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정치에서 소통하는 법-투표를 하자(re) (병장 한상원/051102) 
 
 
 
 
아..집에 다녀오는 사이에 제 글로 인해 행여 불미스런 일이라도 있을까해서 

일단 삭제하고 다녀왔습니다.

괜히 별것아닌 일로 서글프기도 하고, 많은 생각이 들었기도 하고 그러네요.

어쨌든. 

삭제하기 전에 댓글 달린 것들 중에서 

제가 개인적으로 생각을 더 해보고자 퍼놓았던 손재선씨의 댓글과 그에 대한 제 댓글, 그리고 허원영씨의 댓글을 첨부합니다.

다른 댓글은 제가 미처 보관하지 못하고 삭제해버렸는데, 촌장님 포함 댓글 다신 분들께 양해의 말씀을 구해야 할 것 같군요. 죄송합니다.

미처 못 읽으신 분들도 함께 이야기 나눠봤으면 좋겠네요.

칼럼과 좋은 글들이 종종 올라오고 있는데, 저도 분발해보겠습니다. 으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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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 두 번째 이야기-현실정치에서 소통하는 법에 대한 소고



들어가며

민주주의는 무엇일까. 그게 무엇이길래 우리의 80년대에 그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던지고 피를 흘려가며 쟁취하려 했던 걸까. 나는 이 글을 통해 인터넷 세계에서의 개인적인 관점에서  나아가 현실 정치에서 정치과 유권자인 개인 사이에 일어나는 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소통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민주주의의 학문적 고찰 따위의 제목을 달고 이 칼럼을 채우기엔 나의 역량은 턱없이 부족하고 하찮다. 다만, 나는 내가 주워들은 지식들의 단편적인 조각을 바탕으로 나의 화두인 ‘소통’으로 다시 한번 엮어 낼 뿐이다. 그조차도 턱없는 소리가 될지도 몰라 소심한 성격에 절치부심하느라 칼럼이 늦어졌다면 구석에 숨을 수 있는 쥐구멍정도를 마련할 수는 있을까 모르겠다.

어쨌든 부족하지만 이 칼럼이 민주주의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고 알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현실 정치에 대한 막연한 혐오나 부정이 아니라, 정치가 선거를 매개로 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또 하나의 방법이며 사회와의 소통의 과정이라는 것을 강조하고자 하는 뜻이 전달되기를 또한 바란다.

현대 민주주의는 어떤 모습인가

오늘날 민주주의라는 것은 그에 대한 다양한 견해와 해석을 겸허하게 허락하고 있기에 나는 민주주의하면 누구나 동의할 수 있을 가장 넓은 의미의 정의로 그 의미를 분명히 하고자 한다. 

민주주의(民主主義)는 간단하게 말뜻 그대로 국민(民)이 국가의 주인(主)이 되는 체제일 것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국가는 민주주의를 지향한다. 다만, 그것이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이거나 공산주의적 민주주의, 혹은 자유주의적 민주주의 등으로 약간 다른 모습을 가질 뿐 민주주의 체제에 대해 동의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현대 민주주의의 주도적인 틀은 대의제(代議制, the representative system)로 구성되는 대의 민주주의 혹은 간접 민주주의다. 대의제라 함은, 역시도 단어가 가리키는 그대로 의사를 대신 대표하는 대표자를 선출하여 그 대표자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의사를 반영해서 국가의 운영과 각종 결정을 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익히 배워온 것처럼 오늘날의 방대한 영역과 수많은 사람들을 포함하는 국가라는 단위를 적절히 운영하는데 물리적인 한계가 따르기 때문에, 그리스의 아테네와 같은 직접민주주의의 불가피한 대안으로서의 간접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위와 같은 것은 사실이기는 하지만 이는 체제를 선택하고 나서 그 이후에 만들어 낸 일종의 변명일지도 모른다.

대의민주주의의 확립에는 대중들이 주도하는 민주주의에서 예상되는 ‘다수의 우매한 민중들에 의한 폭정’을 우려했던 역사상의 무수한 지식인들의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의심이 더욱 커다란 원인으로 자리잡고 있다. 민주주의 체제가 정착하기 시작한 것은 자유주의가 주도적인 사상으로 사회에 뿌리를 내린 이후다. 자유주의에 근거하면 개인은 모두 간섭받지 않는 자유롭고 동등한 존재다. 이 까닭에 자유주의는 스스로 스스로를 지배한다는 민주주의의 이념을 태생적으로 포함하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자유주의의 노래가 가장 크게 울려퍼진 당시의 엘리트나 부르주아들은 ‘계몽’된 소수에 의해 운영되는 과두제적 대의 정부를 선호했고, 대의민주주의를 채택하는 방법으로, 대중들로부터의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를 충족시키고 동시에 ‘우매한 대중’에 의해 우려되는 자신들에 대한 잠재적인 피해를 대비한 것이다.

선거와 현대판 장 자크 루소

어쨌든 대의민주주의는 오늘날 민주주의의 가장 우세한 체제로 보인다. 대의제의 특징이라 함은 당연히 대표자들에게 유권자들이 자신의 권한을 ‘위임’하는데 있다고 볼 수 있겠다. 그 위임의 과정은 우리에게 가장 친숙하면서도 기본적인 정치 참여의 방식인 ‘선거’를 통해 이루어진다.

‘선거는 대의민주주의의 꽃이다’라고들 한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대의민주주의라는 말이 성립하게 만드는 것은 선거라는 연결고리다. 대의제에서 대표를 만들어내는 절차가 필요한 것은 당연지사. 그것이 선거이다. 하지만 루소는 ‘사람들은 선거날에만 사회의 주인이 된다’ 라는 말을 남겼다. 그의 통렬한 비판은 어찌나 오늘날까지 유효한가. 루소의 이 말은 교과서에도 실렸던 것 같은데, 어쨌든 그만큼 유명한 말이면서 오늘날에도 듣는 이로 하여금 무릎을 탁 치며 괜히 이 나라의 정치인들에 대해 다시 한번 발끈하게 만드는 설득력 있는 말이기도 하다.

국민은 국가의 주인인데, 선거날에만 주인이라니. 이는 말도 안돼는 주객전도가 아닐 수 없다. 얼마전 YTN의 돌발영상을 보니, 시장통에 나온 카메라들 앞에서 국회의원들이 물건을 사고 있자, 지나가던 행인이 “선거철되니 또 날뛰는군.” 하며 그들에게 불호령을 내리는 것이 아닌가. 그 행인은 어쩌면 그 지역에서 행인 행세를 하는 현대판 거리의 루소가 아닐까. 

선거를 기반으로 하는 대의제의 문제는 아마 대부분의 사람이 이미 머리로 알기보다는 몸으로 체감하고 있을 것이다. 대표라고 선거날 투표해놨더니 한다는 일이 저모양 저꼴이라는 말을 하기도 할 것이고, 도대체 뽑아줬더니 해 놓은 것이 무어내고 되묻기도 할 것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진걸까. 나는 여기서 소통이라는 단어를 끄집어 내본다.

소통의 과정으로서의 선거가 왜곡되고 있다

만약 대의제가 오늘날의 사회에서 민주주의를 구현하는데 정말 불가피한 제도라면, 나는 사회라는 한 울타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정치는 선거를 매개로 한 소통의 과정이 아닐 수 없다고 생각한다. 정치는 사회를 전제로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맞닥뜨리게 되는 온갖 충돌과 갈등들을 해소시키기 위한 움직임이고, 그 상생을 통해 전 사회적인 이익과 각각의 사회 성원들의 삶을 한데 안아가고자 하는 사회적인 소통방식이다. 하지만 오늘의 소통방식은 무언가 잘못되어있다. 

선거라는 소통의 행위가 어째서 유권자들을 한낱 투표기와 같은 존재로 소외시키고 있을까. 소통은 근본적으로 양자간에 이루어지는 행위다. 그 맥락에 비추어보면 선거에서의 소통은 유권자들인 국민이 자신의 대표자들에게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는 기본적인 행위고, 그 선거는 후보로 나선 잠재적인 대표자들로 하여금 자신이 대표하게 될 사람들의 의사를 전해받는 과정이 된다. 후보자들은 선거를 즈음하여 자신이 대표가 되어서 시행하고자 하는 일들을 공약이라는 이름으로 알리고, 자신이 가장 적절한, 능력있는 대표자임을 주장한다. 즉, 공약과 수행 그리고 투표로 이루어지는 정치적 소통과정이 성립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일정 시기마다 치러지는 선거는 정당정치가 행해지는 우리 사회에서 이전의 전임 대표자를 평가하는 자리가 되기도 한다. 그 대표자의 지난 과오와 그가 속한 정당에 대해 유권자들이 평가하고 그 평가를 바탕으로 또 새로운 대표를 선택하게 되는 과장이 선거인 것이다.

현실의 소통이 왜곡되고 소통의 참여자들이 서로 소외되는 원인은 앞서 잠시 언급한 대의 민주주의의 태생적 한계에 기인한다고도 생각된다. 수많은 사람들의 욕구를 소수의 대표자가 반영하기란 쉬운 일이 아닌 법. 때문에 선거를 통해 선출된 대표자라 하더라도 선거 이후에는 유권자들이 현실적으로 대표자들의 행위에 대해 강제적인 제제를 가할 수 없다는 점은 선거철에만 주인이 된다는 루소의 말을 더욱 현실성있게 만들고 있다. 더욱이 이는 현실 정치에서 가장 본질적인 소통의 행위인 선거의 기능을 선거철에만 유효하게 못박아버려 정치 현실에서의 왜곡을 자꾸만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국회를 비롯한 현실정치의 장에서 대표자들이 저지르게 되는 실책이나 부정, 피대표자의 민의를 적절하지 반영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실망이 생겨나고, 이에 따라 투표 또한 거부하게 되는 정치적 무관심을 불러온다. 이 정치적 무관심은 정말 정치에 관심이 없이 자신의 삶에만 몰두하게 되는 경우나 정치에 대해 환멸을 느끼는 경우가 있을텐데 양자 모두 투표를 의도적이든 아니든 거부하게 됨으로써 소통의 한 측면에서 떨어져 나간다는데 심각한 문제점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거에 참여하자

정치적인 소통이 왜곡되고 있다. 그렇다면 대의제를 거부할 것인가. 노무현 대통령의 ‘대연정 발언’과 함께 민주주의의 또 다른 모습들이 많이 논의되고 있지만 큰 틀에서의 대의정부를 구성하는 민주주의 체제라는 기본 방침은 변화하기 어려워보이고, 선거는 여전히 효력을 지닐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소통의 왜곡에 따라 투표율 또한 점차적으로 하락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어, 선거를 통해 대표자와 소통하는 과정이 더욱 뒤틀려지고 동시에 대중에 의한 재평가가 선거를 통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음으로써 대표자와 유권자간의 간극은 그 날을 더욱 날카롭게 세울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투표는 기본이다. “쿠니미츠의 정치”라는 만화책에서는 선거를 한 지역의 축제라고도 표현하는데 그 말이 꼭 맞을지도 모른다. 선거는 유권자들이 자신들의 소망을 사회에서 정치적으로 실현시키고자 후보자들과 소통하고, 자신의 권한을 위임하는 미래를 이야기하는 자리다. 그리고 전 시기의 선거를 통해 선출된 대표자나 정당을 새로운 선거로 재평가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비록 무수한 유권자들 속의 한 표가 하찮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그 한 표가 모이고 모여서 커다란 뜻을 반영한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지 않을까. 오늘날 정치 참여의 방법에는 정당 가입을 통한 활동이나 시민단체에서의 활동, 언론에 기고를 한다던가 최근 몇 년사이 아주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인터넷에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는 것과 같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실상 정치에 유난히 관심이 있지 않고서는 일상에서 정치 참여에 큰 힘을 기울이기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선거에라도 적극 참여해야하지 않을까.

때문에 나는 선거라는 축제에 유권자가 보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참여하기를 기대한다. 단순히 유세를 듣고, 집으로 날아오는 홍보전단지만을 볼 것이 아니라, 유권자와 후보자 사이에 줄기차고 끈질긴 대화들이 오갈 수 있어야 한다. 모든 유권자와 후보자가 서로 대화를 하는데는 물리적인 제한이 불가피하게 존재하겠지만, 인터넷이라는 유익한 도구는 ‘전자민주주의’라는 말을 지금의 현실 근처까지 가져온만큼 그 물리적 거리의 극복을 가능하게 만들어주고 있다. 

선거로 선출된 사람은 우리의 권리를 좌지우지하고 우리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사람이다. 국회의원 배지를 단 사람이 국회에서 하는 말은 우리의 목소리를 등에 업은 말이다. 선거에 참여하더라도 무언가 언론에서 이슈가 되지 않는 한에는 거의 공약이었던 정책이 제대로 시행이 되는지 아닌지를 잘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게다가 그 자신의 지역구에서 자신을 대표하는 대표자의 이름조차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마냥 국회의원 욕할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하는 ‘욕먹을 짓’이 바로 우리를 등에 업고 저질러지는 점이라는 데에 유권자가 반성해야 할 몫도 분명히 있지는 않을까.

보다 적극적인 정치 행위들은 선거를 우선으로 한 다음의 이야기이다. 선거에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는 것은 그 만큼 정치가들이 많은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도록 만드는 동인이 되고, 발언의 물리적인 수가 커지면 커질수록 그 발언이 가지는 힘 역시 그 수에 비례하여 커지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지 않을까. 정치의 근본적인 화두는 사회의 갈등을 합리적으로 해소하는데 있다. 선거는 만장일치를 이끌어내지는 않지만, 투표로 결정을 내리기 이전에 행해지는 토론의 과정과 고민들은 시민들의 정치의식을 성숙시키고, 투표로 내려진 결정에 비판적 수용을 하는 관용을 이끌어낸다. 선거는 참여를 이끌어냄으로써 성숙한 ‘민주 시민의 주인 의식’을 고취시키는 가장 기본적이면서 핵심적인 과정이 아닐 수 없다.  

민주주의의 가장 커다란 매력이자 핵심은 사회 성원이 사회의 주인이며, 스스로가 스스로를 지배하는 데 있다. 인터넷이라는 도구가 그 동안 대의민주주의 불가피한 선택에 대한 변명이 되었던 물리적인 한계들을 극복하도록 돕고 있다. 이에 힘입어 더욱 적극적으로 정치의 장에 나설 필요가 있다. 정치는 정치를 직업으로하는 정치인들만의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이익과 갈등, 문제들에 관한 것이다. 정치에서 유권자들이 더욱 힘을 가지게 되는 것은 사회의 주인으로서의 당연한 권리와 마땅한 이익들을 다시 주도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대표자와 유권자간의 선거를 사이에 둔 끊임없는 긴장만이 사회에 더욱 긍정적인 힘을 가져다 줄 수 있다. 분명, 선거가 전부는 아니지만 선거로부터 무언가 시작된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 아닐까. 


댓글

손재선님

잘 읽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상원님께서 말씀하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것처럼 보일수도 있겠군요. 원래 선거의 시발점은 상원님께서 강조하고자하는 "소통"의 개념이 옳습니다. 저는 현대선거제도가 일방적인 유세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상호간의 커뮤니케이션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이상적이라 생각하지만 이미 깊숙히 뿌리내려버린 선거제도를 변화시킨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 입니다.

하지만 과연 선거 참여 인원수와 긍정적인 정치참여 관계가 비례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군요. 본인의 입장을 대변할 수 있는 "한 표"는 분명 커다란 의의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선진국들이 매 선거철마다 겪은 커다란 난관은 바로 저조한 투표율에 있습니다. 가장 살기 좋은 나라하면 꼭 TOP 3안에 드는 스위스 같은 경우도 40%도 못 미치는 투표율을 보입니다(이건 여담이지만 가장 살기 좋은 도시는 캐나다의 벤쿠버랑 호주의 멜번이더군요). 살기 좋은 나라라면 활동적인 정치참여를 예상하겠으나 실상을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 것일까요? 그 이유는 바로 온 국민이 각자 본분에 충실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즉, 정치가들은 정치를 하고, 농부는 농사를 하고, 비즈니스맨은 비즈니스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뱃사공이 너무 많습니다. 인정하기는 싫을수도 있겠지만 대다수 국민은 정치에 대한 별다른 생각없이 막바지에 비쳐지는 후보자에 대한 '이미지'만을 보고 선거에 참여하기 때문에 안타깝게도 아직 우리나라 투표수준은 '여론투표'에 그칩니다. 즉, 여론이 만들어낸 후보자의 이미지가 곧 투표수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역대 대통령 선거 당시 조x일보, 동x일보, 중x일보, 한x레 등의 신문사간의 경쟁에서 나타나며 한때 모 프로그램에서 이와 관련 문제점을 다룬 적이 있습니다. 마치 온 국민이 정치인이 되어버린 듯한 선거현장, 그래서 결국 배는 산으로 가버리는 현상을 빚어냅니다. 똑같은 국민의 입장에서 (후보자의 입장은 다르겠지만) 평소에는 관심도 없다가 선거철만 되면 이래저래 말 많아지는 무지한 유권자의 참여를 기대하느니 차라리 하던 일을 더욱 충실히 하는 국민이 되는 것이 더욱 이상적이라 생각합니다. 


한상원

재선씨/저는 재선씨랑 생각이 조금 달라요. 말씀대로 -아마도- 분명히 대다수 국민들은 '이미지'만을 보고 선거에 참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이 되기전에 흔들었던 노란빛의 풍선을 보고 그 이미지를 머리에 알게모르게 새겨둔 사람도 참 많죠. 눈물 흘리는 광고라던가. 이와 반대로 이회창 후보의 다소 냉정한 이미지도 그렇구요. 

그렇다고 해서 낮은 투표율을 당연시 여긴다든지, '살기가 좋다'는 것과 '투표율'은 무관하다라고만 볼 수는 없다고 봐요. 실제 그 도시 혹은 나라의 정치 참여가 어떠한 모습으로 이루어지는지 저로서는 알 수가 없지만- 선거말고도 다른 활동들이 충분히 있을 수 있기에- 그 곳이 살기가 좋은 이유는 투표율과 무관하게 각자 본분에 충실하기 때문이 아닐까라는 말에는 제 이해가 짧은 탓인지는 몰라도 쉽사리 공감할 수가 없군요. 

각자가 각자의 맡은 몫을 한다는 말은 일견 정당할 수 있지만, 정치를 다양한 영역에서의 갈등을 다루는 분야라고 생각한다면 그 갈등은 해소를 통한 도약을 기대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죠. 하지만 각자가 각자의 맡은 일만 하고, 정치는 정치가 직업인 정치인이 하자라는 식의 사고는 그 갈등이 생겨날 여지조차 주지 않게 되는 것은 아닌지요.

재선님의 말씀처럼 온 국민이 정치인이 되어 배는 산으로 간다하지만, 정작 정치판에서 흐르는 이슈는 국민 감정이나 사람들의 견해와는 무관하게 전혀 다른 방향으로 종종 전개되죠. 이는 사공이 많아 배가 산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공의 의사와 상관없이 몇몇 사공의 뜻대로만 배가 방향을 정하는 것이라 생각됩니다.(비유가 적절치 못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긴합니다만) 저는 이걸두고 마땅히 배의 진로를 결정짓는데 영향력을 행사해야 할 국민들의 견해가 왜곡되고 있고,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라고 봐요. 

때문에, 하던 일을 더욱 충실히 하는 국민이 될 것이 아니라, 재선님의 타당한 지적사항인 이래저래 말 많아지는 무지한 유권자 혹은 이미지만을 보는 유권자를, 유권자 스스로 극복하는 방향으로 나가는게 올바른 ‘정치’의 관점을 되찾는 것이 아닐까 싶네요. 관심은 참여를, 커져가는 참여는 보다 역량있는 유권자의 능력으로 나타나지 않을까요. 페리클레스는 아테네를 그리스의 학교라 말했다죠. 그리스 세계에서의 민주적인 시민들을 직접민주주의의 ‘참여’로 양성한다는 의미에서요.

그를 위해- 다음에 이야기 할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언론이나 정당들의 정책 중심의 활동, 지자체 중심의 자율에 기반한 자치적인 움직임이 더욱 필요로 하지않을까요. 제주도의 자치지역(정확한 명칭이 떠오르지 않는군요)은 그런 움직임의 선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긍정적이라 생각하고 있답니다.

말처럼 쉽지 않은 문제지만, 정치는 바로 우리 자신의 이해와 직결되는 문제기 때문에 더더욱 관심을 가지고 생활 속에서 조금씩 풀어내야 할 문제같아요. 한표 한표가 모여 대통령을 만들고, 국회의원을 만드는 것처럼 그런 끈질긴 힘이 필요하겠죠. 

재선씨 댓글 감사해요. 적절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도 다시 한번 생각하면서 말씀처럼 그저 당연한 말이 되버린 글을 조금이나마 보충할 기회가 된 것 같네요. 계속적인 논의로 이야기가 풍성해졌으면 좋겠어요.

허원영님

이곳의 논의를 읽어보니 최장집 교수가 쓴「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의 한 구절이 생각나는군요. 정확하진 않지만, 대략 "민주주의는 갈등을 기반으로 발전한다. 갈등이 없는 민주주의는 있을 수 없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사실 민주주의라는 게 그렇습니다. 길고 지루한 싸움입니다. 서로의 입장과 이해관계를 조율하고, 관철하며, 소리 높여 외치고, 때로는 싸우기도 해야 하는 시스템입니다. 다른 사람을 설득하고, 어떤 이들은 설득당하는 '갈등의 미학'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체제입니다.
그렇기에 중구난방 떠들어대는 소리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갈등'이 표출되지 않는 나라는 1) 정말로 갈등이 없거나, 2) 갈등이 표출되지 않도록 억누르고 있거나 둘 중 하나겠지요. 그렇지만 전자의 경우가 있을 수 없다는 걸 생각하면 갈등이 표출되지 않는 나라가 얼마나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박정희, 전두환 시절이나 제국주의 일본, 또는 나치 치하의 독일을 보면 잘 깨달을 수 있습니다. 사람의 몸이 통증을 느낄 수 없을 때 얼마나 심하게 다쳤는지 알 수 없는 것처럼, 사회의 갈등 역시 표출되지 않으면 그 나라가 얼마나 곪아 있는지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이런 갈등이 가장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방법으로 표출될 수 있는 제도가 바로 민주주의입니다. 그러나 현대의 사회는 너무나도 복잡하며, 모든 이의 의견을 골고루 반영하기란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대의 민주주의 제도를 채택하고 있죠. 이런 현실에서 정치를 외면하고 우리 삶의 안정과 향상을 바라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강압적이든 자의에 의한 것이든 의사를 표현하지 않으면 반영되지 않고, 결국 말 그대로 소수에 의해 우리 사회는 끌려 가겠지요.
뭐, 민주주의도 문제점이 꽤 많은 시스템이긴 합니다. 허나 처칠의 말대로, 최선의 제도는 아니지만 지금까지 인류가 발견한 정치제도 중 제일 쓸만하다는 건 부정할 수 없습니다. 현대에 와서 부족제나 봉건제, 독일의 제 3제국 같은 정치체제를 부활시킬 수는 없겠죠. 결국 선택의 여지는 없습니다. 민주주의는 인류의 발전을 떠나 올바른 삶의 유지를 위해 필요한 것이고, 그 민주주의를 썩지 않고 살아있게 만드는 건 참여 뿐입니다. 결론은,

투표 하십시오. 





상병 김동환 (2005-11-02 09:20:57)  
투표는 꼭꼭 해야지요.  

상병 주영준 (2005-11-02 10:00:45)  
답글 달고 싶네요. 학교다닐때 기획으로 학생회 대의제 의회 민주주의 관련해서 侈 빡신 회의 끝에 글을 만들어본 기억이...(뭐. 다행히 책임기획자는 제가 아니었음...)  

병장 김지건 (2005-11-02 11:15:18)  
선거로부터 뭔가가 시작된다? 선거는 권력유지(혹은 계승)의 수단일 뿐입니다. 과거 '우매한 국민들'의 시절의 체육관투표는 노골적인 예이고 근래의 선거는 재선님이 언급하신 것 처럼 여론몰이와 쉽게말해 뒷담화의 장입니다. 언제 이나라 정치판에서 '대화'라는게 존재했었습니까? 소통이란것도 그 대상자들이 서로의 생각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가능해지는 겁니다. 그럴려면 서로 동등한 입장이라는 생각을 공유해야 하는데 그조차도 없습니다. 상원님도 언급하셨다시피 선거철에는 니가 왕이다 이것도 먹고 저것도 먹고...절도 해가면서 표 받아 '높으신 보좌' 하나 떡하니 챙겨먹은 후에는 '내가 왕이다' 하는 자들이 과연 '소통'을 허락할는지...(웃기는 일이지만 예전의 그같던 대통령들에겐 "각하, 각하" 하며 연명하던 자들이 지금의 지나치게 겸손한 대통령에겐 손자뻘 대하듯 하지만요) 일단 우리 '국민'들부터도 소통할 자세가 되어있지 않잖습니까? '저들은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인데' 하고 말입니다. 군부정권을 거쳐왔던 대한민국에서 소통이란 단어는 정말 멀게만 느껴지는군요.

투표할 수 있는 나이를 올려야 한다는 생각도 잠깐 해봅니다. 다른사람을 어떤 직책에 올려놓을 만큼의 권리를 행사하려면 최소한의 사회경험과 최소한의 역사의식, 그리고 양심이 있어야 합니다. 정신없이 수능공부만 하면서 난잡한 신문사설과 잡다한 글쟁이들의 칼럼을 읽으며 '교양'을 쌓아왔던 고3들이 안그래도 정신없어 죽겠는데 정치에 참여한다? 고3이 겉늙어보이는데는 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대학생은 또 어떻고요. 양심은 내팽개친지 오래, 대기업 취직만이 목표입니다. 대학생들이 점찍어두는 정치인은 이미 만사 제쳐두고 '갱제를 학씨리' 살릴 수 있는 사람으로 낙점되어 있습니다. 아, 그런거라면 어르신들이 가장 우선되는군요. 이런 상황에서 투표로 세상을 어떻게 해본다? 너무 어려운 얘깁니다.

단적인 얘기로 제 후임 얘기를 하자면, 모 당의 열혈'팬'입니다. 착한 사람들이라나. 북한도 아니고 어떻게 한 사람에게 그리 몰표가 나올 수 있느냐 라고 하는 말에 속에서 뽀그락 끓는걸 겨우 참아 넘겼습니다. 독재와 학살을 황금빛 용포로 에둘러 감추어왔던 자들에게 그 피해자들이 표를 준다? 예수나 석가가 아닌 이상 그렇게는 못합니다. 후임은 그런건 모르는 듯 했지만요. 아마도 그 고름 짜내려면 도려내는 수밖엔 없겠군요. 대검에 가슴이 도려내졌던 이름모를 여자처럼요. 사람을 선택하려면 그 사람에 대해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근데 알려고도 하지 않으면서 선택하려 한다? CPU가 4GHz를 바라보는 지금 휘황찬란한 LED로 장식된 케이스의 486 50MHz짜리 컴퓨터 사고 나서 후회한들 그는 후회할 자격이 없습니다. 절대로 투표 해서는 안됩니다.

[재선님 의견에 표 던지기] 민주주의에 대한 정의로 '국민'이 주인이다라고 하셨는데, 말이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개인'이 주인이라는 의미로 수정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국가에 피지배당하는 '국민' 말고요. 국민을 지배하려는 국가는 가히 폭력적입니다. 우리세대 갓 태어나 앙앙거리던 시절 있었던 그 처참한 인간상을 다시 보고싶지는 않군요. 예전처럼 직접적 물리력을 행사하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은 차별과 냉대가 횡행하고 있습니다. 참 어이없는게, 어느 동네라도 마찬가지로, 피해자가 항상 더 냉대를 받습니다. 잔인한 자들...아니라고요? 그건 당신 개인에 국한된 이야기. 혼자서는 얼마든지 착할 수 있으니까요.

미국이 정치체계가 좋아서 저렇게 강력한 힘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철저히 '개인주의'를 인정하는 집단이었기 때문에 개인은 강한 힘을 가질 수 있었고 또한 그 힘을 마음껏 발휘해 낼 수 있었습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개인이 사회에 공헌한다'는 의미는 바로 이런 것들이죠. '저변'이라는 말과 일맥상통합니다. 반면 모든 것을 통제하고자 국가가 제시한 '시스템'과 그 시스템 요소들은 민주주의와는 딴판인게 됩니다. 그 무엇과 닮아있죠. 네, 저기 저 무엇. 재선님의 말씀을 민주주의를 구성할 수 있는 '저변'이 필요하다는 걸로 받아들이면 맞을지 모르겠지만 '자기 일이나 똑바로 하는' 국민이 민주주의의 궁극적 의미가 아닌가 합니다.

왜, 한글타자연습 장문에 '들사람 얼(야인정신?)'이라는 글 따라 치다보면 이런 에피소드가 등장합니다. 천자 요왕이 민심을 살피려 시골길을 지나다가 밭일하고 있는 농부를 보고 "지금 왕이 어떤것 같소?" 하니 농부가 "내가 내 힘으로 내 땅 파서 먹고 사는데 임금따위가 다 뭐냐"고 했더랍니다. 오오...이 무슨 경을 칠 소린가. 불과 근 십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서 그딴 소리 했다간 조용히 어디 끌려가서 전기의자에 살짝 구워졌다가, 욕조에서 살짝 데쳐졌다가 집앞에 버려졌을텐데, 이 하늘이 내리신 지엄하신 천자는 "백성이 내 간섭 없이도 이처럼 신간 편하게 살고 있으니 내가 어지간히 정치좀 하는구나"하고 생각하셨더랍니다. 과연 현인이요, 탁 트인 널찍한 가슴의 소유자가 아닙니까? "요순시절이 좋았지"하고 혀끝이나 끌끌 차고있던 저 영감님들은 무슨생각으로 그런 말을 그리 쉽게하나 몰라...그냥 '각하께서 계시던'시절을 회상하면서 그러던데...  

상병 김상희 (2005-11-02 14:47:33)  
요즘 들어서 내부의 민주주의 보다는 외부의 민주주의에 더 신경쓰이는군요...  

병장 오규현 (2005-11-03 12:48:37)  
이런 글이 있었군요. 감탄입니다.
어느새 주욱 따라 읽다 보니 바닥까지 내려왔네요.
투표라. 저도 개인적으론 '투표를 하자'에 한 표 던지고 싶습니다.
항상 '형식'이 필요한 시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틀이 없으면 내용을 담을 수 없듯이.
투표가 없다면 민주주의를 논할 수 없겠죠.
투표라는 자신의 권리를 이해하고, 권리에 따르는 책임까지 이해한다면 정말 좋을텐데요.  

상병 김강록 (2005-11-05 14:22:43)  
우선, 전공 학부생으로서의 식견을 유감없이 펼쳐보이는 상원군께 박수를!

지난 대선 때의 제 개인적인 감상을 말하자면, 간단하게, 민주주의 체제에서의 시민의 권리란 '선거권⊂참정권'일텐데도 자꾸만 '선거권=참정권'으로 그것이 호도되더란 것입니다. 선거철에(만) 앞장서서 선거에 대해 떠드는 이들─이란, 대체로 피선거권자 당사자들이거나 혹은 그들과 이해관계를 공유하는─에게 과연 일개 유권자인 제가 어떤 의미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작, 한 표로 뭘 할 수 있다는 건지. 저는 마치 한창 작업철 만난 병사와 같은 몰골이었습니다.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요, 축제라지만, 별로 저를 위해 피는 꽃도 아니고 저를 위한 축제도 아닌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이후로 좀 더 말이 많아지기로 했지요. 그전에도 구구절절 말이 많은 놈이었지만, 더욱 말 많은 놈이 되기로 했습니다. 선거권에는 포함되지 않은 그 '너머'의 참정권은 제가 적극적이 되면 좀 더 챙길 수 있을 듯 해서요.

'정치 과잉'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학교에서 몇몇 아끼는 후배들에게는, 종종 이 말을 해주고 싶은 경우도 있어요. (물론, 그래도 이는 '힘들텐데 좀 쉬었다 하지' 정도의 어조일 겁니다.) 하지만 대개 우리 또래의 실상을 보면 '정치 과잉' 운운한다는 게 우습습니다. 좀, 진지해졌으면 싶어요. 단지 어른 흉내 내고서 으쓱거리는 이상의 의미가 우리에게 있었으면 싶은 겁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선거철에 주변 친구들이나 선후배들과 선거에 대한 제법 진지한 논의를 형성시키는 정도가 있을 듯 했습니다. 어떤 정당, 어떤 후보가 더 낫다, 는 식의 논쟁이 아니라, 그야말로 서로 좀더 생각해볼 기회를 가지는 게 목적이고, 누가 누굴 설득하는 게 아니라 서로간의 생각의 차이만 확인할 수 있어도 이는 괜찮은 성과입니다. 하지만 그조차 선거철에만 반짝한다는 게 제 한계라면 한계겠네요.  

병장 김윤규 (2005-11-07 08:07:15)  
그렇다면 문제는 '우매한 민중들로 인하여 어리석은 결과가 빚어지는 사태'를 피하는 것을텐데..
그들을 투표하게 하고 올바른 선택을 하게 하는 교양,경제,역사지식,철학,양심등은 '교육'에 달려 있는게 아닐까요? 교육시스템의 개선이 정치뿐만이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시민들의 영향력을 극대화시킬수 있는 근본적인 대안일지도..

어쨌든 투표합시다...  

상병 김상희 (2005-11-07 10:05:00)  
한 두번만 제외하고 대부분 보이콧이나 무효표를 선택했어요.. 강록씨 말대로 내 한표가 생각보다 소중하게 느껴지지 않더군요... 그러면서 '선거연령 낮춰달라'는 요구를 하고 다녔었지요... 스콧니어링 자사전을 보다가 이런 구절이 있더군요 " 젊은 세대는 갈수록 기성사회에 순응하기를 거부하고 있다. ...차별과 기계화와 자동화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의 노동이 존중되지 못하고, 수백만 명의 고등학교, 대학교 졸업자들이 실업자로 전락하거나 장래성 없는 직업에 매달리고 있는 마당에 말로만 '자유'와 '민주'를 떠들어대는 기성사회는 젊은 세대들에게 분노와 적대감을 불러일으켰다." 전통적인 생활방식이든 사고방식이든 거침 없이 받아들이는 세대가 아닌 젊은세대에게 그래도 전 희망을 갖고 있답니다..(전 이제 곧 낡은세대의 대열로 가는 중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