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행복한 동거를 위한 한가지 (7급 하지연/051026 
 
 
 
 
후배J와 살림을 합치게 된 것이 벌써 일년이 되어간다. 
J와는 알게 된 건 햇수로 3년쯤 되니 그리 오래 알아온 것은 아니지만 지금은 가장 친한 친구이자 소울 메이트가 되었다. J는 다른 후배의 결혼식 피로연장에서 만났는데 그냥 첫눈에 끌려서 내가 꼬신거나 다름없다.

J에 대해 잠깐 얘기하자면 나이는 나보다 4살이 어리고 호리호리한 몸에, 산에라도 같이 갈라치면 전생에 빨치산이 아니었나 할 정도로 훨훨 날아다닌다. 술은 여지껏 한번도 취한걸 보지 못했을 정도로 두주불사(斗酒不辭)에 발동이 걸리면 새벽 3-4시는 거뜬히 넘기는 엄청난 체력을 가지고 있다. 나와 같이 있을 때는 항상 예의바르고 무던한 성격인데 가끔 얘기를 들어볼라 치면 그 거칠다는 남자 중학생들을(학원 수학강사이다) 한칼에 제압하고, J선생님 화가 났다하면 벌벌 떨 정도라는 것이다. 
이런 J의 아이러니는 가끔 거실에서 TV를 보다가 J의 비명을 듣고 뛰어 나가보면 바닥에 풍뎅이 한 마리이거나, 조금 큰 개미한마리가 비명소리에 놀라 혼비백산을 하고 우왕좌왕 하고 있다는 것이다. 
눈이 커서 항상 눈에 뭔가 들어가 눈물을 줄줄 흘리고 비위가 약해 냉장고에 상한 음식이라도 있으면 안절부절 못하며, 물은 또 얼마나 많이 마시는지 나 혼자 일 때는 2리터 여섯 개 들이 한 팩이면 20일을 넘기는데 J는 하루에 2리터 물 한통을 그것도 집에 있을 때만 해치운다. 그래서 급기야 내 평생에 이런 일이 있을까 했는데 집에다 정수기를 갖다 놓았다. 
그런데도 우리는 제법 잘 맞는다. 내가 어줍잖은 요리를 하면 후배는 쓰다 달다 없이 잘 먹고내가 싫어하는 설거지도 뚝딱 잘 해치운다. 가끔 마트에 가서 카터를 끌며 같이 장을 보고 심야영화를 같이 보러가고 주말엔 같이 딩굴 거리며 만화를 보거나 TV를 보며 낄낄거리고 낮잠을 잔다. 

결정적으로 우리가 같이 살게 된 것은 작년 12월 아주 추웠던 날 영화를 보고 집에 데려다 주러 갔었는데 현관문을 여니 엄청난 시베리야 한파가 몰아치는 것이었다. 어찌된 것이 바깥보다 집안이 더 추운가 물어보았더니 보일러가 고장 나서 고쳐야 하는데 귀찮아서 전기장판하나로 버티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당장 필요한 옷 몇 가지를 챙겨서 J를 집으로 끌고 왔고 처음엔 겨울을 같이 나자고 꼬드긴 것이 봄이 지나고 여름이 지나고 가을을 거쳐 다시 겨울이 왔다. 사실 11월 새로 입주하는 아파트에 이사를 가야하는데 내가 요번겨울만 같이 지내자고 계속 꼬시고 있는데 어찌될지 잘 모르겠다. 

같이 살게되면 서로 많이 닮아가는 것 같다. J는 츄리닝 패션 애호가 인데 맵시가 제법 날렵한 것이 둘이 어디 다니다 보면 항상 운동선수인지 헬스클럽 강사인지 물어볼 정도다. 얼마 전에는 J의 꼬드김에 거금을 들여 나이키 샤크 운동화를 샀다. 얼마나 폼 나고 편한지 출근 할 때도 신고 나선다. 쑥스러워하는 J를 반 강제적으로 마사지 샵에 끌고 가서 중독 시켰고, 쥐를 무서워해 그 큰 눈에 공포가 가득한데도 햄스터 먹이 주는 것까지 시킨다. 이놈이 가끔 탈출을 하는데 그것도 꼭 J의 방에서 어슬렁거리다 잡히는 것이 이 녀석도 J 겁주기에 재미를 느끼는 것 같다. 
그것도 모자라 나는 보편적이고 약간은 멜로적 감성을 가진 J를 나의 사악한 B급의 정신세계로 천천히 물들였다. 처음에는 황혼에서 새벽까지를 보다 도망 가버리고 킬 빌을 보다 5분 만에 잠든 J였지만 몇 일전 회식 후 11시쯤 들어가 보니 소파에 덜렁 혼자앉아 OCN에서 하는 킬 빌을 홀린 듯이 보고 있는 J를 보며 보람을 느꼈다. 탄력 받은 김에 조만간 황혼에서 새벽까지를 다시 보기로 했다. 
J는 나의 사소한 취향이나 게으름에 대해 많이 너그러운 편이다. 욕실에 다섯 개가 넘는 비누가 있고 3가지 타입의 샴푸가 있어도 귀찮아하지 않고 냉장고에 유통기한지난 맥주나 냉동식품도 군말 없이 같이 먹어치운다. 

우리 둘을 아는 사람들은 어떻게 다 머리 커서 그렇게 사는지 신기해한다. 
물론 살다보면 그 사람이 나와 얼마나 틀린지 알게 되지만 설령 J가 샤워를 한뒤 욕실이 물바다가 된다 해도 가끔 밤에 너무 늦게 들어와 나의 잠을 설치게 한다 해도 나 밥 먹기 싫어도 J 때문에 찌개 끓이고 생선 굽게 된다 해도 그 수고로움이 J와의 동거에 대한 즐거움을 망치지는 못한다. 
나도 내가 누군가와 이렇게 보편적으로 잘 지내리라고는 생각 못했다. 처음의 고민은 친구로 좋은 감정이 결국 같이 살게 되면서 나빠지지는 않을 까 하는 것이었다. 사실 J에게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J역시 나와 다름 아닐 것이라 생각한다. 나 자신에 대해 지나치게 냉정한 면이 없지 않아 있지만 이렇게 남과 같이 할 수 있다는 건 내게 새로운 감성이 있지 않을까 하는 착각을 해보게 된다. 

옛날에는 친하게 된다는 것이 너나 할 것 없이 허물없이 잘 지내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지금은 조금 바뀌었다. 
J는 예의가 바르다. 벌써 한3년쯤 알았고 1년도 넘게 같이 살았지만 아직도 나에게 말을 놓지 않는다. 지금의 여세로 보아 아마도 결코 나에게 말을 놓을 것 같지 않다. 그런데 신기하게 그것이 불편하지가 않다. 
오래도록 좋은 사람으로 남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아무리 친하게 되거나 같이 살게 되더라도 최선을 다해 예의를 지키는 것이 라는 생각이 문득 든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예의를 지킨다는 것 
부모와 자식간의 예의, 연인과의 예의, 스승과의 예의, 친구와의 예의, 나아가 인생에 대한 예의. 나 자신에 대한 예의.
J와 같이 지내면서 그것을 알게 되었다. 아니 옛날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가슴에 와 닿게 된 것이다.  
아침에 일찍 출근하는 나를 위해 오후에 출근하는 J가 어제 늦은 귀가에도 불구하고 비틀거리며 일어나 배웅을 하고 나는 J의 해장을 위해 10분 일찍 일어나 끓여놓은 오징어 국에 청량초가 너무 많이 들어가 속이 화닥거릴 거라고 미안해하며 우리는 아침인사를 주고 받는다.





병장 한상천 (2005-10-26 11:34:44)  
황혼에서 새벽까지 정말 재미있게 보았는데..
좋은 룸메이트인거 같습니다. 주위에 인물을 이렇게 정감있게 표현하시다니.. 부러워요  

병장 김태우 (2005-10-26 11:41:10)  
뜬금없이 예의바른 J씨 라는 멘트가 생각났습니다.(난감)  

상병 황현준 (2005-10-26 12:16:32)  
와~ 매력적인 글솜씨에 푹 빠져서 3-4번 더 읽은것 같습니다
지금 친하다는 명목하에 선임/후임한테 막(?)대했던 것들이 반성되는 좋은 글이었습니다  

병장 이동규 (2005-10-26 12:19:18)  
혹시 사바세계에 문예동아리는 없으신지?????

인터넷도 있을텐데 인트라넷에 글을 올려주시니...흠....


친절한 지연씨(님)  

병장 양용구 (2005-10-26 12:25:09)  
하지연님의 글을 읽을때마다 글솜씨에 푹 빠져 듭니다...(웃음)  

병장 이상수 (2005-10-26 13:08:48)  
허걱...소설책에서 인용인줄 알고 읽어내려가다보니...인용이 아니네요. 정말 멋있습니다. 옥탑방고양이라는 드라마가 한창 인기리에 방영될 때 동거에 대한 환상이 많았는데, 맘만 맞으면 동거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상병 고계영 (2005-10-26 13:24:01)  
동거라는 것이 그저 금전적인 이유에 의한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실화?!인 것 같아서 재미있고 생각하면서 읽게되네요. 그리고 갑자기 '낙하하는 저녁'생각나는 이유는 뒹굴뒹굴과 만화책 때문인것 같은. 그냥 웃음이 나오는 즐거운 글이네요. 언제나 이렇게 글을 올려주시는 것이 그저 고마울따름입니다.  

병장 손영호 (2005-10-26 13:24:17)  
턱에 손을 괴고 무기력하게 마우스의 휠을 굴리다가
에세이를 한편 발견하고는 그리 큰 기대는 하지 않고, 읽기 시작했는데..
이게 왠걸..하지연님의 글이라 너무 기뻤습니다..
글쓴이를 확인치 않고 문체만 보고 "혹시?역시!" 하고 느껴낸 것이라..
제 자신이 너무 기특하네요...
밖에서는 하지연님의 글을 만날 수 없는건가요?
이런..중독성이 너무 강한데..  

일병 안대섭 (2005-10-26 13:51:18)  
말이 혼자 자취지, 지방에서 올라온 녀석부터 스위스서 뚝 떨어진 녀석까지 이녀석 저녀석 얹고 살다보니 입대 전까지 기간중 1/3은 동거한것 같습니다만....

나가면 경험을 살려 이번엔 이성과(...)  

병장 양인수 (2005-10-26 13:56:59)  
저도 사고 싶습니다. 나이키 샤크 운동화... 후...  

병장 정명기 (2005-10-26 14:39:09)  
재미있군요. 글도, 그에 의해 떠오르는 이미지도.  

병장 박윤철 (2005-10-26 15:44:07)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저는 누나와 10년을 넘게 한 방을 쓰며 자취했는데, 그 생활이 생각나네요. 제대하면 다시 둘이 자취하며 살 거라서, 이젠 반찬거리 만드는 법을 어머니에게서 전수받아 상경할 계획입니다. 

언제나, 함께 살고 친하게 지낼 수록 서로에 대한 예의가 관계를 좋게 만들지요. 잘~ 읽었습니다!  

병장 손현태 (2005-10-26 16:52:58)  
그 스크롤의 압박에도 하지연님의 글을 끝까지 다읽게 만드는것 같습니다...
누군가와 동거를 한다는것 재밌는일이죠...
서로를 배려하고, 예의를 갖추는것 동거를 하면서 배워야 하는 것들 인것 같네요..  

병장 김석안 (2005-10-27 08:26:50)  
대학시절을 떠올리게 하네요. 지방 소도시에서 상경하여 난생 처음 가보는 서울이었습니다. 많이 낯설어 외로움에 사무쳐 지낼때 기숙사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혼자는 아니라는 생각에 마냥 좋아 하며 기숙사 방에 도착하는 순간 혼자가 아님에 많이 얼떨떨 했습니다.(2인1실) 룸메이트가 오기까지 혼자 어떤 사람일까 상상하고 인사말을 생각하며 기다리다 마주본 얼굴에 민망하여 3일간이나 서로 말 없이 지냈었습니다.
그때는 뭐가 그리 부끄러웠던지. 이주일이 지나고 한달이 되어가자 너무 잘 맞는 꿍짝에 밤새는지 모르고 놀았던 기억이 새록새록 합니다. 낯선이와의 동거도 꽤 괜찮을수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병장 김승현 (2005-10-27 09:25:22)  
'옛날에는 친하게 된다는 것이 너나 할 것 없이 허물없이 잘 지내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지금은 조금 바뀌었다.' 이 문장이 계속 생각에 남는데요. 아직 덜 살아서 그런지 아직까지는 친하다는 것이 허물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좀 더 살아보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네요....
남자x끼라서 그런가....(웃음)  

일병 이영준 (2005-10-27 10:17:21)  
친할수록 "예의"를 지켜야 한다는 말.. 가슴에 참 와 닿습니다.(맞춤법이 맞나 모르겠네요)
동거를 한다해도 상호간의 예의만 지킨다면, 마찰없이 잘 지낼 수 있을 듯 합니다.  

상병 강재훈 (2005-10-27 14:16:51)  
나 밖에 모르는 저로써는 동거가 쉬운게 아닙니다
허나 저도 누군가라면 같이 살수도 있겠다 싶은 사람이 있는데
여자는 아니고 친구입니다 그 친구라면 같이 살아도 좋겠다 싶네요  

병장 구자민 (2005-10-27 23:05:03)  
저도 이곳에 여행오기전에 한 2년 정도 동거를 해봤지만 
혼자였을때 보다 둘이 낳은거 같네요 
외롭지도 않고 항상 집에 들어 갔을때 
가득차 있다는 그런느낌 군대에서는 느끼기 힘든 그런 묘한느낌이죠.  

일병 장강욱 (2005-10-28 07:16:06)  
일방적 관념의 무서움이란...
처음 글 제목을 봤을 때 제일 먼저 떠오르는게 왜 이성간의 동거였는지...  

일병 임재현 (2005-10-29 19:20:09)  
소개시켜줘  

상병 박대열 (2005-10-31 09:12:35)  
행복한 동거를 위한 한가지는 '예의'라는 건가요?
그러면 그 '예의'는 애정(이성간의 그거 말고)과 우정 사이의 감정일라나
왠지 그런 느낌...  

상병 이진수 (2006-01-04 14:26:13)  
남자? 여자? 음.. 해깔리네요.  

상병 신현준 (2006-01-04 19:51:45)  
잘 읽었습니다. 멋진 에세이 였습니다.  

병장 백승건 (2006-01-06 19:33:06)  
두번 읽어 봤습니다..
J가 여자라는 생각으로 한번.. 남자라는 생각으로 한번.
이런 시각의 차이에도 글이 어느 한방향으로 가지 않고 
참 깔끔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정말 감사히 읽었습니다.   

  
 
 
 
 상병 조경동 (2006/05/02 12:43:09)

부럽네요.. 
착착 잘 맞는 동거인.. 
자신과 잘 맞는 사람을 만나는게 쉬운게 아닌데말이죠.. 
글 잘 읽었고,부럽습니다.(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