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베스트-독서후기]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  
병장 홍석기  [Homepage]  2009-02-14 16:09:49, 조회: 278, 추천:0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



#1. Riders on the storm


짙은 안개 속, 모든 것은 흐릿하다. 칙칙한 빛깔의, 묵직한 구름 속에 하늘은 갇혀지고- 보이는 것이라곤 우중충한 회색으로 덧칠된 무엇. 느릿느릿한 비가 내린다. 무거운 빗방울에 부딪힌 나의 시선은 굴절되고, 노이즈 낀 카메라처럼 시야는 흐려지고 만다. 빗방울이 떨어진 곳엔 축축한 공기만이 남아 나에게 들러붙는다. 떼어버릴 수 없는 이 불쾌함 속에서, 사람들은 살아간다- ‘그림자처럼’. 푸른 제복의 우편배달부, 가방을 맨 초등학생들, 아이스크림을 핥는 여자아이. 서류가방을 옆구리에 끼고 어디론가 향하는 샐러리맨. 걱정스런 얼굴의 주부. 빗물을 짓밟으며 무참히 질주하는 운전기사. 그리고 열일곱의 마약중독자, ‘류’.

이 소설은 ‘류’가 세상을 관찰한 일종의 기록에 가깝다. 죽은 벌레의 상흔, 스타킹을 벗는 여자의 모습, 혈관을 뚫고 주입되는 헤로인까지- 여과되지 않은, 자그마한 일상의 한 조각이 하나의 ‘스틸 컷’ 이 되고 그렇게 여러 장의 사진을 빠르게 돌려보는 것 같은, 하나하나를 묶어 완성한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관객처럼 냉철하게 세계를 ‘관찰’한다. 쓸데없는 상념이 개입하거나, 타인의 논리로 구성된 이 타인의 세계에서 빠져나오려 발버둥치는 열일곱의 눈이 아닌, 릴리의 말마따나 ‘마치 기록을 해놓고 나중에 그것을 연구하는 학자’의 눈이다.

‘안개’, ‘비’, ‘습기찬 공기’ 와 같은 이미지로 대변되는 류의 세계는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보이지 않는 세계이다. 유리된 보호막 속에서 그저 자전하는 일상이 있을 뿐. 1969년. 한 쪽에서는 베트남 전쟁의 사상자 수가 하루하루 늘어나고, 다른 한 쪽에서는 평화의 제전, ‘우드스톡’이 펼쳐지며 Love & Peace 의 구호 속에 무언가 무너뜨릴 수 있을 것만 같던 그때. 일본의 기성세대들은 세상과 연결되지 못한 채, 국가 재건과 경제 발전의 구호 속에서- 마치 짙은 안개와 모래폭풍으로 뒤덮힌,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사막 한가운데에 서 있는 여행자들처럼- 그저 묵묵히, 답답한 안개 속을 걸어나갈 뿐이다. 류는 이 갑갑한 안개 속을 탈출하여 세상을 똑바로 ‘관찰’ 하려 한다. ‘눈을 감아도 떠오르는 여러 가지 것들을 보고 싶어’ (p.99) 한다. 마약을 통해서, 난교 파티를 통해서, 일상과는 동떨어진 그 일련의 행위들을 통해 자신의 ‘시야의 한계’ 밖에 위치한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인가를 보려 한다. 하지만, ‘해시시’의 뿌연 연기 속에 벌어진 난교 파티의 포장된 즐거움은 땀과 정액의 끈적끈적한 불쾌감과 역겨운 냄새로 얼룩져 구역질이 나고, ‘나는 토할 것 같다.’

눈앞에, 달콤한 향기를 내는 연기가 흐른다. 머리가 무거워지면서 마비되어간다. 손과 다리를 천천히 움직여보니 관절에 기름을 부은 것처럼, 미끈미끈한 어떤 것이 몸 구석구석을 도는 것처럼 느껴진다. 숨을 쉴 때마다 점차 자신에 대해 망각해간다. 몸에서 여러 가지 것들이 차례로 빠져나가고 내가 껍데기만 남은 인형이라고 생각된다. 방안은 달콤한 공기로 가득 차고 담배 연기가 폐를 긁어댄다.

자신이 인형이라는 느낌이 더욱 강렬해진다.

어쨌든 저 녀석들의 지시대로 따라서 움직이기만 하면 되는거야.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노예야. (p. 86)

류 자신이 누리고 있다고 생각했던 그 즐거움은 자기 자신을 망각하여 인간의 감각을 잃어버렸기에 느낄 수 있었던 착각에 불과했다. 무감각한 인형은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할 뿐 그 역시 안개 속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 보이지 않는 길을 걸어나가야만 한다. 빠져나올 수 없는 그에게 남은 것은 조심스런 한탄 뿐.

도대체 여기는 어디일까, 하고 나는 계속 생각하고 있다.(p. 66)

안개는 더욱더 짙어지고, 어딘지도 모르는 목적지를 향해 그는 그저 묵묵히 앞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먼지로 뒤덮인 사막 한가운데를 지나는 여행자처럼, 보이지 않는 세상을 헤쳐나가야 하는 인간의 운명. 이것이 우리의 ‘블루’(우울) 의 근원이 아닐까.
Riders on the storm.



#2. 투명, 그 잔혹한 이름. 그리고 The end-


투명함은 모든 것을 그대로 투과시키는 성질을 가진다. 그 왜곡되지 않은 깨끗함, 신비로울 정도의 순수함을 통하여 우리는 사물을 인식한다. “투명”은 인식의 매개체. 그렇기에 우리는 무엇을 볼 때면 그 순수한 매개체의 흔적을 읽는다. 그 순수함을 기억하고 인식의 대상에서 순수함을 보려한다. 사물의 순수한 성질을 열망하여 그렇게 모든 것에서 순수함을, 변하지 않는 그대로의 모습을 찾으려 한다. 투명한 물은, 그것이 왜곡되었을지라도 세상을 비추어 내며, 투명한 거울은 자기 자신을 비추어 낸다. 흐르는 강물을 볼 때면 왠지 마음이 차분해지고, 거울을 응시 할 때면 내 몸 속 어딘가가 숙연해지는 느낌을 마주하는 것은 인간의 인식 체계가 그 투명의 매개체 속에서 순수함을 읽어내기 때문이다.

이 소설 전체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물’과 관련된 이미지들-비, 습기, 헤로인 등-은 그러한 투명함에 대한 열망, 즉 일종의 절대성을 지니는 순수함을 차즌 류의 욕망을 상징한다. 왜곡되지 않은 관점에서, ‘학자의 눈’ 과도 같이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관찰하고자 하는 류의 욕망, 그리고 결코 투명할 수 없는 현실과의 괴리감이 무의식적 저변에 깔리는 장치 역할을 하는 것이다.

류, 당신은 참 이상한 사람이야. 불쌍한 사람이기도 하고. 눈을 감아도 떠오르는 여러 가지 것들을 보고 싶어서 그러는 거 아냐? 말로 잘 표현할 수는 없지만 정말로 마음속으로 즐기고 있다면, 그럴 동안에는 무엇인가를 찾는다거나 깊이 생각하진 않을 텐데. 그렇잖아? 당신은 무엇인가를 계속 보려고 하는거야. 마치 기록을 해놓고 나중에 그것을 연구하는 학자처럼 말이야. (p. 99)

그 영화는 거대한 거울 같은 영화가 되겠지. 보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영상화되어 다 비치는 큰 거울같은 영화. 나는 그런 영화를 보고 싶어. 그런게 있다면 꼭 보고 싶어. (p.104)

세상은 결코 투명하지 않다. 대부분의 사물은 어떠한 ‘색’을 띄고 있기 때문이다. 빛은 색을 통과하지 못하기 때문에, 색에 가려진 사물의 본모습은 우리에게 인식될 수 없다. 있는 그대로를 비추어 내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점점 그 색깔만으로 사물을 인지하는데 익숙해져버린다. 당장 눈에 보이는, 외형적으로 구분될 수 있는 색을 찾아내는 것이 더 자연스럽지, 그것의 투명도를 관찰하기에는 너무나도 화려한 색색으로 포장된 것이 현실이다. 그렇게 채도에는 익숙하지만 명도에는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오렌지 빛의 토마토’ 는 인식될 수 없다. 강력한 빨강에 한없이 익숙해졌기 문에. 색이란 단지 빛의 차이란 것을, 그 투명함의 차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류는 이 감정을 ‘두렵다’ 고 표현한다. 짙은 안개속에서 마주한 한 줄기의 빛은 고통스러울 정도로 눈이 부시다. 이제는 더 이상 그 투명한 빛을 똑바로 응시할 수 없으며, 빛을 바라보는 것은 때로 실명의 위험을 짊어져야 하는 어리석은 짓이 되어버린 것이다. 투명, 그 잔혹한 이름.

당신은 무엇인가를 계속 보려고 하는거야. 마치 기록을 해놓고 나중에 그것을 연구하는 학자처럼 말이야. 어린애처럼. 사실 어린애지 뭐. 어릴 때는 무엇이든 보려고 하잖아? 어린애들은 낯선 사람의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지만, 지금처럼 어른이 돼서 다른 사람의 눈 같은 걸 계속 보고 있어봐.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을 계속 바라보고 있어봐. 금방 마음이 이상해져서 미쳐버릴 테니까. 류, 알았지? 어린애 같은 시각으로 사람과 사물을 봐선 안 돼. (p. 104)

끊임없이 투명함을 찾으려 하는 류, 그리고 차가울 정도로 투명한 주사기 속의 헤로인. 그 한없이 투명한 매개체를 통하여 그는 관찰하려 한다. 아픔이 망각되고, 감정과 사견이 배제된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그러나 인간은 완전한, 말 그대로의 투명함을 인식할 수 없다. 인식할 수 있다면 그것은 투명한 것이 아니기에. 타인을 인식하는 순간 (‘말을 걸어오는 순간’) 모두가 영상화된 상상 속 류의 세계가 깨어지듯이. 인간은 색을 통해서, 그 색과 투명의 괴리를 통해서만 투명함을 인식할 수 있고, 그 과정에서 발생한 색의 간섭 현상으로 인하여 ‘굴절’이 일어난다. 물에 비친 세상은, 거울 속의 나의 모습은 결국 왜곡되고 마는 것이다. 헤로인 역시 아픔을 망각시키고 사유를 해방시키지만, ‘굴절’에서 오는 또다른 고통(구토)를 유발하게 된다. 한없이 투명한, 에 닿을 수 없어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에 머무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데아와 현실의 괴리. 그렇다면 갑갑한 현실도, 차가운 이상도 아닌 이 곳은 어디일까. 릴리는 절규한다.

그만하라고 했잖아, 류. 그보다 지금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가르쳐줘. 어디를 달리고 있는지 도저히 모르겠어. 잘 보이지도 않고. 류, 좀 진지하게 생각해, 제발. 우린 지금 어디에 있는거야? (p.114)

‘도어즈’ 의 짐 모리슨은 'The End' 라는 곡에서 끊임없이 절규한다. This is the end. 이것이 끝이라고. 반복하고 또 반복하며, 끝을 갈구한다. 여기가 끝이기를, 세상의 끝을 마주하고 싶지만 끝은 찾아오지 않는다. 사람들은 하나 둘씩 떠나가고, 노래는 끝을 향해 달려가는 듯 하지만 끝은 오지 않는다. 노래는 계속 되고, 그는 계속 외칠 뿐이다. 
This is the End.



#3.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


검은색. 각각의, 색색의, 그 모든 색깔들이 하나로 섞일 때 검은색이 된다. 빛은 색을 통과하지 못하고, 그 빛의 투명함을 상실해버린 색들이, 개개인들이 뭉쳐져 검은색을 이룬다. 검은색. 명도의 의미가 사라지는 색. 투명함이 존재할 수 없는 완전한 어둠. 손댈 수 없는 불가항력의 존재- 그 곳에서 투명은 사라지고야 만다. 그렇게 탄생한 ‘검은 새’는 류를 절망으로 몰아넣는다.

릴리, 저것이 새야. 잘 봐. 저 마을이 새인 거야. 저것은 마을 같은게 아니야. 저 마을에는 사람 따위는 살고 있지 않아. 저것은 새야. 모르겠어? 정말 몰라? 사막에서 미사일을 향해 폭발하라고 외친 남자는 새를 죽이려고 한거야. 새는 죽이지 않으면 안돼. 새를 죽이지 않으면 너는 나 자신을 이해 못하게 되는 거야. 새가 방해하고 있어. 내가 보고 싶은 것은 숨기고 있는 거야. 같이 새를 죽여줘, 릴리. 아무것도 안 보여, 릴리. 아무것도 안 보여. (p. 210)

류는 새를 죽일 수 없다. 그것은 너무나도 거대해서, 그 전체를 볼 수조차 없는 것이기 문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 거대한 어둠조차 부분적으로는 각각의 색깔을 지닌 객체들, 빛을 통과시키지 못하고 투명함을 잃어버린 개인들이다. 그리고 비록 빛의 투명함을 받아들이진 못했더라도, 그 빛이 충돌한 곳에는 조그맣지만 투명한 상처가 남아있다. 순수한 매개체의 흔적은 아직 세상 곳곳에 파편처럼 존재하는 것이다.

류는 투명에 닿지 못했다. 감각과 사유를 초월한 그 본질적인 세계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그는 패배를 선언한다. ‘마른 몸 여기저기에 구멍이 뚫린 것 같은’ 불완전한 인간의 패배선언은 구슬픈 선율을 가진 패잔병의 노래만큼이나 애처롭지만 , 담담하게 인정할 수밖에 없다. 아픔을, 외로움을, 투명할 수 없음을, 인정한다. 그리고 모든 감각이 되돌아 올 때, 묘하게 안심이 됨을 느낀다. 순수한 매개체의 흔적에서, 그 투명의 부재에서 우리는 아픔을 느끼는 것이 아닐까. 나 홀로 이 세계와 유리된 듯한 그 감정이, 사실은 나 자신속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투명함일지도 모른다. 의미없는 지긋지긋한 일상조차, 투명함의 파편이나마 쥐어볼 수 있는 마지막 유적인 것이다.

아픔에 의해 주위로부터 돋보이고, 아픔에 의해 자신이 빛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처럼 빛나는 나 자신은 저물어가는 아름다운 오렌지 빛과도 친해질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p.201)

자! 잘 보라고. 아직 세상은 내 아래에 있다. 이 땅 위에 내가 있고, 나무라든가 풀, 설탕을 집으로 운반하는 개미와 굴러가는 공을 쫓는 여자아이, 달려가는 강아지가 있다.
무서워 하지마. 세상은 아직 내 아래에 있다. (p. 200) 

우리는 영원히 투명에 닿지 못할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맑은 날 아침을 비추는 한 줄기 햇살이나, 여자의 하얀 팔과 같은 부드러운 곡선,처럼 자그마한 파편들일 뿐이다. 유리는 투명하지만, 유리 조각은 파란색을 띄며 일그러진 모습만을 비추어 내듯, 인간의 감정은 객관적일 수 없으며, 개인의 주관적 관념을 투영할 뿐이다. 그저 한없이 투명에 가까울, 뿐이다.

그러나 그 유리조각은, 눈부신 에메랄드 빛을 뿜어내며 그 무엇보다도 투명하게 빛난다.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다.

* 책마을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9-03-11 13:16)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6-01
15:22:01 

 

병장 김민규 
  갑작스런 난독증입니다. 출력해서 좀 곰씹어봐도 되겠지요? 
맛있게 먹겠습니다. 냠냠 2009-02-14
19:08:40
  

 

일병 김유현 
  "세상은 결코 투명하지 않다. 대부분의 사물은 어떠한 ‘색’을 띄고 있기 때문이다. 빛은 색을 통과하지 못하기 때문에, 색에 가려진 사물의 본모습은 우리에게 인식될 수 없다. 있는 그대로를 비추어 내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점점 그 색깔만으로 사물을 인지하는데 익숙해져버린다. 당장 눈에 보이는, 외형적으로 구분될 수 있는 색을 찾아내는 것이 더 자연스럽지, 그것의 투명도를 관찰하기에는 너무나도 화려한 색색으로 포장된 것이 현실이다."...어쩌면 이것은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이야기를 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듭니다. 류의 그것은 어쩌면 구도자의 그것이었는지도 모르겠군요. 2009-02-15
00:43:14
  

 

병장 김민규 
  저는 색色이라는 것을 외형적 포장재의 성격이 아닌, 본질의 반사, 실체의 메아리라고 생각해왔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오렌지 빛의 토마토'를 무언가 미숙한 것, 내적으로 완성되지 않은 것이라고 판단해왔다는, 단편적 지레짐작의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죠. 

그런 자격지심상에서 이 글을 읽을 때에, '투명한 매개체를 통해 보는 사물의 외피들, 굴절되는 빛의 간섭'은 반성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색과 투명의 괴리를 통해서만 투명을 인식할 수 있는 - 즉 색의 부재의 결과로 투명이라는 현상이 존재할 수 있고, 열의 부재로 차가움이 있으며, 빛과의 괴리로 어둠을 깨닫을 수 있고, 악의 부재로 반대급부의 무언가가 있을 수 있다는 저의 현실인식을 다시금 떠오르게 한 듯. 

채도에는 익숙하지만 명도에는 둔감한 눈과 너무도 친밀하여 2차원적 가치(UL에서UV까지의 스펙트럼)에만 집착해온 찜찜함을 벗어버릴 수가 없네요. 그러나 다소 동의되지 않는 부분들도 마주해야 했는데, 그러니까 언어의 형이상학적 관념성에서 낯선 거리감을 느끼는 것은 아마도 저의 고질적인 진부성때문이리라 생각합니다. 

어쨌건, 다시금 황홀합니다. 아마도 우리는 영원히 투명에 닿지 못할지도 몰라요. 그러나 눈부신 에메랄드 빛을 뿜어내는 이 글, 투명하게 빛나는 내글/후기의 여러 보석들을 통해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를 저는 보고 있습니다. 절대적 황홀감, 심리적인 도취와 공감, 무엇으로 대신할 수 있을까요? 

두려워집니다. 두어 달 후가. 잘 읽었습니다. 2009-02-15
04:51:43
  

 

병장 홍석기 
  유현// 오오. 그렇게 연결될 수 있겠군요. 저는 그저 이 책 곳곳에 퍼져있는 '색깔'의 이미지들을 모아서 어떻게 합리화를 시켜보려고 했는데, 이거 굉장히 뿌듯합니다. 

민큐// 다소 동의되지 않는 부분들이 있는 것은 구색맞추기에 급급했던 저의 미숙함 탓이 클 겁니다. 이 후기를 완성하고 나서 든 생각은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 라기 보다는 인간은 합리적인 동물이 아니라 합리화의 동물이다, 라는 구절이었거든요. 헤헤. 또 하나 아쉬웠던 건 색에 대한 지식이라든가 (하다못해 미술책이라도 좀 봤었으면) 빛의 대한 물리학적 지식이 전무해서 깔끔하게 설명해낼 수가 없었다는 것. 무라카미 류가 곳곳에 배치해 놓은 색과 빛의 이미지들을 제대로 묶어내지 못해서 그저 안타까운 마음만 들더군요. 

그렇지만, 뭐 부족한 글이 유현님과 민큐님의 답글로 인해 투명한 빛을 뿜어내기 시작하는군요. 흐흐. 2009-02-15
14:43:34
  

 

상병 박은규 
  석기님의 글을 읽으니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를 볼 때의 느낌이 새록새록.(웃음) 
신촌에 제가 자주 가는 술집 이름이 '우드 스탁'이어서 우드 스탁이 뭔지 찾아봤던 기억도 나고. 잘 읽었습니다. 아, 집이 서울이면 신촌 우드스탁 한 번 가보세요. 시원한 생맥주를 마시며 신나는 LP음악을 들을 수 있답니다. 2009-02-16
09:52:08
  

 

병장 홍석기 
  은규// 감사합니다. 마침 신촌에 자주 가는 편인데, 들러서 술 한잔 하고 가야겠네요. 흐흐. LP도 무쟈게 좋아한답니다. LP 수집도 해볼려다가 가격땜에 밥 딜런의 'Highway 61 Revisited' 밖에 모으지 못했지만... 2009-02-16
14:37:57
  

 

일병 권홍목 
  석기//아! 밥딜런의 그 앨범 집에 박아놓고 썩히던게 기억났네요. 덕분에 생각났어요. 이번에 나갈때 가져와야겠어요 2009-02-16
16:33:03
  

 

병장 김민규 
  아 정말 The secret은 진리인가. 아침에 'The sarcastic DB revisited' 라고, 예전에 제 싸이월드 게시판에 써놓았던 구절이 떠올라서 그땐 그랬지 했었는데 여기서 'Highway 61 revisited'를 보니까 뭔가 연관된듯한, 그러니까 revisited라는 단어를 빨아당긴듯한 느낌이 들어 잔뜩 찜찜하네요. 

저런 형태로 자주 쓰지 않잖아요. 프리메이슨들의 비밀은 진리인가? 궁시렁 궁시렁. 2009-02-16
22:57: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