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글-내글내생각]하루키 이후의 문학에 대하여  
상병 박원익  [Homepage]  2009-03-03 13:50:22, 조회: 446, 추천:4 

나는 최근에, '가라타니 고진'의 <무라카미 하루키론論>에서 하나의 범례적 비평을 발견했다.(주1) 그것은 (일본의) 젊은 소설 작가들이 자명하게 생각하는 어떤 감성적 베이스Base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에는 분명 어떤 역사적 기원이 있다. 하루키의 초기 작품들은 그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초기 작품 경우 외에도, 하루키의 작품의 주인공들은 역사적 고유명을 배제한 어떤 임의성의 세계를 살아간다. 가령 그곳에서 구체적인 지명이나 세대적 공감을 자아내는 고유한 연도가 등장하더라도, 하루키에게 있어서 이는 하나의 일반적인 <풍경>에 지나지 않는다. <1970년의 핀볼>에서 1970년은 그것이 80년이 되든 60년이 되든 아무래도 좋은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독아론적獨我論的 주관에 비쳐지는 풍경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풍경은 어디까지나 시차적視差的인 것으로 내면화된다. 말하자면 풍경을 구성하는 사물들과 그것의 명칭들은 단순히 변별적이고 임의적인 기호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난다. 그러한 기호들의 총체로서의 세계는, 일례로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주2)에서 극단적인 해체와 재구성을 경험한다. 이것에 대해 우리는 흔히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부르지만 이보다 정작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 

이것은 오히려 포스트모던보다 칸트의 초월론적 모티브를 더욱 강렬히 환기시킨다. 칸트를 따르자면 초월론적 통각은 자신의 임의적인 인식의 범주를 통해 상像을 구성한다. 상은 그것을 촉발시키는 물적物的존재 없이 존재할 수 없다는 점에서 분명 ‘외부성’에 종속되어 있다. 그러나 적어도 어떤 한 유형의 판단 즉 ‘취미판단’ 속에서, 주체는 상을 구성하는 인식 범주-틀 자체와의 반성적, 유희적 관계 속에서 그러한 상을 자유자재로 조작하며, 외부성으로부터 일정한 자유를 획득한다. 이것의 극단은 예컨대 힐베르트의 형식주의 수학 프로그램에서 실현된다. 그것은 실제 사물이 어떠하든지와 무관한 그 자체의 새로운 정합적 범주만으로, 일상적인 경험세계에서 추론된 것과 전혀 다른 수학적 대상을 가질 수 있다는 이론적 가설로까지 나아간다. 이를 하루키의 소설세계에 대해 거칠게 적용하자면, '일각수'가 존재하는 공리계를 설정한다면 우리는 실제로 그러한 세계 속에 살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임의적인 구성과 해체의 과정 속에서, 한정된 역사적 의미나 목적 같은 것 따위는 있을 리 없다. 칸트 역시 이러한 점을 <판단력 비판>에서 명시한다. 동시에 그는 그러한 취미판단에는 언제나 ‘한계’가 있음을 이야기한다. 앞서 말한 임의성의 세계 속에서 경험적 자기自己의 자기실현은 언제나 패배당하고 예측 못할 의외성 앞에 무력하게 앞지름 당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다시 칸트 철학을 환기하자면, 이러한 굴욕당하는 자아를 냉정하게 주시하는, 초월론적 주관이 있는 것이다. 

여기서 가라타니 고진은 일종의 <전도된 의지>를 발견한다. 오늘날 젊은 세대에게 매우 익숙한, 모든 정치적-윤리적 판단을 유보한 채 드러나는 하루키의 소설적 ‘풍경’(이것은 어떤 알레고리적 의미도 포함되지 않은, 순전히 임의적인 상징으로 구성된 세계가 일반적 드러나는 방식이다)과 그것이 자아내는 쿨Cool한 정서는 사실 그러한 초월론적 의지 없이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여기에는 일종의 ‘악의’가 존재한다. 즉 일본의 1960년대가 무엇인지 모른 척 하는 행위와, 당시의 안보투쟁과 학생운동의 사건과 그것의 비참한 실패들을 당대의 풍속적 화제들과 동일선 상에 있는 것인 양 회고하는 <1970년의 핀볼> 화자의 어조는, 어디까지나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아는 전제 하에서 문학적 의미를 획득한다. 그것은 하나의 적극적인 의지를 가장한 도피이다. 가라타니 고진은 그것은, 새로운 것이기는커녕, 근대문학의 기원을 형성하는, 낭만주의적 아이러니의 의식에 불과하다 평가한다. 그것은 진지함과 장난스러움이 뒤섞여 있는 상태, 알면서 짐짓 모르는 체 하는 초월론적 의식이다. 이것은 앞서 말해듯이, 절대 패배하지 않는 자의식이다. 그리고 이는 취미판단의 초월론적 주체, 역사적 상황에 사로잡힌 채 아무런 힘도 쓸 수 없지만, 이를 자기 나름대로 재구성하고 내면화하는 임의적인 방식들을 초연하게 응시함으로써 현실적 패배를 주관적 승리로 전환시키는 주체성이다. 그런데 정작 60년대의 기억이 탈각되면서 발생한 것은, 애초의 정치적 주체성의 기획이 처절하게 실패한 역사적 곤궁에 대한 날카로운 감感으로서의 아이러니가 탈락하고, 로망스Romance만이 남은 것이다. 이것이 80년대에 쓰여진 <상실의 시대>이다.

우리 역시 하루키 세대를 가지고 있는 이상, 가라타니 고진이 평한 바를 오늘날 한국의 젊은 작가들과 그들의 의식에 대해서도 적용해 이야기해볼 수 있을 것이다. 가령 박민규와 같은 작가의 작품들이 범용하게 소비되는 방식은 어떨까. 하루키의 후기 소설이 점차 아이러니가 탈락된 범속한 로망스(연애소설)로 귀착되었다면, 박민규를 비롯한 한국의 젊은 작가들이 자주 보여주는 것은 낭만이 탈락한 아이러니 자체의 범속함은 아닐까. 이것과 일본의 통속소설과의 흥미로운 대비를 생각해볼 수 있겠다. 요컨대 백치스럽기까지 한 로망스Romance만 남은 오쿠다 히데오 류類의 대중소설에 대한 하나의 대조로서 대한민국의 젊은 작가들은 뻔뻔스럽기까지 한 진부한 아이러니를 확대재생산하는 데 골몰하지 않는가? 이러한 한일韓日 대비론에 대해 동의하든 않든, 어느 쪽이든 그다지 전망이 밝아 보이지 않는다. 

  다시 박민규로 돌아가서, 그가 <핑퐁>에서 전범적으로 보여주고 있듯이, ‘세계’라는 저 바깥의 자명한 외부성의 실존은 한낱 게임의 결과물로서만 존립하며, 이 모든 것을 단박에 엎을 수 있는 Reset의 설정은 분명 새로운 형태의 패배하지 않는 아이러니한 자의식에 어떤 우주론적 형태를 부여한 것에 불과하다. 요컨대 이것은 키취에 불과하다. 작가 자신이 이를 알고 있다고 해도 문제는 남는다. 문제는 이러한 태도 이면에 자리 잡고 있는 일종의 역사적 ‘원한의지’Resentment가 보이지 않게 되며, 결국 하나의 자명한 감성적 인터페이스로 정립되는 전도 과정에 있다. 요컨대 이러한 작가의 작품을 소비하며 재가공하는 오늘날의 행태에는, 젊은 발랄한 감성로 선전되는 그 무엇만이 확대재생산되며, 식견 있는 자들이 이면에 남아 있는 씁쓸함Bitterness을 알아보더라도, 그것이 어떤 적극성을 가장한 어떤 전도된 의지에 기초해 있는지에 대한 통찰에까지 미치지 못한다. 말하자면 나는 그러한 사태에 강한 불만을 느낀다.
  
(주1) <역사와 반복> 참조할 것. 
(주2) 구체적인 작품 명칭에 관해서 착오가 있을 수 있음.  
* 책마을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9-03-05 07:49)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6-01
15:21:30 

 

병장 이우중 
  어차피 1970년이든 1960년이든 상관없었을 테니 1973년쯤의 핀볼도 괜찮았을 것 같군요. 허허. 
전 개인적으로 이러한 사태들에 별 불만은 없습니다만 
거대 서사에 능한, 뛰어난 스토리텔러가 혜성처럼 속속 등장해 주기를 바라고는 있답니다. 

제가 꿈꾸던 '책마을'의 글이에요. 고마워요. 좋은 글. 2009-03-03
14:29:19
  

 

상병 김예찬 
  잘 읽었습니다. 저도 <역사와 반복>을 읽으면서 특히 90년대 이후 유행하고 있는 전기류 소설이나 세카이계 아니메가 취하고 있는 탈역사적 태도(脫, 이라는 표현이 적합할지는 모르겠습니다..)에 생각을 뻗쳤던 기억이 나는군요. 이런 작품들의 소비층들이 대부분 세상에 대한 모호한 강한 불만을 가지면서, 사회/구조적 문제에 냉소적이면서도 자신의 불만을 모두 개인적인 내면과 그에 상대되는 바깥 사이의 대립으로 치환하게 되는 것이 인상적이라고 느꼈습니다. 

박민규의 작품들이 소비되는 방식도 유사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건 책마을에서도 마찬가지로 느끼게 되는 안타까움입니다만..) 박민규는 의도적으로 심각한 문제를 단지 '슬며시' 드러냅니다. 독자들은 "잡지 못할 공은 잡지 않는다"라는 문장을 과연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요. 더이상 역사적 대체물로 기능하지 못하는 근래의 문학에 대해 매우 당혹스러운 느낌을 받게 됩니다.. 2009-03-03
14:33:09
 

 

병장 김무준 
  가지로. 2009-03-03
14:40:50
  

 

상병 김형태 
  하루키의 소설을 좋아하지만, 이런식으로 생각해본적은 없는것 같네요.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상실의시대', 단편집 '중국행 슬로보트'를 본거 또보고 본거 또보는데, 위 글을 읽고 나니, 음- 이라는 생각을 감출수 없군요. 잘 읽었습니다. 일각수 생각하니 다시한번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읽고싶어지네요 허허허 2009-03-03
14:48:06
  

 

병장 이동열 
  무엇인가 통찰을 얻을 수 있는 글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 역시도 박민규라는 작가의 매력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물론 이는 계속 이어갈 것으로 생각하구요. 하지만 원익님이나 예찬님이 말씀하는 것처럼 참여적인(?) 텍스트는 부족한 것으로 느껴지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고백하자면 저에게 무거운 텍스트는 말 그대로 짐에 가깝습니다. 아직 이를 짊어질 저 자신의 역량이 부족하기에 조금씩 나아갈 수 있게 노력중입니다. 이런 점에서 일본 통속소설 중 이사카 코타로의 작품은 괜찮지 않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의 '마왕'이나 '골든슬럼버'는 어느정도 짊어질 수 있는 무게라는 생각이랍니다. 

이 텍스트를 읽고서 원익님이 어떤 분인지 가입인사를 찾아보았습니다. 고맙습니다. 좋은글 읽게 해주셔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덧붙여야겠지요. 

가지로- 2009-03-03
15:04:22
  

 

일병 이정환 
  원익 씨는 식자들의 통찰이 박민규 류 소설 저변에 깔린 '전도된 의지'에까지 미치게 되면 정치적 주체화를 이끌어낼 인식론적 모색이 시작될 것이라고 기대하시는지 여쭤보고 싶군요. 2009-03-03
15:05:05
  

 

일병 신재호 
  무라카미 하루키하면 사골의 뼛속까지 우려먹는 작가라는 생각밖에는 안들더군요 제가 아직 책읽는법을 몰라서 그런건가요? 음.. 2009-03-03
15:11:48
  

 

일병 신재호 
  그..그나저나 이런글은 힘들어요 2009-03-03
15:14:37
  

 

병장 안재현 
  잘 읽었습니다. 일본소설을 좋아하지는 않아서 이해하기 어렵군요 흐흐흐 난독증인가 봅니다 2009-03-04
08:31:16
  

 

상병 박원익 
  제가 기대하는 것은 거대 서사에 능한 스토리텔러라기 보다는, 언표 주체가 작동시키는 피할 수 없는, '명명의 힘'에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리고 언어의 힘의 본질은 이야기가 아닌 다른 곳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고진이 '역사성'이라는 용어를 어떠한 용법으로 사용하는지를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역사성'을 과거 사건들을 나름대로 서사화하는 장르적 방식이라든지, 혹은 어떤 역사적인 무게감을 전하는 글쓰기 방식과 무관한 어떤 것으로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애초에 언표주체가 어찌할 수 없는 고유한 단독적 사건들에 둘러싸여 있다는 것에 대한 강한 인식입니다. 그것은 '외부성' 내지는 타자성이 우리가 사유해야할 조건임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저는 세대론을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박민규 씨를 비롯한 우리 88만원 세대들은 어느 누구보다, 이러한 '외부성'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고 판단됩니다. 물론 저희들은 누구보다 현실의 무게를 더 잘 알며 더 기민하고 영악하기까지 하다고 평가되는 세대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이 어느 누구보다 '외부성'에 대한 감각이 약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 단순히 '참여'가 부족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봅니다. 다시 이것은 우리가 소통하고 사고하는 '기반'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기반을 아무도 문제삼지 않습니다. 요컨대 저는 그것에 대해 일종의 책임감을 느낍니다. 그리고 그 책임감은 바로 언어를 탁월하게 사용하고자 하는 모든 이들의 책무라고 생각합니다. 2009-03-04
09:50:00
  

 

상병 박원익 
  우리의 소통의 기반은 무엇일까요? 그리고 그것이 기초하고 있는 감성적 인터페이스는 무엇일까요? 계속 박민규라는 작가 개인을 걸고 넘어지는 것 같아서 송구스러운 기분마저 들지만, 저는 그에게서 저희들의 감성적 기반의 전형이 표출되고 있다는 느김을 계속 가질 수 밖에 없습니다. 다시 외부성의 문제로 돌아오자면, 그의 작품이 <핑퐁>이든 <카스테라>든 <삼미슈퍼스타즈>이든 간에 그의 작품에서 분명 개인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환원불가능한 어떤 현실의 장벽이 표상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장벽들은 개인의 어떠한 관점이나 환상적 틀을 가지느냐에 따라 일정한 방식으로 치환, 응축되는 방식에서, 작가와 화자 그리고 독자는 일정한 자유를 얻습니다. 요컨대, 저는 이것이 88만원 세대의 공통적인 세계관이라는 느낌을 받습니다. 20대 의식에 대한 각종 설문조사들을 읽다보면 그들이 거시적으로는 현실 자본주의의 구조에 대한 냉정한 인식에 기초한 반면에, 미시적으로는 이러한 구조의 틈새 속에서 나름대로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으로 조사됩니다. 제가 문제 삼는 것은, 그들이 지나친 비관주의나 냉소주의에 사로잡혔다는 사실이 아닌, 이러한 설문조사와 소설적 세계관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낙관주의와 비관주의의 감각적 '나눔' 내지는 '짜임의 분배'입니다. 2009-03-04
09:57:25
  

 

상병 박원익 
  말하자면 이것이 하나의 시대적인, 감성적 기반이라는 점입니다. 이러한 기반 속에서 다시 보이지 않는 것은, 우리의 개인적인 삶의 기획을 방해하는 일련의 사회경제적 조건들을 불러일으킨 특유한 사건들이 단순한 하나의 일반적인 구조로 추상화되는 전도과정입니다. 예찬님이 일본의 경우 <세카이물>을 적절히 예시로 든 것처럼, 그러한 작품관에서도 작동하는 것은 그러한 추상화과정입니다. 가령 <최종병기그녀>에서 전범적으로 드러나듯이, 각자의 행복한 경험적 생활세계를 붕괴시키는 거대한 세계전쟁의 근원이나 배경에 대한 질문은 단순히 괄호'()' 쳐져 있습니다. 하지만 독자들의 편에서는 그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아니메를 즐기는 오타쿠들이 사회경제적 조건에 대한 엄밀한 인식이 결여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최종병기그녀>과의 탁월한 대비를 가령 <공각기동대 TV판>에서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에서도 역시 어떤 세계조건을 불러일으킨 '사건'들의 윤리성이나 정당성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아니메에서는, 분명 그 '사건'이 아니었다면 '여기'에 모든 이들을 불러모은 이러한 유일무이한 조건들이 창출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강렬한 인식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애니메이션의 영역에서도 발견될 수 있는 '역사성'이라고 생각합니다. 2009-03-04
10:05:27
  

 

상병 박원익 
  원래 한 글로 완성되었어야 할 긴 논의를 댓글로 보충했습니다. 제가 있는 환경이 인트라넷을 마음놓고 진득하게 사용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점을 양해해주셨으면 합니다. 

정환님에게, 저는 어떤 비평적 인식으로 어떤 특정한 실천적 결과가 나올지는 보장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정환님은 그 질문에서, 어떤 이론/실천의 이항대립을 염두에 두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제 생각으로는, 진정한 실천행위는 바로 '감성적 기반' 자체를 무의식에서 건져내고 그것의 자명성을 문제삼는 바로 그 비평적 행위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비평가로서의 입장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2009-03-04
10:10:08
  

 

상병 김예찬 
  요새 젊은 세대들이 자신의 삶 뿐만 아니라 사회적 관심까지도 '라이프 스타일'에 좌우하며 살아가는 것 역시 지적하신 것처럼 어떤 무의식의 영역에서 비롯된 바가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잘 읽었습니다. 원익님이 마음 놓고 진득하게 인트라넷을 사용할 수 있는 환경이 빨리 오기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2009-03-04
14:05:13
 

 

상병 김예찬 
  참, <가지로> 보내죠. 2009-03-05
07:49:01
 

 

병장 김동욱 
  원익님의 글을 좀 더 읽어보고 싶군요. 2009-03-06
01:45: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