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월 통합 월베-내글내생각]파시즘은 ㅁㅁㅁㅁ이다?  
상병 박원익  [Homepage]  2009-05-02 22:30:49, 조회: 119, 추천:2 

이번 글은 먼저번의 '근대성'에 대한 논의들의 연장선 상에서 개진된 것임을 이야기하고자 올린 것입니다. 파시즘이 자유 민주주의라는 형태로 완수된 근대성의 기획과 내재적인 관련을 맺는지에 대한 쟁점이 제기되었습니다. 저는 그 둘이 어떤 의미에서 관련을 맺는다. 파시즘은 근대성의 도착적인 이면이다. 라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저는 마치 과격분자들처럼 우리의 자유민주주의가 파시즘적이라는 결론을 곧바로 제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현행적인 자유민주주의가 다름 아닌 자기 논리에 충실해질수록 '도착'에 빠져드는 어떤 역사적 수렁이 있다고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적 수렁이 완전히 배제될 수 없기에, 우리는 파시즘이 여전히 오늘날의 문제라는 점만을 말하고자 합니다. 아울러 파시즘과 같은 역사적 대파국은 근대적인 방식으로, 의회민주주의적인 방식으로, 현행적인 자본주의적 경제질서를 함부로 뒤집어려 들 때, 어떤 재앙이 도래하는지를 분명히 보여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파시즘은 섣부른 젊은 열정들에게 주는 하나의 경고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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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파시즘이라는 단어에 담긴 경멸적인 용법들은, 오늘날 우리들의 사고방식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준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자유민주주의의 대척점에 서 있는 것이지요. 그것은 좌우 모두에게 경직성과 집단적 광기, 보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전체주의'를 표상하는 환유적인 용어로 자주 사용됩니다. 이런 용법은 또한 공산주의 역시 파시즘만큼이나 혹은 파시즘보다 더 악랄하다(파시즘은 단순히 공산주의라는 전체주의에 대한 방어기제에 불과하다 기타 등등)는 수정주의 역사학파의 사고방식의 토대를 닦아주기도 하지요. 아무튼 우리는 그것이 얼마나 나쁘고 또 비극적인 경험이었는지를 잘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그것을 일종의 '절대악'으로 표상하곤 합니다. 그리고 다시금 우리가 서 있는 자유민주주의라는 지평에 빗대어 보자면, 그것은 이해 불가능한 역사적 과잉입니다. 예컨대 우리는 그것이 너무 중앙집권적이고, 너무 폭력적이고, 너무 불관용적이며, 너무 비이성적이고, 아무튼 뭔가 너무 지나치기 때문에 그것이 잘못되었으며, 그래서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마땅히 안도해야한다고 이야기하지요.

  그런데 그것은 역으로 아주 이상한 방식으로, 도리어 파시즘의 매혹적인 깊이와 심오함에 대한 설명이 되어버립니다. 예컨대 파시즘(전체주의)에 대한 저 통상적인 비난들이 무엇을 말하는지, 저 물 건너 나라의 네오나X들도, 혹은 동쪽 나라의 오른손 잡이들도 잘 알고 있다고 봐야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비난들이 얼마나 피상적이고 요점에서 어긋난지를 잘 알고 있다고 봐야겠지요. 그것이 그들의 위치를 정당화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우리가 저지르는 어떤 실수에 대해서 말한다고 봐야지 않을까요. 

  가령 탐 크루즈 출연의, 영화 발키리는 전형적인 반파시즘 영화입니다. 그것은 제3제국이라는 체제가 얼마나 가공할만한 폭압적 구조인지를 보여주기 위해 그 단면들을, 미국인들의 눈에 보여줍니다. 여기서 탐 크루즈는 독일 장교의 복장을 하고 있지만, 사실은 독일에 건너 온 양키 촌놈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그는 바그너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으며, 다른 장교들처럼 교양 있는 농담도 나누지 않으니까요. 그는 아무리 좋게 봐도 스티븐 스필버그 류의 휴머니즘 드라마에 출연하기 위해 저 2차대전 시절로 타임워프한 시대착오적 인물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 영화의 공식적인 메시지가 파시즘의 가공할 만한 측면을 보여주고 폭로하며 되씹는 데 있으며, 그것에 저항한 한 영웅의 애국적인 선견지명과 용기있는 행위를 칭송하는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그가 반역음모를 담은 작전계획을 서명받기 위해 히틀러 앞에 서게 되자 공식적인 메시지가 전도됩니다. 오히려 탐 크루즈는 히틀러에 비해 한층 왜소하고 평면적인 인물(당연하지요. 탐 크루즈는 <어 퓨 굿 맨>의 양키 촌티를 못 벗어 났으니까요)로 보여지고, 히틀러야말로 무언가 심오한 정신적 깊이를 드러내는 것 같아 보이죠. 이것은 파시즘과 자유민주주의의 관계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준다고 생각합니다.

  통상 우리가 영화 <발키리>에서처럼 파시즘을 한 인격에 구현된 광기와 절대악으로 간주할 때, 그러한 관점의 대표적인 징후는 그러한 광기가 출현하게 된 정치경제적 맥락을 추상화시켜버리는 것에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왜 대중들이 히틀러 같은 인물을 지지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많은 맥락들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여전히 불가해한 '광기'로 볼 때 다시금 수 많은 요점을 상실한 홀로코스트 영화나 반파시즘 영화들을 양산할 수 밖에 없겠지요. 그것은 결코 광기가 아니라, 너무나도 손 쉬운 유혹입니다. 가라타니 고진의 <역사와 반복>은 이 점을 우선시 합니다. 우선 파시즘은 세계자본주의의 거시적 경기순환의 한 국면 속에서 출현한 정치적 과정입니다. 우리는 그것이 자본주의의 총체적 모순이 폭발해 나온 현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가 파시즘이라고 총칭하는, 대공황에 대처하는 수 많은 방안들이 상당히 '진보적'이고 온정적이며 심지어는, 사회주의에 가까운 형태라는 것을 잘 모르고 있습니다. 무솔리니 역시도 태생은 사회주의 아나키스트였으며, 중일전쟁과 만주사변을 일으킨 고노내각의 주요 인사들의 면면을 보면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이름을 날렸던 자들이 다수였습니다. 나치 돌격대 역시도 그 기원은 로자 룩셈부르크의 스파르타쿠스 단과 동일합니다. 그들 역시 오바마처럼 마틴 루터 킹처럼 꿈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꿈은 민족도 국가도 몰라보는 자본의 맹목적 횡포에 대항하여, 파괴된 사회적 연대를 재건하고, 소외계층을 구제하며, 실업자들에게 일자리를 돌려주고 불합리한 사회경제적 전횡과 특권을 일소하는 것이지요. 고노 내각이 집권하자마자 단행한 정책은 농민과 노동자들을 위한 토지몰수와 무상분배정책이었습니다. 우리는 그것이 미국에서는 뉴딜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나머지 파시즘은, 마치 사회주의자들처럼, 모종의 '혁명'을 통해서만 그것이 성취 가능하다는 점을 단언했다는 것입니다. 일본의 천황주의자들의 쿠데타나, 나치의 뮌헨 봉기는 바로 그런 순수한 '혁명'에의 열정을 가지고 감행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혁명은 그래봤자, 대내적인 차원에서 자본주의의 모든 모순을 해소하겠다는 것이며, 자본가들과 기존의 사회적 관계들을 그대로 두고서 민족적-사회적 연대를 복원하겠다는 계획이었습니다. 파시스트들이 그런 지점에만 그쳤던 것은 아마 정말로 모든 것(자본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을 싹 쓸어내기에는 너무 온정적인 인간이어서 그랬을 것입니다. 저는 여기에 냉소적인 어조를 싣고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실제로, 파시스트들이란 휴머니스트들이라고 굳게 믿고 있으니까요. 그들은 지금은 공황에 시달리지만 지난날에는 그래도 사회적 부에 어느정도 공헌한 세력에 대한 인간적인 예우를 해야한다고 생각했으며, 결국 그들 역시 우리와 같은 한 사회적 구성원이라는 생각을 가졌으니까요. 그들은 스탈린보다는 훨씬 인간적이었던 셈입니다. 파시스트들의 온정과 배려심은 오늘날 우리의 공익광고에 등장하는 그것만큼에 뒤지지 않을만큼 손색이 없다 봐야할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스탈린이 옳은 것은 절대 아니며, 인간적 온정을 배제하는 게 좋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스탈린주의적 공산주의라는 대재앙으로 귀결되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온정 역시도 나름의 시련을 겪었다는 것이지요. 가장 가공할만한 역사적 도착Perversion과 아이러니는, 사회적 개혁을 옹호하는 온정적 관점들이 결국 광기로 전도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파시스트들의 문제는, 그들의 심성과 멘털리티의 문제는, 그리고 무엇보다 근대적 관료제의 폐단은 분명 아닌 것입니다. 그들을 광기로 몰았던 이유는 정작 따로 있었던 셈이지요. 물론 우리는 이제 앞으로 전개될 과정을 잘 알고 있습니다. 파시스트들이 시행한 유사-사회주의적 정책은 결국 강력한 집산화와 생산수단의 거대독점화로 귀결되었고, 거시경제를 전공한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알겠지만, 이는 경제적 공황 상황에서 장기적으로, 필연적으로 더욱 심한 과잉생산과 실업자들을 쏟아낼 것이라는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일본의 경우 정부의 온정적이고 리버럴한 사회주의적 색채를 지닌 사람들이 전쟁을 원하는 군부의 강경노선에 밀리게 되었고, 독일의 경우 그것이 침략전쟁으로 귀결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 과정에서 순수한 청년나치들로 이루어진 돌격대가 하인리히 힘러에 의해 어떤 운명을 겪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숙청 과정 끝에 그것은 후일 SS라는 전쟁기계로 변모하게 되지요.

  파시스트들은 물론 머리는 차갑게 가슴은 뜨겁게 처신했던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들 역시 현실의 수많은 변수들을 고려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들도 우리만큼이나 제정신이라면 말이지요. 그런 온정많고 그에 못지 않게 실리적인 그들을 괴물로 만들었던 것은, 단순히 맹목적 과정으로서 자본의 세계적 운동이었고, 이후 전개될 파괴적 광기는 그러한 '과정'에 개입하지 않고 내버려 두었던 그들의 조합주의Coporatism적 '온정' 때문에 초래되었을 것입니다. 요컨대 그들은 말로서 혹은 광경으로서 혁명을 조직할 줄 알았지만 그 여파를 끝까지 추구할 계획도 용기도 없었다고 봐야겠지요. 파시즘은 바로 그러한 자세가 역사 속에서 자기배반으로 귀결되는 역동적 과정 자체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파시즘은 냉정하게 말해 역사의 기회비용을 알려주는 거대한 실패였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한편으로 우리들은 순전한 정치적 측면에서 동일한 '전도과정'을 목격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들은 흔히 파시즘이 저 유명한 의회 민주주의에 대한 폭력적 부정으로 나타났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2차 대전 이전의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이 당대 유럽에서 가장 완벽한 자유민주주의의 이상을 실현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의 자유주의적 관용정신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당대의 발흥한 각종 지적-사상적 성숙(발터 벤야민, 칼 슈미트, 카시러, 후설, 하이데거, 기타 등등)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물론 그들은 제각각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를 (자유민주주의적 의회제도에 대한 직접적 불신과 부정) 파시즘의 맹아로 간주하는 것은 지나치게 안일한 생각은 아닐련지.

  저는 <자뽕론>에서, 강막수가 묘사한 한 역사적 사건이야말로 파시즘의 맹아에 대한 가장 탁월한 버젼이라고 생각합니다. 막수씨가 묘사하길, 영국의 챠티스트 운동이 실패한 후, 그 후 파리코뮨과 48년을 휩쓴 거대한 혁명의 불길이 대실패로 귀결된 후, 영국에서는 이전에는 없었던 기묘한 사회적 대타협이 출현하게 되었습니다. '가족'과, '재산'과, '전통'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여당과 야당이, 보호무역론자들과 자유무역론자들이, 지주와 공장주들이, 매춘부들과 늙은 여자 성직자들이 일치단결하는 기묘한 장면이 연출도니 것이지요. 이들이 이전에는 가령 <곡물법> 논쟁 때 얼마나 심하게 다투고 대립했는지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10시간 노동시간 보장을 요구한 운동 앞에서, 그들 사이에 당파를 초월한 연대가 발생했던 것입니다. 그것도 의회민주주의의 틀 안에서 말이지요. 오히려 <곡물법> 때문에 서로 지지고 볶는 게 더 합리적이지요. 아무래도 갑자기 가족, 재산, 종교 때문에, 당파를 초월해서 정쟁을 그만 둔다는 것 자체가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실제로 일어나곤 하는 일입니다. 저는 이 역동적 과정으로서 역사적 사례가, 사실은 굉장히 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과정 속에 파시즘의 맹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 당파를 초월한 '일치'를 추동한 원동력은, 사실은 가족, 종교, 재산의 가치라는 게 흔히 그렇듯이, '담론' 속에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소모적 정쟁에 염증을 느낀 많은 사람들이 이 '일치'를 구하기 위해, 모종의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요. 심지어 혁명을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최근에는 모 의원이 의원 수를 줄이는 방안도 생각한 것이 보도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눈곱만큼도 혁명이 아니며, 단순히 '말'에 불과한 것이지요. 그런데, 이 '말'은 전형적인 의회민주주의의 말입니다. 말하자면 누군가의 이해를 대표하는 것으로, 대의Represent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말입니다. 이 '말'이 심각한 도착에 빠져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말'은 어느 순간부턴가 '모두를 대표'하겠다고 자처하고 나서면서부터, 어느 누구도 대표하지 않는 이상한 상황으로 치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 파시즘적 발상은 의회민주주의를 부정한 자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의원이라는 자들이 흔히 입에 올리는 말이지요.

  <보나파르트와 브뤼메르 18일>이라는 저서에서도 막수 씨는 공황이 닥치자 갑자기 혼란스러운 정치적 분열에 휩싸였던 프랑스에서 황제를 선출하게 된 과정을 저널리즘적으로 기술합니다. 사실 이 보나파르티즘이야말로 파시즘의 맹아일 것입니다. 보나파르트는 아직은 정치경제적 후진국이었던 프랑스의 농민과 도시 빈민들, 계급적 대표자들을 가지지 못한 자들의 대표자를 자처하고 나섰습니다. 최근에 뉴스에 자주 오른 태국의 탁신 총리도 전형적인 보나파르티즘적인 지도자이지요. 그러나 갑자기 기존의 모든 정당의 초당적으로 그를 지지하고 황제에 추대한 것이지요. 아무도 대표하지 않는 군림하는 주권의 상징에 등극했던 것입니다. 막수 씨는 이런 '도착적 상황'을 분석했던 것입니다. 그는 사실 태생적으로 오웬 사회주의 추종자였습니다. 그는 황제로서 농민들에게 온정적인 정책들을 베풀었지만, 사실 당시의 사회경제적 관계 자체를 바꾸지 않는 이상 그것은 어느 누구도 대표하지 않는 선심성 정책에 불과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지자 당사자들은 그에 대한 지지를 놓치 않았습니다. 여기에는 물론 의회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가 녹아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역으로 (오늘날 태국과 같은) 정치적 혼란을 가중시켰습니다. 왜냐하면 그 선량한 민초들은 충실한 의회 민주주의자들답게 사회경제적 조건들을 일소하고 변혁하는 프로그램에 지지하는 대신, 이를 '대표'Represent하는 정치인과 상징을 지지했으니까요. 이러한 자기배반적 행동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든 간에, 이것은 결국 파시즘과 비슷한 유사-혁명적 강박으로 귀결되었던 것입니다. 보나파르트는 마치 오늘의 탁신 총리처럼 '눈에 보이는' 정권교체와 길거리의 붉거나 노란 환호성들로 뒤덮인 스펙타클한 광경을 끊임없이 연출하곤 했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변화'이고, '혁명'의 시작이라는 것처럼 말이죠. 하지만 그것은 결국 아무 것도 바꾸지 못했습니다.

  저는 이러한 '도착'이 의회민주주의에 대한 테러리스트들에게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무엇보다 명확히 해 두고 싶습니다. 그것은 의회민주주의의 틀 내부에서 의회민주주의의 병폐를 급진적으로 극복하려는 시도들이 필연적으로 겪는 도착인 것입니다. 그것은 의회민주주의의 옹호자들이라면 꿈꾸지 않을 수 없는 은밀한 백일몽이지요. 이는 굉장히 일상적이고 정상적인 백일몽입니다. 나치는 다름 아닌 의회민주주의의 틀 내부에서 부패하고 무능한 의회를 개혁하려는 혁명적 시도에서 출현했습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가라타니 고진은, '자유주의도 아니고, 전체주의도 아닌' 중도적 노선을 지지하는 것이야말로 파시즘적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이처럼 저는 좌도 우도 아닌 중도 대중노선을 지향한다는 오늘날의 상투적 수사가 남용되는 것이야말로, 어느 급진적인 과격분자보다 더 파시즘에 빠질 위험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곡물법 논쟁 때처럼 영국의 여야가 진지하게 대립하는 것이 더 정상적이고, 바람직한 일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과정으로서 파시즘', 최초에 온정적이고 사회적 연대를 표방한느 대중운동이 도착에 빠지는 과정을, 정치경제적 측면과, 의회제도의 측면에서 나누어 고찰해 보았습니다. 저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파시즘을 고찰하지 않으면 필연적으로 영화 <발키리>를 보는 관객들과 같은 처지에 놓일 것입니다; 파시즘은 야수적 정욕에 사로잡힌 절대악으로 보이거나, 아니면 저항하기 어려운 비합리적인 어두운 매혹으로 보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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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6-10
09:36:32 

 

상병 김소망 
18.35.1.121   쭈욱 훑어보니 파시즘을 나름 제대로 연구하신 것 같네요. 
파시즘 역시 변혁사상이고,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사상으로 출발하였다는 것을 인정하고 시작하지 않는다면 파시즘에 대한 제대로 된 객관적 연구는 불가능할 것입니다. 

출력하여 더 제대로 읽어보고 댓글 드리겠습니다. 2009-05-03
07:55:19
 

 

상병 김태완 
16.48.3.118   파시즘은 꼭두각시이다. 

연극의 주인공으로서 핵심적 역할을 맡아 무대를 꽃피울 목적으로 생겨났지만 여러 실들에 묶여 이리저리 그저 끌려다닐 수 밖에 없는 여건에 놓여있는 꼭두각시. 그렇게 강해보이기만 했던 히틀러의 어깨가 측은하게 보이는군요. 그런데 이런 논리라면 북한도 이와 비슷한 경험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생각되네요. 2009-05-16
01:21:06
 

 

상병 김예찬 
48.9.2.115   오늘날의 경제적 태도(효율 추구)가 민주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표현인 분열과 논쟁에 대해 취하는 태도를 볼 때면 가끔 '전체주의'가 과연 무엇인지 되묻고 싶어질 때가 많습니다. 

루이 보나파르트 등장 과정은모 국가의 모 정치지도자를 떠올리게 하는 구석이 많은 것 같습니다.. 지지층의 성향, 개발/건설 계획에 대한 맹신, 지속적인 '쇼'의 소환... 2009-05-19
10:5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