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냐리투에 대한 단평 
 병장 김광철 03-01 21:22 | HIT : 179 




 요번에 휴가를 나갔다가 신문을 보다가 우연히 눈에 들어온 이름이 바로 '이냐리투' 감독이었습니다. 
 그 이름조차 낯선 멕시코 태생의 감독을 처음으로 접한 터라 흥미를 가지고 읽어보았죠.  
 기자는 그를 매우 화려하게 소개하고 있더군요. 단 세편의 영화로 단숨에 거장의 반열에 오른 감독이라고 말이죠.
 뉴욕 타임즈에서 그의 2000년 데뷔작인 <아모레스 페레스>를 새로운 세기에 처음으로 나타난 걸작이라고 극찬했다는 사실까지 덧붙이고 있더군요, 그의 필르모그라피는 매우 간단했습니다. 2000년 데뷔작인 <아모레스 페레스> 2003(?)년 <21그램> 그리고 이번에 발표한 <바벨>까지 단 세편이 전부였죠. 

 부쩍 호기심이 생긴 저는 냉큼 <21그램>과 <바벨>을 감상했답니다. (아쉽게도 <아모레스 페레스>는 보지 못했구요;;)
 감상 결과는.....글쎄요.... 그의 영화들은 물론 매우 잘 만들어진 수작에 속했습니다. 
 그러나 '한 세기의 시작을 장식하는 걸작' 혹은 '거장의 반열에 오른 감독' 이라는 수식어를 감당하기에는 조금 버거워 보이는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그의 영화들은 적어도 셋 이상의 주인공이 등장하며, 그 주인공들이 각기 독립적으로 이끌어 나가는 플롯들이 서로 복잡하게 엉키고 교차하며 일종의 퍼즐구조를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다수의 플롯이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하나의 주제의식 아래 치밀하고 촘촘하게 직조해내는 이냐리투의 솜씨는 역시 수준급 이었습니다. 

 그의 직조술은 <21그램>에서는 직선적인 시간의 순서를 뒤섞어 버림으로써 지나치게 현란한 기교로 흐르는 듯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지럽게 엉크러지던 모든 플롯의 씨줄과 날줄들이 종국에는 섬세하고도 감동적인 문양을 교직해냄으로서 이냐리투가 짜낸 옷감은  형식적 기교와 내용적 감동을 동시에 달성하며 찬란한 빛을 발했지요. 

 또한 <바벨>에서는 일단 일본, 미국, 멕시코, 모로코?(맞는지 모르겠군요;;)를 아우르는 배경의 압도적 스케일을 과시합니다. 또한 영화에 등장하는 언어 또한 일어日語에서부터 수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합니다. 이쯤 되면 감독의 의도는 비교적 명확합니다. 그는 태곳적 바벨탑을 쌓다 소통불능에 빠져버린 수많은 언어들/인간들을 다시 대화시키고 싶어하는 것이죠. 이러한 야심찬 계획은 그로 하여금 플롯의 퍼즐놀이를 이제 전세계를 배경으로 하여 진행시키게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모로코 원주민 형제의 고분분투를 몇천 킬로미터 떨어진 일본의 한 농아소녀의 고독과 교차시키며 거기에서 모종의 공명효과를 얻어내려하는 것이지요. <21그램>에서 시간을 초월하여 현기증 날 정도로 파편난 플롯들을 자유자재로 요리하던 그는 이제 엄청난 공간의 간극을 초월하여 하나의 문제의식으로 전 인류를 비끌어 매려 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바벨>은 전 인류의 소통을 꿈꾸는 이냐리투가 야심차게 혹은 무모하게 다시금 축조한 현대판 바벨탑이라고 볼 수도 있을겁니다.   

 상기한 바와 같이 이냐리투의 강점은 다수의 플롯을 조금의 버거움 없이 능수능란하게 요리하는 기교와 그 화려한 형식 이면을 흐르는 묵직한 주제의식으로 요약 될 것입니다. 기실 이러한 감독의 전략은 매우 적절한 듯 보입니다. <21그램>의 중심주제인 '죽음과 삶 혹은 속죄와 용서', <바벨>에서 다루는 '현대인의 소통불능과 상호오해' 등의 문제는 어느 한 개인 한 지역에 국한되지 않는 인류 보편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문제를 스크린에 형상화 시킬 때 갖가지 상황에 처한 여러 인물들의 댜양한 이야기를 펼쳐내며 교차시키는 것은 주제의 보편성 획득에 틀림없이 긍정적 역할을 할 것입니다. 즉 이냐리투의 성공은 쉽지않은 주제의식을 적절한 형식적 기교를 통해 감동적으로 표현해 내는 능력에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이러한 장점만으로 저널리즘에서 떠들어대는 거창한 칭호에 한치의 모자람 없이 값할 수 있을까요? 물론 저는 영화에 대한 아무런 이론적 배경지식 없이 소박하게 영화를 즐기는 사람에 불과하지만, 그런 제가 생각하기에도 이냐리투에게 주어진 상찬은 좀 과분한 구석이 없지 않습니다. 

 우선 그의 기교넘치는 직조술은 전위적인 실험일까요? 저의 보잘 것 없는 일천한 영화편력에 비추어 보더라도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이냐리투가 선보이는 다중적 플롯의 교차라는 형식은 저 쿠엔틴 티란타노의 흐물흐물한 영화 <펄프픽션>에서 이미 실험되고 있지 않습니까? 특히나 시간의 직선적 흐름을 무시하고 시간 순서를 뒤섞는 편집과 (이 때문에 <펄프필션>에서는 좀전에 부르스 윌리스의 총에 맞아 처참하게 죽은 존 트라볼타가 다시 아무런 일 없다는 듯이 말끔한 모습으로 다시 등장합니다) 복잡한 플롯들의 엉킴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맨 처음과 끝장면을 이어지게 맞붙이는 수법은, 즉 직선적 시간을 흐트려 순환적 시간으로 환치시키는 실험은 <펄프픽션>과 <21그램>에서 동일하게 발견됩니다.  결론적으로 다중적 플롯의 교차와 직선적 시간흐름의 파괴로 특징지어 볼 수 있는 이냐리투의 형식적 기교는 그의 독창적인 산물이 아니라는 결론입니다. 좀 심하게 말하면 <21그램>은 오직 형식적인 측면에 국한시켜 볼 때, <펄프픽션>의 아류정도의 위치밖에 지니지 못한다는게 제 생각입니다.  
( 특히 직선적 시간흐름의 파괴라는 실험의 극단적인 형태로는 <메멘토>를 들 수 있겠죠. 조각나 버린 기억의 파편들만을 가지고 그것들을 조립해가며 역순으로 이야기를 꾸미는 <메멘토>는 일반적인 영화적 시간개념을 충격적으로 완전히 뒤엎어버렸습니다. 개인적으로 영화상에서 사간을 가지고 얼마만큼 장난칠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끝장을 본 영화라고 생각힙니다.)

 그렇다면 비록 순전히 형식적인 측면에서는 독창적이지 못하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주제의식을 능숙한 기교로 표현한 솜씨로 이냐리투를 변호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 물음에 대해서도 저는 회의적입니다. 이런 회의는 특히 <바벨>을 보면서 강력하게 고개를 들었습니다. 다중적 플롯을 형식으로 채택한 영화의 성공여부는 그 어지럽게 종횡으로 질주하는 플롯의 가닥들을 동일한 주제의식의 주파수 속에서 얼마만큼 훌륭하게 공명시키는가에 달려있을 겁니다. 그 공명의 성공여부에 따라 각각의 풀롯은 훌륭한 조화를 이루어 감동적인 선율을 만들어 낼 수도 있고, 아니면 최악의 경우 끔찍한 불협화음을 내며 영화 전체의 구조가 무너져 내리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겠죠.

 감상결과  <바벨>이 연주하는 선율은 나름대로 훌륭했습니다. 그러나 영화 자체의 응집력이 다소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다르게 말하면 이냐리투가 짜낸 <바벨>이란 옷감은 플롯들의 교직이 너무나 헐거워 보였습니다. 특히 농아로 등장하는 일본소녀의 이야기는 다른 플롯들과 거의 따로 노는 것 같더군요. 하나의 플롯 가닥이 다른 가닥들과 엮이지 못했고, 이는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공명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다중 플롯을 하나의 영화에 담아내기로 작정했다면, 더구나 그 작업이 전세계의 여러 나라와 언어를 포괄해야 하는 부담을 안고 있다면, 감독은 분명 플롯 간의 긴밀성에 좀 더 신경써야 했습니다. 그렇지 못했다면 차라리 단편영화를 여러편 이어 만드는 쪽이 나았을 겁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이냐리투가 야심차게 쌓아올린 바벨탑은 어딘가 2%부족해 보입니다.
( 제가 괜찮게 본 다중 플롯의 형식이 등장하는 영화로는 단연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영화들을 꼽을 수 있을겁니다. <부기나이트>, <메그놀리아> 등이죠. 특히 <메그놀리아>는 진정한 다중 플롯영화란 바로 이런 것이다라는 느낌을 받은 작품입니다.)  

 그리하여.......저의 결론적인 의견은 이렇습니다. 이냐리투는 물론 많은 재능을 가진 뛰어난 영화 감독임에 틀립없다. 그러나 저널에서 떠들어대는 작금의 평가는 너무 그를 과대포장하고 있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지나친 과대평가는 오히려 평가받는 사람에게 악영향을 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냐리투는 이제 고작 세편의 영화를 찍었을 뿐이고 앞으로 그의 발전 가능성은 무궁무진합니다. 그가 영화역사에 있어 진정한 거장으로 기록될지는 아마도 좀더 두고 봐야겠지요.

 덧. 제가 딴지를 건 '저널의 과대평가'라는 것은 순전히 저희 집에서 구독하는 어느 일간지의 영화면 기사에 근거한 것입니다. 기타 저널이나 전문적인 영화평론가 사이에서 이냐리투 감독이 어떻게 평가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군요. 혹시 아시는 분 있으면 답글달아 주시길∼                 



 상병 김지민 
 허허. 이게 '단'평이라니요. 
 사실, 이냐리투 감독의 영화를 한 편도 감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공감할 수 없어 글을 자세히 읽지는 않았지만, 얼마만큼의 성의가 들어간 '단'평인지는 알 것 같습니다. 
 다음에 그의 영화를 보게 되거든 다시 찾아 읽어봐야겠네요 03-02   

 일병 김준호 
< 아모레스 페로스>는 정말 좋아요. <바벨>은 아직 보지 못했지만, 전 <21그램>에서 <아모레스 페로스>의 시간에 관한 직조술만 남겨진 듯한 느낌을 받았어요. <아모레스 페로스>가 워낙 강렬해서 그랬던 건지는 몰라도, <21그램>이 많이 아쉬웠죠. <아모레스 페로스>를 본 지 오래 되어서 구체적으로 언급하기는 어렵지만(친구 방에서 컴퓨터로 본 후 비디오방을 전전했지만 못찾겠더라구요 흑), 이냐리투 감독은 이 작품 하나만으로 찬사를 받기에 충분하다는 생각이. 근데 제목이 <아모로스 페레스> 이거나 <아모레스 페로스> 아닌가요? 한국어로는 '개같은 사랑'이랬던가. 제목이 입에 착 달라붙지가 않아서. (웃음 

< 매그놀리아>는 봤는데 <부기나이트>도 봐야겠어요. 충격이 너무 커서 제대로 감상조차 못했던 영화라서. (웃음) 03-02   

 상병 이지훈 
 잘읽었습니다. 

 영화가 보고싶어지네요. 많이 알려진 21그램도 아직 못봤는데, 광철님의 의견을 염두해 두고 휴가나가면 한번 빌려봐야겠어요~ 03-02   

 병장 김효진 
21 그램만 봤는데 결론은 '광고문구와 제목만 못한 영화'였죠. 반대로 광고문구랑 제목이 너무 좋았다는 말도 되겠고. 이번에도 제목이랑 홍보포스터는 진짜 좋은데 영화는 어떨지 좀... 

 전 씨네21을 주로 보는데, 대체로 요즘 영화저널들이 그렇네요. 제일 마음에 안 드는 건 20자평 류의 단평들. 무슨 자판기도 아니고. 

 하여간 요즘 영화 중에 제일 좋게 본 건 허우샤오시엔의 <쓰리 타임즈>였습니다. 특히 { 청춘몽} 편은, 영화 보면서 그렇게 행복한 느낌 받은 건 진짜 오랜만이었습니다. 03-02   

 상병 이용택 
21 그램보다 바벨의 플롯이 헐겁다는 얘기로 읽히는데요, 하하, 바벨에 대한 기대치가 주욱 떨어지는 느낌이 드네요. 
 같은 감독인 줄은 몰랐네요. 일천한 영화편력이라니. 무슨 말씀을. 좋은 평 감사합니다. 03-02   

 병장 김광철 
 준호// 허허....아마도 준호님이 기억하시는 두개의 제목 중에 하나가 맞을겁니다. 워낙 제목아나 사람이름을 잘 기억을 못해서말이죠;; <아모로스 페레스> 혹은 <아모레스 페로스>가 그렇게 뛰어나다니....이번에 못본게 아쉽네요. <부기나이트>가 좀 충격적이긴 하죠. 포르노 배우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으니까요. 

 효진// 제가 이글을 쓴 이유도 그런 무책임한 저널리즘 비평을 읽고 '욱' 하는 심정에서 였을 겁니다. 최소한 감독이 신작을 발표했으면 진중한 평가가 이루어져야 할텐데, 전작의 광휘에 기대너 무조건적인 찬사를 보내는 것은 문제가 있죠. 

 그렇다고 제가 이냐리투 감독을 의도적으로 깎아내리겠다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제가 보기에도 그는 향후 매우 유심히 눈여겨보아야할 '무서운' 감독임에는 틀림없다고 생각합니다. 

 용택// 허헛...이것 참...제가 스포일러가 되버린것 같은 느낌이;;; 제 논지가 좀 가혹했나요... 
 어느정도 단점을 가지고 있지만 <바벨>이 수작임은 틀림없습니다. 그 정도 영화가 나오기가 쉽지는 않지요. 나가서 보실 계획이셨다면 적극 추천해 드립니다. 적어도 표값이 아깝다는 느낌이 들게 만드는 영화는 아니니까요. 03-02   

 병장 이건룡 
 이거참 '이냐리투'가 낯설어서 김광철님의 글을 지나칠뻔 했군요. 그나마 눈에 익은 <부기나이트>정도군요 03-02   

 병장 김준현 
 소통에 관한 문제. 
 일본농아의 현실 부적응을 나타낸 영화는 일반인과 장애인의 외면적 소통불가를 
 말하면서도 내면적인 요소를 더 중요시 여긴다. 언어장애는 현사회에서 그렇게 
 큰 문제점으로 보이지 않는다. 물론 청소년기 성장과정에서 남들의 시선과 차별은 
 소녀를 매우 불쾌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자살충동을 느끼거나 
 자기파괴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소통에서도 큰 어려움은 없어보인다. 
 입모양으로 상대방을 알아듣고, 농아끼리 통화를 할때도 영상통화를 이용하며, 
 이성에게 몸으로 표현할 줄 알고, 세밀한 표현은 글로써 표현한다. 
 농아의 소통장애 문제는 농아로 인식한체 애초의 소통부재로 인한 자기감정표현의 
 미숙일 뿐이다. 어머니의 죽음을 현실적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농아란 현실에 
 억제되어 감정이 표출되지 못하고 억눌리다 보니 통제가 무너진것이 아닌가. 

 일본농아의 플롯과 모르코의 부부이야기는 총기 하나로 이어진다. 단지 총기 
 하나로 이어진다면 플롯과 플롯사이의 개연성은 매우 적어 보인다. 하지만 
 영화자체의 제목이 '바벨'이며, 그 의미는 소통의 부재, 소통의 불능을 전제로 
 하고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요새는 총기사건에서도 끌어 낼수가 있다. 
 농아소녀와 형사의 관계도 대화의 오해에서 발발한 것이다. 그리고 농아 아버지와 
 모르코 안내인과의 사이의 관계는 문화적 차이로 이해할수 있다. 단순한 사냥의 
 기념품인 총은 모르코에서는 생계의 수단이 되고 거래의 물품이 된다. 

 세가지 플롯의 연계성은 지금 설명하는 것처럼. 어쩌면, 억지스럽게 설명해야만 
 이해할수 있을수도 있다. 하지만 이 세가지 플롯이 단순히 단편, 단편, 단편으로 
 이어져서, 시간의 복잡성을 잃는다면 이 영화의 묘미는 반감할 수 밖에 없다. 
 소통의 불능은 단순히 색깔이 다른 이민족, 장애를 가진 사람과의 차이만을 이야기 
 하려는 것이 아니다. 영화는 소소한 삶속에서의 현재 일어날수 있는 우리 주변에서의 
 소통불능을 적절하게 표현한다. 그리고 영화적 기법으로 서로 다른 공간, 동일한 시간에서 일어남을 
 표현하고, 정말 우연하게 연관된 사건의 일련을 보여준다. 그럼으로써 나, 개인으로 국한된 
 소통의 문제를 사회, 국가, 민족으로 확대시켜 거대한 파동을 만들어낸 것이다. 
 지금 느끼고 있는 당신의 가슴의 답답함, 표현의 부재가 당신 혼자만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게 아닐까. 03-02   

 병장 배성훈 
 글보다는 윗분의 의견에 더욱 공감이 가네요. 

 이냐리투 감독의 가치가 인정받는건 분명 '기교'가 아닌 '플롯'과 '스토리'겠죠. 

M 나이트 샤말란 감독이 '스토리'보단 '반전'이란 기교로 유명해진 경우와 비슷하게 

 이냐리투 감독을 평가하셨군요. 

' 바벨'이란 영화가 감독상이 아닌 작품상에서 더욱 유력한 후보였단건 이런 이유가 아닐까요? 

' 바벨'을 포함에서 이냐리투 감독의 영화 전체가 말하고자 하는건 '인간에 대한 애정'이라고 하네요. 03-02   

 병장 김광철 
 성훈// 글쎄요....적어도 이냐리투의 영화에서 만큼은 기교(형식)이 플롯/스토리와 완전히 구분되어 평가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냐리투의 성공적인 주제의식의 형상화 바탕에는 분명 형식의 문제가 놓여져 있기 때문이죠 

<21 그램>을 살펴볼까요? 일반적인 영화기법상으로 사건들을 나열하는 것보다는, 강박적일 정도로 속죄의 삶을 살고있는 전과자, 시한부 삶을 살고있는 환자와 그가 죽기전에 그의 아기를 가지려 몸부림치는 아내, 과거 마약중독자였지만 개과천선하여 행복한 삶을 살던 주부 등. 개개 주인공들의 플롯들이 별개로 질주하다가 '자동차 사고'라는 하나의 사건으로 날카로운 파열음을 내며 충돌하고 교차하는 과정은 분명 영화의 완성도 측면에서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일 겁니다. 그리고 주목할 점은 이러한 형식을 이냐리투 감독이 데뷔작부터 <바벨>까지 세편에 연달아 채용하고 있는 사실은, 그가 이러한 다중적 풀롯의 교차라는 형식에 대해 단순한 기교 이상의 애착과 더불어 주제의식 형상화에 아주 중요한 요소로 생각하고 있음을 짐작케 합니다. 

 따라서 그의 작품의 성공여부를 결정짓는 열쇠 중 하나는 제가 지적했듯이 "플롯의 가닥들을 동일한 주제의식의 주파수 속에서 얼마만큼 훌륭하게 공명시키는가"에 있을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냐리투가 <바벨>에 이르러 보여준 헐거움이지요. <바벨>을 봤을 때, <21그램>보다 아쉽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던게 사실이었습니다. 그가 고수하는 플롯들의 밀도있는 교차가 <바벨>에 이르러서는 배경의 광대함을 이기지 못하고 헐거워졌다는 것이지요. 물론 <21그램>에서 빛을 발하던 주제의식의 군더더기 없는 포착은 여전히 <바벨>에서도 유효합니다. 그러나 그 포착들이 하나의 사슬로(그것도 감독이 세편째 고수하고 있는 형식의 사슬로) 꽤뚫리지 못했다면 적어도 일말의 아쉬움이 남는 작품이 아니겠습니까? 한마디로 말해 <바벨>에서는 <21그램>에서 주제의식을 효과적으로 전달해 주었던 플롯들의 밀도있는 직조 혹은 충돌이 이쉬웠습니다. 

 준현// 준현님의 분석처럼 일본인에게는 사냥의 기념품이었던 총기가 다른이에게는 생계 및 거래의 수단으로 변하는 상황이 오해와 소통부재의 현실을 표현했다는 식으로 플롯간의 연계성을 만들어 낼수는 있겠지요. 매우 의미있는 분석이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21그램>을 꽤 인상깊게 봐서일까요......아무래도 그 연결고리들이 빈약해보인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네요;;; 03-03   

 병장 김준현 
 광철// 아직 21그램도 못보고, 이냐리투 감독의 영화세계, 플롯과 스토리의 완성도를 생각해보진 못하고, 그저 영화를 보고 느낀점을 써보다 보니 여러가지로 해석이 가능하더군요. 

 그나저나, 빨리 21그램을 봐야 할텐데.. 시간이 없네요.(땀) 03-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