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꽃의 문학산책 2-1 황민우 2006-09-17 
 병장 김민성 01-04 14:02 | HIT : 362 



 푸른꽃의 문학산책 2-1 중세, 성가극과 음유시의 탄생 황민우 2006-09-17  

 푸른꽃의 문학산책 2-1 중세, 성가극과 기사 음유시의 탄생 - 힐데가르트와 벵따도른을 중심으로



- 중세, 작가의 등장 -

 잠시 문학이 아니라 음악이야기로 가보겠습니다. (앞으로 보시겠지만, 중세는 문학과 음악이 굉장히 중요하고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음악에서 최초로 '작곡가'라고 이름이 남아있는 사람이 누구인지아십니까? 비발디? 파헬벨? 바흐? 아닙니다. 작곡 텍스트로 남아있는 최초의 인물은 바로 '힐데가르트 폰 빙엔'이라는 사제입니다. 그것도 '수녀'입니다. 이 이야기를 왜 꺼내냐면, 중세시대에 이르러 '작가'라는 사람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고 본격적인 최초의 작가로 중세에 이름을 남긴 사람이 바로 이 아줌마이기때문입니다.

 중세를 암흑기라고 부르는 이유는 로마시대와 대비되기 때문입니다. 로마는 굉장히 뛰어난 선진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었고, 전업작가가 있을정도로 예술이 꽃을 피운 시대였습니다. (천년제국이었으니) 하지만, 중세에 이르게 되면서 작가는 사라지지요. 왜냐면 저 유명한 은유 '유럽사의 진통기'라고 불리는 게르만족 이동이 시작되어 5세기부터 10세기까지의 기간들동안에는 정세가 안정될 나날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유럽의 예술과 철학은 본질적으로 '배부른 자의 여가'였기때문에 정세가 불안하면 예술이 싹 틀 수 없었습니다. 카톨릭으로 중앙집권 봉건제가 안정을 되찾는 8세기가 지나서야 이제 슬슬 문학이라는 것이 움트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로마시대에 예술이 꽃핀 시기와는 자그마치 800년의 간극이 벌어져있었고, 그 유럽의 실세를 쥐고 있는 사람들도 라틴인이 아니라 게르만이었다는 사실을 우선은 염두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라틴계와 게르만계는 일단 근본적인 문화 자체가 다릅니다. 라틴인들은 농민이었고, 게르만인들은 수렵인들이었습니다. 1장에서 설명해드렸듯이 신화는 사람들의 본질적인 삶게 관계가 있고, 수렵민의 신앙과 농민의 신앙과 신화는 본질적으로 다를수 밖에 없었습니다. 로마시대의 세네카나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들이 중세시대의 여러 문학과 매우 대조적인 이유가 바로 이런 근본적인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8 세기 이후 게르만족들은 유럽전역에 기틀을 잡고 로마인들의 유산들을 흡수해 나가기 시작합니다. 그레고리8세가 교회예배의 목적으로 '음악' 즉, 성가를 집대성하여 하나의 통일된 교회음악을 수립하려고 했던 시기가 바로 9세기~10세기 사이, 저 유명한 '그레고리안 성가'의 체제가 확립되는 시기입니다. 하지만, 그레고리안 성가는 '도미니안 선법', 그리고 '이오니안 선법', 혹은 '리디안선법'등 그 교회선법의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듯이, 원래 로마에서 불려지던 제의의 성가들을 카톨릭으로 흡수-집대성 한것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주요한 중세음악의 하나로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고, 10~11세기에 이르러서는 정식으로 이런 교회음악을 작곡하는 사람들이 등장하게 되었는데, 그 최초의 리스트에 올라간 사람이 바로 힐데가르트 폰 빙엔Hildegard Pon Bingen이라는 수녀였습니다.


- 빙엔과 교회음악, 그리고 문학과의 관계 -

 빙엔은 중세의 수녀로는 불가해할정도로 다양하고 미스테리우스한 업적을 남기고 간 사람이었습니다. (중세의 관념이나 문화를 조금 떠올려보시면, 여자가 이런 직업을 가진다는게 얼마나 파격적인지 이해하실수 있을겁니다.) 빙엔은 본질적으로 수도사이자 수녀였고, 그러면서 카발리스트이면서 허벌리스트였고 의사이면서 작곡가이고 그러면서 작가였습니다. (이 시기가 무슨 르네상스도 아니고. 먼산) 어쨌든, 그녀는 '신의 숨결이 닿는 깃털'같은 엄청나게 중요한 그레고리안 성가들을 작곡하게 되는데, 우리가 여기서 빙엔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이런 그레고리안 성가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녀의 최대업적은 성가에서 드러납니다만)

 네네, 중요한것은 거의 남아있지 않지만 그녀의 성가극들입니다. 성가극이란 중세때 발전된 독특한 문학 희곡중 하나로, 그레고리8세때 교회문화융성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시작되었고, 로마시대의 희곡들을 미사의 양식으로 흡수하면서 공연되었습니다. 

 중세 성가극은 로마희극를 본따서 그대로 가져오되, 내용은 성서와 성전에 담겨있는 내용을 민중들이 이해하기 쉬운 방법으로 각색하여 알려주는 교육용 목적이 강했습니다. 특히 성자전설은 중세인들에게 일종의 '신앙'이었기 때문에 이 성가극의 역할은 아주 중요했습니다. (성자전설은 중세에 여러 각 지역의 전설과 민담이 카톨릭과 습합되는 과정에서 발생했습니다.) 

 이 성가극은 현재 거의 남아있는 것이 없지만, 이 성가극은 나중에 서민희극으로 진화하고, 르네상스가 지나가면서 희곡, 즉 셰익스피어 같은 대가들이 출현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기반을 만들어줍니다. 왜냐면, 이 르네상스 희곡의 근원은 광대극이었고, 광대극은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중세의 전설적인 기사음유시인인 나이트하르트 폰 로이엔탈Neithard Pon Reuental이라는 사람이 뿌리가 되는 나이트하르트극이라는 중세 서민 희곡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가 알고 있는 유럽 극예술은 중세 광대극에 그 정신적 기원을 두고 있고, 광대극은 나이트하르트극에 기반을 하고 있으며 이 나이트하르트극의 요소들은 성가극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희곡과 극예술을 이해하기위해서는 성가극의 이해가 중요합니다. 

 위에서 지적해드렸지만 성가극은 원래 지식인이 서민에게 카톨릭적 교육을 위한 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만, '문맹인들'을 목적으로 하는 극이었기 때문에 굉장히 쉽고도 직설적이고 이해가 강한 제스처를 많이 사용하며, 굉장히 친숙한 금언들을 사용하였습니다. (이것이 유럽 고전 희곡의 특징이기도 하죠.) 이 부분에서 힐데가르트의 성가극은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습니다. 중세에는 서민들이 즐길수 있는 문학적 여건이 굉장히 제한되었기 때문에 이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민네의 문화  음유시의 시작

 중세 최고의 문학이라고 불리는 기사 음유시는 정확히 언제부터 꽃피웠고 그 근원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여러 중세문학역사서를 훓어보면 그 배경을 어느정도 유추할 수 가 있는데요, 여기서는 제가 공부했던 중세문학사를 바탕으로 간단히 설명해드리겠습니다.

 클로드비히 대제 이후 카롤링 왕조가 펼쳐지고, 베르됭조약과 메르센 조약으로 프랑크 왕국은 프랑스와 도이칠란트, 그리고 이탈리아로 분리됩니다. 프랑스는 서쪽에서 자리를 잡고, 도이칠란트는 중부와 동부를 차지합니다. (여기서 동부라는 것은 폴란드 지방을 말합니다.) 이것이 확립되는 시기가 대략 8~9세기 사이, 그리고 샤를마뉴 대제가 문화산업을 융성하여 여러 문화와 정치체제가 확립되는데요(일명 카롤링거 르네상스라고 부르죠) 이 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중세 로망어(중세 프랑스어를 지칭합니다. 이것은 중세 로망스에서 상세히 다루어드리겠습니다.)와 고고지독일어 (중세 독일어죠)의 경계가 방언정도에 그치고 있던 시절이고 정치, 문화체제를 거의 공유하던 시기였습니다. 

 중세는 교과서에서도 많이 들어본 쌍무적 계약관계라는 주종 봉건제도로 성립됩니다. 이것은 영주가 기사에게 토지와 병사를 주는 대신, 기사는 주군에게 충성과 보호를 약속하는 관계입니다. 이것은 중세 특유의 전통이라기보다는 다분히 게르만적 전통이 강합니다. 대표적으로 프랑크 왕국을 갈라먹은 베르됭조약의 경우, 영주가 죽으면 상속자는 토지를 균등분할한다는 게르만족 전통관례의 원리에 따라서 국가를 나눠먹은 엽기적인 경우이고, 중세는 이런 게르만 전통이 쭈욱 이어지면서 국가는 계속되는 나눠먹기로 수백개의 자그마한 나라들로 나눠지게 되는 겁니다.

 하여튼, 이러한 중세문화에는 독특한 방식이 있습니다. 영주는 기사를 먹여살리고 토지를 제공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리고 기사는 기사의 자식들을 그러한 영주의 충복인 기사로 양성해야하여 영주를 보호할 의무를 갑니다. 그래, 처음으로 1대 계약을 맺은 영주와 기사는 함께 궁정에서 머물며 국사를 돌볼것입니다. 기사는 용맹하고 사납기로(?) 이름높았을테고 그러므로서 영주를 보호하는데에 전력을 다하겠지요. 왕이 황제의 칙사로 다른 국가에 파견을 나간다던지, 외교적 임무로 자신의 영토를 비울경우, 기사는 항상 그를 호위해야했습니다. 따라서, 중세시대에 성인 남성 귀족은 거의 성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나마 영지에서 휴식을 취하는 동안도 끊임없이 중세최고의 여가였던 사냥을 즐겼기때문이지요.

 기사의 아이는 다섯살이 되면 (그도 귀족신분이기에) 궁정문화를 익히기 위하여 성으로 보내집니다. 그리고 성에서 귀족의 예절들을 배워나갑니다. 하지만 위에서 말씀드렸듯이 남자들은 '바깥일'로 바빠서 성에 거의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러면, 결국 성에 남는 사람들은 귀부인Madame과 하녀들Maid입니다. 그리고 이 어린 기사는 꽃밭 같은(!) 환경에서 다섯살부터 열다섯살까지 십년동안 궁정 예절수업을 받습니다. 

 이제 중세 기사가 귀부인을 신봉하는 이유가 조금 납득이 가시려나요? (웃음) 이에 대해서 조금 더 자세히 알려드리겠습니다. 이 어린 기사는 열다섯살이 되면 이제 스스로 생각도 하고 자아정체성을 조금씩 찾아나가기 시작하겠죠. 이때가 되면 이제 '기사수업'이라는것을 받게 됩니다. 물론 어린기사 시절에 아버지 기사와 영주에게 검술과 마상수업도 받고 사냥도 배웁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훈련'일뿐 실전은 아닙니다. 열다섯이 되면 이 어린 기사는 영주에게 간단한 갑옷과 말, 그리고 한명의 종자를 하사받습니다. 그리고 이제 본격적으로 기사가 되기 위한 수업, 즉 '편력여행-기사수업'을 떠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기사의 '편력모험'은 일종의 기사 성인식인 셈입니다. 이 편력여행을 마치면 그는 정식으로 기사의 작위를 부여받고 문장이 새겨진 휘장도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까지 편력(세상 여기저기를 떠돌며)생활을 하는 기사를 바로 '견습기사'라고 부르는 겁니다. (견습 성직자, 견습 마법사라는 판타지에서 많이 나오는 이름들이 다 여기서 유래합니다. 물론 배경은 다 다르지만)

 이제 어린 기사는 자기가 15년동안 정든 마을, 특히 10년이나 정을 주었던 궁정 여인네들을 떠나서 몇 년간 개고생의 모험속에서 삶을 깨우쳐가야하는 것입니다. 일단 그는 떠나기 전에 견습일지언정 '기사'라는 명칭을 부여받습니다. 그리고, 순례가 끝나면 돌아오리라는 기약을 남기고 기나긴 여정을 시작합니다. (처음 보는 타지의 기사를 성안으로 영접하는 것은 굉장히 호의적이고 영예로운 관례였다고 합니다. 쌩판 처음 보는 기사를 어떻게 며칠간 손님대접하면서 먹여주고 재워주냐는 의아함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마찬가지로 영주의 아들내미도 곧 저런 신세가 된다는 것을 중세 귀족들은 모두 알고 있었기에, 어떤 기사든지 성안으로 모시는 것을 자기 아들내미 모시듯이 했다고 하더군요. 기브 앤드 테이크랄까. 웃음)
 하지만 그 많은 궁정 여편네중에서 자신의 마음에 안와닿은 여인이 없을까요? 결국 견습기사는 편력시대동안 수많은 왕국의 성 안에서 연정을 나누고 마음에 이끌렸던 여인들을 그리워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사들은 여행하는 동안 자신의 자리에서 멀리 떨어진 고향, 혹은 먼 곳에 있는 타향의 여인을 그리워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마음에만 차마 담아둘 수가 없어서 표현하기 시작합니다. 그것도 '노래로'요. 자, 이것이 바로 중세 기사 음유시의 기원입니다. 먼곳의 사랑Distance Love, 자신이 그토록 오랫동안 얼굴을 맞대고 흠모하던 여인을 긴 시간동안 볼수 없는 안타까움, 이것을 노래하는 것은 '견습기사'의 운명이었습니다. 따라서 견습기사들은 편력여행을 떠나기 전에 악기를 하나씩 가져가는 것이 보통이었다고 합니다. (류트나 플룻, 페덜  바이올린족 중세악기  같은것들을요) 이리하여 기사 음유시가 탄생하게 되는거죠. 

 잠시, 기사 음유시를 접어두고 민네에 대해서 조금만 더 이야기하겠습니다. 왜냐면 이 부분은 중세 궁정 문화에서 아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견습기사가 편력을 마치고 금의환향하면 그날은 대축제가 벌어집니다. 그리고 다음날 드디어 어리숙한 견습기사의 때를 벗겨내고 정식으로 폰Pon(전투를 할 능력이 되는 가장 낮은 계급의 기사)이 되는 것입니다. 기사 서임식에서 그는 가장 중요한 세가지 맹세를 자신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주군에게 하게 됩니다. 주군은 주로 나이 많은 영주이거나 그 영주의 후계자(아들)가 보통이었습니다. 

 이제 저 유명한 기사 서임식이 시작됩니다. 영화에서 많이 보셨을겁니다. 기사는 주군 앞에서 무릎을 꿇고, 주군은 기사의 머리와 양 어깨에 검으로 가볍게 성호를 그어줍니다. 그리고 열가지 맹세를 약속받습니다. 그 열가지 맹세중에서 가장 중요한 세가지 원칙은 다음과 같습니다. 순서는 약속의 중요도(우선순위)입니다.

I. 기사는 이 자리에 서있는 자(영주)를 죽을때까지 주군으로 받들고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히 한다.

II. 기사는 힘과 노력이 닿는 한도에서 교회에 봉사할 의무가 있다.

III. 기사는 위험한 상황에서 여자들과 아이들에게 먼저 봉사해야한다. 


 이렇게 세가지입니다. 이것이 바로 중세의 민네Minne, 즉 '기사도'라고 불리는 바로 그것입니다. 이 기사도는 유럽 문화에서 아주 중요합니다. 왜냐면 이 민네의 가장 중요한 세가지 원칙은 결국 유럽의 젠틀맨 (신사)에티켓으로 발전하고, 지금의 유럽문화의 에티켓, 즉 예절의 가장 중요한 바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중세에 민네Minne라는 말이 발전하여 영어의 예절Manner이 되었다는 것은 특기할만한 사실인 것입니다. 유럽 신사들이 명예를 중요시하는 것은 첫번째, 유럽인들이 교회를 받드는 것은 두번째, 아녀자와 아이를 존중하는 것은 세번째에 기인합니다. 

 하여튼, 이런 기사 서임식이 끝나면, 기사는 자신이 평생을 봉사해야하는 세번째 대상 (첫번째는 주군, 두번째는 교회)을 지목해야합니다. 바로 여인입니다. 그 여인은 누구라도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기사는 자신이 평소에 사모하던 여인을 자신의 여인(지금은 보통 단테의 신곡에서 따온 '베아트리체'라는 표현을 즐겨 쓰죠)으로 지목하고 평생 그 여인의 이름을 드높이기 위해서 봉사해야합니다. (이 사랑은 연애적 관계가 아니라 주종적 관계이기 때문에 그 사람이 결혼한 부인이라고 상관없었습니다. 그래서 성배 이야기에서 귀네비어공주와 란슬롯의 묘한관계도 성립이 되지요. 왜냐면 란슬롯이 아더왕에게 기사서임을 받을 때 그가 봉사해야할 여인으로 아더왕의 아내인 귀네비어공주를 꼽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귀부인의 대상으로 대개 영주의 아내나 그의 딸, 혹은 조카들이 지목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기사는 평생 주군을 위해 봉사하고, 귀부인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 생활했습니다.

 기사 서임이 끝나면, 모든 귀족들이 뜰(혹은 살롱)에 모여 이 새로 폰Pon의 직위를 부여받은 기사의 편력 무훈담을 듣기를 즐겼습니다. 기사는 보통 이때 자신과 함게한 종자를 불러와 악기를 연주하게 하고, 자신의 무용담과 더불어 그리워한 이곳 여인에 대한 노래를 곁들여 불렀습니다. 이것이 바로 중세문학, 바로 '기사음유시'의 탄생입니다.

 기사는 가끔 자신의 여행중의 느낌을 짤막한 연정시로 읊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런 아주 짧은 '노래형식'의 시문학을 샹송이라고 불렀습니다. 보시다시피 이 샹송은 프랑스에서 시작되었으며 (뒤에서 말씀드리겠지만, 기사 음유시인은 프랑스에서 시작했습니다.) 후에 이 샹송은 현재 프랑스의 가곡(샹송)의 기원이 됩니다. 라이Lais는 짤막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노래를 말합니다. 현대식으로 말하자면 단편소설정도의 분량의 이야기이지요. 저 유명한 『인동덩굴』이나 『여우 이야기』, 『요넥』, 『갱가모르』등이 여기에 속합니다. 그리고 하나의 우여곡절의 긴 이야기를 역시나 긴 노래로 불렀던 장시를 로망스라고 불렀지요. (이에 대해서는 '로망스'장에서 상세히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투르바두르와 투르베르, 프랑스 음유시인들

11 세기부터 프로방스지방 주위에서 최초로 이런 기사 음유시인들이 활동하게 됩니다. 왜 하필이면 프로방스 지방이냐? 라는 질문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으로 답변을 드리자면(이부분에 대한 내용이 나와있는 책을 아직 구하지 못해서..땀) 그 당시 프로방스는 갈리아지방에 속해있지 않았고, '프로방스 공국'이라는 엄연한 독립국가(제국에는 속해있었음)로 힘을 발휘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정치적 안정속에서 프로방스지방은 10~13세기까지 어마어마한 민요들이 번성하게 됩니다. (결국 12세기에 프랑스로 편입되지만) 그래서 지금도 프랑스 민요 = 프로방스 민요라는 말이 있을정도로 프로방스의 민요는 굉장한 예술성을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이에 대해 궁금하신 분은 마틴 콘소토Martin consoto라는 중세음악 밴드가 발매한 프로방스 중세음악 앨범이 시중에 나와있으니 한번 들어보시길)

 이런 뛰어난 음악적 배경을 가지고 그들이 중세 장원제도에 편입되는 10~12세기 사이에 남부의 투르바두르Tourbadour(말 그대로 여행을 말하는자Tour + Bader => 여행을 말하다)들이 등장합니다. 이 혁신적인 최첨단 궁정문화는 편력기사들의 본질적인 '방랑성'에 의해서 백년도 못되어 전 유럽에 퍼지게 됩니다. 북부에서는 투르베르라는 기사시인들이 등장하기도 하죠. 이 초기 투르바두르의 명인이 있었으니, 지금도 프랑스 시문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연애시인 벵따도른Ventadorn입니다.

 그는 류트의 대가로 알려져 있으며, 고요하고 슬픈 류트음색에다가 자신의 연애감정을 가감없이 굉장히 낭만적이고 감성적으로 노래했다고 알려져있습니다. 그의 대표적인 연애시인 「종달새는 슬피 울고」라는 노래는 지금까지도 프랑스에서 널리 사랑받고 있는 불후의 명곡이라고 합니다. (아, 정말 아쉽게도 이 벵따도른의 음반과 시가 집에 있기 때문에 원문과 번역본을 보여드릴 수가 없다는 것이 참 아쉽습니다.) 

 하여튼, 중요한 것은 이런 기사시인이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등장했고, '인간의 감정을 노래(시)의 형식으로 표현하는' 시문학이라는것이 궁정문화에서 꽃피기 시작하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거의 90%이상이 연애감정과 모험에 대한 방랑의 우수를 담고 있기 때문에 '중세문학은 세속문학'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쓰기도 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2부의 마지막 장에서 비판적으로 검토해 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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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편을 즈음하여 황민우씨 연재를 못 구했군요.

 앞편은 다 지워져 버려서...

 원래 예정대로라면 다음달이 연재완료일텐데...아쉽군요~  


 병장 조주현 
 황민우씨 연재는 워낙 들쭉날쭉해서..(먼산) 
 전편을 다 가지고있지만, 민우씨가 안올리면 나도 안올려~힝 01-04   

 병장 김민성 
 어디까지가 연재 마지막이었죠? 01-04   

 병장 조주현 
 호오, 난 1-4까지밖에 없네...다른데 저장했나....(먼산) 01-04   

 병장 황민우 
 조주현씨// 이거 텍스트는 저한테 단 하나도 없어요. 다지워놔서.. 
 일단, 소논문식의 칼럼 하나 김동석의 부탁으로 그거 쓰느라 바빴고, 편입준비에 문학동네장편소설 공모준비에 이것저것때문에 많이 바빴고 귀찮았다고 말씀드리고 싶.... 01-08   

 병장 조주현 
[ 귀찮았다고 말씀드리고] 이부분이 가장 신뢰도 높다.(먼산) 0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