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한통
병장 진규언 06-08 10:31 | HIT : 300
엊저녁 일과를 마치고 생활관으로 복귀하니 관물대에는 떠억 하니 편지 한통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게 왠일이래. "아직도 편지가 오십니까?" 그러게 아직까지 날 잊지 않는 친구가 있구나. "나 아직 죽지 않았어" 익숙한 지렁이 필체. 설모군입니다. 잠시 설모군을 소개하자면
새내기 무렵 만났습니다. 학교마다 입학전 오리엔테이션을 지칭하는 단어가 있겠지요. '새내기 새로 배움터' 줄여서 '새터'였습니다. 함께 신입생 장기자랑을 하며 열정을 불태웠고 1학기는 언제나 이놈과 함께였습니다. 어찌저찌 과 학생회 활동을 열심히 했고, 재학생 과대표를 선출하는 자리에서는 러닝메이트였던 이놈과의 가위 바위보로 각각 과대표, 부과대표가 되었습니다. 새내기 2학기는 특히나 기억에 남습니다. 과에 투신했으니까요. 푹 빠져서 1년을 보냈습니다. 참 각별한 사이였습니다. 모든 술자리에서 함께였고, 모든 수업에서 함께였고, 심지어 미팅도 함께 나갔었고, 스무살의 팔할이 이녀석이었습니다.
녀석이 먼저 군대를 가고, 전역을 하고, 복학을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통화했던게 3월이니 연락이 뜸한 저를 탓해도 변명거리가 없습니다. 갑자기 편지를 쓴건 무슨 할말이 있단걸 그녀석이나 저나 알고 있습니다. 조심스럽게 떨리는 마음으로 봉투를 엽니다.
절반을 차지하던 안부인사를 뒤로 하고, 단 하나의 물음이 뇌리를 스칩니다. "너 과학생회장 할래?" 2학기 복학예정임을 알고, 그리고 자신이 알던 친구라면 군대에 가서 변하지만 않았다면 시기의 문제이지 가부의 문제가 아님을 알았기에 편지는 그렇게 이어집니다. 누군가는 해야한다라는 당위성, 이번이 우리학번 차례인듯 하다. 적임자가 없다. 어느 누구하나 나서는 사람도 없고, 그렇다고 안할 수는 없잖냐. 이제 너는 2학년 1학기니까 부담도 적을거다. 선배들, 동기들 사이에서도 너라는 말이 나왔다. 3학년들은 고시, 시험준비 때문에 힘들기도 하다. 칼복하며 회장이라니 부담도 되겠지만 너만 OK한다면 적극적으로 지원해주마. 기타 등등 구구절절 소상한 이야기들..
요즘 세상에 누가 하려고 하겠냐만은, 개인주의의 앙양이라는, 또 그로 인한 학생회의 약화라는 사회 보편적인 현상을 뒤로 한채, 속한 학과의 특수성이 있습니다. 단독 출마, 찬반 투표(90%이상의 찬성, 일당 독재도 아니고)가 큰 특징이구요. 최소한 2학년이 되고서면 어디론가 다들 사라지는 가운데서 활동하기란 쉬운일이 아니지요.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고민에 빠졌습니다. 빈 A4지 하나를 꺼내 적어 보았습니다. 18시~24시까지. 6시간동안 아무것도 못했습니다. 결정 내렸습니다. 24시가 넘은 시각에 그놈에게 전화했습니다. 단 한마디 했을뿐입니다. "내 차례가 아닌것 같다" 그녀석의 대답이 더 가관입니다. "그래" 라는 답뿐, 어쩌고 저쩌고 다른 소리 불라불라 불라불라. 괜한 고민을 했단 생각도 했습니다. 기실 고민은 '하고 싶다'가 전제되어야 할 수 있는 것인데 하고 싶은 욕심도 상당합니다.
허영심이었음을 깨닫습니다. 누구를 위해, 집단을 위해, 교수를 위해, 학생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마음가짐은 찾아보기 힘들었고, 이력서의 한줄이 탐났을 뿐이고, 자기소개서에서 리더쉽이 있는 인재로 보여지기를 원했을 뿐이고, 많은 경험들과 이를 통한 양질의 인맥들이 탐났을 뿐입니다. 타인과의 만남에서 '~학교 ~학과 학생회장'으로 나를 소개하는 허울뿐인 욕심이었습니다. 내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았습니다. 이휘재 주연의 <인생극장>에서처럼, <나비효과 1,2>에서처럼 선택의 결과가 미래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상상도 해보았습니다. 두 가지 후회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두려움 혹은 의구심 때문에 하지 않고서 '~했어야 하는데'라는 후회와, 일단 저지르고 나서 '~하지 말았어야 하는데'라는 후회. 전 후자를 추종해왔고 이것저것 다 해보자는 생각이 앞섰습니다. 물론 지금도 이 생각에는 변함이 없지만요. 그렇다 하여도 제게 허락된 자리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았다는데서 자의성이 강한 '선택'이라고 믿고 싶은게 사실입니다.
비교적 아니 절대적으로 하고 싶은 일만을 해왔습니다. 고등학교땐 연애가 하고 싶어서 연애를 했고, 대학을 가고 싶어져서 공부를 했고, 대학에 와서야 한계를 모르던 새내기이기에 하고 싶은 것들은 마음껏 했습니다. 여행을 가고 싶어 배낭 하나 메고 떠났고, 친구를 만났고, 사람을 만났고, 학생회 활동을 하면서 MT준비하고 과행사 준비하고, 술자리 준비하고, 술을 마시고 싶어 미친듯이 마셔도 보고, 동남아에서 유혹받았던 마약을 못해본건 일종의 아쉬움으로 남습니다만. 심지어 입대 조차도 비교적 '자의'에 의하여 결정했고(시기 방법, 주특기 모두) 그렇게 이 집단에 들어왔습니다.
학창시절, 그리고 대학시절 통했던 방식이 여기서도 통할 수 있을꺼라 생각했습니다. 하기 싫은 일과 꺼려지는 일이 주어졌을때 그것을 포장하여 합리화 하는 방식을 이미 터득했기에 결국은 하고 싶은 일이 되는 마법을 경험했습니다.(일례로 입시를 위한 공부를 큰 꿈을 이루기 위한 통과의례쯤으로 받아들이니 원하는 일이 되더군요) 그런 방식이 여기서도 무리없이 적용될 수 있을꺼라 생각했습니다. 아니었습니다. 하기 싫은 일은 그저 싫고 귀찮은 일이었습니다. 많이도 낙천적이고 긍정적이라 자부했지만 강요된 폭력앞에 마주서니 신념을 잃어버린적도 많습니다.
술을 강권하는 문화가 싫고(권하는 것 권함을 받는것), 권위적인 것이 싫습니다. 교수님에게조차도 인간적 '존경심'보다는 학문의 배움을 구하는 교육자의 모습을 원합니다. 정작 나조차도 버거워하는 일들을 함께 감내하자고 선동하기가 싫습니다. 호불호가 분명해지는 듯한 느낌도 듭니다.(점점 독선과 아집에 빠지는건 아닌가 고민도 되지만) 최소한의 절차적 정의에도 미치지 않는 밀실정치, 요정정치와도 같은 이러한 방식도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전화 한통, 편지 한통, 술자리 한번으로 얻을 수 있는 자리라면 정중히 고사하겠다는 자존도 있습니다.
끝으로 어제의 고민이 헛된 시간들이 아니었음을 믿습니다. 적어도 진지한 물음에 어느때보다 진지하게 임했고, 확대 해석임에는 분명하겠지만 인생의 기로에 서있다고 여기며 답했습니다. 디디고 있는 토양과 환경을 포함하여 주변에 대한 모든 생각을 할 수 있게 해준 설군에게 마음을 다해 고마움을 느끼며..
이렇게 한발자욱 뒤로 물러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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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병 서동영
우리를 성숙하게 할 수 있는 그런 '고민'을 가지고 있어서 저도 늘쌍 그 누군가에게 혹은 그 무엇에게 언제나 고맙게 생각하려하고 있습니다. 06-08
병장 이주형
한 녀석이 복학을 하더니, 과학생회장이 되었습니다..
원래 그런 관계였기에 대놓고 열심히 비웃어주었었더랬죠..
좋겠구나. 굴지의 S대 법대 학생회장이 되었으니, 이제 정계 진출은 문제 없겠구나..
물론, 그 녀석은 꿈꾸던 세상을 위한 한 걸음이었겠죠.
군에서 현실을 보았겠지요.. 그런 순수함으로 움찔하지 않을 세상이라는 걸 알았겠죠..
분명 꿈은 버리지 않았어요. 하지만..
고시는 보지 않겠다던 녀석이 고시를 이야기하고, 학생회장을 이야기하는 모습이,
고등학교 시절의 순수한 혁명을 논하던 모습과는 동떨어진 듯 해 서글퍼졌었습니다..
문득, 지난 휴가 때의 서글픔이 생각나서 주절대보았습니다..(웃음)
그래도, 내게 한 표가 주어졌으면, 규언님께 한 표 던졌을 텐데... 06-08
병장 김지민
고작 과 학생회를 하면서도 저는 선배와 이런저런 뜨거운(?)토론을 해야했습니다. 저는 군대 가기 전까지만, 즉 한학기만 학생회를 한다고 이야기 했고, 그 논리로서 '두 학기를 하기에는 희생이 얻는 것보다 크다'라는 이유를 내놓았었죠. 지금도 그 논리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허영심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규언님은 테레사 수녀가 아니잖아요. 정당한 요구사항입니다. 만약에 나쁜 것이 있다면, 이득만 취하고 책임은 회피하는 행위겠지요.
어쨌거나 규언님의 고민이 끝난 것 같아 다행입니다. 잘 생각하셨어요 06-08
상병 박준연
저는 규언씨가 다른 선택을 해주시길 바랬는데 아쉽네요.(웃음)
저 역시 많은 고민을 하고 군에 입대한 덕에 혼자 남은 제 친구 녀석이 지금은 어느새 단대학생회장까지 하고 있네요. 빨리 제대하라고 힘들다고 말하는 녀석을 보고 있자니 마음도 짠한게 사실이지만 현실의 높은 벽 앞에 앞으로 많이 남은 제대 후 어떤 선택을 해야하는지 벌써부터 걱정이 됩니다. 06-08
일병 임승관
진지한 고민들 속에 어떤 결정을 내린다는 것만큼 힘들고 어려운 일은 없을 겁니다.
지인의 편지한통으로 시작된 고민은 단순히 그 지인이 던져준 문제만 아닌 자신의 내면에 있는 많은 것을 고민하게 했었으리라는 생각됩니다.
' 학생회장'이라는 타이틀과 그 타이틀에 따르는 책임(하기 싫고 꺼려지는 일도 포함되어 있는)사이에서 고민하는 모습은 비단 진규언 병장님만이 아닌 우리 모두의 고민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부디 하지않겠다고 결심하신것에 대해 다른 감정(죄책감 비슷한)은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타이틀과 그에따른 책임을 모두 버리신 결정에 대해 모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또한 군에 오기전에 하셨던 생각(오기전에는 학생회장을 하려고 마음먹었다면)이 지금과 다르다고 하여서 자신이 변한게 아닌가 라는 생각도 하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사람은 항상 변하는 존재고 그 변화가 좋은 변화인지 나쁜 변화인지 판단하는 것은 자신이 제일 잘 할수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남들의 평가가 두렵고 남들이 수근거리는게 신경쓰여서 자신의 의사를 제대로 밝히지 못한다면 그것만큼 바보같은 것도 없을거라 생각합니다. 저는 당당히 자신의 의사를 밝히고 그 의사를 한마디 말도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그 지인분과의 관계가 부러울 따름입니다. 06-08
병장 진규언
동영, 그래서 그 친구녀석에게 한없이 고마울 따름입니다. 언제나 도움을 받는 위치가 되니 새삼 미안하기도 하구요.
주형, 군에서 현실을 보셨음이 짐작되는 그 친구분은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시는지도 참 궁금합니다. 나중에 기회되면 소식 전해주세요. 꿈꾸던 세상을 향한 한걸음을 내딛기 위해 새로운 방식을 모색하는 그 분의 앞날을 기원합니다. 서글픔을 느끼셨을 법한 주형님도 이해가 되구요. 과찬이세요.
지민, 이득만 취하려고 하고 책임을 회피할것 같은 두려움이 앞섰습니다. 저의 그릇이 아닌것 같으니까요. 일전에 지민님이 학생회 이야기를 해주셨을때가 기억나네요. 그 변하지 않는 논리를 존중합니다. 저도 일정부분 덕을 보았어요. 감사해요.
준연, 얼른 가서 그 친구분 도와주세요(웃음) 지나치게 속단하는 것이라면 죄송스러운 말씀이지만 걱정하고 계시다는 자체에서 준연님은 그 친구분 곁에 계실 자격이 있는것 같아요. 고맙습니다.
승관, 진심어린 조언 감사합니다. 언급해주신 내용들이 앞으로 저에게 주어진 과제인듯 합니다. 사실 자랑할만한 사이입니다. 가타부타 긴말 하지 않더라도 서로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사이. 이것 또한 복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06-08
상병 정민수
승관님의 말이 가슴에 참 와닫네요(웃음)
남들의 평가가 두렵고 남들이 수근거리는게 신경쓰여서 자신의 의사를 제대로 밝히지 못한다면 그것만큼 바보같은 것도 없을거라 생각합니다.
착한아이 컴플레스라는 말이 있죠. 남들의 기대를 저버리는 행위나 자신을 바라보는 이들에게 실망감을 안겨줄 행동을 거부하는... 대한민국 부모님들의 교육열의 부산물이며. 이승일 병장님의 밑에 글에서 언급한 새로운 영역(외모, 패션, 직업)처럼 '타인의 시선'에 의해 생겨난 것들 중 하나일 수도 있겠군요. 아니 그것을 의식하는 것에서 생겨났겠죠...
그러한 삶을 살았던 저로서는 마치 저를 질책한 말인냥 가슴이 욱씬 거리는 말이네요..
말이 자꾸 헛도는데 어쨌건 저는 진규언 병장님께서 하신 선택이 옳으리라 믿습니다. 많은 고민 하셨을 테고, 후회의 무의미함은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그 십자가를 직접 어깨에 짊어지실 수도 있었겠지만, 아쉬워하지도 후회하지도 않고 그저 그 홀가분함을 즐기시면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결정하느라 수고하셨습니다.(웃음) 06-08
상병 구본성
오홋, 왠지 따뜻한 광경이네요. 06-09
병장 김청하
잘 읽었습니다. 전 누군가의 앞에 나선다는 것, 그 자체가 일종의 폭력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었어요. 그리고 언제나 사람들은 앞에 나서고 싶어하는 것으로 보였죠.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네요. 과연 사람들은 무엇을 원하는 걸까요. 06-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