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딱하게보기-노출증 (상병 강승민/051122) 
 
 
 
 
여성의 노출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은 좋아하면서도 불편함을 느낀다. 
보통 일반적으로 여성의 노출은 노골적인 성적 유혹이라고 간주되지만 대부분의 여성은 이러한 것에 반대한다. 노출하는 여성들은 자신들은 남자를 위해서 노출하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시원하게 보이려고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우리는 이것을 살펴보기 위해 우선 남자 노출증 환자를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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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학교 주위에는 자신의 성기를 노출하는 남성 노출증 환자들이 종종 있다. 일반적으로 이들은 슈퍼맨으로 불려진다. 슈퍼맨은 왜 자신의 성기를 노출하고 싶어할까? 슈퍼맨은 일종의 병리적인 인간이라고 볼 수 있다. 슈퍼맨은 고전적인 프로이트적인 관점으로 이야기할 때 거세공포에 아직도 사로잡혀 있는 사람이다. 남자는 남근을 가지고 여자는 남근 그 자체가 된다는 고전적인 명제로 돌아간다면, 슈퍼맨은 자신이 남자라는 것에 대하여 끊임없이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한 불안을 감소시키는 것은 자신이 남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다. 물론 자기가 자기 자신의 몸을 보는 것이 하나의 방법이겠지만 그것은 그의 남자로서의 정체성을 확고히 해주지 못한다. 가장 확실한 것은 타자가 자신의 남근의 소유를 인정하는 것이다.  

이것을 라캉적인 관점으로 볼 수도 있다. 라캉에게 있어서 남근은 생물학적인 기관과 관련이 있기는 하지만 본질적으로 상징적인 것이다. 슈퍼맨은 상징적인 남근(타자의 인정. 명예, 권력 등등)를 가지고 있지 않거나 가지고 있더라고 끊임없이 상실의 위험을 느끼고 있다. 이때 슈퍼맨은 이러한 상징적 남근의 소유를  자신의 실재적인 기관의 소유의 확인으로 대치한다.  

따라서  그가 취하는 방법은 여자들에게 자신의 남근을 보여주고 그들의 불안을 확인하는 것이다. 타자가 불안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슈퍼맨들에게는 불안을 감소시키는 역할을 수행한다. 따라서 이러한 슈퍼맨의 행동에 대해서 여자들이 취해야 하는 태도는 간단하다. ‘쳇. 너무 작군. 더 키워봐!’ 라고 비웃는 것이다. 슈퍼맨을 피하거나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슈퍼맨이 바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성의 노출은 당연히도 슈퍼맨과 다른 각도로 파악되어야 한다. 성차별적이라는 비난을 무릅쓰고 다시금 남자는 남근을 소유하고 여자는 남근이 된다는 관념으로 돌아가 보자. 여성은 몸의 특정부위를 노출할 필요가 없고 몸 전체를 조금씩 더욱 내보이는 전략을 취한다. 여성의 몸 자체가 남근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남근의 의미는 라캉적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라캉의 이론에서 남근은 대타자의 욕망의 기표이다. 여성은 곧 사회가 욕망하는 것 그 자체이다. 하지만 욕망 그 자체가 곧바로 드러나는 것 역시 불안감을 유발하는 것은 분명하다. 

이러한 불안은 슈퍼맨이 야기하는 단순한 불안과는 다르다. 슈퍼맨은 자신은 상징적인 권력(상징적 남근)을 가지지 못하거나 있더라도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감소하기 위하여 타자의 불안을 야기하는데 여기서 타자의 불안은 불쾌감이다. 타자(여학생들)는 슈퍼맨의 한심한 노출을 보고 싶어하지 않는다. 슈퍼맨의 노출은 자신이 한심한 존재이며 그것을 부정하기 위하여 타인을 피곤하게 한다는 것을 까발리는 것이다. 그런데 여자의 노출은 대타자의 시선이 원하는 바이다. 대타자의 욕망의 기표는 남근이기 때문이다.  여자의 전략은 자신을 노출하며 대타자를 만족시킨다. 

그런데 원하는 것을 보는 것 자체가 이상하게도 불안을 야기하게 된다. 첫 번째로 이것은 숨겨진 대타자의 욕망이 드러나는데서 대타자가 수치심을 느끼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여자가 대타자의 시선의 대상이 되는 것만을 의도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여성의 노출은 대타자를 농락하는 기괴한 전략을 띠게 된다. 즉 여자는 추상적인 남성의 시선을 즐기지만. 그 이상을 바라지 않는다. 즉 시선의 주체의 우위라는 통상적인 페미니즘적인 관점은 여기서 전복되는데 우리는 이것을 블루벨벳에서 주인공이 장롱속에 숨어서 외설적인 장면을 목격하는 무력한 장면에서 볼 수 있다(Zizek, 향락의 전이 참조). 여자는 대타자가 은밀히 욕망해오던 것이 그대로 되면서 대타자의 불안을 야기하고 동시에 ‘그 이상을 원하는’ 대타자의 욕구를 좌절시킨다.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여성은 추상적인 남성의 시선의 대상이 되고 그것을 즐기지만 구체적인 남성의 성적인 판타지의 대상이 되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여자가 의도하는 바이며 남자들을 괴롭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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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여성의 노출은 남자와는 관계없다는 여성들의 주장은 절반만 옳다. 그들은 분명 남자들의 시선의 대상이 되는 것을 의도한다. 하지만 문제는 그들이 원하는 남자들의 시선은 철저히 비개별적인 추상적인 시선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남자들의 시선을 바라지만. 막상 구체적인 남자의 성적인 대상이 되는 것은 거부한다. 

노출하는 여성과있는 남자들이 여자의 의도를 오해하여 성적인 접촉을 시도하고 여자가 그것을 거부하면 폭력으로 달성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남자들은 여자의 이러한 태도는 급작스런 태도변화라고 생각하고 폭력을 휘두르거나 혹은 성폭력후 여성에게 책임을 돌린다. 여성이 노출한 것은 저 여자가 나를 원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하지만 여자는 정말로 노출만을 의도한다. 바로 이러한 여성의 복잡한 전략을 이해하는 것이 남자들에게는 필요하다. 남자는 시선의 주체로서만 즐겨야 한다. 비록 그것이 불만족스러울 지라도. 





병장 한상천 (2005-11-22 09:46:26)  
승민님 말머리 조금 고쳤습니다. 죄송해요..  

상병 엄보운 (2005-11-22 14:31:13)  
대타자의 개념이 사르트르의 존재론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라면 남성들, 여성들로 이분화 하는 것이 더 글을 부각시킬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슈퍼맨이 남근을 보여주고 거기에 타자들이 불안감을 느껴 슈퍼맨이 자기 강화를 확인받는다는 부분에서 오히려 타자라는 단어가 여성들이라는 더 좋은 단어를 구축해버렸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군요.

여성들의 노출증의 원인을 분석하기 위해 남성의 노출증으로 글을 시작하셨는데, 여성의 심리적 원인이 밝혀졌다기 보다는 '남성적인 시각'에서 바라본 우리의 생각이 나열되어 있었던 건 아닐까 염려하며 글을 읽었습니다. 

남자라는 말 대신 '우리'라고 읽어도 무방하며, 남자를 글 안으로 숨기기 위해 대타자라는 말의 빈도수가 늘어났으며, 여자들을 '그들'이라고 지칭하는 부분에서 지나친 남성 위주의 사고가 글의 주류를 이루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됩니다.

[ 하지만 여자는 정말로 노출만을 의도한다 ]
글에서는 여자가 정말로 노출"만"을 의도하는 지에 대한 이야기가 없습니다. 남성들을 섹시 코드에 족쇄가 채워져 있는 닳고 닳은 무기력한 남근으로 묘사하는 것 만큼이나 여성들을 일반화하는 것도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 한 번 비딱하게 봤습니다. 



Postscript.
저의 독서가 짧아 '향락의 전이'를 보지 못했습니다. 대부분의 책마을 분들이 읽은 책은 아닌 것 같은데 이 부분에 대해 부연 설명 해주실 수 있으신지요?

Postscript 2.
1883년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 1885년 역시 같은 저자의 '벨아미'. 남자의 야망에 의한 여성의 불행을 그린 책들이지만 이것은 거대한 한 쪽의 힘이 반대쪽 그렇지 못한 자들을 강요하는 야욕에 그 속성이 맞닿아있습니다. 남성주의적 사고방식 자체도 이러한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가 비판하는 제국주의적 침략 야욕과 마찬가지로요.  

병장 변석호 (2005-11-22 15:23:57)  
1. 아줌마들한테 달려들었다면 효과가 적을듯 하네요.

2. 사회화 되어가면서 성별이 규정되어지기 때문이 아닐까요.

3. 타자가 놀라고 충격을 받음으로 불안감을 해소하지 않을까요. 일종의 시선 등을 즐기는 것 처럼.  

7급 하지연 (2005-11-22 15:51:41)  
* 몇가지 의문이 있습니다. 
1. 그 바바리맨은 왜 꼭 여고나 여중에만 나타나는 겁니까. 여대도 있고 아줌마들만 득실한 문화 살롱도 
많은데. 그런 의미에서 약하고 힘없는 계층에 대한 폭력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2. 그 노출증은 남자에게만 있는 병인가요. 혹시 노출증 걸린여자가 남고나 남중 어디에서 발견됐다는 예기
를 들어본적이 있으신가요. 왜 똑같은 병에 대한 반응은 여자와 남자가 틀릴까요
3. 여자들은 여자들만 있는 동창회에서도 끝내주게 입고 나오는걸 즐기는데 동료 여성들의 반응에서도 노출
성과에 대해 즐기는 것으로 봐서 타자가 꼭 남자만은 아니란 사실로 볼 수 있는데 그 반면 남근들의 노출
은 꼭 여성을 통해서만 인정받아야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는걸까요 

위 대답으로 미루어 보건데 남성의 노출증은 가학성을 동반한다는 결론이 나오나요  

병장 장성운 (2005-11-22 16:09:52)  
여성의 노출증은 
노출이 아름다운 것이라는 주류(대부분 남성)의 관점을
여성들이 무비판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생기는 현상이 아닐까 분석했지요.

사회적 통념이 칭칭 감는게 아름답다고 여긴다면
오히려 여성들은 감추는걸 즐기지 않을까요?  

병장 박지수 (2005-11-22 16:41:08)  
아름다운의 기준은 시대에 따라 변한다.  

병장 김우중 (2005-11-22 17:27:08)  
훔쳐보기 심리는 관음증에서 비롯되는거죠?  

병장 정치훈 (2005-11-22 21:32:22)  
제 이해력이 딸려서 그런건지 문장이 어렵게 느껴지네요.  

일병 현철형 (2005-11-22 22:43:08)  
하지연님 1번 질문에 대한 답변.

원조교제가 문제시될 때 들었던 얘기입니다.
남성들이 여중생이나 여고생 등 성적으로 완전히 성숙하지 않은 여성들을 욕망하는 경향은
성적으로 성숙한 여성 즉, 성 경험이 다양한 여성을 만족시키 못할 것이라는 자신감 결여에 기인한다고 들었습니다. 
성적 쾌감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되는 어린 여성들을 욕망하게 되는 것이죠

슈퍼맨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요?
성 경험이 많은 소위 '아줌마'에게는 아무런 충격(?)을 유발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되는 것이 아닐까요  

일병 유철환 (2005-11-23 07:30:08)  
굉장히 흥미로운 글인것 같아요. 여기서는 남성적 시선이라는 통속적인 비판이 불필요한 것 같군요,
재밌어요[웃음]  

병장 박승현 (2005-11-23 09:39:34)  
라캉이란 말이 여러번 나오는데 라캉이 뭡니까?  

병장 김형진 (2005-11-23 09:47:52)  
승현 // 프랑스의 정신의학자 자크 라캉(Jacque Lacan)을 이야기합니다.
에크리는 아직 저도 읽어보지 못했지만, '욕망이론'이나 '자크 라캉', 포스트 구조주의 관련 서적에서 라캉에 대해 알 수 있습니다.  

병장 백윤화 (2005-11-23 11:00:34)  
여자들의 노출과 일명 슈퍼맨이라고 불리우는 남성과의 노출에는 분명히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여기서 언급된 노출증이라는 단어의 접근은 
슈퍼맨과 일반 여성분들을 같이 묶기엔 너무 작은 범주가 아닐까 생각이 드네요. 
대등하게 여자들의 노출은 남성들의 남근이 아닌 남성들의 일반적인 노출로 봐도 무방할듯 하구요
위에서 언급하신대로 그들은 남자들의 시선을 바란다. 
역시 몸이 좋으신 남성분들도 그러길 기대하죠
남자분들이 몸을 키우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자기 자신에 대한 만족감, 성취감 물론 무시할수 없지만
"너 보여줄려고 하지?"라는 물음에 "아니다!!"라고 대답하실수 있는 분은 거의 없다고 봅니다.
여자분들 역시 몸에 자신이 없으신분들은 노출에 대해 꺼리는 경향도 무시할수 없습니다만
노출로 통해 다른사람들한테 피해를 주시는 분들도 간혹 아니 요즘은 많은거 같습니다.
시대의 흐름이라지만 내가 시대를 못따라가고는 있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정도로 혼란스럽기도 합니다.
이젠 속옷들도 속!옷이 아니라 겉!옷의 일부분이 되는 세상이니까요
노출증! 모르겠습니다. 하하  

상병 강승민 (2005-11-23 11:36:52)  
지연 님/
1.
맞습니다. 폭력입니다. 보는 사람과 보여주는 주체 사이에서 권력은 언제나 바바리맨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바바리맨은 일반적으로 여중이나 여고에만 나타나는 것일까요?
저는 여중이나 여고라는 공간이 한국사회에서는 획일화되고 집단화된 공간이자 남자 학교와는 달리 어떤 은밀한 환상이 개입되기 쉬운 곳이라고 생각됩니다. 사실 중, 고등학교를 다녀보신분들은 아시겠지만 중,고교와 같은 의무교육의 장은 대학과는 달리(아니 대학에 비해서 -_-;) 국가의 이데올로기를 가장 직접적으로 빨아들이는 곳이며 동시에 합법적인 폭력이 가능한 공간입니다. 자신의 남성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어쩌면 수동적인 여성성으로 타자화 하기 쉬운곳이 여중,여고가 아닐까요? 알록달록 옷을 입은 대학이나 문화 살롱보단 오히려 교복을 꼭꼭 챙겨입으며 합법적으로 약자의 자리를 대신하는 우리나라의 중,고교 여학생들에게 그런 짓을 저지르는게 저 쉽지 않을까요? 다양한 개인보단 획일적인 집단이라는 추상적 존재에 대해 병리적 인간은 미리 자신감을 얻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2. 3
(생물학적)남자라고 다 노출증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글에서 말했지만 노출증이라는게 어떤 병리학적 현상인데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것은 어떤 상처받은 남성성에 대한 회복이라는 것에 의미가 있습니다. 생물학적으로는 여성이지만 자신의 사회적 위치가 남성성을 강요받는다면 그러한 행동을 할 수도 있겠죠. 이러한 논의에서 가장 흥미로운 작품인 소설<피아노 치는 여자>에서 주인공 에리카는 정신병으로 죽은 자신의 아버지 자리를 대신 하는데 그녀가 벌이는 일련의 일탈 행동들은 그러한 의미가 아닐까요? (카섹스 중인 연인들 옆에서 오줌누기, 자신의 성기를 면도날로 도려내기, 특히 소설 <피아노 치는 여자>에서 굉징히 인상깊은 부분은 어느 핍쇼장에서 주인공 에리카가 자신의 억압된 자아와 남성성으로 역할지어진 에고 사이의 착란증을 거기서 황홀경에 빠진(척하는) 매춘여성들의 스트립쇼를 보면서 되려 보상받습니다))
에리카는 보는 자의 위치에서 권력을 획득하는 전형적인 보습인데 반해 바바리 맨처럼 너무 많이 보여줌으로서 자신의 파워 페미니즘을 과시하는 여성도 있습니다. (<섹스 앤 시티>에서 남부러울 것 없는 여피 사만다가 근육질의 소방수들 앞에서 스트립쇼를 하던 것처럼)

시선과 권력에 대해선 지금 저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부분인데 다음에 포르노그라피와 관련해서 글을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상병 강승민 (2005-11-23 11:37:03)  
보운 님/
일단 위의 글에 대해서 보운님이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칼로 들이대시면 저는 거기에 합당한 또 다른 '올바름'을 내세울 수가 없습니다. 저는 억압된 타자들을 불러낸다는 명목으로 자유주의자들이 부르짖는 그러한 정치적 중립성이 되려 미국의 기독교 근본주의로 치환되어 많은 동방의 민족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오히려 그러한 올바름이 더욱 폭력적이지 않는가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물론 일상적인(특히 언어의 문제에 있어서) 파시즘만큼 무서운게 없겠지만 저는 사회현상을 드러내고, 또 위의 글처럼 남성성이나 여성성이라는 사회 징후를 나타내는 글을 쓸 때에는 정치적 올바름은 일종의 또 다른 폭력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들이 흔히 논쟁의 말미에 그러한 중립적인 올바름을 내세우며 대화를 끝낼려고 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 인 것 같습니다. 

우리가 어떤 텍스트에서 남성중심적인 시각이 드러났다는 건 분명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으며 작가 개인에게 또한 어떤 윤리적 반성을 필요로 하는 일이라고 봅니다.(이문열의 소설 [아가]처럼 미학의 이름하에 자행된 끔찍한 남근주의). 하지만 분명한 건 우리가 진정으로 차별과 억압없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혹은 비대칭적인 시대를 바로 잡기 위해서는 우리가 발디디고 있는 이곳의 공기와 토지를 직시할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라캉의 이론은 그 이전의 프로이트와 마찬가지로 수없이 페미니스트들의 논쟁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를 이미 남근들의 도시, 아버지들의 세계로 인정하고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실 여러분들도 아시겠지만 우리들이 사는 사회는 그리 안전한 곳이 아닙니다. 우리가 부정하고 싶어도 부정할 수 없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태어난 이상 우리는 경제인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 척박한 아버지들의 도시에서 사는 이상 우리들은 불가피하게 남근의 언어를 사용해야만 대화가 가능한 것입니다. 여기서 아무리 우리가 달라지고 싶어도 이미 그러한 네트워크(대타자)안에서는 가부장 사회의 남성이자 여성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일단 저는 대타자와 타자를 남성과 여성으로 치환하여 이분화하는 게 더 효율적이지 않았나라는 보운님의 딴지가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리다고 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생물학적인 여성과 남성은 대타자, 즉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라는 곳으로 오면 남성성과 여성성으로 바뀌게 되는데. 이런 젠더 감수성은 지극히 사회적이며 또 어떻게 보면 가부장사회의 네트워크가 작동시키는 이데올로기적 최면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저가 말한 대타자는 가부장 사회의 일반적인 남성성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모든 남자를 대타자로 치환할 수 없는 것은 남자와 사회적 남성성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또한 여성을 타자라고 못 박을 수 없는 이유는 모든 여성을 한국사회의 전형적인 여성성으로 묶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정상적인' 가정에서 태어나 고정적인 여성상을 사회화한 여자와 자본주의 사회의 요구에 조금 빗나가는 가정에서 태어나(소녀가장이거나 아님 강남 부잣집 딸 이거나) 불가피하게 고정적인 여성성을 학습받지 못하는 여자는 서로 같다고 말 할 수 없습니다. 이런의미에서 생물학적 여성과 남성은 페미니스트들에게 별 소용이 없습니다. 그건 n개의 인구가 n개의 성을 만든다는 상징계 이전의 이상향이기 때문입니다. 
페미니스트 진영이 자꾸만 n개의 인구가 n개의 성을 만든다에 집착한다면 발전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는 위의 글을 라캉의 고전적인 명제 "남자는 남근을 가지고 여자는 남근 그 자체가 된다'" 라는 어떤 가정하에 글을 썼습니다. 
남자는 남근을 가진다라는 가정자체가 이미 벌써 남성적 시선이 아니냐라는 말은 저가 예전부터 지겹도록 들은 말인데 사실 라캉의 저 명제는 시대가 변해도 달라지지 않는 우리가 사는 이 아버지들의 세계에 대한 징후입니다. 우리들의 언어가 남근 그 자체이고 가부장적이다라는 건 어떤 작동기재를 이미 남성성이 획득하고 있다는 건데 그러므로 라캉의 저 명제는 가부장적이라기 보단 일단 지금 우리의 현실이 가부장적이라는 것을 직시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따라서 저의 글에서 지적하신 남성적인 시각은 라캉이 대타자를 바라보는 시선으로 바꾸어 말하는게 좋을 듯 합니다. 

그리고 [향락의 전이]...
사실 이건 부끄러운 말인데 저는 라캉에 대한 것을 슬라보예 지젝의 글을 통해 거의 알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향락의 전이] 또한 슬라보예 지젝이 쓴 저서인데요. 뭐...그의 책을 여기서 '대~충' 설명하는 건 조금 무리고 영화 <블루벨벳>의 내용을 조금 말해드릴수는 있습니다.

<블루 벨벳>은 <트윈픽스><멀홀랜드 드라이브><이레이져 헤드>를 만든 데이빗 린치 감독의 영화입니다.
어는 한 남자가 미국의 평화로운 시골중산층 마을로 이사를 오게 되는데 거기서 주인공은 어느 집 마당에 버려진 "잘려진 귀"를 발견하게 됩니다. 여기서 '잘려진 귀'는 저가 얼개에서 말한 일종의 '안경의 흠집' 역할을 해서 주인공을 그 평화로운 마을 이면에 감추어진 추악한 폭력의 세계로 인도하게 됩니다. 

그는 도망치다가 어느 술집에서 블루벨벳을 노래하는 아름다운 여인을 보게 되고 결국 그녀의 집에 숨어들게 됩니다. 옷장에 숨어 몰래 그녀를 지켜보던 주인공은 그녀가 악질 폭력배인 데니스 호퍼에게 가학적 성관계를 당하는 것을 목격하게 됩니다. 
지젝은 이 장면을 두고 보통 우리들은 포르노그라피를 보는 자가 권력을 가지고 있으며 상연되는 포르노에서 여자주인공은 일종의 착취당하는 자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러한 포르노그라피를 관음적인 시선을 바라보는 자가 무력해진다고 말합니다. 
사실 포르노를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포르노는 정말 우리들에게 '모든 것'을 보여주지만 나중에는 우울해집니다. 왜나햐면 보고 싶은 것을 응시함으로서 자신이 권력자의 위치에 서게 될 것을 예상g지만, 결국에는 그 보고자 했던것에 의해 보는 자가 되려 응시를 당하기 때문입니다. 포르노는 그것을 보는, 관음의 시선으로 응시하는 우리를 패배자로 만들어버리는 겁니다. 
즉 다시말하자면 시선의 주체의 우위라는 통상적인 페미니즘적인 관점은 여기서 전복되는 것입니다.  

상병 엄보운 (2005-11-23 16:10:13)  
한쪽으로 치우친 문장을 지적하다는 것이 기독교 근본주의로 변모하는 과정은 따라가기 힘드네요.


강승민이 글을 쓰신 이유는 글로 다 표현하지 못한 내면에 차곡차곡 쌓여 있겠지만 제가 승민님의 글에 답글을 다는 건 철저하게 텍스트 위주로 생각하여 쓰게 됩니다. 원문에서 여성의 노출증을 알아보기 위해 남성의 노출증부터 살펴보셨는데 결국 글의 말미에 가서는 그 의문이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 중간 중간에 남성 주의적 사고로 재단된 여러 문장들이 나열되었으며 후반부에 '향락의 전이'와 '블루벨벳'을 통해 사고가 급격히 건너뛰어 넘어가고 있지 않은가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글의 효과적인 내용 전달을 위해서는 n개를 n의 이름을 붙여 설명하기 보다는 어느 정도의 범주로 묶을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글에서는 필요 이상으로 타자와 대타자로 여성과 남성이 대명되고 있고 그것은 지나친 남/여로 구분된 이분법적 남성주의 사고를 감추려고 한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을 버릴 수 없었습니다. 

저는 중립적인 올바름을 내세워 어떤 말싸움을 이기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한쪽으로 편중된 - 남성으로 편중된 - 글쓰기가 현실을 직시한다는 명분으로 또 다른 왜곡을 재생산하려는 것은 아닌가하는 경계심을 풀 수가 없습니다. 만약 글에서 현실을 제대로 보고 그것을 바탕으로 남성주의적인 사고에 대한 독자적 깨달음을 이끌어 냈다면 승민님이 답글로 반박하신 내용을 수긍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앞에서도 말했다싶이 원문에는 전혀 그런 부분이 없습니다.
한마디 더 붙이자면, '우리가 어떤 텍스트에서 남성중심적인 시각이... 공기와 토지를 직시할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라는 문장은 전혀 관계없는 근거로 치우친 사고를 옹호하고 있다고 느껴지네요. 아니면 인접할 당위가 없는 두 문장이 접속어 '하지만'으로 합쳐져 있거나.


라캉에 대한 대부분의 지식을 슬라보예 지젝의 글을 통해 접하시고 그것을 기반으로 하여 - 라캉의 전제로 - 글쓰기를 하셔서 여성의 노출증에 대한 원인을 분석하시려 했다는 건데. 무리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상병 강승민 (2005-11-23 17:32:44)  
보운님의 비판은 굉장한 가치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저가 쓴글 자체를 비판함으로써 효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제 글의 존재자체를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저는 우리 사회에 만연된 남,여 차별, 가부장적 시각을 쓸려고 했던 게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저의 글이 읽는 독자들로 하여금 남성적 시선을 정당화한다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보운님의 비판은 저의 글 뒤에 이어질 이야기와 현상에 대하여 가햐지는 것이 공정하다고 봅니다.

보운님이 말씀하신 결국 풀리지 않았던 의문은 저가 정리하기엔 이런 것 같습니다.
불안정한 남근을 지니고 있는 남성들은 그것을 해소하기 위해 노출증을 한다면 여성을 왜 노출을 하는가? 제가 보기엔 보운님은 남성의 노출증을 분석한 방법 그대로 여성의 노출증을 분석하지 않았는가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계신 것 같아요 (저가 정치적 올바름을 잣대로 들이대고 있다고 느낀점도 이 때문입니다.) 글을 읽으시면 아시겠지만 저가 의도했던건 여성의 노출에 대한 이중적인 태도에 관한 것이지 여성에 대한 라캉적인, 혹은 그와 비슷한 방법으로서의 고찰이 아니었습니다. 아니 그건 애초부터 불가능한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저가 그러한 이중적인 태도를 말하기 위해 남성의 예를 든 이유는 여성의 노출이 대타자의 시선을 은밀히 즐기기 위해서이다 라는 여성 외부의 원인을 이야기 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리고 보운님은 거기에 더해 저에게 글이 남성으로 편중된 것이 아닌가하고 말씀하셨는데 
(........ 남성들을 섹시 코드에 족쇄가 채워져 있는 닳고 닳은 무기력한 남근으로 묘사하는 것 만큼이나 여성들을 일반화하는 것도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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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그러한 남성중심적 사고가 도대체 구체적으로 어디에서 나타나있는지를 모르겠습니다. 
님께서 지적하신 이분법적 구분과 폭력적인 일반화는 사실 남성/여성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남성성과 여성성에 대한 고정관념입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우리 사회를 이끌어가는 기호로서의 젠더는 이러한 만들어진 성 역할입니다. 노출을 하고 또한 그것이 화제의 도마에 오른다는 것은 실존의 문제라기 보단 사회적인 일입니다. 저의 글은 그러한 사회적 현상을 분석하기 위해서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남성성과 여성성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를 고찰하고 또 그것이 노출에 있어서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알아보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아예 대타자와 타자를 남성과 여성으로 범주화하는 것이 더 낫지 않았겠는가...또 필요이상의 그러한 범주화는 오히려 가부장제를 더 굳건히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저는 여겨집니다)라 말하는 것은 조금은 과대평가를 하신게 아닌가 여겨집니다. 모든 생물학적 남성이 남성성이라는 젠더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남성성은 어떤 구체적이고 물질적인것이라기 보단 돈처럼 추상적인 것인 동시에 사회를 작동시키는 기재라고 봅니다. 그런데 보운님의 비판은 저가 느끼기에는 그런 구분법에 대한 반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일단 현실을 직시하자...등등의 말로 원론적인,정말 원론적인 답글을 달았던 것입니다. 
사실 보운님의 의견에 대한 저의 답글은 처음에도 말했지만 원론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게 더 치우친 사고를 옹호하고 있다고 여기신 것 같은데 하지만 그러한 치우친 사고가 무엇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게 은밀히 감추어진 남성위주의 사고라고 생각하시는지요?

p.s
라캉에 대한 대부분의 지식을 라캉의 글로써 얻기에는 현실이 상당히 척박합니다. 슬라보예 지젝은 라캉의 번역가이자 연구가입니다. 따라서 지젝의 저서를 통해 라캉을 이야기하는 것이 결코 무리가 이님을 밝히고 싶군요  

하사 김용섭 (2005-11-23 18:45:56)  
어렵네요.(하하) 그래도 잘 읽었네요.  

병장 박욱현 (2005-11-27 20:46:44)  
글이 참 어렵네요.

그나저나 제가 예전에 봐온글에따르면,,

노출이 심한옷에 견해에 따를지는 모르겠지만 여자에게 섹시는 뷰티고 남자의 관점에서는 섹스라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