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물의 도의 - 재미에 대하여 (병장 이준영/051129) 
 
 
 
 
  세상에는 많은 글들이 있고, 글들은 독자를 전제하고 쓰여지기 마련이다. 누군가의 말처럼, 일기조차 최소한 자신이라는 독자를 위해 쓴 글이다. 하물며 다른 글들은 어떠하겠는가. 그래서, 이제 나는 칼 맞을 준비를 하고서 다시 또 한 가지의 마이너리티를 말해볼 생각이다.

  논픽션은 세상에 대해 직접적으로 서술하는 글이니까 일단 예외로 해두자. 그렇다면 픽션, 그 중에서도 첨단을 걷는 소설에 대해서 우리는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 우리가 너무도 당연하게 가지고 있던 생각은 나조차 벗어나기 힘든 강박이었다는 것을 얼마 전에야 느꼈다. 
  사람들은 재미없는 소설을 읽지 않는다. 당연하다, 소설은 괜히 픽션이 아니다. 재미를 전제로 하지 않았다면 굳이 픽션을 동원하여 글을 쓸 이유도 없다. 소설의 기본은 <재미>이다. 아무리 유익한 소설이라도 재미가 없다면 그것은 앙꼬없는 찐빵이다. 그럴거면 차라리 이론서를 뒤적이는 것이 같은 시간을 투자하여 훨씬 유익한 길일거라고 생각한다.
  자, 그럼 반대를 이야기해보자. 소설에 재미만이 있다면? 얻어갈 무엇은 없지만 재미만이 있다면? 여기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재미만을 주면 어떤가.

  소설은 원래 재미있으라고 쓴 이야기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재미만을 주는 소설에 대해서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 감동? 교훈? 그런 것 좀 없으면 어떤가.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 분명히도 그 말은 맞을 수도 있다. 재미를 느낌과 동시에 다른 부수적인 것을 얻으면 더 좋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플러스 알파의 가치일 뿐, 소설이 필연적으로 가지지 않으면 안 될 가치는 아니라는 것이다. 재미 이외의 것은 작가의 서비스 정신에 의해 독자들에게 “덤”으로 얹어주는 것이지, 없다고 욕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라는 뜻이다.
  한창 문제가 되어왔던 귀여니의 소설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필자도 인트라넷에서 처음으로 귀여니 소설을 접했다. 그 때는 한창 책을 보기에 눈치가 보일 짬이라서 몰래몰래 다운받아놓은 인트라넷 소설을 읽곤 했다. 온갖 신세대적인 수사와 이모티콘이 난무하긴 했지만, 또 스토리상으로 허황되긴 했지만, 귀여니라는 작가가 가진 스토리 전개에 대한 힘(개연성 없는 사건전개는 문제였지만)은 지금에 와서도 그닥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인기를 얻고 있는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들. 그의 소설들에 대한 독서후기들을 살펴보면 “삶의 교훈과 통찰“과 같은 어휘들이 자주 등장한다. 그 점에 대해서는 부정하지 않겠다. 그는 그런 점을 형상화 하는데 뛰어난 점이 있는 작가니까. 하지만 그 장점들은 최소한 코엘료의 소설이 [재미]라는 요소를 일정량 이상 확보하고 있기 때문에 붙을 수 있는 수사다.
  이번에는 하루키의 책들을 살펴보자. 하루키의 책들에서 인간에 대한 허무 같은 감정을 읽어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럼 이번에는 물어보고 싶어진다. 당신이 읽어내었다는 그 인간에 대한 허무라는 것이 과연 당신이 그 소설을 통하여 [배우거나 습득할 점]이 되냐고. 플러스 알파의 의미를 읽어냈을 따름이지, 꼭 그것이 배울 점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하루키에 열광한다. 나도 하루키에서는 큰 의미를 읽어내지 못했다. 읽다보면 가끔 “당신은 그렇게 느낄 수도 있겠지. 그런데 어쩌라고?” 와 같은 심정이 되곤 하는 것이다(밝혀두건대 나 역시 하루키의 팬이다. 개인적으로 하루키를 싫어하여 의도적 폄하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주었으면 하는 작은 소망이 있다).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은 결코 쉽지 않고 어렵지만 수많은 톱니바퀴들을 가지고 있다. 나처럼 논리적 사고력이 좀 떨어지는 사람들은 그의 작품을 결코 쉽게 이해할 수 없다. 나는 푸코의 진자와 장미의 이름을 읽다가 결국 이해가 되지 않아서 덮고 말았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의 책을 나와 마찬가지로 끝까지 읽지 못한 사람에게도 물어보면 “대단한 작가인 것 같아.” 라고 종종 말하곤 하는 것이다. “너 그거 다 읽고 이해했냐? 난 안 되던데.” 라고 말을 하면, 그런 논리성을 소설에 녹여 넣을 수 있다는 것이 대단하잖는가 하는 식의 이야기로 얼버무리고 만다.

  하지만 사람들은 대부분 귀여니의 소설에 대해서는 부정적 태도를 견지하고, 코엘료에 대해서는 경외하며, 하루키에 대해서는 공감하고, 에코에 대해서는 대단함을 인정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이 이유를 찬찬히 생각해보자면 각각의 차이점은 여기에 있다.

  1. 귀여니의 소설은 형이하학적 주제를 가졌다. 비현실적인 남자주인공을 통해 결국 형상화한 것은 공주가 되고 싶은 일반적인 여학생들을 위한 로맨스일 따름이다. 쌈 잘하는 남학생과 이쁘지도 않고 돈이 많지도 않은 여학생의 사랑, 어린 것들의 신데렐라 신드롬이라고 간단하게 비웃기에 얼마나 좋은가. 이 시대의 사랑이라는건, 특히나 고등학생 수준의 사랑이라는건 이미 형이상학적 주제의 범주에 들지 못한다.
  2. 코엘료의 소설은 형이상학적 주제를 잘 풀어썼다. 그를 통해 읽는 사람에게 교훈적 요소를 던져준다. 그의 소설은 삶이 얼마나 가치있는 것인가에 대해서 잘 느끼게 해준다(물론 그의 말들에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도 열명 중 서너명은 될 것이다). 
  3. 하루키의 소설은 형이상학 그 자체이다. 나름의 판타지적 요소들로 인해 그 형이상학적인 느낌은 더욱 살아난다. 이해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공감은 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지나간 것은 허무하며, 그 허무를 딛고 일어서기보다는 인정해버리고 다음 역으로 가는 기분(그런 기분은 요시모토 바나나의 소설들에서도 느낄 수 있다)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여튼 허무, 라는 것은 형이상학적이고, 멋있으며, 많은 단어들과 어울리며 맥락이 통함과 동시에 한 번쯤 느껴봤던 감정이기도 하다. 이른바 현대인의 구미에 맞다.
  4. 에코의 소설은 논리적이고 어렵다. 물론 재미라는 것을 확보하지 못했다는건 아니지만 그 수많은 장치들은 대부분의 읽는 사람이 단번에 이해할 수 있는 범주를 넘어서고 있다. 그래서 질려버린 독자들은 지레 “저 안에는 대단한 것이 있을거야.” 하고 짐작하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장치들 하나하나가 역사적이며 형이상학적이기 때문이다. 그의 소설은 알게 모르게 대단한 리얼리티를 확보하고 있다.

  물론 책을 평하는 것도 개인의 취향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기저에 깔린 그 공통성은 [형이상학적이냐 형이하학적이냐]의 차이라고 보인다. 형이상학적이 아니라서 재미는 있으나 배울 것이 없으면 무익한 소설, 형이상학적이라서 한 번 생각하게 되면 유익한 소설. 이런 이분법적 사고에 대해서는 왠지 동의하기가 어려운 기분이다.

  소설은 원래 픽션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독자들은 소설 안에서 리얼리티를 굳이 얻어가려고 애쓴다. 어차피 쓰는 사람도 알고 읽는 사람도 아는 판국에 그 안에서 아등바등 리얼리티를 찾으려 들건 뭔가. 
  소설의 ‘덤’에 대한 강박과 문학적 엄숙성을 버리자. 굳이 읽고 나서 무언가 남아야만 좋은 소설은 아니다(그건 영화에 있어서도 똑같이 적용되는 점일거다). 딴거 하나 없이 재미만 좀 주면 어떤가. 돈 낸 만큼 가슴에 남는게 없어서 억울하다는건 핑계다. 당신은 읽고 즐겁기 위해서 책을 읽었다. 어느날 마트에 갔더니 1리터 짜리 우유팩에 200ml짜리 우유팩을 덤으로 붙여 팔더라. 그래서 그걸 일주일 사먹었다. 그런데 행사기간이 끝난건지 일주일이 지난 그 어느날 마트에 다시 갔더니 덤으로 붙은 우유팩이 사라지고 없더라. 그러면 소비자는 생각하게 된다. “아, 이거 손해보고 사는거잖아. 예전에는 덤으로 붙은게 있었는데.” 하지만 그게 원래 값이다. 덤은 덤일 뿐, 꼭 딸려나와야 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가볍게 떠도는 인터넷 소설에 대해서 찬양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귀여니를 마녀사냥할 바에는 개뿔 재미없는 소설을 양산하는 엄숙한 작가들에게부터 돌을 던져라. 소설은 즐겁게 읽히기 위해서 존재한다. 문제의식이며 교훈이며 그 모든 것은 덤이다. 200ml 우유를 위해서 1리터짜리 우유를 구매하는 사람도 분명 있을거다. 하지만 당신은 옆집 강아지에게 줘도 안 먹을 맛대가리 없는 1200ml의 우유를 먹을 것이냐, 맛있는 1000ml의 우유를 먹을 것이냐에 대해 선택할 권한이 있다. 그리고 그 선택은 독자의 자유다. 

  고로, 덤이 없다고 해서 먹고 나서 열받아하지 말고, 혹은 덤까지 먹고 나서 배탈난체 하지 말라는거다. 그건 당신의 자유의지로 이미 선택된거니까.





상병 정치환 (2005-11-30 00:11:40)  
와... 동감입니다. 동감.  

상병 노지훈 (2005-11-30 00:39:45)  
저는 약간 생각이 다른데요. 물론 소설을 포괄하는 문학, 문학을 포괄하는 예술은 재미를 위해 처음 만들어진것입니다. 하지만 예술이라는 장르가 현재 지니는 의미를 볼 때 저는 그 덤의 가치가 고작 '덤'인지는 의문인데요. 그걸 무시한다면 야설, 에로영화 등등도 재미있으면 된걸까요? 저는 덤의 가치를 크게 보고, 무언가 남지 않는다면 재미있는 소설이지 (저에게는)좋은 소설이 아닙니다. 가치관의 차이일까요?  

일병 김세혁 (2005-11-30 08:33:35)  
야설, 에로영화에 그 '덤'이라는 자체를 찾는다는게 우스운일이 아닐까요? 그것들은 단지 '보고 재미있으라고'쓴 어떻게 보면 가장 원초적인 목적에 충실한 쟝르일지도 몰라요.
최근에 가장 많이 읽히는 판타지나 무협이 소위 비판가들이라는 사람들에게 비웃음당하는것도 개인적으로 가슴시린일입니다. 가장 손쉽게 그리고 가장 많은 재미를 줄 수 있는 쟝르들인데도 불구하고 '덤'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문학축에도 제대로 끼지 못한다는건 판타지소설을 기획하고 있는 저에게도 상당한 불만입니다.
해리포터의 조앤K롤링이 7편까지 모두 써내려도 노벨 문학상하나 받지 못한다면 큰 불행이라고 생각해요.  

병장 이준영 (2005-11-30 09:19:12)  
노지훈님//

소설이라는 장르 자체의 의미보다는 다른 곳에 집중하는 것이 세태라고 보는 편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야설, 에로영화는 그렇게 치면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장르인걸까요?

앞서 언급했듯이 덤이라는 것, 있으면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같은 값과 품질을 가졌다면 덤이 붙은 물건을 사는 것이 누가 생각해도 합리적이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덤이 붙지 않았다고 해서 비난하는건 옳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그와 별개로, 단적으로 <야설과 에로영화>에 대해서 예를 들어주신 것에 대해서 간단히 의견을 피력하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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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한 번 사회의 강박성 - 외설에 대한 칼럼도 쓸 생각이지만 이상하게 한국사회는 <외설적인> 것에 대해서는 이상하리만큼 관대하지 않습니다. 영화에 수많은 살인장면이 나오는 영화들은 공중파 방송을 버젓이 타고 나옵니다. 지금도 명절이면 SBS같은데서 나오지요. 헐리우드의 블록버스터들은 파괴와 살인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삼지 않지요. 하지만 야한 것만 나왔다 하면, 가슴만 나왔다 하면 공중파 정규방송들은 학을 뗍니다. 그 이유는 방송물심의위원회에서 강력한 백태클이 들어오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살인과 섹스, 그 둘 중에 심각성이 더한 하나는 무엇일까요? 어떤 대답을 하실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살인>이 더 큰 문제성을 가진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살인은 용인되면서도 섹스에 대해 이상하리만큼 결벽증을 가진 이 사회에 대해서 저는 의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섹스 예찬론자는 아닙니다. 하지만 <불건전한 것>의 이야기만 나오면 몸담론부터 시작하는 이 사회의 생리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모두가 생각해보아야 한다고 봅니다.  

병장 김태경 (2005-11-30 12:47:46)  
픽션을 전제로 글을 쓴다는 것이 꼭 재미를 위해서일까요?

A라는 작가가 있습니다. 전쟁을 반대하는 그는 전쟁이 일어났을때 그 속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잔인함과 인권유린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알리고 반전 시위에 참여를 유도하고 싶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는 카메라를 메들고 전쟁터로 나가서 보도사진을 찍어와야 할까요? 그는 자신이 할수있는 영역으로 들어가 '있을법'해보이는 참혹한 전쟁소설을 쓸것입니다. 그것도 '재미있게' 써야하죠. 많은 사람이 읽어야 하니까요.

B라는 작가가 있습니다. 그는 평소 판타지를 좋아했고 많이 읽었습니다. 그가 쓰고 싶은 이야기는 여러 다른 민족의 갈등과 화해입니다. 그 이야기를 쓰는데 자신이 익숙한 판타지를 이용했고, 글쓰는 솜씨도 좋아서 재미있게 쓰여졌고 인기도 많이 얻었습니다.

여기서 두 작가는 '재미'를 주기 위해 글을 쓴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재미'라는 말이 문제가 많습니다.
아주 감동적인 영화를 봤습니다. 다른 사람이 '어땠어?'라고 물어보면 '응. 재미있었어.' 라고 대답합니다. 그 영화는 전혀 코믹하지도 않았고 슬프기까지 했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편하게 '재미'있었다고 대답을 하게됩니다.
우리는 이처럼 '재미'라는 단어에 대해서 상당히 광범위한 인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코믹한 책을 재미있다고 할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잘 만들어진 슬픈 이야기를 재미있다고 할수도 있습니다. 감동을 주는 책을 재미있다고 할수도 있고, 치밀하게 짜여진 논리적 소설을 재미있다고 할수도 있습니다.

준영님의 글에서 나오는 '재미'라는 것을 감동과 교훈을 제외한 소설에서 얻을수 있는 것으로 가정하면 준영님의 글은 타당한 주장이고, 형이상학적이면 좋은 책이고 형이하학적이면 한번 읽고 버리는 책으로 이분법하는 것에 대한 반대는 저도 동감하는 바입니다. 하지만 소설이 '재미'를 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글을 남겨봅니다.

짧게 쓰려고 했는데 쓰다보니 이렇게 길어지네요. 레포트를 써도 한 페이지 넘기기가 힘든 공돌이가 열심히 머리 짜내서 써봤습니다.  

병장 이준영 (2005-11-30 13:30:08)  
그렇군요. 재미라는 것에 대하여 광의의 해석이 가능하다라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습니다. 표현하기에 따라서 태경님의 말씀처럼 감동적이거나 처절한 현실도 재미라는 뜻으로 치환이 가능하지요. 그 점에서 태경님 말씀이 맞는 것 같습니다. 제가 단어를 잘못 선택한 것 같네요. 음,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러면 저 모든 것을 제외한 순수한 의미로의, 말초적 즐거움에 대한 감정을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무어라 딱 잘라 말하기가 어렵군요.  

상병 노지훈 (2005-11-30 13:54:41)  
김태경 병장님께서 잘 말씀해주셨네요. 저도 이주경 병장님의 말씀처럼 덤이 없으면 무조건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봅니다. 재미만 있어도 저는 충분히 재미있는 소설을 읽었다고 생각하지 비난은 하지 않습니다. 이글에서 전달하고자 것에 공감하는데 재미라는 말의 모호한 의미 때문에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봅니다.  

일병 안대섭 (2005-11-30 13:58:33)  
Dulce et utile, 풀어서 '달콤하면서 유용한것'이라고 저 옛날 로마의 정치가이자 시인인 얼레벌레리우스는 문학을 정의했던 것이라고 강사 선생님이 말씀하셨었죠. 그땐 달콤하다는 표현이 참 어색했는데 지금은 조금 이해가 가는것 같아요.  

상병 노지훈 (2005-11-30 14:09:06)  
아 죄송합니다. 주위에 이주경이라는 사람이 있어서 ... 이준영 병장님 
그리고 외설과 에로는 다르다고 봅니다. 외설적인 면이 그 작품에 필요한 요소라면 상관없겠지만 에로는 성적인 면을 부각시켜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것으로 이런 재미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병장 김태경 (2005-11-30 14:10:59)  
고등학교때 국어 선생님께서 무슨 책이었는지 영화였는지에 대해서 어떻게 봤냐고 물어보셨어요. FUN한 것은 아니었는데 딱히 어떻다 할말이 없어서 재미있었다고 대답했더니 '재미? 그게 재미있었어?'라고 물으시더군요. 그 이후로 '재미'라는 말을 쓸때마다 조심하게 되었어요. 문득 그 생각이나서 적어봤습니다.  

병장 이준영 (2005-11-30 14:22:30)  
지훈님 // 

굳이 해당작품에 쓸모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성적인 소재를 끼워넣어서 끼워팔기식으로 장사를 하는 작품에 대해서는 저도 반대입장입니다. 하지만 제 생각으로는 아직까지 한국사회라는건 끼워팔기가 아닌 외설에서도 그리 관대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군요. 폭력적 요소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관대하고요.

800만을 동원했다는 <친구>, 사시미로 몇 차례나 찌르는 장면이 나오고 피가 흐르고, 해도 버젓이 공중파를 타고, 조폭 신드롬까지 몰고올 정도로 칭송을 받지요. 그러면 여기에서 생각해보겠습니다 : 과연 친구에서는 그 <살인의 장면>을 꼭 영화 속으로 끌고올 필요가 있었을까. 필요했겠지요, 그 비장함을 강조하려면. 그리고 그 장면은 매체에 여과없이 통과되어 나오지요.

그러면 <오, 수정>에 대해서 생각해봅니다. 만약에 이 영화가 공중파를 타게 된다면 아무런 여과없이 나올 수 있을까요? 저의 생각으로는 힘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아마도 정사씬과 같은 부분은 모두 가위질 당해서 나오겠지요. 그러면 이 정사씬은 작품의 표현에 불필요한데 집어넣은것일까요?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관점으로 볼 때, 이 사회는 살인보다 섹스에 엄격하다고 생각하는겁니다.

언젠가 마광수씨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나는 책 두 권을 약간의 간격을 두고 썼는데(제가 알기로는 6개월 남짓입니다, 94년 4월과 10월) 두 권 다 야한 책이었다. 그런데 한 권은 인정을 받았고, 한 권은 지탄을 받았다. 그 두 권의 차이는 하나였다. 인정을 받았던 책은 야한 바탕에 어려운 사상의 옷을 입혀둔 것이었고, 한 권은 그냥 야한 책이었다. 어쨌거나 베이스는 야한 책이었는데 왜 한 권은 지탄을 받고 한 권은 야해도 봐줄 수 있다, 는 분위기로 가는건가?>

그러면 이런 경우는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독자들을 위해서 <사상>을 집어넣어준 경우겠지요. 그런데 사상을 양념한 책은 인정받고, 주제에 충실한 책은 지탄받았습니다. 이 경우에는 보조적인 장치의 부각을 통해 욕망을 충족시키고자 하는 행위의 "사회적인 선악판단" 자체도 모호해지는 것 아닐까 생각합니다.  

상병 노지훈 (2005-11-30 15:03:25)  
예 확실히 그런면은 있는 것 같습니다. 왜 그럴까요?
저 또한 살인장면을 보면 아무렇지도 않지만 정사장면을 본다면 자극(?)을 받죠
더 자극을 받기 때문에 섹스에 엄격한걸까요?
살인장면을 너무 많이 봐서 살인에는 둔감하고 섹스에는 민감한걸까요?

유교적 가치관에 영향을 받은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살인 장면이 섹스 장면보다 더 허용되고
점차 살인 장면에 둔감해지고 섹스장면에는 엄격해지고..
그러다 엄격하던 외설이 갑자기 허용되면 우리가 민감하게 반응하는것은 아닐까요?
계속 질문해서 죄송합니다.  

병장 김대현 (2005-11-30 18:44:01)  
나라가 힘들던 시절 한창 유행했던 '외국' 영화들를 생각합니다. 아무 생각없이, 그냥 눈요깃거리로 즐길 수 있던 영화.
하지만 그런 영화들은 완벽한 판타지, 완벽한 눈요깃거리를 만들어내기 위해 
우리네 추잡하고 데데한 진짜 일상을 연상하는 어떤 건덕지도 절대로 피해가야 했다는 점에서 
오히려 더 정치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것을 일부러 피해가는 것은 어떤 것을 일부러 끼워넣는 것보다 
그 어떤 것에 더 강박하고 신경쓰고 있다는 점에서 
훨씬 정치적인 것이지요.

사실 위의 분들이 말씀해주신 대로 '재미'와 '덤'은 서로 칼자르듯 구별할 수 있는 말이 아니라고 봅니다.
그런데도 그걸 선명하게 구별하는 '버릇'이 이리 사람들에게 만연하게 된 것,
한데 슬슬 녹아있어야 할 '재미'와 '덤'인데도 
꼭 팥죽 속에 새알 찾듯 '덤'이 있느냐 없느냐를 그토록 따지게 된 것도
우리 역사가 그 '덤'에 빚진 것이 많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마도, '재미'도 하나의 독립된 기술이고 가치라는 것을 인정받기에는, 시대가 너무나 척박했던 것이겠죠.
그리고 그 '덤'- 이라 불리지만 실은 "알맹이"라 불러야 옳을 것 같군요 - 에 대한 엄숙주의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덤'을 찾든 단순한 '재미'를 좇든, 소설을 통한 다양한 재미들은 존중되어야 한다는 요구보다
소설 속의 어떤 '덤'을 통해 우리 사회의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박정희' 스런 인식,
그를 좋아하는 사람이든 싫어하는 사람이든 우리나라 사람들의 머릿속에 도리없이 박혀있는 사고구조이죠.
사실 그런 사고의 틀을 통해 지난날 우리가 얻은 것도 상당하지만
이제는 그 효용가치가 점점 떨어지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어떤 것이 제한 없이 허용되고 있다는" 것은
얼마만큼 그 사회가 건강하고 튼실한가를 보여주는 척도라 할 수 있겠군요.
무엇을 안된다고 자꾸 금기시하는 사회는 결국
그거 하나 트인다고 제 방죽 다 무너질까봐 단단히 "눈치보고 있다"는 걸 의미할테고,
그건 그만큼 제 방죽이 허약하다는 걸 스스로 증명하는 길이 될 테니까요.  

병장 손영청 (2005-12-01 00:00:38)  
확실히 '재미'란 단어에 대해서는 광의의 해석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에는 적극 동감합니다.
재미라는것이 윗글에서만 말하는 재미만 있는것이 아니니깐 말이죠..
김태경 병장님의 말슴에 정말 동감하는 바..
음.. 살인과 섹스의 문제는...
확실히 우리사회가 '성'이라는 문제에 대해서 민감하게 반응하는 측면이 많이 있죠.
그래도 지금은 조..금 바뀌었긴 하지만...
불과 몇 년전만 하더라도 성이라는 문제는 매우 조심스럽고 비밀스럽게 다루어졌으니까요.
'간통죄'라는 것이 남아있는 몇 안 되는 나라가 우리나라라고 하더군요..
'도쿄타워' 도 따지고보면 우리나라에선 간통죄인데 말이죠..
그래도 살인장면에 대해서 말이 전혀 없는 건 아닌 것 같은..
영화에서 나오는 살인장면, 그것을 모방하는 범죄로 인해 사회에서 조폭 드라마에 대해서도 문제점을 제기하기도 하였죠..

도대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되는걸까요..
답을 찾기가 참 힘드네요..  

병장 장정환 (2005-12-01 10:29:29)  
한참 소설 얘기하다가 영화 얘기하면 반칙인가요?
일단 저도 반칙 한 번 합니다.
'주성치'라는 영화인 다 아시죠?
뭇 사람들은 그의 영화를 삼류라고 합니다. (아,2류쯤으로 해야 되나요?) 앞서 윗분들이 말한
형이상-하 학중에서 후자를 대표하는 작품들이라고 할 수 있죠.
김경이라는 기자(?)의 인터뷰 글을 봤습니다. '주성치'자신도 자신의 영화에 무슨 큰 사상, 인간 내면의
심사숙고 해야할 문제(이런걸 형이상학적이라고 해도되나요?)들을 깔아 놓으려고 의도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는 그저 자신의 영화를 보고 사람들이 부담없이 웃어 주면 좋겠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그의 영화에서 형이상학적 요소들을 발견하고 그것에 반한 사람들이 무척 많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일단의 매니아층까지 형성해 놓았습니다. 
더구나 영화 비판적인 면어서도 주위에서 영화 좀 한다는 사람, 본다는 사람들은 이유불문, 덮어놓고 그의 영화에 대해서라면 넓은 아량을 베풀어 줍니다.
왜 그런걸까요?

생각해 봤습니다. 재미만 추구하는 그의 영화는 허구적인 내용을 조금 더 우리주위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식신(먹는것), 소림축구(월드컵 붐이 한창일 때 -그 때 남자들은 죄다 공한번씩 찼을 겁니다- 나온 영화),
서유기(온 국민이 한번쯤 들어봤을 이야기) 등 우리 삶 중에 산재한 내용들, 요로쿰 저러쿰 부딪치고 깨지는
그런 것들을 필름속에 담아 놓는 것입니다.

나름의 지식인들은 어려운 말들로 형이하학 속에 담겨 있는 형이상학을 일깨우는 글들을 떠받들고 좋아합니다. 자신이기에 해석할 수 있고 자신이기에 공감할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하고 자태를 뽐냅니다. 그러나 그들도
결국에는 쉽고 또 그렇기 때문에 재밌는 것들을 찾는 것에는 다름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자꾸 쉽고 
재밌는 것에 대해 무시하고 폄하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오히려 저는 생각합니다. 글로 치자면 글 속에 형이상학적 내용들을 잔뜩 칠해놓은 것들은 밥숟갈로
밥을 떠먹여 주는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차라리 형이하학적 내용들 속에서 자신이 형이상학을 찾아
내도록 하는 글이 진정 자신을 시험할 수 있는 글이고 또 그로 인해 체득하는 바가 더 크지 않나
싶습니다.

저는 법정스님의 글이나 다비드 르 브르통의 <걷기예찬>에 담겨 있는 글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저는 법정스님처럼(책-홀로사는 즐거움) 산속에 홀로 온돌방(구들방)을 만들어 놓고 군불을 때면서
꽃과 새와 벚하며, 다비드 르 브르통의 글들처럼 좋은 자연이 있어 내 두 다리로 산책을 하는 등의
경험은 거의 전무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글은 머리속으로만 잠시 맴돌다 사라질 뿐
그 이상은 없습니다.

그러나 학창시절 경험해보거나 목격해본 귀여니류의 소설이라던가, 주성치의 소림 축구처럼
'태극권!'을 외치면 볼을 차고 받고 하는 것들은 오히려 더 삶 가까이에 있고 그래서 느끼는 바가
더 많을 것들입니다. 비록 거기에서 느낀것을 수준높은 법정스님이나 다비드 처럼 형상화하고
잘 풀어쓰진 못할 지어도 말입니다.

저는 생각합니다. 재미란 우리 주위에서 더 자주 접해서 쉽게 다가설 수 있는 것이여서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더 자주 접하고 더 쉬워서 희소성이 없는 것이여서 무시하지 말고
그 속에서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아낼 수 있다면, 고고한 단어들을 늘어놓은 이름 있는 작가의
책보다 우리들에게 더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참 궁금합니다. 과연 어떤것이 형이상학적이고 형이하학적인 것이라고 못 박을 수
것일까요? 그리고 형이상학은 의미있고 형이하학은 의미없는 것이라고 말 할 수 있을 까요?

극과 극은 통한다고 합니다.  

병장 정진홍 (2005-12-01 17:10:17)  
우리가 살인보다 섹스에 더 민감한 것은 우리네의 문화입니다.
우리네의 문화가 이런 것을 왜 이러냐고 비탄하는 것은 참 답변하기 힘든 거 같습니다.
우리네 문화가 살인에는 덜 민감하면서 섹스에는 왜 민감하냐라고 따지고 든다면. 
우리 문화의 근본으로 따라가봐야하지 않을 까 합니다.

미국에서는 총기를 소지 하는데 우리는 왜 안하느냐
브라질 사람들은 아주 정열적인데 우리는 왜 안그러느냐
미국에는 동성애자가 아주 많은데 우리는 왜 없느냐
일본은 길거리에서 포르노나 빨간 책을 찍는다는데 우리는 왜 안하느냐
일본은 지하철에 부비부비가 많다는데 우리는 왜 없느냐
중국에서는 별 것을 다 먹는다는데 우리는 왜 안먹느냐
일본인은 욕탕안에서 가운을 입지 않하면 이상하게 본다는데 우리는 왜 안입냐


이 질문들과

살인에는 덜 엄격하면서 섹스에는 왜 더 엄격하느냐

다를 바가 별로 없는 질문 같습니다. 문화라는 것은 항상 변화하는 거 같습니다. 하지만 반드시 변화가 좋은 것 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요즈음의 무엇이든지 파괴하려는 문화가 저는 심히 불만입니다.  

상병 김승연 (2005-12-01 21:53:40)  
긴 댓글을 달기 앞서서, 위의 댓글을 다시 한번 읽을 시간을 벌기위해서 짧은 댓글을 먼저 달겠습니다.

"순수한 의미로의, 말초적 즐거움에 대한 것"은 쾌락이겠지요.

그런 면에서 전 쾌락과 재미를 구별하겠습니다.
먼저 이 구별이란 것도 사실상 모호하다는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쾌락은 말그대로 말초적인 즐거움, 그냥 읽는 것 자체의 그리고 읽는 자체의 즐거움입니다.
생각할 필요 없는 전형적인 장면, 정사의 끊어질 듯한 신음소리,
생각을 거의 할 필요 없는 짧은 유머라고 생각합시다.

재미는 자신의 머리로 글을 이해하고 분석하여 얻는 즐거움입니다.
논리적인 반전이나 방대한 구성, 새로운 사상의 충격.
현실의 다양한 가능성을 반영하는 또다른 미래에 대한 설계를 현실과 비교해봄.

전 일단 이 두가지로 나누겠습니다.
어떤 작품을 읽는데 얼마나 이해능력이 필요한지를 이용해서 말입니다.

귀여니의 소설은 이런 면에서 쾌락적인 면과 가깝습니다.
상대적으로 단순한 구조는 이해하기 쉽고, 자신과 동일화 하기도 쉽습니다.
어려운 책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재미있습니다.
하지만 좀더 복잡한 것을 이해하는 사람에게는 재미가 없습니다.

왜냐?
그 글에는 도전이 없습니다.

반대로 움베르토 에코의 푸코의 진자를 살펴봅시다.
이 책은 대단히 논리적이며 엄청난 수준의 배경지식을 요구합니다.
이해력이 높지 않거나 배경지식이 거의 없다면 이 책은 그저그런 재미없는 단어 나열입니다.
하지만 애해력이 좋고, 게다가 배경지식이 많아 그것들과의 상관관계가 읽는 순간순간마다 떠오른다면
굉장한 즐거움을 줄 것입니다.

즉 재미란 것은 읽는 독자의 독서실력에 상대적입니다.
(이런 생각방식은 칙센트미하이의 책 "flow"에서 얻었음을 밝혀둡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책이 의미있는 것"인가?
다르게 말하면 어떤 책이 훌륭하다는 것인가? 입니다.

제가 생각하기로는 재미와 훌륭함과는 다르다고 봅니다.
훌륭함이란 인류 지식의 발전이나 혹은 새로운 사상이나 새로운 시도 즉.
뭔가 대단히 도전적이고 창조적인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귀여니의 책은 훌륭하지 않습니다. 결국 남는게 없습니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는 훌륭한 책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입니다.)
그 책에선 자유의지가 없는 미래세계, 조절된 인간에 대한 경고를 분명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자유의지를 가지지 못한 자는 이렇게 될 것이다. 라는 강한 경고를 전하고 있습니다.

책의 좋고 나쁨은 재미나 훌륭함 하나만으로 판단하긴 힘들다고 봅니다.
재미있는 책은 좋습니다.
우리를 즐겁게 해주고, 스트레스도 풀고.
훌륭한 책은 좋습니다.
우리에게 하나의 지침과 새롭게 생각하는 방법을 가르칩니다.

그렇다고 재미없는 책이라고 나쁜 책은 아니며, 훌륭하지 않은 책이라고 나쁜 책은 아닙니다.

나쁜 책은 바로 우리를 좀먹는 책입니다.
결과론적으로 봅시다.

포르노 소설을 많이 읽게되면 결국 우리는 포르노의 노예가 되고 맙니다.
얕은 쾌락에 익숙해 지게되면 높은 재미는 포기한채 만족하게 되며, 결국 자기자신을 죽이는 행위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읽는 시간을 낭비하게 하는 책들도 여기에 속합니다.
기껏 읽었는데 재미도 없고, 뭔가 훌륭하지도 않으며, 기분만 나빠졌다.
이를테면 양비론의 괴상망칙한 사회비판서가 대표적이겠습니다.

이쯤되서 따로 결론을 한번더 매듭지어줘야 깔끔할텐데,
너무 길어지는 것도 같고 시간을 두고 다시 써야 좀더 읽을만한 의견이 나올꺼 같아서 이만 줄입니다.  

병장 안준원 (2005-12-03 11:08:49)  
준영씨 이런 데다 이런 글을 쓰고 있었군요 (웃음)

에코의 책은 재미있는데 말이에요. 배경지식이 없어도 책 안에서 다 찾아볼 수 있으니 문제될 게 없다고 생각해요. 물론 그 당시의 역사적 사실을 알면 더욱 재미있을테죠. 하지만 역사적 사실 같은 건 하나도 몰라도 재밌어요. (장미의 이름 밖에 읽어본 게 없지만서도) 

저도 귀여니의 소설에는 마음놓고 돌세례를 하고 무언가 있어보이는 소설에는 자신은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뭐, 이딴 어려운 책이 다있어. 이런 것도 소설이냐.' 라고 돌을 던지지 못하는 사회에는 참 불만이에요.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가끔씩 제 사고를 돌이켜 봐요. 

내가 과연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정말 그 문제를 절감하고 발상한 것이냐' 아니면 '마이너리티에 대한(혹은 일방적으로 매도당하는 것에 대한) 변론을 해야겠다는 반사적인 발상이냐'. 

많은 것들을 알아가고, 그럴 수록 '상대성'이라는 가치에 대해서 고찰하게 되고, 마이너리티에 대해 고심하다보면 어느 순간, 어떤 문제에 대한 다수와 소수의 대립이 있을 때 소수의 측면에서 바라보게 되요. 강박관념까지는 아니지만 도와주고 싶고 '다수'에 대해 '소수'가 꼭 불합리하게 공격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죠. 저는 문희준을 그렇게 공격하는 사람들의 말에 별 생각없이 동감했다가 '아니다' 싶어서 다시 생각해 보고는 생각을 고쳐먹기도 했으며 귀여니의 소설에 대해서도 그랬죠.

그래서 아직 진정한 나의 가치관이 확립되어 있지 않는 저의 경우는 고민해요. 과연 내가 마이너리티의 편에 선 글을 쓰는 것이 정말 내가 절실하게 느껴서 그런 것인가 일종의 의무감이나 휴머니즘에 깃대어 혹은 그런 것의 도움을 받아서 그런 것인가, '이것이 좋은 것이다'라는 학습의 결과는 아닌가. 물론 학습으로 인해 가치관이 형성되기는 하지만. 

이거 직접 만나서 이야기 하면 술술 잘 나올 것 같은 이야기가 글로 쓰려니 참 어렵네요. (제 생각이 잘 전달된 것 같지도 않고 오히려 오해만 불러일으킬까봐 지울까 생각도 해보지만 준영씨를 믿으니까 웃음) 

아무튼 전 그래서 이런 이야기를 하지 못하겠어요. 그래서 저를 위한 글만 쓰는 지도 모르죠. 많은 생각들을 하고 사회의 많은 단면들을 준영씨와 같은 시각으로 바라보지만 (믿지 않으실지도 모르지만) 내 사고가 정말 내것이냐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 

그래서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준영씨가 부러워요. 

아무래도 전 아직 내 사고를 내 것이라 당당히 말할 수 있기에는 어린가 봐요. 
조금 더 수양해야겠어요. 
그렇게 되면 나중에 가서는 준영씨와 이런 문제에 대해서 당당히 대화할 수 있을 거에요. 
그 때가 되면 받아주실 거죠? 그 전까지는 저를 위한 이기적인 글들만을 쓰고 있으려고요. 

대체 주말 아침 부터 이 무슨 헛소리란 말인가! (사실 이 곳에 글을 쓰는 것은 참 두려워요. 어투하나하나 고민해 가며 조바심으로 이파리를 다는 이 기분이란 웃음) 

에, 요컨대, 부락에서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