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Libris] 필연성과 책임에 대하여 
 
 
 
 

[……]세계종교는 인간의 근원적인 죄를 말한다. 그것은 사람들이 자기에게는 죄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을 의심하도록 만들기 위해,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만 필요하다. 예수가 "마음속으로 간음한 자는 이미 간음한 자다", "너희들 가운데 죄 없는 자 돌을 던져라"고 말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 말들이 의미하는 것은 우리가 실제로는 죄를 범하지 않아도 간접적으로는 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개인을 사회적인 관계에서 보는 것이다. 우리는 매개적으로 모든 사람들과 관계하고 있다. 예컨대 나는 소를 죽이지 않지만 비프 스테이크를 먹는다. 나는 군사적·경제적 제국주의에는 반대하지만, 그것에 의해 얻어진 생활 수준은 향유하고 있다. 그러므로 근본적으로 생각하려고 한다면 자기가 손수 하고 있는가, 아닌가 하는 차이를 배제해야 한다.[……]

- 가라타니 고진,「윤리 21」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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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나라는 가보지 않아서 어떤지 모르겠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보통 좌파는 '자기들과는 별 관련이 없는 일에 참견하는 이상한 사람들'로 치부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안티 조선일보 운동에 참여한 한 청년이 조선일보 사옥 앞에서 1인 시위를 벌인다고 가정해 보자. 그 광경을 본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마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조선일보가 자기한테 뭔 피해를 줬다고 저럴까?' 혹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밥 먹고 할 일이 없나, 저런 쓰잘데기 없는 일에 힘을 쓰고.' 굳이 '안티 조선일보' 운동이 아니더라도, 들 수 있는 예는 많다. 'WTO 반대'라든가, '외국인 노동자 권리 보호 운동'이라든가, '동물권 보호 운동', '환경 보호 운동' 등등.
  왜 이들은 자기들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일에 이토록 열을 올리는 것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의아해한다. 내가 외국인 노동자에게 일을 시킨 것도 아닌데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인가? 내가 야생동물을 밀렵한 것도 아닌데 왜 그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 비전향 장기수를 내가 투옥시킨 것도 아닌데, 왜 죄책감을 가져야 하나?
  그러나 이런 주장은 틀렸다. 어느 유태인 할아버지의 말대로, '인간은 사회적 관계의 총체'이다. 우리는 모든 타인들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흔히 예로 드는 것이지만, 누구나 축구를 한다. 그러나 그 축구공을 만드는 데에는 수많은 어린이들의 노동력이 불법적으로 가혹하게 사용된다. 또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마셔보지 않은 사람도 드물 것이다. 그러나 그 '스타벅스'에 커피를 공급하는 남미의 대단위 커피농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정작 그들이 수확한 '최고급 원두커피'를 구경조차 하지 못한다. 이런 식으로, 인간이 하는 모든 행위는 전부 타인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하는 행위 하나하나는 반드시 어떤 불특정 다수/소수의 타인에게 영향을 준다. 그리고 그 영향은 다시 되돌아온다. 그러므로 어떤 일이 발생했을 때 그것을 '내가 했는가 하지 않았는가'에 따라 판단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이것이 윗글에서 고진이 말하는 바이다.

  대부분의 '좌파'들은 이런 입장에서 의견을 펼치고 운동을 벌인다. 그들의 주장에서 찾을 수 있는 공통점은,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 또는 알면서도 회피하는 - 영역에서 부당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 일들은 우리들과 '연결되어 있다'. 그들은 자꾸 우리의 주의를 환기시키고, 우리의 양심을 건드리며, 우리를 귀찮게 만든다. 우리의 무관심으로 인해 방치된, 또는 발생하는 문제들을 계속 끄집어내어 우리의 가슴을 무겁게 만든다. '환경파괴'를 방관하고 있다고, '차별'을 일상화한다고, '인권'이 침해당한다고 우리를 집요하게 괴롭힌다.
  그들이 계속 '귀찮게' 하기 때문에 우리들은 짜증이 난다. 도대체 뭘 어쩌란 말인가? 그런 것들을 주장하는 이들이라고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다 참여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한정되어 있다. 어떤 한 사람이 사형제도 폐지 운동에 몸을 바치면서, 동시에 중동지역의 분쟁을 막기 위한 운동에 투신하기는 어려운 노릇이다. 또한 이 세상의 모든 문제들이 '나'라는 존재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절실히 인식하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과 관련된 모든 실천을 하기는 어려운 노릇이다. 우리 농민들의 생계와 직결되어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수입 농산물을 먹는다. 공해를 유발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동차를 탄다. 동물들의 권리가 침해당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양계장에서 사육된 닭을 먹고 도축된 소고기를 먹는다. 그 모든 일들을 완벽하게 실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것은 문제의 핵심을 벗어나 있다. 우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 곧바로 우리가 모든 일에 전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결론으로 귀결되지는 않는다. 그런 것은 불가능하며 옳은 자세도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모든 일에 책임을 질 수는 없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면죄부를 주지는 않는다. 여전히 우리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남는다. 만일 서로가 모든 일에 연관되어있기 때문에 우리는 '다 같은 죄인'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최악의 결론이다. 거기에는 어떤 자유도, 또 책임도 존재하지 않는다. 누구도 책임지지 않게 된다. 아니, 책임을 질 수 없게 된다. 따라서 다 잘못이 없다. 그것은 "모든 인간을 용서하는" 종교의 논리이지, 삶의 자세가 될 수는 없다.
  핵심은 이것이다.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두 가지를 분리시켜서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이 좁은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어떤 식으로든 연관되어 있다.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면 반드시 어떤 연결고리가 발견된다. 그러나 이것과 책임은 별개의 문제이다. 고진의 말에 따르면 책임은 '자유'에서 생겨난다. 모든 일들이 '나'라는 존재와 연결되어 있지만, 그리고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그것이 '우리의 책임인 것처럼'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일에 참여하고 실천하는 것이 불가능할지라도,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한에서는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 내가 한 일이 아닐지라도 나와 연관되어 있다는 자세로 스스로에게 책임을 부여하는 것, 이것만이 진정한 '책임'이 될 수 있다. 김규항이「B급 좌파」에서 이야기한 것도 아마 같은 맥락이리라. '남의 양심'까지 건사한다는 것은, 그래서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어쩌면 '세계 전체'를 '나'라는 존재 혼자서 짊어지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 일은 아마 계속 실패를 거듭할 것이다. 깨닫지 못했던 문제를 새롭게 깨달을 것이고, 정작 나 자신에게서 '부당함'을 발견하고 절망할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책임을' 계속 부여하기에 그것은 의미가 있다. 그리고 그런 자세에서만, 희망은 존재한다. 

  
 
 
 
병장 허원영 (2006/01/26 01:32:45)

몸이 좋지 않아서 수요일에 올리지 못했습니다. 그것도 그렇지만, 책을 읽으면서 줄곧 생각했던 문제인데도 막상 글로 쓰려니 쉬이 나오지 않더군요. 역시 인풋과 아웃풋은 다른 문제인가봅니다. 

이 글은 제가 2005년 12월 21일에 썼던 칼럼 '[Ex-Libris] 가능한 일에 대하여'에서 보운 님이「B급 좌파」와 관련하여 제기했던 문제에 대한 답글이기도 합니다. 쓰다보니 꽤나 긴 답글이 되어버렸군요. 이해해 주시기를.    
 
 
병장 한상원 (2006/01/26 01:47:17)

우리를 옭아죄고 있는 호흡같은 무수한 관계의 고리들 속에서 그 고리들의 끝끝마다 이어진 책임들을 인지하는 것만 해도 얼마나 저리고 무거운 일인가요. 영화 <매트릭스>의 사이퍼의 탄식처럼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것을 말이죠. 하지만 의식 속 통각의 자극은 여전히 보다 많은 사람들과 함께 웃을 수 있는 가능성이 남아있다는 걸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사회적인 진화의 길은 바로 곁에 있는 사람과의 변화를 만들어내는 일이라 믿어요. 나부터, 그리고 내 주변부터. 그렇게요.    
 
 
 병장 김동환 (2006/01/26 07:59:51)

유난 친절한 느낌이 드는건 왜일까요.(웃음) 
B급좌파 요즘도 1학년 세미나 커리로 잘 쓰는지 모르겠지만 B급 좌파 세미나할땐 원영님의 이 글을 
프린트해서 한장 척. 하니 첨부해주면 참 좋을 것 같아요. 멋져요멋져요.(초롱초롱)    
 
 
병장 주현탁 (2006/01/26 13:54:06)

세계를 이롭게 한다면 자신에게도 이로운 것이다. 자신도 그 세계의 일부이기 때문에.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병장 오재환 (2006/01/27 22:54:01)

잘 읽었습니다. 

더불어 한상원님의 답글 공감 많이 가네요.    
 
 
상병 송희석 (2006/01/28 09:15:14)

동완// 세미나라면 저는 이런 질문을 하겠는걸요? 
인과론적으로 결과가 있다면 원인이 존재한다. 원인이 없다면 결과는 존재하지 않을테니 모든 
결과는 원인으로부터 자유로울수 없다는 주장은 이해할수 없습니다. 
그건 차라리 ~하지 않았다면 ~하지 않았을것이라는 조건식 주장과 무엇이 다르단 말입니까? 
하나 예를 들어보도록 해봅시다.(예가 이상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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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동물을 밀렵한 사람들은 잘못된 행동이다. 그행동을 한 잘못은 그사람이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사람이 태어나지 않았다면 그런 행동을 안했을것이다. 고로 그사람이 태어난 아버지가 잘못이다. 
그러므로 아버지는 이러한 연결고리때문에 책임의식을 스스로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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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과론은 분명이 어디서든 존재할수 있습니다. 허나 그걸 단순히 받아들인후에 책임의식을 스스로 
제약을 가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그렇게 묶일 필요 없이 하나의 '가능성'만 타진해보면 되지 않습니까? 어떠한 원인이 있는데 그것은 나에게 얼마만큼에 개연성상의 '가능성'이 존재하는지 본다면 우리스스로 책임의식을 가질필요가 있을지 없을지 판단해도 좋을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라고 질문할것 같네요.(웃음)    
 
 
병장 허원영 (2006/01/28 14:22:11)

송희석 님 / 동환 님에게 질문하는 형식이지만 결국 글쓴이인 저에게 문제를 제기하신 듯 합니다. 쓰면서도 영 탐탁치 않았는데, 희석 님이 좋은 지적을 해주셨군요. 사실 이 글은 가라타니 고진의 <윤리 21>을 '제 나름대로' 요약한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겠습니다. 그냥 '요약'만 할 걸 괜히 '제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해서 오해를 산 것 같습니다. 

제가 글에서 이야기하려 했던 - 그리고 고진이 책에서 말한 - 것은 , 어떤 결과를 거슬러 올라가면 원인이 존재하기 때문에 책임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 사실을 회피의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이지요. 

희석 님의 예에서처럼 극단적인 인과론을 주장한 것은 아니지만, 제가 글에서 의미하려 했던 것 역시 '어떤 결과를 거슬러 올라가면 원인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곧바로 '원인으로 인해서 결과가 만들어졌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두 가지는 다른 문제입니다. 만약 밀렵꾼들을 조사했을 때 80%가 동물학대자였다고 해서, 동물학대 성향이 있는 사람들이 밀렵꾼이 되지는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어떤 원인이 곧바로 결과로 연결된다'는 것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제가 글에서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면 반드시 어떤 연결고리가 발견된다. 그러나 이것과 책임은 별개의 문제이다.] 라고 말한 것도 마찬가지 의미입니다. 

제가 - 그리고 고진이, 알튀세르가, 스피노자가 - 이 두 가지를 분리한 이유는, 첫째로 엉뚱한 책임을 부여하는 일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아이가 어떤 잘못을 저질렀다고 해서 반드시 부모가 원인이 되는 것은 아니며, 또 결과를 거슬러 올라갔을 때 부모가 직·간접적인 원인이 되었다고 해서 모든 책임이 부모에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둘째로 모든 것을 원인의 결과로 봄으로써 '모든 것은 모든 것의 원인이자 결과'가 되고 결국 '책임을 회피'하게 되는 사태를 피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모든 것은 고진의 <윤리 21>을 보면 좀 더 명확해지겠지만, 아무튼 정리를 해보자면 이렇습니다. 

따라서 희석 님이 제기하신 문제가 오해라는 점은 명확해졌으리라 생각합니다. 제가 글에서 말하려고 했던 바는, 단순히 인과론적으로 우리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단순히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만으로 책임이 부여되어서는 곤란하다는 점입니다. 또한 그 사실만으로 '책임 회피'가 이루어져서도 안된다는 것을 말하고도 싶었고요. 이런 짧은 글에서 말하기는 좀 복잡한 내용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상병 김강록 (2006/01/28 14:28:43)

우리들의 영원한 고전 닥터슬럼프를 보면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슬럼프박사를 (저승으로) 데려가려는 꼬마저승사자가 슬럼프박사의 지난 죄과를 '비디오로' 보여줍니다. 슬럼프박사의 죄목은, 여름방학 곤충채집 숙제를 위해 잠자리를 i다가 그만, 잠자리를 잡았다는 게 아니라 그렇게 뛰어다니던 와중에 개미를 밟아죽였다는 거지요. 그래서 저는 생각했습니다. '개미를 밟아죽이는 것은 과연 우리가 책임을 짊어져야할 죄악인가?' (그래서 저도 이 주제로 언젠가 글을 한번 써볼까 했는데, 원영님께서 선수를 치셨군요 흐흐) 

당시 저는 한창 겉멋에 포스트모던 운운하며 근대철학을 공격하는 걸로 하루하루를 '소일'하고 있었습니다. 이날 저의 타격지점은 데카르트의 코기토였습니다. (만만하니까!) 책임이라는 것은 '나'의 자유와 수학적인 대칭을 이루는 하나의 가상의 이미지라고 볼 수 있는데─즉, 저는 '책임'이라는 것이 백인 농장주가 흑인 노예에게 휘두르는 채찍의 이데올로기라 생각하며, 권리는 의무에 앞서는 것임을 강력히 주장합니다─과연 '나'라는 것이 데카르트처럼 손쉽게 정의내려지는 명석판명한 문제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나'라고 알고 있는 것, 하지만 사실 그 영역 안에는 외부로부터의 학습을 통해 그냥 '나'인 줄로만 믿고 있는 '내가 아닌 것'이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내 안의 외부'─프로이트식으로 말하자면 libido인줄 알고 있는 super-ego라고, 해두면 편리하겠죠?─를 색출해내는 것이 보다 진실에 가까워지는 방법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자 그럼, 방학숙제 곤충채집의 주체는 기실 '슬럼프박사'가 아니고 슬럼프박사에게 방학숙제를 내준 '곤충의 생명을 인간 이성의 제물로 삼기를 종요하는 오만한 공교육'임이 밝혀졌으니 슬럼프박사는 이제 더 이상 책임이나 죄의식을 느낄 필요없이 홀가분해져도 되는 걸까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내 탓이오, 하며 무릎꿇고 고해를 할 필요는 없지만─이러한 개인 환원주의야말로 지금 이 세계를 좀먹는 해악임을 강력하게 주장합니다!─슬럼프박사는 그래도 '불편한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이 세상의 한쪽은 채집하고 한쪽은 채집당하는 이 세계에, 그리고 이러한 세계에 자신이 동참하고 있다는 사실에, 슬퍼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힘 닿는 데까지 뭔가 해보려고 노력해야겠지요. 어떤 당위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느끼는 '불편한 의식'에 충실하려 노력해야겠지요. 그것은 곧 다시, 자기 자신의 삶에 얼마나 충실하느냐의 문제이니까.    
 
 
상병 송희석 (2006/01/28 14:59:20)

원영님/ 앗! 들켰네요!(원영님께 문제제기하는것이 맞습니다. 너그럽게 이해해주세요!). 이제서야 
명확히 이해했습니다. 아직 고진의 책을 읽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더이상 글을 쓰기 어렵겠네요. 
아무튼 오해는 확실히 풀었답니다.(웃음) 그래도 찜찜한 이 기분은 무엇일까요? 

강록님/ 개인 환원주의가 무조건적인 해악임이라고 주장하시면 전 정말 해충이겠네요!(웃음) 
그 '불편한 의식'을 가져야만 한다면 전 이성을 가지고 가능성을 판단하여 인과론을 주창하면서 
살려고 합니다. 어떠한 결과든간의 나와 어떠한 원인의 가능성이 존재하는지를 중점으로 살아볼려고 하는것이 저의 의문제기였답니다. 
역시 닥터슬럼프는 참 재미있는 예인것 같네요. 우리 슬럼프 박사는 개미를 밟음으로 인해 지옥에 간것에 대한 인과론적으로 가능성을 중점으로 본다면 가능성은 있기 때문에 지옥에 갈만 하네요!    
 
 
상병 엄보운 (2006/01/28 17:04:41)

이렇게 멋진 답글이라니 새해 선물로는 과분합니다. 

제목을 보고는 제 답글에 바로 답글을 달지 않은 이유가 칼럼에서 논의를 재개해주시려나? 하는 추측을 하며 글을 열었는데, 논의 전개를 확인하며 아래로 내려갈수록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제 지적을 '극단적인 인과론'으로 포장해서 답글다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그것을 뛰어넘어 양비론과 절충론을 피해서 고진의 사상으로 글을 풀이해낸 것을 보고는, 그 도량에 놀라버렸습니다. 

찰나의 기지로 흉내내듯 덤벼대는 중생을 친절하게 가르쳐주시니 어찌 기쁘지 않겠습니까,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고진의 책을 더 읽어야 겠네요.    
 
 
병장 김대현 (2006/01/29 08:18:16)

만세!    
 
 
 병장 고선준 (2006/02/02 14:42:19)

역시 인문학 쪽은 어렵네요..접한지도 책한권밖에 않되고 모르는것도 많은 만큼 알아가는게..있으니 
괜찮은 글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