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의 名詩 까기] 첫번째 _김지민
병장 김현동 04-09 11:27 | HIT : 169
( 김지민, 김현동, 이승현 님의 글과 댓글을 편집하였습니다.)
[ 한국의 명시 까기] (by 김지민)
이 시리즈는 이른바 한국의 명시라고 불리우는 몇몇 詩들을 읽다가, 처음 이 시를 접했을 당시(대부분 수험생이었던 그 때)와는 다른 감흥이 느껴지고, 단점들이 막막 느껴져서 참을 수 없었기에 올리는 것임을 말씀드리며, 개중에는 시대적 차이점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단점들도 있음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뿐만 아니라 제가 명시를 깔 수 있을 만큼 문학적 소양이 높은 것은 아니며, 다만 이것은 개인적인 체화를 통해 익힌 '詩作'의 기술을 토대로, 한 마디로 지 멋대로 까는 시리즈임을 먼저 변명합니다.
한국의 명시 까기
1
유리창 1
정지용
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어른거린다.
열없이 붙어 서서 입김을 흐리우니
길들은 양 언 날개를 파다거린다.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새까만 밤이 밀려나가고 밀려와 부딪치고,
물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박힌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고운 폐혈관(肺血管)이 찢어진 채로
아아, 늬는 산(山)새처럼 날아갔구나!
나는 고등학교 때, 이 시를 처음 접하고 나서, 도대체 이 놈의 詩라는 문학은 왜 이렇게 어려운 것일까 고민했다. 이해가 되지도 않는 문장을 싸매고 이것이 왜 좋은 시인지 깨닫지를 못하는 내 머리를 탓하며, 인생이란 왜 이리 또 어려운 것일까 고민했다. 항상 막히는 것은 마지막 두 행이었다. 그 이외에는 단순한 시각의 묘사로 처리할 수 있다치지만, 마지막 두 행은 전혀 이해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파다거리는 것은 입김이 아니었던가. 입김이 폐혈관이 찢어진건가. 폐혈관은 왜 튀어나온거야. 갑자기 튀어나온 폐혈관 덕택에 나는 래프트 훅 훅을 맞은 것처럼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랬다. 이 시는 무척이나 불친절한 시였다.
이따금 작가들의 작품 중에는, 작품이 작가를 살리는 경우 말고도, 작가가 작품을 살리는 경우가 있다. 말하자면 작품이 설령 조금 '허접'하더라도 이때까지 작가가 쌓아놓은 공이 있어서 작품을 '허접'하지 않은 것처럼 포장하는 경우 말이다. 나는 감히 이 시가 그러한 예의 하나가 아닐까 하는 의혹을 제기해 본다.
솔직히 말해서, 이 시가 명시가 될 수 있는 부분은 딱 두 행뿐이라는 생각이다.
새까만 밤이 밀려나가고 밀려와 부딪치고,
물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박힌다.
이 두 행의 표현은 무척이나 훌륭하다. 입김으로 새까만 밤을, 이 어두움을, 이 슬픔을 가리려 하지만 보면 어느새 또 식어버려 어둠은 밀려오고, 그래서 가슴에 부딪치고, 그래서 슬프고, 그러다 보니 물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박힌다는 것이다. (물먹은 별은 다들 알듯이, 눈물로 보는 별의 완곡한 표현이다.)
하지만 다른 행들의 표현들은 이렇다할 표현력을 갖지 못한다. 그렇다고 해서 소월처럼 기가 막힌 운율감을 가지는 것도 아니거니와, 발상의 특이함도 떨어지고 있다. 게다가 이 모든 행들의 매력이 귀결되지 못하는 것은 다아, 아까 말했던 마지막 두 행 때문이다. 왜 슬픈지 도무지 독자가 공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작고한 정 시인의 아들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리고 슬픔에 젖어 시상을 떠올렸을 정 시인에게도 미안하지만,
'폐혈관'은 얼어죽을..
시에서 분위기를 이끌어내어 독자들의 공감을 이끌어 낼 수 있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라고 말 할 수 있겠다. 한 가지는 분위기 조성을 위해 한껏 풍경을 묘사하는 것이고, 한 가지는 화자가 처한 상황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여 화자의 상황에 독자들의 입장을 대입시키게 하는 것이다. 이른바 '롤플레이'라고도 말 할 수 있겠다.
나라가 깨어져도 산하(山河)는 그냥 있어
성에 봄이 오니 초목이 우거졌다
시절을 슬퍼하여 꽃에 눈물 뿌리고
이별이 한스러워 새소리에 놀라느니,
잘 알다시피 위의 시는 두보의 <춘망>이다. 나라가 망한 가운데에서도 봄이 오는 아름다움을 슬픔으로 역설한 시이다. 이 시는 '나라가 깨어진'사정을 보여줌으로 인해서 봄이 오는 것이 어째서 슬픈 것인지 충분히 독자로 하여금 공감할 여지를 남겨준다. 만약 이 춘망이라는 시가, 위의 예시에서 1행만이 없어졌다고 생각해 보자. 이때 우리는 두보가 당최 '무슨 시절'을 슬퍼하는 것인지 좀 체로 공감하기 어려운 사정에 처하게 된다. 물론 눈치야 대충 챌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시를 읽는 동안 '눈치밥'을 데굴데굴 굴려야 하고 이렇게 되다보면 시의 감흥 보다는 이성이 더욱 앞서 시의 감상을 헤치게 된다. 말하자면 정지용의 '유리창 1'이 바로 그런 경우이다. 느닷없이 등장하는 폐혈관은, 어느 정도 화자의 슬픔을 이해 할 수 있는 단서가 되어준다고도 이야기 할 수 있지만 - 일테면 춘망에서 '시절을 슬퍼하여'와 같이 - 그 이전에 앞서, 너무나도 외딴 소재를 끌어온 까닭에 이질감으로 독자는 숨이 턱 막히게 되는 부작용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거 뭐야? 이물질 아니야? 퉤.
말하자면 시를 전체적으로 지배하는 공감대 형성의 단서가 너무나도 생소해서, 차라리 없느니만 못하다는 것이다. 각별한 자신의 상황에 대하여 좀 더 친절한 설명이 있었더라면.... 아니면 차라리 폐혈관 말고 추상적인 단어를 써서 개인사를 포기하고 폭넓은 공감대를 유도하던가...
그리고 앞서 말했듯이, 이러한 생소함 때문에, 독자들이 앞줄들을 읽으며 느꼈던 궁금증들 '왜 슬플까? 뭐가 어른어른 거린다는 것일까?' 라는 궁금증들은 풀리지 않고 끝나버려서 앞 문장들의 매력들 까지도 싸그리 없어지는 역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게 된다. 이것이 불친절한 시가 가져올 수 있는 부작용이다!
보통 詩는, 자신의 일기나, 중얼거림에 그쳐서는 아니된다는 말이 있다. 말하자면 독자들의 측면을 이해해야 하는 것이 '시'이고, 눈치밥을 굴릴 만큼의 하중을 독자들에게 넘기기 위해서는 경제적인 '단서'를 시 곳곳에 배치해야 하는 것이 시인의 의무라고 한다. 그런데 정지용 시인의 이 '유리창 1'은 경제적인 단서를 사용하지 못했기 때문에 너무 무리한 하중을 독자들에게 넘겨버렸고, 때문에 자신만이 알고 자신만 슬퍼할 수 있는 중얼거림에 그치게 되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사실 이 시가 그렇게 졸작은 아니다. 곳곳을 보면 정성스레 써 넣은 어휘가 분명한 부분이 황금처럼 빛나고 있으며, 중간 부분의 행에서는 아까 말했던 기가 막힌 표현이 쓰이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그의 감성을 이해하기 위해서 텍스트와는 동떨어진 시인의 사정을 공부해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당연하다.
시인이 유명했고, 그래서 아들의 죽음이 유명했으며, 때문에 이 시가 유명해 진 것뿐이지, 다만 이 시가 무명 시인에게서 뿜어져 나왔더라면, 소리소문없이 욕이나 진창 처먹고 데굴데굴 굴러다니지 않았을까 하는 혹독한 생각도 잠시 해본다.
병장 김현동
오웃, 저는 이 시 정말, 무척이나 훌륭하다고 생각하는데.
물론 좋아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지만.
상병 김지민
그렇담 제가 태클 건 부분에 대해서 반론을 제기해 주세요
전부터 느꼈지만 자꾸 저랑 현동씨가 어떤 작품을 바라보는데에 있어 항상 상이한 의견을 내놓는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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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창1 : 김지민씨의 글을 읽고 (by 김현동)
( 다 써놓은 걸 흔적없이 날려먹어서 다시 썼.......)
유리창1
- 정지용
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어른거린다.
열없이 붙어서서 입김을 흐리우니
길들은 양 언 날개를 파다거린다.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새까만 밤이 밀려나가고 밀려와 부딪치고,
물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박힌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고운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
아아, 늬는 산새처럼 날아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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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민씨가 이 시를 썩 훌륭하지 못한 시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1. 이렇다 할 표현력을 갖추고 있지 않다. 2. 기가막힌 운율감도 없다. 3. 왜 슬픈지 독자가 공감할 수 없다. 정도로 파악된다.
1. 표현력이란 게 무엇을 말하는 건지 아직 나는 잘 모르겠는데, 일단 일상의 언어를 시의 언어로, 그러니까 도구의 언어를 존재의 언어로 바꾸는 능력이라고 생각하겠다. 그리고 존재의 언어가 우리에게 보여주어야 하는 것은 메시지가 아니라 오로지 이미지라고 나는 굳게 믿고 있다. 물론 이런 나의 입장은 지극히 주관적인 것이고 시를 향한 수많은 입장 중 하나일 뿐이라는 것을 안다.
지용의 이 시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이미지는 새와 유리이다. 전 행에 걸쳐서 새의 이미지는 가장 중심적으로 드러나는데, 차고 슬픈 것, 언 날개, 산새, 날아갔구나 등의 시어가 가리키는 것, 혹은 시어의 숨은 주체가 새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에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새는 산새처럼 날아갔다. 하늘로 멀리 날아가는 새의 이미지는 죽음의 이미지와 닿아 있다. 날개를 가진 것, 하늘, 그리고 닿을 수 없는 먼 곳의 이미지라면 그것의 종착점에 죽음이 있다는 주장을 해도 일정 정도 이상의 적합성을 획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유리는 새와 나를 차단하는 역할을 한다. 새는 유리 밖에 있고 나는 유리 안에 있다. 새는 어둠 속에 있고 나는 밝은 곳에 있다. 새는 추운 곳에 있고 나는 따뜻한 곳에 있다. 어둠과 빛, 추운 곳과 따뜻한 곳의 이미지 속에서도 삶과 죽음의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다. 그리고 그 둘 사이를 차단하는 것이 유리이다. 하지만 화자는 유리를 깰 수 없다. 왜냐하면 유리는 차단하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새가 상을 남기는 매개체이기 때문이다. 유리가 없으면 새를 볼 수 없다. 상황의 아이러니다.
새와 유리의 이미지를 통해 시 전체가 관통하고 있는 것은 죽음이다. 화자가 사랑하는 대상은 죽었고, 화자는 그것을 슬퍼한다. 그것은 울부짖는 슬픔이 아니라 사무치는 슬픔이다. 이 시가 극도로 조용한 분위기를 풍기는 이유는 시인이 어금니를 꽉 깨물며 슬픔을 삼키기 때문인데 이러한 극도의 슬픔은 마지막 행에서 읽어낼 수 있다. '아아'와 같은 감탄사나 날아 갔구나 다음에 오는 느낌표는 어쩌면 심훈이 절제하지 못하고 표출한 극적인 감정보다도 더 가슴에 사무치는 느낌을 준다. 이것을 '한'이라고 부는 게 그리 어색하지는 않을 것 같다. 결국 이 시가 이 모든 이미지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한'이다. 시는 시인의 손을 떠나면서 더 이상 시인의 것이 아니게 된다. 이 시를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슬픔 정도로 생각하는 건 시를 읽는 수많은 방법 중 하나가 될 수는 있겠지만 결코 그것이 정답은 아니다. 작가론적 측면의 해석을 제외하더라도, 이 시는 지극히 슬프고도 한스러운 이미지를 그린다. 상실, 단절, 흐릿함,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는 반복, 열없이 붙어서서 부는 입김 등 지용은 외롭고도 황홀한 상실감을 이토록 절절히 표현하고 있다.
폐혈관은 결코 메시지를 지니는 시어가 아니다. 폐혈관에서 메시지를 찾았다면, 순전히 한국의 국어 교육 탓이다. 아하, 여기서 폐혈관이라는 시어를 사용한 건 시인의 아들이 폐렴으로 죽었기 때문이구나, 정도로 해석하는 건 결코 정답이 아니다. 고운 폐혈관 이라는 시어를 고운 심장, 고운 고사리 손, 고운 모세혈관, 고운 뺨 등으로 바꾸어도 이 시가 지니는 한스러움은 그대로 유지된다. 물론, 다른 시어로 교체하였을 때 폐혈관만이 지니는 이미지가 다른 이미지로 교체되는 문제점이 있다. 시를 읽는 사람은 시인의 아들이 폐렴으로 죽었기에 폐혈관이라는 시어를 썼다고 생각할 게 아니라, 폐혈관이 어떤 이미지를 지니기에 이 시어를 썼던 걸까를 고민해야 한다. 물론, 고민할 필요도 없다. 폐혈관이란 말을 입 속에서 두어 번 굴려보면 혀끝에 감도는 맛이 있을 거다. 나의 경우에는 이렇다. 폐라는 글자를 머리에 떠올리면 숨이 차다. 폐肺와 같은 음가를 지는 폐閉 덕에 꽉 막히고 답답한 느낌이 난다. 그리고 혈관이라는 단어에서는 가느다랗고 약하고 살짝만 쥐어도 터질 것 같고 심지어는 꽉 쥐어서 터뜨리는 가학성과 꽉 쥐어져서 터지는 피학성도 느껴진다. 폐혈관은 이렇게 답답하고도 위험한, 위태위태하고 불안한 이미지를 뿜어낸다.
오히려 이 시의 가장 큰 단점으로 나는 보석을 떠올린다. 별과 보석은 너무나도 식상한 메타포다. 서로 너무 닮아있다. 물론 별이 보석처럼 박혔다, 라는 표현을 일상의 언어로 치부해 버리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시의 언어라 생각한다 해도 죽은 시의 언어라고 보아 마땅하다. 지용이 이 시를 썼던 당시에도 별과 보석의 연결이 식상하고 지루한 맺음이었는지 알 수가 없기에 이렇게 말하는 게 무례하다고 생각될 수도 있지만, 여하튼 21세기에 사는 나는 이 보석을 칼로 도려내서 다른 시어로 바꾸어 버리고 싶다.
2. (미리 말하지만 여기서 소월과 지용을 나누는 방법은 지극히 주관적인 것이며, 김춘수에게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소월은 전통 서정시 계열의 독보적인 자리를 차지한다. 그것은 그의 시가 지니는 서정성이 독보적이라는 뜻이며, 그 서정성은 한국 특유의 민요적 운율로 극대화 된다. 소월의 경우 운율이 서정성을 만들어 낸다.
지용이 소월과 같은 계열의 전통 서정시를 쓰지 않은 건 아니지만, 지금은 이미지스트 정지용에 국한하여 말해야 한다. 이미지스트에게 운율은 도구의 역할을 할 뿐이다. 전통 서정시에서는 운율이 그 자체로서 만들어내는 서정성이 있지만, 이미지즘 시에서 운율이 하는 역할은 이미지의 극대화일 뿐이다. 소월의 운율이 음악적이라면 이미지스트 정지용의 운율은 회화적이어야 한다. 처음부터 소월의 시는 노래이고, 지용의 시는 그림인 것이다.
천부적인 감성에 의한 것인지, 극도로 세밀한 이성적 작업에 의한 것인지 알 길이 없지만, 유리창1에 찍혀있는 5개의 쉼표는 시의 이미지를 더욱 선명하게 만든다. 부딪히고, 반짝, 별이, 심사이어니, 아아 다음에 오는 쉼표는 앞 뒤의 이미지를 나누는 역할을 하기도 하고 쉼표 앞의 이미지를 부각시키기도 한다. 이러한 운율의 창조는 그것 자체의 음악성에 목적을 두는 게 아니다. 민요조 노래의 악보에 숨표를 찍어 넣는 게 아니라, 용의 그림에 눈을 찍어 넣는 것이다. 그러니까 기가 막힌 운율은 이미지스트 정지용이 추구하던 게 아니다. 화가에게 노래를 불러달라고 할 순 없지 않은가.
3.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다. 시인은 시를 쓸 때 독자를 염두에 두어야 하는가, 아니면 독자를 염두에 두지 않아도 되는가. 조금 비겁하게 말하자면 나는 전자와 후자 모두를 긍정하는 편이다. 그리고 조금 덜 비겁하게 말하자면 전자보다 후자를 긍정하는 편이다. 시를 쓰는 동안 시는 시인의 것이다. 독자의 반응 따위는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는 시인의 사명에 있어서 중요한 게 아니다. 시가 시인의 손을 떠나고 난 뒤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는가는 독자의 몫이다. 시인이 의도하지 않은 의미를 독자가 얻을 수도 있다. 그렇기에 좋은 시는 끊임없이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는 시라고 생각한다.
시를 읽는 사람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바가지만큼 시에서 의미를 퍼 가면 된다. 큰 바가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만큼 많은 의미를 퍼 갈 것이며 조그만 바가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적은 의미를 퍼갈 것이다. 좋은 시는 끊임없이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내는 샘이어야 한다. 시대가 바뀌고 세대가 바뀌어도, 어떤 바가지를 들이대도 그 바가지만큼의 의미를 퍼주어야 한다. 그것이 좋은 시다.
앞서 말했듯이, 이 시는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슬픔을 그린 시가 아니다. 이 시는 사랑하는 여인을 잃은 남자의 노래일 수도 있고, 불변의 진리를 잃은 학자, 영원한 예술을 잃은 예술가, 신앙을 잃은 신부, 조국을 잃은 애국자의 노래일 수도 있다. 결국 이 모든 해석의 공통분모는 '상실'밖에 없다. 이 시가 그려내는 것은 소중한 것을 상실한 자의 슬픔이다. 상실에 기인한 한스러움이다. 독자는 자신이 읽은 한스러움을 그것 자체로 느끼면 된다. 괜히 정답을 찾으려고 헤맬 게 아니다.
유리창1은 결코 불친절한 시가 아니다. 폐혈관을 단서로 폐렴으로 죽은 아들을 추리해야 할 의무는 있을 수 없다. 오히려 그렇게 추리한다면 시를 해석하는 다양한 방법에 대한 모욕이다. 폐혈관은 폐렴의 단서다, 라고 가르친 건 대한민국 중고등학교지 정지용이 아니다. 시인은 자신의 시에 정답을 만들어 놓은 우리의 학교를 보고서는 비분강개할지도 모른다. 삼천포로 잠깐 빠지자면, 이것이 내가 국어 교사를 할 수 없는 이유다. 아는 것과 가르치는 것 사이의 거대한 괴리를 나는 감당할 수 없다. 올바르게 시 감상하는 법을 가르치는 교사상과, 효과적으로 언어영역 성적 올리는 법을 가르치는 교사상 사이의 딜레마를 해결할 수가 없다.
단 한 가지 내가 수긍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폐혈관'이라는 시어 자체가 만들어 내는 이미지에 대한 입장의 차이이다. 나는 지용의 선택이 아주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폐혈관은 다른 시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이질적인 시어이고, 이국적이며, 그것만이 가지는 독특한 이미지의 선명함이 마음에 든다. 하지만 내가 느끼는 이런 이미지는 굉장히 주관적일 수 있는데, 지민씨나 다른 누가 '폐혈관'은 너무나도 어색하고 전혀 아름답지 못한 단어라고 말한다면, 그것에 대해서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없다. 이것은 단순히 호불호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내겐 너무나도 맛있는 크림 스파게티가 누군가에게는 냄새조차 맡기 싫을 정도로 느끼한 음식일 수 있듯이.
상병 김지민
길게 쓰다가 지쳤습니다. 어차피 조금은 무의미한 '추잡한 변론'이 될 듯 싶어서 짧게 말씀드립니다.
일단 현동씨께서 제가 시를 까는 논조를 요약하신 것이 좀 잘못되어있습니다. 제 논조는 위에 제시된 바와 같이 분리되어 느껴지는 것이 아니고 '공감대 형성을 위한 표현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공감이 잘 안된다. 차라리 그럴 바엔 운율이라도 좋던가' 하는 이야기인데, 분리되어 표현되다 보니 플러스 알파의 단점이 무시되어버리는 것 같습니다.
운율감에 대한 지적은 다만, '하다못해 이거라도 잘 하던가' 정도의 논지였을 뿐이지 모든 시가 운율감을 갖춰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진 것은 아님을 말씀드립니다.
그리고, 시에 대한 지향점에 대해서도 할 말이 있습니다.
저는 작가가 의도하는 메시지가 독자에게 전달되는 시가 '좋은 시'라고 말한 적이 없으며, 현동씨 또한 이를 잘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공감대 형성을 위한 수 많은 길을 뚫어놓아 독자들로 하여금 이런 느낌도 들고 저런 느낌도 들게 하는 것이 '좋은 시'라는 점에서는 저 역시 공감합니다. (국어 교과서적인 해석입니다만, 한용운 '님의 침묵'에서 님을 꼭 그 님만으로 파악하지 않아도 되는 것 처럼 말이지요) 하지만 이 유리창이란 시에서 '폐혈관'이라는 단어는 수 많은 공감대 갈래의 장치적 어휘로서는 하아아안참 부족해 보인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본문에서도 말씀드린 바 있지만, 정지용은 폐혈관이란 단어에 집착하고 싶었다면 차라리 자신의 특수상황을 시에서 단서로 제시해야 하는 것이 더 나았을 것입니다. 만약 그게 아니라 수많은 공감대를 위했더라면 '폐혈관'보다 더 좋은 어휘가 있었을 것 같다는 것입니다.
한가지 오해하고 계신 점이. 제가 이 시를 '아들의 죽음'에 대한 시로 파악해야 하는 강박관념에 사로 잡혀있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 절대로 그렇지 않음을 말씀드리며, 다만 '아들의 죽음'을 나타내지도 못했으며, '수많은 공감대 형성'에도 실패 한 이 시가 왜 명시로 분류되는 지 이해 못한다는 것 뿐임을 알려 드립니다.
저는 그 의아함에 '정지용이 유명한 시인이기 때문에' 라는 의혹을 달고 있는 것이구요
그리고 지적하신 '폐혈관'이라는 어휘가 생소할 뿐만 아니라 강렬한 이미지라는 점에서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습니다만, 이 시에서 다분히 통일성을 해칠 우려가 있는 시어라는 점에서는 제 주장을 굽힐 수 없습니다. 차라리 '새'와 연결된 시어였다면, 차라리 '찢어진 날개'를 좀더 시적으로 인용했다면 상실감을 통일성 있게 형상화 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래서 독자들로 하여금 쓸데없는 이질감을 (마치 밥먹다 돌 씹는 것 같은) 느끼지 않게 하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포인트는 '공감대 형성' 이겠지요. 메시지를 굳이 시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고, 독자들이 시를 읽으며 슬픔을 시로 하여금 느낄 수 있는 것이 중요한 것 아닌가요. 아무런 효용이 없는 시라면 그것은 단지 조잡하게 엮어놓은 텍스트일 뿐이겠지요. 제게 시란 '메시지'가 아니라 '느낌으로 다가오는' 텍스트입니다. 현동씨께서는 자꾸 메시지 메시지 하셨는데, 저는 시가 꼭 일정한 '메시지'를 가져야 한다고 말한 적 없습니다. 저 역시 바라볼때마다 새로운 시가 훌륭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이렇게 바라볼 때마다 새롭기 위해서는 '공감대'의 가능성을 여기저기 열어놓는 시의 장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시인이 시를 쓰고 나서 시가 시인을 떠나는 것은 맞는 말이겠습니다만, 제가 본문 중에서 말씀 드렸듯이, 어떤 '하중'을 넘겨주기 이전에 노력해야 하는 것은 또한 당연한 이치가 아닐까 싶습니다. 자식새'끼 내 품 떠난다고 싸질러놓고 나몰라라 할 수는 없는 것이겠지요. 뭐 조금은 다른 비유겠습니다만.
상병 김지민
폐혈관 어휘 자체의 호불호를 따질 수는 있겠습니다만, 어떤 시에서 이것이 쓰일 때, 일반적인 호불호는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초콜렛이 좋다 하더라도
쿠키 안에 초콜릿을 넣는 경우와
빈대떡에 초콜릿을 넣는 경우가 다를테니까 말이죠.
병장 김현동
사실 시를 대하는 태도부터 차이가 나다보니 지민씨와 저 사이의 간격이 좁아지리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아요. 저는 이래요. 지민씨는 공감대의 가능성을 여기저기 열어놓는 시의 장치가 필요하다고 했지만, 시인이라면, 독자가 이 단어를 보고서 공감대를 형성하겠지, 라는 고민은 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공감대는 생겨도 그만 안 생겨도 그만입니다.
제 글에서 독자를 염두에 두고 시를 쓰는 것과 독자를 염두에 두지 않고 시를 쓰는 것 둘 다 소극적으로 긍정한다고 말씀드렸지만, 사실 전자를 소극적으로나마 긍정하는 이유는 공감대 형성을 시의 목적 중 하나라고 생각해서라기 보다 시가 문예지에 발표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시인이 독자를 예상하지 않는다면 문예지 따위에 시를 발표할 일도 없지요. 결정적으로 이 문제에 자신감있게 해답을 제시할 수 없으므로 독자를 염두에 두는 시인을 소극적으로 긍정하는 겁니다. 하지만 시는 독자가 없어도 시입니다. 이것에 대한 제 주관은 뚜렷합니다. 시인은 독자에게 아무런 하중도 넘겨주지 않습니다. 독자는 시인으로부터 그 어떤 하중도 받을 의무가 없구요. 굳이 다다이즘이나 쉬르레알리즘까지 가지 않더라도 독자의 전제가, 공감대의 전제가 시에 있어 결코 필수적인 것은 아니라는 제 주장의 심정적 근거를 충분히 이해하시리라 생각합니다.
또 한가지 우리의 차이는 '폐혈관'이라는 시어를 어떻게 평가하느냐의 문제인데,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폐혈관이 매우 훌륭한 시어 선택이라고 보는 입장이므로, 호불호의 문제라는 제 생각은 변함 없습니다. 지민씨는 초콜릿 같은 좋은 어휘라도 빈대떡 같은 시 속에 있다면 일반적인 불호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러면 폐혈관이 초콜릿이고 빈대떡이 유리창1인가요? 제 생각으로 지민씨가 하고 싶은 말은 '쿠키 같은 유리창1안에 염소똥 같은 폐혈관'인 것 같은데요. 그래야 이 시의 완성도가 떨어지는 이유를 '폐혈관'이라는 어휘에 추궁할 수 있으니까요. 물론 지민씨가 마지막 댓글의 비유를 이 시에 직접적인 메타포라고 한 적은 없습니다. 그냥 제 추측일 뿐이에요.
하지만 이것도 참 애매한 게, 무엇이 쿠키냐, 무엇이 빈대떡이냐, 무엇이 초콜릿이고 염소똥이냐를 판단하는 것 부터가 사실문제가 아니고 가치문제이기 때문에 선호와 비선호의 문제로밖에 볼 수 없습니다.
지민씨도 느끼시겠지만, 지민씨와 저에게 수렴점은 없는 것 같아요.
병장 김현동
아차, 운율의 문제를 두고 곡해한 것 죄송해요. 그런데 사실 이 시가 훌륭한 이미지즘 시가 아니라면, 운율이 아무리 기가 막혀봤자 소용 없지 않을까요. 운율은 단지 이미지를 선명히 하기 위한 도구적 역할만 할 뿐이니까요.
상병 김지민
저는 시는 독자가 없으면 의미가 없다고 봅니다. 화장실에 쓰는 낙서도 하다못해 보면서 킬킬댈 사람들을 떠올리며 적는 것이죠. 만약 정말 의도가 없다면 단순히 '심심풀이'일 것입니다. '시' 말예요.
저는 정확히 현동씨가 '시를 쓰는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분명히 독자를 염두해 두고 쓰고 있습니다. 일기장에만 적어놓는 시라면 독자는 '제 자신'이 될 것이고, 어떻게 해서든 제 시에 독자는 있습니다. 그래서 제 시는 하중을 넘겨줘야 하고, 하중을 넘겨주기 전에 충분히 이것이 친절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꼭 문예지에 올리는 것이 아니더라도요.
설령 저 혼자만을 위한 시더라 하더라도, 먼 훗날 읽게 될 것을 생각하며 불친절하지 않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그리고 쿠키, 염소똥 이건.....
폐혈관이라는 시어가 다른 시에서 씌여 있었던 것을 어렴풋이 기억합니다. 그 시에서 폐혈관이라는 시어는 시의 분위기에 이질적이지 않았으며, 갑작스런 이미지로 등장하지 않고 녹아들어 있었습니다. 시 전체적인 이미지가 뭔가 신체적이고 해부적이었던 고어의 느낌으로 기억되네요.
아무튼 이런 경우엔, 폐혈관이라는 초콜릿이 쿠키라는 적절한 바탕안에 숨쉬고 있다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유리창은 전혀 분위기가 딴판인 (물론 제 주관으로) 느낌이므로, 유리창과 새의 이미지가 주를 이루다가 갑작스럽게 폐혈관이 튀어나와 놀라게 하므로, 같은 어휘일 지언정 빈대떡 속에서 초콜릿을 먹듯이 부조화라는 말입니다.
쿠키 속의 염소똥이라는 것은, 속에 들어가는 재료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비유가 옳지 않습니다. '폐혈관'이라는 시어는 두 시에서 똑같으니까요. 바탕만 바뀌었을 뿐.
쿠키와 빈대떡이라는 바탕말이죠.
물론 본질적으로 이것은 가치문제입니다. 호불호를 따지는 것이 당연하긴 합니다만, 웬만한 호불호가 그러하듯이 이것도 '일반적인 호불호'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입맛이 특이한 사람은 초콜릿 넣은 빈대떡을 조낸 맛있게 먹을 수도 있는 노릇이겠지만, 그런 빈대떡이 과연 그 사람을 제외한 평가에서 '좋은 음식'으로 평가 받을 수 있을까요?
가장 중요한 논점은, 내가 이 시를 좋아하느냐, 현동씨가 이 시를 좋아하느냐가 아니고, 일반적으로 이 시를 봤을 때 이 것이 과연 '명시'로서의 가치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병장 김현동
제가 시를 쓰는 이유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좀 가르쳐주세(......).
요즘 제가 쓰는 시는 모두 미끄러지는 의미의 안타까움에 관한 것입니다. 나와 너의 소통 불가능성. 소통의 불가능. 너와 나 사이를 차단하는 것.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의 한계와 딜레마. 뭐 이딴 것들인데, 시를 쓰면서 이런 주제를 선택한다는 것 자체가 어처구니 없는 짓이죠. 소통의 불가능성을 이야기하면서 소통을 위해 시를 쓰는 꼬락서니라니. 독자를 염두에 두지 않는 시인을 말씀드린 거는 이것과도 유관합니다. 차피 자아는 타자와 소통이 불가능하니까요. 아, 역시나 이건 지극히 주관적인 견해입니다.
다시 폐혈관인데(......). 지민씨가 한 말을 오해하고 있었어요. 저는 폐혈관이라는 단어 자체를 쓰레기라고 보시는 줄 알았으니. 그러니까 지민씨는 폐혈관 자체의 이미지를 문제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그 이미지가 나머지 시의 분위기와 부조화를 이룬다는 뜻이었군요.
초콜릿을 넣은 빈대떡을 폐혈관이 들어간 유리창1로 직접 비유하셨으니 이제 좀 편합니다. 이 극단적인 비유를 제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좀 난감한데, 다수와 소수의 문제로 치부해버리는 것에 대해 좀 의아합니다. 지민씨가 "폐혈관이 여기에 들어가는 건 너무나도 어처구니 없는 일이고, 다른 많은 사람들도 당연히 이렇게 느낄 거야" 라고 생각하는 것 딱 그만큼 다른 누군가도 "폐혈관이 여기 들어가는 건 너무나도 적절하고, 다른 많은 사람들도 당연히 이렇게 느낄 거야" 라고 생각할테니까요.
어떤 의견이 다수냐를 따지는 것도 지금 제대로 파악되지 않은 상태이긴 하지만, 어느쪽이 다수이건 간에, 사실 이렇게 말하는 건 다수가 가지는 권위에 호소하는 것밖에 안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은 훌륭한 것이고, 소수가 좋아하는 것은 훌륭하지 못한 것이다. 이 주장의 논리적 취약점은 언급할 필요도 없을 정도죠.
고로 이 시가 명시이냐, 졸시이냐를 판단하는 건 시를 읽는 독자의 몫입니다. 아무리 교과서에 나오고 문제지에 나와도 시를 읽고 감흥이 없으면 그에게 이 시는 그냥 스쳐 지나가는 읽을거리일 뿐이고 그냥 답을 맞히기 위해 외워야 하는 암기 대상일 뿐입니다. 하지만 이 시를 읽고 절절히 사무치는 한을 느꼈다면, 그에게 이 유리창1은 명시가 되겠죠. 사람들이 이 시를 두고 명시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그렇게 느끼는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이쯤에서 지민씨는 정지용의 이름값 때문에 이 시가 허명을 얻은 것은 아닌가, 라고 물으실 것 같은데(아니면 죄송합니다. 무례함을 용서하세요) 그것까지 따지라면 일이 너무 커지니까 사실 좀 걱정이 되는군요.
상병 김지민
1. 저도 완전한 소통은 당연히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꼭 시를 통한 소통이 아니라 일상적인 언어의 사용에 있어서도 타인과 타인은 분리된 개체이기 때문에 완벽한 소통은 불가능하지요.
제가 한숨과 함께 잘 섞어쓰는 말 중에 '진심은 결국 절대로 통하지 않아'라는 말이있습니다. 같은 이치가 아닐까 싶네요
2. 어떤 의견이 다수냐를 따지는 것은 다수 권위에 대한 호소라기 보다는 '시'가 가지는 특성 때문입니다. 어떤 문학이 그렇지 않겠습니까만은 쓸데 없는 군더더기를 최대한 덜어내고 경제적으로 언어를 사용하여 의미를 부여해 나가는(그것이 작가의 몫이던 독자의 몫이던 이것은 둘째로 칩시다) 시라고 했을 때 여기서 사용 되는 언어는 '다수의 언어'가 됩니다.
언어를 '시어'로 적절히 변용하고자 할때, 적당히 다수가 쓰는 언어가운데서 변용을 통해 '낯설게 하기' 기법을 쓰는 스킬은 현동님도 잘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이렇게 일상적인 언어를 '낯설게'만드는 방법을 통해 독자들로 부터 시적 감흥을 얻어낼 수 있는데, 이러한 '낯설게 하기' 기법이 어느정도 일반화된 언어를 변용시키는 수준에서 벗어나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 들게 되어버리면 그 시어는 이미 죽어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작가 스스로만이 알 수 있는 언어가 되어버리는 것이죠. 심지어는 작가 스스로도 먼훗날 자신의 시를 펼쳐보았을 때 이것이 대체 무엇에 대한 비유였는지, 어떤 것을 '낯설게'한 것인지 까먹을지도 모릅니다.
말하자면, '개그'를 치는 것과 비슷한 논리입니다. 많은 사람들로 부터 '웃긴 개그'라는 평을 듣기 위해서는 '일반적인 논리'에서 깨는 아이디어를 생각해야지 '협소한 논리'에서 깨는 아이디어를 생각해 보았자 먹혀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군대 개그를 하나 들먹이겠습니다.
저와 제 고참이 가끔 사용하는 이 개그는 '잘 못들었습니다'의 변용으로서 전화할 때 '여보세요?' 하며 되묻는 상황을 군대에 맞게 변용한 개그입니다.
말하자면, 별로 듣고 싶지 않은 말을 들었을 때
" 통신보안?"
이라고 개그를 치는 것입니다. (솔직히 조금 웃깁니다)
하지만 이 협소한 군대개그가 저 넓디넓은 사회에 가서 쓰인다고 칩시다. 아마... 외계인 보듯 쳐다볼걸요.
그래서 시어는 최대한 사람들이 많이 공감할 수 있는 쪽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물론 이것도 '시는 독자를 향한 것이다'라는 제 주관 아래서의 생각이지만요.
아무튼 그렇기 때문에 다수냐 아니냐를 묻는 것은 '훌륭하냐 아니냐'를 묻는 것이라기 보다, '먹히냐 안먹히냐'를 묻는 것과 상통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좀 극단적으로 변용시킨다면 물론 '훌륭하냐 아니냐'로도 쓸 수 있겠지만요.
3. 그리고 제 의견이 다수라고 굳건히 믿고 있는 것은, 그 글의 논지이자 주장입니다. 허허. 다수가 아니라면 제 글이 틀린 것이구요.
4. 물론, 어떤 시를 읽으며 이것이 좋은시다 아니다를 판가름 하는 것은 독자들의 몫입니다만, '명시'는 '좋은 시'와는 또 다른 의미입니다. '일반적으로 좋아서 이름난' 시 라는 뜻이지요. 저는 거기에 태클을 거는 겁니다. 과연 일반적인가. 그 일반적이라는 범주에는 과연 누가 들어가는가, 정지용과 친했던 문인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 말이에요
현동씨 말이 맞습니다. 본문에서도 언급한 바 있구요.
상병 김지민
결국은 또 시의 지향점에 대한 이야기로 귀결이 나는군요. 크하핫핫
그러니 현동님 말대로 수렴점이 없어보입니다. 모쪼록 제 의견에 대한 현동님의 오해가 풀린 것 같으니 더이상의 논의는 의미가 없어 보이네요.
시가 독자들을 염두해 둘 수 밖에 없다는 이야기는 현동씨와 술자리에서 한번 해보고 싶습니다. 정모때 만날 날이 있으리라 믿습니다. 히히
병장 김현동
결론은 술이 들어가야 한다는 겁니다. 시인의 한 손에는 언제나 시가 있어야 하고 다른 한 손에는 언제나 차가운 소주잔이 있어야 하지요. 하지만 저는 막장설탕 빼고는 남아있는 게 없다는 거(.........).
하긴, 저 저녁먹은 뒤에, 지민씨 병장일 때, 그때 보는 방법도 있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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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유리창1 : 김지민씨의 글을 읽고 (by 이승현)
# 막상 시 자체보다도 시를 둘러싼 이 토론의 장이 더 아름답다는 느낌을 받아서, 나름의 생각을 올려봅니다. 저는 현동씨의 생각을 지지하는 입장인데, 글을 쓰는 도중에도 논의가 한층 진행되고 있었군요. 저는 유리창1이라는 시에 대해 별로 깊은 인상을 받지 못했지만 논의의 기저에 깔린 시에 대한 몇 가지 중요한 지점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지민씨가 지적하신 대로 "폐혈관"이라는 어휘는 시의 내적 통일성을 해치고 있다고 느낄만한 여지가 충분합니다. 그리고 이 부분이 이질감을 유발시키고 공감대 형성을 망치고 있다는 의견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공감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에 따라 공감대 형성을 통해 좋은 시와 나쁜 시를 나눌 수 있다는 관점, 요컨대 포인트는 공감대 형성에 있다는 말에 대해서는 완전히 동의하기가 어렵습니다.
우선, 시의 내적 통일성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약간 진부한 이야기지만, 시가 시인의 내면을 떠나 하나의 완결된 (동시에 무수한 변용의 가능성이 열려있는) 유기체-텍스트로서 존재하며, 우리가 독자로서 그 텍스트를 대면하면서 각자의 접점과 공감대를 찾아가는 과정으로서 시를 읽는다고 한다면 하나의 텍스트에 대하여 우리 각자는 서로 상이한 공감대, 즉 독자 고유의 내적 맥락을 만들게 됩니다. 우리가 논의로 삼는 유리창1이라는 시에 대하여 우리는 부분적으로 "폐혈관"이라는 어휘가 부적절하다는 데 동의할 수도 있겠지만 본질적으로는 그 동의 또한 서로 다른 이해의 토대, 서로 다른 내적 통일성 위에서 성립되었음을 인지해야 합니다. 따라서, 그 부분적인 동의를 통해 좋은 시다 아니다 라고 결론 짓기에는 아직 이른 감이 있습니다.
( 아마도 여기서 지민씨와 의견이 엇갈리게 되겠군요.) 단언컨대, 시인에게 독자를 배려해야 할 가시적인 의무는 하나도 없습니다. 시는 시인 자신의 내면에서 탄생하고 그 내면의 내밀성을 반영하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시는 공감 이전의 존재 자체에 목적이 있고, 공감은 말그대로 시의 2차적인 효과에 불과합니다. 유리창1이라는 시에 대하여 지민씨의 접근에 따라 "폐혈관"이라는 어휘가 그 이전에 제시된 새, 유리, 눈물 등의 어휘와 그 어휘들이 만들어내는 분위기와 부조화를 일으킨다는 의견에 대해서는 달리 이견을 제시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지민씨 고유의 감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1차적으로 시인이 유리창1이라는 시를 쓰게 되었을 때 달리 다른 표현이 가능했겠는가 하는 문제, 즉 시어의 선택과 표현에 있어서 우리의 이해와는 다른 시인 고유의 내적 통일성 위에서 이 유리창1이라는 시가 탄생했다는 문제를 검토해야만 합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유리창1이라는 시를 읽을 때 느끼는 불편함이 시인에게 있어서는 전혀 이질적이거나 생소한 것이 아닌 오히려 자연스러운 연결 내지는 오히려 내적 필연성을 느끼게 할 수 있다는 가능성, 나아가 시의 표현은 시인의 내면적 세계를 구성하는 여러 오브제들의 필연적 연결성을 반영한다는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초점이 되는 "폐혈관"이라는 어휘를 통해 이 문제를 살펴 봅시다.
폐혈관이라는 단어는 숨을 쉬는 기관으로서의 폐를 부각시킵니다. 숨은 생명을 상징하며, 시의 2행에 제시된 입김과도 암묵적인 연결성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기관과 생명으로서의 폐는 자기 자신 안에서 숨쉬고 있는 작은 생명을 자연스럽게 이미지화할 가능성이 충분합니다. 또한 폐가 공기가 교류하는 기관인 점에서 공기 안에서 날개짓하며 오가는 가벼운 이미지인 새들과 완전히 결부되지 않는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고운 폐혈관이 찢어진 채 산새가 되어 날아갔다"라는 표현은 여리고 위태위태한 그리고 결국 곁을 떠나가 버린 어린 생명에 대한 애정과 안타까움을 이야기하는 데 지민씨가 지적하신 얼어죽을 만큼의 무리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시인의 아들의 죽음이 이 시를 읽는데 결정적인 기점이 될 수 있으며 그것이 시의 풍부한 가능성을 제약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에 대한 독자들의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이 시를 통해 표현된 시인의 내적 필연성보다 우선하는가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시인은 작자인 동시에 제 1독자이기도 합니다. 시인은 자신의 내면에서 태어난 시를 최초로 대면함과 동시에 독자로서의 새로운 이해를 처음으로 시작합니다. 새롭게 태어난 세계에 대한 낯설고 생경한 느낌은 제1독자에게서부터 시작하며 그와 함께 수많은 다른 독자들이 그 충격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 충격 속에서 시가 상상력을 통해 비현실적인 것을 실재하게끔 만들 때 핵심적인 것은 이미지입니다. 그 이미지는 음악과 다르고 회화와도 다르며 단지 음악적인 것, 회화적인 것 등으로 설명될 수 있을 뿐인 언어의 원형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미지는 매번 새로움을 갈망하며 그에 따라 시인은 새로운 이미지를 갈망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시가 다른 예술장르들과 구분되는 지점이 바로 이 새로운 이미지에 대한 갈망이라고 생각합니다.(전적으로 제 주관에 불과합니다만) 어떤 시가 명시냐 아니냐에 있어서 주된 기준은 이 새로움, 익숙한 감정을 이미지로써 새롭게 경험하게 하는 시인만의 새로움이 아닐까요? 지민씨가 말한 친절한 시쓰기(죄송합니다.) 또한 지민씨 고유의 내적 통일성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면, 우리는 다른 통일성을 기반으로 하는 시쓰기도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3, 제4의 독자들에게는 불친절하지만 제1독자인 자기 자신에게는 더없이 친절한 시인의 시쓰기를. 물론 제3, 제4의 독자들에게도 충분한 공감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은 좋은 시의 조건이 될 수 있습니다.그러나 그보다 우선해야 할 것은 무엇보다 시인 자신에게 충실하고 투명해야 하는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 써놓고 보니 크게 어긋나는 것도 없군요. 그저 강조점이 다를 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상병 김지민
크아!!
기분이 좋기도 하고 쌉싸름 하기도 하고, 아무튼 이 감흥은 개인적인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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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공감대 형성이 잘되는 시를 무조건 '좋은 시'라고 칭하는 것이 아님을 승현님도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다만 공감대 형성은 하나의 조건이며, 저는 이 '공감대'측면을 조금 높이 사는 것 뿐입니다. 굳이 설명드려서 죄송합니다.
시인이 독자들을 생각해야 하는 '의무'는 없지만, 무릇 '명시'라는 칭호를 받기 위해서는 '공감대 형성'이 잘 이루어져 있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시인이 독자들을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개인에게 좋은 시가 아니고, '명시'이려면 말이지요.
현동님과의 대화를 통해 그리고 승현님의 이 성실한 답글을 통해 '폐혈관'이 얼어죽을 만큼 어이없는 시어라는 말은 취소하겠습니다. 하지만 다른 시어에 비해 아쉬운 것은 사실입니다.
제가 명백하게 명시를 '깐다'고 이야기 했던 만큼, 본문에서의 제 표현이 너무 곡해되는 경향이 없지 않아있습니다. 시 감상에 있어서 저 또한 현동님이나 승현님 만큼 많은 감상의 갈래들을 열어두고 있으며, 시를 쓰는 사람 중에 하나로서 다른 누구의 독자보다도 저 스스로의 독자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승현님께서 쓰신 마지막 문단에 크게 공감하고 있으며 저 역시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보다 독자를 먼저 생각하는 시는 헛될 수 밖에 없습니다.
공통된 분모로서, 시는 독자들이 수용하기 나름이기에, 제가 쓴 '명시 까기'역시 한사람의 독자로서 시를 읽고 수용한 결과물이므로 '나는 이랬는데 당신은 그랬군요' 정도로 이야기를 마치고자 합니다.
덧. 그 놈의 폐혈관은 본문에서도 말씀 드렸지만, 이해 할 수는 있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너무 먼길을 돌아가야 하므로 이성이 감성에 앞서나가 시적 감흥을 해칠 수 있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다고 다시 한 번 말씀 드립니다. 제가 시인이었어도 그 '폐혈관'이라는 시어를 포기 하기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만, 어쨌거나 아쉽다는 겁니다.
병장 김지민
편집하느라 수고하셨습니다. 04-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