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과 인격성
병장 이승일 05-02 16:03 | HIT : 319
니체는 자신의 첫 서물인 <비극의 탄생>의 서두에서, 예술의 아폴론적 경향과 디오니소스적인 경향을 남녀관계에 비유했다. 그가 바라본 남녀관계는 "재생산을 위해 이따금 결합할 때를 제외하고는 끊임없이 서로 갈등과 충돌을 빚어온" 그런 관계였다. 요즘 세대가 그 어느 때보다 재생산(이전의 단계)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녀간의 상호 갈등은 그 어느 때보다 큰 것 같다.
남녀관계에 관한 사회적 담론이 참으로 어려운 이유 중 하나는 우리 중 그 어느 누구도 남성 혹은 여성이라는 카테고리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점에 있다. 물론 제 3의 성으로 불리는 소수자들이 존재하지만, 이들의 입장은 양자를 포괄하는 객관적 입장으로 간주 된다기 보다는 말 그대로 단지 제 3의 입장으로 간주되곤 한다. 또한 이들 자신이 당면한 문제는 오히려 남녀문제보다 더 클 것이기 때문에, 어떤 조언이나 관조적 시각을 제시해줄 입장에 놓여있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결국 대부분의 남녀는 한쪽으로 치우친 여건을 가지고 시작할 수밖에 없으며, 이 한계에 대항하건 혹은 순응하건 그 영향력 하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관점 역시 - 나 개인의 한계를 떠나서 - 이 문제가 지닌 특수한 한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 때문에 나는 마치 남녀를 초월한 인간으로서 말하는 척 할 수 없을 것이다. 아래에서 이야기할 관점은 어디까지나 한 남성의 관점이다.
그러나 이 한계가 아주 분명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것을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한계로 만들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남녀문제를 보다 근본적인 <인간의 문제> 속에서 다룰 때에 가능하다. 남녀 문제는 남녀를 제대로 바라볼 때에만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으며, 남녀를 제대로 바라본다는 것은 결국 인간을 제대로 바라본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나는 남녀의 문제가 근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그릇된 시각으로부터 비롯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한 인간의 정체성을 그가 가지고 있는 속성을 통해서만 이해하려는 현상주의적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한 인간은 그의 성격, 사회성, 외모, 지능, 말투, 재산, 거주지, 직업, 가족, 학교, 친구 등등의 집합으로 간주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이러한 기준을 통해 '평가' 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것이 한 개인이라는 존재의 전부인 것으로 인식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 평가기준들이 얼마나 삭막하건 혹은 아름답건 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어떠어떠한 속성, 기준의 집합으로 간주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한 것이다. 이는 신경과학에서 인간의 의식마저 기능의 한 종류로 생각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에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과거 가부장제 사회의 남성들이 남녀간의 특성 차이를 본질적인 차이로까지 소급했던 것도 이와 같은 맥락 위에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또한 일부 페미니스트들이 남녀가 동일한 인격적 존재라는 이유로 동일한 특성까지 지녀야하는 것처럼 주장하는 것도 마찬가지 시각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한 개인이 인격적 존재라는 사실은 그가 지니고 있는 구체적인 특성들로부터 구별되어야한다. 인간의 본질적 가치는 오직 그가 인격적 존재라는 사실에 놓여있을 뿐이며, 그가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고 어떤 외모와 출신, 지능과 직업을 가지고 있는지는 우연적인 가치에 불과하다. 이 둘을 구분하지 못하거나 아예 한 쪽을 폐기처분할 때, 우리는 우연적 차이를 본질적 차이로 확대하거나, 혹은 본질적 동일성을 우연적 동일성으로까지 확장하게 되는 것이다.
한 인간의 인격적 가치는 타인과 사회, 혹은 여러 환경적 요소들에 의해 침해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닐 뿐 아니라 자기 자신조차 훼손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자의식을 소유한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은 우리가 결정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단지 그렇게 태어났고, 거기서부터 출발했을 따름이다. 우리는 자신의 우연적 속성들을 바꾸기 위해 노력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 하겠지만, 인간이라는 사실을 바꿀 수는 없다. 심지어 자살조차 그가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무효로 만들지는 못한다.
어떤 사람은 <가치>라는 것이 순전히 사회적으로 합의되는 것이기 때문에, 궁극적인 의미를 지닐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홉스 이래로 꾸준히 유행하는 하나의 가설이다. 그러나 과연 우리가 언제 가치에 대해 합의한 적이 있었는가? 역사상 어느 사회에서 한 곳에 모여 어떤 가치를 자신들의 가치로 받아드릴지 합의했는가? 사회계약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암묵적으로" 합의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암묵적 합의의 실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암묵적으로조차 설명해주지 않는다. 단지 어떤 모종의 메커니즘에 의해 알아서 합의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대체 무엇을 더 설명해주는가? 과학자 집단은 서로 토의하고 의논해가면서 과학적 지식을 새롭게 구축해가지만, 그렇다고 해서 과학적 사실이 그들의 합의에 의해서 <제조>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토의와 의논은 어떠한 변형은 가할지언정, 과학적 사실의 뿌리는 실질적인 자연현상에 있는 것이다. 가치라는 것도 이와 유사하게 생각하지 말아야할 이유가 있는가? 사람들은 가치에 대해 논의하고 토의하지만, 그것을 통해 가치를 생산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가다듬고, 더 잘 살펴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주장이 사회계약설보다 덜 설명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오히려 이러한 사고방식은 어째서 사회적 가치들이 각기 다르면서도 또한 여전히 비슷할 수 있는지 설명해준다.
가치의 의미를 인정한다고 하여도, "인격적 존재" 라는 것의 현실적 가치가 무엇이냐, 과연 실질적으로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냐고 반문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인격성이란 너무나 기본적이며 또한 추상적인 것이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어떤 영향력을 행사하기는 힘들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단지 공허한 외침에 불과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가 대하는 것은 결국 그 개인의 구체적인 특성들이지 인격성 그 자체가 아니라는 주장도 가능하다. 그러나 너무 큰 것은 도리어 보기 힘들고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은데, 위와 같은 의견도 비슷한 착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인격성은 다른 특성들을 '통해' 표현되는 것일 뿐, 다른 특성들로 이루어져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우리가 눈을 통해서만 사물을 볼 수 있다고 하여 모든 사물이 눈 속에 포함되어있는 것은 아닌 것처럼 말이다. 또한 인격성은 그 자체가 공허하거나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자세히 생각해보면 타인을 인격적 존재로 대한다는 것이 갖는 현실적 의미가 결코 적지 않음을 발견할 수 있다. 우선 우리가 타인을 인격적 존재로서 존중하는 한, 그의 메세지를 근거 없이 배척하거나 외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격성의 가장 중요한 측면은 소통이 가능한 주체라는 점에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 부당한 정신적, 물리적 폭력을 행사할 수도 없을 것이며, 그를 수단으로 이용하지도, 부속품으로 사용할 수도 없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물건을 대할 때에 하는 행동방식이지 인격적 존재를 대할 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러한 기본적인 배려와 존중만 지켜지더라도 우리 사회가 경험하고 있는 남녀간의 문제는 매우 사소한 영역으로 축소될 것이 분명하다.
인간의 인격성을 나머지 속성으로부터 근본적으로 구별함으로써, 우리는 남녀간의 특성 차이를 어느 정도 선천적인 것으로 인정하면서도 그 평등함을 함께 주장할 수 있다. 남녀는 사회나 관습은 물론이거니와 자기 자신에 의해서도 변경될 수 없는 인격체라는 점에서 동등하지만, 능력이나 성격, 알맞는 분야 등에 있어서 통계적인 차이가 존재하지 말라는 법은 없는 것이다. 개개인의 문제에 있어서는 독립적으로 접근해야하겠지만,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에 여성이 설사 남성보다 언어적 능력과 사회성이 우수하고, 남성이 여성보다 기계적, 수학적 사고능력이 우수하다고 해서 그들의 인격적 가치에 어떤 차등을 초래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인격적 존재라는 구심점이 존재하는 한, 나머지 특성들의 다양성과 차이는 우리 사회에 풍성함을 가져다주는 요소가 된다.
일부 페미니스트들은 그러한 구심점을 너무 가볍게 생각했고, 그래서 남녀간의 차이를 풍성함으로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페미니즘이 기존 사회가 상실하고 있었던 여성성의 긍정적인 면을 제공할 수 있기를 바란다. 여성성의 긍정적인 면이란, 다른 무엇보다도 질서와 규칙을 넘어설 수 있는 사랑, 즉 모성애에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가 최선의 질서와 규칙을 추구하면서도 그 한계를 극복하는 사랑을 발휘할 수 있다면 이는 가장 이상적인 모습이 될 것이다. 그러나 현재까지의 페미니즘은 단지 여성 스스로가 여성성을 버리고 남성들의 문화에 비집고 들어옴으로써 마찰과 경쟁의식만 키운 점이 큰 것 같다. 단지 여성과 남성간의 밥그릇 싸움으로 문제를 변질시켰다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페미니즘의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되며, 알맞은 정당성을 보장받을 수 없고, 그래서 실패할 수밖에 없다. 페미니즘은 오히려 밥그릇의 종류와 크기를 확장시키는 운동이 되어야한다. 우리가 밥그릇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 역시 충분히 밥그릇이며, 심지어 더 중요한 밥그릇일 수 있음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성주의는 기존 사회가 놓치고 있었던 여성적 가치와 삶의 형식을 보여줌으로써 오직 물질적 부의 축적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시키고 있는 우리 사회의 병폐를 치료하려고 했어야한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페미니스트들은 오히려 그 병리 현상에 참여하는 것을 자신들의 목표로 삼았고, 결국 그들이 원하던 대로 병들고 말았다.
다시한번 강조하지만, 자신이 남성이건 여성이건, 남녀 문제를 양성간의 경쟁의 문제로 볼 것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인간의 문제, 인간 가치의 문제로 간주해야 한다. 우선 인격적 동등함이 결코 공허한 구호가 아니라 그 무엇보다 현실적이고도 직접적인 요소라는 것을 자각해야한다. 그리고 그 인격적 동등함을 흔들리지 않는 축으로 하여, 양성간의 차이를 불일치가 아닌 풍성함으로 간주할 수 있어야한다. 그 때에만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없는 것처럼 현실을 왜곡하지 않을 것이며, 그 차이를 오히려 반갑고 다행스러운 것으로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우리 사회의 일부 지식인들은 남성성과 여성성에 대한 구별이 남녀의 평등을 해친다고 여기고 있다. 그 결과 남성성과 여성성에 대한 구별이 사라지기는커녕, 서로의 도움을 전혀 받지 못하고 따로 떨어진 채로, 가장 천박한 모습으로 사회에 만연하게 되었다. 일부 페미니스트들에게 남성성은 폭력, 부패, 근거 없는 권위에 대한 추상적 표현으로, 일부 남성들에게 여성성은 '된장녀' 라는 유행어가 암시하듯이 사치와 무책임함, 신변잡기성의 표현으로 간주되고 있다. 남성성과 여성성은 역사적으로 모든 사회와 문화권에서 받아드려진 범주이며, 우리가 부정한다고 해서 제거되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또한 이 중 어느 하나가 지나치게 강조될 때에도 우리는 그것의 가장 부정적인 측면만을 마주할 수밖에 없다.
남녀의 인격적 고귀함은 이러한 구체적인 속성들로부터 비롯하는 것이 아니다. 이 사실을 받아드릴 때 오히려 남성성과 여성성을 현실적인 것으로, 그리고 자연적인 것으로 인정할 수 있고 그 때에만 이들의 긍정적인 면을 사회에 드러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오직 그 때에만 페미니즘은 여성은 물론이거니와 인간 사회에 자그마한 빛을 던져줄 수 있을 것이다.
중위 정도환
잘 읽었습니다.
근데 파란건 글자고, 흰건 바탕이란것밖에 모르겠어요.
너무 어렵네요(눈물) 05-03
병장 진규언
가지로!
.. 라고 외침으로써 승일님의 글에 대한 평을 일단락 짓고 싶네요.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페미니즘과 그에 대항하는 마초적인 행태들 간의 논의는 적어도 이정도의 '상식'선에서 출발해야 할텐데요. 인간을 여성이건 남성이건 보다 근본적인 인간의 문제, 인간 가치의 문제로 간주해야 한다는 승일님의 주장에 전면 동의합니다. 참 잘 읽었습니다. 05-03
병장 한치영
받아드릴 때(x)->받아들일 때(0)
' 여성주의는 기존 사회가 놓치고 있었던 여성적 가치와 삶의 형식을 보여줌으로써 오직 물질적 부의 축적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시키고 있는 우리 사회의 병폐를 치료하려고 했어야한다. '
' 여성성의 긍정적인 면이란, 다른 무엇보다도 질서와 규칙을 넘어설 수 있는 사랑, 즉 모성애에 있다고 생각한다'
-> 어쩌면 이것도 여성성에 대한 암묵적 강요인듯 싶어요.(여성이라면 모성애가 있어야 한다라는 측면에서 말이지요) 기존의 남성위주 사회에서의 병폐를 여성이 치료하려 노력했어야 했다라기 보다는...그러한 병폐들을 꼬집어내고 함께 고쳐나갈수 있도록 이끌었으면 좋았을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남녀의 문제가 인간에대한 그릇된 시각에서부터 비롯된다는 점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여담입니다만...모 여자 대학교의 슬로건이 갑자기 생각이 나네요...'세상을 이끄는 부드러운힘'...(웃음) 05-03
병장 이건룡
최근 페미니즘의 양상이 여성의 새로운 가능성 모색에 대해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들었습니다. 제 귀에 들리는(들렸던) 말로는 기존의 사고방식에서 혁명적인 반항을 통해 병폐에 대한 타파에 대한 탐구정도와 그리고 이들의 대다수가 병리적인, 기형적인 꽃을 피우고 말았다는 결말에 다다른 점정도. 그렇지만 이들의 천박한 주장이야말로 되씹어 볼 수 있는, 부 적절한 방향이 될지언정 참고할 중요한 지점에 대해 물음을 던져 봅니다. 성적인 관계에 대한 도착적인 과잉의 풍경이 일상화 되어 버린 이지점에서는 여성의 권리에 대한 호소의 강조는 언제나 재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는 점과 더불어서 말입니다(승일님과 병리적인 측면을 달리 보자면 여느 목소리와 함께, 여성들의 호소는 은폐되어 가고 있는 '진실', 그리고 현실성과 함께 라고 생각합니다).
그 뿐 아니라 인격적인, 품성과 같은 심성에 대한 강조, 서로 존경과 존중은 어느 지점에서 상호 불가침 적인 양상과 같이 들립니다. 다시 말해 서로의 입장에 대한 상대적 불가침 조약은 서로에 대한 거리와 불신만 벌려 놓을 공산 속에 이루어진 계산적인 이해로써 이루어지듯, 보충하자면 인간의 유대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에 의해 찢어지고 계산적 관계를 통해 복건 된 관계, 바로 이를 통해 발전한 거래의 윤리와 같은 의심이 듭니다(나쁜 것만은 아니지만....).
(* 제 글이 너무 무뢰한 게 아닌지 걱정이 드네요) 05-03
병장 서정현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근데 페미니즘은 이거다 하고 딱히 이야기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스펙트럼을 지니고 있습니다. 글에서 '일부 페미니스트들이 말한다' 라는 건 정확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그래서 특정 페미니스트의 글과 사상을 가지고 페미니즘을 논하기는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하지만 '여성성의 긍정적인 면이란, 다른 무엇보다도 질서와 규칙을 넘어설 수 있는 사랑, 즉 모성애에 있다고 생각한다. '부분은 대부분의 페미니즘에서 동의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치영님 리플처럼 일단 여성성과 남성성이라는 것으로 규정하는 자체에서도 관습과 차별적인 시선이 존재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특히 모성애라는 것이 여성성의 대표적인 것으로 이야기되고 있는데.. 이것 또한 자연계의 다른 생물에서는 모성애라는 것이 없는 종족도 많음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된 최재천 교수님의 책이 있는데 제목이 기억나지 않네요 죄송합니다.)
암튼 이렇게 나누는 것 자체가 오히려 제3의 성(?)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가져오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은 제 생각입니다 05-03
병장 이승일
정현, 치영 / 뜻은 알겠습니다만, 여성성과 관련하여 제시하신 문제는 저의 의도를 오해한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그에 대한 답변은 이 글에서 이미 이루어졌다고 생각구요. 만약 이 글에서 그 답변을 찾지 못하셨다면, 안타깝게도 제가 추가로 더 드릴 수 있는 말씀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매번 많은 분들이 저의 맞춤법을 지적해주시는데도 불구하고 습관이 되어버린터라 항상 틀리는군요. 맞춤법도 분명한 약속인 만큼 잘 지키려고 노력하겠습니다.
건룡 / 건룡씨가 보시는 관점, 즉 병리현상이 아니라 은폐된 진실이라는 말도 충분히 현실의 일면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지 어느 쪽 시각이든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시각은 아마도 없을 것 같아요. 샤워기에서 현재 차디찬 찬물이 나오고 있다고 해서, 제일 뜨거운 쪽으로 레버를 옮기는 것이 결코 그렇게 현명한 일이 아닌 것처럼 말이지요. 한 개인의 변화도 오랜 시간 속에서 이루어지는데, 사회의 변화가 한순간에 오기를 바란다면 과욕이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모든 과욕은 결국 또 다른 부작용을 낳기 마련이지요.
한편 두번째 단락에 대해서는 전혀 동의하지 못하겠다고 말씀드릴 수밖에 없군요. 상대방의 인격성에 대한 존중은 결코 상호불가침 조약과 같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서로 아무런 영향력도 주고받지 않는다 수동적 의미에서의 비폭력이 아니라, 서로에게 긍정적으로 개입한다는 의미라고 생각해요. 물론 '긍정적' 이라는 말에 대해 사람마다 다르게 생각하지 않느냐, 라는 반론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유사성이 더 크다고 생각하며 우리가 주목해야할 것은 바로 그 유사성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서로를 존중하는 것이 어떻게 서로를 더 계산적으로 만들겠어요. 05-03 *
병장 이건룡
서로간의 인정과 존중으로 인한 조화로써 긍정적으로 미래를 기안하는 사고에는 동의를 표하지만 이를 위한 매회 거듭 인정과 존중을 반복한다는 전제 아래에서입니다(계산적인 관계를 오히려 권장할 수 있죠). 안주하는 조화는 이를테면 진정한 배반이 그러하듯 윤리적-이론적인 최고의 충실성의 행위에 기대어 있습니다.
"유대인이 예수쟁이를 모욕한다면 예수쟁이의 관용은 뭐겠소? 복수요. 예수쟁이가 유대인을 박해한다면 우리가 예수쟁이를 본뜰 때 유대인의 인내는 뭐겠소? 물론 복수요. 당신들이 내게 가르쳐준 그 악행을 실행하리라. 무슨 일이 있어도 내 배운 것 이상으로 훌륭히 해낼테요."(베니스의 상인중 샤일록)
< 베니스의 상인>을 참고하자면 당시 가장 발전된 도시공동체(유대인과 기독교인의 공존) 안에서의 기독교인과 유대인간의 공동체의 구조를 묘사하기는 보다는 파열지점을 가리키고 있는 작품으로 보아. 위의 샤일록에게는 기독교의 '관용'과 유대인의 인내를 대립시키지만 그것들은 결국 '복수'라는 점입니다. 다시 돌아와 긍정적인 결과/바램에 부쳐진 긴장이 "존재의 일의성을 역설하면서 모든 이질적인 요소들을 동일한 '일과성의 평면'"내에 모여진 바에 비추어질 수 있다는 우려입니다. 다들 <베니스 상인>을 보았듯이 샤일록은 안토니오와의 숭고적 제스처(어떤 경제적 이해관계를 부정하는 듯한 '우정'에 대한 집착)을 모방하여 '살 1파운드'에 빌려준 돈을 포기한다는 점에 있습니다.
바타이유에게 잠시 빌린 '일과성의 평면' 돌려주자면 "다시 말해, 진정으로 전복적인 작인은 존재의 일의성을 역설하면서 모든 이질적인 요소들을 동일한 '일관성의 평면'내에 모은다. 확립된 질서를 그것의 초재적인 외상적 중핵으로 억지로 몰아가는 우스꽝스러울 마치 애처로운 가짜영웅주의 대신 우리가 얻는 것은 눈도 깜박이지 않고......윤리와 비역질을 동일한 계열에 놓는 무관심한 열거이다.' 같은 위반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앞서 핀트에 어긋나는 설명을 장황하게 설명했지만 요는 서로에 유사성에 비추어 놓은 인격적 존재에 대한 동등한 우대 보다는 차라리 그 유사성을 찢어버려야 할 필요가 있다는 점입니다. 이 말은 페미니스트에 대한 논의 중 일련의 유사성보다는 서로의 차이점에 대한 강조입니다. 우리는 지루하게나마 남성과 여성의 차이점을 명확하게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남성과 여성의 거리가 심하게 벌어 졌다고 해서 남성에게 여성은 다른 종으로, 여성에게 남자는 다른 종이지 않습니다. 그렇다 해서 결코 서로의 긍정적인 점을 취해야 한다 해서 결코 남성이 여성이 될 수 없고, 여성은 결코 남성이 될 수 또한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은 남성이 있어 여성이 있고, 여성이 있어 남성이 있다는 맥락에서 이루어져야 할 필요가 있다는 점입니다.
(* 더구나 출산을 위한 성행위와 쾌락을 위한 성행위는 구별 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05-04
병장 이승일
대답은 간단하군요. 유대인에게 복수한 기독교인이 있을지언정, 기독교는 유대인에게 복수하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성경을 읽어보신 적 없으시기 때문에 모르시겠지만, 예수의 가르침은 유대인으로부터 시작하여 유대인에게 끝난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유대인이 예수를 외면하고 죽였지만 결국 지구 한바퀴를 돌아 예루살렘에까지 복음이 다시 전해질 때에 그 가르침이 완성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유럽과 미국을 거쳐 동아시아까지 왔으니 얼마 더 지나면 예루살렘까지 가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예수쟁이의 관용이 복수라는 것은 단순히 사실이 아닙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이 끝까지 관용을 실현할 수 없다는 점을 두려워하며 남도 그럴 수 없다고 믿고싶어합니다. 그리고 대체로 그것은 사실이지요. 그래서 누군가가 관용을 주장하면 그것을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주장이 관용을 실현시키지 못하는 자신을 가엾고 한없이 작은 존재로 만드니까요. 그래서 그 주장을 끝내 파괴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자극하죠.
" 어디, 이렇게 해도 관용할래? 그게 가능한 일이야?" 라고 말하면서... 그러나 그 순간 정말로 파괴되는 것은 자기 자신입니다. 리플의 앞부분에 대한 대답이었는데 페미니즘과는 빗나간 이야기가 되었군요. 05-13 *
병장 김지민
옛날에 페미니즘과 관련된 논쟁에서 (문정희 시인의 시로 인했던) 제 답글을 보고, 하지연씨가 '지민씨의 감성은 남녀노소는 물론 국적까지 초월한 인간의 감성이군요' 라는 과한 칭찬을 해주셨었는데, 아직도 기억에 남습니다.
맞아요. 결국 중요한 것은 인간이라는 것이 가장 중요할테지요. 잘 읽었습니다. 06-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