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언에 대하여 (병장 이준영/051128) 
 
 
 
 
  우리는 바야흐로 말이 너무 많은 시대에 살고 있다. 세상에는 너무도 많은 미디어들이 범람하고 있기 때문이다. 활자화된 많은 책들과 라디오, TV, 신문 등으로 대변되는 매스미디어들. 이 모든 것들이 우리 주변을 떠돌며 저마다의 말을 토해내어 놓는 것이다.
  물론 이 모든 매체들이 한 시점에서 문득 생겨난 것은 아니기 때문에 [말이 많아진 것]에 대해 하루 이틀의 문제로 치부할 수는 없다. 하지만 말들은 어느 순간부터 점증해와서 현재에 이르러서는 거의 포화상태에 도달하고 말았다고 생각한다. 어떤 식품을 먹으면 건강해질 수 있다, 무슨 책을 읽으면 좋다는 TV 프로그램부터 시작해서, 돈 잘 벌고 투자를 잘 하는 법에 대한 책들, 산업의 동향을 제시하여 투자의 올바른 지평을 열어주는데 그 의의를 가진 신문...
  이런 식으로 우리의 곁에는 지식을 알려주는 목소리 못지않게 조언을 하는 목소리 또한 많아진 것이다. 그러면, 지식과 조언의 차이는 무엇인가(지식과 조언이라는 것이 완벽하게 동일한 범주로 해석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지식은 확정된 것에 대한 해답이며, 조언은 지식을 기반으로 하는 상황적 판단에 대한 해답, 혹은 방법론이라고 볼 수 있겠다. 수요가 많아지면 가격이 올라간다는 것이 지식이라면, 오르는 가격과 공급을 조정하여 최대의 이윤을 창출해내는데 대한 방법론이 바로 조언이라고 할 수 있겠다.
  매체가 점점 발달할 미래에 있어서는 더욱 심해질 것이 명약관화하다. 그러면 우리는 이 범람하는 조언들에 대해서 어떤 모양으로 대처해야할 것인가. 약도 과하면 독이 되곤 하는데, 우리를 둘러싸고 넘실거리는 이 매체의 주입적인 파도 속에서 익사하지 않기 위해서는.

  선인先人들은 많은 명언들을 남겼다. 그것들은 금언, 명언이나 속담 등으로 우리의 주변에 산재해있다. 하다못해 달력의 아랫도리나 다이어리의 여백부분, 심지어 휴지에 인쇄되어 있기도 한 수많은 말들. 하지만 생각하고 보면 그것들은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인 경우도 많다. 

  아주 조악한 예를 들자면 
  [겉 다르고 속 다르다]라는 속담과 [겉볼안(겉을 보면 속을 알 수 있다)]이라는 두 속담의 상충성이나
  [고생 끝에 낙이 온다]와 [나쁜 일은 혼자 오지 않는다] 사이의 괴리에 대해서 
  우리는 어떤 해석을 하는 것이 온당한 것일까.

  이런 불일치성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겠다.

  1. 인간은 각자의 행동 / 사고양식을 가진다. 
  2. 한 인간의 경험이 다른 누군가과 적확히 같을 수 없다.
  3. 같은 선택을 하더라도 상황에 따라서 다른 결과가 발생할 수 있다.

  이 이유들에 근거하여 말하자면, 문제는 두 가지로 압축될 수 있다.

  첫 번째, 조언의 대부분은 귀납적 추론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생의 깨달음]이라는 것은 [경험에 의한 깨달음]이므로 결국 그들이 남긴 것은 [자신의 경험에 비춘 최선의 방책]인 것이다. 

  릴케는 [지금 닥친 일에 대해서 답은 미래의 어느 시간이 내려줄 것이다] 라는 맥락의 말을 한 적이 있다. 이 문장은 순전히 귀납적 추론에 의한 것이다. 릴케의 말대로 미래의 어느 시간이 오면 해답이 갑자기 눈 앞으로 확 다가오는 날도 있을지 모른다(릴케는 그렇게까지 단정적이 되어서는 안 되었다고 생각한다. 정말 그런 날이 안 올 수도 있잖는가. 단정적 어투가 강한 메시지를 전달한다는데 이견은 없으며 이런 경구의 경우 메시지성이 강하다는 점을 인정하긴 하지만, 세계는 불특정하다). 첫사랑의 아픈 기억을 잊으려 하는 젊은이가 이십대 후반이 되어 그 시절을 생각하며 픽 웃을 수 있는 것처럼. 하지만 문제라면 그런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시간이 해결해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가장 무책임한 해결법이다. 그것은 5분 후면 죽는 응급환자 앞에서 의사가 느긋한 목소리로 [10분이 있으면 혈청이 도착할테니 조금만 기다리세요]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문제에 대한 해결방식은 항상 현실지향적이어야 한며, 사후약방문이 되어서는 안 된다. 

  두 번째, 매체가 생산한 정보가 독자에게 읽혀지는 동안 많은 것이 변한다는 사실이다.

  이번에는 선인들이 남긴 명언이 아니라 실용경제서에 대해 말해보자. 예를 들어서 블루오션을 공략하라, 는 맥락의 책이라면, 그 책 한 권이 일으킬 수 있는 파장은 실로 엄청나다. 그 책을 읽고서 블루오션에 뛰어들어 성공하는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블루오션에 빠져 익사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며(말아먹었다는거다), 동시에 블루오션이 레드오션으로 빠르게 변화하는데 힘을 실어 주기도 할 것이다. 책은 분명 또다른 블루오션을 찾으라고 가르치고 있겠지만.
  경제 신문과 같은 경우에는 물론 대체적인 경향이나 주가 등에 대한 분석은 가능하리라고 본다. 다만 급변하는(정말 분 단위로 변화하는!) 증권시장 등에 대한 명확한 예지를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예견(見)은 예지(知)와 달라서 분명히 들어맞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상황에 따라서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기 때문에 정말이지 [그때 그때 달라요]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궁색한 변명 앞에서 그저 고개를 같이 주억거릴 방도 밖에 없다는 사실이 ‘예견의 표지판’을 따라갈 때 발생할 수도 있는 웃지 못할 종착점이다.

  물론 조언들은 인생의 보편적인 문제들에 대해서 자주 힘을 실어주고, 때로는 난국을 타개하거나 혹은 틀린 선택의 가능성을 줄여주는데 일정량 기여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조언이 가지는 몇몇 가지의 허점들로 그 모든 장점들까지 폄하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타인의 조언을 여과없이 믿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특히 최근과 같은 경우는 삶 자체에 대한 조언(교훈적 매체), 살아가는데 필요한 도구를 획득하는데 대한 조언(투자관련 매체) 등의 모습이 자주 보이는데 이것은 경제사정이 그다지 순조롭지 못하며, 사람들이 점점 삶의 ‘결정‘에 대해 소극적인 성향을 띄고 있기 때문으로 사료된다. 
  그 결과 조언과 관련된 서적이 출판계의 베스트셀러에 이름을 빼먹지 않고 오르내리며, 매체들이 삶의 매뉴얼을 제시해주는 수많은 조언들로 무장한채 나타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필자는 여러분께 두 가지 당부를 하고자 한다.

  1. 조언이 당신의 결정을 주도하도록 하지 말지어다. 조언은 그야말로 助言, 당신을 돕는 말일 따름이다.

  2. 매체에 의해 교육된 조언의 길만을 따라가다 보면, 당신은 매체에 의해 같은 매체를 공유하는 사람들과 획일화된다. 같은 책을 읽고, 같은 옷을 사입고, 같은 곳에서 밥을 먹으며, 같은 투자를 했다가 같이 망하는 사람의 대열에 자신의 이름을 보태 올리는 우를 범하는 일이 없길 바란다.

  끝으로, 이 글조차 조언을 위한 조언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리라는 점이 매우 슬프다.





상병 노지훈 (2005-11-28 11:11:05)  
조언하자면 조언을 너무 믿지는 말라는 조언은 믿을 만 합니다.(웃음)  

상병 류경철 (2005-11-28 17:17:14)  
조언이란것을 주장이라고 조금 확대해서 말하자면
완벽한 주장이란 존재할수가 없거든요.
일단은 무조건 삐딱하게 봐도 틀리지많은 않을지도 몰라요.
인간이라서 어쩔수 없는거죠. 주장 역시 인간이 만든 불완전한 언어에 의해 나온거니까.
불완전한 주관에 의해서 나올지도 모르는 것이니까,
글쓰기 역시 마찬가지에요. 독자를 단 0.1mm 만큼이라도 상정하지 않은 글은 없는걸요.
심지어 일기만 해도 그렇다니까요,
조금 슬프지만 극단적인 예를 들자면, 자기는 전혀 그렇게 생각안하더라도, 혹은 어쩌면 모르더라도,
그렇게 생각하는척 말하고, 글쓰면 그만이잖아요. 
나란 존재를 새로 한명 또 만드는거죠. 그저 여기저기서 흘려들은 불완전한 것으로 인해. 

글을 아직 제목만 보고 큰 글만 보고 자세히 읽어보진 못했어요. 상관없는 소리일지도 모르겠네요.
지금 바로 잘 읽어보겠습니다.  

병장 이준영 (2005-11-28 19:02:33)  
그러니까, 조언을 위한 수많은 매체들이 팔려나가는 현 시점을 논리적으로 살펴보자면
그만큼 그 매체들에 대한 수요가 많다는 것을 의미하는거라고 생각해요.

이제 그런걸 좀 자제할 때가 된 것이 아닐까, 해서 썼습니다.  

병장 김대현 (2005-11-28 20:24:44)  
조언이 원래 가질 수밖에 없는, 결국은 '참고사항'일 뿐이라는 "생래적인" 한계와,
그 "한계"를 빌미로 조언을 신나게 상품화하고 사람들은 또 그걸 줄창 사서 읽는, "조직된" 한계의 차이 정도일까요.
늘 그렇지만, 원래 "그런" 것과,
그거 믿고 어차피 원래 그런거 아니냐면서 원래 "그런" 수준에서 더 오바하는 건 큰 차이가 있지요. 

"너 외롭구나" 에서 그런 말이 나오더군요.
청년실업을 맞아 쏟아져나오는 자격증, 조언서들은 어디까지나
청년실업이라는 현재의 상황을 '장사'의 대상으로 여기는 기성세대들의 마인드에서 나온 거라구요.
결국은 믿을 놈 없다 - 의 결론이 되는.

그런데 그런 책을 사모으는 사람의 심정이 십분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이거야 원 믿을 놈은 이 몸뚱아리 마음뚱아리 하난데 그것마저도 못미더우니.  

이승일 (2005-12-01 23:10:49)  
그런데 마지막 줄의 탄식이 오히려 의미심장하군요. 이 글 역시 조언이므로 조언에 대해 이 글이 한 평가에 영향을 받을 것입니다. 그래서 크게 신뢰하지 말라는 결론에 이를테지요. 그런데 이 글을 크게 신뢰할 필요가 없다면, 조언을 크게 신뢰할 필요가 없다는 이 글의 내용도 크게 신뢰할 필요가 없으니, 조언을 크게 신뢰하지 않을 필요도 없어지게 되겠군요. 말장난 같지만 이 글전체의 내용보다 마지막 줄의 탄식이 더 많은 것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우리는 어떤 조언인가는 분명하게 신뢰하게되지 않을까요? (예를 들면 조언을 신뢰하지 말라는 조언) 우리는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고 여겨지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사실 이러한 시대 정신 자체는 정말로 절대적인 영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