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철학  > 













후기 비트겐슈타인에 있어서 언어관과 삶의 형식에 관한 소고 










                                                                            4년 이 정 기 










《목 차 》 




Ⅰ. 서 론 




Ⅱ. 『탐구』에 있어서 언어의 문제 

      1. 언어관의 전환 

      2. 언어놀이의 다양성 

      3. 가족 유사성 

      4. 언어의 규칙성 




Ⅲ. 삶의 형식 

      1. 정의와 판단에 있어서의 일치 

      2. 삶의 형식의 두 가지 국면 

      3. 주어진 것으로서의 삶의 형식 




Ⅳ. 결 론 
















Ⅰ. 서 론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은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지며, 전기는 『논리철학논고』로 대표되고, 후기는 『철학적 탐구』로 대표된다. 그의 철학의 전면은 언제나 언어에 집중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언어 자체에 대한 관심이라기보다는 언어를 통해 철학적 문제를 해결해 보고자 하는 그의 열망에 의해서이다. 그는 철학적 문제가 생기는 이유는 언어 논리가 오해되었기 때문이며, 따라서 철학의 과제는 언어의 논리를 보여줌으로써 철학적 문제를 해소하는 데 있다고 보았다. 




『논고』에 따르면, 언어는 명제들의 총체이며, 명제는 더 이상 분석되어질 수 없는 요소명제로 이루어진다. 이들 명제는 세계의 그림이며, 세계는 원자적 사실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사실을 그리지 않는 명제는 무의미한 명제이며, 따라서 세계의 한계를 넘어서 있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라고 한다. 그러나 후기에 들어오면 비트겐슈타인은 『논고』의 의미그림이론(picture theory of meaning)에 포함되어 있는 중대한 잘못을 비판하고 언어의 다양성, 언어와 행위와의 관계 등에 주목하고서 언어놀이(language game)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이제 언어는 더 이상 실재의 그림이라고 하는 단 하나의 목적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 속에서 극히 다양한 목적을 수행하기 위한 도구로 파악된다. 그리고 비트겐슈타인은 나아가 언어가 이러한 도구로서의 구실을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삶의형식(form of life)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말하자면 하나의 언어는 그 언어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삶의 형식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후기에 있어서 언어에 관한 새로운 통찰은 이러한 삶의 형식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 이리하여 언어는 실재를 그리는 것으로 본 전기에 비해, 후기에는 언어와 삶의 형식의 관계로 그 축이 바뀐다. 그러므로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언어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삶의 형식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며, 또 그렇게 함으로써 그의 철학의 전체 모습을 조망해 볼 수도 있다. 이러한 점에서 삶의 형식은 후기 비트겐슈타인 철학의 기저를 형성하는 중심개념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본문에서는 후기 비트겐슈타인 철학의 대표작품인 『탐구』를 중심으로, 그의 언어관의 변화와 후기 철학의 중심개념인 삶의 형식이라는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의도한 바가 무엇인가를 밝혀보고자 한다. 







Ⅱ. 『탐구』에 있어서 언어의 문제 







1. 언어관의 전환 




비트겐슈타인은 전기 사상을 대표하는 『논고』에서 언어는 실재와 대응한다는 의미그림이론을 전개했다. 그러나 그는 후기 사상을 대표하는 『탐구』에서는 의미그림이론을 부정하면서 새로운 언어관으로 전환한다. 그에 따르면, 단어들의 의미가 그 단어들이 나타내는 대상이라는, 의미그림이론과 같은 언어관은 언어의 일부 기초적 기능에 근거하고 있다고 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아동들이 언어를 배우게 될 때 가르치는 교사는 언어의 원초적 형식을 빌어 가르친다고 한다. 왜냐하면 아동들은 아직 아무 이름도 모르기 때문에 교사는 어떤 대상, 예를 들어 하나의 대상인 목판을 지시하면서 '목판'이라는 말을 발설한다. 그는 그것을 이 단어의 '예시적 교육'이라고 말한다. 예시적 교육은 설명이 아니라, '이것은 무엇이다'라는 반복교육, 즉 훈련의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이런 훈련방법은 단어와 사물간에 대응한다는 관계를 확립시키고, 아동들이 어떤 단어들을 들었을 때 그 대상의 그림이 그 단어의 의미가 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언어관은 의사를 전달하는 체계 중 한 체계만을 기술하였을 뿐 모든 체계를 기술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비록 문장들이 이름의 집합처럼 보이고, 이름이 어떤 대상을 지시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단어의 의미가 대상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없다. 가령 '수'나, '그리고'나, '아니다'와 같은 말들이 지시하는 어떤 직접적인 대상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와 같은 단어들이 예시적 정의에 의해 이해된다고 할 수는 없다. 적어도 그 단어들을 이해할 수 있으려면 무엇의 이름만을 안다고 해서 가능한 것이 아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우리가 어떤 사물의 이름을 물을 수 있으려면 무엇인가를 이미 알고 (혹은 알 수) 있어야 한다"고 한다. 무엇인가를 미리 알고 있지 않으면 예시적 교육은 불가능하다. 적어도 예시적 교육이 언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려면 단어의 전반적인 역할이 분명하게 밝혀졌을 때 가능한 것이다. 언어에 대한 훈련이 전혀 되지 않는 생소한 상태에서는 어떤 사물의 이름도 물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예시적 교육이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나에게 색채어를 설명하려는 의도를 내가 안다면, '그것이 세피아이다'라는 예시적 정의가 그 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예시적 정의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이러한 진단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즉 '의미'는 그 말에 대응하는 사물을 뜻한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N.N씨가 죽었다'고 했을 때, 우리는 'N.N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죽었다'고 말하는가? 아니면 'N.N씨의 의미가 죽었다'고 말하는가? 우리는 분명히 'N.N씨의 의미가 죽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가 언어의 의미를 그것이 지시하는 대상이라고만 생각하는 것은 언어의 혼란에 빠져 있다는 징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비트겐슈타인의 '의미'가 단순히 그것이 지시하는 대상이 아니라고 했을 때, 우리가 언어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으려면, '그 밖의 어떤 것'(everything else)을 알아야 한다. 예컨대 누가 '망치'라고 말했다고 해 보자. 여기서는 '망치'라는 말이 그것의 표상을 떠오르게 하기 위해 사용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어떤 실제적인 목적, 즉 그것을 건네 달라는 목적으로 사용된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이 상황에서 어떤 사람이 '망치'라는 이름만 알았다고 한다면, 그 상황 속에서 진행되고 있는 언어놀이를 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언어놀이를 할 수 있으려면 언어가 어떤 실용적인 목적을 위해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가를 알아야 한다. 우리는 비트겐슈타인이 '언어놀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끌어들인 것을 이와 같은 시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비트겐슈타인에 있어서 언어놀이는 "언어와 그것에 얽혀있는 행위들로 구성된 총체"이다. 우리는 언어놀이에 대한 이러한 정의 속에서 언어는 그것이 사용되는 맥락 속에서만 생명력을 가질 수 있다는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관을 볼 수 있다. 







2. 언어놀이의 다양성 




언어의 의미가 인간 활동 속에서의 언어 사용에 달려있다는 비트겐슈타인의 생각은 언어의 다양성으로 나아간다. 논의의 전개를 위해서 다음과 같은 물음을 던져 보자. '과연 얼마나 많은 종류의 문장들이 있을까?' 이런 물음에 대해서 비트겐슈타인은 수없이 많은 종류의 문장들이 있다고 말한다. 문장 중에는 대상을 기술하지 않으면서도 각기 다른 기능을 하고 있는 문장들이 수없이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은 '기호', '단어', '문장' 등의 다양성을 조명하려고 언어를 '놀이'와 '도구'로 비유한다. 놀이에는 장기놀이, 공놀이, 카드놀이 등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놀이가 있다. 그리고 공놀이라 하더라도 놀이 방식에 따라 축구, 배구, 야구 등……여러 가지가 있다. 마찬가지로 이런 놀이의 다양성은 연장상자 안에 있는 망치, 드라이버, 톱, 나사, 못, 자 등 여러 가지 도구들이 들어 있다. 그런데 '기호', '단어', '문장' 등은 연장상자 안에 들어있는 도구들처럼 다양할 뿐만 아니라, 망치의 역할과 톱의 역할만큼 차이가 난다. 실제적인 사용에서 살펴보면, 언어는 망치가 못의 위치를 수정하거나 톱이 판자의 모양을 수정하는 것처럼 그 기능은 다양한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다양한 언어놀이의 예들을 다음과 같이 들고 있다. 




명령을 하고 명령에 복종하는 언어. 대상의 모양을 기술하거나 크기를 재는 언어. ……번역의 언어. 물음, 감사, 저주, 인사, 기도 등의 언어. 




이 예들은 언어가 하나의 본질적인 기능을 가지고 하나의 목적을 수행하는 도구가 아니라 다양한 목적을 위해서 사용되는 것임을 보여준다. 다양한 종류의 언어놀이가 존재하고, 그 언어놀이들은 명령하고 묻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도구가 그 기능과 용도에 의해 이해되듯 이 언어 역시 인간의 삶 속에서 수행하고 있는 기능과 용도에 있어서 이해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다양성은 한번 주어진 그대로 확정되거나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새로운 유형의 언어들이나 새로운 언어놀이들이 생겨나고 어떤 것은 없어지며 망각된다"고 하다. 




언어놀이의 다양성은 영원히 고정되어 잇는 것이 아니다. 언어놀이는 항상 새로 생겨나기도 하며 쓰여지지 않는 언어놀이는 사라지기도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언어는 하나의 고대도시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좁은 거리들과 광장들, 옛날 집들과 새 집들, 여러 시대를 거치면서 증축된 집들, 또한 똑바르고 규칙적인 거리와 통일된 형태의 집들로 둘러싸인 도시와 같다." 그리고 다음에 언급될 것이나 언어놀이에는 공통된 본질은 없고 중복되고 겹치는 '가족 유사성'만 있을 뿐이다. 따라서 언어놀이의 종류가 다양한 만큼 그들 간의 한계도 분명하게 구분되는 것이 아니고 서로 중복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처럼 언어놀이들이 다양한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들이 다양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3. 가족유사성 




앞에서 우리는 언어놀이의 다양성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비트겐슈타인은 이들 다양한 언어놀이의 공통된 본질에 대해서는 어디에도 언급하고 있지 않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모든 놀이에 공통된 어떤 것이 있어야만 그것들을 놀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는 "공통된 것이 있어야만 하고 만일 그렇지 않으면 그것들을 놀이들이라고 할 수 없다'고 말하지 말고 모든 것에 공통된 것이 있는지 우선 살펴 보라"고 한다. 우리가 그것들을 실제로 살펴보면 어떤 공통적인 것을 볼 수는 없고, 그것들 속에서 복잡하게 서로 다른 방식으로 관련되어 있는 유사성만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위해 비트겐슈타인은 역시 놀이 비유를 든다. 장기놀이, 바둑놀이, 구기놀이가 있다고 가정해 보자. 이들 모두에 공통되는 어떤 공통점이 있다고 할 수 있는가? 장기놀이의 여러 가지 관계들을 관찰하고 바둑놀이로 넘어가 보면 장기놀이와 공통점도 찾아볼 수 있지만 장기놀이가 가지고 있지 않은 많은 특징도 발견될 수 있다. 다시 구기놀이로 넘어가 보면 몇 개의 공통점은 남아 있지만 바둑놀이가 가지고 있는 더 많은 특징들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수많은 놀이들을 계속적으로 비교해 본다면 이것들의 공통점은 사라지고 "유사성이 부분적으로 겹치고 교차되는 그물의 조직, 즉 어떤 때는 전면적으로 유사하고 어떤 때는 상세한 점까지도 유사한 조직을 보게 된다." 이것은 한 가족의 구성원간의 닮음과 같다. 한 어린아이는 아버지의 코의 모양, 눈빛, 머리 색깔을 그대로 닮았다. 그러나 다른 아이는 코의 모양은 닮았으나 눈빛, 머리 색깔은 완전히 다르다. 또 다른 아이는 이 모든 특성들은 닮지 않고 걸음걸이와 기질만 물려받았다. 따라서 가족 구성원들 속에는 어떤 공통된 특성은 발견될 수 없고 '겹치고' '교차되는' 유사성만 볼 수 있다. 




이러한 생각을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에도 적용한다. "우리가 언어라고 부르는 모든 것에 공통된 어떤 것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수없이 상이한 방식으로 서로 관련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그것들을 모두 '언어'라고 부르는 것은 이 관계 혹은 관계들 때문이다." 언어에는 단 하나의 공통된 본질은 없으며, 단지 다양한 방식으로 서로 얽혀있는 관계들만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관계를 비트겐슈타인은 가족 유사성(Family-resemblance)이라 한다. 




그런데 모든 놀이들에 공통된 본질은 없고 가족 유사성만 있다면 '놀이'라는 단어의 의미설명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이 의문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대답은 다음의 인용문에서 나타난다. "어떻게 우리는 누군가에게 놀이가 무엇인지를 설명해야 할 것인가? 우리는 그에게 놀이들을 기술하고 '이것과 또 이와 유사한 것들이 놀이라고 불리어진다'고 언급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놀이라 불리는 것에 어떤 공통된 것은 없다 할지라도 다양한 종류의 놀이들의 예를 통해서 우리는 '놀이'란 단어의 의미를 설명할 수 있다. 또 그러한 예들을 통한 설명에 의해서 자기가 소속되어 있는 사회에서 그 단어가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알게 된다. 이처럼 예를 통한 의미설명이 가능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동일한 삶의 형식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삶의 형식이 일치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의미설명은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4. 언어의 규칙성 




언어를 놀이와 비교할 때 가장 두드러진 것은 언어와 놀이가 모두 규칙에 의해 지배되는 활동이라는 점이다. 비록 놀이들이 다양하지만 그렇다고 규칙이 없이 아무렇게나 진행되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장기는 규칙에 따라 진행되는 놀이이다. 언어도 장기와 다르지 않다. 그러나 여기서 비트겐슈타인은 규칙에 대한 규정적인 정의를 내리는 것이 아니라, '규칙을 따르는 것'(following a rule)이 무엇인지를 분석함으로써 언어의 특징을 밝히고 있다.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규칙은 그 무엇보다도 공적(public)인 것이다. 우리가 규칙을 따른다고 할 때, 그것을 단지 한 사람만이 행할 수 있고 그의 생애에 있어서 꼭 한 번만 행해진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어떤 기호에 특정한 방식으로 숙달되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단 한 번만 규칙을 따른다고 해도 이미 규칙에 따르는 관습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런데 언어놀이를 할 때 어떤 규칙적인 행위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것을 언어라고 할 수 있을까? 비트겐슈타인은 그것을 언어라고 할 수 없다고 한다. 예를 들어 어떤 낯선 부족의 언어와 그들의 행위들 사이에 어떤 규칙성도 발견할 수 없다고 해 보자. 만일 "그들이 말한 것, 즉 그들이 낸 음성들과 그들의 행위들 사이에 아무런 규칙적인 관계가 없다면, 우리는 그들의 언어적 행동을 조금도 이해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것이 규칙성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언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이와 같이 규칙성이 없는 언어를 사적 언어(Private Language)로 규정짓는다. 사적언어는 규칙성이 없어 다른 사람이 이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나 자신에게서도 규칙성이 없는 언어로서는 언어놀이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사적언어는 언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언어놀이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규칙뿐만 아니라, 규칙에 따르는 행위가 전제된다는 것은 언어와 삶의 형식이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럼, 장을 달리하여 먼저 비트겐슈타인에 있어서 삶의 형식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그것이 언어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관계를 고찰해 보기로 하겠다. 







Ⅲ. 삶의 형식 







비트겐슈타인에 있어서 언어는 삶의 형식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언어는 그것이 쓰여지고 있는 사회의 삶의 형식을 반영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여러 방식으로 나타난다. 언어는 구체적인 사회적 행위로서 단순히 세계를 그리는 것이라기보다는 세계 속에서 인간들 사이의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사용된다. 그러므로 언어는 인간적, 사회적 맥락과 분리되어질 수 없다. 이 장에서는 삶의 형식이 언어가 작동하기 위한 전제조건임을 먼저 살펴보고, 삶의 형식의 두 가지 국면을 밝히면서 언어와 삶의 형식과의 관계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1. 정의와 판단에 있어서의 일치 




비트겐슈타인의 다음 언급을 고려해 보자. "언어가 의사소통의 수단일 수 있으려면, 정의(Definition)의 일치 뿐 아니라, (아마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판단에 있어서의 일치(agreement in judgement)가 요구된다." 가령 '붉다'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바를 알기 위해서는 그 말의 정의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며, 그 정의가 일치해야만 의사소통의 수단으로서 사용될 수 있다 '붉다'에 대한 정의가 다르다고 한다면 그들은 그 단어로서 의미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에 정의의 일치가 요구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정의의 일치 뿐 아니라 그 말에 대한 판단에 있어서도 일치가 요구된다고 비트겐슈타인은 주장하고 있다. 




여기서 '판단에 있어서의 일치'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명현 교수는 '붉다'라는 단어가 사용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반응에 있어서도 일치해야 한다고 하여 판단의 일치를 반응의 일치와 같은 것으로 본다. 즉 어떤 사물의 색에 대해서 그것을 '붉다'고 반응하는 데 있어서 우리가 일치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붉다'라는 단어는 의사소통의 수단으로서 사용될 수 없다. 혹은 우리는 고통이나 슬픔에 대한 단어로써 서로 의사소통을 할 수도 있다. 따라서 '판단에 있어서의 일치'는 단어적용방식의 일치, 궁극적으로는 어떤 것에 반응하고 그것을 바라보는 방식에 있어서의 일치를 말한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판단의 일치가 있어야만 언어는 의사소통의 수단으로서 사용될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탐구』 242절에서 언어가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사용되기 위해서는 언어 사용자들간의 정의와 판단의 일치가 요구된다고 하였는데, 여기서 다시, 언어가 사용되기 위해서는 인간들 사이의 일치가 요구되며, 그 일치는 바로 삶의 형식에 있어서의 일치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비트겐슈타인이 정의와 판단에 있어서의 일치와 삶의 형식에 있어서의 일치를 같은 것으로 보았음을 의미한다. 즉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동일한 삶의 형식을 공유하고 있음을 의미하며, 또 이 언어로서 의사소통할 수 있기 위해서는 정의와 판단에 있어서의 일치가 요구됨으로 삶의 형식에 일치를 한다면 정의와 판단에 있어서도 일치한다. 말하자면 정의와 판단에 일치한다는 것은 언어사용방식에 일치한다는 것이고, 언어사용방식에 일치한다는 것은 동일한 삶의 형식을 지니고 있음을 의미한다. 







2. 삶의 형식의 두 가지 국면 




위에서 논자는 비트겐슈타인에 있어서 삶의 형식이 언어가 작동하기 위한 전제조건임을 살펴보았다. 삶의 형식에 대한 해석들은 여러 학자들에 의해 행해져 왔다. 삶의 형식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석이 나올 수 있는 소지는, 비트겐슈타인 자신도 삶의 형식에 관하여 『탐구』에서 다섯 군데(『탐구』, 19, 23, 241, 654, 174)에서밖에 언급하지 않을 뿐 아니라, 거기서조차도 그 개념에 관한 충분한 설명을 우리가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Ⅲ장 1절에서 논자는 언어사용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정의와 판단에 있어서의 일치가 있어야 함을 보였다. 그리고 정의와 판단에 있어서 일치한다는 것은 동일한 삶의 형식을 지니고 있음을 보였다. 즉 인간들 사이에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는 사실은 인간들 사이에 삶의 형식이 동일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삶의 형식은 인간의 원초적인 특성, 즉 생물학적 공통특성에 토대를 두고 있는 인간의 판단양식이나 반응양식을 말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말할 것도 없이 인간은 하나의 생물학적 종에 속하므로 동일한 생물학적 공통특성을 공유하고 있다. 이 공통특성은 인간을 하나의 생물학적 종으로 분류하는 근거이기 문이다. 인간의 희, 노, 애, 락이나 희망, 타인의 고통에 대해 동정하며, 아픈 곳을 치료해 주는 것과 같은 인간의 행위들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행위들이다. 이러한 행위들을 우리는 본능에 의한 행위라고 보고 이다. 이것은 학습을 통해서 배운 행위들이라기보다는 인간의 "자연사(natural history)"에 속하는 행위들이다. 개체보존과 종족보존에 필요한 여러 가지 행위들, 먹고 마시고, 걷고 자고, 사랑하고 그리고 웃고 울며, 희망하는 일들이 그런 것들이다. 언어는 이런 행위 위에 기초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삶의 형식 속에는 인간의 자연사에 속하는 원시적 행위들이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삶의 형식은 판단양식이나 반응양식, 그리고 인간의 생물학적 특성에 뿌리를 두고 있는 원시적인 행동양식 등을 지시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판단의 양식과 반응의 양식은 사람들의 삶의 시간과 공간의 차이에 따라 동일하지 않다는 것이 하나의 사회적 사실로서 드러나 있다. 이러한 사회적 사실에 근거하여 이제까지의 대부분의 비트겐슈타인의 연구가들은 비트겐슈타인의 삶의 형식은 그런 문화적 특성을 지닌 것으로 파악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문화공동체에 따라 특수적이고 상이한 것으로 파악되었다. 여기서 이명현 교수는 삶의 형식에 대한 두 가지 다른 입장 앞에 서 있음을 발견하고서 두 가지 다른 입장을 원초적 삶의 형식(primordial form of life)과 문화적 삶의 형식(cultural form of life)이라고 명명했다. 




비트겐슈타인의 삶의 형식을 전적으로 문화적인 것으로만 해석한 종래의 해석이 옳지 않다는 것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삶의 형식은 인간의 원시적인 행동양식과 같은 자연사를 포함하고 있으며, 이런 자연사에 속하는 행동은 문화적 소산이라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간이 생물학적 종에 속하기 때문에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인 것, 따라서 문화의 차이에 무관한 것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삶의 형식의 문화적인 국면을 보여주는 가장 두드러진 사례를 우리는 비트겐슈타인의 오리-토끼의 형상에 관한 논의에서 발견할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오리-토끼 형상을 하나의 형태 교체(Gestalt Shift)의 한 예로 논의하고 있는데, 그는 그 예로서 어떤 현상을 지각하며 그것을 조직하여 보는 방식이 어떤 성질의 것인가를 보여주려고 한다. 동일한 형상이 우리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토끼의 머리로도, 오리의 머리로도 보인다. 토끼-오리형상을 보는 것은 그 형상이 망막에 나타난 사진을 보는 것이 아니다. 즉 눈이 보는 것이 아니라 눈을 통해서 사람이 보는 것이다. 보는 것은 조직화를 포함한다. 그것은 시야에 놓은 하나의 사물이 아니라 시야에 놓여 있는 사물들이 보여지는 방식이다. 실제가 어떤 것인가는 보는 방식을 통해 드러난다. 삶의 문화적 형식은 일정한 문화적 틀 안에서 창안된 사물을 보고 판단하는 방식이다. 이런 삶의 문화적 형식은 여러 가지 사회적 훈련에 의해서 이렇게 혹은 저렇게 달리 형성될 수 있다. 오리-토끼의 형상을 보는 방식의 변화가능성을 시사해주기 때문에 그것은 삶의 형식의 문화적인 국면을 지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상에서 삶의 형식의 개념이 문화적인 국면을 가지고 있음과 동시에 원초적인 국면을 가지고 있음을 보았다. 그러면 이 두 국면 사이의 관계는 어떠한가? 앞에서 논자는 삶의 형식의 일치가 의사전달 수단으로서 언어가 작동하기 위한 전제조건이라고 했다. 그러하면 서로 다른 삶의 형식, 즉 삶의 문화적 형식이 다른 사람들 사이의 의사소통의 가능성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대답될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에 있어서 '삶의 형식의 일치가 언어사용 가능성의 전제조건이다'라고 했을 때의 '삶의 형식'이라는 것은, 1차적으로 원초적 삶의 형식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삶의 형식의 일치'라는 말을 '동일한 삶의 형식을 가지고 있음'으로 번역하여, 이것을 삶의 원초적 형식에 적용하면, 이런 경우가 된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생물학적으로 동일하게 구성되었기 때문에, 사물을 보고 판단하며, 사태에 반응하는 장치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부여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는 보고 판단하며, 사태에 반응하는 동일한 장치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인간의 생물학적인 조건이 인간들 사이의 의사전달 수단으로서의 언어가 작동할 수 있게 만든다. 여기서 논의를 더 전개해 보면, '언어가 작동할 수 있는'이라는 말은 언어 사용자의 측면에서 보면, '언어를 습득할 수 있는'이라는 말로 해석될 수 있다. 우리는 외국어를 배울 수가 있고, 또한 의사소통의 수단으로서 그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문화적 형식이 상이한 나라들의 문화를 알 수가 있는 것이다. 







3. 주어진 것으로서의 삶의 형식 




Ⅱ장 4절에서 살펴보았듯이,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규칙은 그 무엇보다도 공적인 것이며, 따라서 한 사람 이상이 규칙을 따르는 것을 배우는 것이 가능하여야 한다. 그리고 두 사람이 놀이를 하려고 한다면, 규칙을 따르는 방법에 있어서 동일하지 않으면 안된다. 규칙을 따를 때 우리는 그 규칙을 어떤 논리적인 이유에 의해서 따르는 것이 아니다. "규칙을 따를 때 나는 선택하지 않는다. 나는 맹목적으로 규칙을 따른다." 




언어에 있어서도 놀이에서 규칙을 따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은 사회적 훈련을 통해서 언어의 규칙을 습득하며 또한 그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언어교육은 '예시적 교육'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이것은 여러 예들을 선생이 지시하면서 학생들의 주의를 그 대상에 집중시키는 동시에 하나의 단어를 말하도록 훈련시키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훈련에 의해서 그 언어공통체의 실행을 습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이러한 언어의 습득이 가능한 것은 무엇에 의해서인가? 고양이는 사냥을 배울 수 없으나, 개는 배울 수 있다는 것은 자연의 사실이다. 인간이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도록 훈련될 수 있는 것은 인간본성의 사실이다. 길 안내판을 따라서 우리가 행위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따라서 행위하는 원시적인 반응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원시적 반응은 동일한 생물학적 종으로서의 인간의 자연사에 속하는 행위양식이다. 우리 인간들은 보편적으로 주어져 있는 원시적인 반응양식이 있기 때문에 어떤 훈련에 일정하게 반응하고, 그리하여 언어적 행위에 참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원시적 반응을 포함하는 인간의 자연사는 언어적 시행의 근거가 된다. 그리고 이러한 원시적 반응을 포함한 인간의 생물학적 조건에 기초를 둔 자연사의 제약 아래서 구성된 인간의 보편적 행위양식을 비트겐슈타인은 삶의 형식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삶의 형식은 언어의 존재근거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언어의 최종적인 존재근거인 삶의 형식에 대해서 우리는 존재이유를 물을 수 있을까? 이 물음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답은 이것이다.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 주어진 것은 삶의 형식이다." 인간의 자연사에 속하는 행위양식은 인간종의 생물학적 특성에 뿌리 두고 있는 것이므로 그것은 우리가 인간인 이상 어찌할 수 없는 것으로서 그냥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주어진 것으로서의 삶의 형식은 궁극적인 주어짐이요, 의식적으로 초월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절대적인 한계라 할 수 있다. 




우리는 동일한 삶의 형식을 가지고 있음으로 해서 하나의 언어적 실행에 참여할 수 있으며, 동시에 그러한 언어적 실행은 삶의 형식에 제약받고 있다. 그러므로 삶의 형식은 언어의 궁극적인 근거일 뿐 아니라 또한 언어의 한계이기도 하다. 







Ⅳ. 결 론 




지금까지 논자는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사상에 있어서 《탐구》를 중심으로 그의 언어관과 삶의 형식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그것들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첫째, 《논고》에서는 세계와 언어, 이 두 가지 사이의 구조적 동일성을 의미그림이론을 통해서 주장한 것에 반하여, 《탐구》에서는 언어와 인간, 좀 더 정확히는 언어와 삶의 형식 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통해서 언어의 의미가 인간의 활동 속에서의 언어의 사용에 달려 있다고 주장한다. 




둘째, 언어놀이의 다양성은 영원히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새로 생겨나기도 하며, 쓰여지지 않는 언어놀이는 사라지기도 한다. 왜냐하면 다양한 종류의 언어놀이들은 삶의 형식의 부분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족 유사성 개념을 통한 의미설명과 규칙을 따르는 행위의 예들을 통한 훈련이 가능하게 되는 것은 삶의 형식에 있어서의 일치에 의해서이다. 




셋째, 언어가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사용되기 위해서는 정의의 일치와 판단의 일치가 요구된다. 그리고 언어가 사용되기 위해서는 인간들 사이의 일치가 있어야 하며, 이것은 삶의 형식에 있어서의 일치이다. 따라서 삶의 형식에 있어서의 일치는 정의와 판단에 있어서의 일치와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말하자면 인간은 그들의 삶의 형식에 있어서 일치하지 않으면 언어로서 서로 의사소통을 할 수 없다. 따라서 삶의 형식은 언어사용 가능성의 전제조건이다. 




넷째, 삶의 형식에는 원초적 삶의 형식과 문화적 삶의 형식의 두 국면이 있으며, 원초적 삶의 형식이 인간의 생물학적 종의 특성에 바탕을 둔 것으로 모든 인간에 공통된 것이라면, 문화적 삶의 형식은 특정 시대와 사회에 속하는 것이다. 인간의 생물학적 특성에 바탕을 둔 원초적 삶의 형식은 인간의 자연사라고 하는 공통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공통성에 의해서 인간은 언어를 배울 수 있다. 이러한 원초적 삶의 형식은 언어습득 가능성의 전제조건이다. 




다섯째, 언어교육은 훈련에 의하여 그 언어공동체의 행위를 습득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동일한 원시적 반응이 있기 때문에 어떤 훈련에 일정하게 반응하고 따라서 언어적 행위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원시적 반응을 포함하는 인간의 자연사는 언어의 존재근거이다. 따라서 삶의 형식은 언어의 궁극적인 근거이며, 또한 그것은 더 이상 설명될 수 없고,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이라는 점에서 언어의 한계이기도 하다. 즉 우리는 동일한 삶의 형식을 가지고 있음으로 해서 하나의 언어적 행위에 참여할 수 있고, 동시에 그러한 언어적 행위는 삶의 형식에 제약받고 있다. 이러한 삶의 형식은 주어진 것으로서 그냥 받아들여야만 한다. 







결국 비트겐슈타인이 삶의 형식이라는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의도한 것은 언어라고 하는 것이 인간의 삶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하는 데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를 삶의 형식과 관련시킴으로써 언어가 우리의 삶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드러낸다. 사실 언어가 없이는 인간의 삶은 성립하지 않는다. 이러한 의미에서 언어행위는 인간 삶의 기본구조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동일한 삶의 형식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비로소 하나의 언어놀이에 참여할 수 있다. 말하자면 언어놀이가 성립하고 행해질 수 있는 것은 삶의 형식에 의해서이다. 이것은 언어가 인간의 삶을 벗어나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의미할 뿐 아니라, 언어와 세계의 이원론을 벗어나 그것들이 원래 나누어질 수 없는 것이라는 주장을 함축한다. 언어놀이는 언어와 그것이 얽혀있는 행위들로 구성된 것이며, 언어에 얽혀있는 행위들은 우리의 삶 속에서 이루어지므로 이 언어놀이에서 언어와 세계는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참 고 문 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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