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변의 카프카를 읽고 
 
 
 
 
칠월 이십구일, 새벽 두시

  무엇 때문인지 그냥 눈이 떠진다. 눈을 떠도 잠시 동안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다. 어둠속에 눈이 조금씩 익숙해지도록 놓아둔다. 자고 있는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고 보니 이 방에서 스물다섯명이나 생활해 간다. 이제 다시 신병이 들어와도 잘 곳은 없다. 누워있던 상체를 일으킨다. 덮고 있던 침낭이 내려가는 소리 때문인지 바로 옆에서 자던 후임이 뒤척인다. 다행이 잠은 깨지 않은듯하다.
  
  왜 잠을 더 청하지 않고 일어났는지 그건 알 수가 없다. 무슨 꿈을 꾼듯한데... 내가 무슨 꿈을 꾸었던가 분명한 기억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게 다 안개 속에 묻힌 것처럼 몽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한 것은 꿈속에서 느꼈던 그 고압의 정서가 아직도 깊숙한 울림으로 살아 있다는 것이다. 잠에서 깨어난 순간부터 그랬다. 문득 그 꿈에 생각이 미치면 그 울림은 더없이 절실한 느낌으로 되살아나면서도 분명한 기억은 단 한가닥도 집어낼 수가 없는 것이다. 단지 그녀와 관계있던 꿈이었다는 것을 제외하곤. 그러나 그녀가 누구인지 나는 알 수가 없다. 나에게는 알 수 없는 것이 너무 많다.

  나는 잠들 수가 없다. 다시 눈을 감고 침낭 속으로 기어 들어간다. 하지만 아무리 애써도 잠이 오지를 않는다. 몸은 강하게 잠을 원하고 있는데 정신은 이미 차갑게 깨어있다. 그 수수깨끼의 그녀에게 내가 이상할 정도로 마음이 강하게 끌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무언가 아직도 애절하다. 나를 다시 한숨짓게 만든다. 가을이 멀리서 조금씩 다가와서... 그래서 여유로워져서 그런가... 이런 나의 책임은 항상 상상력 가운데서 시작된다. 늑골에 갇힌 뜨거운 심장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수축되고 확대된다. 확대되고 수축된다. 
  
  다시 침낭을 뒤로하고 행정반 나의 자리에 앉은 채 아침을 맞는다. 내가 유일하게 혼자 있을 수 있는 곳, 책을 읽을 수도, 음악을 들을 수도 없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나는 다만 거기 앉아서 아침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

칠월 이십구일, 아침 일곱시 삼십분

  아침은 급식으로 나온 빵과 우유로 간단하게 해결하고 계속혼자 있을 수 있는 곳을 찾는다. 행정반은 더 이상 조용한 곳이 아니다(주말이라고 해서 군대가 쉬는 것은 아니다). 무슨 생각을 하려는 것도, 편지를 쓸 것도 아닌데 내 눈은 계속 어둡고 아무도 없는 곳을 찾아다닌다. 문득 창고를 뜯어고쳐서 만든 작은 도서관에 생각이 미친다. 주말에는 오후부터 문을 여는 곳이다. 행정계원이라는 이유로 몰래 열쇠를 가지고 가서 문을 연다. 습하고 쾌쾌한 냄새... 하지만 부대 안에서 나에게 이곳만큼 매력이 가득한 곳도 없다.
  
  혼자가 되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침묵이 나를 에워싼다. 문득 손이 가는데로 아무 책이나 잡고 책상에 앉는다. 나는 나라고 하는 틀 속에 들어있다. 나라는 존재의 윤곽이 찰카닥하는 작은 소리를 내면서 딱 하나로 겹쳐지며 자물쇠가 채워진다. 이제 됐다. 이렇게 해서 나는 언제나 내가 있어야 하는 장소에 있다. 부대 안에 있는 무수한 얼굴 없는 병사들 보다 천년도 전에 쓰인 황당무게한 이야기 쪽이 훨씬 더 생생하게 다가온다. 나는 본디 빨리 읽는 독서가가 아니다. 시간을 들여 한줄 한줄 꼼꼼히 읽어가는 타입이다. 문장을 즐긴다. 문장을 즐길 수 없으면 도중에 읽는 걸 그만둔다. 표지와 표지사이에서 조용하게 오랫동안 잠들어온 깊은 지식과 예리한 정감이 발산하는 독특한 향기를 나는 좋아한다.
  
  오전의 반이 지났을 무렵, 나는 책읽기를 그만두고 주위에 아무렇게나 돌아다니는 종이위에 며칠분의 일기를 쓴다. 가느다란 사인펜으로 나한테 일어난 일과 생각나는 일을 작을 글씨로 하나하나 종이위에 적어 넣는다. 기억이 생생할 때 조금이라도 더 자세하게 기록해 두지 않으면 안 된다. 기억이 언제까지 올바른 형태로 거기 머물러 있을지, 그것은 아무도 모르니까.

칠월 이십구일, 열두시

  점심때가 조금 지나서야 나는 막사로 복귀한다. 기분을 좋게 하기 위해 곡이름을 언제나 잊어버리고 다니는 비틀즈의 어느 노래를 흥얼거려 본다. 그 기묘하게 쉼표가 없이 계속되는 흥얼거림에 의식을 집중한다. 내무실로 복귀하자 소대의 가장 고참이 급히 행정반으로 가보라고 한다. 일직사관이 나를 찾는다고 한다. 소대원들도 오랫동안 계속 나를 찾아다녔다고 한다. 또 간단한 업무 때문이겠지... 하지만 나나 다른 계원이 잠시라도 안보이면 부대가 한번 뒤집어진다. 방송으로 계속 내 이름이 나오고 소대원들은 우리를 찾을 때까지 계속 돌아다닌다. 그렇게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 뒤 막상 행정반으로 가보면 정말 간단한. 오분도 안 되어서 처리할 수 있는 그런 업무들이다. 특별히 전문화 된 것도 아닌데 담당하고 있는 업무를 담당계원이 아니고선 전혀 처리할 수 없는 이런 시스템에 무엇이라고 할 수도 없는 곳이 이곳의 행정이다.
  
  나를 보자 일직사관은 우선 화부터 내려고 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분명 어디에 있었냐부터 물어보겠지. 군대에선 한명의 병사가 잠시라도 눈에 보이지 않거나 행방이 묘연해지면 탈영이나 자살부터 의심할 수밖에 없으니. 하지만 사실대로 말하고 싶지는 않다. 다음의 조용한 휴식을 위해서라도 오늘 발견한 그곳을 누구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다. 
  
  일직사관이 뭐라고 말하기 전에 알아서 문제를 해결해 간다. 근무교대 때문에 탄알이 몇 발 없어졌다고 잠시 착각한 모양이다. 역시나 오분도 되지 않아 일을 끝마치고 다시 일직사관 앞에 선다. 문제를 끌어안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좋은 집안에서 가정교육을 잘 받고 자란 듯한 소년 같은 표정을 짓고 그제서야 내가 어디에서 오전을 보냈는지 대충 둘러댄다. 나는 머리도 단정하고 자세도 바르다. 청결한 활동복을 입고 있고, 얼마 전에 깨끗하게 씻은 하얀 새것 같은 활동화를 신고 있다. 치아는 가지런하고 샴푸냄새가 난다. 경어도 제대로 쓸 줄 안다. 나는 그럴 마음만 있으면 연상의 사람들에게 얼마든지 좋은 인상을 줄 수 있다. 그는 내 이야기를 잠자코 듣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내무실에선 소대원들이 점심을 먹고 난 뒤 각자 자기들 나름대로 비디오를 보거나 운동을 하는 등 나른한 주말을 즐기고 있다. 나는 그 모습을 잠시 동안 지켜보다 침상에 걸터앉는다. 식후라 곤했지만 낮잠은 자지 않기로 한다. 지금자면 밤에 깊은 잠을 잘 수 없게 된다. 이곳에선 정해진 생활리듬에 맞춰 움직이지 않으면 다음날의 업무가 힘들어진다. 난 굳이 몸에 베어있는 리듬을 깨지 않기로 한다. 그리고 문득 보내지 않은 답장들에 생각이 미친다. 관물대 가장 깊숙이 넣어둔 편지들, 나는 그 편지들을 일정하게 분류해 놓았다. 답장을 한 편지와 답장을 아직 보내지 못한 편지, 그리고 답장을 보내지 않을 편지들로 말이다.
  
  답장을 보내지 않을 편지들. 나는 그것들을 의식적으로 간과한다. 차별당하는 심정이 어떤 것인지, 그것이 사람에게 얼마나 깊은 상처를 주는 것인지 나는 피해자의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알고 있다. 아픔이라는 것은 개별적인 것이어서, 그 뒤에는 개별적인 상처자국이 남는 것도 알고 있다. 다만 내가 짜증이 나는 것은 그것들 중 어떤 것이 편지를 보낸 사람이 상상력이 결여된 인간이라는 것을 알게 할 때다. 그런 공허한 부분을, 상상력이 결여된 부분을 무감각한 지푸라기로 메운 주제에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바깥으로 돌아다니는 인간들. 그리고 그 무감각함을 공허한 말을 늘어놓으면서 나에게 억지로 강요하려는 인간들에게 생각이 미칠 때마다 그냥 넘길 수가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상상력이 결여된 속 좁은 비관용성, 공허한 말들, 찬탈된 이상들을 나에게 당연한 듯 이야기 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증오한다. 무엇이 옳고 옳지 않은가. 내가 어디에 있든 물론 그것도 매우 중요한 문제다. 그러나 그런 개별적인 판단은 혹시 잘못되었더라도 나중에 정정할 수 가 있다. 잘못을 스스로 인정할 용기만 있다면, 대개의 경우는 돌이킬 수 있다. 그러나 상상력이 결여된 속 좁은 것이나 관용할 줄 모르는 것은 기생충과 마찬가지다. 중간 숙주를 바꾸고 형태를 바꾸어서 끝없이 이어져 간다. 거기에는 구원이 없다. 나는 그런 종류의 편지들에게 답장하고 싶지 않다.

칠월 이십구일, 오후 세시

  시곗 바늘은 오후 세시를 지나 있다. 그 두 개의 바늘은 무척 쌀쌀해 보인다. 그들은 중립적인 척하면서 내 편에 서있지 않다.
  언젠가... 지금과 같은 밝고 약간은 더운 날, 지금의 내가 아니길 바라는 나와 지금의 그녀가 아닌 지금 그곳에 없는 그녀가 작은 카페에 앉아 있다. 그녀는 무엇이 그리 급한지 차도 시키지 않았고, 내 앞에는 평소엔 잘 마시지도 않는 나에게 너무 달기만한 카페모카 한잔만이 있다. 나는 깊이 숨을 들이 마신다. 그리고 내가 지금부터 입에 담아야 할 말을 다시 한 번 확인한다. 물론 확인할 것 까지도 없이 그건 거기에 있다. 그건 언제나 거기에 있다. 하지만 나는 다시 그 비중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그 말을 일단 입 밖에 내버리자, 새삼스럽게 형태가 있는 말로 만들어 버리자 내 마음속에 커다란 구멍이 생긴 것 같은 허전한 감각이 생겨난다. 그 가공의 구멍 속에서 내 심장은 금속적이고 공허한 소리를 내고 있다.
  
  하지만 불행히도 내 입 밖으로 나온 그 말은 내가 원하는 형태가 아니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원하는 형태로 끄집어 내지 못했을 때 남는 찌꺼기를, 독 같은 것을 나는 그 뒤로 마구 뿌려놓았다. 내 주위에 있는 사람을 모두 오염시키고 상처를 안겨주었다. 그게 무슨 까닭인지 그렇게 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건지 모르겠다. 아니면 나라는 사람이 애당초 그렇게 만들어진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그때, 무엇인가가 다가와서 내 가슴을 꽉 조여 댄다. 갑자기 주위의 공기가 희박해진 것처럼 느껴진다. 나는 정말로 내가 해도 되는 일을 했던 것일까 이런 생각이 들자 나는 몹시 불안해진다. 나는 그 생각을 더 이상 하지 않기로 한다. 담배를 하나 꺼내어 입에 문다.
  
  고개를 들어 멀리 바라본다. 하늘은 여전히 밝고 새들은 항상 암수가 같이 다닌다. 구름과 구름이 부딪혀서 부셔지는 것을 바라본다. 아니 이때 부셔진다는 건 적당하지 않은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풍경들을 보고 있으려니까 내 마음에 다시 따스하고 온화한 상념이 되돌아온다. 괜찮아. 나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나서 나 자신에게 그렇게 타이른다. 피고 있던 담배를 바닥에 눌러 끈다. 담배를 피다 서서히 죽는 일은 내 인생의 선택사항에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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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삼스럽지만 내가 아는 한사람의 대해 끄적이려 한다.
  
  그는 한창 자랄 나이에 주위에 높은 벽을 쌓아 놓고 어느 누구도 그 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그 자신도 그 벽을 넘어 밖으로 나가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는 점점 더 과묵해져 갔다. 감정의 기복이 얼굴에 나타나는 것을 가능한 억제하고,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선생님이나 주변의 친구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노력했다. 그렇지만 그런 조용한 고립을 항상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자기 스스로 주위에 빙 둘러쳐놓은 높은 벽이 간단하게 허물어진 일도 있었다. 그럴 때에는 벽이 그도 모르게 없어지고 그는 사람들 앞에 노출되어 버렸다. 그렇게 됐을 때, 그는 혼란스러웠다. 그것도 여간 혼란스러운게 아니었다.
  
  그런 그가 원하는 것이 있었다. 바로 ‘성공’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말하는 성공이 아니었다. 그는 솔직히 성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사전적인 의미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다. 다만 사회적으로든 인간적으로든 그것이 ‘좋다’라는 것만 알고 있었다. 단지 그 이유만으로 그는 성공을 강렬하게 원했다. 그는 학생이었고 그래서 가장 가까이 있었던 것이 공부였다. 성공을 위해 그는 그때부터 흡수지가 되었다.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버릴지는 나중에 결정하면 되었다. 다른 것을 보지 못할 정도로 공부에 집착했다. 책을 좋아하는 천성 때문인지, 자기 앞에 다른 사람이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질투 때문인지 그의 성적은 다른 사람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향상되었고 결국 주위에 그보다 뛰어난 학생은 없게 되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앞만 달리는 그를 어느 순간부터 그의 부모마저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선생님도, 몇안되던 그의 친구도 하나둘 그를 두려워했다. 그는 그런 상황을 당연하게 받아들였고 그렇게 성공할 줄 알았다. 그리고 그는 그런 사람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듯이 나이를 먹어 가는데 따라 성장의 단계를 맞춰서 가는데 익숙하지 못했다. 물론 그의 성장기에도 첫사랑이라는게 있었다. 지금도 그는 가끔 그걸 아름다운 수식을 붙여 회고하곤 하지만, 내가 보기엔 그건 사랑보다는 집착이었고 공부 잘하는 그녀를 자신을 위해 이용한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일반론적으로 인간이 무엇인가를 강렬하게 원할 때 그것은 대게 찾아오지 않는다. 커다란 전환, 의외의 전개는 이야기의 공통적인 구성요소이다. 그는 그만의 성공을 위한 하나의 간단한 의식 정도로만 생각하던 대입시험에서 실패했다. 그리고 순서를 밟아가듯 그를 두려워하던 사람들의 비난이 이어졌다. 하지만 그런 비난도, 잘난 아들을 두었다는 다른 어머니들의 부러운 시선에 원래의 아들을 잃어버리고 아들의 잘못된 꿈에 동화되어 버렸던 어머니의 때늦은 한숨도 그를 여전히 붙잡을 수 없었다. 그에게 그의 성공이 너무도 당연히 생각되었기에 실패를 인정하지 못했다. 아니 실패라는 것 자체를 인식하지 못했다. 그리고 어느 날,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술을 권했다. 그는 술과 담배를 증오하고 있었다. 어릴때부터 그의 아버지가 즐겨하던 술과 담배를 그의 어머니가 무척 싫어했었고, 무엇보다 그것들의 냄새가 역겨웠기 때문이다. 그는 입에서도 ‘나는 자라서도 술과 담배를 절대 입에 대지 않을 것이다. 술과 담배를 하지 못해서 성공을 못한다면 차라리 성공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당신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그것들을 싫어하고 증오했다. 대입시험 후 그의 아버지가 그에게 술 한잔하자고 이야기하기 전까지는...

  대입시험 얼마 후, 그의 아버지가 그에게 술 한잔하러 가자고 했다. 아버지의  친구분이 하신다는 일본식 철판구이점, 처음엔 따라가지 않으려고 했지만 그는 그의 아버지에게 꼭 물어보고 싶은게 있었다. ‘왜 처음부터 나의 실패를 알고 있었다는 듯한 눈빛을 하고 있느냐고’ 그리고 그곳에 따라가야지만 그 질문에 답해줄 것 같았다.
  
  그곳엔 미리 예약을 해 놓으셨는지 가장 깊숙하고 조용한 곳에 있는 자리에 이미 음식과 술이 놓여져 있었다. 처음으로 와본 술집. 그에겐 모든 것이 어색했지만 아버지 앞이었다. 두리번대지 않고 아버지의 눈만 똑바로 보려고 노력했다. 그의 아버지와 그가 단둘이 대면한 적은 많았지만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 속에서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술을 한잔 따라 주었다. 천천히 조금씩 채워지는 그의 잔, 그것은 분명 그의 의지가 아니었다. 무심코 채워져 버린다. 받은 잔은 분명 비워져야했다. 누구의 뜻이었든 그는 그 잔을 받았고, 한번 바라본 후 단번에 들이켰다. 그의 인생에서 첫잔은 그렇게 넘어갔다. 그는 거기서 담배도 피워 보았다. 아니 그때는 입에 연기를 넣어 보았다고 하는 것이 맞겠다. 그와 그의 아버지는 많은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동생이 요즘 어떻게 지내는 것 같냐, 용돈은 부족하지 않냐, 요즘 하루에 남는 시간은 어떻게 보내고 있냐, 그런 이야기들 속에서 그는 끝내 아버지에게 물어보고 싶었던 것을 물어보지 못했다.
  
  그리고 며칠 후, 그는 집을 나왔다. 그의 부모는 그가 가출이란 것을 하고 있는 두 달여 동안 시골의 조용한 고모 댁에서 지낸 줄로 알고 있지만, 그가 실제로 어디 있었는지는 나도 모른다. 아무도 모른다.
  
  그의 인생은 그가 다시 집으로 돌아온 그가 스무 살이 된 시점에서 정지했다.  아니, 그 계기는 스무 살이 아니라 좀 더 일찍 찾아왔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 뒤에도 바깥의 시간은 흐르고 있고 또 그에게 현실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하지만 그에게 그 후의 시간은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 그 후, 이년 남짓한 시간동안 그는 취해있었다. 그의 아버지가 따라준 그 한잔이 그를 이년동안 취하게 했다. 그동안 만났던 친구도, 사랑도 하나도 빠짐없이 그에게 있어 ‘헛것’들이다. 그가 술에서 깨어남과 동시에 그것들은 취기와 함께 없어질 것이다. 난 그렇게 믿고 있다. 그 취해있는 이년동안 나는 그에게서 항상 무엇인가를 강렬하게 찾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것을 필사적으로 피하려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비록 헛것을 바라  보았지만 무언가 강렬하게 원하기만 했던, 다른 것을 생각하지 않았던 예전의 그가 그립다. 그를 지금까지 취하게 만들었던 그 한 잔의 술에서 깨게 되면 그는 아마 예전의 그때로 돌아갈 것이다. 될 수만 있다면 그때는 내가 그가 올바른 성공을 바라 볼 수 있게 도와주고 싶다.

칠월 이십구일, 저녁 여덟시(빨간 당구공 세 개의 비밀에 관한 이야기)

  시간을 들여 최대한 몸을 구석구석 깨끗이 씻고, 하루를 마무리 하려는 내게 어느 한 선임이 다가온다. 그러고 보니 그와 같이 생활한지 벌써 여섯 달째다. 서로 휴일을 마음껏 만끽하고 나른해져 있는 지금도 그는 나에게 다른 사람들에게처럼 짖궂은 농담을 던지지는 못한다. 왜 그런지 나도 모르겠다. 그가 나에게 뭔지 모를 부담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 외에는 다른 건 짐작조차 할 수가 없다. 난 굳이 그런 관계를 바꾸고 싶지는 않다. 다른 사람들에게 쉽게 보이기보다는 차라리 다가오기 어렵게 하는게 이곳에서의 나에게는 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끔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편한 농담들을 주고받고 싶어지는게 사실이다. 특히 오늘 같은 날에는...

  그래서 나는 그에게 내가 알고 있는 이야기를 하나 해준다.

어느 한 마을에 남자아이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 남자아이는 참 공부를 잘하는 아이고, 말도 잘 듣고 착실한 모범생 아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부터인가 그 애 성적이 차츰차츰 떨어지더니 마침내 꼴찌까지 되었습니다. 아이의 아빠는 안 되겠다 싶어서 아이를 불러놓고 말했습니다.
「너 왜 자꾸 성적이 떨어지냐」
「아버지, 빨간당구공 세 개만 구해다 주세요」
「그건 어디에 쓰려고」
「그건... 말씀 드릴수가 없구요. 하여튼 꼭 좀 구해다 주세요. 그럼 성적을 반드시 올릴께요」
  아버지는 빨간 당구공 세 개를 구해다 주었습니다. 얼마 뒤부터 아들의 성적은 막 오르더니 다시 일등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중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안지나 아이는 또 성적이 쭉쭉 떨어지더니 다시 꼴찌가 되었습니다. 아들은 다시 말했습니다.
「아버지, 빨간 당구공 세 개만 다시 구해다 주세요」
  아버지는 또 왜 그러냐고 물었지만 아이는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너무 궁금했습니다. 그리곤 당구공 세 개를 구해다 주었고 다시 아들의 성적은 쑥쑥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아들은 고등학교를 갔습니다. 다시 또 고등학교를 다니던 중에 성적이 점차 떨어지더니 다시 꼴찌로 하락했습니다. 아들은 다시 아버지에게 빨간 당구공 세 개를 구해 달라고 했고 아버지는 또 궁금했지만 참고 당구공을 구해 줬습니다. 아들은 성적이 다시 올라 명문대에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에게 아들이 교통사고가 나서 위급하다는 전화가 왔습니다. 아버지는 빨리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의사들은 마지막이 될 수 있으니 함께 곁을 지키라고 했습니다. 아들은 점점 의식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유언을 들었습니다. 그러던 중 빨간 당구공에 대해 알아야겠다고 생각해서 아들에게 죽는 참에 그 당구공 얘기 좀 해달라고 했습니다. 아들은 빨간 당구공의 비밀에 대해 말해주었습니다. 또 왜 꼭 세 개여야만 하는지에 대해서도 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곧 아들은 죽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해준 당구공의 비밀에 대한 이야기가 너무 우스웠습니다. 아들의 장례식에도 구석으로 가서 계속 웃고, 자꾸자꾸 생각하면 할수록 웃음이 나오기만 했습니다. 장례식을 끝내고 아버지는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택시에서도 아버지는 당구공의 비밀이 너무 우스워 피식거리며 웃었습니다. 택시기사는 웃는 이유가 궁금해서 왜 그러냐고 물었습니다. 아버지는 안 된다고 말을 안 해주었습니다. 그러곤 계속 피식 거리다가 한참을 또 다시 생각해 보니깐 너무 우스워서 또 웃고 웃었습니다. 이제 아예 배를 움켜잡고 뒹굴뒹굴 구르며 웃었습니다. 택시기사는 왜 그러냐고 계속 물었습니다. 아버지는 자기 혼자 알고 있기엔 너무 웃기고 또 별로 잘 아는 사람도 아니니깐 말해줘도 괜찮겠다 싶어서 아들이 얘기한 빨간 당구공 세 개의 비밀에 대해 이야기 해주었습니다. 택시기사는 듣고 한참을 운전하다가 한참을 생각해 보니 너무 웃긴 이야기인 것이었습니다. 택시기사도 기절할 듯 웃었습니다. 너무 웃은 나머지 운전을 잘못해 실수로 차가 강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들의 아버지도 택시기사도 죽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빨간 당구공 세 개의 비밀은 아무도 모르게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 후, 나는 그 선임에게 많이 맞았다. 그리곤 친해졌다.
이곳은 서로 치고 받으면서 친해지는 곳이다.

칠월 이십구일, 밤 아홉시 오십분

  점호시간이 끝나고 다시 잠이 들기 전, 나는 잠시 밖으로 나온다. 머리위에 무수한 별들이 반짝이고 있다. 하늘에 촘촘히 박혀 있다기 보다는 닥치는 대로 마구 뿌려져 있다고 하는 쪽이 가깝다. 내가 지금까지 있어왔던 어느 곳의 밤하늘에도 이렇게 많은 별은 없었다. 몇 개의 별은 굉장히 크고 생생하게 보인다. 진짜로 손을 뻗으면 그대로 닿을 것만 같다. 그것은 물론 숨을 죽일 만큼 아름다운 광경이다.
  
  그러나 아름답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나를 보고 있다. 내가 지금까지 무엇을 해왔고, 앞으로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그들은 알고 있다. 구석구석까지의 그들의 눈이 미치지 않는 곳은 하나도 없다. 나는 그 찬란한 밤하늘 아래서, 다시 격렬한 공포에 사로잡힌다. 숨이 답답해지고 심장의 고동이 빨라진다. 이처럼 엄청난 수의 별들이 내려다보는 가운데 나는 살아왔는데도, 그들의 존재를 지금까지 인식하지 못했다. 별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아니, 별뿐만이 아니다. 그밖에도 내가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나 모르는 것이 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이 존재하는 것일까 나의 앞에서만 숨어있어 내가 미쳐 못 본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 그렇게 생각하자, 나 자신이 구제할 길 없이 무력하게 느껴진다. 가도 가도 끝없이 그 무력함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하지만 그런 나 자신의 공황에서부터 원래의 나로 돌아오기 위한 피드팩일지... 꿈을 꾸게 될 시간이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어서 그런지... 나의 삶속에서 기억하고 싶을 만한 즐거웠던 일들과 그 장면에 같이 있던 사람들이 떠오른다. 고마운 사람들... 하지만 나는 그들에게서 장치로써 작용한다. 나는 그들에게서 장치로써 작용할 뿐이다.
  
  내 주위에선 잇따라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났다. 그중의 어떤 것은 내가 선택한 일이고, 어떤 것은 전혀 선택하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나는 그 두 가지를 지금 이순간 잘 구별할 수가 없게 됐다. 즉 내가 선택했다고 생각한 일도, 실제로는 일을 선택하기 전에 이미 일어나기로 정해져있던 것처럼 생각이 된다. 나는 다만 누군가가 미리 어딘가에서 정한 것을, 그냥 그대로 따르고 있을 뿐이라는 느낌이 든다. 아무리 스스로 생각하고, 아무리 애써 보았자 그런 것은 전부 헛일이라고 생각된다. 아니, 노력하면 할수록 내가 점점 더 내가 아니게 되어가는 것 같은 느낌조차 든다. 내가 내 자신의 궤도로부터 멀어져가는 것 같은 느낌말이다. 그리고 그건 나에게 아주 힘든 일이다.
  
  그래서 나에겐, 답장을 쓰지 않을 편지는 자꾸 늘어만 간다.

  내가 지금 여기서 바라는 유일한 것은 그 어떤 곳도 아닌 오늘 밤 나의 꿈에 어젯밤의 그녀가 내가 익숙해질 때까지 계속 나타나 주는 것이다.
 병장 노지훈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6-08-04 1211) 

  
 
 
 
병장 송희석 (20060803 225849)

가지로! 
할말이 없군요. 태경씨한테서 숨겨져있는 글을 볼수 있다는것만으로 행복하군요. 잘 읽었습니다.    
 
 
 일병 박요한 (20060804 072214)

-병장 이기명- 
가지로! 
하핫 태경님 최곱니다 푸하핫. 
-병장 이기명-    
 
 
병장 김희곤 (20060804 090235)

이제 가지로 가시죠. 좋은 글이군요. 이거 마지막 이렇게 달려주시니 영 나가기 섭섭해지지만 부사관 지원은 절대 없습니다. 기대하지 마시라구요. 하하.    
 
 
병장 김태경 (20060804 094207)

... 
저는 글을 이곳에 처음 올립니다만...    
 
 
병장 송희석 (20060804 094643)

으악! 죄송합니다. 지금 다른분하고 착각한듯 합니다. 이거 김태경이란 이름이 너무 막강하군요!    
 
 
상병 김현동 (20060804 100555)

뜨악 동명이인이었나요. 허허허. 
이거 참 데희리석스럽군요. 이름과 실존의 해체라니.    
 
 
 병장 노지훈 (20060804 121035)

역시... 분명 김태경씨는 7월29일 나랑 마시고 있었는데.    
 
 
 병장 노지훈 (20060804 121110)

어쨌든 가지로!    
 
 
 병장 김동환 (20060804 134817)

..깜짝이야. 
김대현에 이은 김태경 등장.    
 
 
병장 김태경 (20060804 150939)

베낀거죠. 

보르헤스처럼 베낀걸 베꼈다라고 말할수있는 패러디의 수준은 안되는. 

가지로 이건 무슨뜻인죠 허허허. 뭔가 재밌을것 같은데...    
 
 
병장 조주현 (20060804 163343)

허어, 이것참. 저도 동명이인일거라곤 생각못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