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원영씨의 마지막 전언입니다.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만 리장님의 활약에 힘입어 드디어 허원영씨의 답변을 받아낼 수 있었습니다. 비록 이미 전역하시긴 했지만 허원영씨의 마지막 전언을 바라시는 분이 많으실 것이라 생각하고 회원특집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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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선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 얼개에도 썼듯이, 이런 자기소개 앞에서 저는 많이 난감해하는 편입니다. 자기소개할 내용을 생각하다 보면 실존적인 고민에 빠질 때가 많아서요. '나는 어떻게 살아왔는가', '나는 어떤 존재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쉽게 대답하지 못하게 됩니다.

나이 학력 등의 '스펙'으로 자기소개를 하는 것은 퍽 우스운 짓인 것 같고, 그렇다고 저의 성장사를 소개하자니 이미 글에서 다 해버렸군요. 저의 소개가 궁금하신 분들은 제 글을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질문 & 답변


상병 송희석 

이제 벌써 가시네요. 하하. 상병때부터 봤는데, 어느덧 제대이군요. 아무튼, 첫질문은 원래 가벼운 질문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원칙 아닌 원칙이 있으니 질문할께요. 

1. 제가 알기로, 원영님은 동생분이 있으신걸로 알고 있어요. 저도 동생하나 있거든요. 전 동생하고 예전에 많이 싸우고 티격태격하고 그랬지만, 지금은 나이를 먹어서, 그냥 대화를 하는데, 문제는 서로 대화가 매우 적어지고 있어요. 물론 서로 공통점이 전혀 없다는점에서도 그런면이 있지만, 보통 가족끼리는 대화를 해야하는데 말이죠. 여기서 본론으로 들어가, 원영님은 가족간의 소통부제에 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특히 이것을 해결할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의견을 듣고싶습니다. 

☞ 동생이 있긴 하지만, 저와 쌍둥이기 때문에 그냥 '동생'이라고 하기엔 좀 그렇군요. 아무튼 저 역시도, 예전에는 많이 다투고 그랬지만 현재는 별 탈 없이 지내고 있습니다.
가족간의 소통부재라는 것이 어떤 이유로 일어나느냐에 따라서 좀 다르게 봐야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가족이 굉장히 밀접한 관계이기는 하지만, 먹고 살기 바쁜 현대사회에서는 접촉하는 시간이 줄어들 수밖에 없으니까요. 예전의 인식에 따라 무조건적으로 '가족끼리는 대화를 해야한다'고 생각해서는 해결하기가 참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자녀들이 학생일 때에야 부모의 의무 및 권리로서 자주 대화를 하고 별 탈 없이 크도록 이끌어야겠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성인이 된 뒤에는 이야기가 다르지 않을까요. 각자가 독립된 인간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고 바라고 간섭하는 구질구질한 인식을 탈피해야만 이 시대에 적합한 가족간의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일전에 밝힌 가정사처럼 좀 복잡한 문제들이 얽혀있는 관계로, 제가 이런 이야기를 큰 목소리로 이야기할 처지는 못됩니다만.



2. 두번째 질문입니다. 원영님에 칼럼중 '왜 쓰는가?'라는 문학론을 쓰신적이 계십니다. 그것 뿐이 아닌 여러가지 글을 많이 남기셨습니다. 이러한 원영님 칼럼중 대부분의 주내용은 소통이라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원영님 칼럼들을 읽고 몇몇사람들 - 물론 저같은 녀석 빼고 - 은 글을 받아들이는데, 다소 착오가 일어나는 모습이 보입니다. 이것은 절대 원영님의 글이 잘못쓰여진것이 아니라 어느 글을 읽어도 발생하는 문제입니다. 

전 이러한 문제는 당연히 생겨난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서로가 단어와 문장을 받아들이는데 있어서 이중적인 생각을 할수 있기 때문입니다. 단어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나의 단어로 인해 두가지뜻을 생각할수 있으며, 여러 문장들의 복잡한 연결로 인하여, 다른 문장을 같이 떠올릴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으로 인해 글을 쓴 당사자와 독자는 '소통'에 거리가 멀어지게 된다고 판단합니다. 

여기서 저는 적어도 개인적으로 해결할수 있는 방법은 단어선택과 문장에 있어서, 원뜻만 그대로 담을수 있는 것들만 선택해서 글을 쓰는것만이 '소통'의 간극을 줄일수 있는 방안이라 생각합니다. 이것은 물론 저만의 생각입니다. 허원영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글을 많이 쓰셨고, 그로인해 독해의 문제를 많이 겪어보셨을겁니다. 원영님만의 해결책이 궁금합니다. 

☞ 제가 쓴 글들의 주된 내용은 '소통'이라기보다는 '책임'에 있지만,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겠죠.
희석 님이 말씀하신 '소통의 간극'이 어떤 의미인지가 확실치 않지만, 반대 의견이나 논리적인 반박이 아니라 글의 내용을 '오해'하는 경우를 이야기하시는 것으로 생각되는군요. 그렇다면 희석 님이 말씀하신 방법만으로 해결이 가능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원뜻만 그대로 담을수 있는 것들만 선택해서 글을 쓰는 것"이라는 부분에서 특히 그렇습니다. 그런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런 일은 애초에 불가능합니다. 글이라는 것 자체가 표현의 수단일 뿐이므로 아무리 논리적이고 객관적으로 쓴다고 해도 본래의 뜻을 일백 퍼센트 가감없이 전달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그런 게 가능하다면 이 세상의 대부분의 글들은 쓰일 필요가 없었을테지요.
만약 그 표현을 '오해의 소지가 없도록 최대한 간결하게' 쓴다는 것이라면, 그런 방향을 지향하고 있는 저로서는 거기에도 동의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 것만으로 '오해'의 가능성이 줄어든다면야 좋겠지만, 세상은 그렇지가 않으니까요. 글이든 말이든, 어떤 표현물이라도 오해의 소지는 존재하고, 또 오해하는 사람 역시 100%의 확률로 존재한다는 것이 저의 기본적인 생각입니다.
저의 글쓰기를 뒷받침하는 생각은, 어떤 '주장'을 하려는 글을 쓸 때, 이 글의 내용을 오해하지 않고 이해하는 사람의 수를 30% 정도로 기대하자는 것입니다. 아예 기대치를 낮추는 것이지요. 물론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기 위해 최대한 노력해서 글을 쓰기는 하나,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과 '소통'할 수 있거나 '공감'을 얻으리라는 생각은 전혀 하고 있지 않습니다. 차라리 반대로, 언제 어디서나 대략 절반쯤의 '소통 불가능한' 사람들이 존재하며(물론 이 사람들이 잘못되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내 의견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에 선 사람은 일백 퍼센트의 확률로 존재한다, 고 믿는 편이 속편하고 진실에 가깝지요. 터무니없는 비난이나 잘못된 반대에는 정당하게 반론하고 논리적인 의견에 대해서는 고민하며 토론해야겠지만 터무니없는 기대는 버리는 게 정신건강에 이롭습니다. '소통 불가능한' 사람이 절반 정도라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 낙관적인 견해일까요.



3. 마지막 질문입니다. 보통 마지막은 화려하게 끝나야 미덕이 남겠죠?(웃음). 그런의미에서 물어보겠습니다. 원영님은 '사랑'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칼럼중에 '사랑'에 대해 쓰신글을 거의 접하지 못해서 드리는 질문입니다. 

이상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전역인사때 뵙겠습니다.   

☞ 빅토르 위고가 그랬답니다. '사랑은 온 우주를 하나의 작은 인간으로 축소시키고, 그 하나의 인간을 신으로까지 확대하는 것이다.' 저도 대략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병장 김희곤

이궁.. 전역이 얼마 안남으셨다니 축하드려야할지 아쉬워해야할지 가닥이 잘 잡히지 않는군요. 
아쉬움을 조금이나마 달래고자 약간의 질문을 용기내어 해 봅니다. 뭐. 워낙 밑천이 없는지라 그리 어렵지는 않을꺼예요.(웃음) 

4. 책마을의 글들을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한지는 최근인지라 원영님의 생각들을 자세히 알 수 있는 기회를 많이 접하지는 못했지만 몇몇 글들을 보아오건데 원영님의 글쓰기는 친절하다는 평가를 내릴 수 있을만한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지한 저와같은 중생을 구제하사 원영님의 글쓰기 노하우를 전수해 주신다면 어떤것이 있을런지요. 

☞ 무조건 많이 읽고 많이 쓰는 것이다, 라는 말을 해봤자 별 도움이 안되겠지요. 사실 그건 일반인들에게 필요한 조언이라기보다는 전문적인 문인들에게나 해당되는 말이니까요. 뭐 하긴 학생(또는 군인) 신분일 때처럼 글쓰는 연습할 수 있는 시간이 많은 시기가 없겠지만, 모든 사람이 그럴 수야 없겠지요. 사실 저는 '글쓰기 노하우'를 말할 만한 입장이 못됩니다. 전문적인 글장이도 아니고, 스스로도 누군가에게 그런 발언을 할 수 있을만한 자격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거든요. 그냥 제 경험에서 나온 몇 가지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저에게 있어서는 절대적인 명제인데, 우선 '무엇을 왜 쓸 것인가'에 대한 명확한 규정 없이 나온 글은 절대로 그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글의 요지가 흐리멍텅해질뿐더러, 자기 자신조차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는 글이 되어버리니까요. 과연 무슨 내용을 어떤 이유에서 쓸 것인가가 명확하지 않으면 만족할 만한 글이 나오지 않을 뿐더러 차라리 쓰지 않는 게 낫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이 두 가지 - '무엇'과 '왜' - 가 확실해지면 '어떻게'는 자연스럽게 나온다는 것이 저의 경험입니다.
일반론적이고 무책임한 이야기인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도 않습니다. 저 두 가지를 지키지 못하는 글들은 수도 없이 많거든요. '이것'에 대해 이야기하다 '저것'으로 흐르는 글이 좋은 글이 될 리가 없으며, 'A'라는 이유로 논지를 전개하다가 'B'라는 이유를 들어 종결해버리는 글쓰기가 남들을 납득시킬 수 있을 리가 없습니다. 일기라면 모르겠지만 적어도 남들에게 읽히고 싶고 주장을 하기 위해서라면 저 두 가지를 지켜야 합니다.
그리고 다 쓰고나서 꼭 다시 한 번 읽어보는 것이 아주 유용합니다. 다시 읽어보고 '본인도 이해할 수 없는 표현'은 삭제하는 것이 좋은 글을 쓰는 지름길입니다. 본인이 이해할 수 없는 표현은 쓸 수 없을 것 같지만 그런 일은 자주 일어납니다. 글쓰기는 의식적으로 일백 퍼센트 깨어 있는 상태에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흐름'같은 것이니까요. 그러므로 글을 다 쓴 뒤에 잠시 커피 한 잔 마시거나 밖에서 바람 좀 쐬고 온 뒤에 다시 글을 읽어보는 것은 중요합니다.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거나 비논리적인 표현, 또는 앞뒤가 맞지 않는 문장들을 찾아낼 수 있거든요. 본인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다른 사람도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정리하면 글이 아주 깔끔해지지요. 거기다가 스스로가 이해할 수 있는 글을 쓰면 자신에게 당당할 수 있답니다. 누가 잘못 썼다고 해도 왠만해서는 흔들리지 않게 되니까요.



5. 글을 쓰는데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겠지만 저의 경우에는 대부분이 저의 생각을 다른사람에게 전달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이 언어라는 것이 참 저의 생각이나 감정을 명확하게 표현하지 못해서 애를 먹이는 경우가 한두번이 아닙니다. 생각에 주안점을 두게되면 전달이 애매모호 해지고 그렇다고 전달에 목적을 두게되면 생각을 명확하게 표현하기가 어렵더라구요. 대부분의 이유는 언어의 자의성이 문제가 되어 일어나더군요. 원영님께서는 언어의 한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그리고 그것의 해결책이 있다면 어떤것인지 궁금하군요. 

☞ 2번 질문과 비슷하지만 조금 다르군요. 희석 님이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를 물어보셨다면, 희곤 님은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에 중점을 두시는 것 같아요.
20세기 초 논리실증주의 이후에 언어가 곧 사고라는 식의 발상이 많이 퍼져 있는데, 제 생각으로 그런 발상은 '언어를 통하지 않고서는 표현할 수 없는' 인간의 근본적인 결함 때문에 생겨난 듯 합니다. 말하지 않으면 전달되지 않고, 전달되지 않으면 알 수 없기 때문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언어 이전의 어떤 '사고과정'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발상에는 좀 의문이 듭니다. 내가 보는 이 손가락, 키보드, 모니터 같은 것들의 감각은 이미 '언어 이전'에 존재하는 것이니까요. '생각'이나 '감정' 같은 추상적인 것 역시, 언어와 개념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일지라도 '언어가 닿을 수 없는' 그 무엇으로서 자리잡고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 타당하다고 봅니다.
이런 '생각'이나 '감정'을 명확하게 표현할 수 없는 '언어'라는 도구에 불신감을 가지는 것은 인간으로서 당연한 일이겠지만 저로서는 2번 질문에 대한 답변과 비슷한 말을 할 수밖에 없네요. 자신의 감정을 70% 정도만 글로 옮겨내도 그건 굉장히 훌륭한 글이 아닐까요. 그리고 어쩌면 글에 쓰지 못한 나머지 30%가 글 사이의 여백으로 드러나는 것이 정말로 멋있는 글쓰기일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생각을 100% 글로 옮길 수 있느냐 없느냐는 둘째치고, 그렇게 하면 과연 무엇이 남을까요. 저는 이 질문에 대한 답변에도 일종의 '체념'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애초에 완전한 소통이나 전달 같은 건 없다는 체념, 그런 게 있어야 글을 좀 더 수월하게 쓸 수 있고 또 사람들이 받아들이기도 쉽지 않을까요.



6. 마지막 질문은 좀 짖은 걸로 드려볼까요? 첫키스의 짜릿한 순간에 대해 코멘트를 날려주신다면? 솔직히 그것에 대한 원영님의 구체적이고도 논리적인 친절한 글쓰기를 기대하는 것은 저의 헛된 망상일까요?(웃음) 

이상입니다. 또 뵐 수 있기를........   

☞ 첫키스! 기억이 나지 않아요(거짓말). 거기에 대한 구체적이고도 논리적인 친절한 글쓰기를 기대하는 것은 포기하셔야겠군요. 제가 이래뵈도 개인적인 부분에 대해서 꽤나 보수적인 성격이 강해서요. 저의 '사랑'에 대한 영역은 '출입금지' 테이프가 몇 겹이나 둘러쳐져 있답니다.






상병 조주현 

아아 통성명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 이런, 이런 특집이!!! 크롸롸롸-(투명드래곤) 

7. 언젠가 누구에겐가 꼭 한번 물어보고싶었습니다. 사람에겐 꼭 한가지쯤은 어느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마음의 솟대와도 같은 무언가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현재' 원영님에겐 그것이 무엇인지. 제 생각과 반하신다면, 원영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 "어느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마음의 솟대", 그건 일종의 신념을 말하는 것이겠지요. 그런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물론 있겠지만, 다 그렇지는 않은 것 같아요. 인간은 생각보다 강하지만, 생각만큼 강하지는 않다고나 할까요. 약한 부분도 많고, 사정에 따라서 양보할 수 있는 융통성도 굉장히 많은 동물이지요. 그러므로 모두가 "양보할 수 없"을 정도의 신념을 갖고 사는 것은 아닌 듯 합니다.
그렇지만 저에게는 그 정도는 아닐지라도 그 비슷한 것은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침해받고 싶지 않고, 지키고 싶은 무언가가 있지요. 그건 말로 하기에는 참 어려운 일입니다. 말로 하면 의미가 없어지는 종류의 것이기도 합니다. 그건 저의 이상과도 같은 것이고, 모두가 이러이러하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희망사항인 동시에 나는 이러이러한 삶을 살아야겠다는 다짐이기도 합니다. 그것을 매일 매시 매분 지키며 살아갔으면 좋겠지만, 그것을 침해당하고 또 피치못할 사정으로 양보하는 것이 인간의 삶이기도 한 것 같군요.



8. 사람이 삶을 사는데 있어서 이것만큼은 꼭 갖추어야 한다라고 생각하는 게 있다면 세가지만 꼽아주세요. 덧붙여서, 언제까지는 갖추어야겠다는 것까지. (그 삶은 원영님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것이었으면 좋겠습니다) 


☞ 첫째, 책 읽는 버릇. 취미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독서는 습관이 될 때에야 위력이 발휘됩니다.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요. 그리고 그 버릇은 이후의 삶에 있어서도 훌륭한 동력원으로 작동하겠지요. 이건 어렸을 때부터 갖추는 게 가장 좋을 것 같습니다.
둘째, 세상은 절대로 만만하지 않다는 사실을 몸으로 깨닫는 것. 어른들 중에도 이게 체화되지 않은 사람이 꽤 많습니다. 세상은 절대로 내 뜻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명확한 사실, 이걸 입으로만 말할 수 있고 머리로만 아는 게 아니라 몸으로 절절히 체험하는 것은 인생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 같습니다. 한국 남자들은 대부분 군대에 와서 이걸 깨닫는 것 같은데, 제 생각에는 좀 더 일찍 깨닫는 게 삶을 사는데 있어서 이롭지 않나 싶습니다.
셋째,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대답. 일전에 마루야마 겐지의 에세이를 읽은 적이 있는데, 거기에 이런 구절이 있었어요. "세상은 네가 뭘 하고 싶느냐를 따지지 않아. 네가 뭘 할 수 있느냐로 너를 판단한다구." 그 점이 옳으냐 그르냐를 떠나서, 스스로에게 '너는 무엇을 할 수 있느냐'고 물었을 때 자연스럽게 대답할 수 있는 것이 하나라도 있어야 삶을 제대로 살 수 있을 거라는 게 저의 생각입니다. 저 역시도 아직 '당당히' 대답할 수 있는 것은 없지만, 적어도 서른이 되기 전에는 꼭 갖춰야 하지 않을까요.



9. 마지막으로, 간간히 드러났던 그 음악적 취향이 정말 궁금합니다.(긁적) 

아흐, 동동다리! 인연의 끈을 타고 언젠가 또 만나겠죠. 그때까지 안녕, 안녕히!   


☞ 저의 음악적 취향이라고 해봐야, 뭐 깊이를 운운할 정도로 체계적이고 머리 아프도록 들은 게 아니라서 그냥 아티스트의 나열이 될 수밖에 없겠군요.
저의 음악 취향이 시작된 건 일본 음악이었고, 종종 게시판에서 보여졌듯이 히데와 시이나 링고라는 두 뮤지션을 가장 좋아하고 있어요. 그 외에도 관심이 가는 그룹들은 많았는데, 요즘은 시들하군요. 마지막으로 일본 음악에서 관심을 가졌던 계열은 시부야계랍니다. 코넬리우스라던가 피치카토 파이브, FPM 같은 그룹에 귀를 기울였었죠. 브릿팝 쪽에도 취미가 붙어서 래디오헤드와 콜드플레이, 블러 등의 음악도 자주 들었고, 퀸이나 비틀즈 같은 예전 그룹도 많이 좋아하는 편입니다. 대학교 들어가서는 재즈도 듣기 시작했는데, 그 넓고 방대한 세계를 속속들이 알지는 못하고 그냥 몇몇 뮤지션들의 몇몇 앨범을 즐겨 듣는 정도예요. 듀크 조던이라던가 스탄 게츠, 빌 에반스 같은 사람들이지요. 한국 뮤지션 중에는 꾸준히 합격점 이상의 음반을 내는 그룹들을 좋아해요. 언니네 이발관이라던가 롤러코스터, 클래지콰이 같은 그룹이지요. 옛 가수 중에는 심수봉도 꽤나 좋아하는 편이고(백만송이 장미는 최고입니다), 김광석도 좋아했었군요. 대략 이 정도입니다.






병장 박준응 

이 질문만큼은 꼭, 해보고 싶었어요. 

10. 자나깨나, 꿈에서도, 화장실에서도 날 사로잡고 있고, 내 평생 하지 않으면 무조건 후회할 것 같은 하고싶은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몸을 옥죄고 있는(그 대상은 어쩌면 원영씨와 그리 다르지 않을 것들 - 가족이라든가, 심적 채무라든가, 윤리와 같은 - 에 의해),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리 나쁠 것 같지도 않지만 별로 내키지 않는 그럭저럭 살아가는 데에는 훌륭한 정도의 해야만 하는 일이 서로 상충한다면 어떤 것을 선택하시겠어요? 둘 중 하나를 꼭 지금 선택해야 하고, 한 번 선택하면 되돌릴 수 없다면......? 

인연의 끈을 타고 곧 만나겠죠. 대답 기대할께요.   


☞ 이런 질문은 실례입니다.(웃음) 아시잖아요, 이런 양자택일이 답변자에게 어떤 가혹한 시련을 주는지를.
답변하자면, 준응 씨의 말처럼 그토록 집요하게 자기를 붙잡고 있는 일이라면 무조건 해야 한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그러나 저의 경우에는 "한편으로는 그리 나쁠 것 같지도 않지만 별로 내키지 않는 그러저럭 살아가는 데에는 훌륭한 정도의 해야만 하는 일"(길군요)을 먼저 할 생각입니다. "넌 어째서!"라고 물어도 소용없군요. 저에게는 준응 씨의 말처럼 그토록 집요하게 저를 붙잡고 있는 그 무엇이 없어요. 저의 인생관은 기본적으로 불가지론에 바탕하고 있고, 허무적이며, 또 그 속에서 '의미를 찾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답니다. 그래서 '그토록 집요하게' 붙잡고 있는 게 없을 뿐더러 그런 게 있는 사람이 조금 부럽기도 하군요. 이러나 저러나, 저는 어머니를 편하게 해드리지 않고서는 제가 하고 싶은 걸 할 수가 없답니다. 그리고 제가 (현재) 하고 싶은 일이 그런 일들과 양립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구요. 현실은 이것 아니면 저것의 세계라기보다는 피프티피프티, 또는 7:3 정도로 절충하는 세계인 것 같습니다.






상병 이영준 

저는 가벼운 질문을. 

11. 전역이 얼마 남지 않으셨다고 하는데, 전역하신 후 무엇을 하실 건가요? 

☞ 이미 전역을 했으니 근황 보고가 되겠군요. 일단 알바자리를 구하고 있는 중이에요. 구해지는 대로 일을 할 생각. 그리고 7월이 되기 전까지는 집 안팎을 깨끗이 정리하고(제 방으로 쓸 곳이 없어요), 올해 안에는 운전면허와 JLPT 1급을 딸 생각입니다. 



12. 가장 좋아하는 여자(남자는 필요 없어요~) 연예인은? 

☞ 김태희. 문득 생각나는 연예인은 그렇군요. 그런데 뭐 항상 관심을 갖고 있다거나 미친듯이 찾아다닌다거나 하는 건 아니에요. 연예인은 이미지이고, 이미지는 그저 소비하는 것일 뿐.



13. 원영씨에게 큰 충격을 주었던 책을 몇 권만 추천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 너무 자주 나와서 미안한 감 마저 들지만, <너 외롭구나>, <뇌를 단련하다>, <임사체험> 같은 책들이 말 그대로의 '충격'을 주었어요. 그리고 <시지프 신화>는 충격을 넘어서 저의 생각을 밑바닥부터 바꾸는 계기가 되었구요. <김수영 전집 2-산문> 역시 새로운 충격이었답니다. 책에 대해서는 다른 분들의 독서후기에서 충분한 정보를 얻으실 수 있을 겁니다.






병장 한상원 

14. 이제껏 살면서 가장 잘했다고 생각되는 일 세가지는? 

☞ 세 가지를 고르라고 해서 고민해봤는데, 썩 성공적인 인생은 아니었나보군요. 세 가지가 쉽게 나오지 않아요.
첫째는, 수능시험을 인문계로 보았던 것. 저는 고등학교 때 이과를 지망하고 이수하고 졸업했는데, 만약 수능을 자연계로 보고 공대나 자연과학 계열의 대학으로 들어갔다면 저의 인생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합니다. 그건 정말 끔찍한 상상이지요. 상당히 실망스러운 앞날이 되었으리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둘째는 군입대를 했던 것. 오해가 상당히 있을 것 같은데, 입대 자체를 잘했다고 생각했다기보다는 북클럽과 다른 인트라넷 동아리를 알게 되고 또 그곳의 사람들과 알게 된 것으로 인해 입대라는 선택이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을 고쳐먹었다는 뜻입니다. 입대하지 않았다면 인트라넷 동아리는 알지도 못했을테니까요. 입대 자체에 대해서는 그다지 잘했다 못했다를 따지고 싶지는 않군요. '결과적으로 보면' 나쁘지는 않았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이 정도로 해두지요. 세번째는 쉽게 나오지가 않는군요. 잘못했다고 생각되는 일은 수도 없이 고를 수 있는데.



15. 예전에 본인의 첫인상 판별법에 대해 나름의 자신감을 피력했는데, 원영씨가 지닌 사람을 판단할 때 가장 먼저 보는 부분은 무엇입니까? 

☞ 이거 참 애매하군요. 이성을 볼 때 가장 먼저 보는 부분도 아니고. 좀 이상하다고 생각될지도 모르겠지만, 제가 어떤 사람의 첫인상을 판별하는 기준은 외모보다는 그 사람이 하는 '말'에 있습니다. 첫 만남에서 험한 말을 하는 사람이야 물론 없겠지만, 말을 주의 깊게 들어보면 내용보다는 억양이나 뉘앙스 등에서 그 사람의 성향이 풍겨나오거든요. 그걸로 판단하는 제 나름의 기준이 저에게는 잘 들어맞았다고 생각합니다.
이때 주의할 점은, 말의 내용이 아니라 '여백'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 사람이 말을 하지 않을 때, 그러니까 말을 막 마친 뒤나 말을 막 꺼낼 때의 공백, 거기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말과 말 사이의 느낌을 잡아내면, 꽤나 성공률 높은 첫인상 판별법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16. 원영씨가 장래에 직업으로 삼고 싶은 일과 직업이 아니더라도 해보고 싶은 일은?   

☞ 직업으로 삼고 싶은 일은 아직 없어요. '직업=돈'이라는 수식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기본적으로 생계는 생계고 취미는 취미다라는 생각이 있기 때문에요. 직업으로 하는 일에 열정을 바치는 사람들도 많지만, 그들이 처음부터 하고 싶어서 막 달려든 경우는 그다지 없지 않을까요. 특히 요즘 세상에 대부분의 직업을 차지하는 서비스업 같은 경우가 그래요. '사람을 대하는 일'을 '꼭 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얼마 안될 것 같은데. 이건 저 같은 사람의 생각일뿐일까요.






병장 고시원 

축구선수 루니을 쏙 빼닮았지만 축구와는 상관없으신 허원영 병장님....(웃음) 
일단 전역을 축하드립니다... 

먼저 가벼운 질문을... 
17. 군생활중 가장 꼴보기 싫었던 사람과 그래도 이사람이 있었기에 내군생활이 즐거웠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 와, 어려워요. 정말 어렵군요. 같은 부대니까 직접적인 실명을 거론하기를 원하는 것 같은데. 꼴보기 싫었던 사람은 순간순간마다 생겨나고 사라졌기 때문에 한 두명을 거론할 수가 없고, "군생활이 즐거웠다"고 생각될 정도로 고마운 사람은 없었군요. 굳이 들자면 동기들 때문에 군생활하면서 여러가지로 힘을 얻을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낮은 계급이었을 때 챙겨준 몇 안되는 선임도 그렇고.



18.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자신의 인생에 커브길을 만들어줬던 스승 3인은?? 

☞ '커브길'이라고 한다면 인생의 전환점을 말하는 것이겠지요. 나름대로 우리나라의 정규교과과정을 충실히 가르쳐준 선생님들은 많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가 그분들 모두에게 존경하는 마음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지요. 어디서 듣던 대로 정신감정 의뢰가 필요한 분들도 만나보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밖의 다른 분들이 '스승'으로 부르고 싶을 정도로 존경스럽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세 명이나 끄집어내지는 못하겠고, 한 분만 이야기하고 싶군요. 그 분은 고등학교 때 일반사회를 가르치시던 분이신데, 저의 반(저는 이과였습니다)에서 하는 수업은 일주일에 한 번 정도밖에 없었고, 자주 만나뵙지도 못했습니다. 대학 시절에는 운동권이셨고 수업 시간에도 이따금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시기도 했지만 그걸 막 드러내놓는 분은 아니셨지요. 아무튼 고등학교 3학년 때까지 큰 영향없이 생활해 왔습니다.
그분이 저에게 '전환점'을 만들어주신 것은 수능이 끝나고 나서였지요. 저는 정시모집에 원서를 넣어야 해서 학교를 방문했었는데, 그때 지원했던 학교 중 한 곳이 교대였답니다. 집안사정도 있고 해서 나쁠 것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도장을 찍고 이런저런 빈 칸을 채우고 필요한 서류를 복사하고 있는데, 그분이 교무실에 들어와서 저를 보시더니 버럭 호통을 치시더군요. '너 교대 쓰기로 했다며? 거긴 왜 가 임마!'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렇게 친한 사이도 아니었을뿐더러, 선생님이 제자의 교대 지원을 반대한다는 게 의아하기도 했지요. 그분이 말씀하셨습니다. '교대는 넣지 마라. 선생은 너 말고도 할 사람 많아. 넌 다른 일을 해라.'
저는 원서를 집어넣었고 교대에 붙었지만, 그 선생님의 말이 자꾸 머릿속에 남아 결국 입학을 포기하고 현재의 학교에 들어갔습니다. 가끔 잘한 일일까 생각하는 때도 있지만, 아직까지는 나쁜 선택이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이후로, 그분의 말씀은 저에게 화두가 되었지요. 나 말고도 선생할 사람이 많다면, 과연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일까. 안주하며 살지 않고, 뭔가 다른 일을 해야 한다면, 무엇을 해야 하는 걸까. 저는 이게 무서워서 흔히 안정되었다고 말하는 직업들에 대해 손을 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길로 가는 것도 겁난다고나 할까요.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제 인생에서 줄곧 화두가 될 것임에는 틀림없다고 생각합니다.



19. 이번주말에 저와 함께 축구한판??(웃음)   

☞ 아니, 이런 말도 안되는 질문을!






병장 박민수 

20. 가장 좋아하는 숫자는 무엇인가요? 그리고 그 이유를 말해주세요. 

☞ 좋아하는 숫자는 없습니다. 보통 3이나 7을 대긴 하지만, 그건 그냥 습관적인 거고 솔직히 말해서 3이나 7을 정말로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숫자에 어떤 감정을 가져본 적이 없어서요. 또는 숫자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분석할 정도로 수비학에 관심이 있지도 않답니다. 숫자는 그냥 숫자일뿐이지 않을까요.



21. 인터넷-인트라넷이 아닌-을 할 때 하루도 거르지 않고 들어가는 사이트가 있다면 알려주세요. 

☞ 기본적으로는 저의 홈페이지( http://imperfectworld.cafe24.com )입니다. 여긴 말 그대로 하루도 거르지 않고 들어가지요. 그렇다고 뭐 대단한 게 있는 홈페이지는 아니랍니다. 다만 저의 기록들이기에 저에게 소중할 뿐이지요. 책마을 분들도 가끔 찾아주시는 것 같은데, 실망하신 분들이 꽤 있었을 거예요. 하하.



22. 지금까지 본 책 중에서 정말이지 너무나도 쉽지만 인상적이었던 책이 있다면 소개해주세요. 여러 권도 좋아요. 호호.   

☞ 너무나도 쉽지만 인상적이라. 조금 역설적이군요. 쉬운 책중에 인상적인 책이 과연 있을까요. 그건 밀림을 헤쳐나가지 않고 보물을 얻겠다는 심보랑 비슷하다는 게 저의 생각인데. 동네 주위를 돌아다녀봤자 거기서 거기거든요. 각설하고.
쉽다는 면에서, 나이절 워버턴의 <철학의 근본문제에 관한 10가지 성찰>을 추천해드리고 싶군요. 제목은 좀 어려울 것처럼 보이지만, 굉장히 쉽게 쓰여 있습니다. 그리고 인상적이지요. <자본주의 역사 바로알기>라는 책 역시, 인상적이라는 면에서는 괜찮습니다. 쉽다는 측면에서는 동네 근처라기보다는 옆 동네에 가깝습니다만.






병장 석대희 

23.가장 힘들었을는 

☞ 일전에도 글로 쓴 적이 있지만, 집안 문제로 줄곧 힘들었었죠. 그 와중에 진로 문제가 얽히고 개인적인 일(여자친구 문제 같은)도 생기면서 심란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24.그 어떻게 극복하셧는지 

☞ 극복, 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구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 때는 시간이 가기를 기다리는 것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더군요. 시간은 모든 걸 치유해주지는 않지만, 많은 걸 지워버리고 덮어주기는 했어요. 몇 가지 문제들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기 때문에 '극복'이라는 말은 쓰기 어렵지만 확실히 그 당시의 불안하고 방황하던 마음에 비하면 확실히 차분해졌다고 생각해요. 김연수의 말대로 삶의 좋은 점은 "첫째 모든 것은 어쨌든 지나간다는 것, 둘째 한 번 지나가면 다시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이니까요.



25.인생관은 무엇인지 알고싶네요   

☞ 위에도 쓴 바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인생에 어떤 의미같은 게 없다고 생각하고 있고, 그렇기때문에 '의미를 찾는 데에 의미가 있다'는 게 기본적인 인생관입니다. 이런 인생관은 좀 이상한 부분이 있지만, 아무튼 현재는 그래요. 그래서 그 '의미'를 찾는 과정에서 몇 개인가의 좌우명을 세워놓고 살았는데, 요새 글쓰기와 인생에서 나름의 좌우명으로 삼고 있는 것은 김수영의 다음과 같은 글입니다. "거짓말이 없다는 것은 현대성보다도 사상보다도 백배나 더 중요한 일이다". 거짓말이 없다는 것은, 진실하다는 것은 돈보다도 지식보다도 백배나 더 중요한 일인 것 같습니다.





상병 박종민 

26. 원영님이 꿈꾸는 세상은 어떤 것인가요? (입시 구술문항마냥) 그것에 있어 ‘읽기’와 ‘쓰기’가 가지는 의미와 연계하여 알고 싶습니다. 

☞ 어려운 질문들이 참 많군요(웃음). 저 하나의 생각으로 세상이 바뀔 거라는 순진한 믿음은 가지고 있지 않지만, 세상이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식의 생각은 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세상은 구체적인 면에서 바라보았을 때 '불가능'에 가까울지도 모르겠지만, 그렇기때문에 더욱 추구되어야 한다는 생각도 하고 있구요.
그 세상은 무엇보다 근본적으로, 인간에게 제약이 없는 세상이어야 합니다. 이 말은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인간의 자연파괴라든가 전쟁에 제약이 없다는 걸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런 거창한 부분에 있어서 무제한의 자유를 주장하는 게 아닙니다. 개개의 인간이 무엇을 하고 싶을 때, 사회가 거기에 대해 어떤 제약을 주지 않고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어야 한다는 이야기지요. 어떤 주제로 논문을 쓰고 싶다면 쓰고, 어떤 소재로 글을 쓰고 싶다면 쓰는 사회. 어떤 직업을 갖고 싶다면 갖고, 병들었을 때 제약 없이 치료받을 수 있는 사회. 이런 게 제가 꿈꾸는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이 '불가능'의 영역에 있고 도달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해서 무조건 비웃음당할 이유는 없습니다. 이상향은 어디까지나 이상향일뿐이니까요. 유토피아를 꿈꾸는 사람들이 비웃음을 사는 이유는 대부분 '그것이 실현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지만, 만일 유토피아를 꿈꾸는 사람들이 정말로 유토피아를 이 땅에 세우고 싶어한다면 그들은 비웃음을 사 마땅합니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현실적으로 현실을 바라봐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유토피아로 진행하는 그 과정에 있어서 조금이나마 더 나아질 수 있도록 한다면 인간으로서는 큰 역할을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 '과정'에서 읽기와 쓰기의 의미는 참 중요하지요. 요건 김수영 시인의 글을 좀 인용해야겠군요.

[……]현대에 있어서는 시뿐만이 아니라 소설까지도, 모험의 발견으로서 자기 형성의 차원에서 그의 <새로움>을 제시하는 것이 문학자의 의무로 되어있다. 지극히 오해를 받을 우려가 있는 말이지만, 나는 소설을 쓰는 마음으로 시를 쓰고 있다. 그만큼 많은 산문을 도입하고 있고 내용의 면에서 완전한 자유를 누리고 있다. 그러면서도 자유가 없다. 너무나 많은 자유가 있고, 너무나 많은 자유가 없다. 그런데 여기에서 또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게 되지만, <내용의 면에서 완전한 자유를 누리고 있다>는 말은 사실은 <내용>이 하는 말이 아니라, <형식>이 하는 혼잣말이다. 이 말은 밖에 대고 해서는 아니될 말이다. <내용>은 언제나 밖에다 대고 <너무나 많은 자유가 없다>는 말을 해야 한다. 그래야지만 <너무나 많은 자유가 있다>는 형식을 정복할 수 있고, 그때에 비로소 하나의 작품이 간신히 성립된다. <내용>은 언제나 밖에다 대고 <너무나 많은 자유가 없다>는 말을 계속해서 지껄여야 한다. 이것을 계속해서 지껄이는 것이 이를테면 38선을 뚫는 길인 것이다. 낙수물로 바위를 뚫을 수 있듯이, 이런 시인의 헛소리가 헛소리가 아닐 때가 온다. 헛소리다! 헛소리다! 헛소리다! 하고 외우다보니 헛소리가 참말이 될 때의 경이. 그것이 나무아미타불의 기적이고 시의 기적이다. 이런 기적이 한 편의 시를 이루고, 그러한 시의 축적이 진정한 민족의 역사의 기점이 된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는 참여시의 효용성을 신용하는 사람의 한 사람이다.[……]

기본적으로 이 인용문이 말하는 바는 '문학', 특히 '시'의 효용이 어디에 있는가이지만, 제 생각에는 다른 글쓰기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헛소리다! 헛소리다! 헛소리다! 하고 외우다보니 헛소리가 참말이 될 때의 경이. 그것이 나무아미타불의 기적이고 시의 기적이다]라고 하는데, 그것이 곧 '글쓰기'와 '글읽기'의 기적이기도 하지 않을까요. 직접적으로 현실에 영향을 주고 무언가를 바꿀 수는 없어도 그 현실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인간'을 변화시키는 '글쓰기'와 '글읽기'. 제 생각에는 그것이야말로 "기적"의 과정이 아닐까 싶습니다. 일견 무력해보이는 글쓰기와 읽기가 힘을 가질 수 있는 이유도 거기에 있겠지요. 우리나라에 글쓰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면 독립도 민주화도 100년은 느려졌을 거라는 게 저의 생각입니다.




27. ‘문학’이라는 것에 진지하게 빠지게 된 계기랄까요. 글을 쓰게 된 동기의 문제일까요.(웃음) 궁금합니다. 

☞ 초중학교 시절 글짓기나 논술같은 걸 하고 고등학교 시절 문예반 활동을 하기도 했지만, 그때는 별로 '문학'이라는 것에 진지하게 빠지지도 않았었고, 글을 어떻게 써야 한다든가 왜 써야 한다든가 하는 기초적인 자기규정도 없었습니다. 본격적인 시작은 아무래도 대학교 입학 이후로 볼 수 있겠지요. 그 시절에는 하루키를 필두로 여러가지 소설과 책들을 읽었는데, 그것이 계기였다면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소설에 재미를 느끼게 된 것이, 더더욱 빠져들게 된 계기가 되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이런 식으로 자신의 의견을 표출하는 글을 쓰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아무래도 대학교 1학년 시절 만들었던 홈페이지 덕분입니다. 지인들만이 들락거리는 소규모 친목 형식의 홈페이지였지만, 몇몇 사람들의 호응에 힘입어 부단히 글을 쓰고 올리고 했지요. 2년여의 홈페이지 글쓰기가 나름대로 습관이 되어서일까, 책마을의 필진 일도 큰 부담없이 맡을 수 있었습니다.




28. 원영님의 에세이 ‘나는 왜 침묵해 왔는가’ 
제가 책마을에서 많은 글들을 읽어오면서 가장 가슴떨리게 읽었던 글입니다. 이번 회원특집을 빌어서 제게 그토록 많은 고민과 상념을 안겨준 원영님의 글에 다시 한 번 찬사를 보냅니다. 마지막으로 여쭤보겠습니다. 

직접 경험해보지 못한 ‘타인에의 이해’는 가슴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머리에서 정확히 멈추는 ‘피상적 이해’에 그치게 되고 혹시 그것은 ‘위선적인 연민’의 발로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하는 고민을 예전부터 해왔습니다. 

하지만요, 같은 곳을 바라본다면 그것이 비록 위선이라 할지라도 결국엔 동지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드는걸요. 논객과 투사를 동경하던 후레쉬맨 시절, 그들을 병원균 취급하던 주변 지인들의 반응과, 그들의 배타적이고 공격적 언사는 그들에 대한 동경에도 불구하고, 감히 섞이지 못하게 했었죠. 단지 절박하지 않은, 약자에 대한 연민에 불과할 지라도, 쁘띠 부르주아든 페이크 페미니스트든, 기타 등등을 설득시키기보다 공격하며,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음에도 ‘노선의 다름’을 꼬집어 그 쪽과 도매금으로 여겨지기 싫다며 자리를 박차고 나가던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저는 깊은 실망감을 느낀 적이 있습니다. 어쩌면 제대로 뛰어들지도 않고 경계에서 본 ‘그들’의 모습은 표면적인 것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는 점에서 불쾌감을 느끼실 분들도 있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듭니다만, 그래서 유효한 시각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입니다. 

냉랭한 현실 속에서 뿔뿔이 흩어지고 마는 치열한 이들의 모습이 안타깝기만 합니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연대’와 그것을 방해하는 ‘피상적 이해’에 대한 원영님의 생각을. 저는 듣고 싶습니다. 명징하게 정리받고 싶은 마음이구요.(웃음) 비록 인트라넷이라 제한되는 면도 있겠지마는, 우회적으로라도 듣고 싶어요. 이건 모두에게도 묻고 싶은 말이지만(또, 책마을의 지금 떠오르는 몇몇 분들께 질문하는 것이 더 빠를 수도 있다는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만), 제가 접해본 문장 중에서 그토록 핏기어리면서도 균형감 있는 글은 처음이었기에. 제가 가장 만족할 만한 답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은 사람. 원영님께 묻고 싶습니다. 

이런 초보적(?)이고 치기어린 질문. 민망하지만, 역시 저번 메모에도 남겼듯이 저는 자제력이 부족한 사람이라서요.(웃음)   

☞ 이런 어려운 질문을 던지셨다는 건, 그동안 제 글을 잘 안 읽으셨다는 반증이군요!(웃음) 제가 글에서도 자주 밝혔듯이, 저는 그런 '연대'와 '진보' 등에 관련한 활동에 어설프게나마 다리를 걸쳐본 적도 없는 인간이고, 그러므로 그 부분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그냥 저의 개인적인 생각을 말하자면, 지난 80년대의 학생운동이 큰 힘을 지닐 수 있었던 것은 시대적인 상황이 큰 몫을 했다고 봅니다. 전에 영준씨도 말한 적이 있는 것 같은데, 그 당시에는 누구나 좌파일 수밖에 없었죠. 사회가 오른쪽 중에도 오른쪽에 있었으니까요. 사회적 인식의 기준이 오른쪽에 쏠려 있었으니, 조금이라도 가운데로 가면 왼쪽으로 몰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시절에 비해서 오늘날의 상황은 그런 '연대'가 상당히 어렵고 불리한 상황이에요. 종민님의 말처럼, 흔히 말하는 학생운동권의 사람들도 배타적인 모습을 보여 반감을 살 때가 있습니다. 누구 말대로, 80년대의 마인드를 가지고 90년대의 방법으로 2000년대의 학생들을 모으려 하는 식이지요.
이런 문제는 제가 어떻게 말한다고 해결될 수 없는 문제이긴 하지만, '더 나은 세상'이라는 기본적인 목표 속에 수없이 다른 방향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먼저 잊지 말아야 할 것 같습니다. 월간 <말>지(誌) 5월호였던가에 나오더군요. 한국외대 학생회가 도서관을 점거한 채 농성하는 교직원들에게 항의하고, '노조에게 본때를 보여주자'는 등의 플래카드를 걸었다는 이야기. 그 기사를 작성한 사람은 '한국의 대학생들이 노동권에 대한 인식이 없고 예비노동자로서의 의식이 부족하다'는 평을 붙였는데, 저로서는 의문이 생깁니다. 과연 이 기자는 그 학생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관심이 있었을까. 그들이 어떤 고민을 하며 살고 있는지 생각해봤을까.
한국 사회는 너무 빠르게 변화해왔고, 사회경제 구조나 물질문명의 발달을 사람들의 인식과 사고가 따라가지 못하는 실정입니다. 그러니 '연대'나 '진보'에 대한 기존의 방법들(80년대나 90년대에 쓰였던)이 요즘의 학생들과 마찰을 일으키는 것은 당연한 노릇이지요.
기본적으로는 '운동'의 초점을 '개인'으로 옮겨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왜 요즘 학생들은 공감하지 않는가? 그들 개개인은 어떤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가? 이런 고민 없이는 현대 사회에서 '연대'가 절대적으로 불가능하지 않을까요. '피상적 이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그들은 왜 '피상적 이해'로만 만족하는 것인가 하는 문제도 제기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과연 무엇이 '피상적 이해'인가라는 문제도 제기되어야하겠지요. 무조건적으로 '가벼운 인식'이니 '진지한 고민의 부재'니 하는 매도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가 없습니다. 개개인에게 부담이 되는 짐을 지워주면 지금의 세상은 절대로 바뀌지 않습니다. 그리고 특히, 이놈의 교육이 바뀌지 않고서는 넘어서기 힘든 문제들이 너무 많습니다. 이건 차츰 바꿔나가야 하는 문제겠지만, 현대사와 일반사회의 윤리교육만 좀 강화시켜도 상당히 바뀔 거라는 게 저의 예상입니다.
충분한 답변은 못 되었을 걸로 압니다. 핵심만 다시 압축시키면, '피상적 이해'가 정말로 피상적인 이해인가, '연대'는 누구를 중심으로 누구를 위해 이루어져야 하는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순혈주의, 정통성, 분파주의의 문제는 이제는 정말로 구시대적인 발상에서 나온 것들일 뿐입니다. 개인이 개인으로서 온전히 존재하면서(조직에 파묻히지 않으면서) '연대'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저는 그걸 염두에 두면서, 저 자신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고 싶군요. 스스로를 되돌아보면, 이렇게 큰소리로 무언가를 말한다는 것도 참으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병장 박진우 

29. 현실세계에서의 소통과 오해와 이해의 차이에 대한 원영님의 견해를 듣고 싶네요. 
30. 문학(혹은 예술)세계에서의 소통과 오해와 이해의 차이에 대한 원영님의 의견을 또한 듣고 싶구요. 이건 현실세계와 비교해주신다면 더 좋겠습니다. 

☞ 위에 있는 2번 질문, 또는 5번 질문과 비슷하고도 다른 질문이군요. 두 질문을 연관시켜 답변해보겠습니다.
이건 윗답변들에도 계속 나온 말이긴 한데, 소통은 본래 불완전한 것입니다. 인간은 본래 독립된 개체이고, 각 개체마다 사고방식과 뇌의 구조, 살아온 환경과 생활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완전한 소통같은 건 없습니다. 이 '소통의 불완전성'은 두 가지 의미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하나는 말과 글이라는 '소통 수단의 불완전성'이고 다른 하나는 그 '수단의 불완전성'을 어찌어찌 넘어서 의미를 전달했다 하더라도 온전히 다 전해지지 않는 부분, 즉 '수용의 불완전성'입니다.
'수단의 불완전성'은 누구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모두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무엇'을 느낀 경험이 있고, 또 그것을 표현하려고 했을 때 잘 되지 않았던 적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수용의 불완전성'은, 아주 간단하고도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A가 "모든 걸 잊고 싶다"라는 말을 했을 때 B가 알아들었다해도, 본래 A가 의도했던 것과는 180도 다른 것으로 받아들였을 수 있다는 말이지요.
현실세계에서는 이런 문제가 '현실적으로' 나타납니다. 사람들은 하루에도 수십 번씩 오해하고, 다투고, 설득하고, 이해시키고, 받아들이는 과정을 겪지요. 그게 점심메뉴를 결정하는 사소한 문제이든, 한미 FTA체결같은 문제이든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에는 즉각적인 리액션이 존재하며, 역동적으로 그 과정이 나타나고 사라집니다. 무언가 앙금처럼 남아있는 게 있다하더라도, 그게 해소되거나 심도있게 파악될 겨를이 없지요.
문학에서의 소통이라는 것은 어쩌면 그 '앙금'의 표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안톤 체홉의 단편소설에서도 잘 나타나 있듯이, 인간이 근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소통의 불완전성, 그리고 그것으로 인한 현상과 문제들을 표현하는 것이 문학의 중요한 과제 중 하나가 아닐까요. 그림이나 음악 등의 다른 예술분야에 대해서 잘은 모르지만, 그런 분야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일상적인 말이나 사무적인 글로 전달할 수 없는 그 무엇을 전달하기 위해 인간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만드는 것이 아닐까요. 인간이 자신이 상상하거나 전달하고 싶은 것을 일백 퍼센트 완벽하게 표현할 수 있다면 예술이라는 것은 아마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덧붙이자면, 문학에서 오해와 이해의 양상은 현실세계와는 다른 힘을 지니고 있다고 봅니다. 문학에서 '작가가 말하고자 했던 것'을 독자가 '올바로 이해하는 것'은 사실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한 권의 책을 읽은 백 명의 독자가 백 권의 책을 만들어내는 것, 그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문학에서의 올바른 이해'가 될 것입니다. 세계를 '오해'한 작가가 책을 쓰고, 그 책을 '오해'한 독자가 자기만의 생각으로 살아가고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 그것이 문학의 메커니즘이 아닐까요. 또 예술의 메커니즘도 될 수 있지 않을까요.



31. 인간의 바다에서 섬이 될것인가, 한방울 소금물이 될것인가. 원영님은 사회에서 과연 어떤 부류의 인간상을 추구하시는지도 궁금합니다. 흐흐.  

☞ 어려운 질문이군요. 뭐 굳이 해석해보자면 독립된 개체로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사회 속에서 살아갈 것인가의 문제로 보입니다.
저의 기본적인 세계 인식이기도 한데, 인간은 원래 '섬'같은 존재입니다. 정호승 시인의 시구처럼 '외로우니까 사람'인 것이지, 그렇지 않다면 사람이 아닙니다. 평생 탯줄에 매달려 살아가는 인간은 (일부 상징적으로 그런 삶은 사람들은 있지만,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고, 탯줄이 잘린 채 혼자 세상에 내던져진 그 순간부터 인간은 '단독자'로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인 것입니다. 그런데, 다들 외롭고 또 힘들고 여러가지 문제가 있기 때문에 인간은 사회를 구성해서 살고 있습니다. 현대에 와서는 그 구조가 느슨하지 않고 매우 타이트하게 개인들을 묶어놓고 있지요.
제가 개인적으로 추구하는 사회상이랄까, 유토피아는 '모두가 섬이 되는' 세계인데, 좀 부정적인 어감일지도 모르겠지만 간단히 말하자면 '자립한 인간들의 공동체'라고 할 수 있어요. 한쪽이 일방적으로 주고 다른 한쪽은 일방적으로 받는 시혜적인 관계의 사회가 아니라, 대등하고 독립적인 관계의 사회가 상호간에 유익한 사회가 아닐까요.
이런 사회상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모든 개인이 섬으로 존재할 수 있는' 조건이 기반이 되어야 할텐데 사실은 그렇지가 못하지요. 그게 참 문제입니다. 그래서 저는 '개인이 섬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하나의 섬'이 되고 싶다는 것이 추상적인 생각입니다. 내가 '올바른 개인'으로 존재하면서 타인을 구원하는 것, 이것이 저에게 있어서는 추구할만한 인간상이라고 생각되는군요.




병장 주영준 

당신 때문에 나는 책마을에 오게 되었습니다. 당신이 다른 곳에 남긴 당신의 글 '사상의 유행에 대하여'라는 글에 대한 화답을 끄적이며 나는 전율했습니다. 1년 이상 쓰지 않고 있던 몸의 핵심적인 부분을 가동하는 데에서 오는 희열로부터 나는 본격적으로 책마을 내의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당신의 글이 없었더라면, 화답을 하라고 강요하는 듯한 그 글이 없었더라면 아마 나는 2년 3개월 동안 어떤 신경을 봉인한 채 고통스러운 삶을 이어가고 있었겠지요. 이런 부채의식을 가지고 있기에, 쉽게 넘어갈 생각 따위는 전혀 없습니다. 자. 思いは全て捨てて行こう... 

32. 당신과 마츠모토 히데토 간의 공통점을 10개 이상 나열하십시오. 눈이 두 개다. 손이 두 개다. 이런 식의 대답을 할 경우 다음 만남 때 더 이상 그것이 공통점이 될 수 없도록 당신의 육체에 적당한 훼손을 가하겠습니다. 10개가 되지 않을 경우에는 '죽은 사람이다'라는 공통 사항을 만들어 드릴 용의도 있습니다. 나, 진지합니다. 
33. 사르트르는 실존주의의 끝에서 극한의 절망을 맛보고 다른 사조로 급선회했습니다. 나는 그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지 않습니다. 사고의 한계를 극한으로 끌고 나가는 것까지는 위대하다고 생각하지만, 그 극한에서 돌아선 것은 이전의 실존주의와 논리적 연결고리가 그다지 있어보이지 않는 그런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내가 모자라서 그렇게 느끼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그것은 하이데거가 신비주의자가 된 것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최대한 끝까지 몰아쳤는데 그것은 완벽한 한계 이상으로 나아갈 수 없다고 명징하게 느꼈을 때, 당신은 어떻게 할 것입니까. 당신의 사고에 사르트르마냥 완벽한 절망이 찾아온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입니까. 마침내 절망을 할 수 있을 경지까지 강인한 발걸음으로 思考의 길을 걸어가는, 강인한 그런 당신에게 묻는 질문입니다. 
34. 당신의 시를 보고 싶습니다. 일전에 당신의 시론을 본 적이 있습니다. 시는 위대한 언어이고, 나는 함부로 그런 '시'를 쓸 수 없다는 골자의. 그러면, 칼럼은 위대한 언어로 쓰여지는 것이 아닙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당신의 시 한 편을 소개하는 것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また春に會いましょう... 

☞ 마지막 주영준씨의 질문은 허원영씨 개인적인 사정으로 완성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영준씨께 미안하다는 허원영씨의 전언을 전해드립니다.





◎ 인터뷰



노지훈 : 세간에서는 원영씨의 글이 이미 완성에 이르렀다고 평가 되고 있는데요. 저 또한 원영씨의 글쓰기에 감탄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글의 완성도는 높지 않다는 겸손한 태도를 보이시며 일부 주민들의 원성을 산 전례가 있습니다.(웃음) 그럼 스스로의 글에서 좀 더 개선 또는 보완해야할 부분이 있다고 한다면, 말씀해 주시겠어요?

허원영 : 제가 좀 신경질적인 면이 있는데, 글쓰기에서 특히 그렇습니다.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모두 갖고 있는 병증일 거라 생각하는데, 자기 글에 만족하는 글쓴이는 참으로 드문 법입니다. 원칙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없다'고 해야겠지요. 글쓰는 이들은 언제나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습니다. 열등감 역시 가지고 있지요. 이런 게 없는 글쓴이는 없다고 믿고 있으며, 또 개인적으로는 이런 열등감 없이는 글이 잘 써지지 않을 거라 믿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완성도는 높지 않다'는 말을 한 것은 빈말이 아닙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요. 개선이나 보완해야 할 부분은 한 두 군데가 아니지만, 제가 생각하는 '내 글쓰기의 문제점'은 첫째가 수사의 빈약함입니다. 논리적 뼈대를 아무리 잘 세워놓아도, 아름답지 않으면 가치가 떨어지는 법이거든요. 논리 그 자체로 미적인 가치를 성취할 수 있는 분야는 수학 정도라고 생각합니다. 글쓰기의 영역에서는 아무리 적더라도 이 '수사'가 빠지면 글의 미적 가치가 약간이나마 상실되지 않을까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제 글의 미학적인 부분을 탐탁찮아하는 편입니다. 이곳 책마을에서 제 글이 부담없이 읽히는 이유도 어느 정도는 거기에서 비롯한다고 생각하는데, 수사 없는 글은 쉽게 읽히기 때문이겠지요. 그것이 온라인의 글쓰기에서는 장점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오프라인의 글쓰기에서는 치명적인 약점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둘째는 성급함입니다. 저는 '무엇을 써야 할 것인가'에 대해 명확한 답이 나오면 그대로 써 내려가는 타입인데, 이후의 검산이 충분치가 않습니다. 밖에서도 그랬는데, 근거자료나 정보의 활용이 미약한 편이지요. 이건 습관을 들이면 고칠 수 있는 문제일거라고 생각합니다만, 책마을에서 쓴 글들은 이 문제를 피해갈 수 없겠습니다. 누구 말대로 '노템전'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문제점일 수도 있겠으나, 그게 그렇지가 않거든요. 스스로를 속일 생각은 별로 없습니다. 이건 앞으로 고쳐나가야 할 문제들이겠지요.



김동환 : 저는 원영씨 글을 즐겨보는편은 아닙니다만 꽤 좋아하는 축에는 들어간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가장 좋아하는 점은 수십편의 원영씨 칼럼들이 각각의 주제들에 비해 다들 보편적이고 이해가 쉬운(만만하다는 의미는 절대 아닌) 전개를 가지고 있다는 거에요. 강록씨 글도 참 좋아하는데 강록씨 글은 읽다보면 제가 강록씨가 아니므로 어쩔수 없이 좀 아리송하다 싶은 부분이 있거든요. 
빙 돌렸는데(웃음). 원영씨 글에서는 항상 가상의 청자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 글쓰기를 선호하시게 된 특별한 배경이 있으신가요?


허원영 : 저의 본격적인 글쓰기는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 한 학기를 실망으로 보내버린 뒤, 여름방학에 홈페이지를 만들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거의 대부분 저의 글로만 이루어진 홈페이지였는데, 아직도 운영이 되고 있지요. 지금 책마을에서 칼럼의 구분으로 사용하는 'Ex-Libris'와 '에세이'라는 기준도 그때 만들어진 것이었습니다. 물론 당시의 글쓰기는 초보적인 수준에 지나지 않았지만, 분명 저에게는 많은 글쓰기 연습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때 제 홈페이지는 지인들을 대상으로 운영하는 친목 커뮤니티의 개념이었기 때문에(지금도 그리 다르지는 않습니다만), 제 글도 결국 그 '지인들'을 청자로 상정하고 쓰는 글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불특정 다수에게 주장하는 글이라던가, 혼자서 중얼거리는 독백의 형식은 애초에 불가능한 사정이었지요. 아마 그런 것이 '배경'이라면 배경이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런데 동환 씨의 분석, 그러니까 "보편적이면서도 이해가 쉬운", "항상 청자가 있는" 글쓰기는 그런 '배경'보다는 저 자신의 글쓰는 방식에서 비롯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일전에 어느 글에선가도 밝힌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저는 스스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납득할 수 없는 구절이 있는 글은 공개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 발상과 행동 - 그러니까 스스로도 명확히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을 글로 풀어내고 공공에 게시하는 것 - 은 애초에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 저의 고지식한 머리입니다(그래서 영감이나 감수성에 기댄 시-소설은 아직 머나먼 미지의 영역으로만 보입니다만). 아무튼 그래서, 저는 글을 쓸 때에도 제가 발상하고 구상하고 납득하고 이해한 방식과 과정을 글 속에 그대로 풀어내는 것을 글쓰기의 방식으로 선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청자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게 아닐까요. 실제로 제가 책마을에서 쓴 거의 모든 글들은 사실 저 스스로에게 쓴 글들이었습니다. 이런 부분은 앞으로의 글쓰기에서는 조금 바뀌어야 하지 않나 생각하고 있지만, 뭐 굳이 떠들 것 까지는 못되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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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인터뷰가 진행되었었습니다. 저의 개인적인 사정과 원영씨의 전역이 겹쳐 인터뷰가 완성되지 못한 점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어쨌든 이것으로 원영씨와 동환씨의 특집을 부탁한다는 전 촌장님의 당부의 절반을 지킬 수 있게 되어서 기쁩니다. 다음 타자 김형진씨의 인터뷰도 현재 진행 중에 있으니 기대해 주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이번 회원특집에 참여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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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장 한상원 (2006/06/20 13:06:06)

전언이라니, 왠지 비장한데요-    
 
 
 병장 김동환 (2006/06/20 13:25:20)

하핫. 지훈님 정말 수고 많으셨어요. 
잘읽었습니다.(웃음)    
 
 
병장 주영준 (2006/06/20 13:47:58)

갯세끼. 감히 내 질문을. 오래 못 보겠구나. 보고 싶은데. 그래도 한 달 전에 목소리는 들었으니까. 아무튼 넌 죽었다.    
 
 
병장 김태경 (2006/06/20 14:18:18)

아, 원영씨 잘 지내고 있다니 왠지 배아픈걸요. 
쌍둥이라는 놀라운 사실도 알았네요. 인간 허원영과 똑같은 사람이 한명 더 존재한다라... 어떨까요? 
잘 읽었습니다.    
 
 
상병 조주현 (2006/06/20 14:58:15)

수고하셨습니다.    
 
 
병장 김형진 (2006/06/21 07:30:52)

인상깊은 답변들, 그 중에서도 마지막 주영준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 가장 인상깊었습니다.    
 
 
병장 엄보운 (2006/06/21 07:50:03)

'원영스럽다.' 라는 단어를 책마을 사전에 등재하고 싶은 기분입니다.    
 
 
병장 엄보운 (2006/06/21 09:33:06)

2번을 연속해서 정독하고나니 원영씨가 더욱 그리워지는군요. 그는 진정 '책마을'이었습니다.    
 
 
병장 박민수 (2006/06/21 11:44:09)

많이 배웁니다. 아아.    
 
 
상병 안대섭 (2006/06/21 14:59:16)

하일! 허원영! 하일! 허원영!    
 
 
병장 박형주 (2006/06/21 21:36:46)

이제부터 책마을의 목표는 '허원영을 넘어서'가 될 것 같아요.    
 
 
상병 송희석 (2006/06/24 23:09:40)

훗! 이제서야 허원영씨가 제대한것이 실감이 나네요.    
 
 
상병 이훈재 (2006/06/27 09:12:40)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에 꼼꼼이 읽으려다보니 이제야 읽었어요- 
마지막 질문에 대한 답변은 영영 알 수 없는 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