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섭(consilience)
입대 전 반 년 정도를 연구실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역시 시작은 소소했다. 용돈도 벌 겸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는 안정감도 느낄 겸해서 학부연구생으로 공강시간에 잠깐 씩 가서 재롱이나 떨고, 밤에는 여지없이 놀러갈 작정이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여지없이 폐인이 된 내 모습을 발견했다. 좋은 환경에서 좋은 사람을 만나 실험도 하고 논문도 썼지만, 어느 덧웹 서핑이나 하며 노닥거릴 때도, 먹거나 잘 때도, 쉬는 날에도 난 항상 랩(laboratory)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사랑을 잃었는지 사랑을 잃었기에 그리 된 건진 지금도 알 수 없다. '왜 알 수 없을까하면 역시 연구를 해 봐야겠지, 인과관계를 밝히려면 과학적 실험을 해야만 해. 실험을 어떻게 설계해야할까. 이거 꽤 어렵겠는데.' 생각은 그렇게 꼬리를 문다.
저녁은 석사과정 누나가 우먼데인가 뭔가해서 피자를 시켜먹자니까 또 그렇게 때운다. 웰빙이다. 웰빙이라고 풀만 먹는 애들은 배부른 애들이다, 끼니를 거르지 않고, 기름진 음식에, 미각마저 만족시키니 내겐 웰빙이 아닐 수 없다.
배달을 기다리며 신문을 펼친다. 스포츠면이 푸짐한 신문이라 후다닥 넘기는 데, 눈에 거슬리는 기사가 있다. 섹스 자주해야 건강하다. -- 미국 모 대학 모 연구팀 결과, 한 달에 몇 번 이상 지속적으로 관계를 갖은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신체 모든 기능에서 훨씬 건강하다는 것이 밝혀져... --
한숨을 쉬며 신문을 접고 만다. 섹스를 자주해서 건강한 게 아니라, 건강하기에 섹스를 자주 할 수 있었던 거 겠지. 혹시나해서 기사를 끝까지 살펴보아도 그 어디에도 인과관계를 입증할 내용은 없다. 이거 뭐, 건강검진하기 전에 설문조사 받은 것 가지고 대충 만든 거 아닌가. 하긴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이 오래 산다. 는 헛소리 보다야 낫다. 이건 제대로 연구를 해 보아도 섹스가 건강에 도움이 좀 될 것 같다는 결과가 나올 것 이니, 흐흐 (실제로 그렇다)
이런 내게 상병이 꺾이고 나서야 알게 된 (제.기.랄) 책마을은 애타게 기다려 온 단비와 같다. 그간 난 바짝 메말라 있었다. (사회의) 비주류가 주류인 이 곳에서, 무장이 해제된 채로 작성한, 군생활을 함께하는 전우(권장단어라죠;)님들의 솔직담백한 이야기는, 나를 흠뻑 적셨다. 변인통제와 요인분석, 확률통계에 찌들어갔던 나는 다시금 외롭고 각박하지 않을 만큼, 얼마간의 감수성과 인문학적 밑거름을 얻어 자라간다.
그리고 이기적인 입장에서, 필력도 후달리는 내가 굳이 필진까지 해야할까 '잠시' 고민했다. 난 아직도 목이 마르며, 이 곳은 내가 집에 갈 때까지 내 욕구를 채워주고도 남는다. 모든 글을 다 읽지도 못하고, 논쟁을 즐기는데다가 꽤나 독설가로 불리는 내가 여건상 코멘트를 못 달고 페이지가 넘어간 걸 보면 속이 진짜 너무 상한다. 글이라고는 그저 책마을의 평화를 위해서 나름 일조도 할겸 왠지 모르게 쓰기 힘든 독서후기나 부여잡고 있고, 일과시간에는 눈팅을 하고, 휴일에는 쟁쟁한 내글내생각의 틈바구니 속에서 맞장구를 치며 몇마디씩 거들다, 그러다가 집에 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달이면 병장도 되는데, 배둘레햄이나 빼고 나가야 참한 누님을 몸으로 유혹할 뱁인데, 앉아 있어서야 쓰겠나. 게다가 써봐야 (현대)심리학과 인지신경과학인데, 어차피 나가면 죽돌이로 해야되는 걸 무얼 벌써부터 서두르나, 아직 그리스인 조르바도 다 못 읽었는데.'
휴우- 어쨌든, 그래도, 해 볼란다! 많은 게으른 필진들이 있기에 용기가 나고, 필진을 거부한 사람이 있고, 필진이 되어야 마땅한 사람들이 많기에, 필진이 하고 싶어졌다.
사실 나는 꽤 오랫동안 '과학'이란 분야에서는 얼마나 많이 배웠으며 또 그것에 대해 많이 집필했는지와는 상관없이 독창적이고 가치있는 작업이라면 상당한 인정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글쓰기에 노력을 기울여본 적이 없다. 핑계도 댈 겸 해서 이미 존재하는 지식에 대한 해석과 설명을 하는 순간, 나는 과학도가 아니라 인문학도가 되는 거라는 생각에 사로잡힌 적도 있었다.
하지만 분석은 과학적인 방법론을 사용해 할 수 있지만, 통섭은 결국 언어로 하는 것 - 최재천 이라 했듯, 설명하는 뇌에는 인문학이 필요하다. 궁극적으로 내가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내 연구의 성과가, 지금껏 내 삶을 이끌어온 호기심의 결과에서 그치지 않고, 인간에게 눈꼽만큼의 보탬이라도 되기 위해서, 나는 글을 써야만 한다. 아, 그런데 이것은 단순히 필진 수락의 변이 아니라, 일생의 지향점이 아닐까.
필진으로 추천해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나의 얼개는 굵은 글씨로 표시해두었습니다.
그런데, 얼개 마음대로 올려도 됩니까.
병장 송희석 (20060715 231045)
예. 아무때나 올려도 됩니다. 그리고. 굉장히 기대되는 필진이 생겨서 너무나 기쁘네요. 첫칼럼 진심으로 기대하는 바입니다.
병장 김희곤 (20060716 001457)
생명공학의 원조용준과 더불어 침체된 책마을의 과학계를 이끌어 갈 분이시군요. 기대하겠습니다.
병장 박형주 (20060716 011645)
게으른 필진의 한 사람으로서 훈재님의 필진 결심에 일조했다는 자부심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런 것도 때로는 약이 되는군요. 근데 내 칼럼은 언제 쓴담.
상병 김청하 (20060716 080910)
기대하겠습니다. 전 얼개 읽는게 제일 즐겁더라구요.
병장 엄보운 (20060716 095158)
저 역시 훈재님의 필진 수락에 도움이 되었다는 생각에 뿌듯함을 느낀답니다. (엇. 형주씨)
얼개를 보니 찌르르- 하고 앞으로의 칼럼이 너무 기대됩니다. 훈재님의 글을 기다리며 저도 서둘러 칼럼을 작성해봐야 겠네요. 훈재씨. 앞으로 좋은 글 많이 부탁드릴게요!
상병 박종민 (20060716 114036)
게으른 필진이라 하면 이거 너무 뜨끔합니다. 그나저나, 이렇게 책마을내에 연천학파가 자연스레 성립이 되는거군요(씨익)
병장 김정훈 (20060716 202817)
오오, 이거 기대됩니다. 아무래도 인문학 사회과학이 주류인 이 곳에서
비주류가 주류를 쫓으려다 보니(물론 너무나도 재미있는 일이기에 기쁜 맘입니다.)
부H히는 난제들이 이만저만이 아닌터라, 쫓아가기에도 항상 헉헉거릴 뿐이었습니다.
훈재님의 얼개에서 뿜어져나오는 이 기운은, 동질감이라고 해야하는 걸까요.
여하튼, 얼개 잘 보았습니다. 앞으로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
병장 고계영 (20060716 204656)
통섭. 최재천. 등줄기가 찌리릿-합니다. 이럴줄 알았으면...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능력이 될지는 모르나. 보론이 될 수 있는 능력을 발휘하기 위해 공부에 들어가야 겠습니다.
정말 제가 하고 싶었던 분야입니다. 통섭. 아...
병장 노지훈 (20060717 104945)
또 한 명의 신선한 피~
잘 부탁합니다.
병장 박진우 (20060718 124053)
드.디.어.
병장 조용준 (20060718 175059)
오오. 저와 같은 분야()를 개척하시는 프런티어가 한분 등장하셨군요. 웃흥.
일병 김지민 (20060718 183110)
우와아
병장 김동환 (20060718 212743)
오오. 랩을 하시겠다는 건가요.(먼산...)
상병 김청하 (20060718 220112)
설마요. 랩 때문에 폐인이 되고, 랩 때문에 사랑을 잃으셨는데!
그래도 래퍼 훈재 님, 기대하겠습니다. 히히.
상병 이훈재 (20060718 220613)
아니 이 분들이~ 흑흑. 그리고 게으른 필진들이 있기에 용기가 났다는 건 저도 게을러도 되겠다는 생각인거지 난 조냥 부지런할꺼라는 얘기는 아니랍니다 헤헤
상병 박종민 (20060718 221254)
동환 , 청하 아하. 이런이런. 이훈재라는 사람을 5분간만 보고 있으면, 래퍼는 도저히 연상이 안될겁니다. 그러니까, '후루뚜루따다다'를 연발하는 '무하마드' 정도일까......
병장 주영준 (20060719 085114)
용재관의 유령. 화이삼.
병장 이동일 (20060719 213626)
와우~ 대단합니다.
YO MAN~
상병 이훈재 (20060719 214702)
종민 자기는 무슨 노루표 남자주인공 처럼 생겼으면서. 쳇. 노루종민 주제에.
정훈 언젠가 프로이트와 관련한 독서후기에서 던 거 같아요. 동질감이라면, 파이팅입니다!
계영 통섭에는 아직 쪽수가 턱없이 모자랍니다. 동참하세요
영준 용재관의 유령, 조직원 단 둘
병장 김동환 (20060720 074824)
심리학의 거친 밭을 개척하는 래퍼 훈재님이란 취지에서.
'뚫흙훈재' 어떨까요 책마을사상 가장 모양새가 치열한 휘호입니다.
일병 김지민 (20060720 114728)
동환 찬성!
상병 조주현 (20060720 140718)
축하드립니다
상병 이훈재 (20060720 201115)
뚫a뚫a뚫 뚫a뚫a뚫 뚫a뚫a뚫 따다다~
허걱 으 미친 된장 켁 깨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