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드윅과 욕망의 문제 
 병장 김광철 06-20 07:01 | HIT : 195 



< 헤드윅과 욕망의 문제>





 이것은 먼 옛날 어둡고 추운 밤에
 전능한 신의 손에 의해 일어난 슬픈 이야기
 우리가 어떻게 외로운 두 발 동물이 되었는지
 사랑의 시작에 관한 이야기
 그것이 바로 사랑의 시작

<Origin of Love> - 헤드윅(Hedwig) OST 



 각 주체는 두 성을 가지고 있으나 
 이들은 서로 칸막이로 막힌 듯 구분되어 있다. 
 이들은 '또 다른 한 주체의 이 성 혹은 저 성'과 소통한다.
 이와 같은 것이 부분 충동들의 법칙이다.
 아무것도 결여된 것은 없고, 결여로 정의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 앙띠 오이디푸스> - 질 들뢰즈




 어느 허름한 술집, 조악한 색색의 조명이 눈을 어지럽히고, 시큰둥한 몇몇의 취객들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그 곳. 그 초라한 밤무대에 올라서서 누군가 노래하고 있다. 섬뜩할 정도의 짙은 화장, 지나치게 요란스레 부풀려진 금발의 긴머리, 아슬한 미니스커트와 하이힐은 노래하는 가수의 좀 굵은 듯한 목소리, 노출 심한 옷 사이로 드러난 건장한 체격과 묘한 부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 서글픈 부조화와 역설의 한가운데서 노래하는 그 혹은 그녀. 우리의 논의는 이제 막 시작되는 헤드윅의 노래가락을 따라가 보려한다.



1. 그 혹은 그녀 - 헤드윅(Hedwig)   



 존 카메론 미첼의 영화 헤드윅(Hedwig And The Angry Inch)은 괴상한 록가수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주인공 헤드윅은 불완전한 성전환 수술로 인하여 여자도 남자도 아닌 불완전한 성(性)의 영역에 머무르고 있는 자이다. 그가 노래 속에서 자주 자신을 베를린 장벽에 비유하는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일 것이다. 서베를린과 동베를린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둘을 구분해주는 제3의 영역이 바로 '베를린 장벽'인 것처럼, 헤드윅 또한 견고하게 구획지어진 남성과 여성이란 두 성(性)에서 모두 배제된 채 두 영역 사이에 위치한다. 요컨대 그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남성과 여성을 구분하는 장벽과도 같다. 때문에 헤드윅의 말처럼 그가 "없으면 사람들은 헷갈려한다." 사람들은 그들의 영역에서 빗겨나 있는 헤드윅의 모습을 '비정상인'으로 타자화 할 때만, 자신들은 '정상적인' 성(性)의 영역에 안착해 있다는 사실에 안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장벽이 되어 견뎌야 했던 헤드윅의 삶은 얼마나 비참했던 것이었던가. 그의 밴드명이기도 한 '앵그리 인치(The Angry Inch)'는 그가 불완전한 성전환 수술로 인해 6인치에서 5인치가 잘려나가고 남은 성기의 '성난(Angry)' 1인치를 의미한다. 악성종양처럼 매달려 있는 그 '분노의 1인치'를 짙고 화려한 여장(女裝)으로 감춘 채, 헤드윅은 배신한 과거의 연인인 록스타 토미(Tommy Gnosis)을 쫓으며 밤무대에서 노래하고 달떠오르는 애증에 시달린다. 그런데 헤드윅의 노래 중 유난히도 우리의 관심을 잡아끄는 것이 하나있다. 바로 <Origin of Love>란 곡이다. 그는 '사랑의 기원(Origin of Love)'을 어떤 방식으로 노래하고 있는가? 그의 노랫가락에 잠시만 귀기울여 보면 우리는 거기서 서양철학의 가장 오래된 에로스에 대한 사상을, 즉 플라톤의 속삭임을 엿들을 수 있으리라.      



2. 향연 - 아리스토파네스



 눈치빠른 이들은 이미 고개를 끄덕였을 수도 있을 것이다. 헤드윅의 OST <Origin of Love>의 가사는 바로 플라톤이 에로스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대화편인 <향연>에서 등장하는 아리스토파네스의 연설을 차용한 것이다. 아리스토파네스의 의견을 살펴보기에 앞서 <Origin of Love>의 가사 몇 소절을 읊어보는 것이 이해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될 것 같다. 

 지구가 평평하던 때
 불구름이 떠다니고
 하늘까지 솟은 산과
 더 높은 산이 있고
 사람들은 나무통처럼 지구를 굴러다니며
 두 쌍의 팔
 두 쌍의 다리와
 큰 머리 양쪽에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어
 양 쪽 세상도 다 볼 수 있었고
 읽으면서 말할 수 있었고
 사랑이란 단어조차 몰랐어
 그때는 사랑의 기원조차 시작되기 전이었지. 
 ……
 신들은 우리의 힘과 반항을 두려워하기 시작했어
 ……
 그 때 제우스가 말했지
" 내 가위 같은 번개로 그들을 혼내주리"
 고래의 다리를 자르고 공룡을 도마뱀으로 만들었듯이"
 그리곤 번갯불을 꺼내
 크게 웃으며 말했지
" 가운데를 자르리, 딱 반으로."
 곧 먹구름이 모여 거대한 불이 되었고
 천둥번개가 하늘에서 내리쳤지
 번뜩이는 칼날처럼
 육체의 한 가운데를 갈라버렸어

 어떤 인도 신은
 배 둘레를 꿰매 배꼽을 만들어 우리 죄를 상기시켰고
 오리시스와 나일의 신들은
 거대한 폭풍우로 허리케인을 만들어. 
 바람, 비, 홍수, 파도의 조수로 우리를 쓸어 내리고 흩어지게 했어
 만약 또 다시 반항하면 또 다시 반을 갈라버린다고 했지
 그럼 한 발로 뛰고
 한 눈으로 볼 거라며.
 ……
 전에 당신을 봤을 때
 우리는 갈라지고 난 바로 뒤였어
 당신은 나를 보고 나는 당신을 보고 있었지
 너무나 낯익은 얼굴이었지만
 얼굴에 피가 묻어 알아 볼 수 없었어
 하지만 난 이것만은 알 수가 있었어
 당신 영혼의 고통은 내 고통과 같다는 것을
 그것은 심장까지 가르는 고통
 그것은 바로 사랑이라는 고통
 그래서 우린 서로를 감싸주고
 다시 하나가 되기 위해 사랑을 나누고, 또 나누네

 다소 길게 인용한 노랫가락들을 디딤돌 삼아 우리는 <향연>의 아리스토파네스가 주장한 핵심적인 논점에 다다를 수 있을 것이다. 즉 태초에 인간은 원래 네 팔과 네 다리, 두 개의 머리를 가지고 있었으나, 신에 의해 반으로 갈라졌다. 따라서 갈라진 반쪽은 각각 다른 반쪽을 그리워하고 다시 한 몸이 되려한다. 이 반쪽에 대한 그리움, 이것이 바로 에로스 즉 사랑이라고 아리스토파네스는 주장하며, 이것이 헤드윅이 노래하는 바로 '사랑의 기원(Origin of Love)' 인 것이다. (주1)  여기서  우리는 서양철학사 전체를 관류하며 흘러내린, 하나의 오래된 욕망론의 형태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 그것은 다름아닌 욕망은 그 시작부터 늘 불만 혹은 결핍으로 정의된다는 점이다. (주2)  원래는 한 몸이었던 것을  둘로 갈라버렸기 때문에, 다시 말해 원초적 동일성을 상실했기 때문에 그 결여의 빈 구멍을 메우려는 노력, 즉 상실한 원초적 고향으로서의 동일성을 되찾으려는 것이 욕망의 운동으로 정의된다. 

 한편 상실한 낙원이라는 원초적 동일성은 그것이 상실된 한에서 우리가 언젠가 회복해야할 최종목적지로서 수립된다. 출발점으로서의 상실된 전체성과 마땅히 발생하여야할 최종적 전체성은 동전의 양면인 것이다.  이처럼 상실한 이상적인 것이 있고, 그것을 회복해야할 최종목적지로 삼는다는 점에서 이 욕망이론은 목적론적인 형태를 지닌다. 

 그런데 혹자는 다음과 같은 의문을 품을 수 있으리라. (주3) 도대체 이러한 캐캐묵은 플라톤의 이론을 들추어내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은 단지 기원전 시대의 철학자가 지어낸 허무맹랑한 신화적 설명이 아닌가? 이러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 아마도 우리는 우리에게 익숙한 한 학자의 이름을 떠올려야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는 누구인가? 2400여 년전, 플라톤이 에로스의 과수원에 뿌려놓은 씨앗을 오늘날 탐스러운 욕망론의 과실로서 추수하는 자. 그는 바로 다름아닌 자크 라캉이 아니던가!


3. 결여로서의 욕망론 - 라캉


 라캉은 플라톤의 기획을 어떤 식으로 계승하고 있는가? 우선 라캉이 제시하는 <알>의 은유로부터 시작해보자. 라캉에 의하면 자궁 속에서 빠져나온 갓난아이는 껍데기 밖으로 흘러나온 알과 같다. 이것이 바로 오믈렛(l'Hpmmelette) (주4) 혹은 라멜르(lamelle)라고 불리는 것이다. 이 알의 메타포는 바로 우리가 앞서 살펴본 아리스토파네스의 주장에 기반을 둔다. 즉 아리스토파네스가 묘사했던 남녀양성의 공모양의 생명체를 라캉은 자궁 속에 들어있는 태아로 해석하는 것이다. 아기의 탄생은 알껍데기가 깨지고 이 태아가 알 밖으로 흘러나오는 것과 같다. 이때 아기는 아리스토파네스가 말한 공모양의 생명체가 둘로 갈라지듯, 자궁에서 갈라져서 떨어져 나온 듯이 느낀다. 물론 여기서 갓난아기가 상실하는 것은 어머니라는 인격적 인물이 아니라, 해부학적 부속물인 태반이다. (주5)  

 그런데 라캉에게서 이 알의 깨짐은 아리스토파네스의 경우와는 달리 성의 분화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 깨진 알, 즉 라멜르는 아직 성이 분화하기 이전 상태의 생명체인 것이다. 이 단계에서 라멜르를 지배하는 것은 순수한 생존본능이다. 그것이 생존방식으로 선택한 것은 모든 윈시적인 생명체가 그렇듯 바로 아메바처럼 '분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기의 신체는 유기체를 이루지 않는 여러 개로 분열된 아메바들이 제각기 기어다니는 하나의 대지와도 같다. 이 라멜르의 분열된 조각들이 기관(성감대)를 중심으로 고착된 것이 바로 '부분충동'들이다.(주6) 즉 순수한 생존본능에 지배되어 있는 라멜르가 성감대들에 자신을 고착시키는 순간이 바로 부분충동이 탄생하는 시점이다. 그런데 충동이 그 주위를 맴도는 대상 a(abjet petit a)는 어떻게 탄생하는 것일까? 그것의 기원에 대한 설명에는 분명 플라톤에게서 이어받은 결여의 신화가 개입하고 있다. 이미 말했듯 자궁 바깥으로 깨어져나온 오믈렛은 자신의 신체적 보완물을 상실했다는 느낌을 가지는데, 바로 이 대상 a가 이 잃어버린 신체의 대체물로서 자리잡는 것이다. 

 이렇게 라캉은 처음부터 아리스토파네스의 모델에 기반을 두고 자신의 오믈렛 메타포를 구성하면서 출발하고 있다. 즉 '상실된 근원적 전체성'에 대한 노스텔지어로서 리비도를 규정한다. 오믈렛의 세상 첫 경험이 바로 자기 신체부분(자궁/태반)의 상실이라는 결여이며 바로 이 결여 때문에 충동은 신체 부분의 등가물로 대상 a를 상대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결핍을 메우기 위한 목적론적 운동'이라는 플라톤의 에로스론의 기본구도는 상징계에서 작동하는 욕망의 운동을 기술할 때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라캉에 의하면 아버지의 이름으로 대표되는 시니피앙에 의해 주체는 상징계 속에서 오이디푸스화한 주체로 태어난다. 우리의 현실은 상징계로 질서지어져 있다. 즉 상징계적 분절을 통해서만 지각은 현실의 특성을 획득한다. 이 상징계 안에서 욕망을 움직이게 하는 원인은 무엇인가? 바로 이 욕망이 근본적인 목적으로 삼는 것은 바로 위에서 언급한 '대상 a'이다. 그러나 대상 a는 마치 칸트의 물자체가 현상계 안에 나타날 수 없는 것처럼, 상징계 안에서 어떤 적극적인 방식으로도 나타날 수 없다. 실재 혹은 대상 a는 오로지 부정적인 방식으로만 상징계 안에서 나타난다. 상징계 안에서는 대상 a가 자리를 차지할 시니피앙이 없기 때문이다. 

 욕망은 본성상 이 대상 a로부터 만족을 얻고자 하나, 숙명적으로 이 대상 a는 상징계 안에 결핍되어 있다. 따라서 욕망이 현실 속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고작해야 대상 a의 모방물이거나 대체물일 뿐이며, 따라서 욕망은 그 대체물을 소유하면 할수록 자신이 진짜 원하는 것의 결핍과 불만족에서 오는 갈증에 허덕이게 될 뿐이다. 이 갈증은 오로지 대상 a를 거머쥘 때에만 해소될 수 있는 것이므로, 욕망은 신기루처럼 잡히지 않는 대상 a에 대한 끝없는 갈증만을 지닌 채, 대상 a를 모방하고 있는 상징계의 한 시니피앙에서 다른 시니피앙으로 옮겨가는 덧없는 유랑을 계속 할 뿐이다. 

 따라서 상징적인 것만이 자리를 바꾸며 실제계는 언제나 자기 자리를 지킨다. 다시 말해 실재계는 고정되어 있으며, 이 실재계에 도달하려는 욕망의 끊임없는 방황에 따라, 대상 a의 결여를 채우기 위해 상징계의 대체물들만이 계속 자리바꿈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이처럼 욕망의 쉼 없는 방황을 일으키는 것이라는 점에서 대상 a는 욕망의 원인이다. 그리고 욕망은 대상 a를 향하여 정향지어져 있다는 점에서 욕망의 목적 또한 대상 a이며. 또 그것의 만족은 숙명적으로 얻어질 수 없다는 점에서 욕망의 본성은 근원적인 '불만'이다.    

 다시 말해 욕망은 언젠가 완전한 만족을 주었지만, 지금은 상실되어 사라진 전체적 대상(어머니의 육체)을 매우려고 대상 a를 추구한다. 즉 욕망의 대상으로서 대상 a는 '상실된 전체성'에 매개되어 있는 것이다. 위에서 지적했듯이 라캉은 어머니의 육체(전체)로부터 떨어져 나오는 기원적 상실의 사건, 즉 시초에 전체성이 자리잡는 사건을 아리스토파네스의 전형적인 목적론적 신화에 의존해서 해명한다. 

 그러나 단지 이러한 기원의 신화뿐만 아니라, 라캉이 기술하는 욕망의 구조 자체가 이미 플라톤의 결여를 채우기 위한 목적론적 운동을 그대로 본뜨고 있다. 욕망을 활동하게 하는 대상 a는 도달할 수 없는 전체성에 바로 그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 자체로서 매개되어 있으며 따라서 욕망은 늘 불만, 결핍으로 정의된다. 라캉의 결여로서의 욕망은 결국 '잃어버린 것의 획득' 이라는 플라톤의 상기론의 변주에 불과하며 따라서 목적론이라는 신화에 의존하고 있다. 즉 자기에게 결여되어 있는 선의 이데아를 향한 모든 존재자들의 운동과 똑같이, 결여되어 있는 대상 a를 향한 욕망의 운동은 목적론적 형태를 띄는 것이다. 

 들뢰즈는 <앙띠 오이디푸스>에서 이러한 결여로서의 욕망이론을 일종의 신학이라고 말한다. '결여'는 마치 '부정신학(否定神學)의 일자(一者)와 같다'라는 것이 들뢰즈의 주장이다. 부정신학에서 절대자는 어떤 개념적 도구를 통해서도 규정할 수 없다. 현상계 안에서의 어떤 적극적 규정도 절대자에 대해선 유효치 않다라는 '부정'의 형태 속에서만 절대자는 나타난다. 존재자가 현상계 안에서 만날 수 있는 감각적 대상들, 또는 이런저런 형태로 규정된 것들은 모두 절대자가 아니며, 바로 이 '아님'을 통해서만 절대자는 현현한다. 현상계 안의 모든 존재자들의 욕망이란 바로 이 절대적인 초월자를 향한 운동이라는 점에서 목적론적이며,  또 이것은 그 자신이 갇혀있는 현상계라는 본래적 한계 때문에 숙명적으로 충족 될 수 없는 욕망, 늘 결핍에 시달려야 하는 욕망일 수밖에 없다. 

 결여를 통해 정의된 라캉의 욕망개념도 부정신학적 초월의 운동과 매우 흡사하다. 부정신학에서의 절대자처럼 대상 a는 결코 대상 a가 '아닌' 시니피앙을 통해서만 부정적으로 출현한다. 대상 a를 거머쥐려는 욕망은 그 자신이 갇혀있는 상징계의 본성 때문에 계속 대체물들의 부정적 매개만을 반복하는 영원한 운동을 할 수밖에 없으며, 또 이 운동은 숨어있는 신이라고 해야할 대상 a에 의해 궁극적으로 인도를 받으므로 목적론적인 성격을 지닌다고 해야 할 것이다. 욕망에 대한 이러한 목적론적/부정신학적 해석이 플라톤부터 라캉, 레비나스에 이르는 서양철학을 지배하고 있다. (주7) (주8)  



4. 인격주의 비판



 그런데 이러한 플라톤 이래의 결여로서의 욕망론에 대해 결사적인 반대자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질 들뢰즈이다. 주지하였다시피 결여로서의 욕망론은 '상실한 전체성을 향한 목적론적 운동'으로 정의해 볼 수 있다. 즉 지금 내가 욕망하는 것은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이상적 전체성이 '아니다'라는 방식으로서 존립한다. 나의 욕망은 절대로 그 자체로 '긍정'되지 못하고 오로지 다다를 수 없는 전체성에 '부정적'으로 매개된 상태로서만 출현한다. 이러한 욕망론을 차이의 철학자 들뢰즈는 절대 용납할 수 없었으리라. (주9) 

 결여로서의 욕망론은 전반적으로 들뢰즈의 철학과 상충되며, 들뢰즈는 다양한 관점에서 비판을 가하고 있지만, 이 글에서는 영화 헤드윅과 관련된 논의로 한정하여 들뢰즈의 비판점과 그의 새로운 욕망론을 이해해 보도록 하자. 헤드윅이 고통받는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바로 그가 남성과 여성의 영역 어디에도 안착할 수 없는 자라는 사실이다. 굳건히 분할되어 구획 지어진 남/여의 지대 어디에서도 헤드윅은 머무르지 못하고 유랑할 뿐이다. 기실 이러한 딜레마는 헤드윅만이 아니라, 지금까지 모든 성적소수자들이 안고 가야할 고통이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조심스럽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볼 수 있으리라. 혹시 인격적 특성으로서 남성과 여성의 구분은 임의적인 허울이 아닐 것인가? 이러한 도발적 질문이 결여로서의 욕망론을 향해 던져졌을 때, 이 물음은 욕망론의 뿌리를 흔드는 강력한 파괴력을 가지게 된다. 왜냐하면 결여로서의 욕망이 탄생하는 사건은 바로 '성의 분화'와 동전의 양면을 이루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파네스에서 잃어버린 반쪽에 대한 영원한 결핍으로서의 에로스는 네 팔과 네 다리, 두 개의 머리를 가진 태초의 인간이 둘로 갈라지면서 발생한다. 그런데 그 갈라짐은 또한 성의 분화를 의미하기도 한다. <Origin of Love>의 가사에서 나타나듯이 분할되기 전의 태초의 인간은 "사랑이란 단어조차 몰랐"다. 즉 완벽한 전체성의 상태였던 그들은 성(性)(주10)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따라서 사랑할 필요조차 없었던 것이다. 반으로 갈라짐으로써만 그들은 각각 하나의 인격적 성을 가진 남성과 여성으로 정립되며, 이러한 성의 분화가 바로 사랑의 기원(Origin of Love)이 된다. 

 그런데 하나의 성을 부여받게 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그것은 남성 혹은 여성이라는 하나의 동일한 정체성을 부여받는다는 것. 즉 통일적인 하나의 인격적 주체로서 탄생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가? 이를 라캉과 함께 살펴보자. 이미 말했듯이 라캉이 기술하는 '깨진 알'로서의 아기인 라멜르는 아직 성이 분화되기 이전의 생명체이며 그러므로 아직 인격적인 주체로 서지 못한 상태이다. 이러한 라멜르의 상태를 라캉은 순수한 생명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아메바'에 비유한다. 

 그렇다면 라멜르가 하나의 성을 획득하고 인간적인 형태를 띄며 주체로 탄생하는 순간은 언제인가? 그 사건이 바로 '오이디푸스'이다. 프로이트가 소포클레스의 희극을 원용하며 주장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라캉은 상징계로 진입하여 욕망으로서의 주체가 탄생하는 사건으로 기술한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대표되는 시니피앙에 의해 라멜르는 오이디푸스화한 주체로서 탄생하며, 욕망은 근친상간 금지라는 법 속에서 비로소 인간적인 형태, 즉 부모의 아이라는 인물 형태를 갖추게 된다. 즉 욕망이 인간화하는 순간은 어린아이가 언어로 짜인 상징계 속에서 태어나는 순간이다. 대(大)타자(l'Autre)는 시니피앙의 질서라는 법의 체계로서, 아이의 욕망이 향해야 할 지점을 정해준다. 이렇게 시니피앙에 즉 대타자의 질서에 순응할 때 한 사회 체제 속에서 허락된 형태의 욕망이, 다시 말해 인간 주체가 출현한다. 그리고 시니피앙의 질서 속으로 들어섬으로써 실재계에 속하는 대상 a와 그것을 대상으로 삼는 충동은 철저하게 소외되어 버린다. 따라서 상징계는 대상 a가 소외되어 버린 빈자리만을 가지며, 빈자리의 형태로 나타나는 영원한 결핍이 바로 욕망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정리해보면 오이디푸스를 거쳐 상징계로 진입함으로써 비로소 남성 혹은 여성으로서의 인격적 성을 가진 주체가 탄생하며, 그와 동시에 영원한 결여로서의 욕망이 발생한다.  

 그러므로 헤드윅이 부르는 <Origin of Love>는 의미심장한 함의를 지닌다. 그가 노래하는 사랑의 기원은 바로 결여로서의 욕망이 어떻게 탄생했는지를 말하고 있으며, 이것은 곧 남성과 여성으로 굳건히 구분된 인격적 주체의 탄생을 의미한다. 그렇게 구획지어진 곳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헤드윅은 고생스런 방황을 해야했다. 그러므로 그는 이 노래를 통해 자신의 고통이 시작된 태초의 시원(始原)을, 소위 '비정상인'인 자신은 감히 꿈꾸어 볼 수조차 없었던 그러한 '사랑의 기원'을, 나아가 거기서 비롯된 자신의 기구한 운명을 서글프게 반추하고 있었던 것이다. 헤드윅이 노래의 도입부를 자신이 어렸을 때 당한 성적학대를 회상하며 시작하고 있는 것도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이리라. (주11)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헤드윅을 구원할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가능하려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욕망론의 모델이 필요하지 않을까? 새로운 욕망론의 관건은 이것이다. 어떻게 욕망을 비(非)오이푸스적으로 혹은 통일적 성(性)의 발생, 인격적 주체의 탄생과 전혀 관계없이 기술할 수 있겠는가? 새로운 욕망론은 욕망을 주체 개념의 여러 요소들(인격성, 성별)을 통해 이해하려는 인격주의적 해석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제 우리는 결여로서의 욕망론에 대항하는 들뢰즈의 새로운 욕망론을 검토하며 위의 물음들에 대한 답을 모색해볼 것이다.    



5. 부분충동 



 들뢰즈의 이론을 검토하기에 앞서 먼저 라캉의 충동개념을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왜냐하면 들뢰즈는 결여로서의 욕망론을 비판하면서 매우 역설적이게도 라캉의 충동개념에 많은 부분을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들뢰즈의 욕망론의 핵심 개념이라 할 수 있는 '욕망하는 기계'는 라캉의 충동개념과 매우 유사한 형태를 지니고 있다. 라캉이 제시하는 충동(pulsion)은 그의 저서에서 프로이트가 충동을 가리키는 용어인 Trieb의 번역어로서 사용되었으며, 결여를 메우기 위한 목적론적 운동인 욕망(d sir)과는 구별되는 독특한 함의를 지닌다. 때문에 들뢰즈의 욕망개념은 라캉의 욕망 개념과는 극단적으로 상반되지만, 충동개념과는 매우 친화적인 관계에 있다.  

 그러면 충동이란 무엇인가? 라캉의 충동개념은 프로이트의 그것과는 다른 특성을 지닌다. 일단 프로이트와 라캉에게서 충동은 공통적으로 어떤 항상적인 힘으로 작용한다. 그런데 라캉의 충동이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적충동들이란 결코 통일적인 하나를 이룰 수 없는 여러조각의 '부분' 충동들이라는 주장인데, 이러한 견해는 프로이트에게서는 찾아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충동들은 오로지 파편적인 부분들일 뿐 서로 통합되어 하나의 전체를 이루는 법이 없으며, 하나의 부분충동과 다른 부분 충동 사이에는 어떤 생성 관계도 없다. 이렇게 개개의 충동이 하나의 전체로 통합된다는 유기체적 모델에 반대하여, 충동들의 파편적 성격을 강조하는 라캉의 견해는 들뢰즈의 욕망하는 기계의 가장 중요한 성격이기도 하다. 

 일단 각각의 충동에는 그 원천으로서 각각의 기관이 상응한다. 이 기관이 바로 성감대이다. 라캉은 네가지 성감대를 제시하며 이에 대응하는 서로 구별되는 네 가지 부분충동들이 있다. '입(입술) - 구순충동' '항문 - 항문충동' '눈 - 시각적 충동' '귀- 청각적 충동'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충돌에 대응하는 대상이 바로 '대상 a'라고 불리는 것으로 역시 각각의 충동들에 따라 젖가슴, 배설물, 시선, 목소리로 나뉜다. 

 그렇다면 충동들의 '목적'은 무엇인가? 바로 '기관의 즐거움'이다. 그리고 그것은 근본적으로 '자기성애'의 형식 속에서 실현된다. 중요한 점은 충동의 만족은 대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이점은 충동을 생물학적 개념인 욕구(besion)와 비교해 보면 명확해진다. 예컨대 배고픔은 그 대상으로서 음식물을 욕구하며, 또 그것을 섭취함으로써 그 욕구는 만족되고 사라진다. 이 경우 욕구의 만족은 분명 대상으로부터 온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구순충동은 음식물이라는 대상의 섭취 때문에 만족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로지 입 혹은 입술이라는 기관의 즐거움을 추구한다. 음식물이 입안에 들어온 경우 충동의 목적은 그것을 이용해 입을 즐겁게 하는 것일 뿐 허기를 채워 만족을 주는 대상으로서의 음식물에는 관심이 없다. 또한 가령 껌 씹는 행위는 껌 자체를 즐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구강운동을 즐기기 위한 것이다. 다시 말해 기관의 즐거움은 그 즐거움의 원천이 대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기관(성감대) 자체에 있다. 

 이러한 배경아래 라캉이 제시하는 충동의 운동을 살펴보자.  즐거움의 원천이 외부대상이 아니라 기관자체이므로 충동의 운동은 나르시시즘적인 궤도를 그리게된다. 즉 충동의 원천은 기관(성감대)이므로, 충동은 기관에서 출발해 우선 대상 a를 향해 발사된다. 그러나 대상 a는 충동이 진정으로 목적으로 삼는 것이 아니다. 다만 충동은 대상 a의 주위를 돌뿐이다. 진정한 즐거움의 원천은 기관 자체이므로 충동은  대상 a의 주위를 돌아 다시 기관으로 되돌아간다. 요컨대 하나의 기관은 하나의 충동이 등록되어 있는 곳, 즉 충동의 원천이며, 동시에 충동의 운동이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goal)이다. 이처럼 충동의 운동은 근본적으로 회귀적이다. 예컨대 손가락을 빠는 갓난아이를 생각해보자. 아이는 구순충동이 대상 a로 삼고 있는 젖가슴의 대체물로 손가락을 빤다. 이 빠는 행위의 즐거움은 어디서 오는가? 그것은 빠는 대상인 손가락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빠는 행위로 표현된 구순 충동은 대상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빠는 행위를 통해 자신의 기관(입)을 운동시키는데서 충족을 얻는다. 충동의 즐거움은 이러한 나르시시즘적 운동을 통해 충족되며, 그 즐거움의 원천을 자기 신체에 두고 있다는 점에서 '자기성애적'이다. 

 그런데 여기서 라캉은 충동의 목표(goal)와 구분되는 충동의 목적(aim)이 있다고 말한다. 라캉의 말을 빌면 "충동의 만족은 목적(aim)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목표와 구분되는 충동의 목적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라캉은 이렇게 말한다, 

" 당신이 누군가에게 직무를 맡긴다면 그 목적은 그가 가지고 돌아와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취해야 하는 여정이다. 목적은 도정(道程)이다. …… 충동의 목적은 단지 순환의 궤도로 돌아가는 것뿐이다." 

 즉 충동의 목표는 자신의 원천인 기관 자체이지만, 그 기관 자체에 도달하는 것이 충동의 목적은 아니다. 오히려 충동의 목적은 성감대로부터 출발해 다시 성감대로 되돌아오는 자신의 순환적인 여정을 계속 생산해 내는 것이며, 바로 이로부터 만족을 얻는 것이다. 라캉은 이러한 충동의 메커니즘을 새를 쏘아 맞추는 활쏘기 경기에 비유하고 있다. 충동은 이 활쏘기 경기에서 화살과도 같다. 새는 화살이 겨냥하는 목표물(goal)일 뿐 목적(aim)은 아니다. 활쏘기 시합의 목적은 점수(만족)을 얻기 위해 이 활쏘기라는 도정을 계속하는 것이다. (주12)

 이러한 충동의 메커니즘은 욕망의 메커니즘과 전혀 다를 수밖에 없다. 사실 라캉에게서 충동과 욕망을 구별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특히 대상 a의 관점에서 구별하려고 할 경우 그 둘의 차이는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욕망의 대상은 또한 충동의 대상이기도 하며 그 둘 모두에게 이 대상 a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대상, 결여, 상실이기 때문이다. 충동과 욕망을 구분하는 데는 바로 이 결여가 둘 다에게 동일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중요하다. 이미 주지하였다시피 욕망은 대상 a를 향해 정향지어져 있다는 점에서 욕망의 목적은 대상 a이며, 또 그것의 만족은 숙명적으로 얻어질 수 없다는 점에서 욕망의 본성은 근원적인 '불만'이다.  

 그러나 충동의 목적은 대상 a가 아니며, 충동은 대상 a로부터 만족을 얻지도 않는다. 충동의 목적은 성감대로부터 출발해 대상 a를 한 바퀴 돌고서 다시 성감대로 돌아오는 순환 운동을 끊임없이 하는 것이며, 만족은 바로 이 운동으로부터 얻어진다. 따라서 대상 a는 욕망에게서와 마찬가지로 충동에게서도 거머쥘 수 없는 어떤 것이지만, 충동은 대상 a가 아니라 그 자신의 순환운동 즉 그 충동 자신의 끊임없는 생산으로부터 실제로 만족을 얻을 수 있으므로 결코 불만으로 정의되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대상 a는 욕망의 운동을 가능케 하는 원인이기는 해도 충동의 원인은 될 수 없다. (주13)



6. 생산으로서의 욕망 - 들뢰즈 



 그런데 이러한 충동개념은 어떻게 들뢰즈와 연관을 맺는가? 들뢰즈가 결여로서의 욕망에 맞서서 내세우는 주장은 '생산으로서의 욕망'인데. 바로 라캉의 충동개념이 이 새로운 욕망개념을 충족시켜주고 있다. '생산'이라는 말에 주목해 볼 때 우리는 욕망을 '어떤 것의 원인이 될 수 있는 힘'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플라톤이래 욕망을 결여로, 영원한 부족함으로, 그러므로 일종의 거지근성으로 정의해온 전통에 맞서서 들뢰즈는 욕망을 생산하는 힘으로 부각시키고자 한다. 이러한 들뢰즈의 욕망개념에 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 영감의 빛을 비추어주는 것이 바로 라캉의 부분충동이다.

 충동은 끊임없는 순환 운동을 목적으로 삼으며 그로부터 만족을 얻는다. 즉 충동의 유일한 목적은 그 자신을 끊임없이 '생산'하는 것이다. 이 같은 충동의 특성은 지젝이 <비딱하게 보기>에서 라캉을 해설하며 적절하게 지적하고 있다.

" 충동의 궁극적이 목적은 단순히 그 자신을 충동으로 재생산하는 것, 충동의 순환 궤도로 되돌아가는 것, 목표를 향한, 그리고 목표로부터 나오는 그 궤도가 계속되게끔 하는 것이다."

 충동이 하는 일이란 그 자신을 충동으로 계속 생산하는 것이므로, 여기서 '작동(충동이 하는 일 혹은 충동의 기능)'은 '자기 생산 혹은 자기 형성' 과 구별되지 않는다. 이러한 생산하는 충동의 본성은 들뢰즈가 그의 욕망론의 핵심적인 개념으로 내세우는 '욕망하는 기계'의 본성과 동일하다. 즉 욕망하는 기계에서는 '생산하는 일'과 '생산되는 일'이 일치한다. 라캉의 충동과 들뢰즈의 욕망하는 기계는 모두 생산하는 일을 사명으로 하며, 그 생산은 자기 원인이 되는 것, 즉 자신을 끊임없이 재생산(형성)하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들뢰즈가 자신의 욕망개념을 가리키기 위해 왜 기계라는 말을 사용하는지도 라캉의 충동 개념을 통해서 이해할 수 있다. 기계라는 말은 목적론에 맞서기 위해 채택된 개념이다. 결여된 대상 a를 궁극적으로 지향한다는 점에서 욕망의 운동은 목적론적이며, 이 목적론은 전형적인 변증법적 형태를 띤다. 내가 무엇인가를 욕망할 때 그것은 궁극적인 욕망의 대상의 대체물일 뿐이다. 즉 욕망은 늘 대체물들을 끊임없이 매개 항으로 삼으면서만 궁극 목적을 향한 운동을 지속할 수 있다. 

 그러나 충동의 운동은 기계적이다. 그것은 끊임없는 순환만을 고집하는 운동일 뿐, 원인도 목적도 없다. 욕망에게서는 원인이자 목적인 대상 a가 충동에게는 순환운동의 반환점에 지나지 않는다. (주14) 이처럼 그 어떤 목적론적, 신학적 함의도 지니지 않는 충동의 성격은 바로 들뢰즈의 욕망하는 기계의 특징과 동일하다. 들뢰즈는 욕망하는 기계를 '목적도 없고 원인도 없는 욕망'으로 정의한다. 만일 목적이 있더라도 궁극적인 도달점으로서의 목적이 아니라, 지속적인 과정만을 유일한 목적으로 추구하기에, 그것은 '기계' 이다. 이러한 '충동'과 '욕망하는 기계'의 친화성을 들뢰즈는 <앙띠 오이디푸스>에서 "충동들은 오로지 욕망하는 기계들일 뿐이다."라고 언급하며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다. (주15)

 그리고 이미 언급했듯이 결코 통일적인 하나를 이룰 수 없는 여러 조각의 '부분' 충동들로 존재한다는 충동개념의 중요한 특징 또한 들뢰즈는 그대로 이어 받고 있다. 충동들은 오로지 파편적인 부분들일 뿐 서로 통합되어 하나의 전체를 이루는 법이 없으며, 하나의 부분충동과 다른 부분 충동 사이에는 어떤 생성 관계도 없다. 개개의 충동이 하나의 전체로 통합됨을 주장하는 유기체적 모델에 반대하여, 충동들의 파편적 성격을 강조하는 라캉의 견해와 유사하게 들뢰즈 역시 무수한 욕망하는 기계들은 서로 통합되어 하나의 유기체를 이룰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욕망하는 기계들 사이의 관계를 들뢰즈는 이접적(disjonctive)관계 혹은 비(非)관계(non-rapport)로 표현한다. 주(16)    

 이처럼 들뢰즈는 라캉의 충동개념에서 착안하여 '욕망하는 기계'라는 개념을 주축으로 생산으로서의 욕망론을 주장한다. 기존의 결여로서의 욕망론이 지닌 '결여'와 '목적론적 운동' 이라는 두 가지 특성을 들뢰즈는 그의 욕망론에서 '생산'과 '기계적 운동'으로 대체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위에서 던졌던 질문에 들뢰즈는 어떻게 답하고 있는가? 즉 그의 욕망론은 어떻게 욕망을 비(非)오이푸스적으로 기술하는가? 욕망을 주체 개념의 여러 요소들(인격성, 성별)을 통해 이해하려는 인격주의적 해석에서 어떻게 벗어나고 있는가? 이에 대한 답변은 아마도 들뢰즈가 제시하는 매우 기이한 모습의 주체에서 찾을 수 있으리라.  



7. 분열증적 주체



 서로 이접적인 비유기체적 욕망하는 기계들은 성별이 분화되기 이전의 상태이며, 주체의 발생에 선행하는 선(先)주체적인 상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욕망하는 기계들 각각에 주체 개념을 부여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그것들이 자신으로부터 출발해 다시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는 반성적 구조, 즉 일종의 자기동일성을 스스로 산출하는 구조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반성구조를 통한 주체의 탄생은 하나의 성감대에서 출발해 다시 그 성감대로 되돌아오는 순전히 육체적인 층위에 머무른다는 점에서 '나'라는 명칭을 획득하게 되는 완전한 주체화라기보다는 라캉의 말을 빌면 '머리없는 주체화, 주체개념 없는 주체화'이다. 

 그러면 들뢰즈에게서 욕망 자체로서의 주체가 아닌, 현실적인 개별적 존재자가 주체로서 가지는 위상은 어떠한가? 들뢰즈는 하나의 현실적 개별성을 지닌 존재자로서의 주체를 욕망하는 기계들로부터 파생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즉 욕망하는 기계를 일차적인 주체라고 한다면, 현실적 개별자는 이차적으로 파생된 주체인 것이다. 파생적 주체는 욕망하는 기계들의 종합을 통해 생산된다. 즉 주체는 욕망하는 기계들의 종합적 귀결물로서 발견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종합'이라는 의미를 변증법적 통합으로 이해하여, 욕망하는 기계들의 상위 혹은 배후에서 그들을 통일하는 주체가 발생한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들뢰즈의 종합에서 욕망하는 기계들은 여전히 서로 이접적일 뿐 아무런 인과관계를 가지지 않는다. 들뢰즈는 주체 안에서 욕망하는 기계는 늘 하나의 '횡단선(transversale)'에 의하여 다른 기계와 연결되어 있다고 말한다. 이 횡단선이란 말은 서로 병렬적이며 아무런 인과관계도 가지지 않는 욕망하는 기계들 사이의 관계를 일컫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런 괴상한 종합을 통해 산출되는 주체란 무엇이란 말인가? 들뢰즈에게 주체는 바로 이접적인 욕망하는 기계들의 횡단성 위에 존립하는 '과정' 이자 '흐름'이라 할 수 있다. 잠재적으로는 늘 동시적, 병렬적으로 존립하는 욕망하는 기계들은 주체라는 환등기가 지나가면서 과정 속에서 비추어줄 때 어떤 현실적 상태로 나타났다가 다시 잠재성 속으로 꺼져버리는 것이다. 들뢰즈의 말을 빌리면 "주체는 자기가 통과하는 상태들을 계속해서 소비하고 이 상태들로부터 태어난다." 이 말을 뒤집어 보자면, 주체란 그 안에 욕망하는 기계들이 강림해서 하나의 현실적 상태로 자기의 모습을 보여주고 떠나가곤 하는 빈 껍데기 같은 것일 뿐이다. 

 따라서 들뢰즈가 제시하는 이 괴상한 형태의 주체를 우리는 '분열증적'(주17)이라 불러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주체가 이접적인(서로 상관없는) 상태들 다수를 과정 속에서 자신의 성질들로 가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기동일성을 가진 어떤 고정된 주체란 당연히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동일성도 없는 '과정으로서의 분열증'이 주체를 규정한다. <앙띠 오이디푸스>의 다음과 같은 진술처럼 말이다.

" 일련의 상태를 통과하는 ……주체가 있을 따름이다. …… 이 여러지대를 통과할 때마다 주체는 '이것은 나다, 그러므로 이것은 나다!'라고 외친다."          

 즉 서로 이접적인 사태들을 횡단하는 '과정'이 바로 주체이며, 그것은 서로 인과적이지 않는 여러 상태들 다수에 걸치는 과정이므로 분열증이라는 이름에 걸맞다. 들뢰즈의 말을 빌면 "살아가는 주체에 비하면, 체험되는 상태가 더 근원적이다." 주사위를 던지는 일처럼 우연히 그때그때 나타나는 서로 이접적인 상태들로부터 그때그때의 여러 가지 모습으로 주체가 나타난다는 점에서, 주체는 근원에 자리하는 통일성의 원천 같은 것이 아니라, 욕망하는 기계들의 끊임없는 운동의 부산물이다. 따라서 욕망하는 기계들이 주체의 부분들로서 유기적으로 통일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주체가 기계 곁의 잔류물로서 즉 기계에 부속한, 혹은 인접한 부분으로 생산된다고 할 수 있다. 즉 욕망하는 기계들 위에 존립하는 분열증적 주체는 곧 이 기계들의 활동의 잔류물로 생산되는 부분적 주체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주체의 위상을 <앙띠 오이디푸스>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 주체 자신은 중심에 있지 않다. 중심은 기계(욕망하는 기계)가 차지하고 있다. 주체는 가장자리에 있으며, 고정된 자기 동일성을 가지지 않는다. 항상 중심에서 벗어나 있으며, 고정된 자기동일성을 가지지 않는다. 항상 중심에서 벗어나 있으며, 자기가 지나가는 상태들로부터 끌어내어진다." 



4. 새로운 욕망론을 위하여  



 그러면 들뢰즈의 이 분열증적 주체는 어떤 의미에서 '앙띠(anti, 反) 오이디푸스'인가? 들뢰즈는 분열증적 주체에 '독신(獨身)기계'라는 이름을 붙이고 있다. 왜 주체의 이름은 독신기계인가? 이 기계는 욕망을 오이디푸스화 하는 장치인 부모도 배우자도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즉 욕망의 대상으로서의 어머니와 이에 대한 금지로서의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와의 근친상간을 피하기 위한 대용품으로서의 배우자는 독신기계에게 성립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다시 물어야 한다. 들뢰즈가 제시하는 욕망의 주체가 부모가 없는 즉 오이디푸스가 없는 독신 기계라면 들뢰즈는 과연 '결연(alliance)'의 의미를 어떻게 해명할 것인가? 기존의 오이디푸스에 기반한 정신분석학은 모든 결연을 부자관계에서 파생되거나 연역된 것으로 주장한다. 즉 아버지의 등장으로 근친상간 금지라는 법이 제정됨에 따라 어머니와의 근친상간을 피하기 위한 대용품으로 다른 여자를 찾아 혼인하는 것. 이렇게 발생하는 인물들간의 부부관계를 통해 욕망들간의 결연이 이루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인물들간의 혼인은 허용되는 최초의 근친상간이며, 오이디푸스에 영향 받은 민족학들은 이런 방식으로 모든 욕망들과 부족들간에 맺어지는 결연의 의미를 이해하려한다. 따라서 만일 독신기계가 철저히 비오이디푸스적인 것이라면 결연의 의미를 이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주18) 

 우선 욕망을 인물들의 욕망으로 이해하는 이상, 혹은 인물들의 혼인을 욕망들 사이의 결연의 불가결한 형태로 이해하는 이상 결연을 비오이디푸스적으로 설명할 방도는 없다. 오로지 성을 인간의 형태로 표상하는 것을 붕괴시킬 때만, 즉 욕망을 '비인물적인(비인격적인)' 부분 충동의 층위에서 이해 할 때만 해법을 찾을 수 있다. 들뢰즈에 따르면 개체는 하나의 통일적 성에 지배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통합되지 않는 이접적인 여러 개의 성(성적 충동)을 가지고 있다. 기존의 욕망론에서 오이디푸스를 통해 주어지는 하나의 성은 몸 전체에 걸쳐 포괄적으로만 혹은 통계학적으로만 주어진 성이다.  그러므로 한 인물 전체를 통일적인 하나의 성으로 규정하는 것은 관청직원이 남자아이인가 여자아이인가를 묻는 것과 같은 출생 신고상의 통계학적인 허울일 뿐이며, 이 허울이 인간적인 의미의 성이다.  

 이 허울을 걷어내면 서로 이접적인 다수의 비인간적인(비인물적인) 성적 충동들이 있는데, 이것들이 바로 욕망하는 기계들이라 불리는 것이다. 그리고 한 개체 안에서 이러한 다수의 충동이 공존하는 방식을 들뢰즈는 '성의 횡단(transsexuel)이라 부른다. 한 개체 안의 다수의 성끼리는 서로 소통하지 못하며, 이들은 다른 개체의 부분충동들과만 소통 할 수 있다. 이러한 소통이 바로 오이디푸스적 결연개념에 반대하여 들뢰즈가 내세우는 욕망하는 기계들의 '연결(connexion)'이다. 오이디푸스와 상관없는 연결은 인간적인 형태를 띠지 않기 때문에 <앙띠 오이디푸스>의 다음과 같은 구절처럼 매우 전위적인 소통방식으로 나타난다.   

" 한 남자의 수컷부분은 한 여자의 암컷 부분과 소통할 수도 있지만, 또한 한 여자의 수컷부분과도, 혹은 다른 한 남자의 암컷부분과도, 혹은 다른 남자의 수컷부분과도 소통할 수 있다."  

 욕망을 이처럼 비인격적인 부분 충동으로 이해할 경우, 여기에는 상징적 질서 속에서 태어난 인물들의 운명인 '결여'가 끼어들 여지가 없다. 즉 욕망은 어머니의 결여를 메우기 위해 대용품으로 다른 여자를 선택하는 일을 겪지 않는다. 들뢰즈의 말을 빌면 "아무것도 결여된 것은 없고, 결여로 정의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따라서 결연이 오이디푸스를 매개로 하여 부자관계로부터 연역되는 일도 결코 없다. 

 이러한 들뢰즈의 주장을 통해 비로소 욕망은 모든 인격주의적인 해석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욕망이 한 인물의 성욕이라는 형태를 띠게되는 일, 즉 욕망이 남자와 여자라는 인물의 형태로 움직이게 되는 일은 오이디푸스적 조작 이후에나 일어난다. 오이디푸스로부터 생겨난 인물차원에서는 성들간의 결연은 어머니를 배제하고 그 결여를 메우기 위해 다른 여자와 혼인한다는 '배제와 결여의 논리'를 따를 수밖에 없다. 즉 인물들간의 혼인 체계라는 '결연'이 부분충동들간의 '연결'을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들뢰즈는 성들간의 이러한 결연 즉 상징계적 인물을 매개로 한 결연에 대립해서 비인격적인 부분 충동들의 연결을 내세웠던 것이다.

 그렇다면 인물들의 질서를 해체하고 욕망을 부분충동들로 되돌린 결과는 무엇인가? 이제 어떤 '주체'라도 나타날 근거는 사라져버리게 된다. 다시 말해 성욕과 주체성을 연결한 결과인 어떤 인물적 형태의 성욕이나 성별이라고는 없다. 따라서 당연히 인물들을 등장시킬 때만 작동하는 오이디푸스, 결여 등의 개념에 지배되지 않는다. 이처럼 주체성을 규정하는 개념들을 말살하고 욕망을 비인간적 층위에서 이해하고자 하려는 들뢰즈 욕망 이론의 궁극적 목표를 <앙띠 오이푸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각자에게 욕망하는 기계들 혹은 인간적이지 않는 성을 돌려주는 것, 각자에게 그의 여러 성을 돌려주는 것."  

 이제 헤드윅의 운명을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 물음의 답변에 다다르기 위해 우리는 매우 길고 지난한 논의를 거쳐왔다. 헤드윅의 노랫가락을 따라가며 시작했던 논의였기에 마지막 결론 또한 역시 그의 음율을 쫓아 더듬어봐야 할 것 같다. 들뢰즈의 새로운 욕망론을 검토해본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영화의 말미에서 배신한 과거의 연인 토미가 헤드윅에게 용서를 구하며 부르는 애절한 노래. 바로 <Wicked Little Town> (Tommy Gnosis version)이다.(주19) 어떤 의미에서 이 노래는 <Origin of Love>의 정확한 대척점에 서 있는 곡이다. 먼저 몇 소절 음미하고 시작해보자.

 날 용서해요
 잘 몰랐었으니까.
 난 단지 어린 소년이었고 
 당신은 정말 커다란 존재였으니까요.
 어떤 신의 계획보다도, 
 남자 혹은 여자라는 그런 구분보다도 
 훨씬 큰 존재였으니까.

 이젠 알게되었어요 내가 당신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빼앗았는지.
 그리고 모든 것들이 무너져 갈 때, 당신은 바닥에서 그 조각들을 땅에서 주워
 이 사악한 작은 마을에 뭔가 아름답고 새로운 걸 보여줬다는 것도 말이죠.
 ……
 어쩌면 하늘에는 정말 공기말고는 아무것도 없는지도 몰라요.
 신비로운 운명이나, 이미 운명 지워진 우주적 연인(cosmic lover preassigned) 따위도 없어요.
 ……
 당신이 겪은 그 모든 변화 속에서, 언제나 이방인은 당신이었던 것 같아요.
 다시 또 다른 낯선 사악한 작은 마을에 홀로 남았군요.

 그러니 선택의 여지가 없을 때는, 
 이 사악한 작은 마을의 어두운 모퉁이와 소음들 속을 떠나.
 내 목소리를 따라오면 된다는 걸 알죠?
 여긴 정말 사악한 작은 마을이군요.
 사악한 작은 마을이여 이젠 안녕히.

 헤드윅은 더 이상 남성과 여성이라는 인물적 성별의 장벽 앞에서 좌절하는 '비정상인'이 아니다. 그는 이제 "남자 혹은 여자라는 그런 구분보다도/ 훨씬 큰 존재"이다. 즉 오이디푸스를 통해 탄생한, 욕망을 주체 개념의 여러 요소들(인격성, 성별)을 통해 이해하려는 인격주의적 해석은 더 이상 헤드윅을 포박할 수 없다. 그는 이런 인격적 형태의 욕망을 초월하는 자이다. 

 그 초월 뒤에 펼쳐지는 것은 무엇인가? "모든 것들이 무너져 갈 때" 헤드윅이 "바닥에서 그 조각들을 땅에서 주워" 보여준 "아름답고 새로운" 것은 무엇인가? 굳건히 자리 잡고 있었던 인물적 형태의 성욕과 성별에 균열이 일어날 때, 기존에 당연한 것이라 믿었던 통일적인 개별적 인격체가 허물어질 때, 그 붕괴 속에서 조각난 파편들로 발견되는 것. 그것은 다름 아닌 통일적인 전체를 이루지 않고 이접적 관계에 있는 비인격적인 '부분'충동들, 즉 욕망하는 기계들이 아니던가! 그리고 이러한 조각난 충동들을 주워 헤드윅이 보여주는 것은 바로 서로 이접적인 다수의 비인간적인(비인물적인) 성적 충동들을 횡단하는 것, 즉 분열증적 주체인 것이다.

 이러한 분열증적 주체에게는 당연하게도 "신비로운 운명이나, 이미 운명 지워진 우주적 연인 따위는 없다." 다시 말해 오이디푸스라는 강압적인 법을 통해 상징계적 주체로 태어난 인물들에게 태생적으로 주어진 운명인 끝없는 결여로서의 욕망은 거짓이며, 또한 주체의 욕망은 어머니의 결여를 메우기 위해 대용품으로 다른 여자를 선택해야만 한다는, 즉 결연의 형태로 주어지는 "미리 운명지어진 연인"도 분열증적 주체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헤드윅에게 남자도 여자도 아닌, 오직 '비정상인'의 자리만을 마련해주었던, 헤드윅의 사랑을 '변태적 성욕'의 형태로 강등시키는 폐쇄적이고 차별적인 사랑의 기원(Origin of Love)만을 가졌던,  이 "사악한 작은 마을의 어두운 모퉁이와 소음들 속을 떠나" 헤드윅은 새로운 욕망론의 "목소리를 따라"가고 있다. 그 "사악한 작은 마을"과 작별함으로써 헤드윅은 통일된 인격적 성이라는 감옥에서 해방되어 비로소 인간적이지 않은 그의 여러 성들(이접적인 성적 충동들)을 돌려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위와 같은 영화의 메시지는 비단 노래가사 뿐만이 아니라, 다른 여러 장면들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우선 주목해야 할 점은 토미가 <Wicked Little Town>을 불러줄 때 헤드윅이 거의 반 나신(裸身)의 모습으로 그의 앞에 서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영화 초중반부에서 항상 짙은 화장과 함께 화려한 여성용 가발과 옷차림으로 꾸미던  그의 모습과는 매우 대조를 이룬다. 이제껏 헤드윅은 토미 앞에 서기 위해선, 즉 그와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하나의 인물적 성별의 형태로 즉 '여성'의 모습으로 위장해야만 했다. 짙은 화장과 화려한 가발이 그의 '엥그리 인치'를 감춰주었다. 오직 남과 여라는 통일적 성이 있을 뿐인 그곳에서 어디에도 편입되지 못한 헤드윅은 그렇게 자신을 기만해야 했다. 

 그러나 비인격적인 부분충동들로서 존재하는 분열증적 주체에게는 인격적 성의 구분이 완전히 효력을 상실한다. 영화에서 자주 베를린 장벽이 허물어진 사건이 등장하는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헤드윅이 자신을 동/서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베를린 장벽에 비유하듯이, 인격적인 성의 세계에서 그는 남/여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자이다. 그러나 장벽이 무너지고 동서의 경계가 사라지는 사건, 즉 인격적 남/여의 구분이라는 허구적 욕망론이 붕괴하고 비인격적인 부분충동으로서 욕망이 고려될 때 그것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것처럼 해방의 사건인 것이다. 

 이제 헤드윅은 무대에서 격렬하게 노래하며 그의 여장(女裝)을 모두 내던져버리고 반 나신의 모습으로 토미 앞에 선다. 그렇게 모든 인격주의적 성의 허울을 벗어버린 모습으로 당당하게 서 있는 헤드윅은 더 이상 자신을 기만할 필요도, 더 이상 '비정상인'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을 필요도 없다. 더 나아가 헤드윅이 완전한 나체의 모습으로 밤거리를 향해 걸어가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기존의 억압적 욕망론에서 완전한 해방을 이룬 상태를 암시하며 대미를 장식하고 있다.           

 이제 그만 이 두서 없는 논의를 마무리해야할 때가 온 것 같다. 문득 영화의 한 장면이 섬광처럼 지나간다. 헤드윅과 토미가 사랑에 빠져 격렬한 키스와 함께 서로를 애무하던 중 토미의 더듬던 손길이 헤드윅의 '엥그리 인치'를 스친다. 기겁을 한 토미가 도망치듯 사라져 버리자, 헤드윅은 그의 등뒤에서 어떤 말로 서글프게 외쳤던가?

" 나를 사랑한다면, 이것마저도 사랑해달란 말이야 ― !"

 지금까지 살폈던 수다하고 복잡한 이론들보다, 단지 이 흐느낌 섞인 짧은 비명이 우리에게 기존 욕망론의 폐쇄성과 잔임함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는 듯 하다. 그 혹은 그녀는 어디에도 소속될 수 없었기에 비정상인으로 정신병자로 변태성욕자로, 심지어 '역겨운 놈'으로 정의되고 차별 받아야 했다.   

 그러므로 이제 헤드윅이 정처 없이 떠돌았던 방랑 속에서 카인의 표식처럼 매달고 다녀야 헸던 그 '앵그리 인치(Angry Inch)'에 맺힌 분노(Angry)를 풀어주는 일을, 그의 사랑을 '비정상적 성욕'이라는 수렁에서 건져내는 일을, 그리하여 더 이상 남/여 라는 허황된 구분사이에서 장벽으로 굳어가지 않도록 하는 일을, 그 굳어진 장벽이 균열을 일으키는 해방의 사건을, 이루어 내야한다. 

 기실 이미 우리 주위에는 수많은 헤드윅들이 고통받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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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1) <아리스토파네스의 연설> 다음과 같은 <향연>의 구절을 참고하라.  

" 인간이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먼 옛날부터 인간 속에 깃들이고 있습니다. 그건 본래의 몸뚱아리의 부분을 다시 한데 모아, 둘이서 하나가 되게 하여 인간의 본래 구조를 회복하려 하는 거지요. ……  누구나 자기가 오래 전부터 바라던 것, 즉 사랑하는 이와 하나가 되고 융합하여 두 몸이 한 몸으로 되고 싶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고 생각할 거예요. 그 이유는 이것이 우리의 본래모습이요, 옛날에는 우리가 하나의 온전한 것이 되어 있었던 때문이지요. 그래서 온전한 것에 대한 욕망과 그것에 대한 추구가 에로스라고 불리는 겁니다." 

( 주2) <에로스의 탄생>  플라톤은 이같은 욕망 혹은 애로스의 속성을 <향연>에서 디오티마의 입을 빌려 다음과 같은 에로스의 탄생신화를 들려줌으로써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다. 

" 아프로디테가 출생했을 때, 신들이 잔치를 베풀었는데, 그 자리에는 …… 풍요의 신 포로스도 있었어요. 식사가 끝날 무렵에 궁핍의 신 페니아가 구걸하러 와서, 거지들이 으레 하는 것처럼 요란스럽게 굴면서 문간에 서 있었습니다, 포로스는 이때 벌써 신주(神酒)를 많이 마시고 ……제우스의 신의 정원에 들어가 깊이 잠들었습니다. 그러자 페니아는 포로스에게서 자식을 얻음으로써 자신의 궁핍에서 벗어나려는 계획을 세웠지요. 그래서 그녀는 포로스의 곁에 누웠고, 결국 에로스를 잉태하게 되었던 겁니다. ……에로스는 포로스와 페니아의 아들인 까닭에 …… 그는 항상 가난합니다. …… 그러나 아버지를 닮은 데도 있어서, 아름다운 것과 선한 것을 차지하려고 계획합니다." 

 이처럼 에로스는 태생적으로 늘 허기진 거지근성을 타고난 결여의 빈구멍이며, 이 결여의 구멍을 매우려는 것이 사랑의 행위라는 것이다.  

( 주3) <디오티마의 주장> 좀 더 예리한 혹자는 아마 다음과 같은 의문도 품을 수 있으리라. <향연>에서 플라톤이 궁극적으로 의도했던 주장은 아리스토파네스의 것이 아닌, 소크라테스가 들려주는 디오티마의 주장이 아니었던가? 그러므로 단지 아리스토파네스의 의견만을 근거로 삼아 플라톤의 욕망론을 '결핍을 메우기 위한 목적론적 운동'으로 규정하는 것은 문제가 있지 않은가? 

 그러면 한 번 살펴보자. 디오티마는 필자의 주장과는 상이한 형태의 욕망론을 제시하고 있는가? 디오티마의 입장을 요약하자면 사랑은 기본적으로 "언제나 자기자신을 위하여 좋은 것을 가지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좋은 것'의 정확한 의미는 무엇인가? 디오티마의 말을 참고해보자.

" 사랑의 신비를 향하여 인도되어 온 사람이면 누구나, 여기서 그 마지막 단계에 접근하고 있습니다. 갑자기 그의 본성은 놀라운 하나의 아름다움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것은 …… 아름다움 자체입니다. …… 첫째로, 그것은 영구한 것이요, 생멸하는 것이 아니요, 증감하는 것이 아닙니다. 둘째로, 그것은 어떤 데서는 아름답고 어떤 데서는 추한 그런 것이 아니요, 때로는 아름답고 떄로는 추한 것도 아니요, 또 어떤 방향에서 보면 아름답고 다른 어떤 방향에서 보면 추한 것이 아니요, 또 어떤 사람에게는 아름답고 어떤 사람에게는 추한 그런 것이 아닙니다. …… 그것은 독립 자존하면서 영원히 독특한 모습을 띠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 다른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이 아름다움에 참여하는데 …… 그것들(개물들)은 생기고 소멸하지만, 그것(이데아)은 늘지도 줄지도 않으며, 아무 변화도 없어 항상 그대로 있습니다. 그러므로 …… 여러 아름다운 것들로부터 저 아름다움에게로 올라가 그것은 바라보기 시작하면, 그는 마침내 그 궁극의 목표에 도달하게 되는 겁니다."    

 요컨대 에로스가 추구하는 것은 바로 "아름다움 자체" 즉 현상계의 다른 모든 아름다운 개물(個物)들이 "참여"하는 '미(美)의 이데아'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우리에게 이데아는 어떠한 성질의 것으로 주어지는가? 플라톤은 이데아에 대한 상기론(想起論)을 주장한다. 이데아를 '상기(想起)'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과거에 잊었던 것을 다시 떠올린다는 것. 즉 우리가 카론의 배에 올라 망각의 강 레테를 건널 적에 영원한 망각 속으로 흘려보낸 그 진리를 다시 찾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즉 플라톤에게 이데아는 상실한 낙원으로서, 다시 회복되어야 할 최종목적지로서의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현실 속의 우리가 도달하기에 저편 너머의 이데아는 너무나 먼 곳에, 너무나 철저한 망각 속에 위치하고 있지 않은가. 어쩌면 궁극의 이데아는 현상계 속의 우리는 영원히 도달 불가능한, 오직 '죽음을 통한 초월'을 통해서만이 접근을 희망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플라톤의 또 다른 대화편인 <파이돈>에서 소크라테스는 떠나온 그리운 낙원으로의 귀향에 기뻐하며 "철학은 죽는 연습이다."라고 외치고 마치 축배를 들 듯 즐거이 독배를 들이키지 않았던가.  

 따라서 에로스가 '미의 이데아'를 추구하는 운동이라 주장하는 것은 결국, 상실된 진리인 이데아라는 최종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 끊임없는 갈증에 시달리는 욕망의 운동을 주장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디오티마의 주장 역시 '결핍을 메우기 위한 목적론적 운동'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 주4) <오믈렛(Hommelette)> 오믈렛(Hommelette)은 라캉의 익살스런 말장난으로 만들어진 단어로, 인간(Homme)과 깨진 갈걀이란 뜻의 오믈렛(omelette)을 합성한 것이다. 불어에서 H는 발음되지 않기 때문에, Hommelette과 omelette은 똑같이 '오믈렛'으로 발음된다. 따라서 오믈렛(Hommelette)을 굳이 직역하자면 인간 계란 혹은 인간후라이(?) 정도가 될 듯하다.  

( 주5) 아직 라멜르의 단계는 인격적 층위 이전의 단계이다. 따라서 어머니라는 하나의 인격적 인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라캉에게 인격적 층위는 오직 오이디푸스를 통해 상징계의 질서로 진입한 이후에 부여된다.

( 주6) <부분충동> 이 '부분충동'이란 개념과 뒤에 등장하는 '욕망'개념의 차이에 유의하자. 라캉에게서 충동(pulsion)은 결여로서의 욕망(d과는 다른 메커니즘을 가진다. 두 개념간의 차이는 뒤에서 들뢰즈의 이론과 함께 다루어질 것이다. 

( 주7) <레비나스의 부정성/목적성> '무한을 향한 모든 존재자들의 운동' 이라는 플라톤 이래의 목적론은 레비나스 또한 관통하고 있다. 레비나스에게 있어 타자는 현상계를 구성하는 어떤 범주를 통해서도 규정되지 않는 부정신학적인 절대자의 모습을 하고 있다. 따라서 타인은 곧 '목적'이며, 이에 대한 우리의 욕망은 목적론적 운동의 형태를 띌 수밖에 없다. 

 한편 레비나스가 결여로서의 욕망론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사실은 다음과 같은 레비나스의 악수에 대한 흥미로운 분석을 통해 명확히 해볼 수 있을 것이다.

" 친구에게 악수하는 것, 그것은 그 친구에게 자신의 우정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친구에게 우정을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것으로 이야기하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더 나아가 성취될 수 없는 어떤 것으로서, 영속적인 욕망으로서 우정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사랑의 긍정성 자체는 그것의 부정성 속에 있다."     

 무슨 말인가? 즉 악수하는 것은 "내가 너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액면 그대로의 악수뿐이다"라고 그 행위 자체를 긍정하는 태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사랑 자체'라는 것은 이 악수가 아니라는 부정의 방식으로 밝혀 보여진다. 즉 모든 사랑의 행위는 이것은 내가 진정으로 욕망하는 것, 하고싶었던 것이 아니라는 방식(부정의 방식)으로만 저편에 있는 진정한 사랑을 가리켜 보인다. 이처럼 지금하고 있는 행위가 아니라는 방식으로만 사랑은 가리켜보여지는 것이다. 이것은 지금 내가 욕망하는 것은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아닌, 단지 영원히 다다를 수 없는 대상 a의 모사물일 뿐이라는 방식으로, 오직 부정성을 통해서만 달성되는 라캉의 결여로서의 욕망과 얼마나 유사한가!   

( 주8) <레비나스와 라캉> 레비나스가 제시하는 어떤 적극적인 범주적 규정도 허용하지 않는 타자와, 라캉이 주장하는 오직 결여로서만 나타나는 대상 a의 개념은 그 형태상 매우 유사하다. 그러나 두 학자간의 중요한 차이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라캉의 이론이 끊임없는 결여의 체험인 욕망의 운동을 통해 기술하려는 것은 결국 현실세계인 상징계에서 어떻게 욕망을 지진 주체가 '탄생'하는지 이다. 즉 '상징계적 존재의 탄생'을 탐구하려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그러나 레비나스의 타자론이 궁극적으로 노리는 바는 타자를 통해 근대적 주체의 이기적 존재 구조를 깨뜨려 윤리성을 추구하게 하는 것이다. 즉 라캉이 '존재의 탄생'을 문제삼는다면, 레비나스는 어떻게 '존재와 다르게(Autrement qu' tre)'될 것인가가 관건이다.

( 주9) 들뢰즈가 주어진 차이 그 자체를 부정적으로 매개하는 철학을 어떻게 비판하는지는 <들뢰즈와 보르헤스 혹은 차이의 철학에 관하여>에서 이미 다룬바 있다.

( 주10) 여기서 언급되는 성(性)은 물론 생물학적 성(sex)이 아니라, 인격적인 성 정체성(gender)을 의미한다. 

( 주11) <미리오는 전체성> 결여로서의 욕망론은 하나의 인격적 성(性)을 지닌 통일적 주체를 탄생시킨다는 것 외에도, '미리오는 전체성'이란 측면에서 역시 성적소수자들에 대한 억압을 행사한다. 결여로서의 욕망론은 전체가 미리 온다는 모델에 기반하고 있다. 

 예컨대 아리스토파네스의 근본주장은 무엇인가? 애초에 하나의 몸으로 전체를 이루고 있었는데, 그 '전체성'을 상실했기 때문에 다시 서로를 이끄는 그 힘으로 인해 사랑에 빠진다는 것이다. 이처럼 이 주장은 분리 이전에 미리오는 전체성을 전제하고 시작한다. 이러한 미리오는 전체성은 그 이면에 어떤 함의를 갖는가? 바로 부분들의 기능은 그 전체에 맞춰서 미리 짜여져 있다는 것이며, 따라서 신체 안에서 우리의 기관들은 미리오는 전체성에 맞춰서 용법이 정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미리 맞춰진 그 '신성한' 용법대로 기관들을 사용하지 않는 자들, 기관들을 마음대로 오용(誤用)하는 자들이 누구인가? 바로 동성연애자들이 아닌가? 이러한 관점에서 미리오는 전체성에 기반하는 욕망론의 모델은 배후에 정치적 폭력을 숨기고 있다.       

( 주12) <당구와 충동> 좀더 친근한 예를 들어보자. 당구는 공을 치다가 헛손질을 하면 상대방에게 기회가 넘어가는 게임이다. 그렇다면 당구시합을 할 때 목표(goal)는 무엇인가? 물론 큐대로 공을 치는 것. 즉 공이 당구선수의 목표이다. 그러나 그 공이 당구의 목적(aim)은 될 수 없다. 당구의 목적은 큐대로 공을 치는 행위를 실수 없이 지속하여 상대방에게 기회를 뺏기지 않고 공치는 행위를 계속하는 것이다. 즉 정리하자면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목표로서의 당구공을 치는 것이다.     

( 주13) <충동과 결여의 신화> 혹자는 이러한 의문을 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아까는 분명히 오믈렛의 세상 첫 경험이 자기 신체 부분(자궁)의  상실이라는 결여이며, 이 결여 때문에 충동은 신체부분의 등가물로서 대상 a를 정립한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충동도 분명히 전체성의 상실이라는 결여의 신화에, 즉 아리스토파네스의 에로스 모델에 기반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부분충동들이 잃어버린 신체의 대체물로서 대상 a를 자리잡게 하는 과정에는 분명히 결여의 신화가 개입되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러한 결여의 신화와 상관없이 일단 오믈렛이 기관들(성감대들)에 고착되면, 그것의 운동방식은 더 이상 어떤 결여의 신화와도 관계가 없게 된다는 것이다. 분열된 오믈렛은 부분 충동들의 형태로 각각의 성감대에 고착된다. 대상 a는 그것의 신화적 기원이 무엇이든 간에 이 충동들에 대해 결여로서도, 원인으로서도, 목적으로서도 작용하지 않는다. 충동은 대상 a에 도달하는 데서가 아니라 그 주위를 맴도는 순환운동에서 만족을 얻으며, 자기 자신의 끊임없는 생산을 목적으로 할 뿐이다.    

( 주14) 순환운동의 이러한 기계적 성격을 지젝은 <비딱하게 보기>에서  재미있게도 터미네이터에 비유하고 있다.

" 충동은 변증법적 책략을 통해서는 사로잡을 수 없는 '기계적인' 집요함이다. …… 터미네이터는 충동의 화신이다"

( 주15) 그러나 라캉의 부분충동과 들뢰즈의 욕망하는 기계를 완벽하게 동일한 것으로 볼 수는 없다. 결정적인 차이는 라캉이 부분충동을 구순충동, 항문충동, 시각적 충동, 청각적 충동 이렇게 4가지로 제한하는 반면, 들뢰즈는 무수한 수의 욕망하는 기계를 상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 주16) <들뢰즈와 스피노자> 서로 이접적 관계에 있는 욕망하는 기계라는 구도는 스피노자의 '속성' 개념에 빚진 바가 크다. 스피노자에게서 속성들은 서로간에 아무런 인과 관계도 없으며, 하나의 유기체적 전체로 통합되지도 않는 '실질적 구별' 속에 있다. 속성들은 서로 의존하지 않고 그들 사이에는 반대 혹은 모순 관계도 없기 때문에 오직 유일 실체에게나 귀속된다. 그러므로 속성들간에는 오직 비(非)관계만이 있다. 

( 주17)<분열증> 정신분석의 관점에서 분열증은 아버지의 기능이 그 역할을 수행하지 못함으로 해서 즉 아버지가 법의 역할을 떠맡지 못함으로 해서 주체가 상징계 안에 안착하지 못해서 생기는 병리적 현상이다, 반면 들뢰즈적 분열증에서, 법으로 기능하는 아버지의 부재는 이 법에 대해 죄의식이라는 고통으로 응답하는 '하나의' 인격적 형태 아래 억압되어 있던 다수의 충동들이 해방되는 사건을 의미한다. 이것이 해방인 까닭은 부성적 기능이라는 법은 사회, 정치적 권력이 가족이라는 단위에 침투하기 위해 사용되는 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들뢰즈가 말하는 분열증적 주체는 아버지를 통해 구현된 '법'의 지배를 빠져나가는 비인격적인 다수의 충동들을 가리킨다.    

( 주18)<들뢰즈와 프로이트> 라캉의 결여로서의 욕망론을 문제삼고는 있지만, 결연과 관련된 들뢰즈의 비판을 생각해 볼 때 들뢰즈가 진정한 오이디푸스의 원흉으로 지목하고 있는 인물은 아마도 프로이트가 아닌가 싶다. 프로이트는 <토템과 터부>에서 '신앙 혹은 복종(토템)'과 '법(근친상간금지)'라는 사회의 가장 근본적인 두 가지 요소를 가능케 해주는 것은 바로 '오이디푸스적 전제' 즉 인류의 가장 원형적인 죄의식의 기억으로서의 아버지 살해라는 사건이라고 주장한다. 

 그의 논지를 간단히 요약하자면 부족의 여자들을 독차지하는 원초적 아버지를 아들들이 살해하지만 그 아버지에 대한 죄의식으로 인해 사후적으로 아버지에게 복종한다는 것이다. 이 사후적 복종의 대상이 아버지가 옮겨놓인 대상이 신앙의 대상으로서의 동물, 바로 토템이다. 그리고 아버지를 죽인 형제들은 부족의 여자들 때문에 서로 싸우고 스스로 파멸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자기 부족의 여자를 가지는 일을 금지하는 법을 세우는데 그것이 '근친상간금지'이다. 

 이러한 오이디푸스라는 법은 아버지에 대한 죄의식과 결핍에 의해 충동을 단념시키며, 결여로서의 욕망을 지닌 자아를 탄생시킨다. <토템과 터부>의 다음 구절을 떠올려보자.

" 아버지를 대신하고 확장한 권위가 충동의 단념을 강요한다." 

 즉 프로이트에게 오이디푸스는 아버지의 확장인 권위 위에서 그 권위에 응할 하나의 인격으로서 너의 정체성을 확립하라는 요구이다. 그러므로 거꾸로 오이디푸스가 없으면, 하나의 통일적인 인격적 전체를 구성하지 않는 파편적인 충동들이 있을 뿐이다. 들뢰즈가 제시하는 분열증적 주체로서의 삶은 오이디푸스 속에서 불변하는 정체성을 부여받은 한 인격의 삶이 아니라, 거기서 벗어나 수많은 욕망하는 기계들을 떠돌아다니는 삶. 동일성이 없고 비인격적인 다수의 충동적인 삶이다. 분열증자의 충동은 통일적인 개별적 인격체를 허물어뜨리고 수많은 욕망하는 기계들을 방랑하며 '이것은 나다!'라고 동일시하고 또 떠날 뿐이다.

( 주19) 영화상에서 <Wicked Little Town>이란 곡은 Hedwig version과 Tommy Gnosis version 으로 2가지 버전이 있다. 전자는 헤드윅이 토미를 처음 만날 무렵 조그만 카페에서 부르는 노래이고, 후자는 영화 말미에 토미가 헤드윅에게 용서를 구하며 부르는 노래이다. 두 버전 모두 같은 곡이지만, 가사가 틀리다. 여기서 다루는 가사는 Tommy Gnosis version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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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덧1. 개인적으로 영화 헤드윅과 그 OST들은 강력히 추천한다. 

 덧2. 헤드윅이 토미를 처음 만났을 시절을 회상하는 부분에서 헤드윅과 함께 작은 카페에서 <Wicked Little Town>을 연주하는 이들은 영화상에서 주한미군과 결혼하여 이민한 한국여자들로 소개된다. 헤드윅이 밴드맴버들의 이름을 한 명씩 소개할 때 "기타를 맡고 있는 광희∼!" 라고 한국이름을 어색하게 발음하는 대사가 유독 기억에 남는다. 

 덧3. 이 글 역시 나의 불성실한 필사 노트에 전적으로 의존해있다. 따라서 결국 수많은 텍스트의 '짜깁기' 혹은 '인형눈깔붙이기'에 해당될 것이다. 수많은 천 조각을 짜깁기 할 때조차 서투른 박음질 솜씨로 인하여 우툴두툴 튀어나온 볼썽사나운 봉제선들은 모두 미숙한 필자의 몫이다.   

* 병장 김지민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7-06-20 10:22)  


 상병 김현진 
...... 대박입니다. 라캉과 들뢰즈의 주요 개념을 배울 수 있어 좋았습니다. 

 반드시 <가지로> 보내주십시오. 

/ 혹 라캉이나 들뢰즈 입문자들-저같은-을 위해 책을 추천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06-20   

 병장 조용호 
 저도 가지로! 

 긴 주석 하나만해도 책마을 어지간한 글 하나에 해당하는 분량인데 
 거기에 상당한 퀄리티까지 갖춘 주석만 19개라니.. 털썩! 
 다 읽고 리플 달려니까 로그아웃 되있는 건 저뿐만인걸까요? 
 사실 뭐라 담론을 형성할 코멘트 조차 달 엄두가 안나는 대박글이지만 
 가지로를 외치고 싶어서 몇글자 남깁니다. 06-20   

 병장 진규언 
< 가지로> 일단 옮겨주세요. 거기서 정독해보겠습니다. 06-20   

 병장 김지민 
 헤드윅의 노래들을 정말 사랑해요 06-20   

 병장 김병완 
 글 잘 읽었습니다. 얼마전에 읽었던 미셀 우엘벡의 [소립자]의 결론도 결국 아리스토파네스의 에로스를 그대로 차용하고 있었던 거군요. 

 덧. 
'4. 새로운 욕망을 위하여'에서 

" 어떤 의미에서 이 노래는 의 정확한 대척점에 서 있는 곡이다."와 
" 우선 주목해야 할 점은 토미가 을 불러줄 때 헤드윅이 거의 반 나신(裸身)의 모습으로 그의 앞에 서있다는 것이다. "에 오타가 있어요. 06-20   

 병장 김광철 
 지민/ 저도 사랑해요.(웃음) 

 병완/ 고마워요~ 수정했어요. 06-20   

 병장 김남호 
 헤드윅의 광팬입니다. 놀라운 글입니다. 세 번째 읽었습니다. 06-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