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장 한상원 (2005-08-27 18:41:10, Hit : 1322, Vote : 12)  

다양해서 소중한, 저마다의 장미를 위해 <장미의 이름>  



다양해서 소중한, 저마다의 장미를 위해 <장미의 이름>


중세, 1327년- 장미, 혼돈의 중세에 피다

서기 1327년 유럽. 유럽에서는 샤를마뉴 이후 500년 이상 신앙의 거친 불길이 중세의 역사 위를 뜨겁게 휘달렸고, 민중들은 교회 권력이 휩쓸고 간 자리에 남은 독신의 잿더미 같은 시대를 살아야 했다. 천상을 등에 업은 교회 권력은 세속 군주들을 무릎 꿇게 만들었고, 십자군이라는 전 유럽적인 사업을 도모하게 만들었다. 교회의 기세는 하늘에라도 닿을 양 치솟았고 신앙의 이름은 땅 위를 지배했다. 하지만 세속의 권력인 프랑스 왕 필리페 2세가 교황을 아비뇽에서 옹립한 14세기 초를 기점으로 상황이 조금씩 달라진다. 그리고 1327년. 이 해는 몇 세기간 유럽의 중세를 지배한 무소불위의 교회의 권력이 14세기 초의 아비뇽 유수를 계기로 반환점을 돌아 세속의 군주들과 교황, 그리고 청렴을 말하는 수도원들의 등장으로 교회 내부의 반성이 대두되던 시기다. 그리고 이제는 교회 세력이 꺼져가는 불꽃의 마지막 번뜩거림만을 내고 있을 무렵이 되었다. 이러한 유럽의 중세 속에서 1327년 겨울, 에코의 <장미의 이름>은 어느 수도원을 배경으로 그 스산한 꽃망울을 틔운다. 

혼돈과 격변이 예고되는 징조는 늘 상서로울 수밖에 없는걸까. 이제는 고전의 반열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있는 에코의 <장미의 이름>은 중세라는 어둠이 근대라는 빛으로 화해가는 예사롭지 않은 시원(始原)에 기원을 둔다. 에코가 주목한 1327년의 중세를 보자. 지상에서는 국가의 개념이 점점 무르익어 가운데 세속 군주들과 교황의 대결이 임박해오고 있었고, 교회의 물욕은 이제 극에 달해 자기 반성의 목소리가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게다가 한쪽에서는 자의적으로 자행되는 이단 심판의 잣대에 의해 무고한 민중들과 다양한 사상가들, 신앙인들, 사회 변혁가들이 이단이란 이름으로 고문받거나 화형당해 그 피비린내가 시대 곳곳에 진동하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현실 극복의 의지들이 교회가 둘러친 독신의 그물 사이에서 조금씩 새어나오기 시작했고, 서서히 태동하는 교역과 자유 도시를 바탕으로 인간의 이성을 신뢰하는 근대적인 사고들이 이루어지는 모습도 발견할 수 있었다.

전에는 없던 일이었는데 근자에 들어 설교자는, 대중의 공포를 유발시키고 이로써 신앙심과 믿음에의 열의를 부추기고, 인간의 법과 하느님의 법을 공히 준봉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한답시고 공공연히 극언은 물론 끔찍한 위협까지도 망설이지 않고 있다. 

교황은 청빈을 설교하는 수도사들과, 그 청빈을 실천하는 평신도들이 이루는 큰 줄기의 운동을 몹시 두려워했다. 그래서 교황은, 물감으로 그린 깃발을 흔들고, 청빈을 설교하고, 돈을 우려내면서 호기심이 강한 평신도들을 자극한다고 그들을 매도했다. 성직 매매를 일삼는 부패한 교황이 청빈을 설교하는 탁발 수도사 무리를 버림받은 자들의 무리, 날강도의 무리라고 매도하는 것은 될 말이 아니지만 실제로 그러했던 것을 어쩌랴.


에코의 추리소설 <장미의 이름>

에코는 이러한 시대 한 가운데에서, 고즈넉함이 음산함을 독려하는 듯한 어느 수도원에서 일어나는 의문의 살인사건, 그리고 살인사건의 실마리가 되는 수수께끼의 서책, 미궁을 풀어갈 탐정과 조수라는 전통적인 추리소설의 소재들을 가지고 <장미의 이름>을 써냈다. 중세라는 심상찮은 배경에 살인자와 피해자, 탐정과 조수, 그리고 풀리지 않는 기호로 된 수수께끼. 에코의 매혹적인 무대는 이미 갖추어졌다. 

교회의 청빈을 주장하는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수도사 윌리엄은 황제와 교황의 대립 속에서,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청빈에 대해 향해진 이단 의혹을 해소하려 각지의 수도원을 순방한다. 그리고 문제의 수도원에서 교회와 황제, 수도원이라는 삼자의 이해를 건 회합이 예정된다. 회합이 이루어지기 나흘 전부터, 온갖 서책과 필사본을 소장한 유럽 최대의 장서관이 있는 이곳의 수도원에서 의문의 서책을 둘러싸고 요한 묵시록에 예언을 따른 연쇄살인이 벌어진다.

사실 <장미의 이름>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요한 묵시록에 따라 저질러지는 잔인한 연쇄살인만은 아니다. 에코가 숨겨놓은 사실상의 주인공은 ‘중세’라는 격랑의 시대다. 그리고 그 중세의 한가운데에서 시대를 호령한, 세속에 찌들대로 찌든 독선적인 교회의 추한 얼굴이 에코의 타겟이다. 따라서 나의 관심도 역시 이 흥미로운 추리소설의 범인을 밝히는 것 보다 독자를 강력히 끌어당기는 흡인력 있는 스토리 텔링 주변에 교묘하게 숨겨진 모순된 중세와 그 안의 교회를 바라보는데 있음을 밝혀야 하겠다.


중세에서 근대로 향하는 여정

중세의 교회는 정치, 사회, 문화, 학문, 일상 생활에 이르기까지 단순한 종교 단체의 성격을 넘는 땅 위에 덧댄 또 다른 천상의 세계였다. 중세는 역사에서 볼 때 교회만이 그 중심에서 시대를 호령한 단일한 선을 지닌 암흑기로 여겨지지만, 역설적으로 하나의 오만한 중심에 눌려있던 많은 가능성들이 근대라는 출구로 터져 나올 수 있었던 다양한 가능성의 잠재기이기도 하다. 중세에 사람들이 입을 모아 외치던 신은 근대에 이르러 진리를 향한 부르짖음으로 대체되었고, 신의 교리를 둘러싸고 오가던 영혼을 건 거친 도박은 인간 스스로를 더욱 돌아보게끔 만들어 이성에 눈을 뜨게 만들었다. 신을 대리하는 자들에 대한 경멸과 부정은 시대에 대한 부정으로 번져갔고, 결국 교회의 추상성에 반하는 사실과 있는 그대로의 자연에 대한 관심이 근대를 불렀다. 에코는 소설 곳곳에서 훌쩍 다가온 근대의 징조들을 보여준다. 우선 주인공인 윌리엄 수도사는 수도사이면서도 신앙과 신학에 경도된 것이 아니라 합리적인 이성과 자연에 대한 관찰이 신에게 보다 가까이 다가가는 세상을 만든다고 생각하는 근대적인 인물이다. 

그분의 말씀에 따르면 새로운 자연 과학에 학자들이 대거 참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자연의 변화에 대한 각별한 지식을 통해, 무질서한 것 같아도 나름대로 절실하고 온당한, 단순한 평신도들의 필요를 수렴하자는 것이었다. 이것이야말로 새로운 과학이며 학문의 새로운 마법인데, 사부님께서는 교회가 이런 작업의 선봉에 서야 한다고 하셨다. 그러나 나는 사부님께서 이러한 말씀을 하신 까닭을, 식자의 사회는 성직자 사회밖에 없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그래, 당시에는 식자의 사회가 곧 성직자 사회였지만 오늘날에는 통하지 않아. 식자들은 수도원과 성당은 물론이고, 대학, 심지어는 대학 바깥에서도 생겨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오늘날의 나의 동류들은 이러한 작업의 주도를 교회에 맡길 것이 아니라 세인의 집단에 맡겨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한다. 그러면 미래에는 식자의 사회가 곧 자연철학이자 긍정적인 의미에서의 마술인 이 새로운 인간의 신학을 제창해야 되지 않겠냐는 것이다.

또한, 이 소설의 살인사건을 이해하는 키워드가 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잊혀진 서책은 근대를 짐작케 하는 기호학자 에코의 또 다른 기호가 아닐 수 없다.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재발견은 자연과 과학에 대한 신학의 고민을 부추겼다. 게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이 당대에 놀라운 과학적 발전을 이루고 있던 불신자(不信者)인 -교회의 입장에서- 이슬람 세계로부터 전래되었다는 사실을 고려해보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서책이라는 에코의 소재는 다양함을 부정하는 독선과 맹종, 소통하지 않음에 대한 경계의 상징이 아닐 수 없다. 거부와 독선으로 오랫동안 소통을 막아온 맹신의 장벽이 비밀의 서책으로 깨지는 순간 예언의 묵시록은 현실이 된다.

당대 사회는 신의 성스런 이름으로 모든 다양성이 말살되던 시대였다. 지상 위의 모든 삶과 사상들은 종교의 시선 안에서만 의미를 지닐 수 있었고, 의미의 존재와 부재를 정하는 것은 이단 심판을 내리는 교황을 필두로 하는 소수의 성직자들이었다. 시대를 불문하는 권력의 속성일까. 중세는 권력의 주체가 누가 되듯 강력한 권력이 부르는 필연적인 타락은 종교 역시 피해갈 수 없음을 보여준다. 강력한 권력 주체의 타락은 사냥감에 엉겨드는 하이에나 무리처럼 새로운 시대의 예비 주역들을 불러모은다. 그리고 신앙의 타락은 신앙이 현실에서 구현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세속적인 목적들로부터 신앙의 모습이 그려지는 역설이 나타난다.


중세, 그리고 오늘

앞서의 언급한 내용들은 <장미의 이름>을 읽으면서 머리 한 구석에 붙여놓았던 중세 역사 흐름의 일부다. 흩뿌리는 빗줄기 주변에는 그에 동행하기 마련인 어두운 먹구름이 늘 하늘을 메운다. 이처럼 험난한 중세의 삶은 곧 당대를 뒤덮고 있던 종교라는 먹구름에서 비롯된다. <장미의 이름>은 이 가운데를 관통한다. 독자들은 이 작품을 통해 진리가 보이지 않는 중세와 무수한 탐욕에 젖은 인물군상들을 만난다. 맹목적인 청렴의 수도승, 단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여러 종파를 떠도는 목자, 물질의 부유함이 곧 신성성을 상징한다고 생각하는 원장, 사하촌에서 교회에 넘쳐나는 부의 일말에만 의지해서 살아가는 민중. 이렇듯, 중세라는 어지러운 집에 걸친 창을 통해 우리는 오늘날의 또 다른 혼란과 어두움을 반추한다. 

그들은 고통과 피를 진정한 참회의 거울이라고 부르면서, 고통과 유혈이 낭자한 초자연적인 환상을 조장했다는 것이다. 범용한 평신도들의 상상력 안에서는 물론, 때로는 식자들의 상상력 안에서도 이 참회의 거울은 지옥의 고문을 일깨운다. 지옥이 이러이러하니 죄를 짓지 말라는 것이다. 그들이 바라기는, 공포를 상기시킴으로써 영혼을 죄악으로부터 떼어놓자는 것이다. 그들은 반항의 자리에 공포를 들어 앉힐 수 있다고 믿는다.

서로가 사상의 잣대를 상대에게 거칠게 들이민다. 일반적인 내세움과 외침만 있을 뿐 소통이 머무를 공간은 없다. 민중의 힘든 삶은 쉬이 유혹의 소리에 넘어가 저열한 노동과 자존(自尊)을 저버린 행위로 연명하기도 한다. 현실의 고된 삶은 신앙의 옳고 그름의 방식을 생각하지 못하게 한다. 안타깝게도 또 그러한 연유로 그럴듯한 거짓 선동에 기대어 이리저리 휩쓸리면서도 자신의 삶을 위로 받고자 하기도 한다. 세속의 삶은 모질게도 힘이 들고, 천상의 약속된 내세를 보장받기에는 현세에서 감당해야할 몫이 너무 큰 나머지 아무런 위로도 되질 않는다. 깜깜한 밤이다. 칠흑같이 내린 깊은 어둠 속에서 사람들은 아무것도 분간하지 못하고 미혹한 오감에만 의지한 채 서로를 적그리스도라 부르며 헐뜯는다. 성직자들은 어리석고 악마의 유혹에 휩쓸리기 쉬운 민중을 계도하는 성스러운 책무를 띄었다 자부하며 ‘책임감’ 있게 이단의 피묻은 틀로써 세속을 지배한다. 이는 다름아닌 바로 오늘의 모습이 아닌가.

국가발전과 사회정의의 이름으로 인권을 탄압하고, 다수의 이름으로 소수를 억압하고 경제 성장이라는 대의아래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적 가치를 말하는 목소리들은 사회에 대한 이단행위인 양 낙인 찍힌다. 고된 현실의 삶은 사람들로 하여금 사회와 자신을 고민할 틈을 주지도 않는다. 지식인들과 정치인, 관료들은 책상 위에서 이루어지는 자신들만의 고견으로 대안과 계몽을 논하고 대립되는 세력에게는 이념적 색채를 덮고 도덕적 흠결을 찾아 비난한다.

누군가 다빈치 코드의 성공을 말하며 그와 같은 류의 계보위에 <장미의 이름>을 들먹였다. 나는 이제 이 작품은 그와 유사한 역사 재구(再構)의 추리소설이 아니라고 말한다. 장미의 이름은 역사 속의 구체적인 삶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다빈치코드의 맥락이라고 볼 바엔 우리에게 가까운 조정래의 <태백산맥>이나 <아리랑>을 오히려 닮았다고 말하련다. 어쩌면 추리소설을 연상케하는 작품 속의 살인사건은 시대에 휘몰아치던 어두운 격풍에 비하면 작은 나비의 날개짓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단이란 이름의 추상적인 불관용은 얼마나 많은 현실의 사람들을 죽게 만들었는가. 그것은 종교라는 성스러운 이름으로 시대에 자행된, 육신을 불태우고 사상을 말살한 거대한 규모의 의도적이고 잔혹한 연쇄살인이 아닐 수 없다. 


이단 vs 신앙, <장미의 이름>에서 오늘에까지 이어지는 대립구도 - 다양성을 향해 

작품에 등장하는 주요 대립구도는 권력 쟁탈을 하는 세속의 군주들과 교회의 대립, 그리고 교회 내부에서 이루지는 세속적 물욕으로 충만한 교황과 수도회의 실천적인 청빈을 둘러싼 대립이다. 그리고 다른 대립축인 이단과 신앙의 대립이다. 이 모든 대립축은 오늘에서도 여전히 그 시퍼런 칼날을 곤두세우고 있다. 권력에 대한 대립은 말할 것도 없다. 관용과 타협의 부재 속에서 권력 투쟁은 중세 이후 천년 동안 계속 반복되어 왔다. 개인이 대중과 익명 속으로 함몰되어 가는 시대를 살아가는 독자에게 더욱 와 닿는 대립축은 다양성을 화두로 하는 이단과 신앙 사이의 그것이다. 

이단과 신앙의 대결은 진리를 향한 다양성에 대해 열린 마음을 지니자는 근대적인 포용과 중세적인 이단 규정의 독선의 대결로 볼 수 있을 듯하다. 이는 어쩌면 진리로 향하는 좁은 길이 외길이냐 외길이 아니냐의 논쟁과 같다. 신앙이 모든 신념을 대신하고, 신학이 모든 학문으로 통하는 이 외골수의 중세는 이제 새로운 발상들과 다양성을 향한 무시할 수 없는 약진들로 근대를 예감한다. 이 근대의 좁은 길을 에코의 목소리를 지닌 주인공 윌리엄이 열어가고 있다. 중세를 향한 윌리엄의 목소리는 이제 종교의 굴레를 넘어서는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근대의 지표를 담는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도들이 이 땅의 백성에게 명을 내리고 이 땅을 지배하는 것을 바라지 않으셨습니다. 따라서 그 사도들의 계승자들이 세속적, 혹은 강압적인 권력에 집착하지 말아야 함은 당연한 일입니다. 만일에 교황과 주교와 사제가 제왕의 세속적 혹은 강압적 권력에 따르지 않는다면 재속(在俗)의 제왕이 지닌 권위는 도전에 직면합니다. 이제, 이단의 문제 같은, 미묘한 문제도 한번 생각해 볼 차례가 되었습니다. 진리의 수호자인 교회가 이단을 규정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이단자를 처벌할 수 있어서는 안됩니다. 이단의 처벌은 속권(俗權)만이 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이 땅에 사는 사람치고, 고문을 통하여 복음서의 가르침을 따르라는 강요를 받아도 좋은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만일에 그런 강요를 받아도 좋다면 내세에서 심판을 받게 되어 있기 때문에 선악을 선택할 수 있는 우리의 자유의지는 무용지물이 되고 말지 않겠습니까? 교회는 이단자에게, 믿는 백성들의 모듬살이를 해치고 있고 경고할 수 있고 또 마땅히 경고해야 합니다만 이 땅에서 이단자를 심판하거나, 그 이단자의 자유 의지에 반하는 강요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중세를 관통하는 음울하지만 매혹적인 추리극의 종말은 독자 스스로 목격하는 것이 바람직 할 것이다. 하지만 <장미의 이름>의 그 결말에 타오르는 불꽃은 중세의 절망과 독선을 태우는 불꽃이라 불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결국 에코가 말하는 바는 단순한 중세의 재구성도 아니오, 그 독선에 대한 단선적인 비판도 아니다. 그 궁극적인 목적은 근대를 상징하지만 결국 오늘에도 유효한 진리에 대한 다양한 모색이다. 그러나 그의 발언은 근대의 상징처럼 등장하는 윌리엄에 대한 찬미로 이어지는 이성에의 긍정일까? 실은 그렇지 않다. 

에코는 윌리엄과 그의 수도승 아드소의 대화를 통해 반복적으로 이성적 접근이 진리를 향한 하나의 방식이 될 수는 있지만 결코 완벽하지 않음을 역설한다. 이성이 유일한 헤게모니로 스스로를 공고화하기 시작하면, 이성 역시도 다양한 판단의 기준들을 위협하는 극복대상으로 전락한다. 근대에의 긍정이 중세에의 비판에 힘을 더욱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에코는 이 도식에서 벗어나려 한다. 결국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우주의 심원한 진리를 향해가는 다양한 접근, 끊임없는 겸허한 사유인 것이다. 그 안에는 중세도, 근대도, 탈근대조차도 부차적이고 희미한 구분일 뿐이다. 우리가 목도하듯, 우리의 시대는 이미 근대를 넘고 근대를 비판하고, 다음의 영역으로 신나게 탈주의 길을 달려간다. 그 길 너머에 어떠한 모습의 세계가 기다리고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우세와 열세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절대는 없다. 사회 속의 패러다임 경쟁은 이기적 유전자의 진화적 경쟁처럼 심원한 다양성의 세계를 향해 더욱 치열해질 것이다.


우리의 다양성을 위해

우리가 사는 오늘에도 많은 대립축이 존재한다. 사람들은 각자의 이익에 맞게 사회 곳곳에서 충돌한다. 그 충돌은 이해관계를 매개로 첨예한 대결구도를 자아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중세를 수놓은 종교적인 맹신처럼 저마다의 정의(正義)가 충돌한다는 점이다. 정의와 정의가 맞부딪치는 곳에서 그 정의의 추종자들은 모두 의로운 까닭에 그 대결은 더욱 잔혹하게 진행되어 간다. 갈수록 사회 성원들의 연관관계가 깊어지는데 비례하여 이 정의들의 대결의 장은 점점 더 치열해질 것이다. 이 난투극을 종결해주는 영웅은 누가 될 것인가. 에코는 그 영웅을 이름하여 ‘다양성’이라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근대의 철학자 밀은 인간의 자유를 타인에게 영향을 주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으로 지지했다. 그리고 그 선을 넘어서는 자유에 대해서는 법질서와 도덕으로 규제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이는 자유가 가지고 오는 다양성이라는 덕목을 최대한 보장하는 가운데, 자유가 또 다른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길은 사회 성원들 스스로의 약속인 법을 통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나는 사회 속에서 사람들의 삶이 조화를 찾아가는 유일한 길은, 그들 스스로의 약속인 법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법학도가 아니지만, 이런 생각이 들때면 법을 공부 했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다양성은 오늘의 사회에서 법이란 이름의 약속이 지켜가고자 하는 최고의 덕목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존재의 이유로 모두 소중하게 생각되어지는 것이 인간으로서 우리가 지켜야 할 최소한이자 전부인 것이 아닐까. 우리는 근대를 비판하고 맹목적인 이성과 이성만이 앞장 세워진 모습을 갖추거나 모습을 숨긴 다양한 양태의 지적, 사상적 폭력을 거부한다. 그러면서 탈근대와 해체, 유목을 말하지만 이는 결국 종교 그리고 이성으로 통제되고 묶여있던 사람들의 다양성을 찾아가는 일로 수렴된다. 그 소중한의 모습 아래 우리는 스스로의 삶을 구축해가고 넓혀가고, 자신의 영혼을 고이 이 세계에 실현해 나가는 것이다. 대중에 쓸리지 않고, 익명과 가상자아에 함몰되지 않고 질감과 형태, 실천을 담아내는 실제적인 인간으로서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다. 

중세를 넘어선, 근대를 넘어선, 탈근대를 넘어설, 바로 오늘의 세상에서.


장미의 그 고운 이름

드넓은 우주 속 우리는 한낱 미물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구의 역사를 24시간으로 계산한다는 그 숙연한 법칙에 따르면 나와 여러분의 삶은 초 단위에도 들지 못한 채 순간 번뜩이는 빛일 뿐이다. 그러나 그 찰나를 위해 우리는 아웅다웅 살아간다. 우리는 각자의 정의를 품고, 자신의 진리를 담아내는 소중한 그릇이 된다. 

<장미의 이름>은 작품의 화자인 아드소가 죽음을 앞두고 세월과 시대의 덧없음을 말하는데서 붙여진 제목이다. 에코도 그렇게 생각한 것일까. 중세를 휩쓴 그 격론과 대립 역시도 신과 같이 감히 알 수 없고 인간의 인식틀 속에 담기 어려운 우주의 섭리 속에서 적막과 다름없다고.

나는 곧 모든 차이가 잊혀지고 같음과 다름에 대한 분별이 없는 깊고 깊은 바닥으로 내려앉는다. 수고도 없고 형상도 없는 무인지경의 적막한 신성(神性)에 든다.

지난날의 장미는 이제 그 이름뿐,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 덧없는 이름뿐.

하지만 저마다의 우리에게는 우리만의 진실이 있고, 삶 속에서 내가 지켜나가고 싶은 무언가가 분명 존재한다. 한 송이 고운 장미같은 소중한 우리네 삶을 실천적으로 건설해 나가는 것이 우리가 진정 바라는 것 일게다. 자신만의 고귀한 향기를 품은 그러한 장미를.



<장미의 이름> 움베르트 에코, 열린책들, 상,하 각권 9,500원





병장 박윤철 (2005-08-28 09:30:12)  
후기 잘 읽었습니다! 장미의 이름을 이런 식으로 읽으셨다니, 감탄을 금치 못하겠네요. 작품 자체의 감동도 다시 생각나거니와, 꼼꼼하게 읽어 내려간 상원님의 노력이 보입니다. 추리극 이면의, 제가 제대로 짚어내지 못했던 부분들을 일깨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웃음) 책을 다시 보고 싶어지네요.  

상병 김태경 (2005-08-29 07:39:45)  
오래전에, 이 책을 읽었을때 왜 제목이 '장미의 이름'인지 생각했던 기억이 나네요.
그때 어떤 결론을 내렸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지만 어린나이에 움베르토 에코라는 석학이 대중에게 알기쉽도록 설명해준 책 같다는 생각을 했던건 기억나는군요.

제 개인적으로는 외지에서 비에 발이 묶여 하염없이 산만 바라보며 읽었던 아주 낭만적인 책입니다.
항상 궁금해했던 르네상스 이전 문화의 암흑기에 유럽인들의 생활을 엿볼수있는 기회이기도 했지요.

같은 책을 이렇게까지 세밀하게 읽으셨다니, 부러운걸요?  

상병 한상천 (2005-08-29 08:08:06)  
부대내에서 막 책을 잡기 시작할때 처음 잡은 책이 이 책이였습니다.
결국은 40페이지 정도 읽다 나중에 읽는다 하며 덮어둔 가슴아픈 기억이 나네요.
제역판된것으로 올해말을 이책과 마무리 할 생각을 하는데 그때 상원님의 시각을 참고 해야겠내요.
잘 읽었습니다. 추천드러갑니다.  

상병 유준호 (2005-08-29 08:42:01)  
'다빈치 코드' '4의 규칙'을 통한 광고와 에코의 책으로 알게된 책인데..

많은 분들이 읽고, 괜찮은 느낌 받으신 것같네요..

요번 휴가 구매리스트에 포함시켜야 될 것 같네요.. 

괜찮은 책 일듯.. 나~중에 다 읽게 되면 저도 후기 남기겠습니다..

상병 최용우 (2005-08-29 08:44:33)  
읽어보려다가 ... 놓치고 만 책입니다.
다시 한번 읽어봐야겠군요.
큰일 입니다!.... 목록은 잔뜩 늘었는데 진도는 안나가는군요 (웃음)  

일병 안대섭 (2005-08-29 08:57:56)  
읽어보지도 않은 다빈치 코드가 장미의 이름을 들먹거리는 것만으로 속으로 버럭!!...

에코씨의 구구절절한 가르침 그 자체조차 철옹을 둘러버리는 이 어리석은 지적허영을 어찌할꼬!

우울해지네요.  

병장 오재찬 (2005-08-29 09:04:26)  
장미, 장미, 장미...

[푸코의 진자]를 다시 읽는 지금.
'장미'소리만 들어도 속이 뒤틀리는군요..!!  

상병 김강록 (2005-08-29 09:05:58)  
서점에서였다. 大영일고등당구스쿨 공채 24기 개봉동 신프로는 '장미의 이름'을 꺼내들더니,
인물간의 대화를 나와 자신의 이름을 넣어가며 제멋대로 읽어내려갔다.
나는 신프로보다 당구를 못쳤고, 그래서 놀림의 대상이었다.
그 책을 읽을 생각은, 나는 하지 않았다.

그후로 몇 년이 흘렀고, 우리 잔혹한 한상원씨가 기어코 나로 하여금, 이 책을 읽고 싶게 만들고 만 것이다.  

병장 박정현 (2005-08-29 09:14:42)  
저는 '장미의 이름' 대신 김경욱이라는 소설가가 리메이크한 '황금사과'를 읽었었습니다. 상원님의 후기 읽어보니 내용은 대략 비슷한거 같네요. 번역본 보기를 꺼려하시는 분들은 저처럼 아예 글잘쓰는 한국의 소설가가 새롭게 각색해서 쓴 장미의 이름을 읽어보시는 것도 괜찮을 꺼예요.  

상병 이강희 (2005-08-29 11:15:28)  
저두 이책 일병때 읽었었는데 중세의 역사에 취약한 관계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다음에 한번 더 읽을 책으로만 기억하고 있네요~(웃음) 대단하신거 같아요~!!  

상병 김동환 (2005-08-29 13:43:03)  
휴우~ 성실한 상원씨. 멋져요.(초롱초롱)
이 리뷰만 가지고도 어떻게든 상권쯤은 읽어나갈
의지를 불태울 수 있겠군요.  

상병 한상원 (2005-08-30 03:31:26)  
에코의 책은 <장미의 이름>, <푸코의 진자> 두 권만 읽었는데, 뭔가 기호학이나 역사, 종교 등을 배경지식으로 깔아놔야 우리 머리의 소프트웨어가 작동하는 것 같아요. 그냥 읽으려고 하면 호환이 안되는 프로그램 같달까. <푸코의 진자>는 솔직히 잘 모르겠더라고요. 정말 '기호학자' 에코의 책이다라는 생각뿐. 그래도 장미의 이름은 중세사만 적당히 알고 있으면 이해하기가 한결 수월하니까요. 일단 재미도 있고.(웃음) 

다빈치 코드도 재미는 있지만, <장미의 이름>과는 맛이 다르죠. 다들 읽어보시길. 적극 추천입니다.  

상병 김강록 (2005-08-30 13:59:49)  
출력했더니 다섯 장이었다.
그것도 줄이고 줄여서.
문득, 레포트를 써내고 A+를 받아든 상원군의 모습을 상상했다.  

상병 한상원 (2005-08-30 18:47:10)  
강록군 나 민망한데. 큭. 학교 레포트는 두꺼운게 제맛이 아니던가!  

상병 김동환 (2005-08-31 07:43:09)  
강록님 댓글에 깊은 공감.   
 
병장 김동환 (2006/03/23 23:30:20)

글 내부의 댓글에 이모티콘 수정했습니다 (훌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