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의 비판을 위하여_발터 벤야민
병장 강세희 06-18 17:02 | HIT : 152
자율평론 3호에 실린 글입니다. 최근 제 관심분야라 여러분과 함께 공유하고자 올립니다.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_발터 벤야민 (이성원 역)
폭력에 대한 비판은 폭력과 법과 정의의 관계를 규명하는 작업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왜냐하면 폭력의 대의명분이란 그것이 아무리 유효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도덕적 문제에 관련을 맺을 때에만 비로소 문자 그대로 폭력적으로 되기 때문이다. 이 도덕적 문제의 영역은 법과 정의라는 개념으로 규정된다. 전자에 관해서 말하자면, 폭력은 일단 목적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수단의 차원에서 발견되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지적은 일견 보기보다는 더 많은(그리고 또 다른) 문제를 제기한다. 만약 폭력이 수단이라면, 그것에 대한 비판의 기준은 즉각적으로 얻어질 것이다. 즉, 그 기준은 어떤 특정한 폭력이 정당한 목적을 위한 것이냐의 물음 속에 당연히 주어져 있어야 하며, 그 때 폭력에 대한 비판은 정당한 목적의 체계 속에 이미 내포된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왜냐하면 한 체계가 아무리 회의의 여지가 없을만치 확고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대개 그 체계속에 내포되어 있는 것은 원리로서의 폭력 그 자체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폭력의 구사에 대한 기준이고, 따라서 원리로서의 폭력이 정당한 목적을 위한 도덕적 수단이 될 수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는 아직 미해결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수단이 봉사하는 목적과는 별도로 수단 그 자체의 영역 속에서 판별할 수 있는 보다 엄밀한 기준이 요구된다.
그러나 이러한 보다 엄정한 비판적 접근을 애당초 배제하는 것이 아마도 자연법적 법철학의 주된 조류의 특징이다. 자연법은 인간이 그가 원하는 목적을 위해 그의 신체를 사용할 <권리>에서 아무런 문제점을 발견하지 않듯 정당한 목적을 위한 폭력적 수단의 구사에서도 아무런 문제점을 발견하지 않는다. 불란서 혁명기의 공포정치야말로 이에 대한 이념적 토대를 제공한 셈인데, 이 자연법사상에 따르면 폭력이란 자연의 산물이어서, 힘이 부당한 목적을 위해 남용되지 않는 한 그 사용은 결코 문제시되지 않는 원자재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모든 폭력을 포기하고 이를 국가에 부여한다는 것이 자연법사상의 국가 이론이라면, 이것은 이러한 합리적인 계약이 안고 있는 결론에 앞서 개인이 실제로 de facto 그가 자기 마음대로 행사할 수 있는 폭력을 그의 뜻대로 사용할 권리를 합법적으로 de jure 가지고 있다는 가정 하에서 이루어진 것이다(이점은 예컨대 스피노자가 그의 『신학-정치론』"Tractatus Theologico-Politicus"에서 명확히 말하고 있는 대로이다). 이러한 견해는 그후 다윈의 생물학에 의해 다시금 불붙었는데 이것은 자연도태와 더불어 폭력을 자연의 상태에서 생명이라는 목적에 적합한 유일한 본래적 수단으로 보는 독단을 서슴지 않았다.
폭력을 자연적 요소로 보는 자연법적 전제는 폭력을 역사의 산물로 보는 實定法 이론과 대척적 관계에 있다. 자연법이 오직 현존하는 모든 법의 목적을 비판함으로서 그 법을 판단하는 것에 반해 실정법은 오직 그 수단을 비판함으로써 변천하는 법을 판단한다. 正義가 목적의 기준이 된다면 적법성은 그 수단의 기준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반대적 입장에도 불구하고 두 사상은 그 근본적 定論에 있어서 공통점이 있다. 즉 정당한 목적은 정당화될 수 있는 수단에 의해서만 달성될 수 있으며 정당화된 수단은 정당한 목적을 위해서만 사용될 수 있다는 전제가 그것이다. 자연법은 그 목적의 정당성에 의해 수단을 <정당화시키려고> 하며, 실정법은 수단을 정당화시킴으로써 그 목적의 정당성을 <보장하려고> 한다. 그런데 이들이 공유하는 정론적 가정이 그릇된 것이라면, 즉 정당화된 수단이라는 것과 정당한 목적이라는 것이 화해할 수 없는 갈등관계에 있다면, 이 상충성은 풀 수 없는 문제가 된다. 이러한 순환논리를 깨고 정당한 목적과 정당화된 수단을 동시에 판단하는 상호의존적인 기준이 정립될 때에만 비로소 이 문제에 대한 통찰은 획득될 것이다.
따라서 목적의 영역과 정당성의 기준의 문제는 이 글에서 잠시 유보하기로 한다. 대신 폭력을 이루는 특정한 수단이 정당화될 수 있는가의 문제를 논의의 초점으로 삼기로 한다. 자연법의 제 원칙은 이 물음에 답하지 못하고 오직 끝없는 궤변으로 이끌 뿐이다. 왜냐하면 만약 실정법이 목적의 절대성에 눈이 먼 것이라면 자연법 역시 수단의 우연성에 눈이 멀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실정법이론은 폭력사용의 개별적 사례와는 무관하게 폭력의 종류를 구별하려고 했는데 우선 이것을 가설로 받아들이기로 한다. 즉 역사적으로 認知된, 이른바 용인된 폭력과 그렇지 않은 폭력의 구별이 그것이다. 그러나 시론이 여기서 출발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 특정한 형태의 폭력을 그 비준여부로 분류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왜냐하면 실정법상의 이러한 폭력의 기준은 폭력의 사용 자체가 아니라 사용된 폭력에 대한 평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문제되는 것은 도대체 폭력에 대한 그러한 구별 혹은 기준이 적용될 수 있다는 사실 자체와 폭력의 본질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혹은 다른 말로 바꾸어 이러한 구별 자체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 하는 것이다. 실정법이론이 제공하는 이러한 구별은 폭력의 근거에서 볼 때 매우 의미있는 것이며, 실제로 다른 어떠한 것으로 대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구별이 어떤 영역에 국한되는가는 반드시 규명되어야 할 것이다. 요약해서 말하자면, 만약 실정법에서 폭력의 적법성을 평가하는 기준을 그러한 기준이 적용되는 대상과 관련지어 분석할 수만 있다면 그 기준이 적용되는 영역 또한 그 기준의 가치와 관련지어 평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비판을 위해서는 실정법적 법철학과 자연법적 법철학 모두 넘어서는 어떤 관점이 발견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관점은 오직 법의 역사철학적 시각을 통해서만 제공될 수 있을 것이다.
합법적 폭력과 불법적 폭력이 구별된다는 사실의 의미가 즉각적으로 자명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정당한 목적을 위한 폭력과 정당하지 못한 목적을 위한 폭력을 구별하는 식의 자연법적 몰이해는 단호히 배격되어야 한다. 오히려 앞에서 이미 암시한 대로 실정법은 모든 폭력이 그 역사적 연원을 가지고 있으며 특정한 조건 하에서 합법성으로 선언되고 인준되었다는 사실을 입증할 것을 요구한다. 합법적 폭력을 인정하는 것은 폭력을 의도적으로 그 목적에 예속시키는 데에서 가장 명백히 드러나므로, 폭력의 종류를 가늠하는 가설적 기준은 폭력의 목적을 보편적으로 인정한 일이 역사적으로 있었는가 없었는가에 근거해야 한다. 역사적으로 그러한 인정이 있었음이 확인되는 목적은 <법적 목적>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자연적 목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중 어느 것에 봉사하느냐에 따라 각각 달리 나타나는 폭력의 기능은 개별적 법적 상황의 배경을 보아야만 선명하게 추적될 수 있는 것이다. 편의상 이 글에서는 현대 유럽의 상황에 국한하여 논의될 것이다.
법적 주체로서의 개인에 관한 한, 현재 법을 운용하는 방식을 보면, 일정한 주어진 상황에서 자연적 목적이 폭력을 통해서 효과적으로 추구될 수 있다 하더라도 개개인의 자연적 목적은 인정하지 않는 추세이다. 이 말은 곧 현재의 법체제는 개인적 목적이 폭력을 통해 효과적으로 추구될 수 있다 하더라도, 오직 합법적 권력에 의해서 실현되는 것만을 법적 목적으로 설정한다는 말이다. 과연 현재의 법체제는 자연적 목적이 원칙적으로 널리 허용되는 교육의 영역에서조차도 교육기관에서의 체형을 제한하는 법규에서 보듯, 그 자연적 목적이 지나치게 폭력적 수단에 의해서 추구될 경우 법의 목적에 따라 일정한 제한을 두는 경향이 뚜렷하다.
그래서 개개인의 자연적 목적이 일정한 폭력을 수반하여 추구될 때 법적 목적과 충돌한다는 것은 현재 유럽의 입법정신의 일반명제라고 말할 수 있다(이 점과 정당방위의 권리와의 모순은 뒤에 언급할 것이다). 그리고 이 명제로부터 개인의 수중에 있는 폭력을 법체제의 토대를 파괴하는 위험요소로 간주하는 법적 태도가 비롯된다. 그렇다면 이것은 개인의 폭력이 법의 집행을 무효화시키는 위험요소라는 말인가?
분명히 그건 아니다. 왜냐하면 이 경우 폭력은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불법적 목적을 지향할 때에만 비난이 가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혹자는 만약 자연적 목적이 아무 곳에서나 계속 폭력적으로 추구되면 법적 목적의 체계는 유지될 수 없으리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섣부른 판단이다. 이것을 논박하기 위해서 우리는 법이 개인을 제쳐두고 폭력을 독점하려고 하는 이유가 법적 목적을 보존하려는 의도에서가 아니라 법 그 자체를 지키고자 하는 의도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그리고 폭력이 추구하는 목적 때문이 아니라 법 밖에 존재한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이라는 놀라운 가능성을 생각해보면 좋을 것이다. 이 점은 흉악한 범죄자가 그 목적에 있어서는 혐오감을 주는 것이었더라도, 얼마나 대중의 은밀한 경탄의 대상이 되어왔는가를 상기해 보면 더 극적으로 예시될 수 있을 것이다. 이 경탄은 결코 그가 저지른 행위에 대한 것이 아니라 오직 그 행위가 증언하는 폭력에서 기인한다. 따라서 이 경우, 현대의 법률이 모든 분야에 걸쳐서 개인으로부터 박탈하려고 하는 폭력은 실로 위협적인 것으로 되며, 바로 이 점은 법에 패배하면서도 법에 대해서 저항감을 갖고 있는 일반대중의 공감을 유발하기에 충분한 것이다. 폭력이라는 것이 왜, 어떠한 기능 때문에 법에 대해 위협이 되고 따라서 법은 왜 그렇게도 폭력을 기피하려고 하는가 하는 문제는 현재의 법체계에서 폭력의 행사가 암암리에 허용되는 국면을 음미해 보면 금방 드러날 것이다.
무엇보다도 노동자에게 보장된 노동쟁의권이라는 형태로 나타나는 계급투쟁이 그 경우이다. 노조는 오늘날 국가를 제외한다면 아마도 유일하게 폭력을 행사할 자격이 주어진 법적 주체일 것이다. 이러한 견해에 대해서, 파업의 진정한 내용은 행위의 태만 혹은 부작위이므로 결코 폭력으로 표현될 수 없다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실제로 이러한 견해는 일단 파업이 불가피한 상황이 되었을 때 국가권력이 파업권을 인지하고 정당화시키는 것을 용이하게 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것은 무조건 옳다는 말은 아니며 제한이 있다. 행위 혹은 작업의 태만이 단지 <관계의 단절>에 그칠 때 그것은 비폭력적이고 순수한 수단일 수도 있다. 그리고 국가 혹은 법의 편에서 볼 때도 노동쟁의권은 결코 폭력을 행사할 권리가 아니라 고용자에 의해 간접적으로 행사되는 폭력을 기피할 권리인고로, 여기에 대응하는(고용자로부터 소원해짐 혹은 물러섬에 그치는) 파업은 때때로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파업이 아무런 진전도 가져다주지 않거나 피상적 대처만 야기시키는 어떤 상황 속에서, 그리하여 정지된 노동쟁의를 의식적으로 재개하려고 하는 의도 하에서 파업이 일어날 경우, 폭력은 필연적으로 파업에의 참여를 강요하는 형태로 나타나게 마련이다. 이러한 점에서 파업권은 특히 국가의 견해와는 상치된 노동자의 편에서 볼 때 특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힘을 사용할 권리를 뜻한다. 이 두 이해방식의 상치는 혁명적·전면적 파업에 직면했을 때 아주 리얼하게 부각된다. 이 경우 노동자는 언제나 파업권에 호소할 것이고 국가는 파업권이란 <애당초 그런 의도로 마련된 것이 아니므로>, 이를 남용으로 규정짓고 비상조치를 취할 것이다. 왜냐하면 국가는 산업의 전부문에 걸쳐 동시에 일어나는 파업을 불법으로 선언할 ― 법적으로 허용된 파업의 구체적 근거가 모든 산업에 통용될 수는 없는 고로 ― 권리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해석상의 차이에는 법적 상황의 객관적 모순, 즉 국가가 자연적 목적으로서의 폭력의 목적을 인정하여 때로는 무관한 눈으로 보지만 혁명적 전면파업의 경우와 같은 위기에는 절대적 권력으로서 대처한다는 엄연한 모순이 표출되어 있다. 왜냐하면 일견 역설처럼 보일지 모르나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기 위한 행동이 때로는 폭력으로 규정될 수 있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적극적 의미에서는 그렇게 행동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한 법체계를 전복시키기 위해서 그 권리가 행사될 때 그러한 행동은 폭력으로 규정된다는 말이며, 소극적 의미에서는 단지 위에 말한 행동강요를 수반할 경우 폭력으로 규정된다는 말이다. 따라서 이 사실은 법적 상황의 객관적 모순을 노출시킨다. 그렇다고 해서 어떤 상황에서 법이 파업자들을 폭력의 담당자라고 규정짓고 이에 폭력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법 자체의 논리적 모순을 보이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파업에서 국가가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폭력비판의 유일한 확고한 근거로서 이 글이 밝히고자 하는 <폭력의 기능>이기 때문이다. 만약 폭력이라는 것이 인간이 추구하는 그 무엇을 직접 확보하고자 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약탈적 폭력에 의해 그 목적을 이룰 수 있겠는데, 이는 상대적으로 안정된 조건, 혹은 그 조건에 유사한 것을 성취하기 위한 토대로는 전적으로 부적합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정의감이 적이 손상될 수는 있겠지만, 파업은 바로 그러한 약탈적 폭력이며 법적 조건의 토대에 변형을 가할 수 있는 폭력이다. 폭력의 이러한 기능은 우연적이며 개별적 사례에 지나지 않는다는 반론도 있을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군대라는 폭력을 고찰함으로써 이 반론을 일축해 버릴 수 있다.
군법이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은 파업에 관한 법의 경우와 동일한 법적 상황의 객관적 모순, 즉 법적 주체는 자신의 자연적 목적에 부응할 목적을 지닌 폭력을 인정하나 그 폭력은 어떤 순간에는 자신의 법적·자연적 목적과 갈등을 일으킨다는 사실에 의존한다. 군사적 폭력이 일차적으로는 그 목적을 위한 약탈적 폭력으로 직접 사용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법적 관계의 초보도 모르는 원시적 상황에서조차도 ― 아니 특히 그런 상황일수록 ― 승리자가 확고한 우위를 점했다하더라도 평화적 儀式이 필수적이었다는 사실은 대단히 놀랍다. <영원한 평화>처럼 전혀 다른 내용의 평화를 말하는 칸트의 경우에도 평화는 정치적이고 결코 은유적인 것이 아니기는 마찬가지이지만, 아무튼 <전쟁>의 상관개념으로서의 평화는 모든 법적 조건과는 무관하게 이러한 승리에 대한 필수적인 선험적 인준을 뜻한다. 이 인준의 본질은 새로운 조건 ― 이 새로운 조건의 존속이 사실상 보장되어 있느냐는 별개의 문제지만 ―을 새로운 <법>으로 인식하는 데에 있다.
따라서 가장 원초적 폭력이고 자연적 목적을 위해 사용되는 모든 폭력의 모형인 군사적 폭력으로부터 결론을 도출하자면, 모든 폭력에는 법제정적 성격이 내재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인식이 의미하는 바는 뒤에 다시 거론될 것이지만, 여기에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법적 주체로서의 개인으로부터 자연적 목적을 위한 폭력까지도 포함하여 모든 폭력을 박탈하고자 하는 근대 입법의 경향이 잘 나타나 있다. 엄청난 범죄를 저지른 자의 경우 그의 폭력은 법에 저항하여 새로운 법을 선언하는 위협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몇몇 중요한 사례의 경우 그러한 행동이 이미 무력해진 현대에서조차도 원시시대에서와 마찬가지로 대중을 공포에 사로잡히게 하는 위협이 된다. 그러나 외적인 힘이 국가로 하여금 국가에 도전할 권리를 인정하도록 강요하거나 특정 계급이 국가로 하여금 국가에 도전할 권리를 인정하도록 강요할 때 이를 새로운 입법행위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국가는 무엇보다도 그 폭력의 법제정적 성격을 두려워한다.
지난번 세계대전에서 군사적 폭력에 대한 비판은 폭력일반에 대한 열렬한 비판의 계기를 마련했다. 이를 통해 적어도 폭력이 소박하게 구사되고 용인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배웠지만, 아무튼 폭력은 단지 그것의 법제정적 성격 때문이라기보다는 폭력의 또 다른 기능 때문에 더욱 부정적으로 판단되었다. 보편적 징집을 통해 존재하게 된 군대주의의 폭력은 이중적 기능을 갖고 있다. 군대주의는 국가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 폭력을 강제적으로 그리고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특징이다. 폭력의 이와 같은 강제적 행사는 최근에 폭력의 행사 그 자체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더 면밀하게 검토되었다. 이 과정에서 폭력은 단순히 자연적 목적을 위해 행사된다는 사실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기능을 통해 그 모습이 부각되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법적 목적을 강요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행사되는 폭력이다. 이 경우 사회구성원을 법에(일반징집이라는 법에) 예속시키는 것이 바로 법적 목적이다. 그래서 폭력의 첫 번째 기능이 법제정적 기능이라고 한다면 두 번째 기능은 법수호적 기능이라고 할 수 있다. 징집이 그 원칙에 있어서는 다른 폭력과 차이가 없는 법수호적 폭력의 경우일진대, 진정으로 효과적인 폭력의 비판은 평화주의자나 적극적 행동주의자들이 제시하는 수사학적 제스처로 이루어질 문제는 아니다.
진정한 비판은 모든 법적 폭력, 즉 법제정적 강제력과 법집행적 강제력에 대한 비판에까지 나아가야 하며 이에 미치지 못할 때에는 충분히 수행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 또 우리가 유아적 무정부주의를 공언한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은 경우, 이것은 개인에 대한 어떠한 제약도 인정하기를 거부하고 "즐거운 것은 용납되어야 한다"고 외침으로써 이루어질 성질의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이러한 발상은 오히려 윤리적·역사적 차원에 대한 성찰을 배제하는 것이고, 따라서 행위라는 것이 갖는 의미, 그리고 현실이라는, 행위를 배제하고는 결코 정립될 수 없는 것의 의미에 대한 성찰을 배제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더욱 중요한 문제는, 흔히 시도되는 바 도덕법상의 定言的 명령 ― 너 자신과 다른 사람의 인간됨을 목적으로 삼아야지 결코 수단으로 삼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는 식의, 논쟁의 여지가 없는 최소한의 강령 ― 에 대한 호소조차도 그 자체로는 우리의 비판에 적합하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우리는 이 유명한 명령이 실제로는 아주 적은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즉, 우리 자신 혹은 타인을 어떤 식으로든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이 용인될 수도 있지 않은가라고 회의해 볼 수도 있다. 이러한 회의에 대한 타당한 근거는 引證될 수 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실정법도 그 뿌리에 있어서는 각 개인을 통해 구현되는 인간됨에 대한 관심을 인정하고 증진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것은 이 관심이 숙명적으로 결정된 질서로서 대변된다고 보고 그 질서의 수호를 통해서만 이 관심이 성취된다고 보는 점에서 다를 뿐이다. 법을 그 근본으로부터 수호한다고 하는 이러한 관점을 굳이 뭐라고 비판하기는 어렵겠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점을 전제하여 더 높은 차원의 자유를 규명하려고 하지 않은 채 특정한 법 그리고 그 법의 힘 ― 이 때의 힘은 결국 숙명이 세상을 지배하며, 존재하는 것 그 중에서도 특히 위협적인 것은 절대적으로 이 질서에 속한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 의 보호하에 취하게 된 사법적 관행만을 비난할 경우 더더욱 무력하게 된다. 왜냐하면 법수호적 폭력은 위협적인 폭력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위협은 천박한 자유주의 이론가들이 해석하듯 본래 억제력으로 의도된 것은 아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억제력은 확실성을 필요로 하는데, 이 확실성은 문자 그대로의 정의에 의할 경우 위협의 본질과는 상치된다. 법의 영향력을 이탈할 가능성은 상존하는 것이므로 이 확실성이 법 자체로 확보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법은 더욱 더 위협적으로 되기 마련이다. 범법자가 끝내 잡히고야 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법적 위협의 불확실성이 갖는 가장 심오한 뜻은 그것이 연유하게 되는 저 숙명이라는 영역을 고찰함으로써 드러날 것이다. 그것에 대한 유용한 지침을 우리는 처벌의 영역에서 찾을 수 있다. 그 중에서도(실정법의 타당성을 문제 삼은 이상) 사형은 많은 비판을 받아 왔다. 사형에 대한 대부분의 논의가 피상적이었다고 하더라도 그 동기는 늘 원칙에 뿌리박은 것이었다. 그런데 사형폐지론자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막연히, 그리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사형 제도에 대한 비판이 법적 조치 혹은 법조문을 공격하는 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법 그 자체를 공격하는 것이라고 느껴왔다. 왜냐하면 운명에 의해 왕관을 쓰게 된 폭력이 법의 근원이라면 법체계 속에서 생사를 좌우하는 최대의 폭력이 나타나는 국면이야말로 법의 근원을 극명하게 그리고 무시무시하게 그 존재를 천명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원시적 법체계에서 고작 사유재산을 침해하는 정도의 범죄에 대해서 <균형에 맞지 않는> 사형이 부과되기도 했다는 사실은 분명 이 점과 상통하는 점이 있다. 이같은 처벌의 목적은 법의 침해를 벌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법을 세우는 것이다. 다른 어느 법적 행위에서보다도 삶과 죽음을 가늠하는 폭력행사의 경우에 법은 그 자체를 극명하게 재천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폭력을 통해서 법에는 무언가 악취나는 것이 있음이 노정된다. 섬세한 감수성을 가진 사람들일수록 숙명이 그러한 선고를 통해 위압적으로 그 정체를 드러내는 상황이야말로 자신들과는 무관한 무한히 멀리 떨어져 있는 일처럼 느끼기에, 이들에게는 특히 그러하다. 그러나 법제정적·법수호적 폭력에 대한 비판의 결론을 도출하고자 할진대 우리는 理性을 통해 더욱 더 단호하게 이러한 상황에 접근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폭력의 두 형태가 사형제도의 경우보다 더 기괴하게 결합하여 일종의 幻影과 같이 존재하는 것이 근대국가의 또 다른 기구, 즉 경찰이다. 사실 경찰은 조치권에 있어서는 법적 목적을 위한 폭력임에는 틀림없지만, 시행령 공포의 권리에서 보듯 법적 목적 자체를 넓은 테두리에서 결정할 권리를 동시에 지녔다. 그러한 권위의 치욕적 성격은 거의 의식되고 있지 않은데, 이것은 지극히 조야한 행위에 있어서조차 그 행정명령의 근거가 충분치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권위는 더욱 더 맹목적으로 사회의 가장 취약한 영역에서 창궐하고 나아가서는 많은 사상가들 ― 국가조차도 법적으로 이들의 비판으로부터 면제되어 있지 않다 ―을 탄압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이 치욕성은 바로 법제정적 폭력과 법수호적 폭력의 구분이 경찰이라는 권위의 경우에는 정지된다는 사실에 있다. 법제정적 폭력은 오직 결과적 승리를 통해 그 가치를 입증하도록 되어 있고, 법수호적 폭력은 그것이 스스로 새로운 목적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제한을 받는다. 그러나 경찰권의 폭력은 이 두 조건으로부터 자유롭다. 그 특징적 기능은 법의 선포 때문이 아니라 어떤 법령에 대해서 사법적 요구를 할 고유권을 갖기 때문에 법제정적이고, 이 목적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에 법수호적이다. 경찰이라는 폭력의 목적이 일반적으로 법의 폭력과 동일하거나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는 주장은 전적으로 옳지 않다. 오히려 국가가 무능해서 혹은 법체계 내에서의 상호규제 때문에 꼭 달성하고자 하는 실제적 목적을 그 법체계 내에서는 보장받고 있지 못하다고 느끼는 그 한계점이 바로 경찰의 <법>이라고 해야 옳다. 그래서 경찰은 법적 조건이 명백히 성립되지 않는 수많은 경우에 <치안유지의 이유로> 개입한다. 時空적으로 결정된 상황적 산물이기에 형이상학적 범주가 인정되는(그래서 비판적 평가의 대상이 될 만한) 법과는 달리, 경찰기구에 대한 고찰에서 우리는 그 어떤 본질적 내용도 제공받지 못한다. 결코 만져질 수 없으면서 문명국가의 삶의 어디에나 침투하는 유령과 같은 그 존재처럼, 경찰의 권력 또한 형체가 없다. 어느 곳에서나 다 마찬가지이겠지만, 입법과 집행의 최고권력이 결합되어 있는 절대군주체제의 통치자의 권력을 대변하는 경찰이 그러한 절대권력과 관련을 맺지 않으면서도 폭력의 최악의 타락을 증언하는 민주주의사회의 경찰보다 그래도 덜 유린적이라는 점은 부인하기 힘들다.
수단으로서의 모든 폭력은 법제정적이거나 법수호적이다. 이 속성의 어느 것도 표방하지 않는 폭력은 그 타당성을 상실하고 만다. 그러나 수단으로서의 모든 폭력은 가장 호의적인 경우에도 법 자체의 고유의 문제점에 연루되지 않을 수 없다. 이 문제점들의 중요성이 현시점에서 확실하게 평가될 수는 없겠으나, 법은 이제껏 고찰한 대로 도덕적으로 너무도 애매한 모습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도대체 인간의 이해관계의 갈등을 조정하는 수단으로 폭력적인 것 이외의 수단은 없을까 하는 물음이 저절로 대두된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전적으로 비폭력적인 갈등의 해결은 결코 법적 계약관계를 낳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계약이란 비록 당사자들이 아무리 평화적으로 임했다 하더라도 결국은 흔히 있을 수 있는 폭력에로 귀착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만약 상대편이 약속을 위반하면 어떤 형태로든 폭력적 수단에 의존할 권리를 쌍방에 부여한다. 뿐만 아니라 계약의 결과가 그렇듯 그 기원도 폭력을 가리키고 있다. 폭력이 계약 속에 법제정적 폭력으로 직접 존재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폭력이 계약 자체에 도입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법적 계약을 보장하는 힘이 폭력적 기원을 갖고 있는 한, 폭력은 계약 속에 내재해 있다. 법적 제도에 잠재적으로 존재하는 폭력에 대한 인식이 사라지면 제도 또한 쇠퇴하고 만다.
우리 시대의 의회가 바로 그 예가 된다. 의회는 그 자체를 존립하게 만든 혁명적 힘을 계속 의식하지 못했기 때문에 으레껏 예의 그 슬픈 광경을 연출하고 있다. 따라서 최근에 있었던 혁명적 힘의 구현이 ― 특히 독일의 경우가 그랬지만 ― 의회에서는 아무런 결실도 맺지 못했다. 그들 選良들은 자신들이 법제정적 폭력을 대변하고 있다는 인식을 결여하고 있다. 따라서 그들은 이 폭력에 진정으로 값하는 법령을 성취하지 못하고 이에 대한 타협으로 정치문제를 다루는 비폭력적인 듯해 보이는 방법을 추구하고 있다. 그러나 "비록 적나라한 폭력을 아무리 경멸한다 하더라도 타협에로의 노력은 내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고 외부로부터, 상대편의 노력에 의해 動因되는 것이기에, 또 아무리 자유로이 수락되더라도 타협은 강요적 성격 없이는 생각할 수조차 없는 것이기에" 이 태도는 "폭력을 전제한 정신상태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다른 길을 택하면 더 나을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모든 타협의 근저에 있는 느낌이다."(웅거 Unger, 『정치학과 형이상학 Politik und Metaphysik』) 그래서 세계대전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정치적 갈등의 비폭력적 해결이라는 이상에 이끌리도록 했으나 의회의 쇠퇴가 결과적으로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 理想을 저버리도록 만들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평화론자들은 볼셰비키와 노동조합주의자들의 도전에 직면해 있다. 이들은 현재의 의회에 대해 실로 치명적이고도 대체로 적절한 비판을 가했다. 그러나 활발한 의회가 상대적으로 아무리 바람직하고 만족스러운 것이라 할지라도, 원칙적으로 비폭력적인 정치적 합의수단에 대한 논의는 결코 의회주의의 차원에 적합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의회가 핵심적인 문제에서 성취하는 것은 근원에 있어서 그리고 결말에 있어서 폭력을 수반하는 행위인 법령선포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갈등의 비폭력적 해결이란 가능한 것인가? 의문의 여지없이 그러하다. 개인적 인간관계에서 우리는 그러한 사례들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문명화된 세계조망이 온건한 합의수단의 사용을 허락해 줄 때 그러한 비폭력적 합의는 언제나 가능하다. 또 우리는 폭력적인 모든 합법적·불법적 수단을 불순하지 않은 비폭력적 수단에 의해서 해결할 수도 있다. 예의범절, 공감, 온건함, 신뢰, 기타 언급될 수 있는 미덕들은 그러한 비폭력적 수단의 주체적 선결조건이다. 그러나 불순하지 않은 비폭력적 수단은 결코 직접적 해결의 수단은 아니며 어디까지나 간접적 해결의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는 대원칙에 의해 그것의 객관적 구현은 결정된다. (이 말이 갖는 광범위한 의미를 여기서 일일이 논할 수는 없다.) 이 수단은 따라서 인간간의 갈등의 직접적 해결에는 적용될 수 없고 오직 객관적 일에만 적용될 뿐이다. 이런 이유로 해서 <기술>은 가장 넓은 의미에서의 그러한 수단이다. 기술의 가장 의미 있는 예는 아마도 시민적 합의의 기술로서의 토론일 것이다. 왜냐하면 비폭력적 합의는 토론을 통해서만 가능하며, 토론과정에서는 어떠한 거짓도 용인되지 않는다는 사실 자체에 이미 폭력의 원칙적 배제 가능성이 명백히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상의 어떠한 법도 거짓이 용납될 수 있다고는 명시하지 않고 있는데 바로 이러한 사실 속에 비폭력적 합의의 영역이 이미 마련되어 있는 셈이다. 왜냐하면 그 영역이란 폭력이 접근할 수 없는 영역, 즉 이해가 자리 잡고 있는 언어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기만죄를 처벌한다는 식의 법적 폭력이 개입하게 된 것은 비교적 후일에 가서이다. 즉, 법체계는 그 근원에 있어서 승리자의 권력에 의지하여 위법을 그때그때 시정하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에 그것이 문제로 등장하기 전에는 굳이 기만을 문제삼지 않았다. 애당초 기만이란 권력의 흔적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고 따라서 로마와 고대 게르만의 법에서는 <민법은 잠들지 않는다>는 원칙 하에 기만을 구태여 형벌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었다. 후일에 가서 법은 법 그 자체의 폭력에 대한 확신을 결여하게 되면서 더 이상 다른 모든 폭력을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다른 폭력에 대한 두려움과 법 그 자체에 대한 불신이야말로 이미 법의 생명력의 쇠퇴를 표시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 법은 법수호적 폭력을 더욱 강제적으로 구현하기 위하여 법 그 자체에 목적을 두기 시작했다. 따라서 후일의 법은 도덕적 배려에서가 아니라 기만당한 쪽에서 폭발할지도 모를 폭력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기만을 문제삼게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폭력에 대한 두려움은 법의 근원적 폭력성과 상치되는 것이므로 그러한 법적 조치는 정당한 수단이 못된다. 법이 법수호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것은 법의 영역이 이미 쇠퇴하였음을 반영하는 것이며 법적 수단의 가능성이 그만큼 축소되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기만을 금지함에 있어서 법은 폭력적 반발을 낳을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비폭력적 수단의 사용까지도 제한하기 때문이다.
법의 이러한 추세는 국가의 이해에 상치되는 파업권 일부를 허용하는 데에도 작용해 왔다. 법이 파업권을 인정하는 것은 파업이야말로 국가가 대적하기 두려운 폭력적 행동을 사전에 방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노동자들은 기계를 파괴하고 공장을 불지르고 하지 않았던가? 결국 법체계에 호소하지 않은 채 사람들 간의 상충되는 이해를 평화적으로 화해시키기 위해서는 ― 주체적으로 소유해야 할 제반의 미덕 이외에도 ― 비록 내키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폭력적 수단보다는 순수한 수단을 취하도록 유도하는 효과적인 동기가 필요하다. 그것은 결과와는 관계없이 폭력적 대결에서 야기될지도 모를 상호불이익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동기가 개인간의 상충하는 이해를 조절하고 있음은 수많은 경우를 통해 확인하는 대로이다.
그러나 계급간의 혹은 국가 간의 갈등은 그 양상이 다르다. 승리자와 패배자들 모두 압도할지도 모를 어떤 보다 높은 질서가 대개는 감추어져 있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를 느끼지 못하며 지성으로는 더더욱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높은 질서와 이에 따른 공통의 이해를 자세히 추적할 지면은 허락되어 있지 않다. 다만 여기서 짚고 넘어갈 것은 불순하지 않은 수단에 의거한 정책을 원하게 하는 지속적 동기가 궁극적으로는 공통의 이해이며, 나아가 정치에서의 순수한 수단은 개인간의 평화적 관계를 지배하는 수단과 유추적 관계에 있다는 점이다.
계급투쟁에 관해 말할 것 같으면 파업은 어떤 조건 하에서는 계급투쟁의 순수한 수단으로 보일 것이다. 본질적으로 다른 두 종류의 파업이 있을 수 있음은 앞에서 언급된 바 있지만 여기서 보다 자세히 성격 지을 필요가 있다. 순수 이론적 측면이 아닌 정치적 측면에서 이 두 가지를 처음으로 구별한 공로는 소렐 Sorel 에게 돌려야 할 것이다. 그는 이것을 정치적 총파업과 무산계급의 총파업을 대비시키는데, 그 폭력의 성격에 있어서 이들은 대척적 관계에 있다. 전자를 신봉하는 집단에 관해서 소렐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들의 사고의 기반은 국가권력의 강화이다. 현조직상 이들 정치가들(즉 온건사회주의자들)은 이미 강력하게 중앙집권화되고 훈련된 권력의 토대를 구축하고 있다. 이 권력은 반대편의 비판을 허용하지 않으며 능히 침묵을 강요하거나 허위법령을 선포할 수 있는 권력이다." "국가는 권력을 결코 잃지 않으리라는 것, 권력은 특권층에서 특권층으로 이양될 뿐이며 생산자 대중은 주인만 바꾸게 되리라는 것을 정치적 총파업은 입증하고 있다." (G. Sorel, Reflexions sur la violence) 이러한 정치적 총파업은 유산된 독일혁명에서 그 예를 찾을 수 있다. 이와 달리 무산계급의 총파업은 국가권력의 타도를 그 유일한 과제로 삼고 있다. "그것은 가능한 모든 사회정책의 이데올로기적 귀결을 무효화시킨다. 이것을 추종하는 집단은 가장 대중적인 개혁조차도 부르주아적이라고 본다." "무산계급의 총파업은 국가를 폐지하고자 하는 의도를 천명함으로써 그 승리를 통해 얻게 될 물질적 이득에는 무관심함을 선언한다. 왜냐하면 국가야말로 각 부문에서 민중이 지고 있는 부담으로부터 혜택을 받는 지배집단의 존재근거이기 때문이다." 첫 번째 형태의 작업중단은 노동조건의 외적 변화만을 의도하는 것으로써 폭력적인데 비해 두 번째 것은 순수한 수단으로서 비폭력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외적인 양보 혹은 작업조건의 일정한 개선이 이루어지면 작업을 재개한다는 전제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국가에 의해 강요되지 않는 전폭적으로 변혁된 노동에만 참여하겠다는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격변의 귀결은 노동자 총파업이 '야기시킨' 것이기보다는 그 극점으로서 "완성된" 것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서 전자는 법제정적인데 비해 후자는 무정부적이다. 그래서 소렐은 마르크스가 우발적으로 한 말을 받아서, "혁명운동은 그것 자체를 포용하면서, 모든 형태의 프로그램, 모든 형태의 유토피아, 한마디로 모든 형태의 입법을 거부한다." "이러한 멋진 것들은 총파업과 더불어 사라져 버린다. 혁명은 선명하고 단순한 반항으로 출현한다. 여기에 사회학자, 사회개혁을 외치는 우아한 아마추어들, 혹은 프롤레타리아의 일을 전문적으로 도맡은 지식인들을 위해 마련된 자리는 없다." 이러한 심오하고도 도덕적이고, 진정으로 혁명적인 생각을 앞에 두고, 무산계급의 총파업이 사회적 대격변을 가져올지 모른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을 폭력적이라고 낙인찍는 반론은 성립하지 않는다. 현대의 경제라는 것이 화부가 석탄을 넣지 않으면 멈춰버리는 기계라기보다는 조련사가 돌아서는 순간 횡폭해지는 야수와 같은 것이라 할지라도, 한 행위의 폭력성은 그 목적만으로 평가될 수 없듯 마찬가지로 결과만으로 평가될 수도 없다. 오직 그 수단을 지배하는 원칙에 의해서 평가되어야 한다. 물론 결과만을 보고자하는 국가권력은 이러한 총파업과 실제로는 거의 강탈적이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는 부분적 파업을 구별하여 전자를 폭력의 이름으로 반대한다. 소렐은 총파업 그 자체에 대한 엄정한 사고가 실제로 혁명에서 폭력을 얼마나 줄일 수 있는가를 대단히 치밀한 논리로 설명해 주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총파업보다 더 부도덕하고 조야하며 마치 봉쇄전략과도 같은 폭력적 태만의 대표적 예가 독일의 몇몇 도시에서 있었던 의사들의 파업이다. 이 가운데 특히 가장 불쾌하게 노정된 것은, 아무런 저항의 시도도 보이지 않은 채 수 년간 "죽음의 담보로 붙잡혀" 있다가 기회가 생기자마자 자유의지를 포기한 전문계층의 타락하고 무분별한 폭력의 행사였다. 비폭력적 합의의 수단은 최근의 계급투쟁에서보다도 지난 수 천년 간의 국가의 역사에서 더욱 선명하게 전개되어 왔다. 외교적 조인에서 외교관이 법체제에 변형을 가하는 일은 드물지 않게 있는 일이었다. 기본적으로 개인간의 합의에 유사하게, 국가의 이름하에 평화적으로 그리고 계약서 없이 하나하나 해결해 왔던 것이다. 이 일은 물론 미묘한 일이기는 하나 중재자에 의해서 더욱 활발하게 수행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 해결방법은 원칙적으로 법체제를 넘어서는, 따라서 정치적 의미의 폭력을 넘어서는 성격의 것이기에 중재자를 추월하는 문제인 것이다. 따라서 외교관들의 상호관계는 개인간의 그것처럼 그 나름의 독특한 형식과 미덕을 낳았는데 이것은 그 성격상 단순한 외교적 의례만은 아니었다. 비록 지금은 그렇게 전락해 버렸지만.
자연법이나 실정법에 의해 다같이 허용되는 폭력의 형태 중에서, 앞에서 제기한 법적 폭력의 심각한 문제점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러나 그러한 폭력이 이제껏 영위해 온 세계사적 존재양식의 한계로부터 구제되는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인간의 문제에 대한 어떠한 해결책도 만일 폭력이 원칙적으로 일체 배제될 경우에는 불가능하게 된다면, 법이론이 제기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에서의 폭력은 없는가하는 물음이 필연적으로 대두될 것이다. 이것은 자연법과 실정법이 공유하는 근본적 定論 ― 즉 정당한 목적은 정당화된 수단에 의해 성취될 수 있으며 정당화된 수단은 정당한 목적을 위해 사용될 수 있다는 생각 ― 의 진실여부에 대한 물음이기도 하다. 만약 그리고 운명이 부과하는 폭력이 (정당화된 수단을 사용한다 하더라도) 정당한 목적과 양립할 수 없는 갈등관계에 있다면, 또 그와 동시에 그 목적에 대하여 정당화될 수도 있고 정당화되지 않을 수도 있으나, 목적에 대하여 수단의 관계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관련된 또 다른 종류의 폭력이 대두된다면―그 경우에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이러한 물음은 우리로 하여금 모든 법적 문제에 대해서 궁극적으로 해결 불가능성이라는 기묘하고도 일견 절망적인 사태를 깨닫게 해준다.(아마도 그 절망의 심도에 있어서 그것의 느낌은 오직 끊임없이 변화하는 언어로서는 옳음과 그름을 최종적으로 언명할 수 없음에 비견할 만하다.) 왜냐하면 수단의 정당화와 목적의 정당성을 결정하는 것은 결코 이성이 아니라 전자의 경우는 숙명이 부과하는 폭력이고 후자의 경우는 신이기 때문이다. 인간으로서 정당한 목적을 통찰력 있게 아는 것은 흔치 않은데, 그 이유는 우리가 정당한 목적을 <법으로 성립될 수 있는> 목적, 다시 말해서 일반적으로 타당할 뿐 아니라(이것은 정의의 본질로부터 분석적으로 도출된다) 일반화시킬 수 있는(이것은 쉽게 입증할 수 있겠지만 정의의 본질과 상치된다) 목적으로 생각해 온 뿌리 깊은 관습 때문이다. 한 상황에서 정당하고 보편적으로 용인되는 타당한 목적이 비록 유사하다고 하더라도 다른 상황에서도 그런 것은 아니다. 여기서 문제 삼고자 하는 폭력의 非媒介性은 일상적 체험에서 잘 예시되고 있다. 인간은 종종 분노를 터뜨리면서 예정된 목적을 위한 수단이라고 볼 수 없는 폭력성을 드러낸다. 이 분노는 수단이 아니라 표출이다.
이러한 성격의 폭력이 객관적인 모습으로 구현된 것을 우리는 신화에서 찾을 수 있다. 신화에서의 폭력은 가장 원형적 모습에서 諸神의 구현이다. 그것은 제신의 목적을 위한 수단도 아니요, 제신의 뜻의 구현도 아니요, 오직 그들의 존재의 顯示일 따름이다. 니오베의 전설은 그 대표적 예라고 할 수 있다. 아폴로와 아르테미스의 행동은 단순히 처벌인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들의 폭력은 이미 존재하는 법을 위반했다고 해서 가해지는 처벌이라기보다는 새로운 율법의 제정으로서의 성격이 훨씬 크다. 니오베의 오만함은 그녀의 운명을 자초한 셈인데 그것은 니오베의 오만함이 율법에 저촉되어서가 아니라 숙명에 도전하여 숙명과 싸움을 벌이기 때문이다. 이 싸움에서 구명은 틀림없이 승리하며 승리를 통해서만 율법을 천명하는 것이 숙명이다. 고대인들에게 이러한 신의 폭력이 전혀 처벌이라는 법수호적 폭력이 아니었음은, 가령 프로메테우스와 같은 영웅의 이야기에서 보듯 위업과 용기로 숙명에 도전하여 각기 다른 운명을 걸으나 언젠가는 인간에게 새로운 율법을 가져다 주리라는 희망의 여운을 남기며 종결되는 영웅들의 전설을 통해 잘 드러난다. 범법자를 예찬하면서 현대의 대중이 마음속에 그리는 상은 바로 이러한 영웅과 그 영웅에 원천적으로 깃들어 있는 신화의 법적 폭력인 것이다. 따라서 폭력은 저 숙명이라는 불확실하고 모호한 영역으로부터 분출되어 니오베를 엄습한다. 그렇다고 이것이 꼭 파괴적인 것은 아니다. 비록 그것은 니오베의 자식들에게는 잔인한 죽음을 준비했지만 그 어머니의 생명을 파괴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한다. 그래서 니오베는 자식들의 죽음을 통해 전보다 더 죄의식을 느끼며 영원히 침묵하는 죄의 담지자로서, 그리고 그녀 자신 돌이 되어 인간과 신의 접경지대임을 알리는 이정표로서 남아 있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신화에서 구현된 바와 같은 매개되지 않은 폭력이 법제정적 폭력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면 ― 아니 동일한 것이라면 ― 그것은 법제정적 폭력을(앞에서 군사적 폭력과 관련지어 논의한 바와 같이) 매개적 폭력이라고 규정하는 것에 따른 풀기 어려운 새로운 문제를 남기게 된다. 그와 동시에 이 연관성은 결국 법적 폭력의 근저에 있게 마련인 숙명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밝히려는, 법적 폭력에 대한 우리의 비판이 도달할 결론의 개요를 마련해준다. 왜냐하면 법제정에서의 폭력의 기능은 다음과 같은 뜻에서 이중적이기 때문이다. 즉, 법제정은 폭력을 수단으로 하되 이 때 그 목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법으로 제정되어야 하는 바의 그 무엇이다. 그러나 법제정 순간에는 폭력을 배제하지 않으며, 폭력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목적 그 자체가 법으로 정립되는 것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폭력과의 밀접한 관련 하에서 그 비호 아래 법으로 제정된다. 법제정은 권력의 수립이다. 그리고 그런 만큼 폭력의 직접적 구현이다. 정의는 신의 목적제정의 원리이고 권력은 신화적 법제정의 원리이다.
권력의 신화적 법제정의 원리라는 것을 적용할 때 그 풍부한 의미가 드러나는 것은 헌법이다. 헌법의 문제에서 경계선을 긋는 일 ― 즉, 신화의 시대에 인간이 수많은 전쟁을 거친 후 터득한 "평화"의 의미 ― 은 모든 법제정적 폭력의 원초적 현상이기 때문이다. 헌법에서 우리는 진실로 모든 법제정적 폭력에 의해 보장되고 있는 것은 획득한 재산이 아니라 ― 사실상 이 말은 정확히 맞는 말이지만 ― 바로 권력임을 분명히 본다. 오히려 승리자의 힘의 우위가 완벽할 때 패배자에게도 권리가 부여된다. 바로 이것이 신화적이리만큼 애매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는 <평등한> 권리이다. 이것이야말로 협상에 임하는 쌍방이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이다. 바로 여기에 서로 침해해서는 안 될 법의 신화적 애매성이 무섭도록 원시적인 형태로 나타나 있는 것이다. 아나톨 프랑스 Anatole France가 "가난한 자건 부유한 자건 다리 밑에서 밤을 보내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고 풍자적으로 말했을 때 뜻했던 바도 바로 그것이었다. 또 소렐이 태초에 모든 권리를 왕과 귀족 한 마디로 힘센 자의 전유물이었다고 ― 그리고 그의 취지에 따르면 힘센 자가 존재하는 한 영원히 그러하리라고 ― 상정했을 때 이것은 역사 문화적 진리만이 아니라 형이상학적인 진리도 담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폭력만이 법을 보장하는데, 이 때 법의 관점에서 보자면 평등이란 존재하지 않고 오직 폭력의 평등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계선을 긋는 행위는 또 다른 면에서 법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법과 표시없는 경계선은 적어도 원시시대에는 불문율로 통했다. 사람들은 모르는 새에 이를 범하고 보복을 받곤 했다. 이렇듯 씌어지지도 않고 알려지지도 않은 법에 대한 침해로 야기된 법의 제재는 처벌과 구별하여 보복으로 불려졌다. 그러나 이 보복이 불운하게도 전혀 생각지도 않은 희생자에게 떨어질 때에도 그것은 우연이 아니라 또 다시 의도적으로 애매하게 스스로를 입증하는 숙명이라는 것이 그들의 법의 이해였다. 고대인의 운명관에 관한 斷想에서 헤르만 코헨 Hermann Cohen은 "운명이 지시하는 바에 따라 이 침해, 이 범죄가 야기되었다는 불가피한 자각"에 관해 언급하는데(H. Cohen, 『순수의지의 윤리 Ethik des reinen Willens』), 법에 대한 무지가 처벌을 면제시켜 주지 않는다는 현재의 원칙도 이 정신을 증언하는 것이며, 마찬가지로 고대 희랍 초기에 있었던 성문률을 둘러싼 투쟁도 신화적 율법에 대한 반항이라는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매개되지 않은 폭력의 신화적 구현은 더욱 순수한 폭력이 존재함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모든 법적 폭력이 근본적으로 동일함을 보여준다. 그래서 법적 폭력에 대하여 우리가 갖는 의구심을 폭력의 역사적 기능의 독소적 성격에 대한 확신으로 바뀌게 한다. 그리고 이것을 파괴하는 것이 우리의 당위로 대두된다. 그러나 이 파괴작업은 신화적 폭력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는 유일신의 순수한 비매개적 폭력의 문제로 귀착한다. 결국 모든 면에서 신은 신화를 거부하듯 신화적 폭력은 신적인 것을 통해 극복되어야 한다. 신적인 것이야 말로 모든 면에서 폭력의 반명제를 이룬다. 신화적 폭력이 법제정적이라면 신의 폭력은 법파괴적이다. 전자가 경계선을 긋는 것이라면 후자는 아무런 구애받음 없이 경계선을 파괴한다. 신화적 폭력이 죄와 보복을 가져다준다면 신의 힘은 속죄할 뿐이다. 전자가 위협한다면 후자는 때린다. 전자가 피를 흘리게 한다면 후자는 피를 흘림 없이 치명적이다. 이러한 폭력의 예로 우리는 니오베의 전설과 코라의 무리에 대한 신의 심판을 비교할 수 있다. 신은 특권을 누리던 레위인을 경고도 위협도 주지 않고 내리쳐서 완전히 파멸시켰다. 그러나 파멸시킴과 동시에 신은 또한 속죄한다. 여기서 피를 흘리지 않음과 이 폭력의 代贖적 성격의 깊은 연관성이 확연히 드러난다. 피는 단지 육체적 생명의 상징일 뿐이다. 법적 폭력의 해체는(여기서 자세히 언급할 수는 없으나) 육체적 생명에 대한 죄의식에서 비롯한다. 이 죄의식은 죄없는 불행한 사람들로 하여금 육체적 생명에만 사로잡히는 죄를 <대속하게> 하고 따라서 죄지은 자를 정화시키는 ― 정화시켜 주되 그의 죄를 씻어 주는 것이 아니라 그를 죄인으로 만든 법을 씻어버리는 ― 그러한 <보복>을 행한다. 생명에 대한 법의 지배는 육체적 생명과 더불어 끝난다. 신체적 폭력은 육체적 생명 그 자체를 지배하는 피비린내 나는 권력이지만 신의 폭력은 삶을 위한 생명을 지배하는 순수한 힘이다. 전자는 희생을 요구하지만 후자는 희생을 받아들인다.
이러한 신적인 힘은 종교적 전통 속에서 증언될 뿐만 아니라 현대의 생활의 적어도 한 영역에서 구현되고 있다. 교육의 힘은 그 완결된 모습에 있어서 법 밖에 존재하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그 구현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신적인 힘의 구현은 반드시 신이 직접 주재하는 기적에 의해서가 아니라, 피를 흘림이 없이 내리치는 대속의 순간으로,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모든 법제정적 폭력의 폐지로 정의될 수 있다. 그런 만큼 이러한 폭력을 인멸적 폭력이라고 부르는 것도 타당할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재산, 권리, 목숨 등등에 관해서 상대적으로만 적용될 수 있고 생명있는 자의 영혼에 관해서는 절대적으로 그렇지 않다. 이러한 순수한 신적인 힘에 관한 생각은 특히 오늘날에는 많은 격렬한 반론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그리고 그 힘의 외연이 확장되었을 경우를 생각해 본다면 그 논리적 귀결은 결국 인간의 생명을 박탈할 수도 있는 치명적 권한을 인간에게 부여하는 것은 아니냐는 논박에 마주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허락될 수 없다. 왜냐하면 <죽여도 좋을까>라는 물음에 대한 답은 결단코 <살상을 범하지 말지어다>라는 한 치의 에누리도 없는 계명이기 때문이다. 마치 신이 행위를 앞서가듯 이 계명도 인간의 행위에 선행한다. 그러나 신에 대한 복종을 강요한 것이 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듯, 일단 행위가 이루어졌을 때 이 명령은 적용될 수도 없고 통용되지도 않는다. 행위에 대한 어떠한 심판도 계율로부터 도출되어서는 안 된다. 뿐만 아니라 신의 심판도, 이 심판의 근거도, 인간은 미리 알 수 없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폭력적 행위를 비난하는 기준을 계율에서 찾는 일은 그러므로 잘못된 것이다. 율법은 재판의 기준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홀로 그 율법과 싸워야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그 율법을 무시한 책임을 져야 하는 개개인의 행동지침으로 존재한다. 정당방위로서의 살상을 명백히 비난한 유태사상이 보여준 법이해는 바로 이러한 것이다.
그러나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더욱 오래된 사상을 가리키면서 계율 자체도 그 사상에 근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바로 생명의 신성함이라는 신조인데, 경우에 따라서는 인간에게만 적용시키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동식물에까지 확산시키기도 한다. 이들의 논지의 한 극단적 예는 압제자의 암살을 두고 한 다음의 말에서 찾을 수 있다. "만약 내가 죽이지 않으면 정의가 지배하는 세계를 이루지 못하리라는 것이 의식있는 테러리스트들의 논리이다. 그러나 우리는 존재한다는 것이 행복하고 정의로운 것보다 더 높은 가치라고 믿는다." 이 말은 그것이 옳지 못하고 치욕적인 만큼이나, 한 행위가 피해자에게 무엇을 가했는지보다도 그 행위가 신과 행위자 자신에게 무엇을 했는가의 시각에서 십계명을 추구해야 함을 역설하고 있다. 만약 존재하는 것이 목숨을 부지하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면(위에 인용한 말은 분명 그런 뜻을 담고 있는데), 존재하는 것 자체가 정의로운 것보다 우위에 있다는 명제는 거짓되고 치욕적이다. 그러나 한편 존재 아니 차라리 생명이라는 단어가 <인간>이라는 조건, 더 이상 그 무엇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이 총체적 조건을 뜻한다면, 또 위의 말이 이 세상에 인간이 존재하지 않음은 인간이 정의롭게 살 수 있는 세상이 아직 도래하지 못했음보다 훨씬 더 끔찍한 것이라는 것을 말하고자 한 것이라면, 이 명제는 당당한 권리를 담게 된다. 위의 인용문이 그럴 듯하게 들리는 것도 이러한 애매성에 기인한다.
인간은 그의 어떤 조건이나, 속성 혹은 고유의 신체적 특징과 동일한 것이 아니듯, 그가 누리는 생명 그 자체와 동일하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다. 인간(즉 지상의 삶과, 죽음과, 내세의 삶을 통틀어 동일하게 존재하는 인간의 생명)이 아무리 성스러운 것이라 하더라도,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에 의해 쉽게 손상되는 육체적 생명 기타 그의 조건 등도 성스러운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생명을 동식물의 생명과 본질적으로 구별짓는 것은 무엇인가? 동식물들이 다 성스러운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들이 살아 있다는 사실 자체, 생명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 때문에 성스러울 수는 없을 것이다. 생명의 신성함이라는 定論적 명제의 기원을 추적해 들어가는 작업도 충분히 가치있는 일이다. 아마도 그 기원은 쇠진한 서구의 전통이 이미 상실해버린 聖者를 우주의 不可解性에서 찾고자 한, 비교적 그리 오래되지 않은 마지막 잘못된 시도일 것이다. (모든 종교를 막론하고 살인을 금지하는 계율이 이미 까마득한 옛날에 만들어졌다는 사실도 이에 대한 반론이 되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이 계율은 현재 인식되고 있는 식의 명제와는 다른 사상에 근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인간의 성스러움은 다음과 같은 사색을 가능케 한다. 즉 여기서 성스럽다고 언명된 것은 r대 신화적 사고에 의하자면 죄의 담지자로 지목된 속죄양을 뜻하고 그래서 생명 그 자체가 성스럽게 된 것은 아닐까 하고 말이다.
폭력의 비판은 폭력의 역사철학이다. 현재의 폭력에 접근하는 비판적·판별적이고도 결정적인 길은 오직 폭력의 전개에 관한 사유에 의해 제공되므로 우리는 이를 暴力史의 철학이라고 부를 수 있다. 눈 앞에 직면한 대상만을 응시하는 것은 폭력의 법제정적·법수호적 성격의 형성과정의 변증법적 浮沈을 보는 데에 그칠 것이다. 이 진동을 지배하는 법칙은, 모든 법수호적 폭력은 적대적 대응폭력을 탄압하는 가운데 시간이 흐르면 그것(폭력의 법수호적 기능)이 대변하는 법제정적 폭력을 간접적으로 약화시키게 된다는 사실일 것이다. (이 점의 다양한 증후는 이 글에서 이미 언급되었다.) 그러나 이 법수호적 폭력에 의한 탄압은 얼마동안 지속되지만 결국 새로운 힘 혹은 이제껏 억압된 힘이 법제정적 폭력으로서 자신을 지배하던 것을 이기고(그 자체도 결국 쇠퇴하고 말 운명의) 새로운 법을 제정하게 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신화적 형태를 벗어나지 못한 법의 이러한 순환이 깨질 때, 그리고 법이 힘에 의존하듯 힘 또한 법에서 나올진대 이 모든 힘의 장치를 구사하는 법이 정지되고 궁극적으로 국가권력이 종식될 때, 그때에 비로소 역사의 새로운 기원이 세워질 것이다. 금시대의 신화의 지배가 깨지고 있다면, 이 새로이 다가올 시대는 법에 대한 우리의 비판이 애당초 부질없을 만큼 까마득히 멀리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만약 법 너머에 있는 순수하고 매개되지 않은 신의 폭력의 존재를 우리가 확신한다면, 이것은 또한 인간에 주어진 순수한 폭력을 구현하는 진실로 혁명적인 폭력이 가능함을, 그리고 이것이 어떤 방식으로 가능한가를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그러나 과연 언제 이러한 순수한 폭력이 구체적으로 실현된 일이 있는가를 말하는 일은 인류에게 가능하지도 않고 절박한 문제도 아니다. 왜냐하면 폭력의 속죄적 기능은 인간에게는 보이지 않으므로 신의 폭력이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효력을 지니고 출현하지 않는 한, 우리는 신의 폭력이 아니라 신화적 폭력만을 확신을 가지고 폭력이라고 인식할 것이기 때문이다. 법이라는 이름 하에 신화에 의해 사생아로 전락된 순수한 신의 폭력은 또 다시 그것이 역사적으로 취해온 모습들을 자유로이 취할 것이다. 그것은 군중에 의한 범죄자의 처단이라는 신의 재판을 통해 나타날는지 또는 마땅히 전쟁이라고 불러야 할 것을 통해 구현될지 알 수 없다. 그러나 결국 신화에 지나지 않는 모든 법제정적 집행적 폭력은 독소적인 것이다. 이 폭력에 봉사하는 법수호적·행정적 폭력 또한 독소적이다. 오직 신의 폭력 ― 역사가 성스러운 집행임을 증명하는 서명이며 印章이되 결코 그 수단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이 신의 폭력 ― 만이 至高의 폭력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병장 김광철
꺄악~! 이거 정말 보고 싶었던 글인데...감사해요~(웃음) 06-18
병장 박수영
하아. 이런건 원어로 봐야 이해가 잘 되는데 말이죠. 06-19
상병 김재영
전, 자크 데리다의 <법의 힘> 부터 읽어봐야겠습니다.. 06-19
상병 박준연
자율평론 자율평론 자율평론.. 06-19
병장 이건룡
꿀걱.. 잘 읽겠습니다. 일순간 덜덜 떨렸습니다.
자율평론은 보통 어디에 수록된 기획인가요? 책자로 나온 것인지?? 06-19
상병 서동영
꼭꼭 저장해서 잘 읽겠습니다. 06-19
상병 김재영
참 세희님, 개인적으로 추천해드리고 싶은 책은, 존 산본마쓰의 <탈근대군주론>, 갈무리.
출판사가 갈무리라서 다중 네트워크의 생각과 많이 닮아 있지 않겠는가... 라고 생각했는데, 보기 좋게 제 추측을 빗겨간 서적입니다. 미셸 푸코의 광기의 역사와 결부지어 레폿 하나 썼던 기억이 나는데... 06-19
병장 강세희
재영 / 감사합니다. 시간은 점점 촉박해져가고 읽어야겠다고 마음먹은 책들은 쌓여만가네요. 지금도 책상위엔 책이 놓여 있지만 눈은 책마을에.....에휴... 06-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