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기 전에

한창 이 책을 읽기 위하여 출퇴근시 들고다니던 때, 하루는 한 광부님께서 어찌 알아보시고 “너 왜 이념서적 읽냐 임마?, 어쭈, 보안성 검토필도 없네, 너 임마 콩사랑이냐?” 라고 물었다. 나는 허허, “아닙니다” 라고 싱겁게 받아쳤고, “이런거 읽으면 안돼 임마 너 임마 이거 콩사랑 교육을 위한 개론서야 임마”라는 반박이 다시 또 들려왔다. 나는 또 허허, “비판적으로 읽고 있습니다” 라고 싱겁게 받아쳤다.
하여간에 어찌어찌 어물어물 그 상황은 종료되었고, 나는 다시 별 탈 없이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사실, 그 광부님의 말씀과는 달리 이 책은 별로 콩사랑 이야기가 아니다. 분명 권위적 집단이 지배를 하는 상황아래서는 ‘위험한 책’(물론 지배 권력들에게 있어)일 수 있지만 그렇다고 콩사랑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그 분은 뭐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내게 이러쿵 저러쿵 떠들었다는 소리

중요한 건 이게 아니고, 이 책이 그래서 무얼 말 하길래, (콩사랑은 아니더라도) 위험한 ‘이념서적’으로 분류되는 가능성을 가지냐는 것이다.


1. 부제 : 억눌린 자들을 위한 교육

사실상 이 위험성은 책 표지에서부터 떡 하니 제시되고 있다. 앞서 말했던 ‘지배 계층이 위기의식을 느낄 수 있는 요소’를 ‘위험요소’라고 분류한다면, 분명 이 책은 그 부제만으로도 위험요소가 충만한 책으로 분류될 수 있다. 왜냐하면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를 어떤 조직적 필요에 의한 상대적 관계로 파악하기 보다도, 억누르고 억눌리는, 피의자와 피해자의 관계, 즉 옳지 않은 관계, 부적절한 관계로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억눌린’이라는 어휘에서 쉽게 간파될 수 있으며, 따라서 피지배계층이 이 책을 읽을 경우 발생될 효과 역시 쉬이 짐작해 볼 수 있다. 
바로, ‘지배 계층에 대한 불만과 비판’이다.

알다시피 지배계층으로서는 피지배계층이 불만없이 잘 따라주는 것이 가장 마음 편하고 부리기 좋다. 조종하는대로 따라와 주면 일이 잘못되더라도 자신들의 기득권을 빼앗길 염려가 없기 때문이다. 이를 위하여 지배계급은 문화침해를 자행하고, 자신들의 우월성을 심어주는 한편 피지배계급에게는 열등감을 주입한다. 뿐만 아니라 反대화적 실천을 통하여 인간을 도구화 시키는 것이다.

이런 끔찍한 지배화의 실행이 어떤 방식을 통해 이루어져 왔느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그 정점에 바로 ‘교육’이 있었노라고 이야기 할 수 있다.


2. 은행예금식 교육

그렇다면 
지금까지 우리가 받아왔던 교육을 생각해 보자. 권위적이고 주입식 위주의 교육이 떠오를 것이다. 파울로 프레이리는 바로 이러한 교육의 형태를 ‘은행예금식 교육’이라고 지칭한다. 이것은 교사,(혹은 교육자, 극단적으로는 세뇌시키는 자)가 학생들을, 지식을 넣어서 예금해야하는 통장이자 은행으로 인식하는 데에서 기인한 말이다. 이러한 인식 속에서 학생들은 교사들보다 지식이 없는 자, 열등한 자로 분류되며, 따라서 교사는 지식을 다량 보유하고 있음에 대하여 우월함과 권위를 가질 수 있다. 또한 이런 우월감 안에서 점진적으로 문화침해가 자행되는데, (문화 침해란 말 그대로 상대방의 문화를 침해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권위계급이 문화침해를 자행할 경우, 피지배계급의 문화는 열등한 문화로 전락되어 버리고, 결국 열등감의 고수가 이어진다. 또한 이런 문화 침해 안에서 피지배계급은 지배계급에 대한 동경을 나타내게 되고, 따라서 지배계급은 신화화 될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학생들끼리 소규모의 시 창작 동아리를 만들어서 운영하고 있다고 생각해 보자. 시 깨나 읽었다는 교사가 다가와, 지식의 힘을 빌어 권위적이고 反대화적인 충고들을 늘어놓는다. 이는 곧바로 문화침해로 이어진다. 문화침해는 상호 이해가 바탕되지 않고 오로지 무시만이 있을 뿐이다. 그들만의 시 문화를 형성하고 있던 학생들의 문화는 침해를 통하여 깨어지고, 흘러들어온 교사의 권위적 문화 앞에서 무너지고 재정립된다. 이제 그들의 문화가 향하는 길은 가능성의 길이 아니라, 열린 길이 아니라 닫힌 길, 교사가 제시하는 길이 된다. 교사의 권위는 동경이 되고, 이러한 열등감 앞에서 학생들은 교사의 詩眼과도 같은 능력을 갖추리라 동경하게 된다.
따라서 이들의 시세계가 발전하는 길은 잘해야 교사의 뒤를 잇는 것이고, 아무리 잘나봐야 조금 변형된 형태로서 자리잡을 수 있을 뿐이다. 이것이 닫힌 교육이며, 은행예금식 교육의 결론이다.


3. 문제제기식 교육

이러한 은행 예금식 교육의 병폐 앞에서 대항하는 파울로 프레이리의 교육이론, 즉 ‘억눌린자를 위한 교육’이란 바로 ‘문제제기식 교육’이다. 문제제기식 교육이란 은행예금식 교육과는 달리 교사와 학생을 권위있는자와 배우는 자의 몫으로 배열하지 않고, 둘 모두를 배우는 자, 상호간에 배우는 자로 배열한다. 따라서 교사와 학생은 동등하며, 교사는 학생들에게 길을 선택시키는 역할이 아닌 ‘이 길은 어떨까’하며 가능성에 대해서 모색할 수 있는 관계가 된다. 

이러한 문제제기식 교육의 바탕에는 ‘자유’에의 추구가 깊이 함축 되어있다. 인간은 누구나 조금 더 인간다워 질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인간다움’이란 동물들과 차별화 되는 ‘실천하는Praxis 인간’이 되는 과정이다. 여기서 실천하는 인간이란, 타인에 의하여 도구화 되지 않고, 자유를 추구할 수 있는 인간을 말한다. 주체로서 행동하고 실천할 수 있는 인간이 바로 인간다운 인간이다. 파울로 프레이리가 제시하는 문제제기식 교육이 추구하는 인간상은 바로 이러한 ‘인간다운 인간’이다. 

따라서 문제제기식 교육은 끊임없이 인간다운 인간을 양성 할 수 있어야 하며, 만약 이러한 교육이 지배권력 아래에서 실천되고 있다면, 언제든 지배권력의 부조리함에 대하여 문제제기 할 수 있는 실천적 능력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프레이리의 의견이다. 피지배계급(페다고지 중에서는 주로 ‘민중’이라는 어휘로 언급하고 있다)은 자유에 대한 공포(일테면, 자신이 자유를 획득하였을 때 감당해야 하는 일들에 대한 공포, 책임에 대한 공포)로 인하여, 또한 지속적으로 자행되어 왔던 문화 침해와 反대화적 대화, 신화화를 통해 자신들의 입지에 만족하며, 지배계급을 스스로 정당화 하는 우를 범하고 있지만, 문제제기식 교육은 이러한 우를 깨부수고 민중 스스로 개혁하고 인간화 되어야 할 길을 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다는 것이다.

4. 한계점

하지만 이러한 문제제기식 교육을 통한 혁명은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다. 앞서 말했듯이 피지배계급은 오랫동안 은행예금식 교육을 통하여 자기도 모르는 사이 ‘길들여져’ 왔고, 이것은 그들 스스로의 열등감을 유도하며 지배계급의 정당성을 고착해 왔다. 이것은 생각보다도 더욱 무서운 것이다. 설령 혁명 지도자들이 이러한 피지배계급과 함께 호흡하며, 이러한 부조리함에 대하여 혁명을 일으키고자 문제제기식 교육을 실시한 들, 피지배계급은 자신이 속한 사회 안에서의 기득권마저 빼앗겨 버릴까봐, 혹은 자유에 대한 공포로 인하여 오히려 혁명지도자들에게 돌을 던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돌의 방향은 혁명지도자들 뿐만 아니라 이들이 제시하는 문제제기식 교육 그 자체가 될 수도 있다.

5. 나의 의견과 결언

사실 이 ‘페다고지’라는 책은 현실의 교육의 모습과는 조금 동떨어진 버전이라고 생각될 수 있다. 까닭인 즉슨 파울로 프레이리가 초기 이 이론에 대해 정립하던 시기의 목적이 ‘문맹자들’을 주축으로 하는 민중에 대한 교육이었으며,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교육’의 모습이라기보다는 ‘혁명교육’에 그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또한 시대 역시 너무나 멀리 떨어져 왔다는 점에서 우리는 시대적 한계에 대해서 역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다고지가 많은 의의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사회에서 언제까지나 존재하는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그리고 인간화에 대한 인간의 추구가 시대를 초월하는 공통분모이기 때문이다. 나는 실제로 글을 읽으면서 단순히 탈문맹화를 위해 노력하는 교육자들과 민중들의 시선에 입각하는 것이 아닌, 내가 받았던 교육에 대하여 생각해 볼 기회를 가질 수 있었고, 또한 내가 가르쳐야 할 교육에 대해서 역시 생각해 볼 수 있었다. 권위적인 교사와 배움의 통장인 아이들. 게다가 이러한 학교기관의 교육 뿐 아니라 대중매체가 실천하는 우리 사회에 대한 교육 역시도 길들여짐에 대한 시선에 입각하여 좀더 비판적으로, 객관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기회를 마련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 페다고지에서 피력하는 교육이론은 앞서 이야기한 이론적 한계 이외에도 많은 한계상황이 부딪힌다. 다들 느꼈겠지만, 사실 이 교육이론은 이상적임에도 불구하고 그야말로 이상적이기 때문에 비판을 받을 수 있다. 지배 계급과 피 지배계급을 나누지 않고 동등한 선에서 인간화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은 어느 정도 어불성설에 가깝다. 물론 파울로 프레이리 역시 이 점을 간과하고 있지는 않지만,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이런 이상주의적 교육관은 다 무상이 되는 것이다. 프레이리가 제시하는 것은 다만 지배계급이 피 지배계급과 동일화 되기 위하여 노력하고, ‘지배’보다는 ‘친교’로서 맺어져야 한다. 일 것이다. 바로 그것이 혁명 지도자들이 기약해야 할 몫이라는 것이다. 물론 더욱 중요한 것은 억눌린자들 스스로의 비판적 각성과 혁명이겠지만.

우습게도, 억눌린자들이 세계의 부조리를 객관적으로 확인하기 위해서는 ‘문제제기식 교육’이 필요하다고 페다고지에서는 이야기 하고 있다. 다만 이런 부조리함을 이야기하기 위하여, 절대로 교육자들(혹은 혁명 지도자들)은 부조리를 제시하는 형태의 교육을 취해서는 아니 되며, 억눌린자들 스스로 이러한 부조리함을 깨닫고 비판할 수 있도록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한다고 한다. 여기서 파울로 프레이리는 이러한 교육 안에서 교육자들은 학생(혹은 억눌린자들)을 도구화 하지 않고 인간화 할 수 있다고 이야기 하는데, 사실상 이것은 방법론의 차이이지, ‘그들을 깨닫게 하여 비판하게끔 만든다’라는 점에서 어느 정도 도구화를 피해갈 수는 없다. 따라서 프레이리의 이론은 모순점을 가진다고 이야기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모순점은 인간이 불완전한 것이 당연한데도 완전성을 추구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모순이다. 때문에, 어떤 면에 있어서 인간이 도구화가 되는 것은(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을 수 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할 지라도, 여기에서 도구화 자체를 진리로 인정해 버리면 인간화 추구의 길은 지워져버리는 셈이 된다. 인간은 인간화를 추구할 때 인간다울 수 있는 것이다. 즉 인간다움을 추구할 때 인간다울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페다고지의 교육이론은 많은 가치를 함축하고 있으며, 비단 혁명교육으로서의 실천뿐만 아니라 교육 그 자체의 가치관 성립에 있어서도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는 책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효과적인 교육과 참교육이 무엇인가 방황하는 이 때, 이러한 고전은 오히려 더 큰 뜻을 지닐 수 있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