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췌언 35. 희생과 속죄양 
병장 이영기 01-10 15:34 | HIT : 139 
 

 
[전략]..........명칭에 얽힌 정치적 이유나 목적 때문에 양국간 관계 개선에 항상 먹구름이 끼어있고, 쓸데없이 긴장이 조성되는 안타까운 일들이 빈번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왜 우리는 이미 확고하게 그어진 국경선 아래의 땅을 어떻게 부를지를 놓고 싸워야합니까? 왜 우리는 이미 여러 국가가 나누어 가진 바다의 이름을 구태여 자신의 명칭으로 붙이고자 해야 합니까? 국제적인 경쟁과 생존의 시대에 왜 구태한 명칭때문에 서로의 힘을 소모해야 합니까? 누군가 과감히 포기할 줄 알아야 하고, 누군가가 상호간의 공존을 위해 노력을 시작해야 합니다. 

관용과 포용을 강요하는 우를 범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먼저 한 발짝 뒤에서 생각하는 여유는 분명히 훌륭한 미덕일 겁니다. 일본은 이미 충분한 강국이며, 세계 속의 아시아 국가입니다. 서로 같이 살아가는 법을 고민해도 될 만한 포용력있는 국가라고 생각합니다. 저 분쟁으로 얽힌 바다를 일본해라고 부르고 싶을 것이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누군가는 생각을 전환해야 하고, 그래야 공존이 이뤄질 것입니다. 한국과 일본 중 과연 누가 먼저 생각을 전환해야할까요? 누가 더 포용적인 강한 모습을 보여야 할까요? 아마도 그건 각자가 생각해야 할 일일 겁니다. 

하지만 그 공존의 장 속에서 누군가 피해를 보는 것은 한국이 원하는 바가 아닙니다. 보다 중립적이고도 우리의 미래와 공존을 추구하는 해법을 연구해야할 것입니다. 평화의 바다나 미래의 바다, 공존해와 같은 명칭을 일본이 우리에게 제안했다면 아마 우리는 놀랐을 것이고, 당신들의 포용력에 감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들은 하지 않았고, 우리도 하지 않았습니다. 누군가 먼저 한 발짝 앞으로 나서는 포용력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아마도 먼저 상대를 향해 손을 내밀어야 하는 쪽이 누구인지는, 스스로가 잘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후략] 

"07. 1. 한일정상회담 중 노무현 대통령 발언" 중 기억에 의한 필자 재구성한 글. 



일본의 게임제작회사인 타입문의 비쥬얼 노벨 게임인 ‘FATE/STAY Nights'에는 여러 영웅이 현세 속에 등장한다. 성배, 라는 가상의 개념체를 획득하기 위한 마술사에 의한 전투와 전투의 틈바구니에서, 그리고 그들의 전쟁을 위해 소환된 영웅들 가운데서 한 독특한 영웅이 이야기의 중심에 가로 놓여 있다. 앙그라마이뉴, 라는 이름의 이 흑영웅은 암흑과 죄악 그 자체를 상징하는 극단의 영웅이었지만, 그러나 그 자신은 아무런 힘도 없는 평범한 사람일 뿐이어서 일찌감치 전쟁에서 제거되었다. 

살아생전에, 아무 힘이 없던 그가 흑영웅이 될 수 있었던 원리는 매우 단순했다. 그가 살던 마을의 사람들은 일상에서 그들이 저지르는 죄를 끌어안을 존재가 필요했고, 한 청년을 뽑았으며, 그에게 죄악과 반신을 뜻하는 온갖 문양과 문장을 그려넣었다. 그는 세상의 모든 죄를 상징하는 존재인 것처럼 여겨졌고, 사람들은 그가 모든 죄를 끌어안은 존재인 것처럼 대했다. 마을의 사람들은, 더 이상 죄를 짓지 않은 것일 수 있게 되었고, 모든 죄는 그가 가져갔다. 주변 세상이 그를 죄인으로 만들었고 그는 한없는 죄와 지옥의 나날로 곤두박질쳤으며, 마을 사람들은 행복해 졌다. 극도의 죄, 극도의 악인 그가 곁에 있음으로 해서 마을 사람들은 스스로가 선하다는 사실을 계속 깨달을 수 있었고, 그 모든 죄로부터 그들은 자유로워졌다. 그들은 선량했고, 그들은 지극히 서로에게 사려깊은 태도로 임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저 하나의 우화일 뿐이다. 실제로 자신의 죄를 벗기 위해 누군가를 매도하여 그저 악으로, 그저 죄악 그 자체로 전락시킬 이는 아마도 없을 것이고, 우리는 그렇게 저주스럽도록 도덕적이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보다는 선량할 것이며, 우리의 도덕과 양심은 그런 천박한 이중성을 띄는 실용적인 면모를 갖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예는 단지 소설 - 게임 속에서 말하는 우화일 뿐이며, 고대인의 무지함의 발로일 뿐이다. 사실 특히 선량한 사람들을 보면 그들은 정말로 선량하고 도덕적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들은 적극적으로 누군가를 배척함으로써 선량하려는 시도를 하지는 않는다. 우리 모두의 죄를 끌어안을 이를 우리가 설정하여 우리를 구원한다는 것은 이율배반이며, 도덕적이지 않다. 우리는 그런 식으로 도덕하지 않는다. 우리의 도덕은 당위적이다. 

과연 그런가. 

중동 한 작은 마을에서 가난한 목수의 첫 아들이 태어났다. 그의 아들은 아니었으니, 미혼모의 아들이라 칭하는 것이 아마 보다 옳을지 모른다. 정치적으로는, 목수가 입양한 바가 맞으니 그의 아들이라 칭하는 것도 옳으리라. 그는 철학적, 도덕적 천재였고 후세에는 천재 그 이상의 존재로 칭송받았다.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도 여전히 남아서 철학적, 윤리적 문제를 제기하고 있고, 그의 삶은 오늘날에까지 하나의 규범성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십자가에 못박히었고, 그의 제자들에게서 그의 죽음은 가장 큰 신앙의 근간이 되고 있다. 그는 인간의 원죄를 대신 속죄하였고 우리는 그를 통해 신성 - 무한한 결백에 직면할 수 있다는 그런 신앙적 살인은, 바로 우리들 인간에 의해 저질러졌었다. 

사실 그렇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죄, 그리고 비양심을 냉철히 직시할 용기를 갖고 있지 못하다. 정말로 잘못한 것이 누구인지, 정말로 잘못된 것은 무엇인지를 직시하는 과정에서 나타날 자신의 잘못을 견뎌내지 못하기에 우리는 죄를 덮고 모순을 눈 앞에서 치운다. 시선을 피하고 문제를 회피한다. 서글픈 일이지만 분명한 사실이며, 우리는 자신의 죄를 진심으로 반성하고 회개할 여력을 갖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죄를 씻는 방식은 단순하다. 우리가 지었을지도 모르는 죄를, 누군가에게 전이시킨다. 한 젊은이가 2천년전에 죽을 당시, 그를 못박은 이들은 별 다른 감흥이 없었을 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사법살인에 의한 사망을 우리의 속죄로 인식하고 죄를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인지하는 종교의 바로 옆에서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가진 신앙적 원죄는 이로서 씻어질지 모르지만, 그 속에서 여전히 우리의 사회적 원죄는 남아있을 수밖에 없다. 여전히 우리의 결백은 누군가의 희생으로 이뤄져 있으며 거기서 우리의 눈을 피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원죄를 인지하지 못한다. 우리는 심지어 우리가 죄를 짓고 있거나 잘못을 하고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그런 느낌을 받는 것을 기피한다. 결국에 우리는 우리의 죄와 잘못을 누군가 타인에게 전이하고자 시도하고, 그 시도는 대부분 성공한다. 

아마도 지금 이 시점의 한국 사회에서, 지독하게도 어마어마한 욕과 비난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한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 사람이 누구일지는 각자의 생각에 따라 다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어쨌든 내가 생각하는 현대 한국의 앙그라마이뉴는, 최소한 자신이 생각하는 옳음을 위한 논리를 갖고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혹자는 그 사람이 지나치게 정쟁 정략적이라고 비판하지만, 최소한 그 사람은 정쟁과 정략을 위한 선택을 해야할 때 이전보다 훨씬 더 민주적인 방법, 입법적인 방식을 택하고 있다. 적어도 나는 신문에 등장하는 비판들이 왜 그 사람의 잘못인지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경제가, 혹은 정치가, 또는 각박해진 우리 사회가 정말로 그 사람의 잘못이라면 왜 그 사람에 대한 비판과 욕설이 나를 설득시키지 못하는가? 전혀 이론적, 논리적 배경이 없는 욕설이 그토록이나 횡행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언제나 그렇겠지만 사회 문제는 항상 총체적이다. 특히 현 시점의 한국이 처한 모든 상황은 지독히도 총체적이다. 우리 모두가 잘못을 저지르고 있고, 그 잘못은 엮어져 일반인이 이해하기조차 힘든 저편에서 결합되어 또 다른 파멸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매 발자국마다 항상 우리는 지나칠 정도의 잘못을 양산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 잘못을 스스로의 것으로 인지하지 못한다. 언제나 그렇듯 못하는 것은 안하는 것이며, 우리는 스스로의 오류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 결과로, 누구의 눈에도 죄악과 타락의 덩어리로서 결합한 앙그라마이뉴가 우리 앞에서 걷게 되었고, 우리는 그에게 모든 잘못과 죄악을 씌움으로써 스스로 사회의 총체적 문제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검은 덩어리는 그럼에도 우리들의 업을 마저 걸머지려고 하고, 우리는 그런 그에게 또 다른 돌멩이를 던지고 있다. 설령 그자가 잘못한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무얼 하는가. 우리는 이미 그의 잘못을 훨씬 뛰어넘는 모욕을 그의 전신에 새겨둔 것을. 

2천년전 베들레햄에서 태어난 한 청년의 말을 다시 기억하자. ‘스스로 죄가 없는 이, 이 창녀에게 돌을 던질 지어다’ 그 말은 틀렸다. 우리는 돌을 던짐으로써 스스로 무죄함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