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글-독서후기] 폭력-상처-치유,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상병 홍명교   2009-06-04 21:46:47, 조회: 150, 추천:2 

폭력-상처-치유,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김연수 / 문학동네


1. 시대의 죽음, 개인의 치유

이 소설은 작가 자신의 경험과 기억의 단편들, 그리고 현대사를 아우르는 몇가지 사건들의 조합으로 이루어진다. 우선 소설은 크게 90년대의 ‘나’로부터 시작해서, 4,50년대에 청년기를 살아간 ‘나’의 할아버지를 만나며, 그를 둘러싼 한 가지 사물인 ‘입체누드사진’을 토픽으로 삼고 그 이야기의 힘을 발진시킨다. 여기서 '입체누드사진'이라는 사건적 장치가 갖는 플롯 내에서의 힘이란, 독자로하여금 어떤 낯선 느낌이 주조하는 궁금증 또는 생경함을 유발한다. 고지식하고 엉뚱하며 괴팍하게만 보였으며 역사적으로는 근대 이전의 오래된 인물인 것처럼 느껴졌던 할아버지로부터 풀리지 않은 하나의 사물 또는 기억이 바로 입체누드사진이라는 사실. 할아버지는 어떻게 태평양전쟁에서 살아돌아왔으며 또한 그에게는 대체 어떤 기억이 있었길래 입체누드사진을 들고 왔는가. 이것은 '나'가 청년의 고된 시절 속에서 해답을 찾아가는데 하나의 열쇠가 된다. 이 소설. 어딘지 색다르다. 눈에 밟히듯 보이는 일본 성장소설의 장르적 코드를 차용하면서 가장 심각한 주제인 '80년대'와 '죽음'의 문제를 끌어온 것이다. 그러니까 예사 성장소설들처럼 청춘의 방황을 가볍게 다루기에는 영 심각한 출발을 보인다. 한데 동시에 추리소설의 코드를 놓치않으며, 죽음과 역사라는 다루기 힘든 주제를 중심으로, 20대의 치유를 다룬 성장소설이고자 하는 것이다.

2. 인물들

‘나’는 대학시절, ‘정민’이라는 1년 선배와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녀는 외롭고 정처없던 20대시절의 유일하게 행복한 기억을 일구는 인물이다. 정민은 때때로 '나'가 자신의 할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하듯 자신의 삼촌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그는 전북에서 이름난 수재였지만 나중에는 마약쟁이가 되었으며, 언젠가는 야간에 정민을 오토바이에 태워 거센 질주를 하기도 했으며, 결국에는 자살했다는 것이다. 그녀의 삼촌에게는 6,70년대를 둘러싼 굴곡의 한국현대사가 만든 개인적 비극이 담겨있다. 독자들은 기억하라. 어느 마약쟁이의 죽음을.
소설의 중반부부터는 결국에는 ‘강시우’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한 남자가 등장하는데 그는 60년대에 마약밀수꾼 집안에서 태어났고, 70년대에는 행복했던 가정을 잃었으며, 떠돌고 떠돌다가 광주 무등산에서 만난 야바위꾼들 때문에 운명이 뒤바뀌게 되어 80년대 광주로부터 87년 서울, 그리고 89년의 베를린과 평양에 다다르는 거센 격랑 속으로 빠지는 인물이다. 그는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인물로 우리편인지 아니면 저들의 편인지도 감잡을 수 없다. 그러나 그런 가름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그것은 비로소 소설이 결말에 다다랐을 때이다. 

3. 그물망의 세계

"칼 세이건은 이 세상에 쓸모없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전제를 통해 이 우주가 이처럼 광활한 까닭은 어딘가에 우리와 같은 인류가 반드시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 무의미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이 세상은 온통 읽혀지기를, 들려지기를, 보여지기를 기다리는 것들 천지였다."

'나'와 정민의 사랑과 이별. 그리고 이름없는 죽음들. 80년 5월 광주, 그리고 87년 서울과 91년 5월. 소설은 현대사의 굵직굵직한 역사의 페이지들을 등장시키며, 그 속에서 희생당한 개인들의 그물망을 다루고 있다. 그 그물망은 전혀 다른 것처럼 떨어져있다가 베를린에서 접한 관계들의 실마리들이 풀리기 시작하면서 연결고리를 잇는다. 다만 그 망이 장치적으로나 기술적으로 꼼꼼하고 촘촘하지는 않으며, 장르적인 장치들을 억지로 끌어놓으려 하다보니, '그럴듯함'이라는 기준에는 어느 정도 함량미달이다. 그러나 그런 역사의 페이지들을 연결해나가며, 죽음과 살아남은 자들의 상처의 치유라는 목적의식에 다다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작가의 노력이 느껴져 경외감이 들기도 한다. 요컨대, 이 소설은 대단히 젊은 소설이며, 작가가 스스로를, 그리고 동시대의 패배했거나 좌절해서 상처의 어둠에서 허덕이는 지난날의 동지들을 위로하고자 하는 소설인 것이다. 

4. context

“나는 언제나 불안한 마음으로 뭔가를 기다렸고 모든 것에 경이로움을 느꼈으며 무엇인가에 끊임없이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노을이 질 대면 나는 제비떼처럼 날아다니는 환상에 빠져 주위를 빙빙 돌면서 장난을 쳤다. 뿐만 아니라 나는 많은 생각에 잠기기도 했고 우울한 심정에 빠지기도 했다.” - 투르게네프의 ‘첫사랑’ 중

작가는 무수한 콘텍스트의 망을 쳐놓고 서사를 진행시키는 동력으로 활용한다. 아무래도 클리셰(cliche)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하지만 이런 낭만주의적인 스타일이 어쩌면 이 소설의 스타일적 매력이므로 중간중간 껄쩍찌근한 마음은 덮어두며 페이지를 넘겼다. 어쨌든 작가는 ‘의미’의 고리들을 이으며 투박하게 플롯을 구축해나간다. 이 운명론적인 서사가 숨겨진 에너지를 발산할 수 있는 포인트는 ‘진리’적인 언명이 담긴 따옴표 속의 구절들이 시작하고 끝나는 순간이다. 다소 안이한 선택이라는 비판을 피할 순 없겠다. 이런 것은 현대 문학이 구가해온 과감하고 혁신적인 시도들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애초에 그런 것이 아닌 ‘김연수다운 것’에 대한 기대를 갖고 책을 집은 나는 그리 실망하지는 않았다. 

갑작스레 등장하는 화자로서의 '나'의 생각에서 나오는 말들을 주목하자. 이 자기반역적 소설에서의 주인공이자 화자인 ‘나’의 갑작스런 개입은 끊임없이 이동하는 시간대를 다시 ‘현재’로 소환시키는 기능을 갖는다. 우리는 서사를 따라서 70년대, 80년대, 90년대에 머물렀다가도 다시 뜻하지 않은 소환으로 ‘오늘’로 복귀한다. 이런 지점이 이 소설의 두 번째 약점인데, 아무래도 몰입을 중단시키는 효과를 갖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나'는 백과사전적 진리를 갖춘 인물로서 등장해, 이미 스스로의 해답을 갖춘 채 그 길로 순조롭게 항해해나가는 인물처럼 행동한다. 그러나 예정된 길이야 어떻듯 장르적 재미는 남아있으므로 우리는 더 나아갈 수 있다. 후반부에 접어들면 치유로서의 서사 전개보다는 사건적 전개에 더 눈이 쏠리는 것이 사실이다. 이제 서서히 치유는 운명에게로 맡겨지고, 아직 청춘의 진리를 깨닫지 못한 ‘나’는 무섭도록 운명 속에 자신을 내맡긴다. 그것은 서사 속에서는 ‘방황기’로 치환된다. 이점은 작가의 명백한 실패가 아닌가 싶다. 

그러나 관대한 나는, 그는 아직 젊지않은가, 하며 스타일의 미숙함을 용납해줄 수 있다. 그만큼 나는 이 소설이 반가웠다. 나 역시 ‘나’처럼 그 공간에서 사라진 이후 3년이 다 되어가는 스물일곱이 된 지금까지도 지난시절에 대한 부재의식과 죄책감에 괴로워하던 찌질한 모습의 또 다른 '나'이기 때문이다. 나를 위로해주는 소설이구나, 라고 응답하며.

위에 인용된 투르게네프의 문구는 ‘나’의 20대 초반 대학시절의 방황들을 설명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할 말일 것이다. 이런 것은 청춘의 전염병과도 같은 것일까? 스물하나부터 스물넷. 대학시절의 지난날들에서 무엇을 구원할 것인지에 대한 응답이 느껴졌다. 그 지독한 갈등 속에 갇혀서 얼마나 오랫동안 괴로워했던가. 지금껏 항상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조마조마하면서도 조울과 자기기만, 자기혐오 속에서 그 블랙홀같은 고리들에서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벼랑 끝으로 자신을 내몰아가는 나 자신의 삶이 위태위태하게만 느껴졌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언제나 후회, 안타까움으로 남곤 했다. 때때로 용기를 잃어 더 밀어붙이지 못했으며, 좌절감에 빠져 모든 모험을 부정하곤 했었던 것이다. 아. 미치도록 돌아가고 싶다. 어느샌가 나는 소설 속의 ‘나’ 안에 감정적으로 인입되어있었다.

5. 모두가 지워버리려 했던 괴로운 과거

소설의 ‘나’는 서울에 있는 모 대학의 90학번 학생으로 1년 선배인 정민과는 총학생회에서 만난다. ‘나’가 그려내는 추억의 풍경들 덕분에 그 모티브가 어느 학교인지는 쉽게 짐작된다. 학교 뒤에는 인왕산자락이 있고, 앞에는 빼곡하게 들어찬 하숙집 골목이 있으며 더 나아가면 번잡한 유흥가와 서울 과학관, 그리고 고궁들이 있는, 명륜동에 있는 그 학교다. 그곳은 90년대초 학생스뽀츠의 전성기에 ‘관악산’ 아래 모학교와 더불어 ‘프로듀서들'의 성지로 불리던 학교이다. 단 한번도 주사바늘들에게 총학생회를 넘겨주지 않은 학교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삐디수첩의 마지막 줄기를 잡아내려온 나는, 선배들로부터 그렇게 익히 들어왔다.) 91년 5월 열사정국에서는 김귀정 열사가 있었던 곳. 소설 속 ‘나’의 기억은 이 시기를 경과하며 급격하게 상승하고 또 불안하게 추락한다. 죽음과 폭력이란 그에게 그 무엇도 아닌 모든 것의 상실과 모든 것으로부터의 폭력 그 자체로 다가왔던 것이다. 어느새 폭력은 ‘우리’ 안으로 은밀하게 스며들어와 우리의 몸 속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결코 청산주의자의 낭만적 감정으로 이 말을 내뱉는 것이 아니다. 오직, 인정할 것은 냉엄하게 인정하고 다음 발걸음을 내딛는 자세로.)

이 지점에서 소설은 그간의 다른 회고적인 소설들이 저지른 반정립적 패악을 저지르지 않는다. 김경욱의 <아크로폴리스>나 90년대 중반에 쏟아져나온 유수한 R출신 작가들의 소설들을 보라. 죄다 니힐리즘과 나르시시즘에 갇힌 청산주의자들뿐이다.(그러나 동시에, 이 말이 어느 정도 독설임을 인정한다. 이것은 온전히 그 세대의 한계이기도 했다.) 요컨대 대다수 소설들은 ‘영예로운 과거’에 대한 철저한 부정 또는 환상적인 신격화로서만 과거를 대했을 뿐 그 시절의 청춘이 겪는 가장 본질적이며 ‘인간’적인 고민과 폭력의 문제는 애써 접근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것이 매너리즘을 낳으며, 또는 문학의 우경적 정치성, 현실도피, 또는 애꿎은 포스트모더니즘 타령 따위를 낳는다는 것을 작가는 알고 있는 듯하다. 그는 과감하게 과거를 말하다가 그 시절 모든 방황들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한다. 다름아닌 폭력, 그리고 죽음.

6. 우연히 살아남은 사람들

“인생은 자기 자신이 지배하는 것이다. 너의 인생을 누구에게도 맡기지 말라. 무엇보다도 네가 선출한 지도자에게는 맡기지 말라. 자기 자신이 되어라.”

‘나’가 유럽으로 떠나게 된 가장 본질적인 요구는 스스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5월 광주 이후로 모든 20대가 오로지 ‘우연히’ 그곳에 없었다는 이유 하나로 방황하고, 또 부재의식 때문에 괴로워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이다. ‘나’는 우연히 91년에 서울에서 대학생이었고 그 당시 자신의 인생을 한껏 책임질 수 있을 만큼 커있진 않았다. 오직 우연한 위치 때문에 죽지 않은 채로 살아남았고, 그래서 더 괴로워했던 당대 대학생들의 고뇌를 고스란히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소설 속의 '나'는 "기형도"라는 텍스트와 접합지점을 가질 수도 있겠다. 

7. 망명

“그러니까 새로운 삶을, 새로운 현실을, 새로운 미래를, 새로운 미래를 꿈꾸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자신의 이름을 거부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만한 일이야. 그래서 나는 망명이란 이름으로부터 도망치는 일이라고 생각해. 잔인한 현실을 만들지 않으면 도저히 견딜 수 없으니까. 현실을 꿈으로 만드는 첫 번째 단계는 자신의 이름을 부정하는 일이야.”

공감한다. 자신의 이름을 부정하고 그것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을 상상해본 것이 한 두 번이 아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이 소설은 내 영혼 전체를 사로잡을 만큼의 흡입력으로 나를 끌어당겼다. 나는 얼마나 ‘망명’을 꿈꾸어왔던가. 지금 이 순간도 나는 망명을 꿈꾼다. 아마도 대학시절의 무수한 상처들 때문일 것이다. 이제는 그 상처의 고름도 터지고 터진 나머지 무감각할 정도가 되어 굳어버렸지만, 얼마전 다녀온 긴 설탕에서 어색하게 찾아간 학교에서 3년여만에 만난 옛 동지를 만났을 때 어찌 그리도 대책 없이 눈물만 나는지. 

옛 친구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꼿꼿하게 버티고 있었다. 항상 궁금증 가득히 질문만하던 후배들은 어느덧 어엿한 고학번이 되었고, 어색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우리는 어떻게 눈을 마주쳐야 할지 몰랐다. 그것은 마치 1년후의 진정한 재회를 예비하는 것 같은 장면이었다. 그때 재회할 때, 부끄럽지 않은 모습으로 마주치기 위해 나는 무한히 거듭나야만 함을 안다. 어쩌면 운명처럼 그 재회는 1년후가 아니라 2년후이거나 3년후, 또는 10년후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난 3년이 다 되어가는 이 기나긴 망명의 길을 계속 가야한다. 김연수 멋져, 알라뷰. 

뱀발. 
홍상수의 신작 <잘 알지도 못하면서>를 보면 소설가 김연수가 꽤 비중있는 배역으로 출연한다. 그는 여기서 ‘흥행감독’역으로 출연하는데, 정말 우스꽝스러운 캐릭터이다. 홍상수 영화의 팬이라서 출연하고 싶다고 하여 출연했다는데, 이렇게 우스꽝스럽게 나올 줄 알았더라도 허락했을까. 어쨌든 난 그가 부럽고, 무한한 동류의식을 느낀다.
* 책마을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9-06-08 14:00) 

20.19.3.173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6-10
09:34:06 

 

상병 김태완 
16.48.6.22   "인생은 자기 자신이 지배하는 것이다. 너의 인생을 누구에게도 맡기지 말라. 무엇보다도 네가 선출한 지도자에게는 맡기지 말라. 자기 자신이 되어라." 

마음속에 담아두고는 있지만 간과해 버리고 내 인생의 항로에 적용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특히 나를 나답게 만들고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순항하는 인생을 그리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냥 물이 흐르듯 나를 물의 흐름에만 맡기는 일이 허다했지요. 의지박약으로 인해 주체적인 사고로써 실천한 일들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위의 인용구는 님의 글을 새로운 마음으로 읽도록 동기 부여함과 동시에 님이 김연수님의 책을 읽으면서 느낀 것과 비슷한 모양의 느낌을 받게 했습니다. 제 안에서 나를 '나'로 만들어야 겠다는 의지를 다시한번 다지게 하는데 도움을 주심에 감사합니다. 
오늘도 이 글에 힘입어 힘차게 나로써 거듭나겠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2009-06-05
09:52:54
 

 

병장 정근영 
20.3.1.98   명교님 요즘 엄청나군요. 
가지에 요셉님이 쓴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의 독서후기가 있는데, 그 글과 같이 보면 좋을 듯 해요. 

그 중에 이제 저녁을 기다리고 있는 동욱씨가 

"<없었습니다>라는 존칭과 <후회는 없어>라는 비칭 사이의 거대한 틈새에서 말해질 수 없는 모든 것을 읽어내는 장면, 퉁명스런 기록의 틈 사이에서 소멸해간 삶의 흔적을 상상력으로 움켜내는 장면. 그게 바로 김연수적 아우라가 탄생하는 지점이 아닌가 싶어요." 

07년 여름 작가세계였던 걸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마 김연수 특집이었지요. 그때 문학평론가 정(뭐였는데 기억이 잘 안나네요, 정과리인가)이 한 말이 문득 생각이 나서 한번 옴겨봅니다. 남우님이 말씀하시는 '태초'를 '거대한 틈새에서 말해질 수 없는 모든 것' 정도로 옮겨놓는건 저의 오독일지도. 

라는 댓글을 달았는데, "퉁명스런 기록의 틈 사이에서 소멸해간 삶의 흔적을 상상력으로 움켜내는"이라는 표현은 참으로 기가 막히게 적절하지 않나 싶어요. 
김연수의 작품은 아직 '밤은 노래한다' 밖에 읽지 못했고, 읽은지 두 달이 다 되어 감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짤막한 감상 하나 적지 못했습니다만. 
1930년, 간도에서 일어난 거대한 흐름(굳이 간도라고 한정지을 필요는 없겠지만)에 내던져진 개인(박도만과 최도식, 안길룡, 이정희, 그리고 주인공인 김해연까지)의 삶을 상상하는 김연수의 능력은 경이롭다고 생각합니다. 거시적인 흐름 속에 흩뿌려진 미시적 존재의 삶을 움켜쥐려 애쓰는 그의 모습은, '마르탱 게르의 귀향'이라든지, '고양이 대학살'로 대표되는 신문화사적인 역사 인식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안 그래도 조만간 '밤은 노래한다'와 신문화사를 엮어서 후기를 적어보려는 중이라, 글로 찾아뵙도록 할게요. 

위에 인용하신 칼 세이건의 '테이큰'에 이런 말이 나와요 
'이 광활한 우주에 존재하는 것이 인간뿐이라면, 그건 엄청난 공간의 낭비라고 생각하지 않니?'하는. 
위에 인용문이나, 이 문장이나 김연수에게 참으로 어울리는 말인 것 같네요. 

덧붙여, '죄다 니힐리즘과 나르시시즘에 갇힌 청산주의자다'는 말에 머리가 띵합니다. 
죄송하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적어주실 수 있으신지. 대략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지만 명교님의 생각을 좀 더 듣고 싶어서요, 흐 

그리고, 
가지로- 2009-06-05
10:11:18
 

 

상병 김예찬 
48.9.2.115   근영 // 명교님은 아니지만 제가 한번 이야기해보도록 할게요. '죄다 니힐리즘과 나르시시즘에 갇힌 청산주의자다'라는 문장은 저에게 이렇게 이해됩니다. 

'열사'들을 통해서 충격적인 시대를 살아갔던 스포츠인들 중 많은 수가 90년대 후반, 그리고 00년대를 살아가면서 과거 자신들의 운동에 대해 그 한계점을 지적하고 반성하는 태도를 보입니다. (일부는 자신들이 그토록 비판했던 '죽음의 굿판'이라는 표현에 대해 뒤늦게 인정하는 자세를 보이기도 하구요.) 

그 당시의 '스포츠'는 그 당사자들에게도 시간이 흐를수록(시대가 변했다, 라는 말도 뒤따르죠.) 낭만적으로 윤색되거나, 또는 '과격' 혹은 '이상'이라는 표현으로 정리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들은 당시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본질적인 고민들을 아예 포기한 것과 다름 없습니다. '청산'이라는 표현은 아마도 '그 때의 고민들'을 '그 때'로 한정시켜버렸다는 것에 대한 비판 같습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역사'를 그 시점에서 청산시켜 버렸으니, 남는 것은 운동에 대한 허무함과 낭만적 잔재 밖에 없겠죠. 

그러나 실제로 '역사'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청산주의자'의 태도는 엄존하는 역사에 대한 도피행각 이상의 의미는 가지지 못할겁니다.. 그리고 역사가 흘러가는 이상,(그리고 스스로 '역사는 끝났다'고 선언하지 않는 이상) '80년 광주'와 '91년 서울'에서 가질 수 밖에 없었던 부채 의식은 여전히 '09년 어딘가'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따라다니겠죠. 상처와 아픔이 되어서. 2009-06-05
10:34:39
 

 

상병 김태완 
16.48.6.22   예찬님의 댓글에 덧붙입니다. 

현시대인들도 나름의 여러가지 본질적인 고민들을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수많은 부정들에 대항해 때로는 실천적인 자세로 이전과 같은 스포츠를 감행할 수 있는 가능성이 늘 잠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작가들의 과거 상황에 대한 찬양적 묘사는 현대 사회는 이전보다 훨씬 평화로운 시대이니(나르시시즘) 그런 운동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니힐리즘)는 시대 만족적 태도를 심어주려는 경향을 내재했습니다. 

옛 사건들에 대한 숭고한 정신을 기리자는 의도로 글을 쓰며 국민들에게 부채의식을 가지도록 유도하는 것은 좋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정신을 과거의 것으로 한계선 그어버리는 듯한 식의 글은 지금도 존재할 수 있는 폭력과 죽음같은 본질적 문제들을 간과하게 만듭니다. 부정에 대해 맞서려는 의지는 늘 깨어있어야 합니다. 옛것이 아닌 지금의 것으로 말이죠. 

아마도 명교님의 '죄다 니힐리즘과 나르시시즘에 갇힌 청산주의자다'는 문장은 이러한 의도를 내포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군요. 2009-06-05
12:00:05
 

 

상병 김예찬 
48.9.2.115   음, 태완님의 리플에 몇가지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일부 작가들의 과거 상황에 대한 찬양적 묘사는 현대 사회는 이전보다 훨씬 평화로운 시대이니(나르시시즘) 그런 운동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니힐리즘)는 시대 만족적 태도를 심어주려는 경향을 내재했습니다." 

-> 글쎄요, 물론 제가 명교님이 아닌 만큼 섣불리 말할 수는 없는 부분입니다만, 여기서 '니힐리즘'은 '운동을 할 필요가 없다' 보다는 '운동이 있었음에도' 무력했다, 라는 의미아닐까요. '현대 사회는 이전보다 훨씬 평화로운 시대(나르시시즘)' 보다는, '운동이라는게 있었고, 나는 거기에 참여했었다'라는 자기 만족이 아닐까요. 

90년대 이후 등장한 이른바 '스포츠 회고담'격의 문학들은 물론 다양한 차이가 있지만 본질적으로 '낭만적 패배감'을 지니고 있습니다. "니힐리즘과 나르시시즘에 갇힌 청산주의자" 역시 이러한 '낭만적 패배감'에 대한 비판이라고 보이구요... 


어쨌든, 뒤늦게 '가지로'를 외칩니다. 2009-06-05
13:05:41
 

 

상병 김태완 
16.48.6.22   예찬 / 제가 말씀드린 '일부 작가들의 과거 상황에 대한 찬양적 묘사는 현대 사회는 이전보다 훨씬 평화로운 시대이니(나르시시즘) 그런 운동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니힐리즘)는 시대 만족적 태도를 심어주려는 경향을 내재했습니다'는 말은 자기만족적 생각에 사로잡혀 그 시대를 겪었든 겪지 못했든 우리나라 국민 모두를 나태함에 빠지게 한 작가들을 이르는 말이었습니다. 
즉, 예찬님은 작가들로 한정하셨고, 전 작가들을 포함 우리 모두에게 영향이 다 미쳤다고 더 나아가 생각한거죠. 

김경욱과 같은 작가들이 스스로 자기 만족적 태도를 취하면서, 동시에 그들의 글로써 우리에게도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든 나태주의적 의식이 생기도록 유도하였다는 생각이 잘못된 것인가요? 2009-06-05
13:46:59
 

 

병장 정근영 
20.3.1.98   으음, 어렵군요 
김경욱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위험한 독서'의 서평에서 서영채 씨가 이런 말을 했던 것 같아요. 김연수나 김경욱 같은 이들은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애매한 정체성을 가진다고. 70년대 초반에 태어났던 이들은 아마도 80년대에 대학생들이 고민했던 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을만큼 성숙하지 않았을테니 말이죠. 반면에 이들은 2000년대에 김애란이 보여주는 것과 같은 넉넉한 웃음도 가지지 못한다고 얘기해요. 그건 이들이 그 사이에 끼인 세대이기 때문에 그런 거라고 했던가요.(가물가물한데, 이런 얘기였던 것 같네요) 

"김경욱의 <아크로폴리스>나 90년대 중반에 쏟아져나온 유수한 R출신 작가들"의 "니힐리즘과 나르시시즘에 갇힌 청산주의"라 하면, 서영채 씨의 이 말과 꽤나 관계있지 않을까 싶군요. 2009-06-05
17:37:11
 

 

병장 정근영 
20.3.1.98   생각해보니 명교씨의 이 글로 바라보는 김연수는, 
애매한 정체성의 끼인 세대를 극복하고, 
동갑인 김경욱이 니힐리즘과 나르시시즘에 갇혀버린 것과 달리 
"과감하게 과거를 말하다가 그 시절 모든 방황들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많은 다른 작가들이 애써 외면해왔던 진실과 오롯이 마주보는 작가가 되는군요. 

그의 다른 글들도 읽어봐야겠군요. 무엇보다도 이 책부터 먼저. 2009-06-05
22:12:42
 

 

상병 양동훈 
18.1.17.5   제길... 이 글에 나온 책이 문제가 아니고 이 글에 나온 작가가 문제가 아니고, 이 글의 내용을 파고드는 분석이 문제가 아닙니다. 

담담한 문체로 이 글 속에 명교씨의 모습을 이입시키는 그 순간순간들이 
모두의 고민이지만 모두의 고민이 아닌 모습으로 느껴져 가슴이 저려오네요. 

휴............. 

생각의 침잠에 잠시나마 빠져봐야겠군요. 

덤으로. 


가지로- 2009-06-06
15:09: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