화'를 어떤 식으로 유도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난 아무것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이 4)번 문제와 깊은 연관이 있다는 것은 알 수 있다. '습관의 변화'가 4)번 문제의 해답을 도출해낼 수도 있으며, 동시에 4)번 문제의 해답이 '습관의 변화'를 이끌어낼 수도 있다.

  4)번 문제는 곧 '자본지상주의'의 문제이다(주2). 사람들이 '먹고 사는 문제(=돈)'에 이리도 민감한 것은, 곧 사회가 '먹고 사는 문제'에 민감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것은 구조적인 문제다. 현대 사회의 기반은 '상품'이며, 이것이 제조-판매-구매-욕망(타인의 욕망)-제조-… 의 순환을 통해 우리의 생활은 물론이고 의식과 사고까지 제약한다. 따라서 우리는 자본이 왜 필요한지도 생각하지 못한 채 무조건 자본을 좇는다. 만들어서 정작 어디에 써야 할지도 모르는 잉여가치만을 보고 자본을 따라다닌다. 상품의 배후에 있는 수많은 과정들을 보지 못한 채 상품을 욕망한다. 따라서 이 구조들을 지탱하는 '돈'이라는 화폐상품이 절대적인 가치가 되고, 이것과 결부되지 않은 문제들은 모두 '인식'할 필요조차 없는 하찮은 문제가 되는 것이다.
  또한 사회가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하는 것도 이유가 된다. 즉 '생존'을 해결해주지 못한다는 이야기다. '개인'에게 대부분의 책임이 할당된 현대 사회에서, '생존'의 문제를 충분하게 해결할 수 없는 - 해결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불가능한 - 사람들은 '인식'이나 '책임'의 문제에 눈을 돌릴 겨를이 없다. 이것은 말 그대로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는 풀 수 없는 문제다.
  이런 것들은 너무도 거대한 문제이기 때문에 해답에 대해 나는 아무 것도 모른다. 그러나 대충 길을 - 그것이 허황되거나 엉터리일지라도 - 그려볼 수는 있다. 아마도 그것은 '구조의 변화'에서 시작될 것이다. 그리고 그 '구조의 변화'는 '습관의 변화'와 시너지 효과를 일으킬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구조의 변화'는 물론 필연적인 이행은 아니다.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에 따라 조금씩 변화하는 것이다. 그것의 타당한 방향이나 진행과정은 분명 수많은 논의를 필요로 할 것이다.


5. 결국에는 되돌아온

  재미없는 이야기를 길게 써내려 왔다. 논의의 출발이 '실질적인 문제의 해결'이었는데, 결론은 다시 '추상적인 방안'이 되고 말았다. 나의 능력 부족이다. 그러나 그동안 오래 생각해 오던 것을 깔끔하지 못한 형태로나마 정리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편하다. 4장 '어떻게 해야 하는가' 부분은 오래 생각해 오던 것을 정리하면서 동시에 앞으로 탐구해 나갈 방향을 짚어보는 기회가 되었다. 특히 '구조의 변화'가 아니라 '습관의 변화'라는 측면에서 말이다.
  희대의 극작가이자 희대의 독설가인 쇼 Shaw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에 대한 가장 나쁜 죄는 인간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무관심이다." 나는 결국 이 말을 믿을 수밖에 없다. 인간을 미워하면 언젠가는 그 인간을 변화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관심은 아무 것도 변화시킬 수가 없다. 내가 냉소주의를 혐오하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밉든 곱든, 결국 되돌아가야 하는 것은 인간이다. 인간에 대한 무관심은 곧 미래에 대한 무관심이자, 변화에 대한 무관심이기도 하다. 그것은 곧 자멸하는 길이다. 우리는 변화해야 한다. 결코 무관심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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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물론 이것은 '구조적인' 관점에서의 이야기이다. 현실적인 문제에서 '개인의 책임'은 분명히 존재한다. 꽃병을 깨뜨린 '개인'도 있고, 계약을 성사시키지 못한 '개인'도 존재한다. 여기서 논하고자 하는 것은 현실적인/법적인/실생활의 문제에서의 '책임귀속'이 아니라, '우리 모두와 관계 있는' 문제이다. 그것은 환경/인권/동물권/남녀평등/사상의 자유 등등 여러 분야에 걸쳐 있다.

주2) 촘스키가 그의 저서에서 말했듯이, 지금의 세계는 자본주의 세계가 아니다. 자유로운 완전경쟁이 불가능하고 자본은 이동하나 노동력은 이동하지 못하는 현대 사회가 자본주의 사회라고 주장하는 것은, 구 소련이 공산주의 국가였다고 주장하는 것과 동일하다. 

  
 
 
 
상병 송희석 (2006/02/01 08:28:13)

지극히 완벽한 글에 어떠한 논의를 뚫고들어갈 구멍하나 안보이네요!(웃음) 
억지로 구멍하나 만들어서 무관심에 결론을 서로 자멸하는 길이다 라고 주장하는것은 
당연한 말씀 같으면서도 때론 강요스러운 부분도 있다고 생각하네요. 
가끔 전 이런 생각도 해봅니다. 과연 이것은 관심을 가져야 하나? 
오히려 관심을 안가졌다면 더 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을까? 
이부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해요!    
 
 
병장 허원영 (2006/02/01 08:56:31)

송희석 님 / 답글 잘 읽었습니다. 잘 읽었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있으신 건지 제대로 파악하기가 어렵군요. 저 나름대로 파악한 내용을 바탕으로 답글을 달아보겠습니다. 

[억지로 구멍하나 만들어서 무관심에 결론을 서로 자멸하는 길이다 라고 주장하는 것은 당연한 말씀 같으면서도 때론 강요스러운 부분도 있다고 생각하네요.] 
이 문장에 대해서 꽤나 오랫동안 생각해야 했습니다. 특히 "무관심에 결론을 서로 자멸하는 길이다"라는 부분은 도무지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더군요. 대략 이해한 바로는, 저의 글에서 '관심을 가지지 않는', 즉 '인식하려 하지 않는' 인간의 본성을 죽 나열해 놓고는 그런 무관심의 결론이 서로 자멸하는 길이다, 라고 대뜸 던져놓은 것이 "당연한 말씀 같으면서도 때론 강요스러운 부분도 있다"고 말씀하시는 듯 합니다. 충분히 그렇게 생각될 수도 있겠군요. 

그러나 무관심이 자멸의 길로 들어서는 것이라는 사실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관심을 가지지 않아서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맞게 된 것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 수많은 종들의 멸종이 그렇고, 곳곳에서 벌어지는 인종청소로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유태인 학살도 무관심의 결과였으며, 광주 민주화 운동에서 죽어간 수많은 시민들도 무관심에 의해 희생된 이들입니다. 지금 이 시간에 서울역에서 추위에 떨고 있을 노숙자들도, 무관심의 제물입니다. 우리가 책상머리 앞에 앉아서 '관심을 안 가져도 되지 않을까'라고 판단하기에는 너무도 많은 사람들과 생명체들이 희생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당연한 이야기라고 생각해서 '무관심은 자멸이다'라는 문장에 대한 부연설명을 배제했는데, 이것으로 답변이 되었을지 모르겠군요.    
 
 
상병 송희석 (2006/02/01 09:21:35)

원영님/ 윽, 너무나 정확히 짚어내셨네요. 질문을 조금더 추가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당연한 이야기라고 생각하시지만 저한테 있어서 당연한 이야기는 안될수도 있거든요. 

수많은 종들의 멸종이 모두 무관심의 자멸일까? 유태인 학살도 과연 단순한 무관심에 자멸일까? 
광주 민주화운동은 무관심에 제물로 해석할수 있을까? 노숙자를 무관심으로 표현하는것은 
너무나 큰 광범위한 도덕적 규범의 잣대로 해석해야 하는가? 

전 무관심이란 당연한 말에 항고하고 싶습니다. 꼭 인간의 무관심이 미래의 대한 무관심까지 
높아가고, 그 높은 이상은 자기변화를 해야 하는가 까지 물어보신다면 전 못합니다 라고밖에 
말할수 없답니다.(울음) 

아니 조금 더 근본적인 입장으로 역사를 단순히 무관심으로 표현하기 보다는 시대상황까지 
포함시킨다면 이야기는 달라지지 않을까? 라는 의문점까지 드네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병장 허원영 (2006/02/01 09:58:32)

희석 님 / 이 답글 역시 뭔가 명확하게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너무나 큰 광범위한 도덕적 규범의 잣대로 해석해야 하는가?"라는 문장은 뭘 말하는 건지 알 수 없군요. 그 "도덕적 규범"이라는 게 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시대상황까지 포함시킨다면" 달라지는 이야기가 과연 무엇인지도 알 수가 없군요. 예라도 들어주셨으면 좋았을텐데. 

먼저, '무관심'에 대하여. '멸종', '유태인 학살', '민주화 운동의 희생', '노숙자', 이 모든 것들이 발생한 이유는 물론 여러가지가 있을 겁니다. 자연사적 흐름, 시대상황, 정부정책의 실패, 독재자의 존재 등등 많은 조건과 이유가 있을테지요. 그러나 그중에 무관심이 커다란 위치를 차지한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은 무관심이 원인이 되어 생겨났다'는 주장을 할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관심을 가졌다면' 달라졌을 거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저는 무관심이 모든 것의 원인이라거나, 그 무관심으로 역사를 표현할 수 있다는 주장을 하려 한 것이 아닙니다. 관심을 가짐으로써 '바꿀 수 있었던' 많은 일들이 '무관심'으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길로 가버렸다는 이야기입니다. '무관심'의 이야기 보다는 '변화 가능성'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지요. 무관심이 무서운 이유는, 그것이 규정된 '죄'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으로 인해 아무 것도 변화시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역사는 무조건적인 흐름이 아닙니다. 바꿀 수 없는 필연도 아닙니다.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인간 자신이며, 그것을 바꿀 수 있는 것도 인간, 그리고 인간의 관심 뿐입니다. 

* '의'와 '에'에 대하여 
이건 사족이 될 수도 있겠지만, 희석 님의 글에서 종종 눈에 띄길래 말씀드립니다. 
'무관심에 제물'은 '무관심의 제물'이 맞습니다. 그리고 '미래의 대한'은 '미래에 대한'이 맞구요. 별 것 아닐 수도 있겠지만, 문장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종종 혼동이 오기에 지적해 보았습니다.    
 
 
상병 송희석 (2006/02/01 10:26:36)

원영님/ 일단 사족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역시 전 문장작법부터 다시 배워야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부터 하게 되네요!(웃음) 

일단 저는 무관심이 가장 커다란 중요한 위치란 점을 반박하고 싶습니다. 저역시 모든것의 원인 
은 '무관심'이다 라는 주장을 펼치시지 않는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계속 읽어가면서 마음이 불편 
한 이유는 '관심을 가져라!' 라는 말씀과 '관심을 안가지면 바꿀수 없으니 변화를 위해서 관심은 
꼭 필요한 것이다.' 라 주장하심은 '무관심한 사람은 변화시키지 못하는 사람인가?'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랍니다. 

저의 생각은 이겁니다. 왜 '무관심 하면 안되는가?' '꼭 관심이 있어야만 변화를 할수 있는것인가?' 
'무관심으로 인하여 변화시킬수 있는 방법은 없는것인가?' 라고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 
이러면 어떨까요? 
자기가 속한 한 틀안의 분야는 무관심을 갖지 않고 관심을 가지면 '변화는 분명이 올것이다.'라고 
정의를 내리면 될것 같고, 자기가 속한 분야에서 크게 벗어난 분야에 대한 관심은 자기 스스로의 
분야에 대한 관심을 더 가지는 취지로 '무관심'해 버리면 될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병장 허원영 (2006/02/01 10:50:26)

희석 님 / 저로서는 무관심으로 뭘 변화시킬 수 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군요. [자기가 속한 분야에서 크게 벗어난 분야에 대한 관심은 자기 스스로의 분야에 대한 관심을 더 가지는 취지로 '무관심'해 버리면 될것 같은데] 라는 문장은 좀 더 많은 설명을 필요로 합니다. "될 것 같은데", 과연 무엇이 됩니까? "'무관심'해 버리면" 어떤 것이 성취됩니까? 저 말만으로 무언가를 주장하기에는, 근거가 너무나도 빈약해 보입니다. 

어쩔 수 없이 나름대로 해석해 보자면, 희석 님은 '과도한 관심', '관심의 과잉'을 경계하고 있으신 것 같은데, 제 입장에서는 이 시대의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는 우리가 무관심할 수 있는 문제는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 이 시대에는 단 하나, '돈'에 관심이 너무나도 집중되어 있다는 것이 문제이지, 다른 여러 가지 문제들에 '과도한 관심'이 집중되어 있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과도한 무관심'이 무수한 부정적인 결과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리고 짚고 넘어갈 점은, '현실적인 문제'와 '모두의 문제'(=구조적인 문제)를 자꾸 혼동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순수한 기술적 문제라든가, 순수한 학문적 문제라든가, 어떤 분야 안에서의 실무적인 문제라든가 하는 것은 '과도한 관심'이 방해가 되고 걸림돌로 작용하는 경우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서로 연결된 우리'가 걸려 있는 문제에서, '무관심'이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사례가 과연 존재하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군요.    
 
 
상병 송희석 (2006/02/01 11:46:22)

원영님/ 그 '서로 연결된 우리'가 걸려있는 문제들은 어떤것들 인가요? 
난민촌에서 죽어가는 아이들? 멸종되는 위기의 동물들? 파시즘에 사로잡힌 인종학살 문제? 

다 좋습니다. 제 주장은 예로 설명하자면, 

저자신이 동물을 연구하는 한 학자라고 칩시다. 멸종되는 위기의 동물들이 TV에서 나오는걸 
보고 아 정말 심각한 문제구나 깨달은후 내가 하고있는 분야와 밀접한 관계가 있으니 이부분에 
조금더 '관심'을 가지고 열심히 살아보자! 하고, 다른프로그램을 보니 무관심으로 인하여 죽는 
난민촌 아이들이 나오는걸 보고 자책감은 들지만 '무관심'한채 아까 나와 같은 분야인 '멸종위기 
에 놓인 동물'들에 더 중점적인 '관심'을 갖을려고 한다면.... 
과연 전 '무관심'한 사람인가 라는 것입니다. 이 생각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과연 이러한 생각은 '무관심'이 긍정적이진 못해도 부정적인 결과까지 만들어내는 것과 같은 
동질의 것인지 알고 싶습니다.    
 
 
병장 허원영 (2006/02/01 12:33:38)

희석 님 / 허허, 이거 문제가 점점 엉뚱한 곳으로 표류해 가는 느낌이군요. 먼저 이것부터 확실히 해야겠습니다. 제가 쓴 글의 논지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습관의 변화'와 '구조의 변화', 이 두가지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글의 마지막에 쇼의 인용과 함께 쓴 '무관심'의 문제는 저의 신념이자 태도입니다. 이 글의 논지와는 큰 관련이 없다는 것을 꼭 밝혀두고 싶군요. 

희석 님의 글을 쭉 읽어보니, '관심'이니 '인식'이니 '책임'이니를 강조하는, 또 부여하는 논리에 대해 강한 거부반응을 보이시는 듯 합니다. 강록 님은 그것이 자신의 입장과 유사하다고 말씀하셨지만, 저로서는 그렇게 생각되지 않는군요. 강록 님의 입장이 기존의 '도덕률'을 의심하고 그 배후의 구조를 거부하는 데 있다면, 희석 님의 논리는 '관심'이나 '책임'의 문제에서 오는 '부담감'을 줄이려는 데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바로 위에서 들어보이신 예도 그렇지요. 과연 모든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 '내 것'에 집중하면 안 되는가? 그래서 '내 것'에 더 중점적인 '관심'을 쏟고 좋은 결과를 얻는다면 그것이 더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되면 문제는 처음으로 되돌아가게 됩니다. 몇 번이나 말했던 것처럼, 저는 죄인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관심'이 필요하다고 해서, '책임'을 부여해야 한다고 해서, 반드시 모든 일에 모든 관심을 쏟고 모든 책임을 져야 할 필요는 없다는 말입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한다면 그것은 물론 좋은 일이겠지요. 결과적으로 더 좋은 일이 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렇지만 그런 논리가 '무관심'을 정당화하지는 않습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너는 이런 곳에 관심을 갖지 않고 책임을 부여하지 않고 실천하지 않았으니까 죄인이야!'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무관심할 수 있는 문제는 없다'라는 사실이지요. 사람의 관심은 그 사람의 '사정'과 '능력'과 '처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리고 실천도 마찬가지겠지요. 그러나 모두가 '무관심'해도 되는 문제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단 한 사람도 신경쓰지 않아도 좋을 문제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의 문제는 우리들 중 누군가가 반드시 '관심'을 가져야만 합니다. 제가 앞에서 예로 든 문제들은 '너무나도 큰 무관심'으로 인해 비극적인 결과를 가져온 것들이지요. 그것을 보면 사람들이 '자기와는 관련없어 보이는' 문제들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반드시 나쁜 일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부담감을 가지실 필요는 없습니다. 각자는 각자의 몫을 다하면 됩니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관심'을 기울이게 만들고, 주의를 환기시키는 이들은 존재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일들에 '무관심'한 것보다는 '관심'을 갖는 것이 '서로 연결된' 우리를 위해서는 훨씬 더 낫습니다.    
 
 
상병 송희석 (2006/02/01 12:59:59)

원영님// 저의 독해능력 부족으로 인한 질문들로 인해 다소간 오해의 소지가 있음을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전 분명히 부담감을 줄여보자는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해서 
이왕 부담감을 가질꺼면 조금 나누어서 가지자는 의미를 내포하는 겁니다. 

각자의 분야에서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관심을 가진다면 폭넓은 하나의 원이 완성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입니다. 생물학이면 동물문제, 종교학이면 인종문제까지, 신문방송학이면 
대중매체의 파시즘까지등등이죠. 수많은 자기분야와 관계있는것들을 폭넓은 방식으로 
문제제기도 하면서 '관심'을 가진다면 부담감도 줄어들면서 질높은 '관심'이 생기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였습니다. 
아니 '관심'뿐이 아닌 '실천'까지 할수 있지 않을까 라는 단순한 저의 생각이였던거죠. 

넓은 아량으로 글을 남겨주신 원영님께 감사드리며, 특히 '무관심'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 계기 
가 된것 같네요.    
 
 
병장 허원영 (2006/02/01 13:09:12)

희석 님 / 저야말로 다양한 관점에서 문제를 제기해 주신 희석 님께 감사드립니다. 저 역시 '무관심'이라는 것에 대해 좀 더 집중해서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희석 님이 제기하신 '폭넓은 하나의 원'이라는 관점에 대해서는 지지를 보낼 수밖에 없군요. 그것이 어쩌면 옳은 방향일 수도 있겠습니다. 이것을 읽어내지 못한 것은 저의 불찰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많은 이들의 관심'을 필요로 하는 문제는 산재해 있다고 말하고 싶군요. 전문가적인 입장에서 '문제제기'를 하며 '관심'을 갖고 '실천'을 하는 것은 물론 필요하지만, '이런 현 상황에는 문제가 있다', '이런 사건에는 문제가 있다'는 것에 대해 되도록이면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요. 예컨대 한국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인권 문제의 경우, 그것이 '자기분야'인 사람이 깊게 연구하고 관심을 가지면서 문제를 제기하고 실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들 모두'가 그것에 관심을 갖고 현실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을 바꾸어 나가는 것이 훨씬 중요하지 않나 하는 것입니다. 아아, 이건 제가 생각해도 집요하군요. 아무튼 좋은 대화 나누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상병 송희석 (2006/02/01 13:14:09)

원영님/ 저희가 나눈 대화도 '관심과 문제제기'범주 안에 포함이 되겠죠?(웃음)    
 
 
병장 허원영 (2006/02/01 14:29:38)

희석 님 / 그렇겠지요. 부디 이 대화와 그 밖의 많은 논의들이 우리들의 양식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병장 김대현 (2006/02/01 16:46:23)

이제까지의 원영님의 글 중에 (철저히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드는 글입니다. 왜냐하면 글 속에서 '고민'하는 원영님의 모습이 가장 잘 드러나있거든요. (다시말해, 악취미입니다 [퍽]) 
저는 차라리, '남'들의 일에 최대한 관심을 기울이는 걸 노블리스오블리제 쯤으로 삼고 싶네요. 21세기인 지금 지식인! 하면 좌파 지식인을 떠올리게 되는 이유가 바로 그거라 생각해요(하하, 이거 진중권씨한테 단단히 뜯길 발언이군요[웃음]). 원영님이 앞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그들은 남들이 신경쓰지 않는 부분들도 신경을 쓰고 살고 거기에 책임을 지려고 하니까요. 남들에게 무관심하지 않은 그만큼 사회의 여러 현안들에 대해 말할 '자격'이 부여된다고 생각해요. 술자리에서 누구나 뉴스꺼리에 대해 한번쯤은 말해보고 싶어하니까, 한번 제대로 해볼려면 관심부터 먼저 가져라 - 이렇게 회유하는 게 가능하리라 생각해요. 다들 조금씩은 잘나지고 싶을 테니까요. [웃음] 귀찮은 거 나도 아는데, 귀찮아서 거기서 주저앉으면 넌 결국 그거밖에 안되는거야. - 요런 식의 다그침도 가능하겠구요. 언제나 우월감이란 건 매우 보편적이면서도, 꽤 약빨있는 녀석이니까요. "나는 떳떳하게 우월감을 누리고 싶다!" 요런 모토로 가자는 거죠. (물론 이건 아주 밑바닥 차원의 얘깁니다. 그 우월감을 소위 '말이 되는' 방향으로 벼려가는 것도 그 우월감에 대한 능력치를 보여주는 거라고나 할까, 뭐 그런 차원의 해석이 가능하겠죠.) 
당위는 저기 위에 있지만, 거기까지 도달하기 위한 방법은 개인마다 다 다를 수 있겠죠. 그 중 제 경우는 저랬습니다. 잘나지고 싶으니까, 무어라도 말해보고 싶으니까. 제 자신이 지적 허영에 철철 넘치는 사람이란 걸 알았을 때, 그걸 버리고 살 자신이 없다면 차라리 바른 방향으로 아는척 해보자 - 이렇게 마음먹었던 것 같습니다. 세상에 대한 하해와 같은 사랑보다 겨우 쪼잔한 제 아는척이 실은 저를 움직이는 동력이었던 셈이죠. 하하- 
이런 얘기 술자리에서 하면 참 재미날텐데 말이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