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 밥
폴 1991년산 티코
밥 1999년산 마티즈
5년간 몰았던 폴은 상당히 터프한 수컷 이었다.
기계에 성별이 어디 있냐고 물으면 딱히 설명할 길은 없지만 시동을 걸고 엑셀레이터를 밟다보면 확실히 이 녀석은 길들이기 힘든 남자에 가까운 속성을 보인다. 그래서 애칭이 폴이었다.
폴은 고등학교 시절 나의 별명이었는데 혹시 워낙 오래돼서 아시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다. 이상한 나라의 폴이라고 딱부리가 나오고 미나가 잡혀 있는 마왕의 성으로 폴이 찾아가는데 마왕의 부하로 버섯돌이가 나와 폴을 사사건건 간섭하고 ‘분하다 두고 보자’ 로 끝맺는 뭐 그런 만화가 있다. 왜 이상한 나라의 폴 인고 하니 내가 이상했다는 얘기다.
졸업 이후로 착실히 사회생활을 하면서 잊혀진 이 별명을 티코에게 물려준 것인데 그만큼 이 녀석은 나의 속을 무던히도 썩였다. 이 녀석이 말썽 많은 녀석이 된 것은 그 전주인 탓이 큰데 어디 회사 영업사원이었던 그는 차를 너무 험하게 몰았고 여기 저기 긁혀서 얘가 삐딱해 질 수밖에 없었던 아픈 과거가 있었다.
잔 고장은 말할 것도 없고 어찌나 소음이 심한지 내가 지나가면 다들 튜닝한 스포츠가가 지나가는 줄 알고 내다볼 정도였다. 엔진이 낡아서 그렇다는 소리를 듣고 어떻게 손봐주려고 물어물어 엔진 수리하는 사람을 찾아가 거대한 기계에 몸을 해체해 엔진세척을 해도 몇 일 조용하더니 똑 같아졌다. 결국 두 손 두발 다 들고 이 녀석이 그동안 쌓였던 한을 나에게 푸는 거라 생각하고 내가 다 받아주어야겠다고 포기를 했다.
그렇게 5년을 같이 동거동락 했는데 신기하게도 자잘한 말썽은 부려도 꼼짝없이 나를 골탕 먹이는 엄청난 짓은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워낙 낡았던 차체라 어디 긁히는 정도로는 눈도 꿈쩍하지 않았는데 중고차 타면 그렇다는 중고차 법칙에 따라 이래저래 카센터에 갖다 바친 돈을 모으면 웬만한 차한대 뽑지 않았을까 한다.
그러다 운전 5년차에 기어이 사고가 났다.
시골도로를 달리고 있었는데 무더운 여름 에어컨을 켜느라 속도도 못 내고 겔겔 기어가는데 갑자기 반대편 차선 버스 뒤에서 꼬마하나가 번개처럼 뛰어나와 차에 부딪혀 버린 것이다. 급브레이크를 밟았지만 꼬마는 1m 쯤 붕 날았고 나는 본능적으로 차에서 내려 병원 안 간다고 울고불고 하는 꼬마를 차에 던져 넣고 냅다 병원으로 날랐다. 엑스레이 찍고 꼬마 부모님 연락해 병원으로 오게 하고 보험회사에 전화를 했다.
다행히 큰 부상은 없었고 꼬마는 팔에 금이 가서 깁스를 하는 진단 3주가 나왔다.
부모의 보호가 필요한 어린꼬마였고 무단횡단이었기 때문에 그쪽 과실이 80이고 나의 과실이 20이었지만 어쨌건 눈물이 말라 꼬질꼬질해진 얼굴의 꼬마를 보니 가슴이 너무 아프고 한동안 기분이 안 좋았다. 보험아저씨가 그러지 말라고 했지만 맛있는 거 사주라고 20만원을 봉투에 넣어 부모에게 주고 한달정도는 운전대를 잡을 수가 없어 사무실의 우리 동네에 살던 모 중위가 나의 운전수가 되어주었다.
이토록 아픈 위기의 순간을 이기지 못하고 우리는 헤어졌다.
차를 바꾸라는 부모님의 압박도 심했고 내가 녀석을 볼 때마다 그 몸서리치는 기억이 떠올라 견디기가 어려웠다. 그렇지만 좁은 시내에서 돌아다니게 될 그 녀석을 보면 더 마음이 미어질 것 같아 러시아로 가는 배에 태웠다. 딜러가 말한 상태가 좋기 때문에 러시아에 가서 오래 동안 사랑받을 수 있을 것이란 말을 위안으로 삼았다.
그렇게 폴과 헤어지고 지금의 마티즈인 밥을 만났다. ‘밥’이란 이름은 밥 딜런에 대한 오마쥬같은 것인데 나는 이 영감님을 좋아한다. 나중에 늙어 꼬부라져 폐차할 때 까지 같이 살아 보자란 뜻으로 붙여준 이름이다. 그런데 상당히 터프한 그 영감과 달리 이 녀석은 좀처럼 알 수 없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시내를 다닐 때면 상당히 조심스러운 것이 여성적 기질이 많은 것 같은데 고속도로를 올리면 달리는 힘이 타고난 운동선수 같다. 나 혼자 생각인가 했더니 몰아본 사람들이 이구동성 잘나간다고 한다.
기질은 온순하고 착하고 무던한데 외관은 사고 이후로 조금 험악해져 보는 사람들이 흠칫하고 놀란다. 그러니 이 녀석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몇 해 전 운전을 해서 길을 가다 빨간 신호에 걸려 정지해 있는데 소나타한대가 쏜살같이 달려오더니 밥을 딥다 받아버렸다. 순간 라디오 볼륨을 조절하고 있던 나는 붕 날아서 앞에 서있는 포텐샤를 받고 그 충격으로 비틀거리며 찌그러진 문짝을 밀고 내리는 순간 구토가 몰려와 도로위에 주저앉아 헛구역질을 했다. 차는 뒷 범퍼가 트렁크까지 밀려들어왔고 앞 범퍼는 납작하게 찌그러져 본 넷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잠시 너무 어이가 없어 사태를 망각하고 웃다가 밥이 너무 불쌍해서 눈물이 나왔다. 그때 그 모습은 폐차를 해야 될 게 아닌가 할 정도로 심각해 보였다.
‘밥 살려내라. 살려내...’
5년을 타던 폴을 러시아로 시집보내고 처음 장만한 밥은 5년 동안 쓰다달다 말없이 나의 괴팍한 운전 실력을 참아주고 용하게도 잔 고장 없이 오늘까지 버텨주었는데 주인 잘못만나 끝내 제 수명 다하지 못하고 운명을 달리 했구나 란 생각이 들자 땅바닥에 드러누워 울고 싶었다. 사실 모든 기계에 애정을 주고 아끼는 건 아니지만 차는 좀 특별한 것 같다. 언제나 나를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장소로 데려다 주고 비 오는 날 같이 음악을 들으며 장거리를 뛸 때면 꼼짝없이 몇 시간동안 내 엉덩이를 아무소리 없이 받쳐주고 손에 잡힐 듯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애인과 달리 100%의 소유욕을 만족시켜준 그런 존재였다.
그렇다고 윤기 나도록 매일 쓸고 닦고 광을 낸 건 절대로 아니다. 편한 친구처럼 꾸미지도 않고 좌석 구석구석에는 먼지 뽀方 앉아있고 뒤져보면 운동화에 구두 한 켤레쯤 좌석 밑에서 나오고 어디 콘도 놀러 갔을 때 라면 끓여먹느라 샀던 양은냄비도 실려 있고 길고 지루한 신호 걸렸을 때 들여다보던 거울도 뒹굴고 있고 이제 듣지 않아 표지가 떨어진 카세트테이프도 서 너 개 쯤 뒹굴고 있는 그런 차 일지라도 그는 Only 나만의 것 이었다.
밥은 전치 1주에 치료비 이백 몇 십 만원 이란 경의적인 비용을 치르고 나의 곁으로 돌아왔다. 참고로 나의 치료비는 전치 4주에 120만원이었다. 그 사고로 나는 합의금과 보험금으로 250만원을 벌어들였으니 항간에는 땡잡았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지만 마음은 심히 괴로웠다.
나는 경차 애호가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경차를 우습게 본다.
작은 차를 커다란 차에 딸려오는 부록쯤으로 보는데 한동안 티코에 대한 유머가 판을 쳤던 적이 있다. 티모를 들이받은 그랜저가 내려서 돈다발을 획 집어던지며 ‘새 차 뽑아’라고 한거나 고속도로를 가다 갑자기 멈추면 껌을 밟았다거나 거미줄에 걸렸다거나 그랜저 뒤를 따라가면 냄새만 맡아도 갈 수 있다거나 빨간 마티즈는 깍두기요 흰 티모는 두부한모라는 티코 운전자로 웃고 넘기기에 속이 부글부글 끓는 말들이 많았었다.
경차의 장점을 얘기하라면 기름이 적게 먹는다거나 주차료 할인이 된다거나 세금이 싸다거나 고속도로 통행료가 절반이라는 경제적 이유를 들지만 순수하게 그 자체로 좋아해 줄 수는 없는 걸까.
그 작고 동글동글한 앙증맞음을 사랑해 주면 안 될까.
사실 나도 큰 차를 좋아한다. 렌트해서 소나타도 몰아보았고 SM5도 몰아보았는데 그 쾌적함과 중후함은 감탄에 감탄을 거듭하기 모자람이 없지만 역시 유쾌함은 마티즈를 따라올 수가 없다. 내가 스케일이 작아서 그런지 작은걸 좋아하는 여성적 취향이라 그런지 큰 차에 대해서는 압도당하는 느낌이 들어 완전한 소유를 느낄 수가 없는데 경차는 내가 들었다 놨다 호주머니에 넣었다 뺐다 하는 기분이 들 정도로 소유감을 느낀다. 세상에 어떤 물건이 이런 생명감으로 나에게 완전히 복종해 줄 수 있을까.
경차의 단점은 힘이 달리고 승차감이 나쁘고 운전자를 제외한 동승자에게는 공간도 협소하다.
경차를 모는 사람들을 비웃는 것도 문제다. ‘야 안탔으면 안탔지 티코가 뭐냐’
본인이 타지 않는 거야 뭐라 할 일은 아니지만 왜 남의 차에 이런 모진말로 대못을 박는지 모르겠다. 사람이 사회적 동물이다 보니 소셜 포지션 때문에 무리하게 큰 차를 소유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뭐 그 사람의 심지가 무른 것도 사실이지만 남의 눈을 의식해 경차를 기피하는 일은 좀 적어졌으면 한다.
땅 덩어리는 좁고, 자고나면 오르는 기름값, 세금과 보험금의 압박 이런 문제가 아니더라도 경차는 그 자체로 사랑받기에 부족함이 없지만 항상 모자라고 덜 떨어진 자식 취급을 받는다.
어쩌다 보니 경차를 사랑하자는 국가차원의 계몽운동 같은 소리를 늘어놓게 됐지만 나의 바람은 경차를 타는 사람이 많아진다면 개인취향과 욕구충족을 위해 경차도 다양한 차종이 나와 주었으면 하고 바란다.
나의 로망은 내내 폭스바겐의 비틀 이었다가 최근에는 미니쿠퍼로 바뀌었는데 한때 무지하게도 얘 네들이 경차인줄 알았다가 배기량과 가격을 보고 화들짝 놀란 일이 있다. 국가의 녹을 먹는 내내 이런 외제차를 몰일은 없을 테니 당분간 나의 사랑은 밥 영감과 계속 될 것이다.
병장 이민호 (20060804 151326)
1 빠...
상병 허익준 (20060804 151510)
이상한 나라의 폴. 니나가 잡혀있는 마왕 헤이하치의 소굴로 용감히 붕권 하나 믿고 달려가는 소년의 모습을 그린 용감무쌍한 작품이였죠.
병장 김동석 (20060804 152410)
드디어 폴의 이야기가 올라왔군요. 오랫동안 기다려왔습니다.
병장 이준요한 (20060804 154855)
차에 대한 각별한 사랑과 애정은 남자들만의 것인줄 알았는데 아니군요.
마티즈 123을 거쳐온 애호가로서 참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참고로 이상한 나라의 폴에서 펭귄은 펭귄펭귄하고 울지요.(그저 지나가는 에피소드의 캐릭터였지만요)
병장 고계영 (20060804 155307)
요즘 이렇게 지연님이 주말소묘 외의 작품을 저희들에게 보여주시는 것은..
언젠가 나타난 다른 군무원분에 대한 경계심이라거나..
정모 전. 저희들에게 자신의 입지를 알리기 위함이거나.. 정도로 생각해도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흠. 뭐.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 나는 운전면허 따야하는데. 예전 지연님의 운전면허시험에 대한 글도 같이 떠오르는.. 그런 글. 좋습니다!
정모 나오시죠
병장 주영준 (20060804 155719)
밥과 함께.
병장 김동환 (20060804 160017)
저도 폴얘기 무지 기다렸습니다.
한때 제 영어이름이 폴이었는데.(먼산..)
상병 허익준 (20060804 161245)
제 영어이름은 Juno(쥬노)였습니다. une씨와 함께 한때 BMS계를 풍미한 그 분에 대한 오마쥬였습니다만, 아는 사람이 있을리가 없죠.
상병 이영준 (20060804 164720)
저도 큰 차는 별로 안좋아해요.
아반떼나 SM3정도의 차량이 딱 좋은거 같아요.
너무 크면 불편할 거 같던데..
병장 조주현 (20060804 164914)
시간이 없다..
내일 봐야겠다. 흑
상병 정준형 (20060804 165646)
마티즈의 대박은.. 경차혜택이죠..
부모님 차가 마티즌데..
제가 덩치가 큰편이라.... 타면 꽉 조여보인다고 해서.. 타길 살짝 거부하지만
그래도 최강의 차는 마티즙니다.. 번잡가에서 뛰어난 주차능력을 보여주는..
대한민국 명차중 하나!
병장 이영호 (20060804 175116)
폴.. 밥.. 차에도 이런이름을 지어줄수 있구나. 제길.
난 왜 내 세피아에 세라리라던지(절대 페라리 아님), 세쿠스(마찬가지) 같은 국적도 없는
입양이름을 지어줬던 것인가. 설탕 흩날리며 나가는날 개명이나시켜 줘야겠다.
카즈야 정도로. 음. 셀도 나쁘지 않네.
병장 김희곤 (20060804 181234)
제 핸드폰에도 이름을 지어주세요..... 참고로 제 핸드폰은 작고 귀엽고 앙증맞은 여성형.(웃음)
병장 주영준 (20060804 183024)
희곤 필로폰
병장 주영준 (20060804 183504)
Philo (사랑) + Phone(전화) 입니다. 이상한 오해는 하지 마시길.
병장 이영호 (20060804 183903)
희곤. 죠리폰.
병장 김희곤 (20060804 194848)
악영마준 아니 그게 오해 안하게 생겼습니까 근데 뭐. 해석을 듣고보니 그럴듯 하군요.
영호 조리퐁의 아류입니까 흐음. 뭔가 인격형이 좋은데....... 사람같이 키울 녀석이라서. 하하.
병장 이인권 (20060808 081518)
알렉산더!!
병장 엄보운 (20060808 091049)
저의 경우는 여자친구가 검은소. 라는 애칭을 붙여주었더랬지요.
상병 김현동 (20060808 092118)
읽으면서 또 대섭님 이름 나오겠군 했는데 의외로 리플에 대섭님 이름이 없다는(응).
병장 김희곤 (20060808 193119)
현동 '안대습'으로 지으란 말으로 들리는군요. (웃음) 말씀드렸지만 여성형이라구요. 그럼 '지연님'으로 지어야되나.(먼산)
상병 백경민 (20060808 200159)
밥. 너무 감동적이군요.
병장 주영준 (20060809 075220)
희곤 안대순
상병 김현동 (20060809 090359)
아니 그저, 폴이 러시아로 갔다길래.
상병 허익준 (20060809 143727)
... 아니, 대섭님은 대체 어떤 분이시길래. 설마 모스크바 호텔의 발라이커씨랑도 인연이 있는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