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독서후기는 책 자체로서의 독서후기 보다는 '화'와 연관지어 생각한 '폭력성'에 대한 성찰에 가깝다. 중구난방의 글이 될 수도 있겠지마는, 그동안 생각한 바를 책의 내용과 결부시켜 주욱 기술해 보고자 한다.


누군가 당신의 왼뺨을 때리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일반적인 반응을 생각해보자면 이 질문의 답은 무척 쉽다. 보복 or 보복 + 알파가 그 대답이 될 수 있다. 난데없이 뺨을 후두려 맞았다면, 분노 게이지는 폭발하기 나름이다. 왼뺨만 때리면 다행이게, 왼쪽 죽빵을 날릴 수도 있는 노릇이다. 그것이 인지상정, 우리의 인식구조이며, 상식의 틀이거늘,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더라. 다들 알겠지만

누군가 너의 왼쪽 뺨을 때리거든, 너의 오른쪽 뺨마저 내어주어라

자 이 얼마나 넌센스한 말인가. 난데없이 뺨을 후려맞았는데, 또 더 때리라고 다른 뺨을 내어준단 말인가? 설령 이유가 있는 따귀였다고 할 지언정 우리는 다른 쪽 뺨을 내어줄 상식따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렇다면 왜? 왜 오른쪽 뺨 마저 내어주어야 하는 것이 성현의 말씀인 것인가? 간디는 어째서 폭력에 비폭력으로 대항했는가? 왜 팃낙한 스님은 화가 나더라도 그 화를 키워서는 아니된다고 이야기 하시는가?
우리의 상식은, 왼뺨을 맞으면 날 때린놈 주거 너 하는 것이 상식 아닌가?


폭력성과 화는 자연스러운 것

어찌하여 성현들의 말씀이 '헛소리' 내지는 '넌센스'로 들리는가 생각해 보자니, 먼저 인간의 속성이 떠오른다. 우리 인간은 성현들이 요구하는 그런 고결한 인간의 모습과 조금 떨어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다들 알다시피 인간의 본성은 짐승의 본성과 거의 똑같다, 발전된 욕망의 부분이 몇몇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우선시 되는 것은 아니다. 설령 그것이 어떤 사회 안에서 우선시 되었을 지언정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종교 / 문화를 통한 체계적인 사회화 덕택이다. 말하자면 후천적인 요인이라는 것이다.
말해보라. 선천적인 요인과 후천적인 요인을 놓고 비교하였을 때, 어느것을 더욱 '자연스럽다'고 이야기 할 수 있는가? 좀 말도 안되는 비유이기는 하지만, 자연상 쌍꺼풀과 수술된 쌍껴풀 중 어느 것을 더욱 자연스럽다고 이야기 할 수 있는가?

그렇다. 폭력성과 화는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우리는 폭력성과 화를 교육받지 않아도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태어난다. 그래서 순자님께서는 '성악설'을 주창하지 않으셨던가. 

그런데 어찌된 일인가. 성현들 께서는 이러한 자연스런 본성을 거스른체, 사회화 되고 문화화 된, 후천적인 성질아래서 살아가라고 말씀하신다. 아무리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것이 '사회화'와 '문화'덕분이라지만, 폭력에 비폭력으로 대항한다는 것은 너무하잖아. 그건 너무 어려운 일이야.

하지만 막상 따지고 보면 인간사에는 굳이 폭력 뿐 아니라, 많은 일들이 본성보다 '사회화'에 짓눌려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알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인간성'에 가깝다고 이야기 한다. 그래 하기야 인간이 짐승과 똑같다면 더이상 인간이 아니겠지요.

하지만, 화나는 걸 어쩌라고? 때리고 싶은걸 어쩌라고?


어째서 비폭력의 대항은 어려운가. 어째서 화를 키우지 않는 것은 어려운가?


여기서 짚고 넘어갈 것이 하나 있다.
폭력에 비폭력으로 대항하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비단 인간의 본성에 어긋나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일종의 스코어 게임이다. A가 B를 한대 때렸다면, B는 최소한 한대를 앙갚음 해주고자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A와 B의 공평함이며 정당함이기 때문이다. A가 폭력으로 스코어를 올렸다면, B는 A보다 높은 점수를 올리거나, 최소한 A와 동점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장사의 수완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손해보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이치이다. 때문에 폭력에 비폭력으로 대항하는 것은, 손해를 담당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렵다.

때문에 사람들의 의식구조는 대부분이 이렇다. 설령 폭력을 비폭력으로 끝맺음 하더라도, 그것은 폭력을 시작한 사람의 몫이다. A가 B를 때리고 B가 A를 때리면, A는 다시 B를 때리지 말고 비폭력으로 끝맺어야 한다. 라고 생각한다. 

어떻게 봐도 흡집이 없는 결론이며 논리이다. 그렇다면 성현들은 어째서 이런 논리를 적용하지 않는 것일까? 예를 들어 성현의 말씀이
'A가 B를 때렸다면 A는 B에게 맞은 후에 사과하도록 하라" 정도 였더라면 얼마나 쉬웠을꼬?
대체 왜?


폭력의 정당성


흔해 빠지고 기름진 말이지만, 
폭력은 폭력을 낳는다는 말이 있다. 

A가 B를 때리면 그 폭력이 다른 폭력을 낳아 B가 A를 때리고, 그러면 또 그 폭력이 다른 폭력을 낳아 A가 B를 다시 때리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정당성의 논리에서 바라보았을 때, 무척 어처구니 없이 들릴 수도 있지만, 모두가 알고 있듯 현실에서는 꽤나 많이 일어나는 일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대부분이 자기가 더 손해봤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니가 더 세게 때렸잖아!!

친구랑 좀 개구지게 놀았다면, 이런 멘트를 한번씩은 다 들어봤을 것이다. 그리고 한대 더 맞았던 기억 역시 날 것이다.


아주아주 계산적인 정당성의 논리에서 바라보면, 앙갚음의 폭력은 꽤나 정당한 일이 될 수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예시에서 보이듯이, 본인들에게 그닥 정당하지 않아보인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정당성을 찾기 위해서, 여우가 공평한 빵을 나누기 위해 이 빵 먹고 저 빵먹고 하다 결국 다 먹어 치우듯이, 끊임없는 폭력을 주고 받다가 자멸해야 할까?

그래서, 사실 완벽한 의미의 정당한 폭력이란 있을 수 없다. 아니, 폭력을 행하는 사람에게는 있을 수 있겠지. 하지만 폭력이란 알다시피 쌍향으로 이루어지는 일이다. 그래서 폭력은 정당성을 갖지 못한다.누군가는 스코어를 잃고, 누군가는 스코어를 딴다.

그래서, 항상 누군가가 손해보는 게임이기에, 폭력의 정당성은 논의 되어서는 안된다. 다만 문제는, 누가 그 손해보는 게임을 짊어질까 하는 것이리라.

팃낙한 스님의 '화'는 이러한 짐을 짊어질 수 있는 사람들을 양성하는 책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이 책은 말한다. 직접적으로 이야기 하지는 않지만, 이러한 짐을 짊어지는 것은, 훌륭한 일이며, 부처의 뜻에도 결부되고, 스스로에게도 옳은일이라고.
이러한 정신교육이 얼마나 맞는 말인가 하는 것을 따지는 건 소용 없는 일이다. 다만 확실한 것은, 좋으면 좋았지 나쁜 정신교육은 아니라는 것. 만약 이러한 팃낙한 스님의 교리가 일파만파 퍼져서 모두가 손해보는 장사를 원하게 된다면, 참 행복한 세상이 될 것 같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세계의 모든 국가를 한꺼번에 해체하자는 무정부주의자의 주장만큼이나 허황되지만 말이다.



한가지 궁금하다. 그렇다면 무엇이 정당한가?

우리는 앞에서 이야기 했다.폭력은 정당화 되지 못한다고.
그러나 화가나고 폭력을 휘두르고 싶은 마음은 인위가 아닌 자연스러운 일이라 했다. 그렇다면, 최소한 피해자의 정당성을 찾아주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팃낙한 스님은 말한다. '화'는 정당하다고. 그래서 누구나 '화'의 씨앗을 품고 있다고. 그러나, 이 화를 키워서는 아니된다고 이야기 할 뿐이다. 다만, 화를 풀어내고 달랠 때에, 어떤 방법으로 이를 풀어내는가가 관건이다. 물론 여기에는 폭력이 없어야 한다. 사랑과 연민, 오직 그러한 긍정의 감정들만이 필요하다.

그래서, 성현은 왼뺨을 맞고도, 화의 씨앗을 키우지 않고, 오른뺨을 내민다는 것이다.
아마 그때의 대사는 이런 것인지도 모른다

'야 야, 왜 때리는지 모르겠지만, 니가 참 무언가를 때리고 싶었나 보구나. 내 너를 이해한다. 쯔쯔. 여기 오른쪽 뺨도 때리려무나"



이상, 폭력과 비폭력에 대한 단상이었다. 하고 싶은말은 더 많았는데, 다 담아내지 못해 아쉬울 따름이다. 그리고, 할말이 아직 남아있다면,

이런 것을 책을 통해 생각하게 되었다고 해서, 나에게 실천할 힘이 있다는 것은 아니라는거~~ (하지만 노력해 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