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월 통합 월베-독서후기] <홀로코스트와 근대성>  
상병 김예찬   2009-04-21 16:11:31, 조회: 133, 추천:0 


※ 동아대 김학이 박사의 논문인 <홀로코스트와 근대성>에 대한 독서 후기입니다. 김소망, 김태완, 박원익님의 '근대성'에 관한 글들과 이어서 읽어주시면 되겠습니다.

1.

홀로코스트에 대한 연구는 2차 세계 대전 이후 많은 학자들이 천착해온 주제입니다. 특히 나치의 홀로코스트가 우리가 말하는 '근대성'의 어두운 이면을 보여준다는 논리는 아도르노를 비롯한 유수의 지식인들이 지적해온 바이기도 합니다. 근대성에 대한 본격적인 성찰 역시 '홀로코스트'라는 압도적인 사건 이후에야 본격적으로 진행되어왔다고 할 수 있겠지요.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저는 (김소망님의 문장을 빌리자면) "근대성의 함정에 빠져들기 가장 쉬운 국문학자, 국사학자부터 시작해 종교학자, 그리고 이러한 연구와는 별 상관이 없어보이는 보건학 전공자까지" 과연 근대란 무엇인가 되묻고 있는 시점에서 (이제는 조금 식상하게 느껴질지도 모를) 홀로코스트에 대한 반성적 연구는 '근대성'에 대한 해답을 제시해줄 수 있는 실마리를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이 논문은 아도르노/호르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 지그문트 바우만의 '정원사 국가'라는 개념을 통한 홀로코스트 분석, 그리고 괴츠 알리의 홀로코스트에 대한 실증적인 분석을 통하여 1) 서구 근대성의 본질을 어떻게 규정해야 하는가? 2) 왜 하필이면 유대인이 학살되었는가? 3) 홀로코스트가 촉발되고 전개된 논리는 무엇이었는가? 에 대해 묻고 있습니다. 이는 각기 철학 - 사회학 - 역사학으로 분류되는 성과들을 종합한 間학문적 연구라는 점에서 또 의미가 있겠지요.

2.

2차 대전의 와중에 쓰여진 아도르노/호르크하이머(이후 아도르노)의 <계몽의 변증법>은 책의 서문에 나와있듯이 "왜 인류는 진정한 인간적인 상태에 들어서기보다 새로운 종류의 야만에 빠졌는가?"에 대한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도르노는 서구의 근대성 - '계몽이라는 탈을 쓴 새로운 야만' - 을 비판하면서 '오디세우스 신화, 사드, 20세기 문화 산업, 반유대주의'라는 언뜻 보아서는 연관짓기 힘든 주제들을 배치해 놓습니다. 아도르노의 이러한 서술은 홀로코스트에 대한 피상적인 인과 관계의 나열에 그치기 쉬운 목적론적 역사서술을 탈피하여, 홀로코스트가 일어나고, 그 이후에도 여전히 작동하고 있는 근대성의 어둠을 부각시키기 위한 방법입니다. 

아도르노는 먼저 오디세우스의 모험담을 통해 계몽적 주체가 자기 동일성을 확보하는 계기를 보여줍니다. 오디세우스(주체)는 신과 사물이 결합되어 있는 자연을 인간의 책략으로 무력화시킴으로써, 질적인 공간이었던 자연에서 신(주술)적인 힘을 떼어내고 자연을 단순히 양적인 대상으로 전환시킵니다. 그러므로 오디세우스를 통해서 우리는 질적인 특수자들의 유기적 집체인 자연을 동질적이고 양적인, 합리적이고 도구적인 대상으로 전환시키는 '도구적 이성'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연과 인간의 유기적 관계가 절단되는 이러한 과정에서 인간 내외의 자연은 모두 소외되어버립니다. 이는 사이렌의 유혹을 이겨내기 위해 온 몸을 밧줄로 묶고 인간 내면의 욕구와 욕망을 철저하게 지배함으로써 내적 자연의 가치를 희생시켜버리는 오디세우스의 모습에서 적나라하게 나타납니다. 인간의 내적 자연이 도구적 이성에 포착되는 과정에서 자기 희생의 내면화를 통해 삶과 욕망의 억압이 나타나는데, 이는 '자아 상실의 충동'으로 연결되기도 합니다. 이렇게 성립된 '주체'는 자기 유지 외에는 어떤 목적도 발견할 수 없는 주체이며, 따라서 허무주의적인 주체입니다. 

이러한 허무주의적 주체를 채우는 것은 오직 형식적 이성에 따라 체계화되어 배열된 외부의 사실들 뿐입니다. 형식화된 주관적 이성은 현실에서 '통일성'과 '체계'의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이러한 메커니즘에 포착된 인간과 세계는 결국 영원히 되풀이 되는 맹목적 자연과 동일한 모습이기 때문에 '계몽의 기획'과 그 결과인 '근대성'은 결국 폭력과 공포의 '신화'로 회귀하게 되는 것입니다. (참고 글 : 하늘지킴이 웹진 '공감' 코너 영철아 놀자 - '계몽과 이성! 법정에 세우다!')

그렇다면 아도르노가 말하는 '자연'은 과연 무엇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도르노의 자연은 인간 정신에 의하여 인식되고 정의되며 매개되지만 그 매개 속에서 해소되지 않고 남는 것, 다시 말해서 계몽적 주체가 작동시키는 동일화 작업에서 "훼손당한 채 생산되는 비동일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개념인 아도르노의 '자연'은, 쉽게 말해서 인간에 의하여 포섭되고 변화되고 억압 받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인간의 손으로 떨어지지는 않는 (그 자신인 인간을 포함한)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참고 영상 : 미야자키 하야오,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 <모노노케 히메>, <천공의 성 라퓨타>)

계몽적 주체는 사회적인 지배 관계를 정신적/감성적으로 체화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지배의 맹목성과 계급성에 대해 '자연으로서의 원한'을 쌓게 됩니다. 지배 질서는 이러한 원한을 '미메시스mimesis'의 메커니즘을 통해 '소독'합니다. 미메시스는 발터 벤야민의 개념으로, 원시적 인간이 자연을 대하는 방식으로 상정 된 것입니다. 이는 주체가 객체에게 동화되지만 주체의 고유성은 간직하는, 그러므로 자연의 공포를 극복하되 자연을 지배하지 않는 주객의 소통 방식이자 그에 대한 갈망입니다. 쉽게 예를 들어서, 들소를 사냥하기 전에 들소 가죽을 몸에 덮어쓰고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들소의 힘을 받아들인다고 믿는 원시인들의 주술적 행위를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문명화 된 사회에서 들소 사냥을 나갈 때는 거친 들소를 사냥하기 위해 한 방에 들소를 죽일 수 있는 총과, 들소 보다 빨리 달릴 수 있는 자동차를 타고 나가겠지요. 더 이상 들소 춤을 추는 주술적 의식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됩니다. 문명화 과정이란 인간 주체가 신화와 계몽의 과정을 거치면서 이처럼 '미메시스'를 억압하는 대신, '개념'에 의하여 자연을 지배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미메시스는 문명화 과정 속에서도 완전히 억압되지는 않습니다. 다만 '망각'을 강요 받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망각된 미메시스는 근대적 인간들에게 본능적인 거부감을 불러 일으키게 됩니다. 우리가 똥이나 광대, 집시, '자유롭게 게으른 자', 광인, 거지들을 보았을 때 반사적으로 거부감을 느끼고 경직됨을 느끼게 되는 것은, 그것이 망각되고 억압된 자연을 무의식 중에 상기 시키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가 자본화/문명화된 새로운 생산관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잊어야만 했던 과거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자연에 대한 열망의 또 다른 이름인 거부감을 재차 억압하기 위해 지배 질서는 미메시스를 왜곡된 형태로 이용합니다. 자연을 '패러디'하는 것이 바로 그 것입니다. 극우파들에게 흔히 등장하는 해골, 복면, 북소리, 그리고 지도자의 어릿광대 같은 연출은 바로 "미메시스의 미메시스"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KKK단이나 네오나치들을 떠올려 볼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러한 행위에 가담함으로써, 자신의 증오와 갈망을 동시에 해소시켜 버리고, 그렇게 지배의 한 부분이 되어 자기 유지에 성공합니다. 자연의 귀환은 이런 식으로 다시 한번 진압되고 맹목적 지배는 더 공고해집니다. 파시즘은 이런 관점에서 '이성과 자연의 악마적 종합명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도르노는 결론적으로 나치즘은 지배에 억압되어있던 자연의 반란이며, 이 때 타겟이 되는 유대인은 문명의 대표인 동시에 자연의 잔여물입니다. 나치즘의 인종주의는 스스로 억압되어 있던 문명인들이 자연으로 돌아가고픈 열망을 왜곡되어 표출하는 것, 즉 자연에 대한 '억압된 미메시스의 병적 표현'입니다. 나치 대중의 반유대주의가 사회적 '절망의 폭발'인 것은, 그들이 평등과 행복에 대한 문명의 약속이 기만임을 깨달았으나 그 깨달음을 재차 억압해야 했기에 터져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증오와 폭발은 특유의 목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문명화의 덫에 걸린 스스로의 자기 파괴이기 때문에 그와 동반되는 폭력 역시 허무주의적인 총체적 파괴 이상의 것은 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필이면 반'유대'주의자였을까요? 그 것은 유대인이 지닌 이중적인 성격 때문이었습니다. 유대인은 전통적으로 지배인의 중개인이었으며, '샤일록'처럼 '자본'주의자였습니다. 상인이며 은행가였던 유대인들은 소시민과 노동자 중심의 대중 운동에서 분노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유대인을 '문명의 대표'라 했을 때는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어야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유대인은 자연의 잔여물 이기도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미 문명 사회에서는 형식적인 의미 밖에 남지 않은 전통적인 종교와 삶의 질서를 보존하고 있었고, 가혹한 억압의 역사 속에서도 유럽인들과 동화되지 않고 자율적인 사회를 꾸리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유대인은 나치 대중들이 자기유지를 위하여 억압해야했던 자연을 상기시키는 존재였습니다. 유대인은 매혹의 대상이자 공포의 대상이었던 것이죠. 유대인들에게 씌워졌던 음모자, 나태한 사람, 성적 난행의 이미지는 문명인들의 시각에서 바라본 자연의 어두운 면모의 투사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3. 

아도르노의 이와 같은 분석에 홀로코스트의 국가-사회 구조적 측면을 파고 들어간 사람이 바로 지그문트 바우만입니다. 이미 <쓰레기가 되는 삶> 등의 소개로 한국에서도 친숙해진 사회학자인 바우만은 그의 주저 <근대성과 홀로코스트>를 통하여 홀로코스트를 정치, 관료제, 사회 및 도덕의 삼각형 논리구조 속에서 관찰합니다. 나치의 정치 권력이 유토피아적 비전과 기획을 위하여 관료제/테크노크라트라는 수단을 동원했고, 그 비전과 기획이 도덕으로부터 이탈해 버렸을 때 이를 견제할 사회 역시 마비되었기 때문에 홀로코스트라는 결과가 빚어졌다는 것이 바우만의 논리입니다. 그리고 이는 전적으로 '근대'의 문제점으로 이야기됩니다. 전근대 사회는 다양한 '차이들의 집합'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유대인은 다양한 차이 중의 하나이되 다만 특별한 차이에 불과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 거주 지역, 유대인 복식, 유대인들에게 한한 법적 장치, 직업 등의 장치로 유대인들을 구분 지어놓았기 때문에 중세인들의 반유대주의는 단지 나와 다른 이에 대한 경멸과 무시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차이들의 집합'이었던 중세 사회와 달리 근대 사회는 '동일성의 사회'입니다. 그리고 근대화란 곧 동질화의 과정이기도 합니다. 차이의 사회에서는 스스로의 정체성 설정이 용이하지만, 동질화의 사회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건사하기 위하여 인위적으로 타자를 설정해야합니다. 간단하게 이야기해볼까요? 전근대 사회에서는 자신이 위치한 환경에 따라 교육 수준도 다르고, 경제 수준도 다르기 때문에 생활 양식이나 사고 방식이 큰 차이를 보이게 됩니다. 그러나 근대 사회에서는 누구나 일정 정도의 교육을 받고, 경제력을 갖추고 있으며, 동일한 사고 틀 아래서 살아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근대인들은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해 강하게 의식하게 되며, 따라서 나와 다른 타자를 설정하여 스스로의 정체성을 만들어내려고 합니다. 이때 타자로 설정된 것이 바로 '유대인'들이 된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생겨난 반유대주의는 '완전한 사회'라는 국가적 구호 아래서 근대적 인종주의로 변화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것을 뒷받침해준 것이 근대 과학, 특히 우생학의 발전이었습니다. 그리고 반유대주의적 정책의 수립자, 결정자, 집행자의 역할을 하는 것이 관료들입니다. 이러한 삼각형의 논리구조 안에서 국가는 '정원사 국가'가 됩니다. 유대인과 같은 잡초들을 솎아내어 완벽한 정원을 만들려는 정원사의 역할을 맡게 되는 것이죠. 

바우만의 분석에서 주목할 것은 '관료'들의 역할입니다. 바우만에게 있어서 나치 관료들은 지도부의 명령을 수행하는 단순한 실행자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관료들은 '목표와 집행 사이에 뻗쳐있는 공간'을 자발적으로 메우는 존재입니다. 독일 유대인들에 대한 정의, 기록, 분리 작업 등에서 시작하여, 독일 유대인들을 해외나 점령지로 이주시키는 작업, 그 다음으로 유대인들의 쓰레기통으로 삼은 폴란드와 소련 점령지에서 반유대 정책을 펼치는 것 까지, 심지어 전쟁이 패배로 확정지어질 시점에서도 나치 독일이 자원을 유대인 학살에 계속해서 투입시킨 것은 나치즘의 광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지속적으로 다음 과제를 찾아 나서는 관료제적 관성에서 나온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유대인 희생자들 자신도 자신들에 대한 학살 작전의 보조 역할을 맡았다는 점입니다. 먼저, 나치는 유대인의 학살 과정을 유대인의 총괄 및 게토 집중, 게토의 관리, 학살 수용소로의 이송, 학살 수용소의 운영 및 인근에 위치한 공장 부역과 학살 등으로 쪼개놓았습니다. 동시에 나치는 그 모든 단계에서 유대인을 행정, 노동 인력과 기타 유대인으로 위계적으로 나누어놓습니다. 이러한 관료제적 분업체제에 편입되자 희생자 유대인들이 바라보는 사회적 시공간은 축소되었으며, 이러한 좁은 시야 속에서 유대인들은 자기 유지를 위해 자신의 부역을 '합리화'하여 시행하게 됩니다. 이러한 합리화는 자신에게 주어진 과제를 '완수'해야한다는 질서 의식의 발로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희생자들 마음속까지 관철되는 관료제적 합리성의 존재는 '근대성'의 성격이라고 할 수 있는 '합리성'에 내재된 파괴적 속성을 드러내게 합니다.

바우만은 근대성이란 질서에의 강박인 동시에 '풍토적 미완성, 아직 존재하지 않은 상태에의 지향'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근대성의 본질은 '아직 되지 않은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아직 존재하지 않은 상태'를 향해 달려가는 근대성은 매사에 '질서'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그 질서는 '다양한 질서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정해져 있는 질서와, 그 질서를 제외한 모든 것들'로 나누어지게 됩니다. 이러한 발상은 질서에 대한 강박을 낳고, 정해져 있는 질서가 아닌 다른 것들을 '무질서'로 규정하고 자신들의 질서로 편입시키려고 강제하게 됩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근대성이란 '미완성'의 것입니다. 아무리 무질서를 질서의 공간으로 편입시켜도 그 미완성은 채워지지 않습니다. 결국 근대성은 끊임없이 자신에게 내재된 무질서를 발견하고, 발명하고, 다시 질서의 공간으로 편입시키는 순환 구조를 띠게 됩니다. 달리 말해서, 근대의 질서는 필연적으로 무질서를 내포하게 되는 것입니다.

관료제에 의하여 학살의 대상이 끊임없이 증가하고, 또 학살의 분업화와 질서화가 이루어졌던 것, 그리고 그 학살의 분업화가 학살의 대상인 유대인 마저 질서를 향해 편입시켰던 것은 이러한 질서-무질서의 순환 구조를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우만은 이와 같은 홀로코스트 분석을 통해 근대적 질서의 불가능성을 읽어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4.

그렇다면 유대인들을 학살한 '목표'는 무엇일까요? 단순히 유대인을 절멸시킨다는 인종주의적 목표의 달성? 유대인들의 금융 자본을 몰수하기 위한 방편? 역사학자인 괴츠 알리는 홀로코스트에 관여했던 경제학자, 인구학자, 통계학자, 지역개발 전문가들에 대한 연구를 통해 독일의 전문가-기술인 집단이 홀로코스트라는 방법으로 사회경제적 합리성의 성취를 시도하려 했다는 결론을 냅니다. 

1920~1930년대에 학위를 받고도 대공황 때문에 자신의 분야에서 일자리를 가지지 못했던 독일의 젊은 전문가 집단은 나치의 집권과 2차 대전의 발발을 통해 자신들의 사회경제적, 제국주의적 이상을 실천할 공간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한 사회의 경제적 복지는 인구 규모와 밀접한 관계 속에 있다는 생각을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경제자원(N)=인구(V)·생활수준(L)이라는 공식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공식에 입각하여, 한정된 경제자원을 가지고 사회의 생활 수준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인구를 낮춰야한다는 발상이 생겨납니다.(참고 문헌 - 미셸 푸코 '치안, 영토, 인구') 독일에게 점령된 오스트리아, 폴란드에서는 새로운 영토를 통치하기 위하여 젊은 전문가 집단을 관료/고문으로 받아들이게 되고, 이들에 의하여 오스트리아, 폴란드에서 '경제적 합리화'가 실시됩니다. 그 골자는 유대인들을 약탈하고, 추방한 후 생산 시설들을 모두 통합하여 기업 규모를 대형화하는 것이었습니다.

2차 대전이 발발하고, 독일의 승리와 함께 점령지가 대폭 늘어나자, 새로 독일 영토로 편입된 동유럽의 발전 방안에 대한 분석과 연구가 난무하게 됩니다. 대부분의 보고서는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동유럽의 저성장은 농업 인구의 과잉 때문이며, 이는 도시의 상공업을 장악한 유대인들이 농촌 인구의 도시 진출을 막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대인을 현지에서 추방하고, 빈 공간을 현지인들로 채우면서 나머지 잉여 인구 역시 N=V·L의 공식에 따라 제거한다."
이는 독일인 재외 거주자 3천만명의 귀환 작업과도 연결된 것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유대인들을 싹 쓸어버리고 그 자리를 독일인들로 채우자는 계획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재미있게도 동유럽 식민지의 행정부와 나치 독일의 수뇌부들은 동유럽 영토에 대해서 전혀 다른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치 독일 수뇌부들이 독일의 유대인들을 추방할 '쓰레기장'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에 반하여, 식민지 행정부는 식민지를 나치 제국의 영원한 번영을 위한 전초기지로 발전시키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세간의 상식과 달리, 오히려 전문가들로 구성된 식민 관료들이 준비한 상세한 동유럽 발전 계획에 의하여 히틀러를 비롯한 나치 수뇌부들이 제압되어버리고 맙니다. 신비주의적이고 추상적인 반유대주의적 발상이, 일견 합리적으로 보이는 통치 계획에 설복되어버린 것입니다.

유대인 학살은 이러한 동유럽 발전 계획의 주된 내용인 '인구재편성'의 일부이자, 가장 실천하기 용이한 '1 단계'였습니다. 알리의 연구에 따르자면, 우리의 상식처럼 홀로코스트는 히틀러, 히믈러, 괴링 등의 나치 이데올로그들에 의해 시행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추상적인 '반유대주의'를 실행가능의 지평에 올려놓은 '전문가 관료 집단'이야 말로 홀로코스트의 주연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전문가 관료 집단을 지배했던 것은 근대성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 '합리적 기획'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5.

아도르노와 바우만, 그리고 알리의 연구들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홀로코스트는 서구 근대성의 표현, 혹은 그 이면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아도르노와 바우만에게 그 근대성은 '도구적 이성'으로 나타납니다. 그들에게 도구적 이성이란 인간 개개인의 '차이'를 제거하는, 동일성의 인식이자 실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추상적 개인으로 원자화된 근대 사회에서 개개인은 민족, 국가, 민중 등의 이름으로 호명되고, 이렇게 이데올로기에 의하여 주체로 거듭나면서 '상상의 공동체'를 구성하게 됩니다. 그리고 개인의 자유와 평등이 고스란히 구현될 수 없는 현실의 공동체에서 그 균열을 메우기 위하여 유대인이라는 희생양이 필요했고, 그 때문에 홀로코스트가 일어났다는 것이 아도르노와 바우만의 입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바우만은 이에 인종주의적 '정원사 국가'라는 개념을 도입시켰습니다. 그리고 알리는 동유럽의 인종재배치를 통한 정치경제적 발전계획에 주목합니다. 제국의 이상을 향한 전문가 집단의 '합리적 기획'은, 그러나 바우만이 질서 이념의 미완성을 이야기했던 것처럼 실현 불가능한 목표로 남게 됩니다.

한마디로 홀로코스트는, 서구 근대성에 내재된 질서를 향한 근본주의를 현실에서 실천하려던 노력의 궁극적 귀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구 근대성 일반이 공유하던 이러한 노력은, 나치즘을 통하여 폭발하게 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았을 때 근대성은 '미완성을 향한 자기파괴적 노력'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 책마을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9-06-10 09:14) 

48.9.2.115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6-10
09:35:08 

 

병장 김형태 
54.4.11.88   일단 프린트 할게요. 2009-04-21
16:23:37
 

 

상병 박원익 
54.1.19.46   영화 <발키리>를 보면서, 히틀러가 읊조린 멋진 대사가 생각납니다. '바그너의 음악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국가사회주의의 심오한 이념을 이해할 수 없다.' 근대성이란 어찌보면 신비한 '바그너의 음악'과 '국가사회주의'라는 합리주의적 이데올로기 사이의 '단락'에 있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이것이 나치즘과 공산주의라는 파국으로 귀결될지, 아니면 역으로 이것이 해방적인 조건이 될지에 대한 질문이 <근대성 문제>의 진정한 '내기'가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2009-04-25
15:52:58
 

 

일병 김소망 
18.35.1.127   해방성과 억압성을 동시에 갖고 있는 근대성의 양면성 만큼이나 근대성 연구의 필요성을 더해주는 것이 더 있을까요? 

[re] [독서후기] <홀로코스트와 근대성>  
상병 김태완   2009-04-25 18:25:20, 조회: 41, 추천:0 

근대성 추구는 인간이 신이되기 위한 몸부림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모든 인간은 전지전능하기를 원합니다. 자유와 평화를 원하고 이러한 목표달성을 위해 질서를 추구합니다.
현대사회의 끊임없는 연구와 발전은 전지전능을 위한 몸부림입니다.
계속적인 이념의 수정은 자유와 평화 수립에 필요한 질서를 얻기 위한 몸부림입니다.
현대의 자유민주주의는 아직 많은 결함을 안고 있지만 근래 이념중 가장 근대성에 가까운 이념으로 볼 수 있습니다.

홀로코스트는 독일의 근대성만을 위한 이념으로부터 야기된 행위였습니다.
이미 독일만을 위한다는 전제가 틀렸으니 그 행위의 결과도 틀리게 나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홀로코스트는 한 국가의 특정 개인이나 계급집단이 아닌 독일 전체 즉, 하나의 공동체가 영토전쟁같은 원론적인 욕망을 이루기 위한 행위가 아닌 그럴싸한  이기적 이념의 정당화 수립을 의도하여 벌여졌습니다. 이것이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유지하기 위해 균열을 없애고자 한 일이었든, 전초기지 형성을 위한 인구 재편성을 위한 것이었든 다른 집단의 목숨을 마음대로 조종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근대성에 내재된 질서로의 몰입은 좋았지만 그것이 전 세계로 향하지 못하고 독일에만 국한되어 돌이킬 수 없는 죄악을 저지른 것입니다. 

세계적,인도적 시각으로의 근대성 확립은 매우 어렵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유민주주의는 거의 혁명적인 이념이었습니다. 현재 미국이나 몇개국이 이념에 위반되는 일을 저지르고 있으나, 사람 목숨을 담보로 하는 일들이 발생하지 않아야 된다는 인식이 정립되었으므로 이 이념은 어느정도 근대성에 근접했다고 보여집니다. 수요와 공급으로 인한 격차로 인한 차별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직은 공급만이 있는 사회로는 발전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회는 혼자 움직이는 무연료 로봇같은 것이 나와야 가능할 것 같습니다.

아직 더 지켜 보아야 겠지만 자유민주주의가 들어서고 그 이념아래 국가들에서는 근 몇년간 홀로코스트와 같은 일은 터지지 않았습니다.
테러나 분쟁은 자유민주주의에 위배된 곳에서 행하는 일입니다.
공황으로 인한 실업문제 같은 폐해도 일어나긴 하지만 위에서 말했다시피 공급만의 사회를 이루기 위해서는 아직 수요와 공급 사회에 의한 병폐는 어쩔 수 없습니다. 그것이 사람 목숨까지 강제로 뺐지는 않으니까요. 또한 이러한 일들은 차후 바로잡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죽음에 의한 종결보다 훨씬 희망적입니다.
근대성은 이제는 현대 발전정도에 따라 국가에 국한된 것이 아닌 세계적으로 잘 연결만 시키면 더이상 '미완성을 향한 자기파괴적 노력'이 아닌 '현실에 맞는 완성을 향한 노력'으로 보아도 무방하겠습니다.

* 책마을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9-06-10 09:14) 
 
 
[re] 그러나 문제의 근본은 근대성이 내재한 이성 그 자체  
병장 문병준  [Homepage]  2009-05-02 13:58:49, 조회: 25, 추천:0 

김태완님은 상당한 근대성의 옹호자이신것 같습니다. 저도 근대적인 방식만이 플러스가 되는 생산물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기에 근대적인 인간의 발전 방식을 어느 정도 필수적인 것으로 생각하지만 부정적인 부분들이 상당하다고 봅니다.

홀로코스트는 ‘독일의 근대성’ 만을 위한 이념으로부터 야기된 행위라고 하셨는데, 지금 이 논문에서 논의의 주가 되고 있는 아도르노에 의하면 홀로코스트가 발생한 이유는 근대의 계몽적 합리성에 들어맞지 않는 차이들을 근대성이 견디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근대적 합리성을 강화하면 강화할 수록 그 주체는 강해지기 마련 아닙니까? 독일 사회는 그 당시의 대외적인 또 대내적인 조건들 때문에 최고의 힘을 원했고 그래서 지구의 다른 곳에서는 차마 나아가지 않은 곳까지, 즉 모든 계몽적 합리성에 어긋나는 차이들을 제거하고 이것이 김예찬님의 글 마지막에서 ‘근본주의’ 라는 단어로 잘 표현된 것 같습니다. (다만 왜 ‘미완성’을 향한다고 했는지는 잘 이해가 안되는군요.) 근대적 이성의 기준에 맞지 않거나 이해될 수 없는 것들을 인정하느니 차라리 그것을 제거해버리는 바로 그 근본주의입니다.

역시 아도르노에 의하면 이런 계몽적 합리성은 근대 이전에서도 지속적으로 발달되어 왔고 지금까지도 전 세계적으로 지배적 현상이라고 보여집니다. 김태완님은 독일에서의 야만적 사태가 독일의 이념적 특수성 때문에 벌어졌던 독일의 주체적 행동이었다고 보시는 것 같은데 제 생각에는 오히려 몇 가지 상황 조건이 맞아떨어지면 근대적 합리성이 언제나 야기할 수 있는 그런 잠재적 위험성이 보여졌던 예인 것 같습니다. 즉 홀로코스트와 같은 테러는 자유민주주의와 같은 근대성에 위배된 곳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 전근대적인 비합리성에 의한 행동이 아니라 합리성의 극단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에게 익숙한 테러의 형태가 미국과의 전쟁을 벌이고 있는 상대적 약소국들의 방식이라는 점에서 약간 혼동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공포를 통해 지배하는 방식이라는 의미에서의 테러라면 오히려 공포를 줄 수 있는 힘을 지닌 강자들에게 더 쉬운 일이겠지요. 그래서 동일성에게 어긋나는 여러 가지 차이들을 차마 존재할 수 없도록 테러가 나타납니다. 

공급만이 있는 상태라고 말씀하시는데 공급이 무한대여서 경쟁에 의한 분배 과정이 필요 없는 그런 이상적인 상태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과연 그러한 상태에서는 필사적으로 이성을 사용해 목적을 추구해야할 긴박함이 없을 테니 자유롭고 평화로운 상태가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겠지만, 외부의 적의 출현이나 자연, 인공적 재해 등 어떤 조건이 나타날 때마다 그 위협은 다시 나타날 겁니다. 집단을 하나에 목적에 따라 굴려야 하는 도구적 이성, 이 합리성은 사용될때마다 그 기능을 하지 못하는 어떤 것들을 걸러내어 희생시킬 테니까요. 대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이라는 테제가 계몽적 근대성에 의한 폭력을 가장 잘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폭력의 극한은 상대의 목숨을 빼앗는 것일 테지만 목숨은 붙여준다고 그럭저럭 다 봐줄 수는 없을 겁니다. 그리고 몇 가지 우연적 조건만 충족된다면 또 목숨을 빼앗을 수 있을 겁니다.

아도르노도 마찬가지로 이야기하지만 그래서 결국 이러한 위험의 잠재를 막을 수 있는 것은 근대적 이성을 극도로 강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초월한 새로운 차원의 이성/혹은 감성 이 필요할겁니다. 차이의 존재도 구도로 한꺼번에 묶어 이해하는 그런 포용력 넓은 이성!
* 책마을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9-06-10 09:14) 

26.112.19.11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6-10
09:35:38 

 

상병 김예찬 
48.9.2.115   ‘미완성’을 향한다는 것은 '질서와 완성'이라는 근대성의 목적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라는 뜻에서 쓴 것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re] 근대성이 내재한 이성을 넘어서는 이성과 감성?  
상병 김태완   2009-05-03 01:40:30, 조회: 18, 추천:0 

근대적 이성을 극도로 강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초월한 새로운 차원의 이성 혹은 감성이 필요하다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그러한 이성이나 감성이 무엇인지 알려주겠습니까? 

제 생각에 이는 종교적인 차원에서 접근으로 밖에 해결이 안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과연 현대사회에서 이러한 새로운 차원의 것을 사회적 이데올로기로 채택할 수 있을까요? 그러한 이성 혹은 감성 아래서 서로 사랑하고 배려하기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하기힘든 이곳은 바로 수요와 공급의 사회입니다. 1차적 욕구인 의식주가 해결 안된 이상 고차원적인 테제를 들이밀며 받아들이라 하면 받아들여 지겠습니까. 만약 받아들여 졌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토대로 한 사회는 과연 얼마나 혼란없이 평화로이 유지될 수 있을까요. 오히려 그러한 노력은 혼란을 가중시키며 입으로만 떠들지 말라는 시민들의 반감만 살 것입니다.

외부의 적의 출현이라 하셨는데 공급만이 있는 사회가 올 때쯤에는 외계인이 습격할 거란 말씀이십니까?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제겐 그저 과대우려로 보여집니다. 자연적, 인공적 재해는 지금도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지금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 미래가 되어도 적절히 대처되지 못할까요. 병준님 말씀은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예외적인 상황이 있을 수 있죠. 전 그런 예외적인 사항들도 감안하여 말한거였고 꼭 그렇게 된다고 말씀드리지도 않았습니다. 또한 다시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전 그러한 상황을 '만약'을 전제로 했습니다. 필수적으로 그러한 사회가 이루어 질것이란 얘기를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리고 아도르노를 자꾸 언급하셨는데 아도르노의 말이 절대적인 말입니까? 아도르노가 예기한 것은 절대적 진리가 아닙니다. 그저 논리적이고 타당하게 여겨지는 가설입니다. 왠지 님의 글은 추종적으로 느껴지는군요. 또한 추종되어지는 인물은 아도르노보다 바우만에 더 근접한 것 같군요.

마지막으로 가장 집고 넘어가고 싶은 문제가 남았군요. 전 독일의 이념적 특수성과 근대적 합리성의 야기한 잠재적 위험성이 보여준 예가 무엇이 다른지 모르겠습니다. 독일인들이 근대성에 의한 질서 추구를 위해 나치라는 이념적 특수성을 도구로써 홀로코스트를 저지른 겁니다. 님이 말한 '근대적 합리성의 야기한 잠재적 위험성'은 목적이고 '이념적 특수성'은 수단입니다. 이 둘을 상반관계로 올려놓으신 이유를 모르겠군요. 제가 독일의 민족성에 의해 이러한 일이 발생했다고 얘기했다면 이해했을 수 있었겠지만 그렇지 않기에 이해를 할 수 없습니다. 

테러가 자유민주주의가 위배된 곳에서 나타난다고 하여 자유민주주의 채택 나라에서는 테러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되게 말씀드린 것은 잘못이었습니다. 미국에서도 테러는 일어나지요. 그러나 대규모의 테러를 저지르는 곳은 대부분 자유민주주의를 채택하지 않거나 국가적으로 대체로 국민들이 믿는 종교를 거부하여 강대 세력들에 의해 동일성에 어긋난다 판단돼 억압받는 곳에서 벌입니다. 동일성에 어긋나는 여러 차이들을 존재할 수 없도록 테러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동일성에 어긋나는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억압하고 갈취하여 차이가 있음을 부정적으로 생각토록 유도하는 타국의 보이지 않는 횡포에 분노하여 테러를 저지르는 것입니다. 오히려 현재 빈번히 일어나는 테러들은 근대성에 입각한 시각에서 보면 독일에게 당하기만 했던 유대인들의 저항에 가깝습니다.
* 책마을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9-06-10 09: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