윈드드리머
이 책이 발간될 당시였던 1999년 한국에는 판타지 소설의 붐이 절정에 치달았던 시기다. 전민희의 <세월의 돌>이 고등학교 각지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고, 그 당시에 <드래곤 라자>는 대학 강의문단 사이에서도 이슈가 될 정도로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킨 하나의 '문학 현상'이었다. 여기에 본격 게임소설이라 볼 수 있는 홍정훈의 <비상하는 매>와 듀나의 <면세구역>까지 가세하면서 한국 장르문학이 이제 본격적인 하나의 문학현상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가라는 기대감이 여기저기서 부풀어있었다. (사실 내가 친구들과 고등학교때 창단한 동아리가 바로 '환상문학 토론동아리'였고, 내 친구들은 모두 이와같은 상황에 굉장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최초로 SF와 판타지 무크지가 발간되기도 했고, 매스컴에서는 여러가지 장르문단에 대한 호의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6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그것은 대한민국 냄비문화의 한 전형인 '거품'이라는 사실이 여지없이 드러났고, 현재 출간되는 전혀 쓸데없는 판타지소설이나, 퓨전 판타지소설 작품들을 읽어보면, 우리나라 장르문학의 수준은 여전히 후진한 것이라는 뼈저린 현실을 직시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사실, <윈드드리머>는 1999년 발간된 최고의 환상소설집이라는 극찬을 얻어내었다. 사실 친구에 의해서 고등학생 시절 당시에 읽었던 <듀러왕의 전설 - 천인공로할 결투>나 <도서관 소너>는 당시 십대 청소년인 나에게 굉장한 즐거움을 주었고, 이 책에 수록된 단편을 모두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단단히 하고 있었다.
하지만, 2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책은 절판이 되었고, 지난 휴가때 간신히 수소문 끝에 이 책을 구입하게 되어 당대 최고의 한국 환상소설 단편집인 <윈드드리머>의 전모를 밝혀낼 수 있었다. 나는 지금 국문학과 독문학을 전공하면서 문예비평과 장르비평을 동시에 공부하는 대학생이 되어있었고, 그에 따라서 듀나의 소설처럼 이 단편집도 조금은 공정한 판단을 내릴 기본적인 자격을 나는 갖추었다는 생각에 이 책을 읽어나갔다.
하지만 결과는 조금 참담했다. 여기 수록된 단편집 양이 많은 관계로, 이 작품집의 대표작인 방지나의 <윈드드리머>를 대표작으로 뽑아 한국 판타지문단의 한계를 한번 짚어보도록 하자.
<천공의 성 라퓨타>에 컨셉을 얻어서 만든 이 단편은, 가상의 왕국에서 황실의 혈족인 한 과학자가 비행정을 만드는 과정과 그에 대한 대가에 살육과 희생, 그리고 거기서 해방하는 자유를 찾아 나간다는 다소 진부한 스토리라인을 가지고 판타지 소설이라는 형식을 빌어서 그려내고 있다. 작품의 스토리라인은 지극히 단선적이고, 경쾌하며 여류작가 답게 여성적이고 섬세한 터치도 곳곳에서 드러난다.
하지만, 이 작품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바로 그 정도 수준의 퀼리티를 가질수 밖에 없는 치명적인 한계를 가진다. 술회하자면, 이 소설에서 드러나는 여러가지 이야기구조와 진행, 진부하고 평범한 테마에 대한 흔하디 흔한 접근은 필자가 고등학교 때 썼던 습작 단편소설 <지팡이와 학교>의 수준 그 이상도 아닌 수준에서 머물고 있고, 이야기를 끌어가는 깊이는 이영도나 전민희의 여타 작품에 비하 한없이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무엇보다도 SF와는 다른 장르판타지만의 특징인 상상력의 부재가 가장 크게 눈에 띈다. SF평론가 박산준의 서평을 빌자면, SF가 경이의 장르라면, 판타지는 경외의 장르라고 말하듯이 판타지소설에서 상상력은 어찌보면 장르문단을 존속하게 하는 존재이유 그 자체인데, 이 작품에서 드러나는 환상적 구조는 그 어느 부분에서도 신선하고 새로운 시각을 찾을 수 없다. (이영도는 대한민국 장르문단에서도 너무나 독특한 작가이기때문에 그의 이야기는 여기서 제외한다.)
톨킨과 랍킨같은 환상문학가는 환상문학의 '회복'을 이야기했으며, 장르비평의 효시라고 불리는 롤랑 바르트의 제자였던 츠베탕 토도로프는 <환상문학이론>에서 장르문학은 '망설임의 미학'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이런 장르문학만이 가질 수 있는 빛나는 특징인 '망설임의 미학'은 그 어느곳에서도 보여지지 않고 있다는 치명적인 맹점을 가지고 있다. 김예리씨가 작품 후기형식으로 쓴 환상문학 이론에서도 필자가 스물 두살때 범했던 치명적인 오류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같은데, 환상문학 씬의 특징을 중남미의 '마술적 사실주의'와 '장르판타지'로 양분하고 그 특징을 독립적으로 고찰하고 있다는 점에서 여러 문제를 가지고 있다.
마르케스나 환 룰포등 중남미 작가들의 '환상적 사실주의 문학'이나 르귄이나 수전 바클리, 톨킨, 오트프리트 프로이슬러등의 현대 장르판타지 작가들이 가지고 있는 '판타지 소설'이나 두 장르가 모두 '환상소설'로 포용될 수 있는 가장 커다란 이유는 토도로프가 지적했듯이 '망설임의 미학'을 모두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방지나의 <윈드드리머>에서는 이런 망설임의 미학이 전혀 보여지고 있지 않으며, 그저 내재적 리얼리티가 가볍게 채색하고 있는 평범한 만화를 보는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렇다고, 내러티브가 가지는 당위적 미학이 뛰어나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이야기의 흐름이나 조직의 연결은 유기적으로 치밀하지 못하고 허술하기 짝이 없다. 경쾌한 만화적인 진행이 굉장히 돋보이긴 하지만, 이 작품의 내러티브는 그런 만화적인 스피디한 이야기의 진행과 충돌하여 반감을 안고 있어서 불안감을 가진다. 즉, 이것을 하나의 진지한 '문학 내의 장르문학으로서의 가치'를 획득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하기사, 필자의 관점에서는 이영도의 <눈물을 마시는 새>나 <피를 마시는 새>역시 함량부족이라고 생각할 정도니 이런 작품들에게 정당한 평가를 끌어내지 못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이 소설에서는 두가지 테마를 핵심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날기위해 치러야 하는 희생'과 '자유의 문제'이며, 다른 하나는 '혈통과 생명에 대한 진한 인간애'가 그것이다. 작가는 어찌해서라도 이 두가지 테마를 하나의 이야기속에서 엮어보려고 상당히 노력을 했지만, 결론적으로 작가의 역량부족이 그대로 노출된다. 희생과 비상이라는 두가지 전형적인 테마는 그저 일상적으로 그려지면서 하나의 에피소드로 그려지고 있고, 그 안에서 엉켜있는 인간애에 대한 진한 휴머니즘의 테마는 편입되지 못하고, 하나의 '피상적인 이야기'속에서 따로 놀고 있다. 이것은 플롯이 교차되지 않고 '편승되는'느낌을 굉장히 강하게 받는다. 차라리 이 작품 안에서 (어차피 단편이라 이런 두가지 이야기를 한번에 말한다는 것 자체가 매우 어렵다.) 자유의 비상, 혹은 인간애. 하가지 테마를 좀더 심도있게 다루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따라서 이 작품은 일반 작가지망생이라면 누구라도 쓸 수 있는 평범한 판타지 습작 소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 작품이 이 단편집의 '타이틀'이 됐다는 점을 감안하면, 한국 판타지소설은 얼마나 먼 길을 가야하는지를 단적으로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한국 장르문학은 지금 SF든 추리문학이든 판타지든 전혀 잘못 된 길을 가고 있다. 얼마전에 알게 된 SF매니아 친구와 늘 이야기하는 대목이지만, 우리나라 장르문학은 장르의 게토 안에서만 장르적 당위성으로 문학성을 얻어내려고 노력한다. 듀나의 작품들은 SF매니아들 사이에서 열광되고, 이영도나 전민희의 소설은 '판타지 문학'이라는 카테고리 안에서만 '명작'으로 추앙받는다.
하지만, 이것은 매우 잘못된 선입견이다. 물론 외국의 부러운 '열린문학토양'만을 핑계될수는 없겠지만, 외국의 경우 판타지문학이나 SF소설 모두 문학 안에서 진지하게 검토되고 비평받는다. 그러니까 외국의 경우는 비록 '장르적 게토안에서 열광하는' 작품이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의 진지한 '문학작품'으로서 문예비평가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비평되는 매우 훌륭한 시스템이 갖추어져 있다. 그것은 캐서린 흄같은 문학가들이 주제 사라마구나 로저 젤레즈니를 동시에 읽고, 토마스 핀천같은 본격 문학작가가 <49호품목의 경매>나 <브이 스토리>를 쓰고, 미장센의 선구자라 불리는 타르코프스키 감독이 스와니타프 렘의 <솔라리스>를 영화화하는 것처럼 매우 다채로운 소통을 가능하게 만든다.
하지만, 우리 문단은 어떤가? 나는 그렉 이건의 <쿼런틴>과 로저 젤라즈니의 <신들의 사회> 같은 작품들을 그저 SF매니아들은 SF문학의 걸작으로만 추앙할 뿐, 그것을 진지한 하나의 '문학현상'으로서 비평적으로 접근하려는 시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박상준씨나 김상훈씨의 SF 비평을 보면 솔직히 그들의 엄청나게 박학하고 진지하고 열정적인 SF문학담론으로서의 비평이 눈부시고 빛나지만, 그 소설을 하나의 '서사문학의 내러티브에 의한 예술의 현상'으로서 받아들이고, 플롯적 조감을 감상하고, 미학적 테제를 탐구하려는 노력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렉이건? 그의 명작인 장편 <쿼런틴>에 주석을 달아놓은 김상훈씨의 작품해설을 읽어보아도, 양자역학과 나노공학에 대한 하드SF적인 면에서 부상한 그렉이건의 "SF적 역량"을 찬사하는데만 온 힘을 쏟는다. 필자가 이 게시판에 써놓은 <쿼런틴>독서 감상문을 읽어보길 바란다. 필자는 물론 전문학자는 아니지만, 나름대로 4년정도 문예비평을 진지하게 공부했던 사람이고, 문예창작을 공부한 대학생, 인문학도로서 최대한 진지한 성찰의 자세를 가지고 "SF문학"으로서가 아닌, "진지한 문학의 분야로서 SF작품 <쿼런틴>"을 문예비평적으로 고찰하려고 최대한 노력을 하였다. 김상훈 씨는 작품 후기를 쓰는데 있어서도 이 작품의 최대 핵심인 '자아찾기'를 제시하면서, 이 작품에서 드러나는 'SF적 의식의 흐름을 이용한 자아찾기의 과정'을 문학적으로 하나도 잡아주지 못하고 있다.
박상준씨? 듀나의 '면세구역'의 후기에 달린 박상준씨의 듀나비평도 마찬가지다. <나비전쟁>은 최초의 사고실험으로서 빛나는 SF적 통찰력에 초점이 맞춰져 있으며, <면세구역>과 <스핑크스 아래서>를 바라보는 '경이의 문학SF로서 듀나의 빛나는 상상력'에만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다. 필자가 역시 이 게시판에 쓴 '듀나의 <면세구역>' 글을 읽어보라. 필자는 물론 러시아 포말리즘(형식주의)적인 비평으로 작품을 분해하려 한 실수를 범하기는 했지만, 적어도 '사고실험'이니, 'SF의 경이감'이니 '외삽법'이니 하는 SF문학에서만 적용되는 특징들을 넘어서 진정한 문학비평에서 토론할 가능성이 충분한 <면세구역>이 가지는 패스티시와 콜라주기법, 그리고 여러가지 흩어진 작품에피소드 테제들이 단편이라는 F은 텍스트 안에서 통합되는 과정에 대해 추적하려고 했다. 이것이 바로 문예비평이다. 필자가 아직 SF에 박학하지 못하여 이 두가지를 혼합하여 비평하는것은 무리가 따르겠지만, 적어도 이정도 소양이 되어야 비평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점에서 우리나라 SF문단은 너무나도 폐쇄적이다.
판타지문학? 이쪽은 SF보다 사정이 더욱 참혹하다. 많은 판타지 매니아들은 이영도의 <드래곤 라자>를 세계적인 명작이라고 뜬금없이 말한다. 심지어 꽤 많은 독자들은 <눈물을 마시는 새>를 한국의 <반지의 제왕>의 반열에 올려놓아도 전혀 손색이 없다는 말을 서슴없이 한다. 필자의 경우, 이것은 어이가 없다. 이영도가 물론 장르판타지 안에서 '경이'와 '회복'르로서 판타지문학의 개성을 '국제적인 수준'으로 보여줄 수 있는 뛰어난 작가인것은 부인하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이영도 작가의 최대의 가능성이다.
하지만, 그는 이야기의 개연성과 내재적 리얼리티를 부여하는 데는 전혀 개성이 없고, 작가 역시도 그것에 대해서는 별 신경쓰지 않는다. 이영도처럼 거대서사의 이야기를 써내려가는 작가의 경우는 도상학이나 고딕 건축미학과 비슷한 방식의 '플롯 쌓기'가 요구된다. 톨킨이나 르귄, 젤라즈니같은 작가들은 이것을 가히 '문학적 예술의 수준'으로 축조해놓은 이 분야의 거장들이다. 하지만, 이영도는 이점에서 치명적으로 부족하다. 소설은 '이야기'이다. 즉, '서사의 예술'이다. 장르판타지로서 '환상문학의 회복효과'의 경이로움에 온 시야를 빼앗겨버린 우리나라 판타지문학 독자들은 서사예술의 가장 기초이며 핵인 '거대서사의 흐름'을 전혀 바라보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까, 결론은... 우리나라는 장르문학이 성장하려면, 적어도 <문학을 전공한>, <문예비평을 공부하는> 사람이 SF를 진지한 문학의 현상으로 "탐구할 수 있는" 여건이 우선 조성되어야 한다. 물론 필자는 이것을 가장 우선적인 목표로 삼고 대학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필자의 경우는 SF나 장르판타지, 추리문학과 호러문학이 아니라, 흔히 매도되는 "아동문학"의 분야를 파고들기는 했지만.)
SF문학 매니아들이라고 해서 츠베탕 토도로프, 에릭 랍킨, 캐서린 흄, 로즈마리 잭슨같은 장르문학비평가들의 '경이'니 '망설임'이니 하는 좁은 시각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이 아니라, 장르문학보다 훨씬 거대한 바다인 '문학' 그 자체 안에서 진지하게 약동하는 '장르문학'의 특징들을 발견할수 있었으면 한다. 로저 젤라즈니를 읽는 사람이 주제 사라마구나 존 쿳시, 살만 루시디, 파묵, 아멜리 노통을 읽고, 토도로프와 톨킨, 루이스의 문학이론을 공부하는 사람이 야콥슨 쉬클로프스키, 블라디미르 프로프, 노스롭 프라이, W.H 오든, 롤랑바르트를 공부할 수 있는, 그런 폭넓은 통섭적인 문학의 여건이 조성되었을때야 비로소, 우리 장르문단은 진지한 '문학의 현상'으로서 받아들여질 수 있을것이다.
하지만, 최근에 등장하는 장르비평담론이나 작품들을 보면, 정말 솔직한 심정으로 절망적이다. 아직은 멀어도 한참 멀었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