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후기]텍스트의 즐거움과 문학의 종언  
상병 박원익  [Homepage]  2009-04-04 15:10:29, 조회: 152, 추천:0 

오랜 만에 롤랑 바르트를 재독서했다. 내가 접한 롤랑 바르트는 <텍스트의 즐거움>을 쓴 바르트이다. 그가 초기의 기호학 연구와 이에 기초한 신화학 및 이데올로기 비판 작업으로 유명세를 탄 이후, 후기 롤랑 바르트는 '텍스트'의 연구가로 혹은 에세이스트로 더 널리 알려지게 된다. 

그런데 롤랑 바르트를 독서하면서 내가 내릴 수 있는 유일한 결론이 있다면, 그는 그다지 '엄밀한' 사상가는 아니라는 점이다. 그가 엄밀하지 않다는 것은 텍스트의 사상가인 그가 정작 '텍스트'라는 개념을 엄밀하게 사유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사실 바르트 없이도 우리는, 텍스트라는 개념을, 저자와 작품의 위계질서를 가로지르는, 익명적인 언어적 실천의 유희로 사고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 말하자면 '텍스트'는 저자에 의해 체험된 삶과 내적 관념들을 담아내는 것으로 간주되는 '작품'과 그것을 기록한 저자와의 일의적, 배타적 관계를 의문시한다. 텍스트 속에서는 저자조차도 그것을 구성하는 허구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텍스트는 자동사적이며, 모든 합의된 언어적 경계를 넘어선다. 즉 글쓰기의 실천들이 우리가 '읽을 수 있거나', '쓸 수 있다'고 가정된, 바로 그 언표규칙이 더 이상 '뜻이 통하지 않게 되는' 위반의 경계들에 가까워질수록, 우리는 텍스트의 자기실현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현상을 한국 판타지 문학 지평에서 이미 조우한 바 있다. 최초에 독자들이 직면한 '이영도'라는 고유한 작품들의 신선한 충격은, 점차 그의 '손'에서 떠나 더 이상 이영도라고조차, 혹은 환상문학이라고조차 할 수 없는 기괴한 '혼합물'로 전이되어 갔다. 나는 이것을 환상문학의 종언이라고 파악한다. 바르트가 '텍스트'라고 말하는 것은 바로 이 역동적 '과정' 그 자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여기서 '텍스트'라는 것은, 저자라는 특권적 심급을 배제하는 한에서 작품을 가로지르는 상호-텍스트성이자, 수많은 인용문들의 임의적 짜임새로 드러난다. 여기에는 어떠한 주관적인 의미부여도 미리 개입될 필요도 없다. 다소 현상학적인 어조로 돌아가자면, 이것이 우리의 일상적 언어생활에서 원초적으로 드러나는 날 것의 언어적 사태이다. 우리는 발화된 텍스트에 대한 해석적인 기의를 의식하지 않으며, 단순히 그것의 결 그대로를 '즐긴다.' "안녕, 잘 지내니?"라는 인삿말만 봐도 그렇다. 바르트가 말하는 <텍스트의 즐거움>도 그러한 일상적 언어적 사태에 놓인 발화주체의 실존적인 태도롤 의미할 따름이다. 그렇기에 바르트르의 텍스트라는 개념을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게임'과 같은 개념과 등치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그렇다면 바르트가 엄밀한 사상가이기를 그치는 지점은, 그가 이러한 <텍스트>라는 본연의 가치중립적 개념에 어떤 '해방적'인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하는 지점이다. 말하자면 어느 순간에서부터 <텍스트>는 반토대주의적이고, 반권위주의적이고, 반순응주의적인 저항의 기치로 탈바꿈하기 시작한다. 사상가로서의 바르트는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진부해지기 시작한다. 

  이 진부함은, <텍스트>를 한편으로는, 말라르메와 프루스트와 같은 전위적인 언어적 실천의 지평에 놓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말라르메와 프루스트를 '읽는' 일상적인 언어의 에세이스트적 쾌락의 지평에 놓는데에서 발생하는, 개념적 '긴장'을 제대로 직면하지 못하는 바르트 자신의 안일함에서 기인한다. 바르트 자신이 인정하듯이, 점차 오늘날 명백해지는 현상은, 말라르메와 프루스트의 유일무이한 전복적 텍스트들은 점차 희귀해져가는 동시에, 후자의 <텍스트>만이 흔해지고 점차 진부해져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바르트 자신은 이 점을 '직면'하지는 않지만, 분명 이를 '의식'하고 있었다고 해도 좋다. 

그렇다면 바르트를 읽게 만드는 그만의 미덕은 무엇인가? 나는 그것이 엄밀함이라기보다는 '정직함'에 있다고 본다. 그 정직함은 말하자면 '기회비용'에 충실할 수 있는 태도이다. 달리 말하자면 바르트에게 있어, 일단 바르트에게 있어, 맹목적인 언어적 실천으로서 텍스트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그는 더 이상 <작품>에 대해서 <저자>에 대해서 말할 수 없음을, 궁극적으로는 '문학'이라는 것 자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에 충실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가 최초로 <근대문학의 종언>을 (혹은 환상문학의 종언을) 선취한 사상가라고까지 이야기하고 싶다. 왜냐하면, 그가 각종 대담에서 분명하게 밝혔듯이, 오늘날 "발레리와 말라르메 그리고 발자크 플로베르를 쓰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을 다소 서글픈 어조로 되뇔 때마다, 그는 사실상 오늘날 사람들이 흔히 직면하기 거부하는 '문학의 비실존'에 대해 매우 정직하고 소박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사람들이 자명한 대상으로서, 혹은 장르로서 간주하는 문학이라는 것은, 결국 텍스트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어떤 역사적-담론적 합의로서만 존립하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 텍스트라는 일상적-무의식적인 몰역사적 심급에서 그러한 '합의'는 애초에 유지될 수 없다. 가령 아주 저속한 사례 몇가지를 들어보자면, 니체의 야심 찬 아포리즘들이 고3 수험생들의 자기위안적 주문으로 사용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니체에 대해 제 아무리 애정을 가진 사람들이 이를 개탄한다 하더라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다. 우리는 같은 것을 문단문학과 더불어 환상문학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바르트의 미덕(정직성)을, 바르트에 대한 한국적인 '수용'에 대한 비판의 준거점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바르트를 어떤 언어적-문학적 기획이 '끝났다'는 것을 알면서도 여전히 그러한 기획을 주관적으로 정당화하는 어떤 방편으로 흔히 써먹지 않는가? 특히나 이러한 관행은 순문학 영역에서 만연한 것이어서, 바르트는 한 때 문학의 주관적 실존을 담보하는 어떤 보증인 정도로 여겨질 정도였다. 그러나 바르트를 엄밀히 독서할 때 점차 분명하게 드러나는 사실이 있다. 가령 우리가 어떤 기획에 심취하고 그것을 '즐길 때' 그리고 그 정직한 향유의 태도만이 그 기획의 유일무이한 자명성을 보증하는 사태에 이르기까지 할 때, 본래의 기획은 사실상 그 내부에서부터 파탄이 난 것이다. 우리는 같은 것을 근대문학과 환상문학과 기타 등등 90년대부터 우리를 매혹시켰던 (서태지 팬덤 현상을 비롯한) 많은 문화적 기획들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다. 

나는 이것을 비관주의라고 부르고 싶지 않다. 다만 나는 바르트가 '텍스트'라고 부르는 언어적 지평, 즉 모든 엄밀하고 야심찬 언어적-문화적-정치적 기획들을, 마치 꿈처럼 전치시키고 전이시키는 '장애물'을 어떤 역사적 '문턱'으로 적극적으로 사고해야할 당위성만을 제시할 뿐이다.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6-01
15:31:40 

 

병장 김민규 
  잘 읽었습니다. 의문이 하나 들어 염치불구하고 다시금 남깁니다. 
특정 형태의 기획으로 표상화된 '작가'의 자기의식의 통일이 내적 객관성을 보증할 수 없는데, 그것이 타인에게 전해져 경험적 통일 즉, 형식상의 통일 이상의 가능성을 가질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비판은 당연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즉 '텍스트'의 주관성에 대한 논의는 기본적으로 '기획'의 확장적, 생산적 가능성을 목표로 하고 발생한 것이 아닌지요. '언표규칙이 위반의 경계에 가까워질수록 텍스트의 자기실현에 도달하게 된다'는 모순의 지적이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은, '니체의 야심찬 아포리즘'의 적용범위에 대한 견해차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제 의문은 이것입니다. 원익님이 생각하시는 '텍스트'의 목표상실은 그것의 '기획된 방향성'의 해체에 대한 문제입니까, 아니면 '몰가치적 유희'의 저급함에 대한 문제입니까. 간만의 시원한 글에 환호하면서도 불편한 리플을 남기게 된 것에 미안한 마음을 전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기획'의 값어치를 누구만큼이나 존중하는 사람이라는 안일한 핑계를 대어 봅니다. 2009-04-04
16:58:14
  

 

병장 이지훈 
  잘 읽었습니다. 좀 뜬금없지만, 

원익님 첫 글부터 궁금했던 것인데 텍스트와 컨텍스트. 이것의 차이는 무엇이며, 텍스트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요? 글과 텍스트는 서로 완전 다른 무엇인가요? 아니면 텍스트가 가장 큰 범주의 무엇이고 글이 들어가는 건가요? 어디서 처음 시작된 개념인지도 궁금하고요. Text라는 것은 메모장인줄만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전치'와 '전이'를 각각 어떤 의미로 쓰셨는지 궁금해요. 전치와 전이, 한자를 살펴보면 거의 비슷한 의미이면서도 조금 다른 뜻이 있는 것 같은데 말이죠. 
'전위'와'전복', 이것도 이 경우에 해당할 것 같군요. 

그리고 '언표규칙'과 '심급'에 대해서도 어떻게 해석해야할지 한컴사전님도 알려주시지 않는군요. 물론 '심급'에 대해서는 사전에 나오지만, 글에 적용해서 이해하려니 쉽지 않군요. 법률용어라 하니. 

롤랑바르트나 비트겐슈타인, 발레리, 말라르메, 프루스트 등과 관련된 배경지식에 대한 문제는 당장 해결할 수 없지만, 단어나 문장에 대해서 뜻을 조금만 풀어주시면 이 글의 진지함의 색깔을 조금이나마 제 옷에 염사할 수 있을 것 같군요. 부탁드립니다. 원익님 글을 읽고 싶은데, 읽는건지 눈알굴리는건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군요. 저도 민규님처럼 멋드러진 피드백도 좀 남겨보고, 이야기도 하고 싶은데 말이죠 킁 2009-04-04
17:17:53
  

 

상병 박원익 
  김민규/오히려 제가 불편한 글을 남겨 죄송할 따름입니다. 의문에 대해서 저는 어쩌면 둘 다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방향성도 그렇고, 몰가치적인 유희도 문제이겠지요. 여하튼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아주 단순하게 우리가 가령 니체처럼, 플로베르처럼, 혹은 이영도처럼, 서태지처럼 쓰거나 노래할 수 없다는 점이겠지요. 이럴 때일수록 '낭만'을 버려야할 시점일지도 모르지요. 

이지훈/텍스트라는 것은 말 그대로 우리가 일상적으로 엄밀한 하나의 '뜻'을 상정하지 않지만 여전히 그럼에도 내뱉고 씹고 삼키는 그런 일상적-실천적 언어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르트가 상정한 텍스트의 '첫번째' 의미입니다. 이 첫번째 의미가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언어게임'과 유사하지요. 둘째로는 일상적 언어가 그럼에도 소통되기 위해서는 어떤 의사소통적인 '합의' 내지는 서로 간에 공유하는 코드가 존재할 텐데, 그러한 것과 무관하게 여전히 쓰여지고 말해지는 그런 '불편한' 언어들을 의미합니다. 가령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이라는 소설은, 당대의 보수주의 비평가들을 굉장히 '불편하게' 만들었지요. 물론 작가 그 자신도 굉장히 보수적이고 현실 순응적인 사람이었고, 주제 자체도 허영심 많은 여자가 방탕한 생활 끝에 처첨하게 몰락한다는 '교훈적인' 내용이지만, 주제와 무관하게 그러한 과정에서 당대 프랑스의 비루한 사회경제적 일상들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생생하고 자세하게 그려지거든요. 말하자면 비평가들은 왜 굳이 저렇게까지 써야하냐며 이의를 제기했었죠. 작가의 주제의식과 작품의 소재와 무관하게, 오히려 그러한 주제의식과 소재의 자명성을 초과하는, 비평가들이 '과도하다' '지나치다'고 생각한 '텍스트'란 바로 그런 것입니다. 2009-04-05
07:38:54
  

 

상병 김예찬 
  서태지 팬덤에 몸 담았던 한 사람으로 슬픔을 느끼게 됩니다. 다른 이야기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요새 많이 이야기가 되고 있는 '장기하 현상'과 인디씬의 도약에 대한 논평들 - 이는 마치 '서태지 현상'을 이야기했던 십수년전의 그 것과 반복적인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 처럼 보입니다. - 에서도 유사한 안타까움을 느끼게 됩니다. 

인디 뮤지션들의 음악적 야심과 그 성취를 떠나서, 그 것들이 (자의든 타의든) 하나의 '대안적 기획'으로 묶이는 과정에서 이미 유희적 소비 문화 이상의 내용물을 가지지 못하게 됩니다.. 좀 더 걸맞는 주제의 글에서 이야기를 계속 진행해나가고 싶은 욕심이 드는군요. 2009-04-06
17:18:28