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08-13 08:08:38)
병장 황민우
푸른꽃의 문학산책 1-4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
강좌가 늦어서 죄송합니다. 거의 한달간 침체기 및 개인적인 사정으로 강좌를 쉬었던 점 사과드립니다. 앞으로 매주 꾸준히 올릴수 있도록 노력해보겠습니다. 사실 강좌를 중단하려고 생각도 해봤지만, 아무래도 이글을 읽고 도움 되시는 분이 계신것 같아서, 일단은 끝까지 써나가보렵니다. 그럼 좋은 하루 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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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치와 문예비평
문학의 역사는 무엇의 역사라고 생각하십니까? 예술의 발전? 인류의 발전과 더불어 받아가는 인류의 고통을 표현하는 과정? 아니면 M할아범의 말처럼 착취와 억압에 대한 투쟁의 역사? (사적 유물론엔 그다지 신용도 안가고 관심도 없지만 하여튼) 물론 이런 '역사의식'이라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사관이 개입되는 것이며, 중요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한 학문분야를 공부한다는데에 있어서 그 학문의 '역사'를 살펴본다는 것은 단지, 어떤 흐름에 의해서 사조와 시대의 흐름이 펼쳐지느냐가 관건이 아니라, '그 학문의 역사는 지금까지 흘러오면서 대두되는 핵심쟁점이 무엇이냐'라는 것이 진정한 '역사'의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M할아범은 그래서 인간의 역사는 변증법에 입각한 사적유물론의 시각으로 '계급 투쟁의 역사'라고 지적했고, 저어 먼 나라 프로이센의 군인철학가였던 클라우제비츠는 '인간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고 말했던 것이죠.
그럼 문학의 역사는 무엇의 역사일까요? 루카치는 이 문예(즉 예술)의 역사에 대해서 '총체성'이라는 굉장히 충격적인 질문을 던져놓으므로써, 기존 문예이론을 통째로 뒤집었고, 동시에 20세기에는 왠만한 문예이론도 그 영향력에서 벗어날수도 없을정도로 거대한 방향을 제시하고 있는것에 분명합니다. 즉 문학예술의 정신을 추적하는 '역사관'이 담긴 문예이론을 내놓은 것입니다.
지금까지 문학의 역사라함은, 대개 고대의 원시종합예술(즉 제의적 양식)에서 파생되어 중세 기사도문학으로 융성하고, 피카레스크와 노벨라에 의해서 스페인에서 소설이 발전하고 중세 기사들에 의해서 시문학이 발달되어 여러갈래로 퍼져 지금에 이른다가 가장 일반적인 문예사였습니다. (해봐야 19세기에 시작된 이론이지만) 장르의 갈래를 피상적으로 추척하고 있었죠. 하지만 루카치는 이제 이 예술의 발전은 '총체성의 파괴과정'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문예이론을 펴 나갑니다. 이것이 바로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에 모두 담겨있습니다.
- 소설의 이론, 총체성의 문학 -
'삼국지를 세번 읽지 않은 사람과 세상을 이야기하지 말라'는 동양의 격언이 있습니다. '크리스찬이 성서를 읽지 않는것은 용서가 되지만, 판타지 매니아가 반지의 제왕을 읽지 않는것은 용납이 안된다.'라는 이영도씨의 말 (솔직히 조금 오바같긴 하지만)에는 한 텍스트가 그 장르에 끼치는 지대한 영향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문예이론계에서도 마찬가지의 것이 적용됩니다. 물론 루시엥 골드만이나 로만 야콥슨, 쉬클롭스키나 블라디미르 프로프등의 많은 주요한 문예이론가가 존재하지만 현재까지도 소설, 즉 서사문학의 장르비평에 있어서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만큼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는 텍스트는 가장 최근에 빛을 보기 시작한 츠베탕 토도로프의 신비평정도밖에 없을것 같습니다. 100페이지도 안되는 짧은 논문이지만, 이 안에는 인류가 창조한 최대의 유산중 하나인 서사문학의 정수를 추적하고 있습니다.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은 아주 유명한 다음과 같은 첫문장으로 시작합니다.
"별이 총총이 떠있는 하늘만을 바라보며 나아갈 길을 알 수 있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 시대인가."
이 첫 문장으로 루카치는 이미 이 책에서 하고자하는 말을 모두 함축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소설의 이론은 즉 '서사의 이론'이고, 서사의 이론은 '총체성'에서 시작합니다. 이제 이 문장 하나를 가지고 루카치 문예이론의 핵심, '서사'와 '총체성' 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루카치는 예술은 신화의 산물이라고 지적합니다. 신화(즉 주술성)가 융성하면서 인류는 신화적 에너지를 내림시키기 위해서 주술적, 유희적 목적으로 문예를 해왔으며, 그러므로써 삶에 신화가 밀착될 수 있었다고 지적합니다. 문학은 '언어의 예술'임에도 불구하고 유사시대 이전부터 서사가 존재했다는 놀라운 사실에서 우리는 문학의 기원이 '신화'였음을 쉽게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가장 오래된 서사문학의 유산을 지적하면서 문학의 본질은 '신화'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가늠할 수 있습니다.
루카치는 제가 1-1~3장까지 언급했던 길가메시나 베오울프, 그리고 그리스신화등을 언급하면서 '서사시'의 예술형태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제가 이전 강좌에서 말씀드렸듯이 신화의 시대에는 영웅과 신들이 인간들과 함께 생활합니다. 신은 인간을 창조하고 운명을 관장하며, 영웅은 신과 인간 사이에서 메신저 노릇을 하며 양쪽을 돌보고, 인간은 신들의 운명에 순응하며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즉 인간과 신과 영웅이 모두 하나의 세계에 혼열일체가 되어 완벽한 유토피아를 형성하고 살아갑니다. 이 시대에 디스토피아는 없습니다. 인류의 멸망에 대해 이야기가 나올지언정, 그것은 신들의 주관하에 새로운 세상의 재건을 위한 전주곡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신의 섭리였고, 인류의 불행은 영웅들이 막아주려 했습니다. 이런 인간과 신과 영웅의 이야기가 '지구Gaia'위에서 벌어지는 관계들, 이것을 읊어내는 이야기. 이것이 바로 영웅서사시, 에픽Epic입니다.
보통 에픽Epic(D&D나 일련은 TRPG매니아가 계시다면 이 에픽이란 말이 익숙하시겠지만)이라고 말한다면, 우리말로 '영웅 서사시'라고 번역이 됩니다. 하지만, 이렇게 영웅서사시라고 번역되면 영웅이 등장하는 모든 서사시를 지칭할 위험성을 안게 됩니다. 그렇게 된다면, 아더왕이야기도 영웅서사시가 되는 것이고, 중세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이바인, 파르치팔도 모두 영웅서사시가 되겠지요. 하지만, 영웅서사시Epic는 '영웅들이 주가 되는 서사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여기에 대해서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유럽의 역사에 등장하는 에픽문학Epic Literature은 단지 호메로스의 두 서사시, 즉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밖에 없습니다. 베르길리우스의 아에네이드가 영웅서사시의 위격을 지니고 있기는 하지만, 인간의 역사에 조금 더 근접해있습니다. 루카치의 소설이론에서 이 에픽개념은 아주 중요합니다.
에픽은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밖에 없다고 위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이제 그 이유에 대해서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에픽은 말씀드린 바와같이 '신화', 즉 인간과 신과 영웅이 한 세계안에서 정당한 이유로(톨킨의 용어로는 내재적 리얼리티라고 합니다) 함께 살아가고 영향을 주고받습니다. (신이 인간에게 일방적인 영향을 줄거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헤르마프로디투스에피소드나 아스클레피오스 이야기를 보면 인간이 신에게 미치는 영향력도 만만치 않았음을 알수 있습니다.)
인간과 신과 영웅이 혼연일체가 되어 살아가는 세상의 '이야기'는 일리아드에서 가장 잘 보여집니다. 일리아드는 신들의 사회에서 벌어지는 조그만 불화, 저 유명한 '헬레네의 황금사과'의 신들이 쪼잔한 다툼이 어떻게 두 국가의 대전쟁과 한 제국의 명망을 가져오는지를 노래하는 서사시입니다.
여기서 아폴론은 죄를 짓고 2년간 인간의 '노예'로 일하는 형벌을 받기도 하고, 아테나는 트로이 함락에 도움을 주기도 합니다. 신들의 자식이라 불리는 아킬레우스와 오디세우스같은 영웅들은 이 서사시의 '주인공'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Epic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하지만 영웅들과 엮이는 인간들 예를들면 헥토르나 헬레네같은 인가들은 영웅들의 (특히 죽음에 대해)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즉, 일리아드는 트로이전쟁이라는 인간사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그 이야기의 '신화적 근거'와 영향관계를 가진 복잡미묘한 하나의 '세계관'속에서 벌어지는, 우리의 시각으로보자면 일종의 '판타지소설'인 셈입니다.
자, 여기서 드디어 루카치의 핵심개념이라고 볼 수 있는 '총체성'이라는 개념이 등장합니다. 소설이나 서사문학에 등장하는 한 이야기속에는 인류자아Ego뿐만이 아니라 초자아인 영웅Superego과 신Nous이 하나의 '일관된 당위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세상, 그것을 루카치는 총화된 세상이라고 정의내렸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총화된 세상을 노래하는 성격을 '총체성'이라고 말합니다. 특히나 신과 영웅과 인류가 모두 하나의 정당한 내러티브에 의해서 세계관을 구축하고 그 속에서 생기는 총체성의 이야기를 노래하는 서사시, 이것을 루카치는 '에픽'이라고 정의합니다. 에픽문학에서는 인간이 신의 계시를 받아 행동하고 그 행동이 '영웅적 면모'로 비추어진다든지, '신들을 우연히 만나 복을 받는등'의 이야기들이 전혀 어색하지가 않습니다. 왜냐면 그 세계는 그렇게 '총화된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총체성의 문학, 즉 '신화적 내러티브'입니다.
그렇다면 왜 똑같은 영웅들과 신들의 이야기가 등장하는 베르길리우스의 서사시는 '에픽'이 될수 없는가? 그것은 그리스시대의 '총체성'이 이미 베르길리우스시대부터는 '파괴'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베르길리우스의 아에네이드에서는 아이네이아스가 트로이전쟁 이후, 오디세우스와 헤어지는 내용부터 추격에 쫓겨 롬바르디아에 정착하는 내용, 그리고 거기서 로마를 건국하는 내용까지 순차적이고 일관성있게 전개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에네이드는 이미 '인간의 역사의 개벽'에 대해서 노래하고 있고, 그 원천을 '영웅'에서 찾고 있습니다. 그리고 영웅은 '영웅들의 전쟁에서 공훈을 세운' 역시나 역사적 배경을 토대로 하고 있으며, 영웅의 일대기를 그리면서 그것을 인간의 역사와 엮으려는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즉, 아에네이드에는 '신들의 사회'가 빠져버리는 것입니다. 아에네이드에도 역시 신들의 개입이 등장하지만 그것은 지극히 미미한것이지, 트로이전쟁처럼 결정적인 단서는 되지 않습니다. 즉, 베르길리우스시대부터는 이제 신들의 사회가 인간의 서사에서 서서히, 그러나 분명히 밀려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네, 로마시대에 이르러서는 이미 그리스 에픽에서 보여지는 '총체성'이 파괴되기 시작하는 겁니다.
중세로 가볼까요? 중세의 가장 대표적인 영웅물, 즉 영웅서사시라고 오해하고 있는 '아더왕 이야기'를 보겠습니다. 아더왕은 전설의 검 엑스칼리버와 호수의 멀린을 만나면서 아발론에서 왕국을 세우고 잉글랜드의 왕으로 추대되었다는 '영웅전설'이 있지요. 여기서도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신적 자질을 가진 인물들이 속속 등장합니다. 신비의 마법사 멀린, 괴력의 사나이 호수의 기사 란슬롯, 천재적인 순박함으로 모든걸 압도하는 성배의 기사 파르치발, 용맹의 극치인 가웨인... 하지만 이들은 이미 신들의 힘에서 떨어져나간 인간들의 면모를 보여줍니다. 아더왕 이야기에는 어디에도 신성의 개입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순수한 영웅들의 이야기입니다. 이제 영웅들은 인간들을 구원해야하지만, 이미 신성에서는 결별을 한것입니다.
루카치는 다음과 같은 놀라운 사실을 지적합니다. 신화의 시대(그러니까 그리스시대까지를 말합니다)에 문예가 처음 등장했을때는 완전한 총화속에서 총체성이 빛을 발하는 뛰어난 정신적 유토피아의 여정을 그려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역사가 진행될수록 그에 수반되는 문학은 점차 그리스적 총체성에서 분리되고 파괴되면서, 문예가 발전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예전에 제가 잠깐 '번갯불에 콩볶아먹듯 훑어보는 유럽문학사'라는 글에서 언급했던 내용입니다.) 즉 문학의 역사는 '총체성 상실의 역사'라는 충격적인 이론을 제시합니다.
그리스시대의 총체성은 중세에 들어오면서 '신'에 의해서 파괴됩니다. 이제 중세문학에서 신은 인간과 영웅이 범접할수 없는 아득한 경지로 분리됩니다. 아더왕 이야기에서도 성배의 파르치팔이나 성령의 갤러해드가 가히 영웅을 뛰어넘는 신적인 자질을 가진 기사들이지만, 결국 그들도 신의 은총에 '귀속'된다는 종속적이고 일방적인 관계로 드러남에 따라 중세시대의 모든 문학의 중요한 특징인 '신에게로의 구도의 길', '신의 은총'이라는 모토를 보여줍니다. 이 중세문학의 두가지 특질은 이미 서사문학이 '신과 인간-영웅의 관계가 횡적인 총체적 관계에서 상하 권력적 관계'로 이행되었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중세문학에서 신은 인간에게 압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인간과 영웅의 운명은 모두 하나님이라 불리는 신이 주관합니다. 인간과 신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신의 섭리에서 벗어날수 없으며, 그를 바라볼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신은 서사문학에 있어서 내러티브적으로 중요한 요소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중세문학에서 신이 빠지면 대체 무엇이 남을까요?)
하지만 중세가 끝나고 르네상스와 바로크시대에 이르르면서 '인문주의' 즉 인간에 대한 보편이성이 발견되므로서 비로소 인간은 신들의 사회에서 '결별'합니다. 영웅도 '필요없습니다.' 이제 인간은 스스로가 신의 은총이 없이도 영웅이 될수 있었고, 스스로 모든 것을 해낼 수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초서의 켄터베리 이야기나 페트라르카의 칸초니에레,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이라는 인문학3부작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이제 총체성 파괴에서 더 나아가 총체성 상실로 이행되는 겁니다. 이제 서사문학에서 신은 사라집니다. 영웅은 인간들 스스로가 되버립니다. 켄터베리 이야기에 등장하는 'A Knight Tale'은 '기사 윌리엄'으로 각색되어 더욱 유명한데, 여기서는 인간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는 상에 대해서 잘 보여주고도 있습니다. (물론 내용은 조금 다르지만. 웃음)
하지만 신이 인간에게서 떠나면서 가장 중요한 저주를 던져두고 갔으니, 그것이 바로 '죽음'입니다. 죽음은 인류의 영원한 테마입니다. 중세때도 죽음에 대한 굉장한 두려움이 있었죠. 그래서 '메멘토모리Memento Mori죽음을 기억하라'라는 경구까지 집집마다 걸어두었으니까요. 하지만 이 중세의 죽음은 교부들과 교회의 은총으로 극복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교회마저 인간의 삶에서 떠나갔으니, 죽음은 직접적인 문제로 드러났습니다. 신의 결별로 인한 인간의 절망, 바로크문학은 바로 이것을 그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바로크는 비관적 색채로 출발했습니다.)
그리고 계몽주의에서는 보편이성의 극인 '과학'의 발명으로 인간 스스로 자립한다는 독단성을 발휘합니다. 이시대의 '모험소설', '과학소설'들을 읽어보면 인간은 자력으로 신에 버금가는 '창조'의 지위까지 올라가려 하고 있습니다. 이제 신도 영웅도 필요없는 인간 스스로의 자립을 원합니다. 총체성은 완전히 상실된 문학입니다. 리얼리즘에 오게되면 이제 문학에서 신성과 영웅적 면모는 모두 소거되고 '인간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추고 되죠. 이렇게 문학의 역사는 바로 '총체성 상실'의 역사에 다름 아니라는것을 루카치는 '소설의 이론'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의 '소설의 이론' 가장 첫 문장에서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별이 총총이 떠있는 하늘만을 바라보며 나아갈 길을 알 수 있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 시대인가."
별은 신성(신들의 섭리)를 말합니다. 신들이 보낸 여행자들을 위한 길잡이지요. 그러므로 별을 보고 자신의 길을 찾는 사람은 신에게 자신을 맡기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러므로해서 나는 그들(별 - 신과의 교감 - 즉 총체성)의 도움으로 영웅의 도약을 할수 있고 길을 잡을 수 있는 행복함에 젖을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시대는 그야말로 '총체성'의 시대입니다. 그리스문화처럼요.
하지만 우리는 어떻습니까? 별이 총총이 떠있는 하늘을 보고, 별자리의 운행을 생각하여 지금이 몇시인지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것은 현대의 우리들의 자화상입니다. 신들로부터 결별한 인간들의 '상실의 세기' 루카치는 이 단 한문장으로 총체성의 모든것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 총체성과 현대문학 -
루카치는 19세기~20세기 소설은 그야말로 총체성 상실과 인간방황이 문학의 영원한 테마라고 지적합니다. 그는 '돈키호테형' 문학과 '조이스형'문학으로 분류하여 인간의 총체성 상실의 불안감이 내적으로 침투된다고 지적합니다.
돈키호테형은 자신에게서 떠나간 총체성을 스스로 '복구하기위해서' 세상을 변화시키려 하는 유형입니다. 자신은 총체성을 원하지만 (돈키호테 데 라만차는 본질적으로 중세-신화적 판타지를 안고 자신에게 주어진 환상적 총체성을 복원하려고 기사작위를 붙이고 무모한 모험을 떠납니다.) 세상의 리얼리티는 이를 부정하려고 하는 성격으로 난관에 부딪힙니다. 따라서 돈키호테형은 세상과 자아의 괴리에 대해서 굉장한 천착을 하는 경향을 보여줍니다.
둘째는 조이스형으로, 결국 외부와의 소통을 통한 총체성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때문에 '자아의 분열을 통한 복구', 즉 소설기법으로는 '의식의 흐름'을 이용하여 내적 총체성을 획득하려는 시도를 시작합니다. 결국 후자의 방법론은 모더니즘 소설로 이행되면서 '내적 총체성'을 얻으려고 많은 작가들이 시도를 했습니다. 최인훈의 '광장'역시 이러한 내적 총체성을 획득하려고 한 한 인간의 고뇌를 그리고 있으며, 카프카는 이 두가지 양상이 모두 보여지는 매우 독특한 작가입니다. 일련의 공포소설들 역시 이러한 조이스적 내러티브를 따라는 작품들이 적지 않습니다. 따라서 20세기 문학은 총체성 상실의 궁극이라고 볼 수 있으며, '사소설'과 프랑스처럼 '개인주의소설'이 발달할수 밖에 없는 이유도 이렇게 이미 외적 여건으로 산산히 파괴된 총체성의 내러티브는 '개인으로 수렴할 수 밖에'없었기 때문입니다.
루카치의 총체성은 이렇게 문학의 역사를 '상실의 역사'로 상정하므로서 현대문학의 흐름까지의 '정신적 여정'을 추적하는 매우 설득력있는 호소를 하고 있는 셈입니다.
료타르가 지적한 '위대한 이야기(서사)는 죽었다.The Great Narative is dead"역시 루카치가 말한 에픽적 총체성이 상실되는 현대의 소설들을 단적으로 표현한 말에 다름 아닐것입니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철학사상도 해체의 시기로 나아가기 시작했고, 문학은 더이상의 총체성은 보이지 않을것만 같았습니다.
이렇게 총체성상실이 극단으로 치닫는 20세기에 문학은 자아의 내적 총체성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영국의 한 교수가 이상한 소설을 하나 들고 나옵니다. 이 소설은 그저 '옛날 이야기'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옛날이야기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앨리스처럼 중세부터 내려오는 우화들의 집합처럼 보였지만 무언가 당위적이고 당연한 인과관계는 마치 신화를 읽는듯 했습니다. 그래서 그 이야기는 그렇게 매력적일수가 없었습니다. 소설이 출간되자마자 이 이야기는 전세계적으로 퍼져나갔고, 사람들은 이 소설을 그리스 로마신화 읽듯이 읽어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그 책은 단숨에 세계적인 인기를 끌기 시작했고 그 소설을 쓴 교수는 세계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했습니다. 그 바로 현대 판타지의 아버지, 천재작가 존 로널드 류얼 톨킨이고 그 작품은 바로 '호비트'였습니다.
톨킨은 그의 소설들을 써내려가면서 '요정이야기Faerie Tale'에 대한 자신의 문학론을 폈고, 그것은 그의 걸작 논문집인 'On Faerie Stories'와 'On Faerie End'에 모두 함축되어있습니다. (이번에 나들이 나갔다와서 기회가 되면 한번 올려보도록 할게요.) 그는 문학으로서의 '환상'과 더불어 '회복'과 '도피'의 문학으로서 서사를 피력했습니다. 그의 논조는 관점은 조금 다를 지언정 루카치의 '총체성'의 문학과 너무도 유사한점이 많기때문에 제가 루카치르 ㄹ언급할때 빼놓지 않고 말하는 부분이 바로 톨킨의 이 부분입니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챕터7 - 20세기 문학'의 '톨킨' 파트에서 다시 한번 자세히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여기서는 톨킨의 소설들이 루카치의 '총체성'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 정도만 지적하겠습니다.
- 그렇다면 왜 루카치인가 -
자, 이것이 제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왜 1부인 '신화의 시대'에 루카치를 그것도 가장 마지막에 이야기하는가. 루카치의 문예이론은 '신화'의 노스텔지어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그 신화적 총체성은 바로 '정신의 유토피아를 찾아가는 즐거운 여정'이라고 표현하고 있고, 그것은 신화시대에는 여전히 가능했던 사실입니다. 하지만 20세기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라 불리는 해체의 시대, 극단의 시대인 지금 우리는 자아마저 해체되고 타자마자 해체되는 불확실성의 시대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은 해체의 문학으로 말할 수 있고, 그것은 이제 더이상 쪼개질수 없는 극단까지 몰아부쳐졌습니다. 이 완전한 空이후의 문학은 무엇인가라고 문예이론가들이 현재의 문학을 진단했을때, 등장하는 '초신화학'이라는 이 키워드는 사실 루카치의 '총체성'에 기반하고 있는 담론들입니다. 해체뒤의 복원이 앞으로의 문예이론과 문예비평, 또는 서사문학이 진단해야할 문제라고 한다면, 초신화학으로의 '통합, 혹은 복원'이라는 과제는 루카치의 '총체성'으로 가능할수 있습니다. 왜냐면 완전히 해체뒤에 복원은 '조립'의 형태가 아니라 '총화'의 형태가 훨씬 빠르고 인과적이기때문입니다. 바위가 해체되서 돌가루가 되었는데, 이것을 다시 돌모양으로 이어붙여 조립하는것보다는, 바위가루를 반죽하여 새로 '총화'시키는 '초신화'(신화를 뛰어넘는 신화)의 대안이 필요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르케스와 살만루시디를 위시한 20세기 후반의 제3세계 작가들은 이러한 경지를 개척해나가고 있습니다. (그 이외에는 거의 보이지 않지만) 이것은 당연히 자아(주축)의 위치에 있는 유럽인들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과제입니다. 따라서 자기의 정체성이 담겨있는 뿌리를 찾아가는 문학,(이것은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와는 전혀 다른것입니다.) 그리고 그 뿌리를 '총화하여 복원하려는' 문학이 아마도 제 생각에는 포스트모더니즘 이후의 문학이 가야할 길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이점에서, 지금 소설을 읽는 우리에게 여전히 루카치의 '총체성'은 유효합니다.
병장 정진권 (2006/08/13 08:33:37)
잘읽었습니다.
병장 송희석 (2006/08/13 09:07:05)
하하. 결론이 저하고 비슷해요. 맞다니까요. '해체'시키고 새로 '복원'시켜야죠. 다만 전 아직까지 그 '복원'의 수단을 못찾았을뿐이에요. 쳇. 지금 글하나 준비하고 있는데 마지막이 비슷하네.
병장 황민우 (2006/08/13 09:20:02)
희석님// 복원의 수단에 대해서는 7장인 '로스트제너레이션, 휴머니즘을 말하다'의 '톨킨 파트'에서 설명해드릴겁니다. 아마 내년 1월쯤 될거같은데.. 쿠득쿠득.. 못보실듯.. (먼산)
병장 송희석 (2006/08/13 09:34:56)
민우/ 아마도 '문학'에서'만' 복원이겠죠. 쿠쿠. 전 모든'존재'에 대한 '복원'이라구요. 흐흐.
병장 엄보운 (2006/08/13 14:07:54)
병장 황민우/ 민우 씨 질문. '베르길리우스의 서사시'에서 '중세의 아더왕 이야기'로 넘어가는 부분에서, 기독교의 팽창이라는 외부 교란 작용을 지나치게 낮게 평가한 것은 아닐까요? 루카치의 '총체성 감소'라는 일관적인 설명은 인간사에 벌어지는 수많은 상호작용들, 예를 들어 이러한 특정 종교의 수용까지도 포함하고 있는 넓은 개념입니까? 만약 그렇다면, 이것은 단순히 문예 이론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성질이 아닐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병장 황민우 (2006/08/13 14:22:11)
보운님// 총체성은 인가의 역사와 문예사상사를 모두 아우르는 굉장히 포괄적인 개념입니다. 그리고 루카치는 이런 인간 역사와 사상사의 복잡한 상호작용과 누스Nous와 로고스Logos의 권력싸움은 결국 인류의 역사를 '총체성 상실의 역사'로 끌고 갔다고 지적하죠.
물론 루카치의 총체성 개념은 단순히 문예이론으로만 받아들이기 애매할수도 있지만, 문학 이론은 충분히 이런 인류역사속의 '총체성상실'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지요. 예술이론과 미학이론은 근본적으로 '인간의 사상과 역사철학을 대표하는 시금석'이라는 모토를 달고 있으니까요.
병장 엄보운 (2006/08/13 14:29:21)
병장 황민우/ 역시 그렇군요. 읽으면서 '어어. 이거 위험한데?'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루카치의 그 부분 편향에 대해서는 좀 더 알아봐야 겠군요.
예술이론이 사상과 철학을 대표한다라는 진술에는 동의하지만, 그것의 기반으로 특정 사상에 경도된 집필가의 세계관이 흐르는 경우는 그러한 필터를 염두해두고 접근하는 것이 옳은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제 생각에는 루카치의 이론을 문예이론'만'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이 세상 그 어떤 이론이 독립적으로 수용 가능하겠냐만은.)
좋은 글, 좋은 답변 감사합니다.
병장 조주현 (2006/08/14 09:17:43)
올라왔군요.
문학론은 정말 재미있어요. 신기하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