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모그래피(filmography)
내가 아직 학생이었을 때도 어른들은 우리들이 책은 보지 않고 술만 마신다고 개탄을 금치 못했다. 대학 앞에 코딱지만한 서점 하나에 한집 걸러 한집이 술집이라는 예리한 지적과 함께 상아탑이 무너져 간다는 핀잔과 툭하면 선배들에게도 너희들 머리는 데코레이션이고 축구할 때만 제대로 쓴다는 말을 들었다.
초등학교 때는 어른들의 극악스러운 책읽기에 동원이 되어 일주일에 두 권의 책을 읽고 독후감을 써내야했고 중 고등학교 때는 현대나 고전문학에 대한 텍스트를 강요받았는데 지금도 염상섭하면 표본실의 청개구리 김유정하면 봄봄, 채만식하면 탁류 심훈하면 상록수 김동인의 감자 이효석의 메밀꽃, 이런 식으로 자다가 저자 이름만 들어도 대표소설 이름이 튀어나올 정도로 외우고 또 외웠다.
그러나 우리는 교과서 뒤에 하이틴 로맨스를 끼워 읽었고 홍성유의 장군의 아들을 가슴 졸이며 읽고 김홍신의 인간시장에 열광했으며 교과서에는 나오지 않는 이상의 자화상을 중얼거리며 외우기도 했다. 끄적대는 걸 유별나게 좋아했다는 점을 빼면 내가 문학 지망생이었는지는 모르겠다. 그저 아버지가 너는 공대를 가라고 했을 때 나는 문과를 가서 글을 쓰겠다고 했는데 아버지는 코웃음을 치시며 자연계열에 나를 집어넣으셨고 결국 국어에 고전을 가르쳤던 아버지를 3학년 내내 마주치지는 못했다. 그리하여 지독히도 수학과 물리에 적응을 못하면서 아버지의 기대를 무참히 저버렸고 수업시간 내내 딴 짓하며 한 장씩 써왔던 짧은 글 하나를 당연히 작문선생님의 추천과 감수도 받지 못한 체 그저 글씨가 예뻤던 짝을 쫄면 한 그릇으로 매수 해 원고지에다 필사를 강요해 모 대학 공모전에 내 돈 내고 우표를 붙여 보냈는데 그 글이 내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인 공모작 이었고 당선작 이었다. 나는 글이 당선만 되면 그 대학은 그냥 시험도 안보고 들어가는 줄 알았다. 모두들 내가 그 대학에 진학한 줄 알아서 몇 해가 지나 길에서 고등학교 동창을 만나 내가 그 학교를 다니지 않았다고 하면 몹시 의아해 했는데 나에게 그 치기 어렸던 짓의 대가는 고작 아버지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던 그 정도뿐이었다.
아버지는 무척 냉정한 분으로 ‘그래 너 재능 있다. 글 써라’ 이런 정도의 인정을 받으려면 메이저급 신문사 신춘문예라도 당선이 되었어야 당신 성에 조금 찼을지도 모른다.
그럭저럭 끄적거리던 습성은 직업으로는 공무원이 장땡이라는 어머니 논리에 굴복해 학교에서도 펼쳐보지 않았던 문제집을 풀다 얼떨결에 이 직장에 처음 들어서면서 그나마 끝이 났다. 간간히 일기를 쓰는 것으로 그 명맥을 유지해 왔다고는 하지만 진지한 글쓰기는 시작도 못해보고 밥벌이에 쫓겨 끝이 난 것이다.
그리하여 글이라고는 ~에 의거, ~에 따라 고작 두 줄이 넘지 않는 기안문이나 만들고 어디 교육이나 행사 빠졌다가 재수 없게 걸려서 사유서를 쓰고 육하원칙에 따른 논리적 설명을 요하는 사업설명서를 애절하고 비통하게 쓴 장문의 글로 제출해서 사람들을 웃겼고 정신교육을 갔다 돌아오는 길에 남긴 수료 소감문 정도였다.
2004년 10월 책 마을을 알게 되었다.
처음 글을 쓰기위해 책 마을을 한달정도 유령처럼 배회했던 것 같다. 일단 시작을 하면 끝을 보아야 한다는 부담감도 있고 다른 분들처럼 일 수채워 제대를 할 수 있는 사람도 아니니 슬그머니 머리는 내밀었다 치고 언제 어디서 어느 때쯤 꼬리를 감춰야 할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인데 그때 결국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이 배에 올라서 여러 번의 풍파를 거쳐 여기까지 왔다. (그런 점에서 여러모로 형진님이 부럽다)
원래 글을 진득하게 쓰는 편은 아니라 파일을 뒤져보면 반토막짜리 글들이 많이 굴러다닌다.
보통은 이런 글의 뒤를 잇기가 무척 어려운 것이 나는 즉흥적인 사람이라 그때 무슨 마음으로 그 글을 시작했는지 알 길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로 책 마을에 올려지는 글들은 짧은 시간에 단숨에 써내려간 글들이 대부분인데 잘 살펴보면 2페이지를 넘어가는 글들이 별로 없다.
어떤가. 내가 단순 명료한 사람이란 것이 극명하지 않은가.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이라고는 하지만 나는 원래 깊이 생각하면 편두통이 오고 진지해지지 못하는 술렁거리는 치명적이 병에 걸려있어 그럭저럭 잡문이나 써대면서 즐기는 것인데 글 쓰는 사람들의 욕심이 그러하듯이 나 역시 내 인생의 필모그래피를 만들고 싶은 약하지만 부분적 욕구가 있다.
수학은 못 했지만 분수를 알고 국어 선생님 딸답게 주제는 알고 있으니 아무리 내가 좋아한다고는 하지만 날카롭고 통렬한 비평가의 재능을 눈이 빨개지도록 질투해서 아무리 흉내를 내보아도 그 그림자도 밟지 못 할 테니 진작에 포기했고 그저 '바람'이 있다면 그나마 소재에 구애받지 않고 술김에 친한 친구에게 한 구절 들려주어도 부끄럽지 않을 짧지만 마음이 담긴 시 한 구절, 역시 원고지 열 몇 장 정도의 짧지만 하루키 식의 무국적 감수성이 흐르는 괜찮은 담백한 소설하나를 필모그래피로 갖고 싶다. 그러나 그동안 끄적거렸던 글을 컴퓨터에 담아두고 가끔씩 들춰보는데 나의 이러한 욕구와는 별개로 영 그러지 못할 듯싶다. 오히려 요즘은 우리 책 마을의 영준씨를 보면서 그 의젓함에 내 나이가 부끄럽고 대현님의 감수성을 질투하고 형진님의 치밀하고 예리한 논객으로서의 자질과 그 거침없음에 경탄을 하면서 필모그래피는커녕 점점 이러다 죽도 밥도 안 되는 책 마을 유령이 되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한 마음을 감출수가 없다.
사실 필모그래피 운운하는 건 시기상조일지도 모른다. 벌써 어떤 장르에 종속 될 필요도 없고 더 어려운 것은 생각해보니 내가 잘하는 분야가 무엇인지 아직 그것도 잘 모르겠다. 그런 건 신경 쓰지 말고 칼럼이나 제때 올리고 책장의 반도 넘기지 못한 하인리히 뷜의 책이나 끝내야 하는지도 모른다.
얼마 전 진지 드시다 말고 불쑥 아버지가 하신 말씀 때문에 홀딱 깼다.
‘요즘은 글 안 쓰냐?’
당신 뭡니까.
덧 글 1
필모그래피에 대한 생각은 영화 잡지를 보다가 최근에 개봉한 짝패라는 영화에 감독과 주연배우를 겸한 류승완 감독의 작품 필모그래피를 읽다가 든 생각이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피도 눈물도 없이
아라한 장풍대작전
주먹이 운다.
짝패
멋지다. 류승완
그런데 따찌마와 리는 누구의 작품이었나.
덧 글 2
책가지에 의욕적이고 새로운 기류의 필진이 선정되어 그 얼개를 올려주셨다.
이 지면을 통해 축하의 말씀을 드리고 태경님이 축하인사로 밀도 있는 농담도 해 주셨다.
더불어 더 부담을 드리자면 길지 않는 이 책 마을 활동에서 필모그래피가 될 수 있는 좋은 글을 남겨주셨으면 하는 바람이다.
병장 김동환 (2006/05/30 17:21:14)
선리플 후감상. 아싸.
상병 조주현 (2006/05/30 17:54:04)
부럽..
병장 안수빈 (2006/05/30 19:06:34)
[슈크림]
음.. 같은 뜻의 '바램' 과 '바람'이 공존하고 있는데.. 의미가 있는건가요?
흐응..
상병 이벌찬 (2006/05/31 08:15:46)
//바램과 바람, 조금 의미가 다르지 않나요?(아닌가?)
필로그래피, 난 포트폴리오
병장 한승훈 (2006/05/31 09:29:12)
멋지고 예쁜글 잘 읽었습니다..
병장 김동석 (2006/05/31 10:46:30)
『다찌마와 리』가 필모그래피에 없는 까닭은 '필름'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우겨봅니다.
'Music Talk'나 [Zele Park]이 칼럼이 아닌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요.
아아- 저도 보충수업 시간에 '수학의 정석' 껍데기를 씌운 '장미의 이름'을 읽고 있는데 수학선생님께서 '정석책 잠깐만 빌리자'고 뺏어갔을 때의 당황스러움이 기억납니다. 수학선생님의 그 황당하다는 표정이라니. 고등학교 들어갈 때 장래희망란에 '소설가'라고 적었던 그 어처구니 없는 치기도 생각나네요. 하지만 지금은 그저 '책마을에 재미있는 글 몇개 남겼던 사람' 정도로 기억되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요즘 칼럼을 올리지 않는 것에는 그런 이유도 있습니다.
병장 김동환 (2006/05/31 14:40:00)
수빈/
누가 전에 게시판에 썼던것 같은데 '바램'이라는 말은 잘못된 말이래요.
병장 노지훈 (2006/05/31 16:41:48)
저도 인생에 하나 정도 있었으면 하지만 과연...
병장 신현준 (2006/05/31 18:32:59)
제 개인적인 바람이기도 하지만 하지연님의 에세이집이 하나 있어면 괜찮다고 생각이 듭니다. 필모그래피보다 에세이 어떨까요?
상병 이벌찬 (2006/06/01 00:03:26)
꼭, 에세이집의 형태가 아니더라도 출판의견은 찬성!
상병 정재명 (2006/06/01 07:01:26)
당신 뭡니까.
의..
병장 안수빈 (2006/06/01 11:10:15)
동환//그러니까요. '바라다'가 원형이니까 바램이 아니라 바람이 맞는 표현이죠.
병장 김형진 (2006/06/01 12:11:52)
자아, 함께 코멘트주의자의 대열에 몸을 맡겨보아요.
병장 김태경 (2006/06/02 09:39:29)
밀도있는 농담이 뭐였는지 한참 생각했네요. 쿡쿡.
장편소설이 아니더라도 짧막한 단편 하나 쓰고 싶다는 생각은 많이 해요. 경험을 바탕으로 한 소재도 몇개 있어서 끄적거려본적도 있는데, 영 마음에 안들어서 덮어뒀었죠.
형진 : 작성글수 : 11, 코멘트 : 692
지연 : 작성글수 : 27, 코멘트 : 10
코멘트의 수로 봤을때, 지연님은 가장 반-코멘트주의자 아닐까요? 쿡쿡.
상병 정성진 (2006/06/04 13:52:25)
당신 뭡니까의 촌철살인...
아버님께서는 지극히 현실적인 대안으로
하지연님의 지극한 현실을 덮어버린것을
아직도 아파하고 계신것이 아닐런지요..
상병 송희석 (2006/06/04 16:43:07)
훗 결국은 코멘트 최고봉은 단연 저군요. 음하하하!
희석 : 작성글수 : 113 , 코멘트 : 1113
(2006/06/04 21:17:06)
음.. 작성글이나 코멘트의 갯수보다는 뭐..
누가 쓴 글이던 코멘트던 정성들여 쓴게 좋은거겠죠 하하하~
갯수는 무의미하죠.. 관리자의 양만 많고 덧!없는 덧!글처럼... (뻘줌..)
병장 이은호 (2006/06/19 18:24:00)
유령처럼 배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