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후지이 다케시의 논문들을 읽고 있습니다. 전번에 올린 독서후기인 <제 1공화국의 지배 이데올로기 - 반공주의와 그 변용들> 역시 후지이 다케시의 논문이었죠. 1950년대 한국 사회의 이데올로기에 대해서 천착하는 훌륭한 연구자인 것 같습니다.

가라타니 고진의 글이나, 예전에 원익님이 쓰신 <파시즘은 휴머니즘이다?>라는 글을 읽으면서도 계속 느끼는 것이지만, 파시즘, 혹은 파시즘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들은 여전히 계속해서 다시 공부해 보아야할 연구 주제인 것 같습니다. 후지이 다케시 역시 서중석 교수의 <이승만의 정치 이데올로기>에 대한 서평에서 일본 파시즘을 다룬 전후 지식인들의 담론을 언급하며 '근대 비판으로서의 파시즘'의 측면을 다시 환기해 보아야 하지 않느냐고 조심스럽게 이야기합니다. 서중석의 책은 일민주의의 '전근대성'을 강조한다고 하는데, 후지이 다케시는 이 것이 마루야마 마사오의 '일본 파시즘' 분석에 영향 받은 것이라 주장합니다. 마루야마 마사오는 '일본 파시즘'을 전쟁 말기의 '군국주의'와 동일시 하면서 지식인들은 이에 동조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지만, 군국주의 체제 내에서 치안유지법을 위반하여 결국 옥사했고, 그에 따라 파시즘에 맞선 지식인으로 떠받들어지는 미키 기요시 같은 인물은 가라타니 고진이 반증하듯 사실 동아협동체를 주장하여 일본 파시즘의 사상적 축을 담당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를 포함한 교토 학파 철학자들은 '근대의 초극' 논의를 통하여 일본 파시즘을 이론적으로 정당화하기도 했죠. 그들이 활약했던 '고노에 신체제 운동'은 경제적으로 자본주의도, ㅅㅎ주의도 아닌, 또 정치적으로 자유주의도 전제주의도 아닌, 미키 기요시에 따르면 '협동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 체제였습니다. 

마루야마 마사오는 일본 파시즘을 논할 때 군국주의의 봉건적 - 비합리적 성격을 강조하며 그 것이 전근대적인 천황제와 맞물리고 있다고 이야기하지만, 사실 동아협동체론과 같은 논의는 대공황 이후 서구 경제의 몰락과 더불어 '(서구) 근대의 종언'이라는 분위기 속에서 등장한 것입니다. 그 것은 '전근대적'인 것이 아니라 '근대 이후'를 모색하기 위한 것이었죠. 그러나 마루야마는  파시즘을 '전근대적인 것'으로 파악하고, 이에 반대하여 파시즘에 대한 다른 논자들이 그러했듯이 '근대적인 것'인 개인주의와 자유주의를 내세우고 맙니다. 이 것은 일본의 '전후 민주주의'가 파시즘과 정면 대결을 회피하는 결과를 낳게 되지요. 서구 근대의 몰락이라는 분위기 속에서 1930년대의 일본 지식인들이 왜 파시즘에 매혹되고야 말았는가? 에 대한 이유는 묻지 않게 되었던 것이구요.

후지이 다케시는 마루야마 마사오의 경우를 들어 서중석 역시 마찬가지의 함정에 빠졌고, 그렇기 때문에 1950년대 일민주의가 가지는 '근대 비판'의 측면을 단순히 '레토릭'으로 환원시키고 있다고 비판합니다. 일민주의는 과연 이승만이라는 정치 지도자 개인을 위해, 대중을 동원하기 위한 슬로건에 불과했던 것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죠.

여기서 후지이 다케시는 일민주의의 이데올로그였던 안호상의 <일민론>을 꺼내듭니다. 1953년 간행된 이 책에는 이승만이 거의 등장하지 않습니다. 200쪽이 넘는 책 속에서 국가 지도자인 이승만은 단지 '일민주의를 내세웠고, 일민정신을 고취한 이'라는 서술로 밖에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1년 후인 1954년, 안호상은 연설대에서 "여러분은 자본 제국주의와 콩산 제국주의를 막아내어 외적의 침략을 물리치는 동시에 악질 정치가들을 물리치는 것이 책임이며 의무이다"라는 발언이 문제가 되어 국보법 위반으로 구속됩니다. 이어 자유당 내부에서 일민주의 세력(족청계)은 뿌리 뽑히게 되었구요. 이러한 점에서 안호상의 일민주의를 단순히 '이승만주의'라고 평가할 수 없는 구석이 분명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그 것은 안호상 본인의 의도가 어땠는지를 떠나더라도, 일민주의가 대중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느냐의 문제이기도 하구요. 그 뿐 아니라  일민주의 세력이었던 '족청계' 인사들 역시 상당수가 전향 ㅅㅎ주의자로 이루어졌으며, 심지어 1952년부터 농림부장관을 역임했던 '족청계' 신중목은 농민회와 협동조합을 추진하기도 했습니다. 일민주의의 세력이 강대했던 50년대 초반에 진보파 인사 조봉암이 내각에 참여했다는 사실도 떠올릴 수 있겠죠. 1952년 조선방직 파업 때 방직노조는 일민주의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고 악덕 자본가에 맞서 "대통령 각하께 직소할 기회만 얻는다면" 틀림없이 승리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파업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이는 일민주의가 대중적 차원에서 저항의 이데올로기로 받아들여졌다는 의미가 될 수 도 있겠지요.

'민의'를 중점으로 한 일민주의는 동일화된 민족, 국민을 강조하며 '국민-만들기'의 도구로 사용되었지만, 한편으로는 '국민-되기'의 과정을 통하여 대중들은 현실에 존재하는 불평등에 대한 불만을 호소할 권리를 얻게 됩니다. '동원'의 과정에서 폭발하는 민의는 주창자의 통제를 벗어날 가능성을 가지게 되구요. 프랑스 혁명이 그랬고, 3.1 만세 운동이 그랬죠. 또 문화혁명이 그러했구요. 이러한 '폭발적 순간'은 언제나 변혁의 가능성을 품고 있습니다.

일민주의는 기본적으로 파시스트적 사상이었지만, 그 속에는 굴절된 형태의 변혁적 전망이 내포되어있던 것입니다. 이 것은 일민주의 뿐 아니라, 다른 유사 파시즘 사상에서도 마찬가지의 것이구요. 흔히 (어리석게도) 파시스트들을 지지한 대중들을 '피동적 존재'로 인식하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오히려 대중들의 변혁에 대한 능동적인 열망이 어떻게 왜곡된 형태로 등장할 수 밖에 없었는지에 대해 물어야할 것입니다. 같은 방향으로 보자면, 흔히 전체주의를 불러왔다는 비난을 사기도 하는, 반대로 또다른 쪽에서는 진정한 '혁명가'로 불리우는 이들인 로베스피에르, 레밍, 마오 같은 인물들에 대해서도 여기서 부터 평가를 시작해야겠지요.

강인선 
  일시적으로 '자유의 쟁취'에서 오는 어떠한 불안감도 '파시즘'이나 '전체주의'에 대한 이유가 되지 않을까요?? 대혁명 이전의 프랑스의 경우엔 이전까진 '기본 권리'에 대한 '자유'가 크게 허용되지 않았던 대중들이 어느정도 그러한 '자유'를 얻게 된 이후 맞이하게 된 '방향의 상실성'이라고나 할까요.. 

결국 '자유'의 획득이 다시 '비자유'를 원하게 되는 그런 것 말이지요. 그 것이 대중들로 하여금 다시금 '방향성을 제시해줄 무언가'에 대한 열망이 전체주의 혹은 현대의 제국주의와 같은 개념들에 빠지게 된 이유도 되지 않을런지... 2010-01-08
09:58:17
 

 

김예찬 
  그 것과 관련해서 이 시기에 흥미로운 것이 '토지개혁'입니다. 1950년, 토지개혁 이전까지 전체 인구의 70%에 달하는 농민들은 보통 지주에 의하여 정치경제적으로 예속되어있었습니다. 1948년 제헌회의를 구성할 때 절대 다수의 소작농들은 지주의 이해관계에 따라 투표하는 형상을 보였죠. 그러나 토지개혁 이후에 중소지주 계급이 해체되고, 대다수의 농민들이 소작인에서 소농으로 변신하면서 오히려 정치적으로 보수화하는 패턴을 보입니다. 인선님 말씀대로, 정치적 제약이 풀렸음에도 불구하고, 이제까지 강요되던 권력 관계가 일시 해체되자 민중들은 제 것을 지키기에 급급하여 이승만 정권의 손을 들어주었던 것이죠. 물론 토지 개혁 직후 발발한 한국 전쟁 역시 이러한 경향에 큰 요인이 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노동자들의 케이스를 생각해볼 필요도 있을텐데, 1946년에 탄생한 대한노총은 당시 ㅈ익 중심의 노조였던 전평에 대항하여 우익 정치 조직과 기업주들이 결탁하여 만든 어용노조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곧 미군정에 의하여 전평이 분쇄되자 기업주들은 어용노조인 대한노총 마저도 붕괴시켜서 노동자의 조직화 가능성 자체를 파괴하려고 들었는데요, 이 때 노동자들은 좌우를 막론하고 이승만의 일민주의에 기대어 기업주들의 공작에 대항하게 됩니다. 이승만 역시 직접적인 정치적 개입을 통하여 노조를 합법화시키고 노동자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시혜적 제스쳐를 취하게 되구요. 물론 ㅈ익 조직의 분쇄라는 정치적 조건 속에서 노동자들이 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이승만 정권 밖에 없었겠지만, 결국 그 것은 이후 노동 운동이 그 방향성을 상실하게 되는 시작점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