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들어가며 

아주 오래전 박민규란 소설가를 우연히 들은적이 있다. '지구영웅전설'이라는 소설을 썼는데 문체가 독특했다고 들었다. 그리고 그를 말하면서 '포스트모더니즘'작가라는 수식어까지 붙었으니 그가 대단하긴 대단한 작가인것은 분명한것 같다. 그가 말하는 소설에 주제는 비스무리했다. 그의 단편집 '카스테라'를 매우 주의깊게 읽어보아도 대부분 내용은 '소외된 자들에 대한 소통'을 중점으로 되어있다. '자아의 대한 상실자', '일상생활 속에서 소외된 자들'등등이 주인공이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 세상을 이야기하고자 했다. 특히 그가 유명해진 계기인 소설 삼미만 해도 아무도 거들떠보지도 않는 이야기를 썼다는 것에 대해 분명 그는 스타일이 분명한 자였다. 이제 핑퐁을 통해 그는 그 스타일을 확고히 했다. 

1. 왜 박민규는 또다시 소외된 자들을 이야기하는가? 

스토리는 굉장히 단순하면서도 쉽게 읽히지만 그의 문체는 꽤 독특하다. 1인칭 시점에서 다루는 소설에서 그는 다양한 인간관계를 설정시켜놓는다. 그가 주인공으로 선택한것은 '소외된 학생'이다. 수도없이 처음부터 그는 주인공이 수억명에 지구인들중에 단지 한명일뿐이라는것을 상기시킨다. 그것은 지구를 멸망시킨다는 이야기를 하기 전까지 말이다. 

왜 그는 주인공을 소외된 자들로 구성시키는 것일까? 그토록 주인공이 불쌍하다고 느껴지는것이 지겨울정도로 긴 이야기를 꺼내는것일까? 이것은 세상에 대한 소외된 자들에 대변인이 되고싶다는 욕망에 비롯된 것일수 있다. 이와 비슷한 소설인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공'에서도 주인공은 굉장히 소외된 비루한 삶을 사는 자들이다. 허나 난쏘공같은 작품은 현실적 요소를 다분이 배치해놓은 상태에서 현재의 대한 삶에 비판적인 견해를 내비쳤다면 이 핑퐁은 주인공이 어떠한 비판적 견해를 내비치지 않고 오로지 독해를 하는 독자들에게 철저히 맡겨버린다. 주인공이 한마디씩 하는 중요한 단어는 작은 활자체로 하거나, 혹은 몇몇 사람들과 이야기를 통해 오로지 듣기만 하는 주인공은 마치 독자가 직접 듣는것처럼 만들어 버린다. 

어쩌면 박민규는 오래전부터 소외된 자들에 대한 삶을 조금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싶은것이다. 이러한 소외된 자들을 희극과 비극을 적당히 결합시켜서 상상력을 결합시키면 박민규식 소설이 되는것이다. 그리고 이 소설은 독자들에게 해석을 맡겨버리면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소설이 되어버린다. 

2. 대체 그가 말하고 싶은것은 무엇인가? 

그는 말하고 싶은 내용을 맨 마지막에 다양한 메타포를 통해 돌출시킨다. 이러한 수법은 지구영웅전설이나 카스테라에서 자주 나타났지만 약간에 능력이 모잘랐는지 쉬이 독자들이 파악하기 어려웠지만 다행스럽게도 핑퐁은 독자가 다양하면서도 간단하게 파악할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현실'이다. 핑퐁은 '현실'에 대해 극단적인 표현을 계속 나타낸다. 특히 1인칭인 주인공이 바라보는 시점으로 계속 현실에 '당연히 살아가는'사람을 나타내고 있다. 소설 안에서 특이한 모임인 '헬리혜성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 집단인데, 이 모임은 결국 '아웃사이더집단'과 별 다를것 없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소외된 자들이 모임이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반항적인 사람들의 모임과 같다는 것이다. 

핑퐁에서 갑자기 판타지 소설같이 변하는것처럼 느껴질지 모르지만 마지막에 결투를 벌이는 스키너 상자에서 길러진 동물들은 결국 현실세계에서 당연히 살아가는 사람들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니 위대한 현자들을 소환시켜도 절대 이길수 없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반응메커니즘이 너무 당연하게 길러졌다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 박민규가 가장 말하고싶은 바를 잘 나타낸것이다. 그가 말하고싶은것은 결국 '소외된 자들이 만들어진 배경은 현실세계를 그저 묵묵히 받아들인체, 그냥 살아가는 자들'때문이라는 것이다. 

3. '핑퐁'에 한계, 그리고 그것을 뛰어넘기 위한 방법은? 

핑퐁은 한계점이 마치 우행시와 똑같다. 우행시에서 강간을 당한 여성에 대한 폭력을 해결하지 못한체 오로지 마지막 사형수에 대한 사랑 아닌 사랑에 대한 이야기로 끝내버린다. 핑퐁도 마찬가지이다. 주인공이 폭력이란 폭력은 당한체로 오로지 세상을 멸망시킨다는 선택한것으로 해결된것이 아니다. 만약 박민규가 차라리 세상을 바로 멸망시킨다는 내용을 마지막에 첨부시킨것이라면 그것은 괜찮았을수 있는데, 선택만 하고 다시 현실로 돌아온것은 오히려 어쩡쩡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왜 박민규는 그 선택을 했던 것일까? 그렇게 모아이와 주인공을 괴롭히는 것들을 해결하지 않은것일까? 그냥 삶을 괴롭히는 것들을 리셋시킨것으로 선택한것이 해결책인것일까? 이것은 너무나 잘못된 선택방법이다. 결국 패배주의를 숨기기 위한 패배주의라는 것이다. 특히 김영하라든지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불리우는 우리나라 소설가들은 대부분 이런 결론을 내비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매우 잘못된 방식이다. 현실에서 폭력과 해결해야 할 문제를 제대로 해결시키지 못한것은 결국 작가 스스로도 대안을 찾지 못한 것이다. 그 대안을 제대로 찾지 못하고 소설을 쓰다보니 결론에서 흐지부지한체 오로지 독자에게 맡기기만 하는 어설픈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소설이 되버린것이다. 

결국 이러한 부분을 해결하려면 조금더 극단적인 결론이 나와야 한다. 핑퐁에서 현실에서 그저 똑같은 반응만 나타내는 것들을 무찌르고 세상을 바로 멸망시켜버려서 끝내버린다면 이것은 결국 삶에서 어쩔수 없는것들을 삶의 '용기'와 '희망'으로 이긴다는 것이다. 조금 시대착오적인 내용이라고 해도 현실에서 패배한것들을 적어도 해결한다는 점에서 차라리 좋은 결과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러한 부분들을 해결할수 있는 해결책을 조금더 깊이 생각해야 한다. 단순히 박민규나 김영하처럼 계속 현실에 대한 이야기를 메타포가 다양한 방식으로 꺼낼꺼라면 꺼낸것에 대한 책임은 끝까지 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만이 각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우리나라 소설이 풀어나가야할 숙제일것이다. 

4. 결론 

전체적으로 핑퐁은 매우 쉽게 읽힌다. 또한 예전 소설과 다르게 자기 색깔을 분명하게 들어냈다. 조금더 불편하게, 조금더 현실적으로, 그리고 메타포를 알아챌수 있게끔.... 

박민규는 이제 그와 비슷한 소설을 계속 낼것이다. 점점 완성도는 높아지면서 사람들에 마음을 더욱더 불편하게 만들어 버릴것이다. 그 불편함을 해결할수 있는 해결책마저 핑퐁과 조금 다른형태로 결론지어버린다면 아마도 박민규는 차세대 위대한 작가가 되어있지 않을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