핏자국. 여전히 제레인트. 
 
 
 
 
들어가며
- 이 글은 주영준, 고계영 등과 약속한 저의 -나는 전혀 자연스럽지만 당신들이 보기에- 하드코어적 종교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소통과 부조리. 모순덩어리인 인간.

사회과학, 인문학, 철학 등의 이야기들이 오가고, 무신론자, 불가지론자가 주류를 이루는 책마을에서 나는 보았다. 소통의 가능성을. 비록 100% 소통의 ‘니름’ 수준은 아니더라도 -뭐 아니면 어떠랴. 10% 소통도 소통이다.- 입장과 생각의 갭이 너무나 컸던 사람들이 의견을 조율하고 상대방의 의견도 받아들이는 공간. 과거 그리스의 아카데미가 그랬을까 혹은 학문과 사상을 꽃피웠던 무슨무슨 해외의 학파들이 이랬을까 책마을은 가장 이상적인 데모크라시(민주주의)가 현실로서 실천되는 공간이었다. 인간은 모두 소통가능한 존재다! 라는 것을 증명하듯 모든 필진과 주민들은 같은 호흡으로 소통했다.

그래서 매력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나서부터 인간의 소통 가능성은 오직 성령의 교통하심에서만 존재한다고 믿었었고, 경험함으로 알고있던 나였다. 책마을 같은 일반적인 사람들이 소통한다는 것은 영화에서나, 드라마에서나 가능했던 것들이었다. 인간에 대한 불신은 불신론자를 바라볼 때 느끼던 것이었다.

그러나 6,7년의 신앙생활을 하며 그것 또한 진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사실 정답주의자다. 이상은 곧 정답이고, 정답이지 못한 것은 오답이었다. 현실의 모든 사건과 이야기에는 그에 수반되는 정답과 근거가 있어야 한다고 믿고 정답만을 추구하는. 그래서 좀 피곤하다.- 나를 예수께로 인도하였던 엄마와 엄마를 전도한 꽃집의 집사님은 교회 사람들과의 불화로 교회를 옮겼고, 성령의 임재를 체험했던 뜨거운 신앙의 건축학도 P형과 교회에서 사귄 그의 사회복지학도 L양은 즐기지 못하는 청춘에 대한 회의감으로 신앙자체를 저버렸다. 

성도 또한 인간이었다. 이상론을 들먹거릴 수준의 존재가 아니었던 것이었다. 자신안에 거룩한 성령을 모시건 말건 중심이 아닌 변두리의 자리로 성령을 치워둔 인간은 여전히 인간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믿지 않는 인간들처럼 서로 반목하고, 시기하고, 질투했다. 인간은 엑소더스(Exodus)의 총 책임자 모세가 나타나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친히 자신을 드러내보였던 여호와를 보고도 변하지 않았던 지독한 애굽땅의 노예출신 같았다.

신앙의 근거.

내가 인간의 부조리와 소통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나를 신앙으로 인도했던 가장 큰 이유가 인간 존재에 대한 근원적 불신이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기저에 깔린 하나님의 섭리는 말할 필요가 없고.- 피상적이기만한 대인관계, 무관심이 일반적인 소통의 불가해함이 산재되어있는 세상을 어느덧 알아가는 나이가 되었다. 그리고 난 세상의 부조리에 견딜수가 없었다. 내가 배워오던 세상은 모두가 소통가능한 이상향의 유토피아였었다. 그것이 정답이었고. 그러나 알아가는 세상은 정답과는 한참이나 비껴갔었다. 

그래서 하루에도 몇 번씩 자살을 결심했었고, 가출을 준비했었고, 차라리 테러리스트가 되어 세상의 전복을 바랬었다. 더러운 세상, 꼴도보기 싫으니 죽으려 했고, 내 주위가 아닌 곳에 찾지 못한 청정지역이 있을까 하는 생각에 집을 나가려했고, 실존적 존재임을 드러내는 반항이라도 해보려했다. 그러나 유토피아를 들먹이는 이성주의자에겐, 사유적인 동물에 더 가까운 나에겐 그 모든 것은 단지 계획으로 머물렀다.

통로신앙을 배우다.

행복은 가까운데 있다고 했던가. 파랑새는 의외의 곳에 있었다. 집 근처의 빨간 십자가. 그것이 구원이었다. 따스한 가족애를 느낄수 있는곳. 모든 성도들은 성령으로 소통했고, 이상적인 인격에 맞닿아있는 인간도 만났다. 비록 피는 나누지 않았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한데 꽉 묶여있는 교회 공동체는 나의 이상을 충분히 충족시켰다. 아니, 하나님의 사랑은 그보다도 차고 넘쳤다.

교회 공동체에서 구원을 본 나는 성경적 인간에 탐독했으나, 앞에서 이야기 했듯이 몇 년간의 신앙생활동안 믿기전과 똑같은 실망을 얻었고 나는 그 뒤로 인간에게 걸었던 사닥다리를 치우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옮겨 달았다. 성경에서 말하던 ‘세상적’인 것들을 곧이곧대로 듣고 완전히 멀리 치워버렸다. 가요, TV, 신문, 게임 등을 끊었고, 오직 성경, 기도, 예배, 봉사. 나의 집중의 대상은 인간에게서 예수로 치환되어져갔다. 그리고 나는 그 기간동안 성화되어져갔다. 정식 신학을 공부하지 않았어도 삼위일체를 체득했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상징하는 의미 또한 알게되었다.

혹자는 광신이 아니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그런 당신의 반문에 굳이 변명하지 않겠다. 내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니. 그 기간에는 광신과도 같았던 신앙이 필요했었다. 적당히 중용을 지킬수 없던 성향을 가진 나는 항상 극단을 오갔다. 믿음의 가장 밑바닥을 가봤고, 믿음의 가장 꼭대기를 가봤다. 그리고 그 기회를 통해 난 중간을 알게되었다. 

그 후 나는 통로신앙을 배웠다. 예수는 진정한 통로의 역할을 감당해내고 있었다. 무엇을 보든지 예수라는 통로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다. 인간에게서 실망을 얻었었다. 그러나 통로를 통해 바라본 인간은 사랑스러웠다. 예수 그리스도에 집착할수록 다른 것들이 보여졌다.  그를 통해 소외된 인간들에게 다가가던 예수 그리스도. 복음에 소외된 이방인에게 다가가던 사도 바울. 단 한명의 열외없이 영접한 모든 이의 마음에 자리한 성령. 그들의 마음이 나의 것이 되었다. 나는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자가 되었다.

그걸 깨닫고나서 추잡하고 꼴도보기 싫던 세상을 다시 바라볼수 있었다. 다메섹 도상에서 자신이 핍박하던 예수의 영을 만나고 사흘동안 장님이 되었다가 비늘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 사도 바울처럼, 세상에 대해 눈을 닫았고, 비늘이 벗어졌고, 다시 보게된 세상은 놀랍도록 아름다웠다.

다시 본 세상은 아름다웠으나 성도와 불신론자와의 소통 가능성에는 여전히 의문이 남았다. 그만큼 인간에게서 받은 트라우마(정신적 외상)는 뼈가 저릴정도로 쓰렸다. 인간과의 소통에 목마른 나는 불신론자와 소통하고 싶어서 불신론자인척 했고, 성도와 소통하고 싶어서 성도집단에 시간을 더 투자했다. 내게는 불신론자도 인간이었고, 성도 또한 인간이었다. 하나님이 그렇게 생각하듯이.

그러다 입대를 했고, 군대 또한 마찬가지였고, 나는 여전히 불신론자인척 하거나, 종교활동에 열심을 냈다. 그리고 책마을을 만났다. 내가 가진 정답에 가까운 소통이 이곳에서 이뤄지고 있었다. 그러다 김대현을 만났다.

핏자국

김대현은 비판적 지지로 신앙을 고수했고, 나는 긍정적 열정으로 신앙을 고수했다. 몇 번의 담론이 오갔고, 실제로 김대현을 만났다. 병장을 다는 동안의 군생활에서 잊고 있던 감수성을 일깨워준 그였다. 그의 글은 추하기에 아름다웠고, 약했기에 강했다. 실제로 만났던 김대현은 술이 한참 취한듯 했다. 그는 이야기 도중 울어버리기도 했고, 김광석의 노래를 자주 따라 불렀다. 

“종교에 대해 못다한 이야기를 해야지” 하던 나의 제안에 김대현은 정색하며 말했다. -아니, “왜 그 뒤에 글을 안 올렸냐”고 물었던가- 진우씨의 글에서 진우씨의 핏자국을 봤다고. 그 핏자국에 나는 아무말도 할수 없다고. 그리곤 대화가 흐지부지 끝나버렸다. 김대현과 종교를 매개로 소통해보려 했던 나의 노력은 몇 번의 미완성된 글대화로 일단락 되었다. 아쉬웠다.

그 후로 박시용씨가 송희석씨의 질문에 신학적으로도 어긋남이 없으면서 쉬운 종교글을 올렸고, 몇 번의 종교논쟁이 오갔고, 주영준을 만났다.

인간과 신의 경계허물기

주영준은 여신의 상실에서 오는 고통의 문제를 종교로 치유받고 위안받고 싶었나보다. 그래서 종교에 대해 알고자했었다. 그는 유독 ‘나의 종교’ 에 관한 질문을 집요하게 해댔다.

나는 변함없이 인간을 사랑한다. 아무리 인간이 못나고 부족하고 부조리한 모순투성이의 존재일찌라도. 왜냐하면 하나님이 인간을 그렇게 사랑하고 있으니까. 그 성령이 임재하고 있는 나는 인간인 동시에 하나님이니까. 인간을 죽도록, 자기 아들을 죽이기까지 사랑했던 신이었으니까. 그래서 나는 무슨일이 있더라도 하나님의 마음으로 인간을 사랑했고, 사랑하고, 사랑할 것이다.

주영준은 동의하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아직도 당신의 그 한마디는 지금 나의 가슴을 울리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신을 사랑하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주영준은 혹 나의 신앙에 어긋하는 말일까 생각하여 눈치를 살폈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아련히 느끼고만 있던 사실을 명확히 집어내 준 한마디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신의 아들인 동시에 인간이었다. 그래서 그는 십자가에 매달릴수 있었고, 제자들의 발 또한 씻겨줄수 있었다. 인간과 신의 다리. 통로. 2천년 전에도 신과 인간의 경계허물기를 시도한 인물. 그것이 예수였다. 그래서 나는 신을 사랑할수 있게 되었다. 

벤야민은 자신의 저서에서 기술복제 시대엔 예술품이 가진 아우라가 사라지면서 대중이 갖고있는 숭배의 감정이 애정의 대상으로 바뀐다고 말했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예술품-신’ 과 ‘대중-인간’ 의 관계를 바꿔버린 기술복제시대, 그 장본인이었다. 신과 인간의 사이를 가로막던 성전의 두꺼운 장막을 찢고 다리를 놓았다. 인간과 신의 소통.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였다. 그를 믿는 나 또한 예수처럼 인간인 동시에 신이 될 수 있었다. 

나는 그 뒤로 불신론자의 가면을 쓰지 않았다. 정답이 아니어서 인정하지 못했던, 똑바로 직시하지 못했던 내 안의 모순을 인정하고 나를 실체로 받아들였다. 모든 존재 또한 그러하였다. 부조리와 아름다움이 공존하는 현실, 선과 악이 동시에 존재하는 인간. 그것이 현실이었다. 그동안 나는 동전의 한쪽면만 바라보던 성숙하지 못한 녀석이었다.

소외박멸 프로젝트.

김대현은 신약에 대해 이렇게 평을 달아놓았다.
“신약의 주제는 소외박멸이라고 생각해요. 유대인의 하나님을 만인의 하나님으로 바꿔버린...”
소외박멸. 신약의 모든 사역들이 하나로 정리가 되면서 깨달아졌다. 나를 오랫동안 지배하고 있던 청개구리적인 강박관념 또한 설명되기 시작했다. 형상과 의미의 불일치를 주제로 한 알레고리, 고정관념을 깨부수기 위한 여러 가지 행동들, 더 나은 변화를 위한 다양성 추구, 경계허물기, 이면밝히기, 남들이 생각지도 못한 것을 생각해내기. 모든 것은 소외박멸이라는 이름으로 한데 묶일 것이었다. 

세상엔 장점이 있으면 단점도 있었다. 좌가 있으면 우도 있었다. 상류층이 있으면 빈곤층도 있었다. 대기업이 있으면 중소기업도 있었다. 강대국이 있으면 극빈국도 있었다. CEO가 있으면 노동자도 있었다. 이게 현실이었다. 모순적인 부분을 가지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세상은 그러한 정반대의 것들이 하나에 존재하는 속성의 것이었다.

인간사회의 부조리와 소통을 모두 겪은 나는 그 두가지를 인정했다. 그러고나니 편했다. 신성과 인성을 모두 겪은 나는 그 두가지를 인정했다. 역시 편했다. 현실은 거부한다고 해서 달라지지 않았다. 인정하는 순간 변화의 시작은 진행되었다. 물이 되어야 흐름을 바꿀수 있었다.

“나는 인간을 더 사랑하고 싶어. 예수가 그랬듯 소외된 자들에게 손 내미는 사람이 되고 싶어.”라고 말했을 때 주영준이 물었다. “그 반대는 아니고” 당신을 앓는 내 모습을 너무 비췄을까. “아니, 난 이미 사랑을 받았어. 하나님에게서 충분히 사랑받은만큼 나눠야한다고 생각해. 거기서 내 인간 사랑은 시작되거든” 그 뒤에 이 말을 덧붙이지 못했던게 아쉽다. 그게 바로 내 핏자국이고 통로신앙이야. 라는 것을.

나는 여전히 아직 빛이 비취지 못한 곳에 빛을 밝히기 위해 애쓸것이고, 소외된 자들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는 일에 최선을 다하며 살아갈 것이다. 당신이 포착해내지 못한 현실의 사물, 인간의 이면을 집어꺼내어 보여주기 위해 노력할것이다. 통로신앙, 소외박멸, 현실인정.

여전히 제레인트.

유진씨의 그 말도 떠오른다. “목사하면 되게 잘 어울릴거 같애.” 아니. 목사되기엔 글러먹은 녀석이다. 인간을 너무 사랑해서 그들과 대화하기 위해 술을 퍼마시는 녀석에게서 거룩은 무슨. 게다가 인간을 너무 사랑해서 가끔은 하나님을 뒤로하기까지 하는 목사라면 성도들은 도대체 뭘 믿어야 한다는 건가. 나는 나의 한계를 알기에 목사가 못 될거 같다. 그냥 헛소리나 지껄이고 빛이나 밝혀주는 역할을 묵묵히 감당하는 평신도나 될란다.

프리스트는 박준응이나 되라고 해. 나는 여전히 제레인트다. 

  
 
 
 
병장 주영준 (20060801 124703)

사람에게 자극이 될 수 있다는 것. 그걸로 나는 나의 역할에 만족할 수 있겠어. 라는 과대망상에 빠지게 하는 글이로군. 역시 나는 허원영에게, 네게 그랬던 것처럼 질러대며 살아가야 하는 걸까. 그렇게 피흘리면서. 글 써 줘서 고마워. 고맙게 읽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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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외박멸 프로젝트'와 관련해서 2000년경 찌질이 정치학도를 강타한 네그리하트의 명저 '제국'을 읽어보길 추천해. 나도 보다가 귀찮아서 그만두긴 했는데. 그 '만인화된 하느님(혹은 만국화된 제국)'에 대한 문제제기를 재미있게 풀어가려고 하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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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사람에 대한 사랑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내가 말했을 때 너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인간에 대한 사랑이며, 인간에 대한 사랑이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다'라고 대답했지요. 당신의 그 한마디는 지금 나의 가슴을 울리고 있어요.    
 
 
병장 고계영 (20060801 131551)

들어가며. - 하드코어가 아닌데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습니다. 
정말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진우님에 대해서 조금 더 알게되는 듯한 느낌의 글이네요. 
진우님은 지난 댓글에서 [인간밖에 사랑 못하겠습니다]라는 말씀을 하셨었는데, 이 글을 통해서 그 의미를 확실하게 알고 가는 것 같습니다. 
-- 저도 책마을에서 여러분야의 '소통'의 가능성을 보고있습니다. 제 능력이 미천하지만 그 가능성을 보고 있다는 것만으로 행복합니다. (제 이름을 넣어주셨으니 또 한번 감사하다는 말씀을. 하하하.)    
 
 
 병장 박진우 (20060801 202422)

영준 저번에 추천해준 '사람의 아들'도 아직 손에 잡아보지 못한 나에게 또 다른 책을 추천해주는건 사디스트적인 가학인게냐. 끄음. (일단은 리스트에 적는다.) 

계영 워낙에 휴머니즘에 찌들어서요.    
 
 
병장 주영준 (20060801 203011)

푸하. 재밌는 사실 하나. 방금 화장실 구원사 제대로 읽었는데-응. 네가 이상한 글을 남겨준 덕분에 다시 쓰던 소설은 제껴놓고 반론에 네 작품 평이나 해주려고-일전에 추천한 이눔얄 씨의 '사람의 아들'도 화룡-용준같은 듀오가 플롯의 중심에 있다. 물론 핵심적인 문제에서는 전혀 다르지만, '새로운 종파의 창시자와 열성적인 전도자. 그리고 창시자의 종교적 상승에 의한 전도자의 실망. 둘 간의 반목.'이라는 점에서 구조적 유사성을 띄는데. 이거. 굉장한데. 혹시 몰라서 물어보는 건데, 기독교 철학-성서라든가-에서 저 구조가 중요한 구조로 등장한다거나 하는 경우 있냐 

제국은 정말 천천히 읽고. 정말 시간나면. 사람의 아들은 네녀석 작품 읽고 보니까 빨리 읽으라고 추천하고 싶은데.    
 
 
병장 김동석 (20060801 204144)

『사람의 아들』 나도 추천하고 싶소이다. 얼른 읽고 독서후기 쓰세요.    
 
 
 병장 박진우 (20060801 205513)

영준 아, 이런 젠장. 역시 하늘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전혀 몰랐다는... 나조차도 놀라운데 이거. 
문학동네 출품작으로는 완전히 어긋나버렸네. 
그리고 그런 구조는... 있긴 있지. 사도 바울과 마가의 트러블이 비슷하긴한데 
오히려 현대로 넘어오면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종교적인 특성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군. 

동석 예. 그리하겠습니다. 내 얼굴에 사람의 아들이라는 책이 써있는것도 아닌데 다들 추천하신다면야 뭔가가 있을거라고 생각하고.    
 
 
병장 조주현 (20060802 113345)

에, 저도 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