팡세中 은총과 정념에 대한 나의 생각 
 병장 임정우 02-13 14:16 | HIT : 85 



 정념은 인간이란 존재를 어지럽힌다. 파스칼은 정념자체를 부정적으로 바라보았다. 정념이 우리로 하여금 올바른 이성을 따르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파스칼은 혼탁과 반대되는 것은 신의 은총이라 말한다. 은총이야말로 본유적인것으로 정념처럼 흐리고 변화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러한 은총에 어린아이처럼 따르기만 하면 될일이다. 하지만 은총이 본유적인 상태 그대로 보존되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은총은 인류를 거침으로 표면적인 종교와 내면적인 신앙으로 나타난다. 바로 구분, 은총의 나뉜 단면은 분명 변색되어지고 만다. 적어도 그 단면은 은총이 될수없다. 그곳엔 기아와 질병 증오와 분노가 거주하는 평범한 세상인 것이다. 그러기에 순수한 은총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아니라 본유적이 될수 없기에 순수해질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이 꺼냄과 동시에 필연적으로 반으로 갈라지기 때문이다.
 정념은 어떠한가. 파스칼의 말대로 애초에 정념은 혼돈을 야기한다. 우리의 보편성을 의심하게 만드는 주범이다. 정념의 그런 특질은 본유적이라고 이야기할수 있을지 모른다. 적어도 정념에서 변덕은 그것에 있어서 선험적인 무엇이라 할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 변화에는 각각의 인과가 아마 존재할것이지만 그것의 변수는 마치 우연과도 같아서, 게다가 그런 우연이 멋대로 뒤섞인 세상이야말로 어지럽고 혼동되는 것이다. 때문에 다시 거꾸로 되돌아가 정념을 탓하고 보편적인 은총에 매달리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 그렇게 은총의 빈틈에 불쑥 쳐들어온 정념에게 탓을 돌렸다 치자. 그렇다면 세상이 달라보이는가. 아니다. 질문을 다시하겠다. 그렇게 한다면 세상이 달라지는가를. 난 결코 아니다라고 생각한다. 결국 세상엔 정념이 소용돌이치고 그이유 때문이던 아니던 누군가는 증오스런 운명에 휘말려 희생될수밖에 없다. 인간이 은총을 선택하여 어떠한 구원을 획득한다해도 세상은 그대로다. 은총은 너무나 개인적이어서 안으로 파고드는 성질이 있다. 반해 정념은 그것이 옳던 그르던 그것은 밖으로 표출된다. 세상은 이러한 표출된 정념으로 이루어진다. 우리네들의 관계는 그야말로 정념끼리의 뒤섞임이다. 은총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것이 스스로 정념의 가면을 쓰지 않는 이상은 말이다. 
 나는 정념을 옹호하고 은총을 탓하려는건 아니다. 사실 둘은 별로 상관이 없을지도 모른다. 다만 나에게 있어서 정념은 솔직한 것이고 은총이란건 결국 비겁한 것이라는 결론이다.  


 일병 권당우 
 인간이 정념에 휘둘리고, 
 그것이 인간을 신성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이라면, 
 정념은 인간성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정념. 
 우리가 신의 완전무결성을 동경하는 것처럼, 
 우리 스스로도 타인에게 자신의 정념에 의한 결점을 보이고 싶지 않아 
 완벽한것처럼 나타내고 싶은거겠죠. 

 결국은 모두 정념에 가득찬 인간인데도요. 02-13   

 병장 이승일 
 정우씨의 훌륭한 통찰을 보여주는 글이지만, 개인적으로는 조금 공감하기가 힘들군요. 
 인간사회가 정념에 의해 지배받고 있다는 정우씨의 판단과 파스칼의 주장은 어떤식으로건 상충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또한 그로부터 '정념은 솔직하고 은총은 비겁한 것' 이라는 주장이 왜 따라나오는지도 분명치 않은 것 같습니다. 
 저는 정직함과 배설은 비슷한 것이 아닐 뿐 아니라 극단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정념의 무제약적 표출은 정직함이나 솔직함이라기보다는 배설에 불과하고, 이점에 관해서라면 우리들보다 동물들이 훨씬 일가견이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것이 단지 개인적이기 때문에 부정적으로 취급되는 것 역시 이해하기 힘들군요. 설사 사회적 관점에서 본다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사회는 결국 그 개인들의 집합이니까요. 개인이 달라진다면 당연히 사회도 달라지겠지요. 무엇보다도, 한 개인에게 있어서, 만약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변화시킨다면 그에게 세상은 전혀 다른 존재로 비추어질 것이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우리 모두 (하나의 사회가 아니라) 하나의 개인임을 상기한다면,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의미있는 관점은 하나의 개인으로서의 관점이며,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변화시키는 것이 결국 궁극적인 변화를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하고 싶군요. 
" 너 자신을 개선하라. 그것이 네가 세상을 개선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이다." 02-14 * 

 병장 임정우 
 승일님이 답글을 달아주시다니 영광입니다. 
 그냥 뜬금없이 떠오른 단상을 찌그린건데, 하하 
 하여간 고마운 답글이네요. 배운다고 생각안하고 약간만 고맙다고 생각하고 
 나중에 친해지기로 합시다라고 생각하고 말렵니다. 헤에 02-14   

 병장 임정우 
 답급에 답하자면, 
 저는 개인적인걸 단순하게 부정하고 싶은게 아니였습니다. 마지막에 인용하신 구절대로 개인 스스로가 성찰하여 도약하는것이 분명 옳겠지만, 그것이 그 자리에 멈추는 개인적인 성장이라면 저는 부정하는 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승일님도 알다시피, 이 세상에 완벽한 선악은 실제 없을지도 모르고, 진리란건 추상적이고 때론 상대적이기까지 합니다. 물론 절대적인것도 있겠지만, 그것이 항상 그렇지 않다면 다시 전자에 이야기처럼 불명료해진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이것은 필연적인 한계입니다. 그렇기에 저에게서의 최선은 타인과의 솔직한 소통입니다. 서로의 한계를 인정하고 자신의 부족함을, 부족함의 일부를 정념이라고 할수가 있다면 그것을 솔직하게 드러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정념들이 얽힌 이후에 소통과 이해를 동원하여 궁극적으로 성장할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개인 자신의 개선이 필요하고, 그것과 스스로의 부족함(정념같은)이 균등하게 뒤섞인 관계에서 멋진 우정이 태어날수가 있을겁니다. 헌데 은총이란건 이미 어떤것보다 우위의 있는것처럼 결정되어버려서 소통이라던가 이해같은게 필요가 없습니다. 단지 은총을 바탕으로 자비심을 베푸는 것이지요. 저는 이런것이 꼭 개인적인것처럼 느껴집니다. 막상 이야기하고보니 좀 다른감이 있군요. 헤헤. 

 부족한 답변임이 분명하지만, 분명 들떠서 생각을 적어봅니다. (으허허~) 0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