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근영의 시대에 심심함을 느끼다 (상병 김강록/050826) 
 
 
 
 
48. 문근영의 시대에 심심함을 느끼다 :

나는 지금, 우선은 심심하다. 그리고 아무 생각이 없다. 도대체가, 말이 막힌다. 해야 할 말도, 하고 싶은 말도, 아무것도 없다. 실로, '없다'! 터무니도 없다! 허나 이러한 부재는, 이를테면 치열한 공복감 같은 것들과는 다른 성질의 것이다. 지금 내가 맞닥뜨린 막연한 부재감은 그 부재한 무언가를 획득하고 채우려는 욕망과도 별 관련이 없다. 그저 '허무하다' 정도라고나 할까? 내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르겠다. 희로애락이라니, 머나먼 왕조 시절의 이야기 같다. 머나먼 왕조 시절의 전쟁터에서 하늘을 가르며 날아가는 한 화살을 상상하면서 비장함과, 호쾌함과, 우국충정과, 명예와, 뭐 그러한 것들을 얼핏 떠올리고는 "그랬구나"하며 무덤덤하게 책을 덮고 난 직후같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내가 지금 이 세상을 뚫어져라 쳐다보고서 다시 돌아서는 느낌이 바로 그러하다.

'광장'─그래, 광장이었다. 남으로도, 북으로도 그 어느쪽도 가기 싫다며 제 3국행을 택했던 '광장'의 주인공은 끝내 바다 위에서 몸을 던져 고기밥이 되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광장'은 수험생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작품이 되었다. 교과서에 실렸었는지, 아니면 문제집에서 봤었는지 그건 모르겠지만 어쨌든 배웠던 기억이 난다. 문근영도 아마 배웠을 것이다. 자극적인 것도 밍밍한 것도 그 어느쪽도 싫다던 문근영은─그러나 다른 시대를 살아가는 다른 세대이기에 그래서 '광장'과는 다른 결론을 내렸던 걸까. 자신에게 부족한 것은 '2%'라며, 놀랍게도 결핍된 욕망을 백분률로 수량화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좋겠구나, 문근영은. 나는 지금 내가 원하는 게 도통 뭔지를 모르겠다.

관물대의 책들을 이것저것 들춰봐도 머리에 들어오질 않는다. 편지를 쓰는 것도, 요즘은 그다지 흥이 나질 않는 일이다. 박지성의 축구경기야, 그런 건 난 애시당초 보지 않았다. 할 일이 없다. 이상의 표현을 빌자면, "봉분보다도 의무가 적다." 미칠 노릇이다. 그런 생각을 할수록 잠자리만한 모기에게 피를 쪽쪽 빨아먹히는 느낌이랄까. 제기랄, 이것도 저것도 다 내키지 않는다. 그래도 고집스러운 말투와 표정으로 "제 3국행!"이라고 짧고 간결한 대답을 내뱉는 그의 모습에선 일종의 승리감같은 것도 깃들어있었던 것인데.  헌데 나는, 이 터무니없는 situation은 뭐란 말인가.

다시 문근영. 광장의 시대는 그 시대를 사는 이들에게 아무런 해답도 제시하지 못했고, 그래서 죽음을 택한다고 뭐 하나 이상할 게 없는 시대였다. 허나 문근영의 시대는, 문근영에게 자신있게 알루미늄캔에 담긴 음료를 제시한다. 이 시대는 제법 친절하고 포용력이 있다. 문근영에 한해선 말이다. 여전히 시대는 내게 아무런 해답도 제시하지 못한다. 심심함은 이 시대 내부에서 통용되는 언어가 아니다. 그것은 시대로부터 떨어져나와 침침한 구석에서 웅크리고 있는 이들의 언어이다.

대개 그런 사람들이, 세상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고 스스로 해답을 찾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렇게 찾은 해답으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한다. 그래, 그 정도 가치의 심심함이라면. 마음껏 심심해주겠다. "심심해!" 일종의 승리감같은 기분도 이제는 살짝 든다.


2005. 8. 20. 土

大영일고등당구스쿨 공채 24기 목동의 김프로





상병 김동환 (2005-08-26 16:11:58)  
'봉분보다도 의무가 적다'
너무 와닿아요. 강록님의 심심함을 발판삼아
이제 저는 그닥 심심하지 않게 되었군요. 흐흐.  

일병 안대섭 (2005-08-26 16:34:45)  
아아, 밍밍한듸!!  

상병 김강록 (2005-08-29 09:28:57)  
일종의, 비변증법적인 심심함이라고나 할까요. (와하하핫!)  

병장 송민호 (2005-08-29 11:17:08)  
문근영의 시대에 심심함을 느낀건지 아니면 자기 자신에게 심심함을 느낀건지요? 단지 심심한 시대에 살고 있다라는거 같네요  

상병 김강록 (2005-08-29 11:27:19)  
완전한 시대는 없어요. 그래서 항상 변화해나가는 거겠죠. 시대의 불완전한 부분, 그 틈새에 바로 심심함이 있습니다. 문근영처럼 이 시대가 제시하는 캔음료로는 욕구가 해소되지 않는 그들이야말로, 너무나 심심한 나머지 가만 덮어둔다고 누가 뭐라 안할 시대의 틈새를 굳이 벌리고서 마침내 새 시대를 열어가는 것입니다.  

일병 방수호 (2005-08-29 14:22:47)  
大영일고등학교 나오셨군요..
저도 그 학교 나왔는데..
몇 긴지는 모르겠고 83년생인데..  

상병 김강록 (2005-08-29 15:03:57)  
빠른 83이 아니라면 2002년 2월 졸업 25기겠군요. 25기 학생회 부회장이 박민근이었죠?
어쨌든. 학교도 참 심심한 곳이었어요. 하핫!  

일병 박일남 (2005-08-30 20:32:55)  
영일고라면.. 흠흠.. 전 대일고 나왔습니다..하핫;; 전 03년 졸업;;  

병장 서정우 (2006/01/20 10:56:56)
이 세상은 모든 심심함으로 덮혀있고 그 심심함을 떨쳐버리기 위해 존재하죠..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심심했고 이 글을 씀으로써, 심심함을 떨쳐버릴 수 있죠.. 
그리고 이 글을 쓰고 나면..다시 심심해 지는 이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