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연성과 책임, 그리고 행위에 대하여 
 
 
 
 
원영 씨의 앞선 칼럼을 읽고 정말 깊은 공감을 했다. 괜한 사족이 될까 쓸까말까 하다 망설이기도 했지만, 자발적으로 ‘보론’이란 이름 대신 무관한척 뻔뻔스레 옆에 둠으로써 대개 원작만 못한 속편의 어설픔을 조금이나마 회피하고 싶다. 

원영 씨의 글처럼 우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나에게 일련의 책임의식을 남긴다. 그런데 나는 그 책임이라는 것은 늘 행위를 수반해야만 비로소 퍼즐의 완성처럼 그 모양을 갖춘다고 생각한다. 즉, 많은 사람들이 쉽게 생각하는 것처럼 그냥 내가 어떤 사실을 인지했다는 것이, 그리고 그 앎이- 이 앎은 세상과 나 사이에 있는 필연성에 대한 앎이다- 일정의 책임을 내게 상기시켰다고 해서 거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내가 아무리 많은 책을 읽었고 깊은 공부를 했다고 한들 나의 행위에 그 앎이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것은 네이버 검색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지식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딱 그 지점에 멈출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무수한 착취의 산물일 혐의가 농후한 피버노바의 경쾌한 구름에 2002년의 한국은 전 국토가 열광했다. 하지만 지금도 2006년의 여름에 대한 국민들의 열기는 좀처럼 가실 줄을 모른다. 축구공은 이름만 바꿨을 뿐인데. 그럼 나는 이 문맥에서 모든 사람에게 축구공의 흠결에 축구를 외면할 정도의 결벽을 요구하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하지만 축구공과 축구사랑 사이에는 어떤 교집합도 존재하지 않으니 그 둘은 외따른 변수인가 하면 또 그렇지도 않다. 이 두 가지 사실을 알고 난 다음에는 강록군이 말한 것처럼 분명 ‘불편한 의식’-즉, 일련의 책임-이 존재한다. 불편한 의식은 문제를 해결하는 키워드다. 불편한 의식을 해소함에 따라 비로소 축구는 ‘많은 사람’이 즐거운 것에서 ‘모두가’ 즐거울 수 있는 축제로 승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원영 씨가 그의 칼럼에서 말한 것처럼, 모든 일에 참여하고 실천하는 것이 불가능할지라도 우리가 할 수 있는 한에서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리고 그를 통해 우리의 앎을 통해 얻어진 책임에 관한 인식-즉, 불편한 의식-을 해소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항상 여기에서 발생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한’이라는 조건이 붙은 그 ‘최선’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내가 가장 크게 고민했던 부분은 여기였다. ‘나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세상에 이럴 수가! 안타깝게도 우리에겐 어떤 정도의 책임을 인지하는 사람은 이런 정도의 행위를 해야 한다라는 방정식은 없다. 나는 얼마만큼을 해야 내가 느끼는 불편한 의식을 해소할 수 있는건지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모든 일을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도 없다. 그냥 모른 척 한다 해도 나에겐 그 불편한 의식 외에 아무런 제한도 제재도 없는데. 

영화 <매트릭스>는 바로 이 ‘불편한 의식’을 변화의 소재로 삼는다. 세계가 무언가 잘못된 것 같은데 그 정체를 확실히 알 수 없던 네오는 모피어스를 만나, 자신의 세계가 거짓임을 깨닫고 그를 변혁해내는 그가 된다. 실제의 세계는 누추하고 비참하지만, 의식에 존재하는 이질감은 네오를 결국 행위로 이끈다. 

세상에는 많은 사람이 있고 그 무수함 만큼이나 다양한 삶의 모습들이 있다. 누구나 삶을 살고 그 삶은 모두 똑같이 소중하다. 그들이 어떻게 살았고, 무엇을 경험했으며, 어떤 것을 읽어왔느냐에 따라 그들이 느끼는 책임과 행위의 모습은 다양하다.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혹은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인지도 사람에 따라 달라진다. 누구는 네오가 될 수도 있고 누구는 사이퍼가 될 수도 있다. 헐리우드 영화에선 사이퍼는 전형적인 악당으로 그려지지만, 사실 빨간약을 먹거나 파란 약을 먹는 문제는 실제의 우리가 맞닥뜨린다면 선과 악이라기보다는 엄청난 논쟁을 낳을 공산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 삶이 다르고 지위가 다르고 역할과 능력이 다르기에 자신에게 들이밀어진 책임의 문제에 대해 우리는 자유라는 이름 앞에서 상대성의 감옥의 문을 열고야 만다. 

행위를 구성하는 것은 그 행위 주체의 자유에 기반을 둔다. 누구의 자유도 다른 누구의 원칙이나 방식에 의해 규정될 수 없다. 그것이 자유의 본질이다. 너의 자유, 나의 자유, 너의 앎과 나의 앎, 그리고 책임. 각자에게 너무나 소중한 것들이다. 이렇듯 우리는 모두가 자유롭기를 바라는 까닭에 결국에는 ‘너의 방’과 ‘나의 방’이라는 문패를 달고 각자의 방에서 자신을 둘러싼 상대성의 벽에 부딪힌다. 그럼 이 상대성의 벽에 가려진 우리는 저마다의 독방에서 ‘자신이 아는 바의 최선만’ 을 다해야하는 것인가. 

하지만 상대성의 벽을 무너뜨리고 옆방의 다른 사람에게 가는 일은 충분히 유의미하다. 우리가 몰랐던 어떠한 사실을 알게 된 이후 느끼는 공통적인 책임에 대해 공감했다면 너와 내가 함께 움직일 이유는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하지만 책임을 인지하는 서로의 앎이 너무도 상이하다면 내가 상대방에게 내미는 손길은 어쩌면 다른 사람의 방을 파괴하는 폭력이 될 수 있다. 사이퍼는 말한다. “나는 이 스테이크가 가짜인 것을 알아. 하지만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게 해줘.” 이처럼 혹자는 이 세계가 부조리로 이루어진 것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 자체를, 그래서 자신의 방에 들려온 어떤 소리를 원망하게 될지도 모른다. 책임을 진다는 건 늘 아프기 때문에. 게다가 내가 책임을 다한다고 해서 달라질게 무어란 말인가 하는 체념 섞인 감정도 같이 만날 수도 있다.

필연성을 인지하고 그로부터 책임을 느끼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힘들도 고되다. 거기다 책임에 따르는 정당한 행위까지 요구하는 것은 지나치리만큼 가혹할 수 있다. 다들 바쁘고 힘들게 살아가는 이 와중에 책임에 대한 행위까지 바라는 것은 의식적인 증세(增稅)를 하자는 것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 최선을 다해서 내가 느끼는 책임을 실천에 옮길 수 있도록 해야하고, 최선을 다해서 주변 사람들을 귀찮게, 그러나 조심스럽게 해야한다. 다른 사람의 방문을 두드리는 일은, 조용히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는 그녀/그의 얼굴을 마주해야 하고 아쉬운 소리를 해야하고 귀찮게 만들어야하는 불편함을 나에게 가져온다. 허나, 조금씩 조금씩 움직여보자. 

내가 접하는 모든 사안에 두발 벗고, 팔을 걷은 채 나서자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러기도 힘들다. ‘현실적으로’-이 말을 쓸 때마다 나는 마음이 아프다-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 여념이 없고, 그리고 그 삶들은 저마다 소중하다. 누구도 어떠한 이유를 들어 다른 사람들의 삶과 소소한 행복을 가벼이 여길 수는 없다. 그렇다면 무언가 이제 내가 바래야 할 것은 그 사람들의 삶에 호소하는 일이다. 삶 속에서 자신의 책임을 끊임없이 인지하면서 불편한 의식을 품고 살려는 저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우리 서로가 서로에게 끊임없이 서로의 방문을 두드리는 사이가 되어야 한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똑같은 일을 하자는 것이 아니라 당신은 당신이 믿는 그 방식대로 살아주길 바래야한다. 그리고 우리의 삶이 종국에는 서로를 사랑했음을 확인하게 되길 기원한다.

리영희 교수는 ‘진실은 한사람만의 소유물일 수 없고 나는 그것을 알리기 위해서 글을 썼다’고 말했다. 리영희가 글 쓰는 것에서 자신의 책임을 다했다면, 다른 누군가는 현장에서 온몸으로 자신이 알고 있는 그 책임을 다했을 것이고, 역사 속의 무수한 사람들은 자신이 짊어진 자신만의 책임을 행위로서 풀어내었을 것이다. 청년인 우리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믿고 실현할 수 있는 범주 안에서 계속 고민해야 하고 끊임없이 소통해야 한다. 서로의 책임에 대해 상기시켜주고, 무엇을 하며 살아갈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나의 삶은 비록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지만, 그 독자성이 고립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맺고 있는 무수한 연관과 연관은 긴 사슬이 되어 세상을 거미줄처럼 뒤덮고 있다. 나의 조그만 변화와 내가 시도하는 작은 소통이 사슬의 끝점에서 저 너머의 대척점까지 이어질 수 있는 힘이 된다. 아마 우리가 다해야할 최선이라는 것은 그런 소소함을 시작으로 부르는 것이 아닐까.



 

  
 
 
 
상병 김강록 (2006/01/30 15:41:13)

저도 세절 직전의 카드 청구서에서 송혜교 사진을 오려낼 때 최선을 다하고 있었습니다. 으하하하하!    
 
 
상병 노지훈 (2006/01/30 17:04:26)

정말 비슷한 주제로 엄청난 논의가 오가네요. 바람직한 현상입니다.    
 
 
병장 김대현 (2006/01/31 05:05:43)

결국은 믿음직한 개인주의로 귀결되는군요. 참으로 다양한 방점을 갖게 만드는 글입니다. 
나는 어디까지 짐져야 하는가, 보다, 나는 어디까지 짐질 수 있는가, 보다, 나는 어디까지 짐지고 있는가. 
이야기는 사실 거기서부터 시작해야 했던 게지요. 술자리에 잘 어울릴, 취기를 닮은 끈적한 이야기 말입니다.    
 
 
병장 한상원 (2006/01/31 07:44:26)

대현//믿음직한 개인주의라니..정말 맘에 와닿는 말이네요. 제가 그걸 말하고 싶었던것 같아요. 이 긴글을 탁월하게 요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하.    
 
 
 병장 김동환 (2006/01/31 11:43:12)

그래요. 즐거운 나들이덕에 요즘 책마을에서 벌어진 동류의 논의에 끼어들진 못했지만 개인적으로는 저도 상원님의 '믿음직한 개인주의'로 귀결되는게 바람직하다는 생각입니다. 
예전 '지식인의 역할'을 주제로 했던 세미나에서도 이와 비슷한 논의가 나왔었는데 그것때문에 세미나가 파한 후에도 며칠간 술자리에서 열띤 토론이 벌어졌던 기억이 있네요. 항상 불가항력적이고 결론이 나더라도 행동하기 어려운 문제는 뭔가 사람을 끓어오르게 하는 특성이 있나봐요. 
'당위'에 무조건반사적인 알레르기가 있는 탓에 좀더 다양한 관점을 제시해보고 싶지만 이미 결론이 나왔으므로 무효~(땀) 
글 잘 봤습니다아-(웃음)    
 
 
 병장 한상천 (2006/01/31 13:43:57)

믿음직한 개인주의라 언제나 상원씨의 글에는 소통이라는 단어가 자주 나오는군요. 
회원특집때 이에 대한 질문을 해야겠어요!!    
 
 
상병 송희석 (2006/02/01 08:20:57)

생각지도 못한 '믿음직한 개인주의'라는 말을 배웠네요!    
 
 
상병 엄보운 (2006/02/03 10:31:24)

상원씨의 필력에 쓰러져 있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