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글내생각] 헤겔주의자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병장 박원익 [Homepage] 2009-10-02 15:49:54, 조회: 210, 추천:1
0.
준우님은 <[내글내생각] 회의주의자입니다, 잘 부탁합니다.>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자신의 회의주의적 입장에 대한 자기 변호를 하셨습니다.
"내가 견지하고 있는 태도가 회의주의적 태도이기 때문에 어쩌면 이 이야기는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회의주의 자체가 사실은 태생적인 모순점을 갖고 있기 때문에 ‘회의주의를 견지한다.’ 라고 하는 말 자체가 회의주의적이지 못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회의주의적인 입장에 서있다. 이것이 비겁하다는 데에는 사실 반론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다, 나는 비겁하다."
저는 제가 준우님한테 한 못된 짓에도 불구하고, 준우님이 비겁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준우님의 회의주의적 입장이 본인이 말씀하시는 딱 그만큼 '모순적'이라고 생각하지요. 그런데, 그것에 대해 준우님은 자기는 원래 비겁하니까 그렇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게 전혀 그렇지가 않은데, 자신의 본성이나 심성이 비겁하고 어쩌고는 아무런 이유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다른 방식으로 스스로 토로하신 '모순'이 무엇인지를 제가 최근에 읽은 헤겔 입문서를 배설해보면서 써 볼까 합니다.
1.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보면, '회의주의적' 자의식이란 다들 아시는 주인과 노예의 투쟁을 거친 후에 형성된 자의식의 한 단게로 서술됩니다. 재미있는 건, 자기의식이란 단순한 외부세계에 대한 '의식'을 넘어서, 다른 의식적 존재로부터 '인정'을 받으려는 의식의 형태로서, 회의주의란 다른 뭔가가 아닌 그러한 '자의식'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지요. 이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아시다시피 Skepticism은 고대 세계로부터 '인식론'의 한 형태로서 전승되어 왔습니다. 말하자면 외부세계를 향한 우리의 인식의 여정에 대한 하나의 태도를 보여주는 입장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네 헤겔은 '회의주의'를 의식의 단계에 집어넣지 않고, 자의식의 단계에 집어넣습니다. 의식이란 아직 정신이 다른 의식적 존재가 아닌, 외부대상에 대해 몰두해 있을 때의 정신적 단계인데, 회의주의는 이미 그러한 소박한 인식론적 태도를 넘어선, 말하자면 '자의식적인' 단계에 있다고 말하는 겁니다. 이게 헤겔의 서술에서 재미 있는 점입니다.
여기서 (근대적) 회의주의의 입장에는 어떤 '분열'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얼핏 봐서는 외부세계에 어떻게 접근해야하는지에 대한 방법론을 전개하는 것인 데 반해, 사실은 그것은 엄밀히 말해 이미 그러한 외부세계에 대한 관심이 결여되어 있는 것입니다. 헤겔은 고대의 회의주의자들과, 근대에 들어서 '회의주의'를 자처하는 인간들 사이에 그러한 '간극'이 있음을 주목했던 것이지요. 가령 아직 미지의 세계에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했던 고대인들은, 그러한 접근방식으로서 회의주의를 견지하며 탐구를 진행해 나갔다면, 그러한 형태의 회의주의에 대한 실질적인 역사적 요구가 끝난 근대인들의 경우에는, 그들이 주장하는 회의주의는 외부를 향한 유의미한 인식론적 태도이기는커녕, 단지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자기PR'에 불과하다는, 다시 말해 타인에 대한 인정욕구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헤겔이 보기에, 회의주의의 단계에는 치명적인 모순이 있는 것이지요. 말하자면 회의주의자들이 자처하는 것과, 그들이 실제로 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식의 태도에 대한 윤리적인 설교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회의주의자들은 '인식'에 관해서는 그다지 별 관심은 없는 채 자족적인 자의식으로만 머물러 있지요. 헤겔은 그렇기 때문에 결국 이러한 '모순'을 자각한 회의주의적 자의식이 '금욕주의'의 자기의식으로 넘어간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일단 자신의 입장을 구성하는 모순이 무엇인지를 아는 의식은 더 이상 이전과 동일한 의식이 아니니까요. 하지만 여기서 헤겔 입문서를 쓰는 게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그 다음 단계를 이야기하지는 않겠습니다. 중요한 건, 왜 회의주의적 자의식이 초래되었는지를, 그리고 '자의식'의 본성과 한계는 무엇인지에 관한 것이니까요.
2.
자의식은 의식과 어떤 관계일까요? 일단 의식은 자신이 파악하는 인식 대상이 자신의 관념에서 초래되는지, 혹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사물에서 초래되는지에 대한 관심에 빠져 있는 의식단계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의식이 인식론적 논쟁에 빠져 있는 동안, 그러한 논쟁에서 결락되 '다른 의식'(타자)이 있음을 깨닫게 되면서, 자의식으로 넘어갑니다. 자의식은, 그것은 이전의 의식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동일성'의 문제에 사로잡혀 있지요. 의식적 단계에서도 어떻게 자신이 인식하는 모든 것들이 '동일한' 것일 수 있느냐의 문제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존재의 '대자적' 동일성(그 자체의 정합성)은 동시에 다른 존재들과의 '관계'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대타적' 의존성을 지니고 있으니까요. 자의식에 와서는 이런 문제들을 고스란히 물려받으면서, 자신의 자의식적 동일서이 동시에 타인의 인정에 기초하고 있다는 고통스러운 사태에 직면합니다. 여기서부터 <주인과 노예>의 투쟁이 전개됩니다. 결국 인정을 받는 자와 못 받는 자 간의 '간극'이 현실적으로 발생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들 알다시피 이 투쟁에서 궁극적으로 승리하는 자는 처음에 패배자로 등장했던 노예, 즉 주인을 대자적 자기의식으로서 '인정'해주고, 그들을 위한 노동을 수행했던 자들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회의주의적 자의식은 이 노예의 의식을 물려받은 형태의 '자의식'입니다. 말하자면 노예가 스스로에게 되돌아오면서 그것이 극복된 보다 성숙한 형태의 의식단계라는 것이지요. 노예의 의식은 무엇일까요? 혹은 노예가 스스로에 대한 자기의식 내지는 자의식에 도달-복귀했다는 것은 대체 무슨 뜻일까요? 노예가 어떤 '반성'에 도달할 때 드러나는 사태는 다음과 같습니다. 자족적인 동일성을 인정받으며, 물질적 향락을 누리는 주인의 모든 자존감은 사실 노예의 전적인 '인정'에 기초해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자기-동일성이라는 게 타인의 대타적-의존적 관계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는 모순이 전혀 지양되지 못한 채 남아 있는 것이지요. 이렇게 봤을 때 주인이야말로 노예의 노예라는 궁극의 반전이 발생합니다. 한편 노예의 입장에서, 그들은 주인에 종속된 채, 자신을 부정하는 동시에 세계의 자족적인 상태를 부정하며 그것을 가공하고 변형하는 노동을 수행합니다. 그런데 인정투쟁에서 패한 노예들은, 이렇듯 자신의 노동에 의해 '부정'된 외부세계의 모든 흔적들에서 '자기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말하자면 노예는 자신의 긍정적인 아이덴티티를 결여한 채, 순수하게 부정적인 노동의 힘으로서 존재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부정성의 형태로 자기복귀한 이러한 '노동의 힘'이야 말로 진정한 자기의식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말하자면 자기-동일성을 타인의 인정을 통해서 확보하려는 모든 시도는 앞서 말한 '모순' 때문에 실패로 끝납니다. 그런 동일성은 대자적(자족적)이기는커녕 대타적(의존적)이지요.
그렇다면 노예의 단계에 이르러서야, 자기의식은 스스로의 동일성을 타인의 '인정'을 통한 적극적인 '내용'으로서가 아니라, 순수하게 '부정적인 형태'로서만 확보할 수 있다는 걸 깨닫습니다. 가령 고대의 귀족들은 자신의 작위와 호칭과 족보를 자기동일성의 긍정적 형태로 간주하지만, 그것은 사실 타인의 인정 없이는 공허한 것이지요. 노예들은 그것을 깨닫고 외부대상에 가하는 '부정', 즉 노동을 통해서만, 아무런 적극적인 내용물을 지니지 않은 스스로의 동일성, 즉 "자기관계적 부정성"을 통해 도달한 자기의식으로 존재하는 것이지요. 노예들은 자신의 노동을 통해 외부를 부정하는 동시에, 또한 스스로 변형(부정)시키는 적극적인 활동으로서 자기의식에 도달합니다. 여기서부터 '근대적'인 자의식 내지는 노동윤리가 최초로 그 맹아를 싹티운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가령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와 같은 교양소설 역시도, 일종의 정신적인 '노동'의 여정을 끝없이 지속하는 과정을 서술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정신적인 노동이란, 스스로를 끝없이 자기변형하는 Bildung교양의 여정이지요.
3.
그런데 저는, 실질적으로 주인-노예의 사회경제적 관계가 붕괴한 근대사회에서 일어난 '변화'를 헤겔이 염두에 두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앞서 말했듯이 회의주의자의 자기의식은 노예의 의식을 근대적 형태로 물려받은 것이지요. 하지만, 실제적으로 적대적인 외부 세계와 부딪히고 깨어지면서 '부정성'을 뼈저리게 체험하지 않을 수 없었던 고대의 노예들(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을 생각해 봅시다)과 달리, 단지 그들의 진정성이 아니라 그들의 '자의식'만을 물려받은 회의주의자들은 애초에 노예들이 자신의 목숨을 걸고 체험했던 '부정성'을 이미 자신의 내면 속에서 '선취'했다고 밖에 볼 수 없습니다.
말하자면, 준우님이 회의주의자의 모토로서 압축해 표현한, “나도 모르고, 너도 모르고, 우리는 다 모른다. 다만 알려고 노력할 뿐이다.”에서, 어떤 의미에서는 노예가 자신의 '노력' 내지는 '노동'을 통해 수행했던 부정의 활동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노예의 경우에, 혹은 그러한 상태를 감수해야 했던 고대의 회의주의자들에게, 그러한 부정은 정말로 막막한 현실의 부정성에 부딪혔을 때 비로소 '진정성'을 획득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모르며, 단지 알려고 노력할 뿐이다"라고 말할 때, 그러한 근대인의 발언은, 정말로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외부세계의 적대성을 몸소 체험하고 깨어지는 피투성이의 경험을 깨끗이 향균-살균 처리 한 채 이미 자신의 자의식 속에서 '선취'한 것에 불과합니다. 말하자면 그러한 태도는 몰역사적인 것에 불과한 것이지요. 헤겔이 결국 회의주의를 극복하고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한다고 역설한 것은, 그가 회의주의를 넘어선 긍정적인 지식이나 복안이 있어서가 아니었지요.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10-13
10:10:39
상병 박준우
원익씨의 글에 대해서 '감사함'을 느끼는건 처음인거 같습니다.(웃음)
한가지 이해가 안가는 점이 있는데, '근대인의 발언은, 정말로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외부세계의 적대성을 몸소 체험하고 깨어지는 피투성이의 경험을 깨끗이 향균-살균 처리 한 채 이미 자신의 자의식 속에서 '선취'한 것에 불과합니다.' 라는 문장이 잘 이해가 안되네요. 근대인의 세상도 저는 사실 예전의 생활과는 그다지 다를게 없을거라고 생각하거든요. 뭐 예전의 생활은 잘 모르겠지만서도, 근대라는게 그렇게 인간자체에게 큰 변화를 가져다주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전부터 지금까지 인간을 피투성이로 만드는 개념들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2009-10-02
17:12:53
병장 박원익
일단 고대인과 근대인의 근본적인 차이는 차치하고서라도, 헤겔이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은 회의주의라는 게 적어도 요즘 세상에서는 '자의식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가령 그게 외부대상에 대한 치열한 탐구에서든지, 혹은 타인과의 치열한 인정투쟁에서 직접 도출된 결론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말하자면 외부세계를 향한 '부정'이 미리 선취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미 출발점에서부터 부정되어야 할 것으로 상정된 외부세계의 자명성을 굳이 다시 자의식적으로 부정하는 데에서 모순이 발생하는 것이죠.
말하자면 이 모든 건, 준우님의 회의주의니 뭐니 하는 것도 결국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한 게 아니면 뭐라는 겁니까? 2009-10-03
07:54:44
상병 박준우
제 입장에서는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직접도출인지에 대한 문제, 혹은 치열한 인정투쟁인지 아닌지는 판단할수 없는게 아닐까 합니다.
벗어날수 없는 모순된 이야기이긴 하지만, 회의주의는 보여주지 않겠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예, 회의주의를 견지하는 이유는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그건 다른 이즘들도 별반 다르지 않을거라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제가보기에는 그렇습니다.
사실 모순되지 않은 회의주의를 견지하려면 결국에는 침묵하는수 밖에 없는거 같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탐구해 나간다는 측면에서 회의주의는 침묵할수 없습니다, 침묵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알수 없다고 하는 독단이기 때문에 회의주의는 떠들수 밖에 없는거 같습니다.
회의주의는 목적, 혹은 결과, 결론 이런 단어를 상정할 수 없습니다. 회의주의라고 떠드는것이 보여주기 위함이지만, 이것은 과정에 불과합니다. 제가 이런것을 떠드는 목적은 계속회의하기 위함입니다. 이걸 보여주고 거기에 대한 반응을 누군가가 다시 보여주고 그걸 본 제가 다시 보여주는 반복을 계속하는것 자체가 목적이라고 할 수 있겠죠. 예, 쉽게 말하자면 죽을때까지 수다떨자는 거고, 그러기 위해서 모르는걸 아는척하지 말자는거죠. 2009-10-03
09:32:21
상병 장동욱
꼭 눈에 보이는 억압하에 투쟁함으로써 실질적인 피, 를 흘려야 외부대상에 대한 치열한 탐구의 증거가 되고, 타인과의 치열한 인정투쟁의 징표가 되는지 의문입니다. 시대적
상황을 고려한다면 지금에서 '정말로 막막한 현실의 부정성'을 깨닿는데는 꼭 피가 필요하지는 않다 생각합니다. 당장 우리 주변만 둘러보아도, 이전 경찰국가의 통제보다 더 두려운 디지털 판옵티콘, 이 둘러싸고 있죠. 이러한, 디지털과 정보, 그 속을 뚫어 흐르는
감시의 거미줄 사이에서 자신의 자의식을 위해서 싸우는 것도 칼을 듬과 다르지 않다 생각 합니다. 요즘은, 살아있는 사람도 '정보'가 없다면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될수 있는 세상이고, 존재하지 않게 할수 있는 세상...거기서 스스로의 자의식이 부재하고 보여줌의 노력조차 없다면 사라져갈 뿐 아닐런지요. 급한 댓글이고 부족한 바가 많아, 글쓰기 버튼을 누르지 않을까 하다, 무식하면 용감하다 하여 눌러봅니다.(어차피 덜컹거리는 머릿 속 더 잃을 것도 없으니까요.) 2009-10-03
10:37:17
병장 박원익
우선 저는 준우님이 '회의주의자'를 자처하는 것 치고는 본인 자신이 회의주의의 포지션에 있어서 일관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사실 준우님이 회의주의자 정도나 되는지에 대해서 저는 '회의적'이랄까요(웃음). 가령 준우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침묵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알수 없다고 하는 독단이기 때문에 회의주의는 떠들수 밖에 없는거 같습니다."
어떻게 해서 침묵 그 자체가 독단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회의주의자가 자신의 입장에 대해 선전하지 않아도, 회의주의자에게 할 일이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확신'하는 건 회의주의보다는 오히려 흄이나 버클리 주교를 비판한 칸트주의에 더 가까워보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칸트는 자신 나름의 절실한 '기획'이 있어서 그러한 '확신'을 가진건데, 준우님은 단지 스스로 죽을 때 까지 떠들겠다는 결심만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왜 굳이 '회의주의'라는 용어를 선택했는가? 라는 의문을 품어봄직도 하지요.
사실 회의주의라는 것도 외부세계나 인식대상을 향한 '회의'가 아니라, 단지 책마을의 이런 저런 마음에 들지 않는 댓글 정도에 대한 것이라면, 저는 그것에 다른 이름을 붙여도 무방하다고 생각합니다. 2009-10-03
10:38:28
상병 박준우
침묵이 옳은가에 떠드는게 옳은가에 대해서 조차도 저는 회의합니다. 결국 회의주의는 회의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회의할수 밖에 없기 때문에 어차피 회의주의는 모순입니다.
일단 회의주의에 일관된 포지션을 요구하는것 자체가 약간 무리한 요구라고 하고싶네요.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나요. 저는 비겁하다고.
죽을때까지 떠들지 그럴지 않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어차피 일관된 침묵도 독단일수 있고 일관된 수다도 독단일수 있습니다. 그 어떤것도 회의주의 입장에서는 독단이고, 오직 회의하는것만이 독단이 아니라면 그 회의를 어떻게 독단적이 않은 방법으로 표현할수 있을까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표현해야 할지도 생각해 보아야겠군요. 결국 회의주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겁니다. 아, 아무것도 할수없을거라고 생각하는것도 독단일지도 모르겠군요. 예, 회의주의라는건 참 편리하죠. 그래서 저는 비겁합니다.
사실 저는 제목에 '회의주의자' 라고 했지만 '회의주의'에 공감할 뿐이지 회의주의자는 아닙니다. 예, 회의주의라는건 참 편리하죠. 그래서 저는 비겁합니다.
왜 회의주의라는 용어를 선택했는가 하면 욱했기 때문입니다. '오독' 과 '독단'과 '면상으로 날아오는 펀치'에...
다른 이름을 붙여도 무방합니다. 저는 회의주의도 회의하니까요. 2009-10-03
10:57:11
병장 박원익
준우/잘 알겠습니다. 근데 피차 간에 욱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웃음). 다만 저는 비겁함보다는 생산적인 담론이 더 풍성해지길 바라는 마음이지요. 2009-10-03
11:05:13
상병 박준우
원익//저도 마찬가지로 생산적인 담론이 풍성했으면 좋겠습니다. 다만 그냥 제가 생각하는 선이 약간 침범당한듯 해서 욱했을 뿐입니다.
뭐, 그건 그렇고. 일본소설에 자주 보이는 화자의 태도는 저도 동감합니다. 기만적이기는 하지만, 저는뭐 그런 기만이 딱히 싫지도 않을뿐더러, 오히려 인간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일본소설을 좋아합니다만... 2009-10-03
11:11:24
병장 박원익
동욱/엄... 조금 논점을 오해했다고 보이는 게, 저는 회의주의가 엄밀하게 일관된 입장으로서 존재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말씀드리는 겁니다. 가령 동욱님이 훌륭하게 든 사례들, 판옵티콘, 막막한 현실의 부정성, 이런 것들이 실제로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 '회의주의'적인 입장을 자처하는 건 별개의 문제이지요. 제 글과 그다지 충돌하는 논거는 아닌 것 같습니다.
제가 사실 염두에 두는 건 책마을에 있는 특정인들보다는, 요즘 젊은 감각의 일본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화자의 태도 같은 것이지요(웃음) 거기서는 이미 모든 세계가 처음부터 '지양'되어 있습니다. 이 세계는 전혀 새로운 게 아니고, 아무 것도 확신할 수 없는 위태로운 것이다라는 투죠. 그리고 그것을 다시 한 번 더 재확인하기 위해 다시 한 번 그 세계를 경험하려 하지요. 그러고서는, 어쨌든 자기는 말을 해야하니까, 어쨌든 써야할게 있으니까, 좀더 쉽게 말해서, 소설가로서 돈은 어쨌든 벌어야 하니까, 라는 자의식적인 어조가 나오는 겁니다. 이건 그 자체로 기만이라는 거지요.
여기서 동욱님이 이해하셔야할 것은, 처음에 즉자적으로 존재했던 외부세계를 '부정'해나가는 최초의 충격을 이미 옛날에 경험해버린 상태에서, 여전히 회의주의적인 태도를 견지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자기모순적이라는 겁니다. 방금 언급하신 판옵티콘(더욱 촘촘해진 정보망의 감시 등등...)의 사례에서도, 당장에 육박해오는 위험을 이제 알고 있다면, 아직도 판옵티콘 운운하면서 겁에 질려하거나, 관망하거나, 매트릭스 안에 갇힌 자신의 자아를 되돌아보고 그럴 게 아니라,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하는 것이지요. 2009-10-03
11:13:41
상병 장동욱
병장 박원익 //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라는 측면에서 드리는 말입니다만 매트릭스 안에 갇힌 자아를 잃을 위기에 있으면서, 스스로 강렬한 자의식을 구축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히 해야 할 일 중 하나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기만'과도 같은 '어쨌든 돈은 벌어야 하니까'투의 글을 좋아하지는 않습니다만 그러한 '현실에의 디딤'도 필요한 무언가가 아닐지요.(연명의 대책, 이랄까요...) 기만이라, 사실 문제는 그런 글에, 감정에 기만당하는 독자의 '의식부족'이 아닐런지요. 진리는 사람마다 다르게 볼 수 있겠지요. 다르게 접근해 갈 수도 있고, 자기모순적인 곳에서 헤멜지라도 그것이 스스로 나가려는 길을 찾는 과정 중 하나라면 유의미하게 생각할수 있다 생각합니다. 사실 무의미할지라도 유의미하게 볼수밖에 없지만요.
그리고 저야 원체 '논점'에 안맞는 산만한 댓글을 달때가 많은지라..그점에는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하하. 배울수 있을 때, 이런저런 말 할때가 지금처럼 좋습니다. 부족한 제 스스로 배워가는 과정이지요. 2009-10-03
11:21:31
병장 박원익
음, 다시 정리를 하자면(땀 삐질)
필자의 입장에서, 저는 제 글이 수용되고 나서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가 나오는 게 좋지요... 최소한 제 논점은 이런저런 넋두리에 걸쳐 있는 게 아니라, 헤겔의 논의를 따라가면서 어떻게 현실에 접목시킬 것이냐는 '한정된' 주제에 맞춰진 거니까요.
가령 왜 회의주의가 '자기의식'의 범주에 들어가는지에 저는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이게 가장 흥미로운 주제인데,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서 좀 유감입니다.
여기서 인식론이라는 형태로 유지되었던 고대의 회의주의가 근대에서는 공허한 자의식으로만 유지될 수 밖에 없다는 진단이 함축되지 않았나 하는 가설을 내 보았습니다. 거기에는 근대의 현실이 고대의 그것보다 덜 투쟁적이거나 덜 적대적이라는 이야기는 들어있지 않았습니다. 단지, 근대적 형태의 회의주의가 즉자적인 세계를 부정하며 그것을 고통스러운 노동과 투쟁의 과정으로 파악하는 노예의 의식을 물려받았다고 할 때, 그것은 이미 그 역사적 기원과 전혀 다른 형태가 될 수 밖에 없다는게 본래 논점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미 기존의 갈등과 적대성들이 좋든 싫든 '이성적으로 파악된'(동욱님이 말한 판옵티콘이 단적인 실례입니다) 상태에서, 그러한 갈등과 적대성을 이유로 회의주의를 내세운다면, 그것은 이미 퇴행적인 것으로 화해버립니다.
바로 이 '간극'이 눈에 보이지 않나요? 2009-10-03
12:10:18
병장 김예찬
갑자기 스켑티컬레프트라는 사이트가 생각나는군요. 회의적 ㅈ파들의 모임이라고 주장하는데, 실질적으로는 ㅈ파들에 대해 회의적으로 생각하는 모임이죠. 흐흐.
이미 실제로 겪지 않아도 수많은 풍경들이 우리 눈에 들어오는 근대(신문의 발명 부터로 잡아야할까요?)이기 때문에 회의주의란 '그게, (내가 부딪힌 현실은 아니지만) 사실은 이런거야. 그래, 그렇고 그런거지'로 변해버렸다는 말로 이해하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바깥의 모든 것들은 내가 겪지 않아도 다 아는, 그래서 제대로 관심을 가지고 관찰할 필요도 없는 풍경들로 변해버리고, 나는 더 이상 바깥의 무엇도 배울 필요가 없는 사람으로 여겨진다는 이야기인 것 같은데.. 맞나요? 정신적인 늙은이가 되어버린다는 이야기군요. 2009-10-03
15:54:27
일병 김태영
후아..... 살벌한 분위기.
약간 포인트를 벗어나게 하는 점 죄송한데,
'주인과 노예의 투쟁'의 과정에 대해 설명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마음가짐) 2009-10-04
07:00:24
상병 김경율
태영/ 깊은곳까지는 모르지만 제가 알고있는 선에서 알려드립니다.
<주인과 노예의 투쟁>
주인의 입장 : 주인 →(과정) →노예 →(과정) →주인
노예의 입장 : 노예 →(과정) →주인 →(과정) →노예
상황)
주인과 노예가 있다. 주인은 자기가 소유한 노예에게 일을 시킨다.
노예는 주인이 시킨일을 한다. 그러면서 경험을 쌓고 능력을 쌓아가면서
점점 주인을 이해하게 된다. 주인은 노예를 인정해준다.
주인은 노예에게 일을 시키게 되면서 일하지 않고 몸과 마음 편히 지낸다.
주인은 게을러지고 노예에게 의지하게 되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망각하게 된다.
결국 주인은 노예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가 된다.
이런 이유로 노예는 주인이 되고 주인이 노예로 서로의 입장이 바뀌게 된다.
덧붙여
1. 주인은 왜 노예로 전락하게 되었는가? (=노예는 어떻게 주인이 되었는가?)
2. 노예 상태를 한번 경험한 주인은 다시 노예로 전락하기 않기 위해 어떤 자세를 취해야할까?
뱀다리.1) 혹여나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지적부탁드립니다. 2009-10-04
12:47:15
병장 박원익
김예찬님은 이렇게 말씀하셔습니다. "바깥의 모든 것들은 내가 겪지 않아도 다 아는, 그래서 제대로 관심을 가지고 관찰할 필요도 없는 풍경들로 변해버리고, 나는 더 이상 바깥의 무엇도 배울 필요가 없는 사람으로 여겨진다"
맞는 말입니다. 다만 거기에 더해, 이미 세상을 부정한 포지션에서 여전히 끊임없이 말을 하고, 보고 듣는 생의 과정을 반복하는 것에서부터 헤겔이 말한 근대적 회의주의가 유래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요새 젊은 감수성의 소설가들의 포지션이 아닐가 생각합니다(웃음)
김경율/주인과 노예의 투쟁, 이에 관한 글 한 편을 제가 부탁해봐도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