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감하게 질러본다-덤벼라 세상아! (상병 한상원/050829) 
 
 
 
 
<덤벼라 세상아-우리의 진리 찾기>

얼마 전의 강록 군과 승민 씨의 논의를 보면서, 참 부족함을 많이 느꼈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두 분이 만나서 이야기를 하는 상황이었다면 어땠을까 했습니다. 글과 글 사이에서 언어가 가져오는 소통의 한계를 언뜻 본 것 같기도 했고, 사람이 대화를 이끌어가는 뉘앙스나 분위기라는 것은 온라인이나 글로 나타나기란 어느 수준에 이른 사람이 아니고서는 나타내기 힘들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독의 여지가 늘 존재할 수 밖에 없고, 읽는 독자의 다양성을 온전히 담아내는 역량이란 정말 대단한 것이기에 여전히 누군가를 전제하는 글쓰기는 지금 이 순간에도 별을 낚으려는 욕심만큼이나 높고 어려운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분이서 -강록 군의 표현을 빌자면- 팡파레를 울리는 모습은 참 건강해 보였습니다. 덕분에 많은 분들이 대화에 참여하여 두 분 사이의 간극을 메워주는데 일조했고, 저를 비롯한 그 분들의 사고도 두 분과 함께 치열하게 전개될 수 있었던 소중한 대화의 장이었다는 느낌입니다. 소통의 내용이 치열한 격론이 오가든, 온화한 합의로 채워지든 그 소통은 세계와 세계의 연결이라는 점에서 너무나 소중하다는 것을 새삼 확인한 벅찬 느낌입니다. 철학적 논점에 대해 많이 고민하고 공부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구요.

음, 서설이 길었습니다. 이번에 제가 말하고 싶은 부분은 강록 군과 승민 씨 사이에서 주된 화제였던 실세계에 대한 것입니다. 제가 논의의 핵심에 닿아있는지는 저의 미숙함으로 조금 불안한 감이 없지 않지만, 두 분의 화두는 <이 세상을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라고 봅니다. 승민 씨 말처럼 보는 관점에 따라 조금씩 달라질 수 있겠지만요.

20대의 우리는 요즘 늘 고민을 합니다. 세상에는 하고 싶은 것도 많고, 내 가슴에는 넘치는 희망과 꿈들로 가득합니다. 하지만 가슴에 품은 그 꿈들을 하나하나 이루기엔 장벽이 너무 높고 거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잴 수 밖에 없습니다. 경제학적인 시선을 가지고 기회비용을 재어 봐야 합니다. 직장, 연봉, 취향, 결혼, 꿈 등등. 어쩌면 꿈을 말하기에 현실은 냉혹하고, 경쟁적입니다. 현실의 법칙은 누군가 얻은 만큼 다른 누군가가 잃을 수밖에 없는 제로섬게임의 룰을 따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현실을 지배하는 이데올로기와 정치 체제, 사람들과 공개적, 암묵적으로 맺고 있는 관계의 그물망은 여전히 개인을 옭아 죄고 있습니다. 

그래서 탈주를, 어쩌면 관념으로 혹은 상상 속에서 우리는 늘 탈주를 꿈꿉니다. 그 탈주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바를 실현해내고 노동으로서 자신을 실현 해낼 수 있는 세계를 향합니다. 그것은 얽매이지 않고 새로운 영역에서 자신을 확장해내고 기존의 것을 전복, 재배치시키는 대담함입니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면 탈주의 세계는 아무 것도 잡히지 않는 공상입니다. 그리고 나의 두 어깨 위에서는 우리를 지긋이 누르는 현실의 익숙한 무게감이 느껴집니다. 우리가 시도했던 탈주는 다시 일상의 굴레로 회귀하는 가벼운 일탈에 그쳐 버립니다. 그저 한번 질러봤을 뿐인, 칼로 물 베는 식으로 무마됩니다. 소망과 현실이 괴리되어 접점이 나타나지 않을 듯한 이 부조리를 어떻게 풀어가야 할까요.

우리는 정말 토익을 준비하도록 예정 지워진 사람들로 규정 지워지는 걸까요. 토익을 기준으로 사람의 부류가 나뉘어지는 일처럼 우스운 일도 없습니다만. 토익을 준비하는 사람과 토익을 거부하는 사람들로 억지로 나누어 놓는다면, 전자의 부류는 체념적이고 타협적이라고, 후자는 이상주의적, 비현실적이라고 서로가 서로에게 낙인을 가해야 할까요. 

정답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제 생각이 소위 보수적이라 보일 수도 있고, 이상적인 환상이라고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저도 100% 확신은 없습니다. 제 입장이 어떤 이념에 가까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도 치열하게 살아가야 한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그 치열함이 도서관에서 대여섯 시간이 넘도록 줄기차게 앉아서 법서를 달달 외거나, 회계원리를 풀고, 영단어를 암기하는 치열함은 아니어야 합니다. 그 치열함은 자신의 본질을 응시하면서 그 추상적인 본질을 구체적인 현실에 살아 펄떡거리는 노동으로서 실현해 낼 수 있는 치열함을 말합니다. 

추상에서 실제로 옮아가는 방식은 각자가 다를 수 있습니다. 토익을 잘 봐서 좋은 기업에 들어가는 것이 자신의 본질이라고 생각 될 수도 있을 것이고, 법서를 통해 법조인이 되거나 의사가 되거나, 작가가 되거나, 이 모든 방식이 우리에게 활짝 열려 있습니다. 사회를 변혁시키고, 우리네 삶을 진보시켜나가기 위해서 모두 운동가가 되거나 정계에 입문하거나 관료가 되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영화 속 배트맨은 고담시를 구하는 영웅이지만, 우리의 현실에서 우리는 배트맨처럼 모든 사람을 구하려는 소명을 가지고 권선징악의 간판을 건 영웅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그렇게 되면 좋겠지만요. 자신을 희생해서 타인을 진전시키는 이타주의는 누구에 의해서도 강요될 수 있는 사항이 아니니까요.

자신이 사회로 나가게 되는 와중에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줄곧 생각하는 일입니다. 자신이 하나의 주체로 참여하고 있는 사회의 네트워크를 고민하고, 이미 그 고리 속에 참여해 있는 사람과 참여할 사람을 함께 고려하고 고민하는 것 입니다. 작가가 되어, 기업인이 되어, 법조인이 되어, 의사가 되어, 가게 주인이 되어, 무언가가 되어 그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무궁무진 합니다. 우리가 깊은 연관을 맺고 살아가는 한 변화의 가능성은 도처에 있습니다. 변화는 바로 나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소담한 일들로부터 시작되는 것 일겁니다. 

먹고 살기 바쁜데 그런 생각할 틈이 어디있냐구요? 그 생각은 정치나 이데올로기나 법률이라는 거대한 담론들에 대한 고민이 아닙니다. 도덕적으로 우월하고 청렴결백한 사회혁명가나 지도자만이 사회를 바꾸는 것은 아닙니다. 누군가 제게 사회를 바꾸려면 자신이 그만한 지위를 가져야 한다고, 그리고 그 지위에 도달하면 기존의 체제에 길들여져 버린다고. 그래서 늘 개악(改惡)만이 반복된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회적 진화의 관점에서 바라본 세상은 진화를 위해 모든 개체-실제는 유전자-가 끊임없이 자연 속에서 경쟁하는 투쟁의 장에 다름 아닙니다. 인간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피튀기는 정복과 살육의 장을 넘어 진화적으로 안정된 전략을 이루어 낼 수 있습니다. 진화의 시간은 길고도 장구합니다. 우리 역시도 사회적인 진화, 인간적인 진화를 위해서 긴 호흡을 내쉴 필요가 있는 것 아닐까요. 자신이 생각하는 가치를 올바르게 주장할 수 있는 것, 다름을 포용하는 가운데 낯선 사람도 오래 알았던 내 이웃처럼 배려하고 소통할 수 있는 것, 자신과 지인에게 함몰된 시선이 아니라 보다 넓은 폭을 바라보는 상상력을 가지는 것은 우리에게 결코 커다란 어떤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우선 행복해지는 것이, 나의 행복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모두의 행복을 향한 진화의 길이 됩니다.

철학의 목적은 진리에 가까이 가는 것이고, 그 진리에 다가감은 인간의 행복을 추구하는 일과 무관하지 않을겁니다. 오늘의 우리는 되묻습니다. 행복은 얼마면 살 수 있을까하고. 경제적인 요인이 결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닙니다. 예. 경제적인 요소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리스나 로마의 정치 체제에서는 공직을 담당하는 사람에게 봉급을 지급했습니다. 이는 자신의 직무를 다함에 있어 경제적 고민을 하지 않도록 하는 국가 차원의 배려였습니다. 오늘의 과학자들 일부는 연구원들에게 지급되는 보조금을 150만원 정도로 인상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것도 연구원이 연구에만 몰두해서 국가적인 기여를 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자본주의의 사회에서 일하고 먹고 살아남아야죠. 자본주의 사회는 끊임없이 자본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자본이 자본을 부르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경쟁적으로 자본 축적의 전장을 사람들을 내몹니다. 그래서 내 꿈은 로또 1등, 장래희망은 돈을 많이 버는 것이라고 오늘날 우리의 아이들은 말합니다. 하지만 경제적 요소가 의미 있는 것은 자아실현의 한 ‘수단’으로서 입니다. 행복한 삶은 마음먹기에 달려있지만, 정작 우리는 실감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예, 맞습니다. 그 말은 이미 상투적인 말이 되어버린 문구지만, 그것은 그 말이 지극히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당연해서 반복하다보니 상투적이 되버린 겁니다. 살면서 경쟁을 만나 경쟁에서 뒤떨어질 수도 있을 것이고, 경제적인 문제로 고민하게 될 수도 있을 겁니다. 슬프지만 현실입니다. 단번에 현실을 뒤바꿔서 우리가 바라는 대로 옮겨 갈 수도 없습니다. 교육은 백년지대계라는 말이 있는데, 그 말을 거스르고 한번에 교육을 변화시키려다 그 대계를 그르쳐버린 경우를 우리는 바로 눈앞에서 봐왔습니다. 긴 호흡을 가져야 합니다. 아마, 세계 굴지의 기업가가 행복하다면, 그 행복의 이유는 자기 손에서 굴러다니는 수천억 달러의 돈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무언가를 이루고 행할 수 있는 실천과 영향력에서 비롯되는 자기실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얼마 전에 김형태의 ‘너 외롭구나’ 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책에는 냉기까지 느껴질만한 뼈대있는 말들이 오늘의 청춘들에게 향해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의 요점은 간단합니다. 

<현실이 원하는 모습으로 다가오기를 바라기보다는 그 현실로 스스로 다가가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그것을 바꿔버려라. 그리고 그를 위해서 지금 경험을 쌓고 공부를 하고 구체적인 일들을 실천하며 자신을 키워라. 꿈꾸는 자는 배가 고프다. 그런데 자기가 뼛속 깊이 사무치도록 하고 싶은 일을 하는데 어디 그게 중요할까. 꿈을 좇아서 구체적인 일을 하라>

제가 제대로 읽었다면, 아마 이런 식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겁니다. 저는 그의 말에 동의합니다. 

저는 영어를 못합니다. 알파벳만 봐도 머리가 아프고, 영어 방송이 나오면 채널을 빨리 돌려버리고 싶습니다. 그러나 저는 영어 공부를 할 겁니다. 영어라는 언어를 통해 영어를 통해서만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세상을 만나고 싶습니다. 의역과 오역으로 점철된 얄궂은 번역서보다 당당히 원서를 읽고 고민해보고 싶고, 외국사람을 만나면 그와 자연스럽게 대화하면서 그 사람이 살아온 환경을 느껴보고 싶습니다. 토익은 이 ‘이십대 실업대란’이라는 최근의 내전 속에서 어느 순간부터 살아남기 위한 도구로서 지극히 현실 타협적이고, 취업만을 갈구하는 사람들의 지표처럼 여겨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저는 언젠가 토익도 볼 겁니다. 무슨 시험이든 해내고 말겁니다. 그 점수가 나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 점수를 도구 삼아 성장할 것입니다. 나는 굳건한 주체이기 때문입니다. 모두 한번쯤은 이렇게 세상을 자기중심으로 생각하는 오만함을 가져봤으면 좋겠습니다. 자기 실현의 원정에 나서는 용기 있는 젊음에게 그 정도는 애교로 봐줄 수도 있을겁니다. 

정훈 도서인 ‘과학 콘서트’에 보면 <케빈 베이컨의 법칙>이라는 것이 나옵니다. 아시는 분도 있겠지만, 이는 사람들간의 연결 관계를 따져보면 평균 7다리만 건너면 세계의 모든 사람과 만나게 될 수도 있다는 재미있는 법칙입니다. 

즉, 나의 친구 A, A의 친구인 B, B의 회사 상사인 C, C의 친척이고 르완다에 사는 D...

이런 식으로 가정하면 평균 7회에 세계 저 편에 유명한 빌게이츠나 클린턴에게 연결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를 보면서 인간 사회의 밀접함을 다시 한번 느꼈습니다. 이 이론이 성립되는 이유는 사회와 사회가 밀접하게 얽혀 있고 또한 개방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얽혀있는 사회라면 변화의 속도도 빠를 수밖에 없다고. 내가 변해서 누군가 한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다면 그 사람이 또 누군가를 변화시킴으로서 그 변화의 물결이 사람들을 반복적으로 거쳐 사회로, 세계로 퍼지지 않을까요. 이를 마냥 꿈이라고만 부를 수 있겠습니까? 제가 지나치게 이상적인가요? 

그래서 계속 고민하고, 치열하게 살아가는 것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혼자만의 고립된 자아에 빠져있기 보다는 다른 사람의 삶에 공감하고 함께 고민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변화는 기다려서 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일구어 나가는 것입니다. 능동적으로 담론을 만들어가고 토론을 유도하고, 변화를 주고받아야 합니다. 마음 한 구석에 자신의 꿈을 향한 치열한 얼음 같은 신념 한 조각도 필수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세상을 향한 자신감입니다. 우리는 저마다 의미 깊은 진리를 담고 있는 하나의 그릇입니다. 때로 그릇이 뒤집어 질 수도 있고, 깨질 수도 있고, 모양이 흉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삶 속에서 우러나는 진국 같은 우리의 진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그 진리의 목소리에 귀를 귀울이면,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고 느껴지지 않던 공존과 행복의 바람이 우리를 새로운 세계로 데려다 줄겁니다.  

자신이 하게 될 일이 무엇이든지 각자의 자리에서 막중한 책임감과 세상에 대한 자신감을 부여잡고 살아가는 일만큼 소중한 것이 더 있을까요. 우리 모두는 책임이 있습니다. 내가 변해서, 이 혼탁한 세상을 나에게 맞게 변화시키는 책임. 훌륭한 지도자가 등장해서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력으로 사회를 바꾸어가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변화들이 세상을 바꾸는 것이라 믿습니다. 저는 이게 결코 꿈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바로 당신과 함께 변화를 이끌어가고 싶습니다. 이상적이라, 추상적이라, 비판받을 수 있음은 압니다. 하지만 저는 나의 삶을 실현해 낼 수 있으리라는 믿음으로 치열하게 살아가고 싶습니다. 세상을 알고 나의 진리를 찾아가면서 말이죠. 어디서 무슨 일을 하게 되든 열심히 합시다. 그리고 자신이 선 자리에서 올바르게 생각하고, 고민하고, 드넓은 상상력으로 세상을 안아봅시다. 나의 작은 날개짓이 세상의 큰 변화를 가져옵니다. 우리는 나비효과의 한 가운데에 있습니다.

인간적인 진화는 그렇게 이루어 집니다. 바로 우리의 자리로부터요.





상병 한상천 (2005-08-30 13:43:16)  
꿈과 현실속에서 여전히 잣대를 이리저리 왔다갔다합니다.
나이를 한살 한살 더먹어도 여전히 힘든건 여전한 세상의 벽입니다.  

병장 전영훈 (2005-08-31 14:58:21)  
저는 아직까지 어린 걸까요? 꿈속에서 살고 있네요. 막연한 기대.  

상병 이재권 (2005-09-01 09:02:28)  
인간은 꿈을 버리고 현실을 인정하면서 어른이 된다.  

일병 강승민 (2005-09-01 16:57:11)  
경계인이 저의 정체성입니다.  

병장 배현진 (2005-09-04 03:54:19)  
허리케인으로 피해를 입은 뉴올리언스의 모습을 TV로 보면서 '과연 인간은 이타적일 수 있기나 한걸까'하는 의문을 갖게 되었습니다. 모두 자신들의 분노를 표출해내기 시작하자마자 걷잡을수 없을만큼 변해버리는 모습들은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들이 마치 '안장점'처럼 아슬아슬한 평형을 유지하고 있는건 아닌지 생각해보게 합니다. 결국 상대를 진실로 이해한다는 것이 정말 가능하기나 한것이냐 하는 이야기입니다. 진실의 탈을 쓴 가식은 더욱 무서운 법이기 때문입니다.  

상병 한상원 (2005-09-04 17:47:26)  
맞아요, 현진님. 정말 사회를 바라보고, 신문을 보고 뉴스를 보면서 사람들의 삶 이야기를 듣노라면, 현진님의 독백처럼 인간의 이타심에 대한, 혹은 선한 본성을 향한 의문이 강력하게 들죠. 솔직히 저는 박완서 씨의 책 구절처럼, 인간은 나쁜 길로도 좋은 길로도 갈 수 있었는데 어떤 길을 걷기로 했는지의 순간의 선택에 따라 달라지는 것 같아요. 

세상을 산다는 건 대략 무섭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원래 이기적이야라고 단정짓는건, 저의 냉소적인 포기가 될까 걱정이에요. 그래서 끊임없이 소통할 수 있는 광장을 넓혀가고 각자가 자신의 목적의식을 분명히 갖고 서로에게 맞추어 살아가는 일이 중요하다는 생각이에요. 

만원버스나 지하철에서 우리가 할일은 다음에 탈 사람을 비좁다는 이유로 밀어버리는 게 아니라, 불편하더라도 조금씩 몸을 움츠리고 밀착해서 공간을 만들어주는 일 아닌가 합니다. 그게 사회라는 버스를 타고 각자가 지정한 삶의 목적지로 향해가는 우리의 최소한이겠죠. 능력있는 운전수를 뽑고, 버스 내의 규칙과 질서를 준수하며 자신이 의도하는 다양한 방식의 여행을 통해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이요. 목적지에 다다르게 되는 행복은 엄밀히는 각자의 것이나, 버스 전체에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들어주겠죠.

부족하지만 모두 함께 노력하면서 열심히 살았으면 좋겠어요.  

상병 최성호 (2005-09-06 23:27:01)  
지금은 꿈을 꾸고 있습니다. 꿈을 꾸면서 그꿈들을 거르고 걸러 핵심적인 것들만 따로 갈무리 하고 있습니다.
그꿈들이 펼쳐질 멋진 세계로 다가가기 위해 열정을 다해 달려야 겠습니다.
지금 이렇게 글을 쓰는 동안 뉴올리언스 주민들은 배고픔이나 약탈 그리고 여러가지 병들로 지내고 있다는것을 생각할 때면 지금 이순간도 나에겐 감사하다고 느껴지네요. 우리모두 자신들이 가진 꿈을 위해
이세상을 온 몸으로 부딪혀 바꿔 버렸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