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두르다. 베다. 허원영에게. 
 
 
 
 
참 좋은 글을 쓰신다는 점에서 저와는 제법 다르지만, 음악적 취향도 같고 독서 취향도 굉장히 닮은 우리 원영씨에게 오랫만에 글을 써 봅니다. 전에 다른 곳에서 원영씨가 올린 '알리바이에 대하여'에 대한 모종의 답글 이후로 처음입니다. 오랫만에, 반갑습니다. 이것으로 언젠가 대면적으로 해야 할 인사의 부담이 조금 줄었네요. 그리고 책마을 여러분들, 반갑습니다. 이것은 칼럼이니까요. 어떤 입장, 에 대한 주절거림이기도 합니다.

휘청이는 글을 써제끼는 것을 즐기는 입장에서, 글머리에 예의를 갖춰 인사부터 올리는 데는 물론 이유가 있습니다. 전에 썼던 글과 크게 다르지 않은 궤의 글을 쓰겠다는 일종의 암시랄까요.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지만 원영씨도 여전하시고 저도 여전하다는 사실에, 1년이면 사람이 변하곤 하는 딱히 유쾌할 것은 없는 이 세계에서 유쾌한 안도감을 느껴봅니다. 자, 인사는 이정도로 할까요. 이제 그만 본론으로 들어가봐요. 역시 다른 곳에서 '아마 우리가 만나게 되면 제가 이야기하게 될 것'의 문제도 적당히 섞여있고 말 그런 이야기로.
대현 씨가 언젠가 원영씨에게 '바른생활 필'이라는 지적을 했지요. 예, 저도 비슷한 무엇인가를 느꼈지만, 역시 제가 하고 싶은 지적은 '바른생활 필'이 아닌 조금은 더 구체적인 무엇이었습니다. 그 무엇이 과연 무엇일까, 를 고민하다가 내지른 답글이 하나 있었죠. 이제는 인트라넷 어딘가의 해체된 비트가 되어 떠다니고 있을 그런. 다행히 원영씨의 원문은 이곳에 여전히 남아 있으니, 그 때의 이야기에 대해 잠깐만 이야기할께요. 이 글이 쪽지가 아닌 게시물인 이상, 일정 정도의 공공성을 띄는 것은 기초적인 예의가 될 테니까.

당시의 양상을 매우 거칠게 요약하면 이런 양상이었습니다 : 원영씨는 시대의 공공의 적을 단일한 '구조'로 파악하고, 그러한 적을 향해 공동의 공세를 취하자는 입장을 견지하셨고, 저는 우리 시대에서 공공의 적은 존재하지 않고, 자신의 정체성에 따라 각자의 적을 마주한 상태에서 소수자들 간의 연대를 통한 '단일하지 않은'극복을 추구하자는 입장. 이쯤에서 묘한 웃음을 흘리고 계실 육이은씨가 눈에 보이는 것 같기도 하군요. 이은씨가 예전에 속해 있던 학회가 취한 전자의 관점에 대해, 후자의 관점으로 부딪히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저 역시 그런 사람의 일종이었으니까요.
그리고 그 때 저는 원영씨에 대한 '비교적' 구체적인 상을 본 것 같습니다. 그 이전부터 조금씩 느껴왔던, 그리고 이후로도 느껴왔던 그런. 다른 사람에 대해서라면 이는 정말 섯부른 재단이 될 지 모르겠지만, 일관된 논지를 정갈한 글로 담아낸 원영 씨에 대해서라면 저는 이쯤에서 이렇게 말해도 크게 문제가 되리라고는 생각치 않습니다. 그럼, 이야기할께요. 

원영 씨는,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부분이 무서울 정도로 큰 사람이라고.

이쯤에서 모두들 푸핫. 웃어도 됩니다. 무엇인가 굉장한 것을 풀어낼 것 처럼 잔뜩 긴장시키고 한다는 말이 기껏해야 그리 화려하지도 못한 한 문장이라니. 하지만 대상이 원영 씨이기에 이 문장은 문장 이상의 충분한 의미를 지닐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은 당신의 휴머니즘과 태도, 그리고 당신의 내부를 휘몰아치는 새빨간 피에 비해, 무서울 정도로 추상적이고 관념적이라고. 그리고 이번 우람 씨에게 보내는 글에서 또 그러한 무엇을 느끼고, 결국 이렇게 글을 쓰게 됩니다. 언젠가, 그러니까 한 달 전쯤 쪽지로 날렸던 '이런 글을 쓸 심산입니다' 와, 몇 주 전에 이야기했던 '당신에게 편지를 쓸 겁니다'라는 약속 두 개를 이제서야 지킬 수 있게 되어 다행입니다.

당신은 세계를 직시하고 있는, 지금의 세계에 그리 많지 않은 그런 사람입니다. 세계에 대한 당신의 해석은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고 있습니다. 그러한 해석으로부터 당신이 주장하는 많은 것들도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크게 다르지 않은 곳을 바라보고 있는 입장에서 나는 당신과 울타리 안에서는 울타리 안에서 할 수 있는 만큼, 그리고 이 곳을 벗어나게 되면 벗어난 상황에서 할 수 있는 만큼 함께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그리고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이러한 확신 때문에 이야기합니다. 당신에게 나는 가끔씩 추상성과 관념성을 강하게 느낀다고. 물론 우리는 여지껏 단 한번도 구체적인 사례를 두고 이야기를 진행해 본 적이 없기에 나의 이러한 주장은 취약점을 지닙니다만, 거꾸로 당신이 여러 글에서-그것이 세계에 대한 해석이든 해석에 대한 실천이든(물론 해석과 실천을 이원화하는 것은 아닙니다)-구체적인 방향성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런 점에 저는 지저분하게 늘어지고 싶습니다. 아시다시피 나는 글을 휘두르는 타입인지라, 취약점을 보았다고 간결한 공세를 찔러들어간다거나 하는 건 젬병인지라서요.

당신이 이야기하는 세계에 대한 실천은 '세계를 자신의 시각으로 보자. 그리고 입장을 가지자. 그리고 연대하자. 실천하자'로 귀결되는 듯 합니다. 그러함의 전제로써 세계는 '아직 보지 못한 사람들'이 아직은 많은 그런 곳이겠지요. 그리고 그러함의 결론으로써 세계는 '입장을 가지고 실천한다면, 나아질 곳'일 것입니다. 이러한 기본 입장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지극한 천재이거나 지극한 바보일 텐데, 어느 경우에나 중요한 고려대상은 아닐 듯 합니다. 나 역시도 이에 동의하고, 이는 정말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입장이라는 점에서 강령처럼 내걸어도 크게 문제가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왜 그 이후의 진행이 보이지 않을까, 라는 질문에서부터 내가 지목한 '추상성'과 '관념성'의 문제가 제기됩니다.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파악되면,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할 지'에 대해 고민해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 지'에 대한 상이 잡히면, 실천으로 그 상을 정립해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 지'고민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 지'에 대한 상을 더 구체적으로 세울 수 있으며, '실천'의 과정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지'에 대한 고민을 더 해 볼 수 있습니다. 네, 이건 낡아빠진 속류 변증법이며, 잘못된 한 걸음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설령 잘못된 한 걸음일 지라도 그것이 내면의 한 걸음이라면, 그리하여 타인과 더 심도있는 소통을 할 수 있는 더 깊숙한 곳의 나를 찾는 한 걸음이라면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러한 차원에서 원영씨의 글들이 갖는 추상성에 대해 글을 휘둘러 봅니다.

관념성에 대한 이야기도 이러한 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물론 당신은 단 한 번도 '세계를 바라보는 것'으로 세계를 바꿀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방금도 말했듯이 당신에게도 있어서 '세계를 바라보는 행위'는 구체적인 시각을 갖는 것, 구체적인 실천을 고민하는 것에 선행하는 '기본적 단계'이니까요. 그러나 그러한 단계에서 더 이상의 말을 하지 않는 것은 결국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 결국 이 세계의 변화와 관련한 필수적이고 미결된 선결 조건이 아닌가 하는 해석을 낳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당신이 그렇게 생각하는 지 아닌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마 내일 모래 글피 정도에 알게 되겠지요. 만약에 당신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저는 그에 쉽게 동의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시각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것'은 분명히 아주 중요한 과정입니다만, 그것은 '미결된, 그렇기에 풀고 넘어가야 할 선결 조건'이 아닌, 生을 살아가는 과정에 변증법적으로 내재된 하나의 부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실존적인 자아를 성찰하는 것, 그러한 자신이 어떻게 세계와 연관되어있는지를 보는 과정은 '보는 것'을 통해서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것은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이루어지는 행위입니다.

이번에 원영씨의 글에 이런 부분이 있더군요. 
"심정적으로" 동조해 주십시오. "뜬구름"을 잡아주십시오. 그리고 그 "심정", "뜬구름"은 고이 간직한 채로 자기 있는 곳에서 조금씩 시작해 주십시오'
이는 당신이 지금까지 꾸준히 가지고 있던 그런 입장입니다. 그리고 이전에 저와 나눈 이야기로 미루어 볼 때, 당신이 이야기하는 지향이란 '공통의 적을 지닌, 통일된 어떤 지향'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다시 옛 이야기로 돌아가서, 저는 보다 구체적인 부분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뛰는 심장을 주체하기가 약간 힘이 듭니다. 다시금, 지나치게 반갑습니다. 백무산의 시-이에 대해서는 언젠가 부연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를 올려주신 당신, 그리고 '사상의 유행에 대하여'라는 글로 저를 책마을에 끌고 오신 당신이 말입니다. 그리고 세계의 적은 하나의 구조가 아니라는 것이 그때의 내 의견이었고, 지금의 의견이기도 합니다. 물론 그 '특정한 억압적인 구조'에 대한 탐구는 인간에게 가해지는 숱한 일반적인 억압을 해석해낼 수 있고, 어쩌면 많은 부분에서 억압의 해방을 가져올 수도 있을 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이야기하는 '구조를 파악하는, 보통의 시각과는 약간 다른 시각'의 안에도 무수한 '다른 시각'들이 존재합니다. 인간은 서로 다른 구체적인 상황 속의 존재이며, 그리하여 상황 속에서 다른 정체성을 가지는 존재이니까요. 이러한 다른 정체성을 가진다는 것은 다른 억압이 가해진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곧 다른 시각과 다른 실천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시각과 실천들은 '거대한 변화의 장'에서 통제하기 힘들 정도로 얽히게 됩니다. 

이를테면, 소위 '진보'를 표방하는 단체들 내부의 지향점 대립은, 보수/진보 논쟁에서 발생하는 감정적 첨예함 이상의 날카로움을 가집니다. 현실의 변화와 관련된 구체적인 문제 속에서도, 우람씨가 지적하신 대로 '거대한 시각'이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구조적인 폭력의 문제 이외에도, 아주 다르지는 않은 지향을 가진 사람들 간의 충돌은 커다란 문제를 가져옵니다. 이것은 분명히 슬픈 일이지만, 이러한 상황에서, '같은 곳을 바라보고, 차이보다는 단결을(당신의 입장을 극화해서 표현하는 부분입니다. 당신의 입장이 이게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내 입장을 보다 잘 드러내기 위한 수단입니다)'이라는 당신의 기본 입장의 강조-당신은 이것을 '강조'하지는 않았습니다만, 이것의 전제로 인해 더 진행될 수 있는 논의의 부재는 이것의 강조와 크게 다르지 않은 의미를 가질 것입니다-는 폭력이 됩니다. 그것은 예전의 몇 '진보 단체'가 '대동단결'을 외치면서 기본적인 입장의 차이들을 억압하는, 전혀 필연적이지도 필요악적이지도 않은 그런 억압을 발생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다른 위치에 서 있으면, 다른 지향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 옳습니다. 이는 단지 '서 있는 것'의 차원이 아닌, 당신이 강조하는 '바라보는 것'의 차원에서도 쉽게 해결할 수 없는 부분의 문제입니다. 

물론 이러한 '서로 다른 위치와 정체성들'에 대해 논쟁은 구체적인 상황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를 필요로 합니다. 폭력의 구조가 일반화될 수 있다고 해서 서로 다른 차원의 폭력과 억압들-성에 대한 억압, 인종에 대한 억압, 나이에 대한 억압, 계층에 대한 억압-이 동일하게 논의될 수는 없는 것이니까요. 그러나 이런 구체적 상황에 대한 구체적 논의 이전에도, 당신이 이야기하는 일반론 내지는 전제의 차원에서도 얼마든지 보다 더 '구체적'인 논의를 진행시킬 수 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테면, '우리는 어떻게 공통의 지향을 가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당신이 때로 '의지'로 해결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하는 그런 기본 전제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 말입니다.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는 것은, 당신이 말하는 것처럼 '꿈'을 가슴 속에 품는 가벼운 태도로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입장을 가진다는 것, 태도를 가진다는 것 자체도 쉽지 않은 '실천'이며(결코 실천의 선결 조건이 아니며), 이와 관련한 과학적인 분석(의지만으로 가능하지 않다는 차원에서)이 필요한 부분입니다. 설령 '단일한 억압적인 구조에 적대하는' 입장을 가지려 한다 해도, 개인이 서 있는 이미 규정된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그러한 입장을 가지려는 실천은 구체적 상황 속에 왜곡됨으로써 더 많은 혼란을 낳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제대로 바라보아야 하며, 입장을 가져야 하지요. 자. 무엇을 할 것인가, 라는 질문 후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를 물어봐야 하는 겁니다.

나의 입장을 요약하자면, 1.'전제'에서 멈추는 것은 문제가 있는 태도이며 2. 당신이 이야기하는 그러한 전제마저도, 레토릭으로 가능한 손쉬운 전제가 아닌 지난한 실천인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나는 당신의 더 많은 이야기를 원합니다. 내가 보는 당신은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역량을 가진 사람입니다. 한 걸음 더 나가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나 같은 찌질이를 벌벌 떨게 만들 수 있는 내공을 뿜어낼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대현 씨의 표현을 빌리자면 '바른생활 필'에서 더 이상 나감에 주저하는 듯 합니다. 언젠가 제가 베버의 소극성을 비판한 것과 마찬가지로, 당신을 공격하고 싶습니다. 

'말할 수 없는 것에는, 최대한으로 말하라'는 말이다. 개소리를 내지르라는 것이 아니라, 베버처럼 '총체론적'인 학자라면 그래도 된다, 아니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당신이 지르지 않는 것은 당신의 역량에 대한 기만이며, 당신의 논리에 대한 방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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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이야기들은 이제 다 지른 것 같습니다. 물론 당신이 기본을 중요시하는 것은 어떤 전술적 사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적극적 휴머니즘'이라는 기치에 반대하는 사람은, 보다 래디컬하고 구체적인 기치에 대해 반대하는 사람보다 적으니까요. 게다가 이 곳은 인터넷이 아닌 인트라넷이고, 당신의 글은 이곳의 '대중'을 겨냥하는 칼럼이니까요. 그런 글에서 나온 입장을 가지고 논쟁적/대인적 공세를 펼치는 내가 치사한 녀석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역시 언젠가 꼭 지르고 싶었던 것인지라서 써 봅니다(이런 경우라면 그저 '응. 그것은 전술이다' 라고 하시면 됩니다). 적극적 휴머니즘은, 특히나 다수에 의한 적극적 휴머니즘은 어떤 구원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당신이 바라는 그런 구원이 될 수는 없습니다. 언제나 고민되는 지점이지만, 내 입장에서 당신에게 지르는 글이기에, 화려한 연출을 위하여 이렇듯 강력한 표현을 동원합니다.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우리 모두 가슴속에 동화 속 다마를 간직하자, 는 체 곤돌이의 구호는 이건희 회장님도, 나도, 당신도, 김영삼 전 대통령님도 할 수 있고, 따를 수 있는 구호가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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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 지목한 '구체적 상황'의 이야기는, 어쩌면 그저 하나의 예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읽고, 내가 행한 공격은 그 책의 논리 구조 배후의 베버였던 것 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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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당신이 더 이상 지르지 않는 것은 당신의 역량에 대한 기만이며, 당신의 논리에 대한 방기입니다. 라는 표현은 비단 이 글에서 제가 구체적으로 제기한 부분들에 대한 이야기 이상을 원하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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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구체성을 띄는 논의와 현실적 실천이 불가능한 곳입니다 이곳은. 게다가 얼개에서도 밝혔듯이, 진검 승부마저도 불가능한 논쟁의 공간이지요 이 곳은. 그러한 상황을 등에 업고 제가 너무 '진검이 아니면 받아칠 수 없는, 치사스런 가검의 공세'를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자괴감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언젠가 울타리 밖 혹성 베지터-318에서 만날 것이니까, 그 때 무참히 짓밟히도록 할께요. 그러나 그 전까지는 당신의 공세를 느끼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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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건강하십시오. 당신, 이라는 표현에 거부감을 느끼셨다면 정중히 사과드리겠습니다. 다만 글에, 당신에게 최대한 충실하기 위하여 저는 당신, 이라는 표현을 쓸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을 알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나는 당신과 같은 사람에게나 당신, 이라는 표현을 쓰는 인간이기에 말입니다.

 

  
 
 
 
 병장 김동환 (2006/03/15 08:43:30)

선리플 후감상. 
이거 진실게임일까요.    
 
 
병장 김대현 (2006/03/15 11:47:18)

필진들께 거는 기대치, 에 대한 문제랄까요. 

우람씨가 지적한 대로 기대치라는 건 양날의 검이죠. 그 기대치에 맞는 정진이 뒤따라 서로를 업그레이드시킬 수 있는 전기가 되기도 할테고, 기대치가 너무 높거나 래디컬한 나머지 맥만 풀리게 하는 역효과를 가져오기도 하니까요. 

이제까지의 원영씨 글은 그게 설사 "바른생활" 삘이었다 하더라도 분명 그 나름의 가치를 지니는 것이었고, 어쩌면 딱 거기서 수위조절을 하고 싶으셨던 건지도 모르죠, 쓰는 원영씨나 읽는 책마을분들이나요. 거기서 한발짝 더 나가자는 말이 다른 분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는, 잘 모르겠네요. 저야 순기능 쪽으로 기대를 걸고 싶지만요. 그리고 그게 꼭 쓰는 사람에게 국한되는 문제만은 아니라는 걸 얘기하고 싶구요. 

다만, 이런 반문은 제기하고 싶네요. 당위에만 그치지 말고 그것이 자신과 현실 속에서 어떻게 녹여지는지에 따른 경험과 그에 따른 방침까지 글에 포함해달라고 이왕 채근하는 김이라면, 우선 자신의 것부터 들이대야 하지 않느냐는 거죠. 특히 영준씨의 글 속 "다른 위치에 서 있으면, 다른 지향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 옳습니다" 라는 말은, 그야말로 영준씨가 원영씨를 지적한 그 논리로 역비판할 수 있는 "바른생활" 삘 얘기가 아닌가, 그런 얘기보단 그 명제가 삶 속에서 어떻게 녹여지는지, 그 정치적 적용의 지난함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야 되는 것이 아닌가, 라는 반문이 가능하다는 거지요. 

자신의 핏자욱이 섞인 이야기를 하기 쉽지 않은 건 인지상정이니까요. 
저도 이 주제에 관해서 무언가를 쓰고 싶은데, 그것이 참 쓰기에 녹록찮음을 빈 백지를 보며 느끼고 있습니다. 

아무튼 책마을의 논쟁이 보다 "핵심"에 가까워지고 있는 것이 반갑습니다. "핵심"은 "핵심"이기 때문에 이야기하기 힘들다는, 예전 영성님의 글이 생각나는군요. 아무쪼록 논쟁 중에 핵심과 그 핵심에 걸맞는 껍데기를 생산적으로 고민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힘든 만큼 보람찰거라 생각해요.    
 
 
 병장 양인수 (2006/03/15 13:00:36)

두분 모두 사이어인이신지... 
혹성 베지터는 프리더가 이미 날려버렸는데... 
엇그제 스카이 라이프에 방영됐어요...    
 
 
상병 송희석 (2006/03/15 13:52:29)

일단 한수 접고, 맨날 보는 정석 말고 새로운 신수좀 보여달라는 애교군! 
난 이정도 실력이 한계이니, 한계점이 없는 당신의 모습을 더 보고싶다는 건가? 
쳇! 분명히 말하건데, 저처첨 할수 있는 이야기 다 해벌리려다가, 무참히 다굴이 당했던 전 책마을 
분위기를 생각해보건데, 결국 제가 건드려보았던 파울한계가 거기까지일수밖에 없음! 
결국 여기는 혹성 베지타가 아닌 지구!이기 때문입니다.    
 
 
병장 노지훈 (2006/03/15 13:54:04)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원영님은 무서울 정도로 철저한 분이라고, 이 분은 초사이어인이 되기 전까지는 지르지 않으실 것 같습니다. 시를 안쓰시는 이유와 마찬가지로... 
그래도 저는 좀 더 편안한 마음으로 틈을 보여주셨으면 하는 희망입니다. 그래서 저는 예전에 올리신 소설이 좋았습니다. 하지만 이런 공간에서, 필진이라는 위치에서 얼마만큼 자신을 보여줄 것인가는 원영님의 선택이라고 봅니다.    
 
 
상병 송희석 (2006/03/15 13:55:55)

그리고 전 기본입장을 동의하지 않는 '바보'랍니다!    
 
 
병장 김강록 (2006/03/15 17:53:08)

쳇. 이파리가 길어져서 오늘 다 못올리겠다. 내일 뵈요.    
 
 
상병 박종민 (2006/03/15 18:34:49)

지훈님 의견에 동감합니다. 

전부터 느끼고 있었지만 영준님의 권세(拳勢)는 '강(鋼)'이로군요. 
그 누구도 부러뜨리기 힘든, 1%의 불순물-타협일까요-도 용납하지 않는, 
기어이 현실을 쓰러트리고야 말겠다는 그 투지가 
읽는 이의 가슴 깊이 지릿지릿함으로 다가옵니다. 경의를 표합니다. 
그 무서우리만큼 강렬한 투지. 언제까지고 응원하겠습니다. 

제가 원영님의 칼럼을 쓰면서 느낀 것은. 
그 원영님이 지니신 특유의 ‘유(柔)함’이 아니라(영준님께서도 지적해 주셨듯이 
그것은 차라리 초대형 태풍의 한가운데, 침묵보다 고요함. ‘눈’과 같은 것이겠지요. 
저는 그 너머에도 뭔가가 더 있는 것을 느꼈어요.) 
덤덤한 필체 속에 숨어있는 '완벽에의 동경'이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동경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끝도 보이지 않는 여정에 
좌절하는 기색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차분하게. 
끊임없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고 있다는 거죠. 
누구도 토를 달 수 없는. 누구도 이견을 제시 할 수 없는. 
도덕적, 논리적, 문체적 완벽 말이죠. 
그래서 그렇게 ‘조심’스러운 것일까요? 

저는 원영님의 칼럼이 단 한번도 소극적이라고 생각해 본 적 없습니다. 
언제나 원영님은 ‘준비하라’고 말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것만으로 힘이 된다’라는 말은, 
‘그것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라고 단정짓는 것은 아닐 거에요. 
몇 번이고 밑줄 그어가며, 샤프심이 닳도록 읽다보면 보이거든요. 
그 이상을 바라는 원영님의 이글거리는 야망이 행간에, 자간에 숨어있다는 것을. 

하지만, 너무 조심하신 원영님께도 일부 책임(?)은 있으신거죠(웃음) 
원영님의 그 ‘수퍼 울트라 하이퍼 메가톤급 비장의 무기(헉헉..)’는 언제쯤 볼 수 있을까요? 
아직 준비가 안 되었다고 보는 게 맞나요? 

강록님한테 자꾸 물들어가는데, 
원영님의 그 언제까지 사기다마를 참아야 하는 건가요!?(웃음) 
200을 이루었으면서도 끝까지 자기는 200놓기는 좀 그러니까, 
150친다며, 대신 쿠션을 하나 늘리는 제 친구처럼요.    
 
 
상병 송희석 (2006/03/15 19:26:36)

대현/ 결국 기대치는 실망치로 결론내더군요! 대현님 반론에 동의하는 바입니다. 

지훈/ 뭐 원영님 팬은 아니지만 원영님은 이미 초사이언이 되셨어요! 다만 사람들이 초사이언으로 만족을 못할 뿐이죠! 

종민/ 원영님은 숨겨둔 무기같은것은 없다고 생각하는데, 맨날 무기를 꺼내고 사는것 같습니다. 

영준/ 오랜만에 질문. 왜 영준님은 단순한 입장을 가지고 연연하는 걸까요? 물론 답답한심정이야 충분히 이해하지만, 그냥 그것은 스스로의 욕심 같은데? 솔직히 자신이 진검 꺼내고 싶은데 상대방이 진검을 안꺼내주니까 나의 마음의 불빛이 걸리는건가요? 그냥 진검으로 찌르십시요! 뭐 힘들게 합니까? 그냥 찌르면 되지! 아니면 그냥 마음편하게 혹성베지타로 갈때까지 기달려보세요! 

원영/ 원영님이 글쓴적도 없는왜 원영/ 이라고 표기한것은 나름대로 할말이있어서요! 예전에 저한테 한 말씀은 이미 이러한 질문의 대답을 다 하셨다고 보았거든요! 다만 전 원영님이 어디까지 갈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여태 수많은 칼럼 및 모든글을 읽어보았지만, 정확한 목적지는 제가 제대로 못보았습니다. 물론 제 독해능력수준이 딸려서 그럴수도있지만, 목적지가 매우 궁금할 뿐입니다. 두리뭉실한 목적지 말고 제대로된 목적지! 이러한 질문을 하기전에 저의 목적지부터 말씀드려야겠죠? 저는 계몽주의자가 될려고 합니다.(그래서 저는 무슨무슨박사가 될까 합니다.) 님은 무슨 주의자가 되겠습니까? 만약 ~주의자따위가 싫으시다면 어떤 사람이 될것인지 궁금합니다! 혹시나 제가 생각하고있는것과 같다면 저는 당신이 던지는 계란을 폭탄으로 바꿀수 있도록 혹성베지타에서 지원할것을 여기서 맹세해볼까 합니다.    
 
 
병장 김강록 (2006/03/16 08:40:57)

머릿속에 수많은 말들이 떠오르는데 그 중 필요한 말을 취사선택하기가 쉽지 않군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저는 논리적으로는 영준씨 편, 하지만 심정적으로는 원영씨 편입니다. (내가 누구의 편입네, 하는 게 웃기다구요. 하지만 저는 이 문제에 아무런 감정없이 접근하지 못하겠습니다. 그걸 알면서 객관적인 척 하는 건 위선입니다.) 

연대에 관한 영준씨의 견해는 다분히 현장 감각에서 나온 논리라 생각됩니다. 이를테면 역사학회, 경제학회, 여성학생회, 각종 대학언론기관 및 여타 학생자치단위들이, 서로 관심사도 다르고 이해관계도 다른 이질적인 그 집단들이 어떻게 서로 다른 깃발을 나부끼면서 동시에 하나의 거리에서 만날 수 있느냐. '실제로 가능하고 유효하며 전략적으로도 적절한 원리'라는 점에서, 저는 영준씨의 견해에 동의합니다. 게다가 영준씨가 엠마 골드만을 좋아한다면야. 제가 굳이 이 지점에 관해 영준씨에게 토를 달 필요는 없어보입니다. 결국은 그 언젠가 스쳐지나갔던 어느 커리큘럼에 나와있던 얘기들을 착실하게 다시 읊은 것에 지나지 않을테니까요. 허나 그 외에도 다른 문제가 있는데, 바로 그것이 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지점이며 심정적으로 원영씨에게 돌아서는 지점이 될 것입니다. 

영준씨께서는 원영씨를 어떤 사람이라 생각하십니까. (원영씨의 의견을 어떻게 생각하시느냐가 아니라, 그를 어떤 사람이라 생각하느냐는 겁니다. 한 사람의 삶과 생각을 떼어놓고 생각한다는 건 말이 안된다는 개인적인 소견입니다.) 제가 보기에 (감히), 그는 한마디로 뜨거운 청년입니다. 자신이 선택한 고뇌를 결단코 끝까지 짊어지고 나아가려는 그런 사람입니다. 헌데, 여기서 영준씨는 말합니다. 결국 모든 화살표는 '실천'이라는 한 발을 내딛는 것으로 향하고 있는데, 왜 원영씨의 다음 선택은 항상 '한 발'이 아니냐 '또 한 편의 글'이냐. 

하지만 그 '실천'에 대해서 손쉽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대한민국에 없습니다. 진정 원영씨가 고민하고 있는 것 역시 무엇이 옳으냐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행할 것이냐라고 생각합니다. 영준씨가 그 모습에서 어떤 망설임을 읽고는, 그게 안타까워서, 원영씨의 그 뜨거움을 높이 사고 지지하는 이의 입장에서 애가 닳아서 이런 말씀을 하고 계신 게 아닌가 합니다. 하지만 제겐 그보다는 너무나 높은 장벽에 부딛쳤음에도 그 전망없는 전선에서 굴하지 않고 고군분투하는 투사의 모습이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여기서 저는 원영씨의 심정적 지지자가 될 수 밖에 없고, 또한 이는 저와 원영씨가 비슷한 포지션에 위치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지 않을까 합니다. (차라리 이 지점이 논란거리가 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지만, 아무튼) 결국, 하나의 원영씨를 보는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그 중 어떤 면에 보다 비중을 두느냐의 차이인 것 같군요. 

그럼 당신은, 김강록 당신의 삶은 어떠하냐. 그렇게 물으시면 저도 말문이 막힙니다. 전혀 안그래보일런지 모르겠지만, 저 역시 지금껏 나름대로의 제 방식대로 실천의 문제를 풀어보려 애썼습니다. 불행하게도 급기야 얼마전에는 "나는 다른 삶을 상상하지 못한다"며, 폭삭 주저앉아버렸었죠. 다시 실마리를 잡아보려 하지만 여기서 바로 얘기할 수는 없습니다. 김강록은 김강록이 서있는 자리에서 김강록의 언어로 얘기해야 하는데, 지금 두 분 사이에 형성된 무대 위에서 저의 이야기는 난데없이 끼어드는 불협화음이며 엇박자가 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쩌면 그것이 불협화음이고 엇박자이기에 저는 감히 제 의견을 얘기할 용기가 나는 것 같기도 합니다. 바벨탑 이후 인간은 서로 다른 언어로 인해 절망했지만, 하지만 그건 꼭 그렇게 볼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원영님, 영준님과 다른 언어를 가질 수 있어서, 저의 불협화음은 여러분이 남겨두신 여백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함께 선율을 이룰 것입니다. 


……라는 둥의 이파리를 달아보려다가 어제는 그냥 내려갔었습니다. 자, Coming Soon.    
 
 
병장 주영준 (2006/03/16 09:42:56)

모두에게 / 하나이든 복수이든 어떤 '구조'를 갖춘 글에 대한 화답은 당연히 동일한 위상의 글로써 이루어저야 한다는 생각에, 조금 더 준비된 글을 가지고 논쟁에 임하고 싶었지만 '어떤 오해'가 커지는 것 같아 미리 짧게 첨언합니다. 대현, 종민, 그리고 윗 글의 상원, 강록 모두에게 전하고 싶습니다(희석씨와 지훈씨는 조금 다른 차원의 이야기를 해주셨기에, 따로 이름을 거론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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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와 원영씨의 책마을에서의 지금까지의 행보와, 그 둘이 풍겨내는 '분위기', 그리고 둘에 대한 고거의 몇 가지 사실들에 의거, 저와 원영씨의 구도를 특정한 일반화된 구도 속에서 파악하는 듯한 불안감이 들고 있습니다. 허나 나는 뜨겁지도, 鋼의 勢를 지니지도 않은 사람입니다. 내가 원영씨에게 제기한 모든 의문들은 나에게도 해당하는 그런 의문들입니다. 나는 완성된 나의 논리를 가지고 원영씨를 베려 하는 것이 아닙니다. 휘두르고 있고, 그것이 베어들어갈 수 있는 궤도를 그려내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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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록씨는 제게 '연대에 관한 영준씨의 견해는 다분히 현장 감각에서 나온 논리라 생각됩니다.' 하셨는데, 에이, 저 그런 사람 아닙니다. 설령 제가 '현장'의 사람이었다고 해도, 저는 이 글을 통한 논쟁의 수위를 '삶 자체의 난도질'의 수위보다는, '글쓰기'의 수위에서 진행하고 싶을 것 같구요. 과거의 전력을 가지고 논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파헤쳐봐야 빈약하기만 할 과거따윈. Adios. 입니다. 저는 '글쓰기'와 '고민하기'의 수위에서 논쟁을 진행하고 싶은 것입니다. 물론 '고민'과 '실천'이 이분법적 구도를 이룰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나는 강록씨의 '한 사람의 삶과 생각을 떼어놓고 생각한다는 건 말이 안된다는 개인적인 소견'에 굉장히 많이 동의합니다-이 또한 기만적인 단계조절에 불과하겠지만. 生은 때로 이런 기만을 필요로 합니다. 生과 生이 부딪히는 논쟁이라면, 지구에서 진행되어야 하겠지요. 그리고 여기는 지구가 아니며, 아직 저는 그런 논쟁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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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원영씨에게 제기한 핵심은 아마도' 당신의 기본 입장의 강조-당신은 이것을 '강조'하지는 않았습니다만, 이것의 전제로 인해 더 진행될 수 있는 논의의 부재는 이것의 강조와 크게 다르지 않은 의미를 가질 것입니다'인 것입니다. '너는 왜 '실천'을 고민하지 않느냐, 너는 반동이다', 하는 것과는 다른, 그러한 (모두들이 생각하는 '저'의 이미지에 비해) 매우 소심한 지르기입니다. 개인적으로 글의 일부를 인용해서 '이것이 글의 요지다'라고 발화하는 행위에 매우 적대적입니다. 그렇게 요약될 수 있다면, 그 요지만 쓰면 되지 굳이 지저분하게 길게 쓸 필요가 없으니까요. 그리고 전 지저분한 글 '한 뭉텅이'를 썼지, 해체된 채로 분해된 채로 잘린 채로 파악되는 '개개의 입장'의 묶음을 글이라고 던져놓은 것이 아니니까요. 하지만 역시, 씁니다. '오해'라고 거창하게 이름붙을 만한 무엇인가에 관한 건 아니지만, 뭐랄까, 논쟁의 러브젤같은 그런 것이 필요하달까 하는 생각에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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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단단히 오해들 하는 것 같은데, 저는 호전적이지도, 급진적이지도 않은 온건한 평화주의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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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돌/ 약오르지요? 나는 내일 모래 김형X라든가, 허X영이라거나, 김X석이라든가 김X현이니 하는 사람을 우연히 길을 걷다 보게 될 지도 모르고, 월요일엔 육X은이라거나, 한X천을 보게 될 지도 모르는데.    
 
 
병장 한상원 (2006/03/16 13:01:25)

굉장한 오해를 해버린 셈인가요. 모두들이 생각하는 영준씨의 이미지에 혹한 나머지. 음.(긁적) 
그래요. 해답은 어쩌면 정모에 있을지도 몰라요. 만나서, 글대신 사람을 더 알아야겠다는 생각도 들구요. 거기다 영준씨의 글에 대한 지나친 분석적 접근이 되려 화를 부른 격일지도 모르겠군요. 컥. 글 지워버릴까부다.    
 
 
병장 김강록 (2006/03/17 14:25:48)

영준 / 약오르냐는 정중한 질문에 대해 : 하지만 그런 당신의 도발은 정작 가장 보고 싶어하는 사람이 저라는 증거로 받아들여집니다. 약오르지요? 

그리고 나머지 부분에 대해 : 이파리가 너무 길어져서 그만. 헌데 지금 논의되고 있는 것들에서 다소 딴 얘기를 하는 것 같기도 하고, 혹은 적절한 이야기인 것 같기도 해서, 어느쪽의 이유가 되었건 별도의 본문으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잠시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